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으로 돌아간 ‘흙의 작가’>
흙의 작가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갔다.
소설가 이문구씨가 25일 오후 위암으로 40여일째 입원중이던 서울 백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62세. 우리 문단에서 농촌소설의 전범을 보여준 작가로 평가를 받은 그는 ‘관촌수필’ ‘우리동네’ 등 대표작을 통해 농촌의 원형과 산업화에 따른 해체과정을 특유의 유장한 호흡, 해학적 문체로 그려냈다.
충남 보령군 대천읍 관촌리가 고향인 그는 6·25때 좌익활동을 했던 아버지와 형을 잃고, “모진 광풍이 몰아치는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남으려면 남의 눈에 띄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어머니마저 15세때 여읜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그는 1961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김동리·서정주로부터 문학을 배웠다. 이때 동기동창으로 40여년간 우정을 나눠온 이가 소설가 박상륭과 한승원이다.
친구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전 캐나다에서 귀국한 박상륭씨는 “군자이자 대인, 말수가 적고 대범한 사람”이라고 고인을 회고했다. “나와 마신 술 때문에 건강을 해친 것 같아 미안하다”는 그는 “학창시절 김동리 선생이 편애라고 느낄 만큼 고인을 아꼈다”고 말했다.
작가 이문구는 월간 ‘현대문학’에 단편소설 ‘다갈라 불망비’와 ‘백결’이 ‘현대문학’에 추천돼 66년 문단에 나왔는데 당시 김동리는 추천사에서 “한국문단은 가장 이채로운 스타일리스트를 얻게 되었다”고 극찬했다. 올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를 맡았던 고인은 심사 도중 “만해 한용운이 도반과 나누는 대화를 발치에서 듣고 동리가 ‘등신불’을 구상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스승으로부터 문체에 대한 격려를 받고 그쪽으로 노력했다”는 그의 작품은 흔히 ‘충청도 사투리가 중심이 된 우리말의 보고’로 불린다. 국어사전에서조차 찾을 수 없는 6,000여단어로 구성된 ‘이문구 소설어사전’이 나올 정도였다. 흙·자연·농촌·농민·이농·농촌 언저리의 삶에 대한 문학적 탐구를 계속하면서 ‘관촌수필’ ‘우리동네’ 외에 소설 ‘백면서생’ ‘장한몽’ ‘매월당 김시습’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산문 ‘지금은 꽃이 아니어도 좋다’ ‘소리나는 쪽으로 돌아보다’, 동시 ‘개구쟁이 산복이’ 등을 썼다.
그는 74년 자유실천문인협회 창립을 주도하고 84~87년 ‘실천문학’ 발행인을 맡았으며 위암수술 직전까지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시대가 바뀌었으니 문인들은 성명내고 시위하는 대신 서재로 돌아가라”고 촉구했으며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 미당 서정주의 빈소에 다녀온 뒤 “친일은 친일이고 스승은 스승”이라고 말했다.
부인 임경애씨(50)는 “평생 글욕심밖에 없는 양반이었다”고 회고했다. 투병중에도 지난해말부터 두달간 쓴 동시 66편이 곧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올 예정이다. 고인은 자신의 책을 98년부터 재직했던 경기대와 보령시립도서관에 기증하고, 반드시 화장해서 어릴 적 뛰어놀던 고향 관촌의 부엉재 소나무 아래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영안실에는 하루종일 고인의 인품과 작품세계를 존경했던 친지, 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장례는 문인장으로 치러지며 28일 오전 8시 발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영결식을 한 뒤 벽제 화장장을 거쳐 관촌으로 향한다. 산복(26)·자숙(25) 등 1남1녀가 있다. (02)760-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