고등학교 교과목 중에서 수업 시수가 가장 많은 과목은 무엇일까?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국어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답은 국어가 아니라 영어다.
‘영어의 과잉’과 ‘교양-예술-과학의 빈곤’으로 상징되는 우리 교실
보통의 학교에서 2-3학년이 되면 영어수업시간이 하루에 5-8시간이나 된다. 하루에 같은 영어 선생님이 두 시간을 들어가는 일은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정규 시간뿐 아니라 보충 수업에도 거의 매일 영어 수업이 들어있다. 그래서 실제로 영어 수업은 일주일에 많게는 10시간에 이른다. 이는 방학에도 이어져 특기적성 교육 또는 방과후 학교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수업에서 역시 거의 매일 영어 수업이 진행되고 있다.
고등학교 자율학습 시간...... 학생들이 책상 위에 펴 놓은 책은 수학 문제집 아니면 영어 단어(독해)책이다. 고등학교 3학년 수업 시간은 4과목 밖에 없다고 한다. 영어, 국어, 수학, 아니면 과학(또는 사회 중 택1) 이렇게 4과목만 수업을 한다. 나머지 절반 이상의 과목은 아예 시간표에서 사라지고 없거나(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없다.), 시간표에는 있지만 실제로는 수업을 하지 않는다.
시간표에서 사라진 과목들, 시간표엔 있지만 수업은 없는 유령 과목들
이른바 비수능 과목들인 음악, 미술은 아예 고등학교 2학년만 되면 시간표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3학년에는 단 한시간도 없는 학교가 부지기수다. 그나마 시간표에는 존재하지만 체육시간에는 언제 운동장에 나가봤는지 까마득할 정도다. 운동장에서 체육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학습 또는 국영수 수업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체육만 그런 것이 아니다. 자연계에 진학하고자 하는 친구들은 사회 과목 수업을 하지 않고 자율학습을 한다. 반대로 인문계에 진학 하고자 하는 친구들은 과학 수업 시간에 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철학, 윤리, 세계사, 정보와컴퓨터 등 선택받지 못한 선택과목은 교사가 수업을 하려고 하면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항의를 한다. ‘1분 1초도 아까운 고3들이 한가하게 그런 과목을 수업 받고 있을 형편이냐? 당신이 우리의 미래를 책임 질 거냐?’고..... 그래서 그 과목 교사들은 수업하는 교사가 아니라 언젠가부터 자율학습 감독관이 되어 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나 교사 맞어?’하고......
더 심한 것도 있다. 교육 과정에도, 시간표에도 분명히 있지만 특별활동(흔히 CA 라고 한다.)과 학급활동(흔히 HR이라고 한다.)은 한 시간도 운영하지 않는 학교들이 거의 전부이다. 풍물반, 만화반, 사진반, 영화감상반이니 해서 등록만 해 놓고 1년에 단 한번도 정식으로 CA 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러고는 버젓이 CA를 하고 있는 것처름, HR을 하고 있는 것처럼 거짓말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우리 학교의 실상이다. 이런 것을 문제 제기하면 교사들도, 학생들도, 학부모도 모두 화낸다. 현실을 모른다고, 수능에도 안 들어간다고......
대학 입시에 방해된다고 하면서 3학년이 되면 아예 학교를 나오지 않고 학원을 다니거나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특별히 공간을 마련해서 자율학습 또는 특별 수업을 시키는 학교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이 아닌 보통의 학생들만 교실에 남아서 수업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어 남아 있는 학생들도, 교사들도 허탈해지기는 마찬가지다. 그러고 1년이 끝나갈 무렵인 딱 지금 이 시기에 교문에는 명문대 입학생들의 이름만 나부끼고 대다수의 존재는 잊혀진다.
다양한 교육을 하자고 도입된 재량교과 마저도 영어와 수학 같은 과목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교과 수업도, 특별활동도, 재량활동도 이렇게 파행으로 운영되고 있는 교육과정에 대해서 교육부도 알고, 교육청도 알면서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고3의 교실에는 영어는 넘치게 있지만 철학과 예술, 교양 교육은 없다. 심하게 얘기하자면 교육은 없고 입시만 넘쳐난다. 이것이 우리 교육의 근본 문제라는 것을 당선자와 인수위만 모르는 것 같다.
우리 교육의 진짜 문제는 영어가 아니라 근본의 상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주제를 주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넣어서 3분 동안 발표해 보라고 하면 제대로 말을 하는 친구가 별로 없다. 오히려 초등학생 때는 하는데 고3이 되면 못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열 줄 이상 된 글을 읽고 요약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의 반응은 그 글의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냉무) 이 긴 글을 누가 읽어?”인 것이 우리 현실이다.
체육교육을 제대로 않으니 영양상태가 좋아져 신체는 커졌는데 체력은 약해지고, 어린 아이들부터 비만에, 성인병에 시달리고 있고 성인이 되어서 그 반대 급부를 두 배로 물어내고 있는 것이다. 음악 미술 등 예술 교육을 제대로 않으니 문화 생활이라고는 영화를 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 알고 미술관도, 연극도, 음악회도 가진 자들의 사치로 전락해 버린 것이 또한 우리 현실이다. 역사와 철학 등 교양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1년 내내 학생들이 읽는 책이라고는 판타지 소설 외에는 거의 한 권도 없는 것 또한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전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논술이라는 영역을 따로 분리하여 수업을 하고 그것을 대학에서 평가 도구로 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말로도, 글로도 마찬가지이다. 영어에서는 미국식 영어에 대한 신화, 철자 하나와 발음에 집착하는 현상, 그리고 수능 객관식 시험문제로 대변되는, 정답만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에 주눅 든 우리 아이들의 자화상이다. 다른 사람에게 열려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창의성과 독창성, 관용이니 하는 것이 길러지지 않는 것은 우리 아이들의 탓이 아니다.
정녕 우리 초중등교육의 근본 문제는 우리 아이들이 9년(초등학교 4학년부터) 동안 영어교육을 받아도 영어를 잘 못하는 것, 흔히 말하는 영어 의사소통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라 12년을 학교를 다니고도 우리 말과 글로 다른 사람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의사표현을 제대로 못하는 것 아닌가? 초중등교육의 근본 목적인 ‘민주사회에 건전한 시민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교양’을 제대로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대학 입시를 위한 주입식 교육에 빠져 있는 것 아닌가? 영어도 그렇게 쌓아야 하는 많은 교양의 하나라는 사실을 인수위는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이명박 영어올인 정책이 보여주는 우리 교육의 묵시록
새정부의 영어공교육 강화 정책은 사실상 영어 사교육 강화 정책이다. 학교 불만 2배, 사교육 2배의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올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20일 오전 프레스센터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국정운영 방향에 대해 밝혔다.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수능을 대신하여 도입될 1년에 4번을 치른다는 한국형 토익이라는 검증 시험은 1년 내내 입시의 고통에 시달리게 할 것이며, 더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하여 매회 시험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분위기라면 등급제를 채택한 이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대학들이 변별력과 자율성을 내세우며 새로운 별도 대학별 시험을 도입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결국 학생들은 영어검증 시험에서는 더 높은 등급을 받기 위하여 3년 내내 시달리고, 고3이 되면 대학에서 요구하는 학교별 영어 시험에 대비해서 또 다시 학원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학생과 학부모는 모두 허리가 더 허리가 휠 뿐이다. 사설학원만 만세를 부르고 있는 것도 인수위는 애써 모른채하고 있다. 또한 학교는 영어만 잘하는 영어 교사들로 넘칠 것이다. 우리 말만 잘 하면 국어 선생님 할 수 있다는 식의 무지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공교육은 '우리 아이들 모두가 함께 잘 교육시키자.'는 것이 목표이고, 사교육은 '내 아이의 점수만 남의 아이 점수보다 높게 만들자.'는 것으로 근본적인 목적 자체가 다르다. 학교 교육의 목표는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해야지 공부 잘하는 몇 사람의 성적을 더 높이는 것을 목표로 해서는 안 된다. 영어 공교육 역시 마찬가지인데 새정부의 영어올인 정책은 사교육을 엄청나게 팽창 시킬 것이 분명하며, 더 나아가 공교육을 사교육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수위의 영어올인 교육정책은 교육과 교양은 없고, 영어만 있고 교육에 대한 근본 고민이 없는, 주객이 전도된 탁상공론이다.
‘교육 망가지면 어때, 영어만 잘하면 되지?’는 공교육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이명박 당선자가 있게 한 가장 큰 요인은 경제였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한 때 인터넷에서 “~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되지?”라는 댓글 놀이가 유행한 적이 있다. 새정부의 영어올인 교육정책은 한 마디로 “공교육 망가지면 어때, 영어만 잘하면 되지?” 또는 “국민들 고통스러우면 어때, 영어 잘해서 국가 경쟁력 높여 경제만 살리면 되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우리 교육과 우리 말이 망가져도 영어만 잘 하면 그만일까? 자기 나라 말을 홀대하고 다른 나라 말을 숭상한 민족 치고 잘 된 민족이 있는가? 정말로 영어 잘하는 나라들이 국가 경쟁력이 높고 경제가 발전한 나라들인가? 그럼 필리핀, 인도, 파키스탄,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진정으로 국가경쟁력을 높이고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영어가 아니라 과학과 수학 같은 이공계 과목 아닌가? 우리 학생들이 과학이 어렵다고 멀리해버린 것은 지난 PISA 시험에서 세계 최정상이던 과학 과목의 성적이 10위권으로 밀려나버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이후 국가경쟁력에 심각한 후유증을 가져올 것이다.
새정부는 초중등교육과정의 근본 목적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영어 잘하는 학생을 기르는 것이 결코 우리 초중등교육과정의 목적이 될 수 없고, 영어만 잘한다고 국가경쟁력이 올라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 초중등학교에서 진짜 문제는 학생들이 영어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입시 위주 주입식 교육 때문에 과학이, 역사가, 예술이, 철학이 없고, 진정한 우리말과 우리글이, 특별활동과 동아리활동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기러기 아빠나 펭귄 아빠의 근본 원인도 영어교육이 아니라 입시교육이라는 것을, 우리 국민들이 진정 고통받는 것은 사교육비라는 것을 당선자와 새정부 인수위만 모르는 건가? 교육을 망치고는 결코 경제가 살 수 없고, 나라의 미래도 없다.
첫댓글 내용을 안 읽었지만 작은 제목들만 보아도 맞는 말인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