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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립보서 2:12-14
우리는 지난주에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자신을 비우심에 대해서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과 같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런데 새삼 사도가 이 마음을 품으라고 한 이유가 있어요. 그게 뭔가 하면 빌립보 교회가 복음을 들었고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안에 다툼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세상 교회는 선악과를 따먹은 죄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그 안에 항상 문제가 발생하는 게 정상입니다. 오죽하면 한스 큉이 그런 말을 했죠. 교회는 구원받은 창녀들의 모임이라고. 신랄하죠?
첫 사람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아담의 마음에 생겨난 게 있어요. 그게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처럼’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리를 탐했단 말이에요. 뱀의 유혹으로. 그로부터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은 이런 속성 죄성을 가진 채 태어납니다. 이런 아담의 타락이 우리 안에도 있다는 증거가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스스로 높아지려고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과의 비교 우월. 그렇게 성장하고 확장하고 발전하고 더 많이 소유하려고 하는 것들이 다 아담의 죄성에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발전하고 확장하고 더 많은 소유를 가지는 것을 복이라고 하죠. 심지어 교회에서조차도 이런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우리 교회 옆에 있는 대형 교회는 학생들 수능 철이 되면 교회 문앞에 특별 새벽기도 현수막이 붙어요. 우리 애만큼은 수능 성적이 잘 나오도록 해달라는 거죠. 또 교인 중에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하면 현수막이 걸f립니다. 누구 집사 아들 사법고시 합격. 그런데 이런 게 다 세상 정신, 세상 가치관에 물들어서 성공 신화를 추구하는 거란 말입니다. 그런 고지론이 세상 교회를 온통 오염시켰어요. 한 마디로 세상과 교회의 경계선이 무너져버린 겁니다. 그 경계선이 뭐라고 했습니까? 언약의 피, 다른 말로 거룩이에요.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해 못 박힌자들의 교회인 것입니다 (갈6:14)
세상 정신과 세상 가치관이 유통되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이런 게 들어오게 되면 반드시 어떤 생리적 반발이 나타나야 교회예요.여러분 코나 목에 뭐가 들어오면 기침하고 재채기 하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이물질이 들어와도 반응이 없는 건 죽었다는 말입니다.
자 그런데 교회 안에서 그런 잡음이나 충돌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목사거든요. 어떻게 해서든지 조용하게 갑시다, 싸우지 맙시다..뭐 할려고? 교회하려고... 그래서 그들이 믿는 예수는 자기를 비워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예수가 아니에요. 발음은 같고 단어는 같은데, 본질이 달라요.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예수님을 광야에서 시험했던 그 마귀인 거예요. 그러다 보니 순복음 조용기처럼 삼중 축복, 오중 축복이 나오는 겁니다. 열심히 빌고 잘 섬기기만 하면 어디로 올라가든지 정상에서 다 만나게 된다.. 이게 종교다원주의거든요.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변질되었어요. 처음에는 그런 소리하는 사람들을 이단시했던 보수적인 교회들까지도 이제는 그들을 다 따라가 버렸어요. 한 마디로 꿩 잡는 게 매다. 일단 교회는 키워놓고 보자. 그리고 교회를 키우는 데는 딱 두 가지 있으면 돼요. 기복주의와 신비주의, 이 두 가지만 있으면 교회 커집니다. 그래서 말은 대한 예수교이지만, 실제 그들이 섬기는 건 바알이고 맘몬입니다.
그런데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그 종교의 회당, 좀 심하게 말하면 사단의 회당에서 불러내시고 생명의 말씀으로 먹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큰 성 길가에서 그 큰 성을 향해서, 바벨론을 향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치게 하십니다. 그들이 큰 성 길가에 선 두 증인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서 복음과 심판을 외치는 성도는 그로 인해서 마침내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삼 일 반 후에 그들에게 생기를 넣어서 하늘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들의 원수들도 보게 된다고 하거든요. 그게 땅의 심판이에요.
그렇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이에요. 왜냐하면 그들이 외쳤던 큰 성 바벨론을 성경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거든요. 그런데 그곳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결국 성도들도 예수님과 함께 그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는 게 그들의 운명인 겁니다.
제가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성도의 영적 현실에 대해서 부연 설명을 하는 것은 오늘 본문 역시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보겠습니다
(빌 2장)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여기에 ‘두렵고 떨림으로’가 나오는데요 이게 잠언 1장 7절에 나오는 ‘경외’라는 단어입니다.
(잠 1장)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경외는 히브리어로 ‘야레’인데, 그냥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앞에 엎드려서 경배하는 상태를 말해요. 경배하고 예배하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 때 성도들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게 바로 두렵고 떨림인 거예요. 바꾸어서 말하면 거룩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선 죄인에게서 나타나는 감정이고 또 전적 부복이며 항복입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 뭐라고 합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자, 하나님 앞에 세워진 자의 탄식이며 경외입니다. 오늘 본문의 두렵고 떨림이에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들의 하나님 경외란 말입니다.
여러분은 대부분 세상 교회가 방금 읽은 이 12절, 13절 말씀을 어떻게 가르치고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지를 아실 거예요. ‘열심히 종교 생활 하고 착하게 살고 교회 잘 섬기지 않으면 구원에 중도 탈락할 수 있다. 목사 말에 늘 복종하고 교회 생활에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 한다.’.. 그러니까 목사한테 함부로 대들지 말라는 거예요. 그리고 너희들끼리 누가 잘났나 하고 싸우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모두 다 충성된 신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이 아니라 목사를 경외하라고 공갈을 치지요. 누구는 목사한테 달려들다가 암 걸렸다고 하더라.. 누구는 십일조 떼 먹었다가 사업 쫄닥 망했다더라... 이런 간증 많이 하잖아요 이런데 써먹으라고 본문이 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두려움 떨림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12절 앞에 ‘그러므로’가 있어요. 이 말은 앞의 5절에서 11절까지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들어야 12절부터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의 마음을 품은 자들, 예수의 심장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이 12절부터의 말씀이에요. 그래서 10절과 11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최종 목적에 대해서 또 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아멘 할 수 있어야 12절부터 말씀이 이해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했던 2장 5절부터 11절 말씀에 대해서 좀 더 설명드리고 오늘 본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빌 2장)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게 하나님의 목적이며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같은 말씀이 에베소서에도 나옵니다.
(엡 1장)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재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성도의 목적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 안의 완성체로서의 그의 몸 된 교회입니다. 내 구원이 목적지가 아니고 나의 행복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자꾸 내 목적에다가 하나님을 끌어들이고 이용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종교인들입니다. 대부분 종교인이 이렇게 나로부터 시작하고 또 보이는 교회에 갇히는 거에요. 눈에 보이는 교회에 소속되므로 말미암아 안정감을 느끼고 자기의 신자 됨을 확인하려고 하고 다들 그렇게 보이는 것으로부터 자유하지를 못해요.
그런데 믿음은 그게 아니거든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한단 말입니다. 성경은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힘써 알라고 합니다. 인간들이 각자 선택한 하나님, 인간들이 조작해서 섬기는 그 하나님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그 하나님을 아는 것, 그게 구원이고 영생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죄와 사망까지도 하나님을 알게 하는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롬 5장)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죠. 이게 성도들의 현실이에요. 21절에 보면 죄가 사망을 도구로 해서 왕 노릇 한다. 놀랍죠? 이처럼 은혜도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기 위해서 성도, 하나님의 사람들의 죽음까지도, 죄까지도 은혜의 왕 노릇을 보여주기 위한 죄와 죽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게 터닝 포인트 에요 대역전이 벌어지는 거란 말입니다.
이 로마서 안에는 참 놀라운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을 자칫 오해하면 은혜의 왕 노릇 안에 있는 성도는 죄도 안 짓고 죽음도 없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에요. 성도 역시 죄를 짓고 성도도 죽습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다른 게 하나 있어요. 뭔가 하면 모든 세상 인간은 자기 생존을 위해서 발버둥 치다가, 즉 자기 확장, 자기 계발, 자기 지키기에 온 힘을 다 쏟으면서 살다가 결국 절망 속에 죽음을 맞게 됩니다. 이게 보편적 인간들이에요. 그런데 성도는, 의로 말미암은 은혜의 왕 노릇 안에 있는 성도는 자신의 육이 죽어야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의의 선물로 주어지는 진짜 생명을 살게 됨을 안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그 육을 확장하고 발전시키고 잘 지켜내므로 해서 자기를 성취하고 자아를 실현하려고 한단 말이에요. 그런데 성도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이 옛사람이 죽어야 산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에요. 자기 부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그러셨어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서 살겠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지금 우리 이 몸으로 천국에 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난리 부르스 개판되겠죠? 그거 아니란 말이에요. 성도에게는 소망이 있어요.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몸이 있다는 것, 우리의 이 장막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은 새집이 있음을 아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에게는 죽음 자체가 달라요. 그냥 죄의 삯으로 죽는 죽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 언약의 죽음, 진리의 죽음에 연합된 죽음으로 죽었기 때문에, 또 날마다 죽고 있기 때문에 성도는 이미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 안에 들어가 있어요. 그게 다른 점이에요. 여러분은 죽어도 안 죽어요.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되었구나, 나는 새 생명이 있구나 하고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고린도전서 15장을 보면 부활에 이미 참여된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는 날마다 죽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활이 무엇인지를 배우기 위해서, 그 부활의 생명을 체험하기 위해서 먼저 있어야 하는 게 육의 죽음이에요. 이게 다른 거예요. 지금 여기 있는 내가 더 잘 살고 영원히 살기 위한 그게 부활이 아니라, 재생이나 소생이 아니라 질이 다른 생명으로 사는 것, 하나님적인 생명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 그걸 배우기 위해서 먼저 생명이 아닌 것의 죽음, 육의 죽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는 죽어도 안 죽어요. 의로 말미암는 은혜의 왕 노릇을 알기까지 날마다의 죽음을 살아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왕 노릇은 성도의 전 인생에 걸쳐서 나타나는 거예요. 성도의 삶은 그 은혜가 개입하므로 말미암아 이 죄악 된 세상과 분리, 찢어짐이 발생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육이 죽어 나가는 고난이 은혜와 함께 주어지는 거예요. 세상 종교인들처럼 은혜 받으면 만사형통하고 날마다 홀리 하고 마냥 즐겁기만 한 게 아니라 은혜를 입은 자의 삶은 별세하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그게 싫어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밖에 모르고 살기 때문에 이 세상만 사랑하고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세상과의 찢어짐이 너무 아프고 싫단 말이에요. 그런데 은혜를 입은 자는 반드시 이 세상과의 별세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딱 이 한마디로 정의가 되는 거예요. 심판받아야 할 세상에서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그런데 그 은혜를 입은 노아가 어떻게 살았습니까? 산꼭대기에서 120년 동안 배를 만들었어요. 세상 사람들이 노아더러 뭐라고 했겠습니까? ‘미친놈’이라고 했겠죠. 그때 홍수가 있기 전에는 비가 안 내렸었거든요. 지구 생태계가 지금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당시 사람들 수명이 몇백 년인 게 그래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 홍수가 있을 거라고 하면서 혼자 산꼭대기에서 배를 만들고 있으니까 미친놈 소리를 듣는 거지요. 노아는 자기 인생 전체를 고스란히 하나님께 차압당한 겁니다. 이렇게 노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서 노아는 세상으로부터 부정되고 분리되는 인생을 살아내야 했습니다. 이게 성도의 삶이예요.
그런 노아의 은혜가 노아를 이끌고 간 곳이 어딥니까? 어디로 끌고 갔어요? 세상의 종말이에요. 온 세상이 홍수 심판을 당할 때 노아는 방주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한단 말입니다. 내가 당해야 하는 하나님의 저주, 그 심판의 비를 대신 맞아주는 방주 안에서 노아는 이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라는 방주 안에서만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이게 은혜의 목적지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 역시 마찬가지예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오자, 당시 최고 문명의 도시 갈대아 우르에서 광야로 끌려갑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끌려 가요. 그리고 나그네와 이방인처럼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끌려다니다가 결국 이 땅에 무덤 하나 얻고 죽습니다. 막벨라 동굴, 내가 살 곳은 이 땅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약속의 땅은 여기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임을 알고 그 본향을 바라보면서 아브라함 삼 대가 가나안에서 텐트 치고 살다가 갔어요. 그게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이에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목적지를 몰랐을 때는, 그 은혜가 가리키는 게 무엇인지를 몰랐을 때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려고 심지어 자기 아내까지 팔아먹으면서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했어요. 약속을 받은 자기가 죽으면 안 되니까... 심지어 아들 이삭까지 바치려고 그렇게 모리아 산에 올랐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물, 여호와 이레의 그 제물인 어린양에 의해서 살아난다는 것을 그때 알았던 겁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집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게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체감하고 알았던 아브라함은 그 후에도 여전히 육의 행실이 폭로되는 인생을 끝까지 살아내야 했습니다. 그게 은혜가 왕 노릇하는 성도의 인생입니다.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이 육이 변화되고 성숙해져서 구원에 이르는 게 아니라 오직 은혜의 왕 노릇으로 구원이 성취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도의 인생은 죄의 육이 계속 폭로되는, 믿음 없음이 발각되는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의 왕 노릇으로 구원이 주어지지 내가 협조하고 보태어서 구원을 받는 게 아님을 인생 내내 배워야 한단 말이에요. 이게 힘든 거예요. 내가 나의 구원에 협조할 게 조금이라도 있어야 일말의 자존심이라도 챙기는데 그게 안되니까 종교인들이 인간의 자존심, 가능성을 챙겨주는 그런 인본의 신학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성화와 상급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그런 인간들의 노림수를 폭로하기 위해 믿음의 조상들 인생에 없어도 되는 그런 불편한 이야기들이 성경에 기록된 겁니다. 아브라함을 한번 보세요. 사라가 죽은 후에 백 살이 넘은 늙은이가 또 후처를 얻어서 자식을 낳습니다. 아니 왜 이런 걸 왜 성경에 기록해 놓느냐고요.
노아 마찬가지. 온 세상이 홍수로 심판당했는데, 언제 숨겨놨는지 포도주 숨겨놓았다가 나중에 낮술 먹고 취해서 발가벗고 자다가 자식들에게 들키잖아요. 이게 모두 그런 이야기예요. 은혜의 필연성이에요. 다윗, 솔로몬 다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입니다. ‘은혜가 무엇인가?’ 이 은혜에 관한 오해가 참 많죠?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이 우리와 어떤 관계성을 가지는지부터 분명히 알아야지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 자기 뜻으로만 행하시는 하나님의 그 은혜가 어떻게 우리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게 하시는지를 알게 된단 말입니다. 한 마디로 구원의 주체가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사실.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다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에게 거저 입혀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된 신부 된 교회가 주님의 이름 앞에 온전히 무릎 꿇음이 우리의 현재적 구원임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예요. 그렇게 성도는 인생의 주어가 바뀐 자들입니다.
그런데 세상 교회 교인들도 십자가를 안다고 하죠. 진짜 다 압니까? 세상 교회 설교를 들어보면 강단에서 십자가 이야기 거의 하지 않아요. 십자가는 기본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거 아니에요. 십자가는 우리가 평생 알아가야 할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평생 살아내야 할 십자가란 말입니다. 그 약속의 죽음 안에서만 잉태되는 새 생명, 그 죽음 안에서 잉태되는 새 생명을 알 때, 그리고 그 죽음이 어떤 하나님의 희생이고 사랑이며 섬김인지를 우리가 알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그분 앞에 우리의 전 존재를 맡기게 되는 것입니다. 보편적 아담에서 난 인간들은 절대 나 아니 타자에게 자신의 전 존재를 맡기지를 못해요. 그게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죽음으로 나타난 그 사랑, 그분의 죄인에 대한 오래 참으심,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점차 알아갈수록 우리는 조금씩 자신을 그분 앞에 맡길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 안에 새 마음을 주신단 말이에요. ‘나는 아니오, 당신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당신이 전부입니다’ 시편 57편에서 다윗이 말하는 그 확정되고 확정된 마음입니다.
그렇게 하늘의 왕이신 그분의 낮아짐과 비워지심 앞에 납작 엎드려서 부복하게 되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하는 것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자기 가치와 자기 가능성, 그 본성적인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그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은혜의 필연성과 절대성을 알게 된 자들은 반드시 두렵고 떨림이라는 그 구원 앞에 세워지게 되는 거예요. 이 자리가 바로 바울이 말하는 죄인의 괴수 된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새 창조는 이렇게 선악과를 따먹고 생겨 난 ‘나’라고 하는 육적인 자아를 반드시 다시 없음의 자리로 되돌리고 그 없음에서부터 새롭게 창조가 시작됩니다. 세상 종교인들처럼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펄펄 날뛰는 게 아니고 소금 뿌린 배추처럼 자꾸 숨이 죽는 거예요. 날이 갈수록 힘이 빠지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도 바울처럼 마지막까지 죄인 중의 괴수로 인생을 마감하게 된단 말입니다.
요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그런 개혁주의 신학으로 하자면 사도 바울은 지옥 간 사람이에요. 마지막까지도 우리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면 저는 구원받지 못하는 죄인 맞습니다. 그게 죄인의 괴수거든요. 진짜 은혜를 입게 되면 어떤 변화가 있는가 하면 저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나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여전히 내 가치, 내 이름을 챙기고 사람들의 칭찬과 사람들의 시선,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원하는 그런 죄인이 맞습니다. 이게 나와야 해요. 조금만 억울한 일을 당하면 분을 참지 못하고 자기변명, 자기변호에 나서는 그런 죄인이 저 맞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아니면,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아니면 저는 영원히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이 자리로 우리를 끌고 가는 것이 바로 은혜의 왕 노릇이에요. 이 은혜가 우리에게 덮일 때마다 ‘아 나는 정말 이 은혜를 받을 자격 없는 죄인 맞습니다.’ 이게 폭로된단 말이에요. 그냥 은혜받았다고 마냥 좋은 게 아니에요. 한마디로 우리 좋으라고 주시는 은혜가 아닌 것입니다.
제가 여러 번 얘기했지만, 은혜는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은혜예요. 그리고 끝까지 갚을 수 없어야 은혜로 남는단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믿음과 하나님의 행함이 성도들의 인생에 반드시 나타납니다. 그분의 믿음, 그분의 행함이 없으면 우리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다..
자 그래서 오늘 12절 13절 말씀은 세상 교회가 가르치는 것처럼 스스로 자기 구원을 위한 그런 독실한 종교 생활을 하도록 성화를 독려하는 말씀이 아니에요. 또 반대로 복음을 핑계 삼아서 막 살기를 가르치는 자들 역시 이 본문 말씀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이 말씀 앞에 발가벗겨져야 하는 그런 말씀인 겁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을 너무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요. 하나님을 그냥 우리 수준으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막 살라는 말이 나오죠. 그런 걸 가르치는 사람은 불가능한 죄인으로 한 번도 하나님 앞에 서 본 적이 없어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그냥 머리로만 아는 거죠. 여러분 복음은 지식이 아닙니다. 살아내는 거예요.
많은 분이 제게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고 질문을 해요. 신앙생활에서 한 번은 직면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죠. 박영선 목사의 책 중에도 ‘구원 그 이후’란 베스트 셀러가 있지요. 그럼, 성경은 성도의 삶 새 생명으로 살아가는 그 삶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좀 더 살펴보고 강론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내 구원에 도움 되는 어떤 행위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살아야 구원받고 복 받고 상급 받습니다.’라는 말 자체가 십자가 은혜를 모독하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우리에게 그런 착한 삶, 그런 구원 가능성이 조금만 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는 필요 없다는 말이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먼저 성령을 보내셔서 잘 가르치고 훈련하고 성숙시켜서 천국 데려가면 되잖아요. 아니 왜 굳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들에게 맞아 죽어야 하는지,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를 흘려야 하는지 그 복음,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서 대부분의 교인이 고민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냥 그런가 보다. 내 죄를 사하기 위해서 예수가 피를 흘려야 하나 보다. 하고 그냥 넘어가죠. 그거 아니에요. 오죽하면 사도가 그랬을까요? ‘나는 그리스도 예수와 그가 못 박히신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고. 나는 그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이 말은 그 십자가가 전부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내가 구원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말 자체가 십자가 은혜를 모욕하는 말이에요. 제가 그런 질문을 하는 분들에게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그냥 사세요. 살다 보면 압니다.’.. 지금 여기 살아있다고 생각되는 내가 더 잘살아보겠다는 탐심, 하나님처럼이라는 선악과 따먹은 아담의 탐심이 이 땅에 오신 예수를 죽여버렸다는 것을 알 때까지 그냥 사시라는 말입니다 나대지 마시고.
그래서 흔히 말하는 그리스도의 향기, 생명의 향기를 발산하는 성도의 삶을 이야기하기 전에 성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힌다는 게 무엇인지, 또 그 죽음을 지금 살아내는 현재적 구원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해요. 그 죽음을 지금 살아내는 자들에게만 뿜어져 나오는 그리스도의 향기이기에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자기 부정이에요.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자기 부정입니다.
아담에게서 난 모든 인간은 자기 부인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거 한 번 해보려고 종교인들이 얼마나 애쓰는지 아세요? 온갖 수행 고행을 하고, 그래도 안 되니까 자기 몸까지 불태우고 별짓을 해도 자기 부인이 안 되는 거예요. 왜? 그만큼 우리 안에 장착된 죄의 뿌리, 선악과의 죄 성이 큰 거예요. 그런 죄의 세력,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만,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건져내신 게 구원이에요. 우리는 죄의 권세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자기 긍정, 자기 사랑, 자기 영광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요. 그런 우리 육을 우리 스스로는 죽일 수 없으니까, 자살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니까 하나님이 아들의 죽음에 우리를 그냥 집어넣으신 거예요. 우리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그게 언제 일어난 일이라고요? 창세 전에. 이미 창세 전에 이루어진 그것들을 우리 인생 속에서 계속 반복해서 확인시켜 주시는 게 성도의 죽음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을 성도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그 죽음을 살아내는 자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잖아요. 옛날 이스라엘 성전에는 문이 여러 개 있었는데, 그중에 양들이 통과하는 문이 있었어요. 제물로 바쳐지는 양들이 들어가는 문이죠. 그 문이 양의 문이에요. 그러니까 양의 문이신 예수의 죽음을 통과해야만 성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영생이 주어지기 전에 예수의 죽음에 먼저 합류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인생은 예수님이 사셨던 그 세상이라고 하는 무덤을 통과해야만 천국 문이 열리는 거예요. 철학자들이 하는 가장 중심되는 질문이 ‘인생은 무엇인가?’죠. 철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거든요. 그런데 그 인생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성도밖에 없어요. 왜 내가 이 세상을 살고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를 그들만 안단 말이에요. 그들 안에 보배를 담아 주신 분을 아는 인생입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거 하나님께 있음을 배우는 기간입니다.(고후4:7-12)
세상은 그렇게 성도들의 무덤으로서 세상입니다. 아브라함의 막벨라 굴처럼 세상의 역할은 그거에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천국의 문이면 그 예수와 함께 세상에 못 박히는 자들로서 여러분의 인생이 있어요. 그렇게 세상에 대한 죽음을 계속 겪으면서 비로소 우리 눈이 하늘로 들리는 거예요. 내가 살 곳은 이곳이 아니구나. 나의 본향은 위에 있구나. 하나님이 그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서 이 땅을 다녀가셨구나. 이것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 죄의 몸이 예수의 죽음에 연합되어서 함께 장사되어야 새 생명이 부어지는 것을 하나님의 새 창조라고 합니다. 구원은 이 새 창조입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창조는 완전한 없음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성도에게 육의 죽음이라는 역창조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새 생명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는 새로운 방향성이 나타납니다.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찾고 바라보는 소망이 주어집니다. 보이지 않는 소망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그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해요. 그 소망 자체가 구원 얻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재적 구원의 증거란 말입니다. 천성을 향해서 떠나는 노마드들의 천로역정이 성도의 별세의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규정한 옳음, 착함이나 칭찬 등과 상관이 없이 하늘에 완료된 그것을 향한 새로운 지향성이 나타나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누가 가르쳐서도 훈련해서도 되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성령 받은 성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 은혜의 왕 노릇이 있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소망이며 새로운 지향성입니다.
그래서 아까 로마서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는 것을 우리가 수시로 확인하게 되는 은혜의 왕 노릇. 그렇게 왕의 백성, 왕과 함께 사는 자들은 왕이 시키는 대로, 왕의 가르침 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고 통과하게 됩니다. 계시록에 같은 말씀이 나오잖아요. ‘그들은 다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어디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라고. 이게 세상과 다른 길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분명한 방향성이 있어요. 생명의 길로 오신 그분과 함께 이 세상을 통과하고 있는 노마드들이 여러분이에요.
그리고 그들에게 나타나는 향기가 있는데, 누구에는 생명의 향기로 나타나고 누구에게는 사망의 냄새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성도의 존재 자체가 세상의 위기인 거에요 그들에 의해 이 세상이 빛과 어둠으로 갈라지니까요. 성도는 그런 영적 존재예요. 성도가 없으면 이 세상은 그냥 어둠의 세상이지만 성도의 삶을 통해 이 세상이 빛과 어둠으로 갈라진단 말입니다 그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들만 교회에요
사도는 그런 성도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어요. 전쟁에 승리하신 왕의 개선 행진을 축하하는 향기라고. 옛날에는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는 왕의 행진 그 맨 끝에 향을 담은 사람들이 따라가게 된대요. 그 향기가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란 말이에요. 향을 담은 그릇으로 그 승전의 대열에 합류된 자들로서 여러분입니다.
성도는 그 은혜의 영광, 그리스도의 복음의 향기를 어디서나 뿜어내게 됩니다. 복음성가에 그런 게 있죠?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 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 그렇게 백합의 향기, 그리스도의 향기는 자기 몸이 찢어지는 가시밭 속에서 뿜어내는 향기입니다. 은혜의 왕 노릇은 그런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라는 가시밭길을 통과하면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게 하는 왕 노릇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위한 지향성까지 끌어내는 그런 은혜의 왕 노릇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어차피 죄인에게서는 죄만 나오니까 뭘해도 죄가 되니까 막 사세요 ? 지금도 그런 교회 있습니다. 저기 팔공산 아래 가면 교회 가서 청소하는 것도 죄, 밥하는 것도 죄, 예배드리는 것도 죄, 헌금하는 것도 죄.. 그 목사 말이 ‘나는 예수 믿습니다’라는 말을 못한답니다. 왜냐하면 죄인에게서 그런 말이 나오는 순간 그것도 죄가 되니까. 이런 것들이 십자가를 사는 삶이 아닌 십자가라는 지식의 유희인 것입니다.
또 요즘 보면 세상 교회 꼴 보기 싫다고 교회 안 나가는 사람들 많잖아요. 가나안(안 나가) 신자. 인터넷 앞에 앉아서 자기 마음에 드는 설교 들으면서 세상 교회 비판이나 하고...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항상 자기가 의인이에요. 은혜의 왕 노릇이 필요 없는 사람이에요. 은혜의 왕 노릇은 말 그대로 죄인의 괴수에게 덮어주시는 은혜의 왕 노릇인데, 자기는 항상 특별하고 항상 다 알고 세상 교회 비판 할만큼 의롭고... 그거 아니란 말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 이게 참 진짜 마귀의 궤계, 장난질이, 놀랍다는 게 평생 은혜의 복음을 전하다가 가신 목사 동영상을 틀어놓고 모여서 교회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에겐 그 목사 설교가 진리가 되어버리니까 다른 이야기는 아예 안 들으려고 해요. 우린 김성수 외엔 알지 않기로 했다나 뭐라나...다시 김성수 설교라는 율법을 만들어버린 거예요. 어떤 분 이야기 들어 보니까 그 교회 팀장이라는 자가 지난 대선 때 특정 정당 찍으라고 강단에서 선거운동까지 했다던데, 김성수가 이런 거 봤으면 단번에 쌍욕 나옵니다. 모여서 한다는 짓이 목숨 바쳐서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간 사람 동영상을 틀어놓고 교회놀이 하고 있다니까요. 이게 세상 교회예요. 한스 큉이 말한 그대로라니까요. 창녀들의 모임. 십자가의 원수 된 교회입니다. 바울이 오죽 답답했으면 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노니 많은 이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고 했겠어요? 바울이 세상 사람들을 보고 한 얘기가 아니라 교회에게 한 이야기예요. 그러나 그들 가운데도 주께서 남기신 성도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렇게 세상 교회는 잠시 전해진 은혜의 복음 그 진리를 파묻는 일에 열심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내어버려 두신 거예요. 아까 말씀드린대로 은혜받고 진리 알았으니까 내 마음에 드는 목사 설교 틀어놓고 교회 놀이를 하는 자들이나 은혜 받은 만큼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고 다시 종교 행위로 돌아가 버린 자들이나 은혜를 모독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세상의 역할이에요. 그래서 세상은 세상 끝날까지 세상으로 있어야 합니다. 진짜 그 은혜를 알고 그 진리를 알았더라면 그 예수, 그 하나님을 누리면서 감사하고 찬양하면 되는데, 주님 안에서 살아가면 되는 것인데 다들 가만히 있지를 못한단 말이에요. 그건 한 번도 죄인의 괴수에게 베푸신 은혜의 왕 노릇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그 은혜가 아니면, 그 용서가 아니면 전혀 불가능하고 부정한 죄인이라는 것을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경험케 해주는 사건들을 성도의 인생에 발생시킨단 말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런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의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도는 말씀의 사건으로서 교회예요. 성도의 인생 자체가 말씀의 사건이란 말입니다. 그렇게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우리를 그런 낯선 은혜로 돌보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아고’ 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해요. 그만큼 우리는 구원 불가능한 죄인이고 일평생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야 하는 그런 무기력하고 무능한 자임을 알게 되므로 해서 오직 은혜로 주신 그 구원에 대해서 성도는 오늘 본문처럼 두려움과 떨림으로, 면목 없이 빈손으로 그렇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쓸모없는 인간을, 내가 봐도 한심한 이 인간을, 파도 파도 죄만 나오는 인간을 왜 하나님은 이토록 사랑하셨는지 그 은혜, 그 용서, 그 사랑, 그 오래 참으심에 감격해서 그런 자들에게 나에게서 나올 수 없는 그런 순종이 나오고 봉사와 섬김이 나오고 또 우리 안에 두시는 그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그런 믿음의 행함이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런 하나님의 착한 일이 우리 삶에서 나타날 때 우리는 마침내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의 모든 입으로 이 땅에 피를 남기고 가신 그분을 주라 시인하며 나에게 영원토록 주가 계심을 확인케 되는 그런 사건들로 우리 인생이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 본문 말씀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은혜의 왕 노릇과 함께 그 구원을 지금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감사합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죄인들에게 어떤 자격도 능력도 따지지 않고 그냥 값없이 주시는 그 은혜로만 구원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이제 우리가 알았습니다. 우리의 남은 날들이 그 은혜, 그 영광, 그 찬송으로 채워지게 하시고 어그러지고 거슬리는 이 악한 세대 가운데서도 거룩하고 흠이 없는 빛의 자녀로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된 그 기쁨으로 충만한 그 행복이 우리에게 있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