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추자면 대서리 4-9번지
1926년 5월 추자도어업조합의 횡포에 맞서 제주도 추자면 묵리와 예초리 어민들이 항쟁했던 곳이다. 일제는 어업의 근대화를 구실로 1912년 어업령을 제정하여 주요 지역별로 어업조합을 설립하도록 한 다음 조선어업을 통제하려 했다.
1919년 3월에 설립된 추자도어업조합은 어업계 형태로 공동노동과 판매를 하고 있었다. 1920년에는 고기잡이 기구를 구입한다는 명목 하에 어업조합 명의로 조선식산은행 제주지점에서 8,000원의 거액을 차입했으며 이 돈의 일부를 당시 추자면장이 횡령하여 어업조합에 큰 피해를 주었다.
1922년에 어업조합보조규칙이 만들어지면서 추자도어업조합은 관료적 통제를 받으며 점차 어용단체화되어 갔다. 이에 따라 조합장·이사·서기들은 조합의 권력을 남용해 소금을 싸게 매입한 다음 조합원들에게 비싸게 팔거나 어획물을 낮은 시세로 공동판매하여 어민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추자도어업조합의 횡포는 1926년 5월 14일 발생한 추자도 어민항쟁의 원인을 제공했다.
이 때의 추자도 어민항쟁은 어업조합장 김상진(金相鎭)과 이사 황석희(黃錫熙)의 부정이 원인이 되었다. 조합장 김상진이 하추자(묵리)에서 천초를 강제수매하자 하추자 주민은 항쟁으로 대항했다.
이에 대해 추자도명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어업조합은 西紀1919年 己未에 設立이 되었으나 韓日合倂前 西紀 1910年 庚戌에 莞島人 尹亨彦과 海南人 朴民孝가 當時 鹽辛盆子(멸젓동우) 製造業主로 本島에 供給하는 錢主로서 每年 盆子代金이 未受만 늘어나니 이것을 調節하고 各處 小商人의 동우 供給을 막고 鹽辛(멸젓) 自由出荷를 統制할 目的으로 위 兩人 主動으로 漁船主들과 合意 끝에 初代理事代行事務를 尹亨彦에게 委任하고 海南․靈岩․康津․珍島 各地方에서 入荷되는 盆子(동우)·鹽(소금)·明松(관솔뿌리) 등을 均等配定하여 供給하다가, 西紀1914年 甲寅에 濟州島政이 始作되면서 面과 分立되어 各處 商人들의 自由賣買를 統制키로 初代 組合長에 永興里 金相振으로 2代 理事職을 日人 下村孝之에게 任하였다.(當時 組合長兼面長 金承培) 西紀1919年 己未 3月에 正式으로 認可가 되어 2代 組合長 金相振으로, 3代 理事 日人 礪本이 任命되어 共同販賣制가 實施되었는데 漁民들의 認識不足으로 反撥이 漸高하여 結局 下島 住民이 先發的으로 民亂을 일으켰는데, 理由인 즉 古來로 陸地部 商人들과 특히 木浦 李黙珩 外 數十 物産 客主와 去來가 끊기면 우리 島民은 다 굶어죽게 된다는 口設(口舌)로 下島 洞民 全體가 蹶起하여 騷擾가 일어나서 組合長이 變服을 하고 後浦로 逃避하여 九死一生으로 亂을 避하고 當時 駐在所部長 田中의 說得으로 鎭壓되고, 主謀者 金鐘萬(黙里) 李伊準(新陽) 2名이 濟州警察署로 押送되어 懲役3年씩으로 始末되어 所謂 金相振亂이라 傳해지고 있다.〉
특히 김종만(金鐘萬)을 중심으로 묵리와 예초리 주민 700여 명이 추자도어업조합을 찾아가‘공동판매금지하라, 조합장을 몰아내자’고 외치며 어업조합의 비리와 공동판매에 반대하는 집단항쟁을 벌였다. 그 결과 이 항쟁은 목포에서 급파된 일제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항쟁 이후 추자도 어부들이 스스로 추자도어부단(楸子島漁夫團)을 조직해 어업조합에 대항했다.
그 후에도 〈西紀1934年 甲戌에 巨富 島人 元春常 理事가 就任하고 書記 金炳辰․朴種來가 任하여 同年 12月 孤島(관탈) 釣부리漁場에 林兼會社(當時 組合指定買受人)가 小取船으로 每日 沖買를 할 때 去皮量을 속여 過重하게 除한 事實이 發見되어 漁民 騷擾가 일어나서 訴訟 끝에 結局 會社側에서 數年間 不當利得을 辨償措置한 事實이 있었다.〉(추자도명)
당시 항쟁지였던 추자도어업조합 터는 현재 추자수협 건물로 이용되고 있다.
《작성 2026.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