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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1일 오늘의 역사
2024년 미국 유조선 호루무츠 해협에서 이란에 피랍
2023 제주도 애월읍, 무게 1ton 넘는 초대형 슈퍼한우 사육
제주도 애월읍에서 무게 1ton 이상 중량의 슈퍼한우가 탄생했다.
제주축산농협에 11일 발표에 따르면 제주시 애월읍 행복한우농장 문병철·박재순 부부가 출하한 한우 거세우 두 마리가 등급 판정 결과 각각 생체 1120㎏(36개월령) 지육676㎏(1++B), 생체 900㎏(33개월령) 지육 517㎏(1++B) 등급을 받았다고 했다.
축산농가에서 출하하는 일반 한우의 무게는 평균 700㎏으로 1000kg을 넘으면 슈퍼한우로 불린다. 이번 출하된 슈퍼한우는 한우 개량사업을 통해 얻은 결과물이다. 평균 생시체중 25㎏대의 송아지와는 달리 생시체중 50kg대로 태어나 다른 송아지들보다 성장속도가 남달랐던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농가에서는 계묘년 새해 첫날인 지난 1일 생시체중 53㎏의 송아지가 태어나 슈퍼한우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2023년 아프간 자폭 테러, 탈레반 20명 사망…IS 소행
2023년 미국 항공 시스템 오류로 오전 미 전역에서 항공기 운항이 3시간여 동안 마비
2022년 북한 초음속 탄도미사일 발사
2022년 공군 수원기지 이륙한 F5 전투기 오산 야산에 추락
2022년 광주 신축아파트 붕괴 6명 사망
2019년 천막제조회사 파인텍 노동자 2명(홍기탁 박준호) 75m 굴뚝(목동 열병합발전소)농성 426일 만에 내려옴
2019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법농단 관련 사법부수장으로는 사상 처음 검찰 조사 받음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중국 윈난성 샹그릴라 고성 불타버림
2013년 파키스탄 폭탄테러 150명 사망 230여 명 부상
2011년 후진타오, 中 최초 스텔스 전투기 '젠(殲)-20' 시험비행 성공 발표
2011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홍수(일일 강수량 300mm) 산사태 800여 명 사망 400여 명 실종
2011년 '인권 변호사 1세대' 이돈명 변호사 별세
이돈명(89) 변호사는 30여년간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으면서도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열었던 온화한 인품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1922년 8월 전남 나주에서 태어나 1948년 조선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1952년 고등고시 사법과(3회)에 합격해 판사로서 법조계에 입문했다.
1963년 판사직을 접고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로서 본격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후 인혁당사건, YH사건, 미 문화원 점거 농성사건 등 주요 시국 사건과 10·26 사건의 주범 김재규의 변론 등을 맡았다. 2003년에는 재독학자 송두율씨 간첩사건을 맡아 법정에 나타나기도 했다.
이돈명 변호사는 이처럼 인권변호사로 장기간 활동하면서도 시국을 보는 시각이나 정치적 입장이 다르다고 해서 법정에서 상대방을 지나치게 공격하거나 몰아붙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 변호사는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인권위원장, 조선대 총장,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고문을 지냈고, 최근까지는 법무법인 덕수의 대표변호사로 활동했다. 오랫동안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단 한 번도 자동차를 가져본 적도 없을 정도로 검소하게 생활했다.
2010년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 진도 7.0 강진 50만 명 사망 이재민 180만 명
2010년 린튼 목사 별세
2010년 1월 11일 한국에서 4대에 걸쳐 선교와 봉사활동을 해온 미국 선교사 린튼 가문의 드와이트 린튼(한국명 인도아·83) 목사가 미국 애틀랜타에서 교통사고로 별세했다.
린튼 목사는 구한말 호남지방에서 근대 교육과 의료선교 활동을 펼친 유진 벨(1868~1925) 선교사의 외손자이다. 유진 벨의 선교사업은 사위인 윌리엄 린튼(1891~1960)과 그의 자녀, 손자녀로 이어졌다.
드와이트 린튼 목사는 1927년 전주에서 태어나 미국 컬럼비아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한 후 1952년 선교사로 한국에 돌아와 25년간 머물며 호남신학대 학장을 지냈다. 은퇴 후에도 미국 전역의 한인교회를 순회하며 목회 활동을 했고, 1992년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평양 방문 때는 통역으로 동행했다.
2009년 영화 감독 문여송씨 별세
영화 '진짜진짜 좋아해(1977)'를 연출했던 문여송(77) 감독이 2009년 1월 11일 오후 9시 지병으로 별세했다. 문 감독은 1932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일본 도쿄대 예술학부를 졸업한 뒤 1966년 고은아와 남궁원이 주연한 반공영화 '간첩작전'으로 데뷔했다.
1976년 ‘진짜진짜 잊지마’를 히트시키며 흥행 감독으로 떠오른 그는 이후 ‘정말 꿈이 있다고’와 ‘진짜진짜 미안해’를 비롯해 ‘진짜진짜 좋아해’(1977), ‘아무도 모를꺼야’(1977), ‘우리들의 고교시대’(1978) 등을 잇따라 흥행시키며 1970년대 후반 하이틴 영화 붐을 이끌었다.
문 감독은 김응천 감독, 석래명 감독과 함께 당시 하이틴 영화를 이끄는 ‘삼두마차’로 불리기도 했다.
1980년대에도 활발하게 활동했던 문 감독은 1992년 ‘비황’을 끝으로 연출 활동을 마감했다.
2009년 현대 제네시스 북미 올해의 차에 선정
현대기아차 연구개발총괄본부 이현순 부회장과 현대차미국법인(HMA) 존 크라프칙 사장 대행. 현대자동차의 제네시스가 북미지역 ‘올해의 차’에 선정됐다. 자동차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50여종의 차량을 제치고 당당히 ‘최고의 차’로 꼽힌 것이다.
올해로 16회를 맞이한 ‘북미 올해의 차’는 그 동안 미국 자동차 메이커가 8번, 유럽 자동차 메이커가 4번, 일본 자동차 메이커가 3번 선정됐다.
그동안 아시아 자동차 회사로서는 닛산 알티마(2002년), 도요타 프리우스(2004년), 혼다 시빅(2006년) 등 일본 자동차 업체가 중소형차로 3차례 수상했다. 아시아 메이커의 대형차가 ‘북미 올해의 차’에 선정된 것은 현대차 제네시스가 처음이다.
제네시스는 올해 북미에 출시된 50개 이상 신차들의 디자인, 안전도, 핸들링, 주행 만족도 등 종합적인 평가를 거쳐 1위의 영예를 안았다. 제네시스는 포드 플렉스(Flex), 폭스바겐 제타(Jetta) TDI와 함께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최종 평가는 미국 및 캐나다 유력 매체의 기자단 및 자동차 전문가 등 50명의 심사위원에 의해 이뤄졌다.
이에 앞서 제네시스는 작년 10월 ‘캐나다 자동차 기자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차’ 평가에서 럭셔리 부문 최고 신차에 선정됐다. 또 작년 12월에는 제네시스에 장착되는 타우엔진(4.6리터)이 미국 자동차 전문미디어 워즈오토(Wardsauto)가 선정하는 2009 10대 엔진에 올랐다.
2008년 에베레스트 처음 오른(1953년) 뉴질랜드 탐험가 에드문드 힐러리 세상 떠남
2004년 영국 여성 탐험가 피오나 손윌, 역대 최단시간인 42일 만에 남극 도보 정복 성공
BBC 인터넷판은 2004년 1월11일(현지 시각) “영국의 한 여성 탐험가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은 채 42일 만에 걸어서 남극점까지 도달하는 기록을 세웠다.” 고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올해 37세인 피오나 손윌은 지난해 11월 30일 남극 대륙의 허큘리스 해안을 출발, 지난 10일 남극점까지 1127㎞의 거리를 도보로 주파했다. 종전 최단 기록은 44일이었다.
손윌은 음식·연료·장비가 실린 129㎏의 썰매를 끌고 체감 온도가 영하 50도에 이르는 맞바람을 뚫으며 하루 평균 약 25㎞씩 전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윌은 지난 2001년에도 ‘걸어서 양극(북극과 남극)에 도달한 최초의 영국 여성’ 으로 기록된 바 있다.
2001년 일레인 차오, 미국 노동장관에 지명 - 화교출신 첫 각료이며 아시아계 여성출신의 첫 각료
화교 출신인 일레인 차오(47·여)가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 의해 2001년 1월 11일 미국 노동장관에 지명됐다. 차오는 화교 출신 첫 각료, 아시아계 여성출신 첫 각료의 기록을 세우게 됐다. 남편이 미치 매코넬 공화당 상원의원이어서 의회 인준도 무난히 통과됐다.
중국명이 자오샤오란인 차오는 1953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출생한 뒤 8살 때 어머니·여동생과 함께 뉴욕으로 건너왔다. 아버지는 3년 앞서 미국에 건너와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첫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는 가족들 생계를 위해 하루 3가지 일을 해야 했다. 차오 또한 영어를 한마디도 못해 학교 칠판에 적힌 문장을 모조리 베끼는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 했다. 아버지는 매일 저녁 딸의 학과 공부를 번역, 그날 그날 배운 것을 주지시켰다. 각고의 노력 끝에 차오는 1979년 하버드대에서 MBA를 획득한 뒤 한동안 은행회계사로 근무했다.
그는 1989년 부시 대통령의 눈에 띄어 교통부 부장관에 발탁됐고 1991년 평화봉사단 단장을 맡았다. 이어 1992년~96년 미국 최대의 국립 자선단체인 `유나이티드 웨이 오브 아메리카` 회장을 지내며 다양한 경력을 쌓아나갔다. 그가 미국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2000년 7월 공화당 전국대회. 정확한 수치와 근거를 인용, 명연설을 함으로써 아시아계라고 무시하던 당원들을 무색케 했다.
1997년 ‘아리랑’의 작가 님 웨일즈 사망
한국인 독립혁명가 김산의 전기 ‘아리랑’을 지은 언론인 겸 작가 헬렌 포스터 스노가 1997년 1월 11일 89살로 미국에서 사망했다. ‘님 웨일즈’라는 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진 스노는 23세 때인 지난 1931년 상하이 주재 미국 영사관에 자리를 얻어 중국에 건너갔으며 당시 중국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에 대한 저술 ‘중국의 붉은 별’로 유명한 에드가 스노를 만나 결혼했다.
1937년 초여름. 님 웨일즈는 연안의 한 도서관에서 김산(본명 장지락)이라는 한 조선인 혁명가를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고통과 좌절, 정열과 희망, 그리고 모험과 투쟁으로 가득찬 이상주의적 혁명가의 모습에서 인간미를 느끼고 그의 인생역정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그녀는 남루한 방에서 그와 대좌, 개인사를 듣고 적는다. 2년 뒤 필리핀에서 그녀는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은 ‘아리랑’ 집필에 전념, 결실을 맺는다.
님 웨일즈는 이 책에서 공산혁명가로서 피어린 삶을 살아오면서도 파괴되지 않은 고결한 인간성을 간직한 김산의 내면세계를 생생하게 그려냈다. 김산의 어린시절에서부터 동경유학시절,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변에서 활동하던 급진주의자들과 접촉하면서 사상적으로 변신하게 되는 과정, 중국공산당원으로 맹활약한 이야기가 일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님 웨일즈는 남편 에드가 스노우와 함께 1930∼40년대 중국을 누비며 마오쩌둥의 대장정에 참가하는 등 중국과 동아시아통으로 통했던 여성 행동가였다. 그녀는 이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 후보에 두번 오르기도 했다. ‘붉은 중국의 내부’ ‘중국 노동운동’ ‘아리랑’ ‘홍진’ ‘나의 연안일기’ ‘중국에 바친 청춘’ 등은 그녀의 손꼽히는 저서들이다.
1996년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제82대 총리에 피선
하시모토 류타로가 1996년 1월 11일 제82대 일본 총리로 선출됐다. 여론조사에서 언제나 톱을 달리는 대중적인 인기와 후생-운수-대장-통상성 등 4개 부처 장관을 역임한 실력, 현직 자민당 총재 등이 주요 선출 배경이 됐다. 하시모토는 전형적인 2세 정치인이었다.
부친이 1963년 급사하자 아버지 선거구를 이어 26세의 최연소 중의원에 당선됐다. 하시모토를 아는 사람은 그를 멋쟁이라고 얘기한다. 대학생때는 영화배우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1990년에는 베스트 드레서로 선정될 정도로 패션감각도 뛰어났다. 국회 회기 중 모교 게이오대 검도 합숙에 참가하는 열정을 지닌 공인 검도4단에 사진촬영 솜씨도 프로급실력이었다.
1994년 허영호 씨 등 한국남극점 탐험대 한국인 최초로 남극점 정복
1992년 제주 해양경찰서 불법 조업한 중국어선 4척 나포
1990년 중국 천안문 사태 계엄령 해제
1990년 공안당국, 재야단체가 발행한 노동서적 수사
공안당국은 1990년 1월 11일 재야 노동단체 등에서 발행하는 노동운동 관련서적들이 노동자들을 자극시켜 불법노사분규를 조장할 위험성이 크다고 보고, 이들 서적들에 대한 일제수사를 시작했다.
당국이 단속대상으로 분류한 노동서적은 월간 노동해방문학을 비롯한 7~8종으로, 노동해방문학 1989년 4월호(창간호) - 12월호, 노동문학사에서 발행한 단행본인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저자 박노해) 등이다.
이들과 함께 잡지와 책자 5만여권과 편집원고 노동관련단체 주소록 일체를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 받아 압수했다. 이에 따라 노동해방문학 발행인 김사인씨(도서출판 노동문학사 대표)도 국가보안법(이적표현물제작 등) 위반혐의로 검거됐다.
1989년 파리 국제화학무기회의, 화학무기금지선언문채택
1983년 나카소네 일본 수상 방한 한일 첫 공식정상회담 열림
1983년 대구에서 『발해유구2국연표』 원본 발견됨
1982년 한국전력공사 발족
1982년 한국산업기술연구원 개원
1982년 미국, 대만에 최신무기제공 거부
1978년 소련 첫 우주 3중도킹 성공. 2인승 유인우주선 소유즈 27호와 살류트 6호 3중 도킹
1977년 최고 대장경인본 어제비장전권 6 발견
1973년 신민당 전 국회의원 조윤형,김상현,조연하 뇌물수수혐의로 구속
1966년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사망
1965년 정일권 국무총리-우노 소스케(고노 이치로 일본 자민당 부총재의 밀사) 독도 밀약
“해결하지 않는 것을 해결한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조약(한일협정)엔 언급하지 않는다”며 독도문제 해결 사실상 유보, 210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으로 이 밀약이 깨짐에 따라 일본이 교과서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기술, 한일관계 악화
1965년 사병 복무연한 2년 10개월에서 2년 6개월로 단축
1964년 인도, 힌두교도와 회교도간에 폭동 발생. 60명 사망
1961년 IPI 한국위원회 발족
1960년 제1회 국제우주회의 프랑스 니스에서 개막
1959년 브라질 여객기 추락, 36명 사망
1958년 전국언론인대회, 언론제한반대성명 발표
1957년 관훈클럽 결성
언론 연구와 친목을 목적으로 한 중견 언론인의 모임인 관훈클럽이 1957년 1월 11일 창립됐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언론단체인 관훈클럽은 그동안 언론의 지위향상과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기 위한 활동을 주로 벌여왔다. 언론개혁의 주체를 자임, 신문윤리강령의 채택, 신문의 날 탄생, 신문편집인협회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77년부터 뉴스의 초점이 되는 국내외 각계인사들을 초청하여 공개 토론회 및 오찬회, 조찬회를 열었다. 특히 1987년 대통령선거때부터 대통령 후보들을 초청하여 토론회를 개최함으로써 일반 국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관훈언론상과 최병우 기자 기념 국제보도상을 만들어 언론발전에 뛰어난 언론인에게 시상하고, 계간 ‘관훈저널’ 과 격월간 ‘관훈통신’ 을 발간하고 있다. 1977년 재단법인 신영연구기금을 부설하여 연구저술비와 언론인의 해외연수를 지원해 오고 있다.
1953년 소련, 이스라엘과 단교
1952년 유엔, 미국ㆍ영국ㆍ프랑스 3국이 제안한 13개국 군축위원회 설치안 가결
1951년 한국전쟁 중 거창 양민학살사건 일어남
1947년 유엔총회 남북한 총선거 결의
1946년 알바니아인민공화국 수립
1929년 로마교황청을 바티칸제국으로 개칭
1928년 영국 작가 토마스 하디 사망
1926년 장작림, 중국 동부3성에서 독립선언
1914년 호남선(대전·목포 간) 완공
시작은 프랑스의 휘브릴사(社)였다. 1896년 서울에서 의주까지의 철도 부설권을 따냈다. 그리고는 9월 서울에서 목포까지 내달릴 '경목선' 부설권을 요구해 왔다. 하지만 이 철도는 조선의 곡창지대인 논산평야와 호남평야를 관통하는 알토란 같은 노선이었고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한다. 그런데 경부선을 따낸 일본도 이 노선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경목선 만큼은 우리 힘으로 깔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였다. 마침내 2년 뒤 직접 부설할 것을 결정하고 경목철도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하지만 넉넉지 않은 자금 사정으로 1904년 6월 부설권을 민간업자에게 넘겨야 했고 철도 이름도 경목철도에서 호남철도로 바뀌었다. ‘호남(湖南)’에서 ‘호(湖)’는 금강의 옛 이름인 ‘호강(湖江)’을 가리킨 데서 유래한다.
민간에게 넘어간 뒤에도 부설권은 한국인들로 이뤄진 '호남철도 주식회사'가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실제 공사에 들어갔지만, '국방상 중대한 기능을 하는 철로 건설을 개인에게 불하함은 곤란'하다는 일본의 개입으로 좌절하고 만다. 이제 철도의 완성은 일본의 몫이었다. 일본은 호남선을 시급히 완성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한국 최고의 곡창지대에서 나오는 쌀이었다.
3년8개월 동안 구간 별로 시차를 두고 개통해온 대전ㆍ목포간 철도 노선이 1914년 1월11일 전북 정읍과 광주 송정리를 잇는 9번째 철도구간이 마지막으로 완공됨으로써 ‘호남선’ 이라는 이름아래 하나로 이어졌다. 경부ㆍ경의선이 정치ㆍ군사적인 목적으로 부설된 것과 달리 호남선은 이곳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농수산물을 타지역으로 연결해주는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부설됐다.
호남선은 처음부터 한국인 스스로가 추진했다는 점에서 다른 철도와 차별성을 가졌지만, 일본 통감부는 이마저도 일방적으로 12만9000원을 주고 부설권을 빼앗았다. 더구나 통감부가 호남선 착공을 뒤로하고 경원선(용산ㆍ원산)을 먼저 착공하려하자 화가 난 목포지역 실업가들이 ‘호남철도 급설(急設)운동’ 을 벌이며 조기착공을 건의, 통감부가 당초의 결정을 뒤엎고 동시착공(1910년 5월)하도록 성사시켰다. 시작은 같았지만 경원선은 호남선보다 8개월이나 늦은 1914년 8월에야 개통됐다.
1909년 미국과 캐나다 국경 결정
1908년 소설가 김유정 출생
1907년 프랑스 정치인 피에르 망데스프랑스 출생
1904년 일본과 포경기지, 장전포, 진포도,울산포 조차조약 조인
1903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작가 페이턴 출생
1901년 최초의 여자비행사‧최초의 여성출판인‧독립운동가 권기옥 태어남
1895년 전자 키보드 발명자 해먼드 출생
1895(조선 고종 32) 관원의 복제 개정
1881년 홍영식, 어윤중 등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
1872년 미국의 발명가 조지 워싱턴 피어스 출생
1851년 홍수전, 태평천국 수립 선언
홍수전이 1851년 1월 11일 중국 광서성에서 종교조직 `배상제회`를 중심으로 태평천국 수립을 선언했다. 배상제회는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과 유교의 천명(天命)관 등을 결합하고 토지균분과 같은 초기 공산주의 사상까지 가미하여, 수탈과 억압에 지친 중국 민중들 사이에 깊숙이 파고들었던 종교조직이었다.
태평천국은 농민반란인 태평천국의 난으로까지 이어졌다. 태평천국의 난은 아편전쟁 10년 후 불평등조약을 앞세운 서구 열강의 침략과 상품경제의 유입, 그에 따른 전통수공업의 붕괴와 농촌실업자의 양산, 그리고 지배세력인 청 왕조의 무능과 관료집단의 극악한 부패 등이 원인이었다. 홍수전은 만주족의 청나라를 무너뜨리기 위해 한족과의 통일전선 구축을 시도했으나 한족은 호응하지 않았다. 태평천국 선언으로 이들의 영향력은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 18개성 600여개 도시를 14년간 진동시켰다.
홍수전의 조카 홍인간은 한때 중앙집권 강화, 서양기술과 문물의 도입, 서구열강과의 우호적 외교와 교역관계 증진 등을 시도하기도 했다. 태평천국 운동은 200만이나 참여할 정도의 대규모 농민봉기였지만 지도층의 내분과 열강의 간섭으로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운동의 실패는 청의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태평천국이 일으킨 농민의 광범위한 투쟁은 근대 중국에 있어서 농민혁명의 출발점이 되었고 손문 등 동맹회의 혁명운동으로 이어졌다. 또 태평천국이 수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특히 그 말기에 보여준 대외저항은 영국 등 열강에게 강한 인상을 주어, 중국의 완전 식민지화를 저지하는 요인이 되었다.
1842년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 출생
1841년 중부 베트남의 황제(1820~41) 민 망 사망
1825년 미국의 작가 바야드 테일러 출생
1815년 캐나다 초대 총리 존 맥도널드 출생
1693년 이탈리아 카타니아에 지진, 6만여명 사망
1683년 시칠리아 에트나 화산 폭발로 6만여명 사망
1417년 하륜등 태조실록 완성
1388(고8려 우왕 14) 최영 문하시중이 됨
632년 이슬람교 창시자 마호메트 신도들 이끌고 고향 메카로 돌아옴
여섯 살 때 고아가 됨, 40대이던 610년 무렵 알라 신의 계시 받고 이슬람경전 『코란』 지어 포교활동 시작, 신도가 많아져 박해를 받자 622년 신도들과 함께 메디나로 탈출, 그곳에서 이슬람 교단의 예언자인 동시에 정치적 지배자로서의 지위 굳힘
평화적으로 메카에 돌아온 마호메트는 이슬람교도는 자유로이 메카를 순례해도 좋다는 것과 마호메트를 메카의 지배자로 인정하는 조약 맺음으로써 이슬람교로 아랍을 통일하는 기초 다짐
532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대규모 폭동 니카반란 발발
532년 1월 11일, 전차경기를 관람하던 관중들이 동로마 황제 유스티아누스를 향해 "니카!(이겨라!) 니카!(이겨라!)"를 외치며 야유했다. 이후 성난 군중들이 시가지를 파괴하고 죄수를 풀어주는 등 일주일 동안 계속된 니카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황제는 옛 로마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로마법대전을 편찬하고 성소피아성당을 건설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지나친 통제와 기득권 축소로 빈부층을 가리지 않는 반발을 일으켰다. 더구나 사회계급과 종교에 따라 갈린 청색당과 녹색당 두 파벌은 사회불안요소로까지 발전해 있었다.
원래 전차 경기에 출전한 두 팀의 옷색깔에서 기원한 이들 파벌은 어느덧 정치정당처럼 군림했고 심지어 자체 군대를 조직하기까지 했다. 청색당의 주요 지지층은 대지주와 옛 그리스 로마 귀족이었고 녹색당의 주요 지지층은 상인과 기술자 등이었다. 니카는 원래 전차경기에서 상대방을 향해 지르는 고함이었다.
반란을 일으킨 폭도들이 황제의 조카를 황제로 옹립하자 황제는 도망치려 했지만 2명의 유능한 장군이 경기장 안에 있는 3만 명의 군중들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사태는 진정됐다. 오늘날의 성소피아성당은 이때 파괴된 건물을 5년 10개월 만에 새롭게 복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