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남자는 모두 군대에 가야 한다.
나는 끌려간다는 느낌이 싫어서 먼저 해병대에 지원했다.
대학에 휴학원을 제출하고 본가로 내려갔다.
그 당시에 우리집은 전주에 있었다.
8월에 입대하기 전까지 '전주 하수종말처리장' 신축공사판에서 질통으로 모래와 자갈을 날랐다.
힘이 넘칠 때였고 바위도 씹어먹을 때였다.
일도 신명나게 했다.
우리집에서 공사현장까지 꽤 먼 거리였는데 새벽바람 맞으며 뛰어서 갔고, 일이 끝나면 야생마처럼 뛰어서 왔다.
쉬는 날엔 산속에서 혼자 훈련했다.
해병대생활을 멋지게 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입대 전에 주로 했던 운동은 달리기와 푸쉬업, 싯업, 쪼그려뛰기(하체단련) 등이었다.
대지가 이글거리던 몹시 무덥던 1985년 여름날.
나는 포항 신병훈련소로 들어갔다.
입대 하루 전날, 전주 터미널에서 부모님과 지금의 아내인 여친에게 잘 다녀오겠노라고 원기왕성하게 인사하고 혼자서 포항으로 향했다.
훈련소 부근 어느 모텔에서 일박을 했는데 체크인하고 보니 나와 비슷한 처지의 장정들이 예닐곱 명이나 되었다.
내가 먼저 나섰다.
"보아하니 모두 동기들 같고 입대전야인데 통성명도 할 겸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싫어하는 놈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경향각지에서 온 팔도 사나이들이었다.
부근 식당에서 코가 삐뚤어질 정도로 굵고 찐하게 한잔 했다.
그리고 다음날 씩씩하게 훈련소로 들어갔다.
7주간 강도높은 신병교육이 이어졌다.
동기들은 힘들어 죽겠다고 아우성이었지만 나는 내심 "해병대 신병훈련소 별것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표시나게 얘기할 순 없었지만 속으로는 분명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훈련소를 수료할 무렵 동기들 전원이 강당에 모여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강당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알록달록한 위장복에 그린베레모를 쓰고 있었고 검정 썬그라스를 낀 상태였다.
아직 앳된 훈련병 눈엔 그들이 하나같이 무시무시해 보였다.
시꺼멓고 다부졌으며 차돌같았다.
까닭모를 공포감이 일었다.
"제군들, 무더운 여름철에 신병훈련 받느라 고생이 많다."
"나는 해병대 특수 수색대 상사 000이라고 한다."
"실무에서 지옥을 경험해 보고 싶은 놈들이 있으면 화끈하게 나와봐라."
"너희 기수에서 총 0명을 선발할 예정이다."
상사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6-7명이 단상앞으로 우루루 달려나갔다.
나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지원자들은 모처로 이동하여 체력검증과 심층면접, 입대전 생활, 가정환경, 훈련소 이수성적 등등 몇가지 테스트와 절차를 거쳤다.
최종적으로 4명이 합격하였고 모두 포항1시단으로 배치되었으나 나만 딸랑 김포 2사단으로 배치되었다.
실무에서는 더욱 혹독한 훈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 땅, 바다를 가릴 것 없이 전천후 특수요원들을 양성하기 위한 각종 커리큘럼들이 즐비했다.
하나같이 입에서 단내가 나는 악날한 훈련이었고 엄청난 땀과 눈물이 필요한 과정들이었다.
나는 알았다.
전시가 아니면 군대에서 '총'은 그리 필요 없다는 것을.
절대적으로 '칼'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훈련과정 중에는 '총'보다 '칼'의 쓰임새가 많았다.
그러나 군대에서 지급하는 건 특수전용 단총에 착검하는 대검뿐이었다.
그건 백병전에서 찌르기에 특화되어 있던 매우 단순한 무기였다.
행군이나 비박. 유격, 생존훈련 등 거친 자연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착검용 대검이 아니라 '거버 나이프'와 비슷한 산악용 칼이나 좀더 크고 무거운 '정글도'가 필요함을 절감했다.
전역 후 캠퍼스로 돌아왔다.
바로 '검도부'에 입단해 맹훈련에 돌입했다.
일도양단, 찰라결단, 무념무상, 예의존중 등 검도가 주는 깊은 무예의 세계를 무지 사랑했다.
검도부 훈련이 끝나면 곧바로 체육대학 건물로 가서 '수영부'를 지도했다.
수영부는 99%가 체대생들이었는데 법대생이 체대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심각한 아이러니였지만 군대에서 전천후 흑상어로 활약했으며 '라이프가드' 자격증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밤에는 면목동에서 '야학교사'로 활동했고 야학이 끝나면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서 새벽까지 알바하며 돈을 벌었다.
야학에 참석하는 불우한 학생들을 지원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군대까지 다녀온 놈이 부모님께 손을 내민다는 건 일종의 죄악으로 생각했던 터라 무지 열심히 알바했다.
그렇게 꼬박 3년을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열심히 일했다.
정말로 물불 가리지 않고 회사생활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덕분에 입사 7년만에 어느 회사의 대표로 파격적인 승진을 했고 신규로 3-4개의 뉴브랜드, 뉴비즈니스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IMF 사태가 터졌고 2년여의 구조조정을 마무리한 다음 옷을 벗었다.
호기롭게 내 사업에 도전했으나 연이어 2번 말아먹었다.
지금은 3번째 일을 하고 있다.
긴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한 발 한 발 전진했다.
눈물겨웠지만 상황이 어려울수록 더 크게 웃으며 살았다.
끝끝내 엄청난 빚도 갚았고 그런대로 살만해 졌다.
다시 내 마음의 안식처인 '자연'을 찾기 시작했다.
깊은 자연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또다시 '칼'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대자연속에서 여러 종류의 칼을 사용해 보았다.
종류별로 장단점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다른 종류의 칼을 써봐도 역시나 뭔가가 아쉽고 허전했다.
우리집에는 현재 아내가 주로 쓰는 과도와 조리용 부엌칼 말고도 수중대검, 산악용 나이프, 바다낚시용 회칼 등등 나만 사용하는 열서너 종류의 칼을 보유하고 있지만 크기, 무게, 칼날, 강도와 연성, 절삭력 등등 다방면에서 내 마음에 드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사업가이자 반 약초꾼인 절친한 친구와 우리만의 칼을 만들어 보자고 했다.
그 친구도 깊은 숲속에서 '길 없는 길'을 선호하는 사람이라 우리만의 용도와 컨셉에 부합하는 다목적 '밀림도'(일명 '정글도')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고 했다.
진리다.
깊은 자연속에서 숱한 경험을 하다보면 각종 도구의 장단점을 잘 알게 된다.
예측할 수 없는 밀림속에서 상황 상황에 맞는 도구의 설계와 제작, 기능들에 대한 아쉬움이 절실하던 차였다.
나는 현재 서울에서 일하고 있기에 칼제작에 필요한 각종 공구들이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자신의 사업과 연관된 장비들이 어느 정도 구비되어 있었기에 우리만의 '밀림도'를 제작하는데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
관심과 열정이 필요할 뿐이었다.
먼저 재료를 구했다.
용이하게 구할 수 있으면서도, 재질의 강도가 무척 센 쇠가 바로 화물차의 '판스프링'이다.
엄청난 하중을 능히 견딜 수 있을만큼 강성이 좋은 재료다.
휘어진 '판스프링'을 준비해 고온으로 열처리(쇠 달구기)하여 평평하게 편 다음 '모양잡기'에 들어갔다.
'판스프링' 위에 제작하고 싶은 칼모양을 제도하고 그 디자인대로 잘라내야 했다.
과거엔 '산소용접기'를 이용하여 절단했는데 절단면이 매끄럽지 못하고 정교한 작업이 불가능해 현재는 '플라즈마 절단기'를 사용한다.
'플라즈마 절단기'는 강재뿐만 아니라 비철금속의 절단에도 특효약이다.
'자르기' 다음엔 '황삭가공'과 '그라인더 연마작업'이 이어졌다.
'그라인더 연마' 후엔 '벨트샌더'에서 한번 더 정교하게 쇠를 다듬고 이후엔 '담금질', '풀림', '뜨임' 등을 순차적으로 진행했다.
칼에 강도와 유연성을 동시에 향상시키는 필수과정이니까.
최근엔 손잡이 코팅까지 끝냈고 커팅 후 세공 중이다.
손잡이까지 완성되면 차후엔 '숫돌연마'와 '사포연마'까지 진행하여 칼날을 세울 예정이다.
서로 바쁜 각자의 일과 삶이 있기 때문에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작업을 진행시키고 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우리만의 '옥동자'가 태어난다.
단 두 자루의 '정글도'다.
묵직한 무게감에 약 50센티의 크기다.
거목을 제외하곤 모든 수목들이 이 정글도 앞에선 한 방에 훅 간다.
그야말로 '일도양단'이며 진정한 밀림개척용 '정글도'다.
이 개념에 가장 충실한 칼을 만들고 싶었다.
기쁘다.
또한 행복한 감정을 숨길 수가 없다.
글보다는 사진을 게시하는 것이 이해하기 좋을 듯하여 본 게시판 하단에 사진을 몇 장 첨부하겠다.
나중에 현업에서 물러나면 아내에게 '조리용칼' 하나를 만들어 주고 싶다.
최고의 명품으로 치는 '100겹 다마스커스칼'은 아닐지라도 '판스프링'으로 정성스럽게 제작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요리칼'을 선물해 주고 싶다.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로 운명지어져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시도와 도전 그리고 노력과 궁구가 있을 뿐이다.
우리의 직업이 저마다 다를지라도 긴 인생길을 가면서 겪는 숱한 체험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자산이 되고 살이 되며 뼈가 된다고 믿는다.
나만의 개똥철학인데, 나이에 상관없이 순수한 호기심과 다양한 경험들에 열심과 열정을 쏟았으면 좋겠다.
인생이 돈만 있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과감한 탈피와 용기있는 시도가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삶의 서막이 아닐까 한다.
파이팅이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