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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짐을 지라(4)
갈 6:1-10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갈 6:1-10 / [서로 짐을 져주자]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죄에 빠져 있거든 성령을 따라 사는 여러분이 부드럽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도와 바른길로 돌아오게 하십시오. 그리고 혹시 여러분 자신도 악한 길에 빠져 들지 않을까 늘 주의하십시오. 2) 서로 남의 어려움과 짐을 함께 나누어 지고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십시오. 3)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처지에 무엇이나 된 것처럼 자기를 높이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거역하는 짓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 값어치도 없는 인간입니다. 4) 각각 자기가 한 일을 살펴보십시오. 그래서 참으로 자기가 최선을 다하고 있거든 혼자만 자랑스러워할 뿐 남 앞에 드러내 놓고 자랑하지 마십시오. 5) 우리는 모두 결점과 고뇌를 짊어진 불완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6)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그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보수를 지불하고 그를 도와야 합니다. 7)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무시당하실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8) 만일 자신의 악한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악한 씨앗을 심은 셈이 되어 그 결과 죽음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좋은 것을 심는 사람은 성령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9)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하십시오. 실망도 포기도 하지 않고 꾸준히 선을 행하다 보면 복을 거두어 들일 날이 올 것입니다. 10) 기회 있을 때마다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푸십시오. 그리스도인 형제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하십시오.
< 설 교 >
무엇을 거두시렵니까?
갈 6:7-9 / 홍문수 목사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일화입니다. 그는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성공을 희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입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모습의 이면에 이런 숨겨진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21세였던 1997년 마스터스 대회에서 우승했을 때의 일입니다. 그 어린 나이에 세계 대회에서 우승했으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런데 그는 자신의 경기를 녹화한 비디오 테입을 보면서 스윙 폼에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코치에게 어떻게 고치면 되겠냐고 묻습니다. 그때 코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의 스윙 폼을 고치는 데는 3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것에 익숙해서 최고의 경기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2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2년 동안은 우승할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그 말은 들은 타이거 우즈는 고민 끝에 결단을 내립니다. 정말 2년 동안 우승은커녕 형편없는 성적으로 패배를 거듭합니다. 그는 괴로웠지만 미래를 소망하면서 고군분투합니다. 마침내 2년 후인 1999년 14번의 골프 대회에 참가해서 그 중 10번에 걸쳐 우승하는 기염을 토합니다. 그 후에도 그는 연습광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끊임없이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계속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성공 스토리를 들으면 모두들 부러워합니다.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의 성공에 주목하십니까? 아니면, 그 성공이 있기까지 수고한 것에 주목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은 성공의 결과에만 주목을 합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성공이 있기까지의 과정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남의 성공은 보면서도 그 이면의 수고는 보지 못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공짜 심리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공짜를 좋아지는지 우리 한국인은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디 한국인만 그런가요? 세계 제일의 부자인 미국인들도 공짜를 좋아합니다. 링컨 타운 카 같은 고급차를 몰고 마켓에 와서 쿠폰을 내미는 사람들을 흔히 봅니다. 그리고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공짜를 의미하는 프리(free)입니다. 이처럼 공짜 심리는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너무 공짜를 좋아하다 보면 자칫 인생을 망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공짜를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흔히 우리가 값없이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말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공짜가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구속의 은혜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자식이 유복하게 사는 것도 공짜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부모의 땀과 수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공짜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입니다. 대충 대충 넘어가지 않으십니다. 공짜를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법칙대로 자연과 인생을 섭리해 가십니다. 그러므로 그 법칙에 따라 살아갈 때 비로소 인생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법칙이 무엇입니까? 본문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법칙, 즉 공의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반드시 실패합니다. 예를 들어 공부하지 않는 학생이 대학 입시에 합격하기를 바란다면 어불성설입니다. 공부 안하고 기도한다고 붙여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 학생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노력하지 않고 사업의 성공을 바라는 사업가는 반드시 실패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기적을 바라는 크리스천도 반드시 실패합니다. 이런 심리는 한 마디로 도둑놈 심보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승리를 주시지 않습니다. 본문 7절 보십시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여기서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어리석게 스스로 속아 넘어가지 말라는 겁니다. 자기 꾀에 넘어간다는 말이 있죠. 심음과 거둠의 법칙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그것을 무시한 채 성공을 바란다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름다운 인생, 복된 인생을 소원합니까? 그러면 심음과 거둠의 법칙, 공의의 법칙에 충실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거두고 싶으면 반드시 심어야 합니다. 거두는 데 관심을 갖는 이상으로 심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좋은 것을 거두고 싶다면 먼저 좋은 것을 심어야 합니다. 콩을 거두고 싶으면 콩 심고, 팥을 거두고 싶으면 팥을 심어야 합니다. 욥4:8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악을 심으면서 좋은 것을 거두기 원한다면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많이 거두고 싶습니까? 그러면 많이 심어야 합니다. 고후9:6 “이는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물론 심는 데 비해 많이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는 합니다. 30대, 60배, 100배 ... 그러나 조금 심으면 그만큼 적을 수박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조금 심으면서 무조건 많이 거두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칙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심어야 할까요?
[1] 무엇을 심을 것인가? 성령을 위해 심으십시오.
8절 보면 두 가지로 심는 방법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것과 성령을 위해 심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체’란 몸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의 악한 본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육체를 위해 심는다는 것은 인간의 악한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오직 육신의 만족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가치만을 위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을 위해 심는 것은 성령님의 선한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이나 말, 행동 등을 성령의 뜻을 따라 선택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육체를 위해 심다가 실패한 사례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두 가지만 소개해 드립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로 하나님의 약속의 땅 가나안에 함께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볼 때 그리 매력적인 데가 아닙니다. 농사도 목축도 잘 안 되고, 세상의 재미난 향락거리도 없습니다. 결국 육신의 욕망을 따라 아브라함에게 등을 돌리고 소돔 성으로 이주합니다. 맨 처음에는 세상 재미가 있었겠죠. 그러나 그 마지막이 어떻게 됩니까? 유황불 심판의 와중에 겨우 몸만 빠져 나옵니다 아내는 뒤돌아보다 소금기둥이 됩니다. 두 딸만 겨우 나오고 사위들도 멸망당합니다. 아합 왕은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왕입니다. 명색이 왕인데, 가질 만큼 가졌을 텐데 왕궁 근처 나봇의 포도원을 탐냅니다. 말을 듣지 않는 나봇을 죽이고 강탈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도 하나님의 진노로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육체를 위해 심는 사람들의 말로가 다 이렇습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위해 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성령 하나님이 마음 속에 감동하시는 대로 선택하며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아름답게 만들어져 갑니다. 그러면 성령을 위해 심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인가요?
① 말씀을 심는 것 :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든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의식하며 그 뜻대로 선택하며 순종하면 그것이 곧 말씀을 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격과 삶에 성령의 아름다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먼저 내면적으로는 성령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갈5:22~23에 기록된 대로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 예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말씀 속에서 성령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다 보면 저절로 이런 열매들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예수님의 아름다운 향기가 풍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신28:2~6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네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말씀에 순종할 때 이런 놀라운 축복들이 연달아 나타나게 됩니다.
② 기도를 심는 것 : 기도하는 것도 성령을 위해 심는 것입니다. 기도를 심으면 하나님은 응답의 열매를 거두게 하십니다. 마7:7~8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렘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특별히 눈물의 기도를 심으면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시126: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우리가 답답한 문제를 놓고 기도를 심으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십니다. 자녀를 위한 눈물의 기도 하나님이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영혼을 위한 눈물의 기도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응답해 주십니다.
새생명축제가 다가옵니다. 영혼을 품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이 다 들으십니다. 혹시 지금까지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이번에도 버티고 있는 영혼이 있어서 괴로운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계속 기도하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이 반드시 들으실 줄로 믿습니다.
③ 헌신을 심는 것 : 물질이나 시간, 재능, 노력 등을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바치는 것이 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대로 더해 주십니다. 물질을 심으면 물질로, 시간을 심으면 평강으로, 재능을 심으면 더 큰 능력으로, 노력을 심으면 건강으로, ... 물질을 심고 헌신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풍성히 역사하시는지 예수님이 하신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눅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으리라”
그리고 복음을 전함으로 많은 영혼을 인도하는 데 헌신하면 천국의 영원한 상급을 거두게 하십니다.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그리고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충성을 다하면 하늘의 면류관으로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계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아무쪼록 우리의 살아가는 동안 늘 이런 삶으로 좋은 씨앗 삼아 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들로, 이 세상과 저 천국에서 풍성히 거두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2] 어떻게 심을 것인가? 인내하면 잘 가꾸십시오.
좋은 것으로 심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심고 가꾸느냐 역시 중요합니다. 정성을 다해 심고 인내함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농사의 특징 중 하나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는 것은 금세 여러 개가 나올 수 있지만 농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을 요합니다. 그래서 심음과 거둠의 법칙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인내가 요구됩니다. 기다리는 동안 고난이 닥쳐와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을 극복하고 인내하면 마침내 거두게 하십니다. 9절. “ ...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포기하지 않고 고난 중에도 끝까지 성령으로 좋은 것을 심으면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약5:7, 11 “그러므로 형제들아 ...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넬슨 만델라는 남아공의 최초 흑인 대통령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오랜 세월 고생한 사람입니다. 그는 흑인 인권 운동을 하다가 무기수가 되어 감옥에 들어갑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백인이나 흑인이나 동일한 인권을 갖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정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도소장에게 마당 귀퉁이에 텃밭을 가꿀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고, 매일 밭을 가꾸게 됩니다. 고추, 양파, 장미, 그리고 여러 가지 씨앗을 심고 가꿉니다. 그렇게 27년을 보낸 후 마침내 출소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겁니다. 1993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심으면 반드시 거둡니다. 그것은 하나님 정하신 철칙입니다. 그러나 당장 거둘 것으로 기대하지 마십시오. 기다려야 합니다. 때로는 도저히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거두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전11:1 보면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물 위에 식물을 던지면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날 후에 도로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가난한 의대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가난해서 자기가 쓰던 책을 고서점에 팔러 갑니다. 그런데 안 산다는 겁니다. 버리고 올 수도 없고 그 무거운 책들을 다시 가져오느라 다리도 아프고 배가 고파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어느 집 에 들러 밥을 얻어먹으려고 했습니다. 마침 어른은 없고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일하러 나가고 자기 혼자 집을 보는데 점심 대신 우유 한 병을 먹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 우유를 내놓고 대접합니다. 받기가 멋쩍었지만 하도 배가 고파서 받아 마십니다. 큰 감동을 받은 의대생은 소녀와 어머니의 이름, 그리고 주소를 메모해 두었습니다. 몇년 후 그는 의대 졸업하고 대학병원에 근무하게 됩니다. 바쁜 가운데 그 소녀를 잊고 있었는데 어느 중환자와 딸을 만나게 됩니다. 가만히 보니까 그 소녀 같았습니다. 그래서 메모해 둔 것을 찾아보니까 맞습니다. 거액의 수술비와 진료비가 나와서 모녀는 고민합니다. 그런데 청구서를 펴보니 액수 안 적혀 있고 그 대신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의 우유 한 병이 어머니 치료비 대신입니다.” 기대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기대할 수 없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역사하면 이런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때가 되매 거두리라! 바로 그겁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마치 농사짓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의 내 모습은 어제까지 심고 농사한 결과입니다. 내일의 내 모습은 오늘 내가 무엇을 심고, 어떻게 농사를 짓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지난 것은 할 수 없고, 앞으로 남은 생애 아름답고 풍성한 미래를 바라십니까? 좋은 것들을 거두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오늘 좋은 것을 심으십시오! 성령으로 심으십시오! 그리고 인내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미래는 분명 아름답고 복된 모습으로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부디 이런 인생의 법칙을 명심하고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심고 거둠의 법칙
갈 6:7-9 / 문기태 목사
엊그제 새 해가 되었다고 기대가 부풀었는데 벌써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2008년도에 거둔 가장 큰 수확은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내집 장만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원하는 학교의 입학이나 졸업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전도의 열매를 맺은 것을 꼽을 것입니다. 그외에 여러가지 꼽을 것이 있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거둔 것이 없이 아쉬운 마음으로 이 한해를 보내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는 중요한 법칙이 숨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심고 거둠의 법칙을 정하시고 그 법칙대로 역사하시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금년은 전세계에 예상치 못한 경제 한파가 불어와 다른 해와는 달리 모두들 차분한 연말을 보내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위기도 심은대로 거둔 것입니다. 은행들이 집을 담보로 잡고 지나치게 많은 금액을 경쟁적으로 대출해주다가 집값이 떨어지니까 대출금의 회수가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래서 금융부실로 이어졌습니다. 집값이 올라가니까 건설회사들은 무리하게 서로 경쟁하며 아파트를 많이 지었습니다. 결국 미분양사태가 찾아왔습니다. 건설회사들이 부도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개인들도 집에 투자하면 많은 이익이 발생하니까 너도 나도 무리하게 대출을 받고 빚을 내어 큰 집으로 옮겨가려고 하고 집을 여러채 보유하려고 하다가 이자도 갚지 못할 위험에 처하고 곤란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심은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지나친 욕심을 심고 고통을 거두었습니다. 누구를 원망하기에 앞서 내가 잘못 심은 때문이 아닌가? 돌아보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며 정하신 심고 거둠의 법칙이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만 잘 깨달아도 인생을 훨씬 잘 살수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누구나 잘 아는 것 같지만 실제는 잊고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명확하게 심고 거둠의 법칙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고 거둠의 법칙에는 첫번째로 거두려면 반드시 심어야 합니다. 두번째로 심고는 낙심하지 말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세번째는 좋은 씨를 심어야 좋은 열매를 거둡니다.
1. 거두려면 반드시 심어야 합니다(7)
봄에 씨를 뿌릴 시기에 게으름을 피우고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가을에 거둘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밭을 갈고 거름을 하고 때에 맞추어 씨앗을 뿌리면 그것이 자라서 100배 60배, 30배로 열매를 맺어 풍성한 추수를 하게 됩니다. 본문에 씨를 뿌리지 않고 열매를 거두려는 사람을 향하여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책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업신 여기지 말라.' 다시말해 하나님을 조롱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과 친한 척 하면서 억지로 하나님이 정한 법칙을 무시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심은대로 거두리라.'고 강조하십니다.
이맘때만 되면 저는 학생들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됩니다. 수능시험 결과의 발표가 있고 각 학교에 원서를 내고 합격자 발표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좋으면 저희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합격한 것이 되고 떨어지면 목사의 기도가 시원치 않아서 그렇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인지 이때를 지나가며 학생들중에 교회와 멀어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심은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 게으름을 피우고 열심히 하지 않았으면 안수기도를 받았어도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럼 왜 기도해주는 것입니까? 심은대로 거두도록 기도합니다. 실제로 부지런히 심고도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는 수도 많습니다. 실수하지 않고 차분하게 실력을 잘 발휘하도록 기도해줍니다. 그러나 기도해도 실력이 하나도 없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열심히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제발 복권이 당첨되게 해 주세요. 복권이라도 당첨되야지 아니면 살 방도가 없어요."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정말 응답이 왔습니다. "야, 복권이나 사고서 기도해라. 사지도 않은 복권을 어떻게 당청되게 해주냐?" 그렇다고 오늘부터 진짜 복권사고서 기도하는 분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운이나 요행을 바라는 것은 심지 않고 거두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심었기에 지금 거두고 있지 않습니까?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가족들을 열심히 사랑하고 가정을 부지런히 돌보았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직장에서 인정을 받고 충분한 보수를 받으며 일하는 것은 그동안 부지런히 일을 하고 최선을 다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평안하게 생활을 하고 천국을 꿈꾸며 거룩한 기쁨을 맛보는 것은 믿음을 심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기도를 심었기에 응답을 받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학생들도 그동안 열심히 공부하였기에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된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그동안 건강한 사회생활을 하는 것은 좋은 인간관계를 심었기에 관계의 성공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어떤 것을 기대하였으나 그것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필시 여러분이 씨를 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열매를 기대한다면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씨를 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심지 않고 거두려는 욕심을 버리고 차근차근 씨를 심는 수고를 감내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심고 기다려야 거두게 됩니다(9)
세상에서 씨를 뿌리고 거두는 일은 일정한 때가 되면 정확하게 거둘 수 있습니다. 60일만에도 거두기도 하고 길면 6개월을 기다려 추수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심고서 몇 년을 기다려 열매를 따는 과일나무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추수는 다릅니다. 그 때를 미리 예측할 수 없습니다. 쉽게 빠른 시간에 거두는 열매도 있지만 충분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전혀 열매를 거둘 수 없는 때가 많습니다. 특히 사람들을 사랑하는 일은 그 결과가 원하는 시간에 빨리 나타나지 않는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을 전도하는 일은 더욱 더 그렇습니다. 처음 교회 나온 새신자를 양육하는 일은 더더욱 열매가 더디게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낙심합니다. 포기합니다. 지쳐버리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연약하여 쉽게 지치는 것을 알고 격려하십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12:3)" 예수님도 심혈을 기울여 양육한 제자들이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성장하지 않는 모습에 포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개의치 않으시고 사람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묵묵히 지셨습니다.
우리는 정말 상처도 잘 받고 연약하여 절망하고 낙심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한대로 되지 않고 기대한 시간에 열매가 보이지 않으면 열정도 식어버리고 믿음도 약화됩니다. 그래서 불타던 사명도 잊어버리고 잘 하던 사역도 내던져 버리고 나 몰라라 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순간을 인내하지 못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고 금방 열매를 거두지 못해 낙심하면 방치하고 돌보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열매를 영영 볼 수 없습니다. '포기하지 아니하면'.... 새번역은 '지쳐서 넘어지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둘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여 지치고 넘어지지 않도록 끝까지 마음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여러분 왜 실망하십니까? 무엇으로 인하여 실망하십니까? 기도하고 응답이 없다고 실망하십니까? 전도했는데 반응이 없다고 실망하십니까? 고생하며 애써 헌신했는데 인정받지 못했다고 낙심하십니까? 주님께 순종하고 내가 먼저 사랑을 실천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미움과 상처뿐이라 속이 상하십니까?
그래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지쳐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 주님이 주신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러면 곧 하나님의 때가 되고 반드시 거둘 수 있습니다.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거둘 것입니다. 입이 벌어지고 다물 수 없도록 풍성하게 거둘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3년을 우울증으로 고생하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지독하게 가난했습니다. 그는 한때 기름때 찌든 작업복을 입고 기계를 고치는 직공이였습니다. 한때는 리어커를 끌고 다니며 사과를 팔았고, 다시 산동네 판자 집을 돌아다니며 양말을 팔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소박한 꿈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화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그림을 사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그림 다음으로 좋아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야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7년이나 걸쳐 글을 썼습니다. 만약 그의 책이 출간되면 절반은 가정을 돕고 절반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선한 도움을 주고 싶다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원고 뭉치를 들고 이 출판사 저 출판사를 다녔지만 그의 글을 사주는 출판사는 없었습니다. 다섯 번이나 거절을 당했지만 그는 낙심치 않았습니다. 그가 여섯 번째 찾아간 출판사에서 그의 글을 출간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렇게 해서 수많은 독자들을 울린 우리 시대 마음 따뜻한 사람들의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연탄 길'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책 연탄 길에는 그가 친히 그린 그림 31컷이 실려 있었습니다. 졸지에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화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출간된 '행복한 고물상', '곰보빵' 모두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이 철환씨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낙심하지 않은 이유를 곰보빵' 155페이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기름때 찌든 작업복을 입고 있을 때도/나는 프란츠 카프카를 읽고 있었다./아무도 사가지 않는 그림 옆에 서서 고개를 들 수 없을 때도/나는 알베르 카뮈를 읽고 있었다./도스토엡스키와 말라르메, 스타니슬라프스키와 헤르만 헤세가 있어/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계셨기에 나는 절망하지 않았다."
3. 심은대로 거두게 됩니다(8)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이 존재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다 중요합니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육체도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육을 부정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가 경계하는 것은 육체를 소중히 여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육체만 소중히 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육체를 소중히 여긴다는 것과 육체만 소중히 여긴다는 것이 어떻게 다릅니까? 사람을 육체만 존재하는 것인양 여기고 육체만을 위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육체와 함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육체를 부정하는 금욕주의적인 종교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육체를 학대해야만 영혼이 살아나는 줄로 압니다. 또한 모든 육체적 욕구를 부정하게 여깁니다. 금식을 많이 해야만 거룩한 사람이 되는 줄 압니다. 결혼도 거부하고 혼자 사는 것이 더 신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분은 쓸데 없는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육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육을 죄악시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체에도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여야만 합니다. 자신의 육체를 건강하고 훌륭하게 잘 관리 할수 있어야만 합니다.
건강하게 살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고 그것을 위하여 투자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을 사치라고 생각하여 죄악시하는 것은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보다 좋은 환경에서 살기위하여 노력하고 투자하는 일도 그런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이해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건강하게 살고 좋은 환경에서 사는 것이 잘 살고 행복하게 사는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정신에도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여야 합니다. 잘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건강한 육체를 가지는 것보다 건강한 정신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육체는 건강한데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들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는 좀 약하지만 아주 건강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가지고 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신적이 건강이 육체적인 건강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인 건강과 정신적인 생활의 아름다움을 위하여 책을 많이 읽고 묵상을 많이 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혼과 정신을 위하여 음악과 예술을 즐길 줄 아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이해하고 그것을 감상 할 줄 안다는 것, 아름다운 미술 작품을 이해하고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며 축복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으로서 참으로 잘 사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에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이 깨끗하고 건강한 사람, 영이 늘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은 건강한 육체와 아름다운 정신을 소유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살기를 원합니까? 육체의 만족을 위하여 힘쓰는 것보다 먼저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힘쓰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한 삶에 관심을 가지고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육을 위해서는 얼마나 많이 투자합니까?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물을 마시고 몸에 좋은 운동을 부지런히 하지 않습니까? 몸의 편안함을 위하여 좋은 집에 살려고 얼마나 많이 투자합니까? 우리 몸이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고급 화장품을 사서 바르지 않습니까? 값비싼 옷을 철따라 바꿔입지 않습니까? 때문에 육의 생활은 전과 비교할 수 없으리 만큼 성장하고 발전한 것이 사실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영을 위하여 너무나 게으르고 인색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을 위하여 심지 않으며 투자하지 않습니다. 겨우 주일낮 예배에만 한번 출석하는 것으로 영적인 생명을 연명해 나가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거의 발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일예배, 오후예배, 수요기도회 빠지지 말고 힘써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가능하면 새벽기도회도 참석하실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시고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날마다 성령 충만함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을 위하여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에 귀기울여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감동을 소멸치 말고 민감하게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죄를 멀리하고 거룩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반드시 심어야만 거둡니다. 심고 금방 거두지 못한다고 낙심하지 말고 때를 기다려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를 위해서만 심지 말고 성령을 위해서 심을 때 썩어지지 않는 영원한 것을 거둘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좋은 열매를 기대하고 좋은 씨앗을 열심히 뿌리기 바랍니다. 게으르지 말고 기회 지나가기 전에 부지런히 심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그리고 반드시 인내로 좋은 결실을 맺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지금은 심어야 할 때입니다
갈 6:7-9 / 조상호 목사
말씀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유머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은행 문이 열자마자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할머니가 통장 하나를 내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색시 이 통장에서 돈 좀 찾아줘!” 공손하게 일을 처리하던 사무원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통장 도장을 가져오셔야지 이 도장은 아니에.” 할머니는 잠깐만 기다리라 하고 나가신 후 퇴근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은행 셔터문이 막 내려가는데, 할머니가 들어오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색시, 반장 도장이면 안 될까? 우리 통장이 어딜 갔는지 도대체 찾을 수가 없네.”
나이가 들어갈수록 보고 듣고 이해하고 말하는 능력이 쇠퇴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나이가 들어도 마음은 항상 젊어서 무슨 일이든 할 것 같습니다만, 세월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마음으로는 100미터를 칼 루이스처럼 달릴 것 같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 같으면 피구를 할 때 물찬 제비처럼 뛰어서 공을 잡아내고 날아오는 공을 피할 것 같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어제 연합체육대회 마지막 종목으로 남자 릴레이 경기에 제가 출전했습니다. 원래 지난주 알파 도우미 모임에서 제가 "17일은 '1일 성령수양회'이기 때문에 16일 연합체육대회 때 무리하면 안 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전 예배를 드리고 점심식사 후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남선교회 임원들이 릴레이 선수를 찾아나섰다가, 오죽하면 나에게까지 부탁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순종하는 마음으로 뛰었습니다. 겨우 반 바퀴였기 때문에 200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를 뛰었는데도 온몸이 쑤십니다. 달리기를 했으면 다리만 아파야 하는데, 어깨, 목, 허리, 온 몸이 쑤십니다. 나이가 들면 근육이 약해져서 조금만 뛰어도 힘이 들게 되어 있고, 나이가 들면 신체조직이 약해지고 허리가 굽고 치아가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시력도 나빠져서 글씨도 잘 보이지 않게 됩니다. 검은 머리가 흰머리로 바뀌며 팽팽하던 피부가 점점 쭈굴쭈굴해집니다. 몸만 그렇습니까? 기억력도 떨어져서 지난주에 있었던 일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판단력도 흐려지고 자신감과 담대함도 점점 떨어집니다. 인생을 4계절에 비유한다면, 어린 시절을 봄, 청년시절을 여름, 장년시절을 가을, 노년 시절을 겨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계절은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만, 인생의 계절은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테이프나 CD는 한 번 듣고 나서 다시 돌릴 수 있지만, 우리 인생은 다시 돌릴 수 없습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찍을 때 잘못되면 다시 찍을 수 있지만, 우리의 인생 드라마는 다시 찍을 수 없습니다. 한번 지나간 인생은 다시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3장 1절과 2절에 보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날 때가 있고 반대로 이 땅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또한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거둘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어느 성도님 댁에 심방을 가다가 도로변에 있는 한 Nursery 앞에 이런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Now is time to plant' 지금은 심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글을 보면서 아차 싶었습니다. 오랫동안 비가 오고 바람 불던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는 것을 그제 서야 눈치 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이 10월 셋째주일로서 어느 새 우리는 봄의 한 가운데에 접어들었습니다. 바로 지금이 심어야 할 때입니다. 저는 오늘 만물이 약동한다는 봄의 계절에 “지금은 심어야 할 때입니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눌까 합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몇 가지 농사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파종의 원리
첫째로 우리는 파종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거두려면 심어야 합니다. 얻으려면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심지 않으면 거둘 수 없습니다. 어느 봄날, 한 농부가 씨를 뿌리기 위하여 뻘뻘 땀을 흘리며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한참 밭을 갈고 있는데 갑자기 숲속에서 노루 한 마리가 재빠르게 뛰어 나오더니 농부가 일하는 밭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농부는 밭가는 것을 멈추고 노루가 뛰어간 곳으로 가보았더니, 그 노루가 밭둑에 서 있는 나무를 머리로 들이 받은 후 죽어있는 것이었습니다. 농부는 뜻밖의 횡재를 만나, 그날 저녁 가족과 함께 노루고기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다음날 아침 농부는 밭을 갈기 위해 밭에 나갔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굳이 힘들이면서 밭갈이를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밭가는 것을 그만 두고 숲속에 몸을 숨긴 채 또 노루란 놈이 달려와서 나무에다 머리를 박고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로 농부는 밭은 갈지 않고 노루가 달려와서 나무에 머리를 박고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농부는 날마다 힘든 밭갈이는 하지 않고 노루가 달려와서 나무에 머리를 박고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는 사이 가을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 농부는 추수 때가 되었지만,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주위에 보면, 이 어리석은 농부처럼 아무 것도 심지 않으면서 열매를 거두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아니하고 하늘만 처다 보며 축복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기도만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복을 주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동입니다. 7절을 다같이 보겟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오래 전에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한국말에 ‘마중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수도 펌프에서 물이 나오게 하려면 물 한 바가지를 부어넣어야 합니다. 한 바가지의 물을 집어넣은 다음 열심히 땀을 흘리며 펌프질을 하면 땅속에 있는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옵니다. 이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만약 마중물을 부어넣지 않으면 백날 펌프질을 해도 한 방울의 물도 나오지 않습니다. 땅속에 있는 엄청나게 많은 물을 뿜어 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중물을 붓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농부들에게는 한 톨의 씨앗이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중물을 부어야 물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농부가 씨앗을 심어야 풍성한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창세기 26장 12절에 보면,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야훼께서 복을 주셨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백배나 거뒀다’는 이 부분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이삭이 심지 않았다면, 거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삭이 100배나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지만, 그 이전에 이삭이 심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심을 때 하나님께서 거두게 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심은 대로 얻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땅에 속한 복이든지 하늘에 속한 복이든지, 요행으로 주어지는 복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복의 씨앗을 심어야 복의 열매를 거둘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씨앗의 원리
둘째로 우리는 씨앗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저는 지난주 저희 집 뒤 가든을 나갔다가 평소에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한 가지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 그 싹이 무슨 싹인지 몰랐습니다. 텃밭에서 싹이 나왔다면 ‘전에 심었던 씨앗에서 싹이 나왔겠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텃밭이 아닌 3개의 쓰레기통 밑에서 조그맣게 싹이 올라왔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감자 싹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감자 싹이 쓰레기통 밑에서 나왔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한참 동안 생각하다가 지난 8월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다가 조그마한 씨감자 몇 톨을 받아와서 3~4개는 텃밭에 심고 나머지 2개를 대충 쓰레기통을 놓는 자리에 던져놓고 흙으로 덮어놓은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물도 준 적이 없고 신경을 쓴 적도 없는데, 감자씨가 번식력이 강해서인지 몰라도 감자싹이 제법 크게 나왔는데, 쓰레기통 밑에 있었기 때문에 그 동안 저의 눈에 뜨이지 않았다가 지난주에 발견된 것입니다. 저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처럼, 심은 대로 싹이 나고 거두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자씨를 심으면 감자가 나옵니다. 배추씨를 심었으면 배추가 나오고, 알타리 무씨를 심으면 알타리 무가 납니다. 상추씨를 심지 않고 상추싹이 나는 법이 없습니다. 품질 좋은 상추를 먹기 위해서는 좋은 상추씨를 심어야 합니다.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둡니다. 이것은 비단 농사에서 뿐 아니라 우리 인생의 전반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크게 보면, 우리 인생에서 세 종류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말의 씨앗’을 잘 심어야 합니다. 얼마 전 새벽기도회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한국에 <노랫말 연구회>라는 모임이 있습니다. 여기서 발표한 내용을 보면 가수 중에 슬픈 노래나, 비관적인 노래를 부른 사람들은 일찍 죽거나, 끝이 안 좋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예를 들면 가수 남인수씨는 1962년에 '눈감아 드리오리'라는 노래를 마지막으로 41세의 한창 나이에 그가 부른 그대로 눈을 감았습니다. 가수 이난영씨는 '목포의 눈물'을 불렀는데, 그 가사처럼 슬픈 인생을 살다가 가슴앓이 병으로 49세에 죽었습니다. 가수 차중낙씨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불렀는데, 그 가사처럼 찬바람이 부는 1968년 가을 29세의 나이에 뇌에 염증이 생겨서 낙엽 따라 가버렸습니다. 가수 김정호씨는 '님'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 가사가 "간다 간다 나는 간다"였는데, 그 가사처럼 33세의 젊은 나이에 정말 가버렸습니다. 그런데 가수 나훈아씨는 다른 케이스입니다. 그는 ‘강촌에 살고 싶네’를 불렀는데, 지금 강촌에서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송대관씨는 ‘쨍하고 해뜰 날’을 불렀는데, 그 노래 하나로 가수왕에 올라 그의 인생에 해가 떴고,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도 가수협회 회장이 되어 잘 나가고 있습니다. 민수기 14장 28절에서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 말의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하는 대로 역사 하십니다. 원망과 저주의 씨앗을 심으면 원망과 저주를 거두게 하시고, 선한 말과 복된 말을 심으면 선한 열매와 복을 거두게 하십니다. 부정적인 노래를 부르면 부정적인 인생을 살게 되고, 긍정적인 노래를 부르면 긍정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노래도 구별해서 불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선하고 복된 말을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우리는 ‘행동의 씨앗’을 잘 심어야 합니다. J. C. 페니는 미국의 갑부로 이름이 났지만, 증권파동으로 재산을 잃고 병까지 얻어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병원에서 늘 고통과 불안에 떨고 있던 페니에게 어느 날 병원 예배실로부터 찬송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잠시 후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페니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찬송과 성경 말씀과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기적처럼 캄캄한 굴속에 서서히 햇빛이 비치더니 나중에는 온 굴속이 밝아져 마치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진 것 같은 느낌을 체험했다." 그리고 인생의 새 출발을 결심하면서 그는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을 그의 사업과 생활의 표어로 정했습니다. 재기한 후 그는 무엇보다 먼저 많은 헌금을 플로리다에 은퇴 목사를 위해 주택 100동을 건축하는데 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많은 것을 많은 사람에게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감사하는 생활 속에 넘치는 복이 있음을 알았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를 백화점 왕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행을 다 기억하십니다. 사도행전 10장 4절에서 이달리야부대 백부장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바 되었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선행을 보시고 기억하셨다가, 나중에 보상해 주십니다. 본문 9절에서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선을 행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에 따른 열매를 거두게 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물질의 씨앗’을 잘 심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만군의 야훼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십일조를 드릴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물질의 씨앗으로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을 주시는지 주시지 않는지 시험까지 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성도의 의무이자, 축복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잘 드려서 쌓을 곳이 없을 만큼 복을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록펠러는 철저한 십일조 생활로 유명합니다. 그가 소년 시절 공장에 다니며 처음으로 주급 1불 50센트를 받았습니다. 그 돈을 집에 계신 어머니에게 내놓자 어머니는 깨끗한 봉투를 가져오시더니 그 봉투 안에 15센트를 넣더랍니다. 그리고 어린 꼬마 록펠러에게 교회에 가서 예배 시간에 내라고 하더랍니다. 그 때부터 그는 어머니로부터 배운대로 정성껏 평생 동안 십일조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나의 첫 번째 월급은 1달러 50센트였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데, 나중에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부어 주셔서 지금은 십일조를 계산하는 직원만 40명을 두어야 할 정도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십일조를 바치는 사람은 가난하게 사는 법이 없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바치는 자에게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내려 주시겠다고 약속 하시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한국의 참존화장품은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회사입니다. 이 회사의 김광석회장님은 소망교회장로님이신데, 초신자 때부터 십일조를 시험적으로 드렸답니다. 성경에 “하나님을 시험해보라”고 되어 있어서 그대로 했는데, 그때부터 복을 받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10의 2조를 드리고도 넘치는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살림이 너무 쪼달려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까? 그러면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복을 부어주시는지 하나님을 시험해보시기 바랍니다. 물질의 복을 받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물질의 씨앗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증오의 화살을 보내면, 다른 사람도 나에게 증오의 화살을 보냅니다. 다른 사람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면, 다른 사람도 나에게 따뜻한 미소를 보냅니다. 작용(作用)이 있으면 반드시 반작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리학의 법칙인 동시에 인간 생활의 법칙입니다. 여러분들이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으면 남을 대접하시기 바랍니다(마 7:12). 다른 사람으로부터 칭찬듣기를 원한다면 다른 사람을 칭찬하시기 바랍니다. 건강을 되찾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물질의 열매를 얻기 원한다면,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3) 분량의 원리
셋째로 우리는 분량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영국의 한 제과업자의 경험담입니다. 그는 매일 아침, 가난한 농부로부터 버터를 구입해 빵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하루는 버터를 유심히 보니 기준보다 양이 적은 것 같았습니다. 며칠 동안 일일이 버터를 저울에 달아보니 추측한 대로 양이 부족했습니다. 잔뜩 화가 난 그 농부를 법정에 고발했습니다. 재판을 하던 중 놀라운 진술이 나왔습니다. 저울이 없었던 가난한 농부는 그 제과업자가 만들어 파는 1파운드 짜리 빵 무게에 맞추어 버터를 만들어 납품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과업자가 이익을 남기기 위해 1파운드 짜리 빵의 양을 줄여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이익을 위해 빵을 줄인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간 것입니다.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우리가 많이 주면 많이 거두게 되지만, 우리가 적게 주면 적게 거둔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6절에 보면,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이 말씀에 의하면 이니셔티브가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심는 양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양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둘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조금 심으면 조금 거둘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무 것도 심지 않으면 아무 것도 거둘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4) 인내의 원리
넷째로 우리는 인내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다같이 9절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여기 ‘때‘라는 말을 NIV영어성경에 보면 ’proper time'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무슨 의미입니까? 가장 확실한 때, 가장 완벽한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난주 어느 성도님 말씀에 의하면 배추씨를 심으면 적어도 두 달은 지나야 수확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더덕 같은 것은 금년에 심으면 3~4년 후에 수확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모든 식물들은 수확할 수 있는 때와 시기가 있습니다. 아침에 씨앗을 심은 후 저녁에 거두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씨앗을 심고 나서 수확을 거둘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농부에게 필요한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빼놓을 수 없는 두 가지는 ‘성실’과 ‘인내’입니다. 농부는 성실하게 열심을 다하여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싹이 날 때까지 기다리고, 열매가 맺힐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가을에 열리는 사과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과는 기다린 끝에 멋이 나고 맛이 납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쌀쌀한 가을에 접어들면 푸른 색깔의 사과가 빨간 색깔의 사과로 변합니다. 시고 딱딱한 사과에서 달콤하고 부드러운 사과로 변합니다. 기다림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농부의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씨앗을 심고 나서 열매를 맺기까지 기다리는 농부처럼 우리도 기다려야 합니다. 아직까지 싹이 나지 않았어도, 잎사귀가 무성하지 못해도, 풍성한 열매가 보이지 않아도 그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인도에서 열심히 선교사역을 한 스탠리 존스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열심히 전도 하였지만, 완악한 인도 사람들은 회개 하지 않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스탠리 존스는 자기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고, 너무 실망이 되어 사과나무 밑에 쓰러져 누워 있었습니다. 그 때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스탠리야, 피곤하니? 지쳤니?” “예, 하나님 지쳤습니다.” “왜 지쳤느냐?” “제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저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낙심한 스탠리 존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사과나무를 보아라. 지금은 열매가 없는 것 같지만 뿌리가 땅에 묻혀있고 잎이 태양을 향해 펼쳐 있고 채널이 나를 향해 맞춰져 있을 땐 언젠가 좋은 열매가 맺힐 것이다. 낙심하지 말아라. 아름다운 열매가 맺힐 것이다.”
혹시 이 자리에 스탠리 존스처럼, 열매가 없다고 낙심하며 피곤에 지쳐있는 분은 없습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직장생활을 했지만 명퇴를 당하고, 밤잠 설치며 사업을 했지만 사업이 부도직전에 처했고, 엉덩이에 곰팡이가 생길만큼 열심히 공부했지만 성적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습니까? 취업비자와 영주권을 신청했지만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까?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했지만 기대한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까? 교사로, 찬양팀으로, 청지기로 열심히 봉사했는데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낙심하고 있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믿음으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열매를 얻기까지 기다리는 농부처럼 끝까지 믿음으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무엇을 심었습니까? 지금 무엇을 심고 있습니까? 무엇을 거두고 싶습니까? 여러분들이 거두고 싶은 그것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얻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얻고 싶은 그것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지나면 심고 싶어도 심을 수가 없습니다. 심어야 할 때가 지나고 나면, 아무 것도 심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복된 말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선한 행동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물질을 심으시기 바랍니다. 할 수만 있으면 좋은 씨앗들을 많이 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때가 되면 기쁨으로 거두게 될 줄로 믿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낙심하지 말라
갈 6:8-10 / 엄기호 목사
어느 회사에서 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했는데, 이 모집광고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회사에 들어오기 위해 온 응모자들에게 아침 9시까지 회사에 오라고 해 놓고는, 12시가 지나고, 오후 1시, 2시가 되도록 무조건 계속 기다리라고만 하는 것입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이 지나면서, 불평하는 사람, 욕하고 소리지르는 사람, 이 회사 아니면 회사가 없나 하고 다른 회사로 가는 사람 등 별별 사람이 다 있었습니다. 오후 3시가 되니까 거의 모두가 불평하다 가고 몇 사람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불평도 없이 무슨 대책이 있겠지 하고 끝까지 참고 기다린 사람은 그 회사에 모두 채용되었다고 합니다.
쉽게 낙심을 잘 하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성공하기 어렵지만 신앙생활에는 더더욱 금물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완성하는 것도,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도, 축복을 받는 것도, 목적이 달성되고 성취되는 것도, 모두 끝까지 참고 쉽게 낙심하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은 성도인 우리가 특히 낙심해서는 안 되는 경우들을 알아보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예수 믿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잘하다가도, 무엇이 시험이 되어 넘어졌는지 교회에 발을 끊는 이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아예 안 믿었던 것만도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다가 낙심하는 사람들 중에 특히 사람의 잘못과 실수를 보고 신앙생활을 그만 두는 사람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 ‘어느 목사가 어떻고, 아무 게 장로가 어떻고’ 하면서 실망하고 낙심합니다. 어떤 이는 ‘예수 믿으면 모두 천사 같은 줄 알았는데…, 술과 담배를 먹질 없나, 남의 돈을 떼먹고 사기치는 사람이 없나, 예수 믿어도 별 볼일 없구나’ 하면서 낙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천사 같은 의인만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병원에는 환자들이 가는 것같이 교회에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려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저는 죄가 많아서 교회에 나갈 수가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죄가 있으니까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죄가 없으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고 죄사함 받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앞에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사람들 중에 악한 사람이 번창하고 잘 사는 것을 보고 낙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롭고 정직하게 살아보려 노력해보지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하면서 오히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하게 사는 사람들이 하는 일마다 잘되고, 부자로 사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나, 예수를 믿어 보았자 모두 헛것이다’ 낙심하며 예수 믿는 것을 그만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시 73:2~3)라고 하였습니다. 악인들이 일시적으로 잘 사는 것을 보고 낙심하지 맙시다. 때가 되면 선악간에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때가 옵니다. 유대인 6백만이나 되는 생명을 살해한 히틀러는 공의의 심판을 받아 멸망 받았고, 다른 민족을 수탈하고 학대한 일본은 원자탄을 맞고 항복하였으며, 자유당 시절에 부정부패하고 부정축재한 사람들이 사형 당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바라봅시다. 그 곳에 생명이 있고, 소망과 기쁨이 있고, 축복과 승리가 있는 줄 믿습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자
누가복음 18장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불쌍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과부가 원한을 풀어 달라고 애원하고 매달려도 이 불의한 재판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 과부는 낙심하지 않고 밤낮으로 가서 매어 달리고 졸라댔더니 나중에는 결국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기도를 왜 안 들어주시겠냐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꼭 될 줄 믿고 기도할 뿐 아니라, 다 된 모습, 응답 받는 모습을 마음에 그리면서 기도하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11장 24절에 보면 “믿고 기도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꼭 믿고 기도한 후에는 처음에 내 생각대로 안 되는 것 같아도 반드시 더 좋게 해주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엘리야는 3년 반 동안의 가뭄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끈질긴 기도를 했습니다(왕상 18:42 이하). 이에 대해 성경은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다”(약 5:17)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음의 선고를 받았을 때 벽을 바라보며 눈물로써 간절히 기도했을 때 15년이나 생명을 연장 받았습니다. 한나의 인내의 기도는 사무엘이라는 위대한 아들을 얻었고, 가나안 여인의 간절하고도 겸손한 기도는 예수님께 귀신들린 딸의 병을 고침 받을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보배를 찾듯이 악착같이 기도하고 그래도 안될 때는 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리듯이 간절히 애타게 강청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뜨거움과 간절함이 없는 기도는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도의 기도는 하늘나라의 자본이요 만능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생명입니다.
다니엘과 다윗은 하루 세 번씩 기도했습니다. 루터는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를 했다고 하며, 웨슬레는 하루에 두 시간씩 기도했고, 인도와 일본 그리고 중국에까지 복음을 전했던 사비어는 어떤 때는 하루에 23시간씩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기도로 생명 삼기를 바랍니다. 항상 기도하되 낙심하지 말고 인내로써 하기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확실히 받았음을 믿고 감사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기도를 하는 것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가 참된 기도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오늘 본문에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둔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모든 신령한 은혜와 일용할 양식과 입혀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선을 심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할 줄 아는 선을 심어야 되겠고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선을 심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슬픈 일이 더 많습니다. 서로 선을 심은 것을 던져 버리고 감사 대신 원망을 하고, 순종 대신 거역하고, 공경하는 대신 오히려 박대합니다. 사랑하는 대신 무시하고 은혜를 갚아야 할 대신 배신을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하기는커녕 자기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이 많고, 하나님 앞에 헌신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을 버리고 일시적인 세상의 정욕과 쾌락에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리는 안타까운 비극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을 심어야 합니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심어야 합니다. 젊을 때 늙기 전에, 건강할 때 병들기 전에, 돈이 있을 때 돈이 없어지기 전에 선을 심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악한 자의 성공은 빠르고 선한 자의 성공은 시간적으로 느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시나무는 빨리 크고 사과나무는 천천히 크는 것처럼, 거짓말하고 권모술수 하는 악한 자들이 땅도, 물질도 더 많이 모으고, 세력도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일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억울하고, 괴롭고, 손해가 와도 선을 심어 놓고 인내하는 마음으로 눈물로 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누가 알아주든 몰라주든, 인정하든 말든, 칭찬하든 말든, 기억해 주든 말든 선을 행합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선을 행합시다. 그러면 하늘에서 완전한 사랑, 완전한 보수, 완전한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달려갈 길을 다 가고, 싸울 싸움을 다 싸우고, 모든 고생과 수고를 다 마친 후에 만왕의 왕이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쓸 면류관을 들고 진주 문에서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 면류관을 받아쓰고 영원무궁토록 천국의 황금 길에서 노래부를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낙심하지 않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생명의 길로, 올바른 길로,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고, 넘치는 기쁨, 아낌없는 축복, 풍성한 은혜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충성과 봉사, 헌신과 기도를 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놀라운 응답의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신나고 따뜻한 세상
갈 6:9-10 / 이병일 목사
올해 수련회 주제를 함께 외쳐봅시다. “아이들처럼 신나는 어버이처럼 따뜻한 세상 되게 하소서!” 이 문구는 우리들의 소망을 기도처럼 시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생명을 가진 모두가 신나고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라는 말도 되죠. 즉 하느님 나라를 구체적인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인연이 되어 모인 사람들입니다. 다른말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그리스도인을 풀어서 이야기 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의 사람, 예수를 따르는 사람(제자들, 우리 교우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말보다는 따른다는 표현을 더 좋아합니다.). 하느님과 연관하여서는 하느님의 자녀, 백성 등으로 표현합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그 세상을 이겨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의 관계는 리차드 니버의 신앙과 문화의 관계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말했습니다. 성서에서 세상은 극복해야 할 대상임과 동시에 하느님 나라가 실현될 장소입니다. 두 가지를 묶어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잘못된 것을 이기고 바로 잡아서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희망은 역사 속에서 세상을 왕따시키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노력으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반대로 세상을 바로 잡으려는 변혁운동이나 세상을 뒤엎는 혁명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현대사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민주화와 통일 운동, 생명과 평화 운동에 있어서 작은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정치와 경제의 힘의 논리에 편승하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켰습니다. 최근에 개신교가 국민들에게 극단적인 저항과 비판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일반적으로 말하면,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모든 생명이 자기의 권리를 정당하게 누리는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우리 사회에서 민주와, 통일, 생명,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흐름을 만들고 그 흐름이 그들이 꿈꾸는 곳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면서 일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들의 꿈은 정치와 경제적 권력을 쥔 사람들에 의해 무참히 짓밟히곤 합니다.
현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시작될 때에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습니다. 초기에 아라크 파병을 결정하면서 추악한 전쟁의 공범이 되었을뿐만 아니라 새만금이나 핵폐기장, 천성산 터널 등의 개발독재의 잔재를 그대로 추진하였습니다. 경제 활성화를 꾀한다는 면목으로 전국에 수백개의 골프장을 보조금을 지원하면서 건설한다고 합니다. 특히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과 한미 FTA를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군대와 공권력을 동원하는 것은 국민들의 희망을 꺾어버렸습니다.
농민들에게서 땅을 빼앗는 것은 단순히 생계수단의 박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웃들과 함께 형성해온 마을 공동체가 파괴되는 것을 말합니다. 삶의 터전이란 이러한 공동체적 관계를 포함하는 것이며, 마을 공동체는 사람다운 생존을 위해 가장 필요한 근본 토대입니다. 이 토대가 보상금으로 쉽게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을 돈으로만 보는 것이고 사람의 삶이 무엇인지를 망각하거나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일고 있는 저항운동은 헌법에 보장된 생존권을 지키고, 자신들의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려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국책사업이라는 명분으로 국익을 들먹이며 국민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폭력과 테러를 자행하는 것은 그 국익이 과연 누구의 무엇을 위한 국익인지를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출범 초기부터 끊임없이 부의 공평한 분배를 주장해온 참여정부 하에서 빈부의 격차는 심화되고, 경제적 정의가 흔들리고,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더 불안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입니다.
오늘 우리 삶의 사회적 측면은 어떠합니까? 절제를 모르는 자본주의적 대량소비, 기독교의 근본적 숭미주의, 공교육의 난재와 학교를 둘러싼 비리들, 스포츠에 열광하는 맹목적인 애국주의 등은 사람 사이의 최소한의 유대를 끊어버렸습니다. 공동체적 관계는 사라지고 배타적인 개인과 가족 이기주의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기를 탈출하고, 마을 공동체가 파괴된 폐허 위에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하려는 노력들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사람이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스스로를 정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요소가 깊어질수록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려는 요구 또한 강렬해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렇게 우리 사회를 커다란 틀로 들여다 본 이유는 “아이들처럼 신나는 세상, 어버이처럼 따뜻한 세상”을 누가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을 함께 생각해 보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는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을 이기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그의 자녀들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세상을 구원하고 해방할 자인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당시 로마제국의 세력 하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로마 황제와 그 세력이 구원과 행방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오랫 동안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아온 팔레스틴 민중들은 이제 지배자들의 자리바꿈이 자기들의 구원과 해방을 보장하지 않는 다는 것을 뼈아픈 역사의 교훈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래도 개중에 국민들의 기대를 모아서 행정부의 수반이 된 사람이 오히려 더욱 악날하게 국민들의 가슴이 비수를 꼿는 일을 보면서 가졌던 배신감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 세상’을 오게 하겠습니까? 바로 나, 바로 우리입니다. 이것은 교만이나 우월감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한 결단입니다. 권력자들의 비리와 거짓을 죽음으로 폭로한 예수야말로 신의 아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그 예수의 길을 함께 걷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렇게 결단하는 사람들이 왜곡된 세상을 이기고 ‘그 세상’을 오게 할 것입니다.
그 세상은 아이들처럼 신나는 세상입니다. 아이들의 소박한 꿈이 맘껏 펼쳐질 수 있는 세상이고, 유통기한이 지나 상한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고, 어른들의 갈취로 급식비의 절반도 되지 않는 점심을 먹고 배고파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입니다. 신나는 놀이 속에서 관계와 공동체를 체험하면서 돈이 없어도 힘이 없어도 자유롭게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세상입니다. 어른들에게 가로막혀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지 못하는 세상이 아니라 언제든지 예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어버이처럼 따뜻한 세상입니다. 암탉이 병아리를 품듯이 서로를 품어주면서 위험한 일을 함께 극복하고, 사랑이 넘치는 세상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사람마다 자기가 거둔 곡식을 빼앗기지 않고 자기가 거둔 것을 먹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세상입니다. 소외되는 사람이 없고 누구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권력으로부터, 위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나로부터 우리로부터 시작되었고 만들어 집니다. 우리 강남향린공동체가 신나고 따뜻한 공동체가 만들어 가려는 세상입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낙심하지 말라
갈 6:9-10 / 최건호 목사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무엇보다도 확실하고 영원한 희망을 가졌느냐 그 희망을 버렸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천국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새 힘을 얻을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희망을 잃어버린 때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좌절하고 주저앉게 되는데 낙심자체가 불행한 것 보다 자기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 불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망하지 말아야합니다.
첫째, 우리는 언제 실망합니까?(갈6:9) 인생의 선한 일과 의로운 일에 지치고 피곤하여 탈진상태에 빠질 때 우리는 낙심하고 주저앉게 됩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모든 계획이나 나의 살아가는 환경이 급변하는 재난으로 바뀔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속의 엘리야, 요셉, 다니엘도 한 때는 실망하고 주저앉거나 절망적인 위기를 맞이할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 의롭고 영광스러운 일에도 때로는 먹구름이 앞을 가리고 실망과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둘째,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으로부터 희망을 찾아야합니다(시42:11). 이 세상에서 낙심하게 되는 것은 확고하고 영원한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실망하는 것입니다. 시편 42편 11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네 속에서 불안하는고, 너는 너의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으로부터 희망을 찾는 믿음의 성도가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갖는 사람은 어떤 환난이나 시련이 와도 잘 이겨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3절, 4절에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가져오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계획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한 기대와 희망을 갖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롬12:12).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대로 예수는 나의 힘이요, 나의 소망되시니 예수님이 나의 소망이라고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라가고 말씀 속에서 항상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힘쓰라고 로마서 12장 12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희망을 갖게 될 때 우리는 주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주를 향한 이러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살며 인내로서 모든 시련을 이겨 나갈 수 있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받을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이긴 십자가를 바라보고 부활하신 예수를 바라볼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인생의 선한 일이나 의로운 일을 할 때 지치고 핍박받아 실망하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핍박과 환난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믿음과 희망을 가지고 힘써 부르짖으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의 때는 옵니다. 은혜의 때, 하나님의 축복의 때를 믿으시고 낙심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실패의 선용
갈 6:9 / 김홍도 목사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반드시 성공과 승리만 보장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때로는 실패의 쓴잔을 마시게도 되고 죽음을 맛보는 듯한 고통과 절망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을 때가 더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 백년을 산다 해도 그 누구를 막론하고 기쁜 날보다는 슬픈 날, 밝은 날보다는 어두운 날이 더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도 제가 드리는 말씀에 공감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고 부흥회를 인도하러 다니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에게서 실패를 당하고 절망 속에 한숨짓고 있는 모습들을 수없이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생각한 것은 이처럼 인생은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와 절망의 과정 속에서 성장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실패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실패를 했을 때에 낙망하고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하는 그것이 더 나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사업에 실패하고 한숨을 짓습니다. 어떤 이는 시험에 낙방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냅니다. 또 어떤 이는 결혼과 연애에 실패하고 인생을 비관합니다. 이렇듯 수없이 많은 사건을 통해 실패의 쓴잔을 마시고 인생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저는 이 시간에 이토록 많은 실패의 고난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때때로 당하는 이 수많은 실패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세는 어떻게 취하여야 할 것인가를 말씀을 통해 생각하며 서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실패를 했을 때에 절대로 낙망치 말아야 합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험난한 고해와 같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실패도 있을 수 있고 본의 아니게 실수도 하게 되고 때로는 정신차려서 살아가노라고 하지만 마귀의 유혹에 걸려 넘어질 적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실패나 실수 그 자체가 나쁘다고 하기보다는 그 일로 인하여 좌절하고 절망하는 것이 더 나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영국의 작가이며 시인인 스미스(G. Smith)는 말하기를 "우리의 최대 영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할 적마다 일어나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제임스 죤스(James Johnes)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영웅의 참으로 위대한 점은 한 번도 절망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일에 실패하고 실수를 했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절망하거나 낙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두 사람을 비교해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사람이었으나 그 후에 그는 대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베드로는 비겁하게 실수는 했으나 절망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닭이 울고 예수님과 눈이 마주친 다음에 밖에 나가서 애통하며 회개하고 일어섰기 때문인 것입니다. 반대로 가룟 유다는 어떻습니까? 자기의 스승을 은 30냥에 팔고서 그것이 양심에 가책이 되어 절망하다가 자살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망하지 않고 회개하고 일어선 베드로는 승리자가 되었으나 가룟 유다는 반대로 실패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절대로 실패하고 범죄한다고 해서 우리를 버리시는 몰인정한 분이 아닙니다. 아무리 실패하고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은, 다시 말해서 절망하지 않고 일어서는 사람은 멸시하지 않으시고 붙잡아 주시는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왔을 때에도 그 애통해 하고 눈물짓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고 용서하고 붙잡아 일으켜 주신 것을 성경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합시다. 마귀란 놈은 우리가 실패하고 실수했을 때에 낙심과 절망의 바위를 안겨줍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한없는 위로와 담대함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하시기를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마귀는 우리가 실수하고 죄짓기 전에는 모든 일에 "괜찮다"고 유혹하고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일단 실수한 다음에는 "큰일났다. 너 같은 죄인은 용서 못받는다"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령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범죄하기 전에는 "만약 범죄하고 잘못하면 큰일나고 징계와 채찍을 맞는다"고 경고를 합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실수하고 범죄한 다음에 그 일로 인해 절망하고 가슴 아파할 때에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범죄치 말라"고 위로해 주고 붙잡아 일으켜 주시는 분이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2. 실패했을 때에 합리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실패나 실수를 남에게 변명하고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옛 속담에도 "잘된 것은 내 탓이요, 못된 것은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일에 실패나 실수는 반드시 남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변명하고 다른 사람을 탓하려 드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에도 하나님이 질문했을 때에 아담은 하와를, 하와는 뱀을 가리켜 변명하고 서로 남의 탓이라고 책임을 전가시켰습니다. 아담의 후예인 우리들도 똑같습니다. 무슨 일에 잘못되고 실수를 하게 되고 실패를 했으면 모두가 내 탓으로 알아야 할 터인데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우리는 분명히 모든 일의 실패는 내 탓이요,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자기를 책망할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 부흥의 비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흥되는 교회는 서로가 무거운 짐은 자기가 지려고 하고 잘된 것이 있으면 서로 양보합니다. 목사는 교인들에게, 교인들은 목사에게, 이런 관계 속에서 하나가 되어질 때에 교회는 더욱 부흥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부흥되지 않고 갈라져 나가고 냉냉하게 되는 교회는 무거운 것은 남에게 지우고 잘되고 칭찬받을 일은 내가 한 것처럼 자랑만 하려드는 교우들이 모이면 부흥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더 부흥되고 은혜 충만한 교회가 되려고 하면 교역자나 직원이나 평신도나 모두가 다 잘된 것은 상대방에게 돌리고 잘 안 된 것은 자기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고 나가게 될 때 더 큰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질 줄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다 "내 까닭이다"라는 의식 속에서 책임을 지고 노력하는 자에게는 비록 실패를 했다 할지라도 축복이 되어질 수 있고 성공의 시간이 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왕도 실수를 했을 때 나단 선지의 책망을 듣고 합리화하지 않고 자기를 깨달았습니다. 요나도 풍랑을 만났을 때 자기의 까닭임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자기의 실패와 실수를 깨닫지 못하고 합리화하려 드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교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자기를 낮추고 겸손해 하는 자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는데 바리새인은 성전 안에 들어가 고개를 들고 거만한 모습으로 자기의 자랑을 하고 조금도 자신의 실수와 죄를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안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세리는 감히 앞에 나가지도 못하고 머리도 들지 못한 채 눈물 흘리며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때에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분명히 자기를 철저히 알고 가까이 나아오는 자를 용납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실패나 실수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실패했을 때에, 실수했을 때에 그 원인을 자기에게서 빨리 분석하고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3. 실패했을 때에 재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칠전팔기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7번 넘어져도 8번 일어난다는 말인 것입니다. 여러분! 나무가 자랄 때에 벌레 먹을 때도 있고 시들을 때도 있습니다. 싹이 나서 고목이 될 때까지 싱싱하게만 자라는 나무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들도 한평생 사는 동안 어려움과 고난과 풍파와 실패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밀어 닥칠 적이 많습니다. 그럴 때에 자칫 잘못하면 절망하고 주저앉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를 통해서 "인생으로 고난당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패의 쓴잔을 마시게 될 때 좌절하고 또 하나님을 원망하기보다는 원시안을 가지고 멀리 바라보고서 나의 모든 것에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하여 주시는 실패의 쓴잔을 기억하시고 용기를 가지고 일어나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분명코 실패했을지라도 절망하지 않고 일어서기만 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제 2의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가다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다음에 하나님은 두번째 기회를 주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비록 한 번의 기회가 지나갔다 하더라도, 한 번의 실패가 있었다 할지라도, 다시 일어나서 용기를 얻으면 오히려 그 전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고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망과 비극은 없습니다. 절망은 오히려 하나님의 기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기회, 축복을 받는 기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공의 길, 행복의 길은 꼭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믿음으로 용기를 갖고 나가기만 하면 자기가 생각했던 성공의 길이 실패로 돌아갈지라도 더 좋은 길이 예비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고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다고 좌절하거나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때때로 당하는 고통과 실패와 어려움이 오히려 우리에게 축복과 성공의 길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합동하여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기도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험난한 세파 속에서 원치 않는 실패를 맛보더라도 오히려 그 실패를 선용할 줄 아는 성도가 되셔서 승리하여 성공적인 삶을 살아 나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