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는 길....
육교를 건너 북부역으로 건너옵니다.
제가 현재 사는 곳은 북부역 쪽...
어린 시절 살던 곳은 남부역 쪽이었습니다.
지금 교회탑이 높이 솟아 있는 곳 쯤이
그 당시 가장 번화했던 나까마찌 거리였을 겁니다. 아마도....
중산층 사람들과 피난민 하꼬방 촌이 함께 어우러져 살았던 부평역 남쪽...
하꼬방에서 탈출하여
아버지가 직접 지으신 작은 기와집으로 이사오던 날....
저는 작은 이삿짐을 들고 이 육교를 건넜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기차가 서 있는 상태에서 기차 밑을 기어 길을 건넜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요. 그렇게해서 생긴 것이 바로 이 육교랍니다.)
희망에 부풀어서....
새집은 공동화장실이 아니고, 우리 가족만의 화장실도 있었고
작은 뜰도 있었고
편히 누워 쉴 수 있는 마루도 있었거든요.
무려 44년전의 일입니다.
육교는 거의 그때 그 모습입니다.
요즘엔 지하로 길이 죄다 뚫려서 자주 사용하지는 않는 듯하네요.
예전에 다녔던 학교에 근무하면서
자주 옛추억에 빠집니다.
그러면....
가슴이 설레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고....
하여튼 기분이 요상합니다.^^
<아래 글은 2008년 월간 신문 '부평사람들'에 연재했던 글 중 첫 번째입니다>
월간신문 '부평사람들'에 '동화작가가 들려주는 부평 스케치'를 연재하게 되었어요.
태어나 자란 부평이니 얼마나 할말이 많겠어요?
하지만 너무나 변해버려, 추억의 장소를 찾아내긴 참으로 어렵더군요.
그래도 기억을 되살려 한 장 한 장 부평의 옛모습을 그려보렵니다.
부평여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인일여고에 진학했을 때 우리 반 아이들은 내가 부평에서 왔다고 하니까 ‘부평’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부평이 어디 있지?’하는 표정과 ‘부평은 촌동네야.’하는 표정으로 나뉘었다. 그랬다. 정말 그랬다. 그때 부평은 인천의 한 변두리, 시골 촌동네였다. 집과 도로보다는 질척질척한 논과 밭이 더 많았던 부평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사람들로 들끓는 거대한 도시가 되었다.
부평역에 가 보라. 오고가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고, 역 지하상가마다 물건들이 넘쳐나고, 우뚝우뚝 높은 건물들이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다. 하지만 지금의 번화한 부평보다 옛날의 그 촌스럽던 부평이 그리운 건 왜일까?
강원도 철원 깊은 산골에 사시던 아버지와 역시 강원도 첩첩 산중 김화에 사시던 어머니가 부평으로 흘러 들어온 건, 그 분들의 고향이 다시는 가 볼 수 없는 땅이 되어서였다. 처음 우리 가족이 터를 잡았던 곳은 부평동 760번지, 삼릉이다. 옛날에는 가정환경조사서나 기타 서류에 꼭 본적이라는 것을 써넣어야 했다. 우리 형제들의 본적은 ‘부평동 760번지’이다.
부평동 760번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하꼬방이다. 요즘 국어순화 차원에서 하꼬방이 일본말이라며 판잣집이라고 바꿔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살던 그 집을 판잣집이라고 부르면 전혀 느낌이 다르다.
피난민들이 모여 살던 하꼬방은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집이 10가구 정도 줄줄이 붙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땅보다 깊은 부엌이 나오고, 자그마한 쪽마루와 연결해 두 개의 방이 있었다. 그 좁은 방에서 여섯 식구가 살았다.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지만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공동 수도를 써야 했고, 공동변소를 사용해야 했다.
어머니가 아침마다 물 길러 공동 수돗가로 나갈 때면 우리 형제들도 쪼르르 쫓아나갔다. 두 오빠는 무거운 물동이를 들기 위해서였고, 나와 여동생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어제 해가 질 때까지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놀았건만, 무엇이 아쉬워 아침 세수도 안 한 채 수돗가로 달려 나갔던 것일까?
어머니들은 쌀을 씻고, 반찬거리를 다듬으며 수런수런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들은 그 옆에서 괜스레 키득키득 웃어대곤 했었다.
나는 ‘나까마치’에 가는 걸 참 좋아했다. 나까마치는 피난민이 아닌 사람들이 살던 동네 골목 이름이다. 그곳은 우리가 사는 곳과는 아주 달랐다. 어린 내 눈에 제법 번화하게 보였다. 구경거리도 참 많았다. 이발소, 쌀집, 구멍가게, 사진관, 솜틀집 등. 그 골목에는 온갖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피난민들이 살던 하꼬방 동네와는 많이 달랐다. 우리가 살던 바로 옆에는 밤동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었는데 이름과는 달리 밤나무는 한 그루도 없었다. 봄이면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뿌옇게 송홧가루가 날렸다.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곳이 그립다. 그곳이 보고 싶다. 그래서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 보지만, 추억의 작은 부스러기 하나 건질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은 세월과 함께 변해 버렸다.
철도 바로 옆에 있던 군수품 부대는 지금 부평 사람들이 좋아하는 '부평공원' 이 되었고 부평사람들에게 인기 좋았던 대한극장은 여전히 그 자리에 그 이름으로 남아있다. 아주 오랫동안 세력을 누리던 미군부대도 떠났다.
와글와글 복닥복닥, 좁은 방에서 지냈던 그 시절이 행복했던 건 아마도 어려워서일 것이리라. 조금만 먹을 게 생겨도 나눠먹고, 살을 맞대고 한 이불 속에서 자고, 그러면서 우리는 피붙이의 정을 배웠던 것 같다. 넓은 방에, 기름진 음식에, 풍성한 물건에, 좋은 옷이 넘쳐나도 그때만큼 행복하지 않은 건, 나뿐일까? 오늘도 나는 옛 부평이 그리워, 이 골목 저 골목 헤매고 있다.
첫댓글 하꼬방! 그렇군요~~ 일본말이라도 어감상 살릴 말은 살려서 써야지요~~
이 글을 썼을 때, 한 원로작가분이 메일을 보내, 하꼬방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게 좋다고 충고를 하셨지만...저에게 하꼬방은 그냥 하꼬방입니다. 다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집....
어려워서 행복했다기보다 어려서 행복했던 게 아닐까요? 내가 책임지고 헤쳐나가는 어려움이 아니라 엄마 아빠에게 기대도 되는 때잖아요.
저는 어렸을 때 골목에서 남자애들이랑 어울려 축구하고 놀던 것만 기억납니다. ㅎㅎ
지금의 풍요로움 속에서 지난 시절을 떠올리면 모든 게 행복...그 자체입니다. 그때는 어려움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요. 지금이야 비교할 수 있지만...
어려서, 어려워서...그냥 행복했던 시절...
애들을 키우며 그런 생각은 해요. 아쉬움이 없는 게 좋은 게 아니구나, 귀한 것이 무언지 느끼기 힘들겠구나...
이러면서 세대차가 생기는 거겠죠? ㅎ
얼굴 하얀 애가 골목을 누비며 얼굴 까만 남자애들과 축구를 하는 장면...생각만 해도 웃음이...
어어 저 이래뵈두 아저씨들이 지나가며 그랬어요. 여자펠레네!
그 당시엔 축구선수중 펠레가 최고였거든요. ㅎ
예, 펠레 하면 축구, 축구하면 펠레였지요.
산초샘은 어렸을때부터 축구 좋아하셨구나. 44년전이면 전 태어나기 전이라는.ㅋㅋ
갑자기 막 깔보게 된다는... ㅋㅋ
부럽당^^ 젊음이...
와! 같은 세대인데 더 오래된 역사를 읽는 것 같아요. 문학의 자산이 되는 시간들이네요. 전 초등학교 시절 많이 아파서 늘 집에 있었는데...
아, 그러셨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