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구(李玖, 1931년~2005년)

아버지 의민태자는 엄연히 대한제국이 존재하던 시절, '황태자'로 봉해졌지만 이구는 대한제국 멸망 이후, 그것도 순종 사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황태손이 된 적이 없으므로 대중들에게 '황세손'이라고 거의 불리지 않는다. 황제의 손자라는 의미인 황태손과 왕의 손자인 왕세손이 합쳐진 이름, 바로 이도저도 아닌 이 시호에 논란이 많다. 어찌되었든 현재 문화재청에서는 회은황세손을 사용하고 있다.
그의 형 이진은 아직 아기였을 때 사망했고, 그로부터 10년 뒤에 태어났기 때문에 사실상 외아들로 성장했다. 태어날 때부터 그는 이왕 은(李王 垠)의 후계자로서 '이왕세자(李王世子)'라 불렸다. 1947년 10월 18일 신적강하로 그는 완전한 평민이 되었다.
광복 이후
그는 1953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MIT에서 건축을 전공해 유명 건축가 이오밍 페이의 회사에 취직했다. 유학 중 만난 줄리아 리과 1959년 결혼한다. 유학하려고 했을 당시 이방자가 도미를 말렸으나 의민태자가 "구는 아버지를 딛고 넘어 넓은 세계로 가라. 나처럼 되지 말고 너의 길을 찾으라"라고 적극 지원했다고 한다. 이후 1963년 귀국해 한동안 성공을 했으나 1973년 사업에 실패한 뒤 일본으로 갔고, 아내와 별거하다가 1982년에 이혼했다. 불임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다는 말도 있지만 실제로는 불명. 일단 이혼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이구의 바람끼와, 종친들이 이구더러 줄리아와 이혼하고 한국 여성과 결혼하라고 오랫동안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후 1990년대에 일본인 무당 아리타 키누코와 혼인신고를 올렸다고 한다.
그는 주로 미국 아니면 일본에서 지냈다. 한국에 거주할 생각이 없던 건 아니지만, 종친들과 갈등을 겪은데다 한국에 적응하지 못해 포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국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다. 그래서 가끔 일이 있을 때 아니면 거의 한국에 오질 않았다고 한다. 어쨌든 마지막 황태자의 하나뿐인 아들이므로 대한제국 황실의 적손으로서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명예총재 직책을 갖고 있었다.
사망
2005년 7월, 과거 자신이 살던 저택을 개조한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에 묵고 있을 때 사망했다. 향년 73세. 그런데 일본 황가에 이구의 친손이라며 대한제국 황실가에 들어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이구씨는 일본 왕실로부터 약간의 연금과 생활보조비를 지급받긴 했다. 이방자를 통해서 모계로 아키히토와 6촌관계이기도 하고.) 이들은 이구의 시신 유품 일부를 몰래 일본에 가져가기도 해 조선황실복원 관계자들을 격분하게 했다.
알려진 바로는 그에게 친자식은 없다. 양녀 이은숙은 사실 이구가 아니라, 줄리아 리가 이구와 이혼하기 전 한국에 살고 있을 때 입양했다고 한다. 어쨌든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므로 그의 사후, 회사원 이원씨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 의해 이구의 양자로 지명되었다. 이를 정식으로 인정해야 할지는 논란이 있는데, 현행 민법상 사후양자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대동종약원에서는 생전 이구 씨가 이상협 씨를 양자로 지명하는데 동의했다고 했는데, 사실이라 하더라도 법적 절차는 이구의 사후에 이루어졌으니 논란이 될 수 밖에 없다. 참고로 이석씨는 황실인사들과 상의없이 종약원회장과 이구 씨가 일방적으로 이상협 씨를 양자로 지명했다는 것, 종약원 자체가 황실과 혈통상 거리가 멀다는 것 등으로 인해 이 양자 지명을 강력 반대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원은 이구의 후손으로서 현재 조선왕릉이나 종묘에 대한 제사를 맡고 있다.
대한제국 시절 예법에 따라 창덕궁에서 장례를 치르고, 홍유릉 권역으로 운구된 후에 아버지 의민태자의 묘역인 영원 인근에 마련된 조선 왕조 최후의 왕실 묘역 회인원(懷仁園)에 안장되었다. 이구의 장례는 조선왕조 왕실 예법으로 거행된 마지막 '진짜 장례식'으로, 사실상 그가 대한제국 황실의 마지막 직계손이기 때문에 이후로는 무형문화재 전승 차원에서 흉내(?)를 내는 일이 있을지는 몰라도 진짜 장례식으로 거행되지는 않을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