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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대자유인은 예전에 강정진거사가 쓴 글입니다.
불교에 입문하지 않았을때에 이런글이 있었나 하고 놀랐고 더욱이 이글을 비판하는 글을 보면서 세상에는 대단한 사람이 많구나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본 비판글은 청봉스님의 글이었는데 인터넷검색하니 성법스님 글이 나오길래 성법스님글부터 읽어보고 추후 시간이 있으면 청봉스님글도 올리겠습니다.
성법스님이나 강정진거사를 비판할려는 글이 아니고 내 안목이 좀 트였는가에 대한 시험입니다.ㅎㅎ
두분의 입장을 해석하는 글이니 다른분들도 읽으면 도움이 될겁니다.
영원한 대자유인을 비판하다/성법스님
세간의 화제가 된 법기 강정진거사의 <영원한 대자유인>에 수록된 내용을 연재하여 비판합니다. 이 비판은 법기거사의 책 한권의 내용 전부가 대상입니다.
목적은 相과 名色에 집착하는 이 들을 바로잡기 위함입니다. 또한 불자들에게 항상 자비로운 미소를 잃지 않으시고, 세간 출세간의 자잘한
시비를 떠났으며, 오직 선사다운 게송과 침묵으로 답하시는 큰스님들의 품위를 지켜드리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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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18쪽>
또한 관법→염법→의심법으로 이어지는 수행방법은 수행단계에 따라 달리하는 것임을 밝혀 성불에 이르는 과정의
실제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수행방법에 따라 깨침의 종류가 달라짐을 밝혀 깨침의 실상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비판 : 관법→염법→의심법의 차제가 불교 어디에 있는 법인가? 싯타르타는 지금의 표현으로는 관법에 의해 견성하신 것이다. 의심법이란 간화선을 말하는 듯한데, 싯타르타는 의심법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성불한 것이 아니란 것이 되고 말았다.
붓다가 의심법으로 깨쳤다는 이야기가 과연 진실인지는 저도 모르겠고 반드시 관법-염법-의심법으로 이어져야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화두는 원래 초중고를 무시하고 바로 대학에 가는 과정이라, 순차적으로 공부할수도 있고 그게 더 합리적입니다.
지금 대승불교 자체도 보살행을 하고 영겁후에 붓다가 되라는것이니..더이상은 생략합니다.
<원문 19쪽>
깨침에는 자나깨나 한결 같은 경지에서의 깨침, 즉 구경각에 이르는 필요조건을 갖춘 깨침과 그
필요충분조건인 내외 명철한 돈오밖에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비판 : 깨침과 돈오의 차이가 무엇인가? 구경각, 깨침, 돈오에 대한 언어의 선택이 지극히 자의적이라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무척 혼란스럽다.
강거사의 깨침은 자나깨나 한결같다는 말로 볼때 오매일여를 뜻하는거 같습니다.
헷갈리긴 합니다. 여기서 강거사의 공부가 대단한걸 알수있습니다. 저도 석달동안 거의 잊지않고 나무아미타불을 염해봤지만 오매일여에 들수는 없었습니다. 숙면일여는 가능했지만 나중의 일입니다.
<원문 19쪽>
점교법은 선지식의 출현이 없을 때 수행이 오랜 세월을 거쳐 관→염→의심으로 자연발생적으로 바뀌어 돈오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판 : 그렇다면 석가모니는 선지식이 없는 시대에 수행하여 관법을 택하셨나? 의심이란 화두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거사의 논리로 “돈오”한 석가모니가 든 화두는 무엇인가?
불교탄생 이전의 일이니 석가모니는 온갖 수행법을 다 거쳤다고 보여집니다.
석가모니의 화두는 무슨말인지 모르겠네요..그런게 있는가..
<원문 20쪽>
특히 후자의 이러한 점은 ①선지식의 대(代)가 끊어지거나 ②오도(悟道) 후에 보아야 할 조사어록을 수행의
초보자가 보고 그것대로 수행하고 있는 점 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비판 : 오도 후에도 조사어록을 의지해야 하나? 또한 후에 거사는 자신의 화두를 타파하지 못한 이유로 경전을 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했는데, 조사어록도 결국은 부처의 말씀인 경전에 의지하고 그 뜻은 깨침에 목적이 있거늘 초보자는 보면 잘못된 수행에 이르고, 오도 후에나 보아야 한다니 앞뒤를 맞추려 애써도 도저히 방법이 서질 않는다.
돈오후 점수든 돈수든 업장소멸이든 필요합니다. 조사어록이 선문답이나 법거량 같은거라면 돈오후에 보는게 정상입니다.
<원문 40쪽>
공부가 행주좌와일여함에는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말을 할 때[語]나, 말을 들을 때와 같이 침묵을
지킬 때[默]나, 일을 할 때와 같이 몸을 움직일 때[動]나, 사색할 때와 같이 고요히 있을 때[靜]등 의식을 다른 곳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는
공부가 한결같지 않았다.
비판 : 행주좌와 일여에 이른 이가 어묵동정에는 한결같지 않다니, 거사는 행주좌와 때면 항상 말하고 움직여서 그것이 장애로 한결같지 않다는 말인가? 거사에게는 어묵동정이 너무 번거롭고 아수라장인 듯 느껴진다. 나는 오히려 어묵동정에는 한결같음을 느끼나, 행주좌와의 적적이 더 어려운데 한소식 주시면 차 한잔 올리겠습니다.
화두참구라면 어묵동정이 더 어렵다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 이럴수도 저럴수도 있을거 같습니다.
<41쪽>
폐에 공기가 다 빠져나가 배에 아픔을 느끼게 될 때까지 숨을 들이쉬지 않고 불렀다.
비판 : 안반수의경등 어느 경에도 없는 자기개발 호흡법. 따라하시면 차칫 죽을수도 있습니다.
언급할 필요가 없네요.
<원문41쪽>
어묵동정일여에 이르는 단계에서는 대화를 하거나 다른 일을 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삼매관성의
길이가 짧음에도 불구하고 대화를 하거나 일을 하는 시간을 길면 삼매관성이 그 시간 동안을 감당하지 못하여 수행이 단절되기 때문이다.
비판 : 삼매관성이란 표현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마음이 오롯하고자 하는 작용에서 삼매가 흩으러지지 않는 것이지, 그 자체를 삼매의 관성으로 보기는 어렵다. 삼매관성이란 말은 이해되지만 극히 일순간 일수도 있는 그 관성을 너무 광범위하게 인정하는것 같다.
삼매관성은 좀 어색한 단어같지만 그 표현은..학교서 국어공부 시작시 집중이 잘되면 끝날때까지 집중할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관성으로 표현한거 같습니다. 극히 일순은 아니죠. 특히 강거사의 공부상태라면 무척 길수도 있습니다.
<원문43쪽>
신체적인 현상으로는 부처님의 육계(肉髻:살상투)에 해당하는 부분이 솟아오르면서 그곳에서 예전에는 간헐적으로
있던 신호가 항상 끊이지 않게 되었다. 만약 순간이라도 염하는 것을 잊게 되면 강한 반응이 와서 그것을 잊을 수가 없게 하였다. 나는 이러한
반응이 삼매의 신호임을 알았다.
비판 : 그 반응이 삼매의 신호란 증거가 없다. 단순한 氣의 작용일수 있다. 안반수의경등에 호흡의 자세와 방법은 비교적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氣의 운용과 흐름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있는 경이 없다. 이는 불교 수행법은 “마음”의 깨달음을 추구하고, “몸”의 변화에 대해서는 집착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 들여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요가나 ,신선도등과 다를바 없다. 후에 법진거사는 도리사의 진신사리 속의 부처님을 보고 법당의 불상과 비교도 해 보고 큰 자신감을 얻는다. 마침 그때 나는 그곳 도리사에서 행자를 살아 매일 진신사리를 셀수없이 들여다 보았지만, 행자였던 나는 오히려 사리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들을 相과 번뇌로 경계하였다. 이 분은 뒤에 보면 또 인연 닿는 스님을 만나 한말씀 들으면 그것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기적적인 변화로 인식하는 듯하다. 거사 말씀대로 아마 아직 금강경을 읽어보지 못한 연유라 이해하겠다.
저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외국의 경우를 보면, 몸과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육체를 통하여 의식이 크게 확장되거나 쿤달리니 또는 사하스라르 차크라[백회혈]가 열리는 등 여러가지 경험자가 있습니다. 단전호흡 하는 사람중에도 육계가 솟는 경우가 있습니다.
삼매에 들때 기가 자연스레 백회혈로 들어오는거죠. 안그런 사람이 대부분이겠지만 강거사는 그런 경우네요.
<원문44쪽>
그 당시에는 신체적 현상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정신적인 현상들도 나타났다. 예를 들면, 몽중(夢中)에 내가
산꼭대기에 서 있는데 해가 중천에 떠올라 하늘과 땅이 너무나 밝게 보인다거나 밤에 달이 떠오르면서 천지가 밝아지는 것을 본다거나, 밤중에 잠이
깨어 눈을 떠보면 천정과 지붕을 뚫고 하늘의 별들이 보인다거나,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오고 있는 아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거나 사람의
얼굴을 한번 보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읽어버린다거나, 사람의 걸음걸이를 보거나 말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거나, 모든 사물에 대한
판단력이 뛰어나게 된다거나 하는 것 등이었다. 또한 뒷날 돈오(頓悟) 이후에 이때의 수행행적을 되돌아볼 때 알게 된 사실이지만,
어묵동정일여에가까워질 때에는 명멸함으로 감지되던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이때부터는 그 감지됨이 정착되었다는 것이다.
비판 : 거사도 인정 했듯이 이것은 일시적 현상이다. 나도 이정도 이상의 것도 경험했지만, 이것은 識 자체가 맑아지면 오는 현상으로 집착하면 곧 마에 이른다. 이것을 “아뢰야식의 감지됨이 정착”이라했는데 “감지됨이 정착” 이말 자체도 이해가 안되는데, 이해를 하려든다면 “마에 마음을 빼았김”으로 풀이하고 싶다. 기억나는 조사의 말씀 중 “수행은 귀신도 모르게해야 한다” 했거늘 거사는 이뜻을 아는가?
강거사의 신체 및 정신적인 현상은 몸과 마음이 자꾸 닦여가고 있는겁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돈오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습이 자꾸 소멸되니 돈오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리고 업장소멸은 매우 중요합니다.
<원문45쪽>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읽어보는 불교 서적이 불교의 최상승법문(最上乘法門)을 발췌해 놓은 책이었다는
데 대하여 몹시 기뻐했고 석가모니 부처님과의 깊은 인연이 있음을 알았다. 더욱이 이 『선문촬요』는 나의 인생의 방향을 확정짓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책을 읽고 난 후부터는 일어나던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하여 신경쓰지 않고 담담한 자세로 돌아오니 그러한 것들은 대부분 저절로
없어지는 일과성(一過性)의 현상들이었다.
비판: 그런 현상들은 대부분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현상에 집착하고 즐기면 그것이 곧 魔가 된다.
나의 경우 30대초에 절에 오는
신도들의 업은 물론 영가까지도 눈에 성성히 보였는데, 수개월이 지속되도 사라지질 않아 “금강경” 독경과 사경기도를 한동안 하니 그제서야
사라졌다. 법기거사는 저절로 사라졌다하니 삼매관성은 있어도 이것에는 관성이 없는 모양이다.
선문촬요는 안읽어봐서 모르겠고 여러가지 영적현상은 그사람의 상태를 표현해줍니다.
영적현상 자체가 중요한게 아니라 그런 현상이 나타날만큼 닦였다는게 중요합니다.
<48쪽>
수행자 중에는 몇십 년씩 장좌불와(長坐不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한 수행자들이 잠을 자면서도
방심하지 않고 수행에 대한 집념이 흐트러지지 않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살아서는 눕지 못하고 죽어서는 앉지 못한다”는 그런
어리석은 자세는 취하지않았을 것이다.
비판 : 장좌불와란 대수행을 어리석은 자세라 단정해 버리고, 자면서 부처님의 열반상의 모습으로 잠을자는 자세로 방심하지 않는 수행이 좋은 방법이라 권장하는데 거사는 왜 33세에서 45세까지 하루 18시간 후엔 20시간씩 “좌선”을 했다고 하였는가?(표지 뒤 저자 소개란에서) 이건 대단한 오류이다. 기존 스님들의 “구태의연”에 싫증을 느껴 거사의 기발한 “가르침”에 넘어간 이들도 이 문제에 대해선 변명하기 어려울듯하다.
장좌불와 자체는 대단한 마음가짐입니다. 물론 그걸로 깨달음을 가늠할수는 없지만, 그정도의 근기라면 돈오는 몰라도 돈오후의
점수나 돈수는 쉽게 이를것으로 보입니다. 돈오는 매우 강력한 선정깊이가 필요하여 장좌불와와는 큰관련 없어보입니다.
<원문 49쪽>
따라서 열심히 공부하는 수행자가 잠잘 때는 부처님의 자세를 따른다면 언젠가는 잠이라는 무기(無記)의
공간을 삼매관성으로 채울 날이 올것이다.
비판 : 삼매관성이란 신조어를 즐겨 사용 하고 있는데, 그 의미와 범위가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삼매관성이란 用은 “마음의 일여”라는 體가 성성할 때 살아나는 단어이다. 단순히 자세로 잠이라는 무기의 공간을 채운다니, 그렇다면 거사가 생각하는 수행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또한 책에서는 일관되게 돈오법만을 주장하는데, 돈오법과 삼매관성은 공존할수 없는 단어이다. 44쪽 에서 이미 “모든 사물에 대한판단력이 뛰어나게 된다”라는 거사가 수행 자세에 대한 견해가 이 정도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무기의 공간을 삼매로 채운다는것은 숙면일여 또는 오매일여를 말합니다. 강거사나 성철스님, 진제선사, 혜암선사, 영흥선사 등 여러스님이 숙면일여를 주장했고 경허스님 등 많은분들이 숙면일여를 인정안하거나 모르기도 하는데 실제 그런게 있고 8지단계라 하듯이 상당한 단계입니다. 다만 돈오 이전이니 돈오한 사람에게는 별해당 없으나 의식의 명료함 차이는 있을겁니다.
<원문51쪽>
고암 스님과의 대화 도중에 스님을 지켜보니 스님은
쉬지 않고 염주를 굴리고 있었다. 나는 스님도 수행방편을 염하는 방법으로 공부를 하는것을 알고 돌아오는 길에 단주(短珠) 하나를 사서 한동안
굴려 보았다. 그러나 염주를 굴리는 것은 안 굴리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 손가락으로 세는 것보다는 굴릴 수 있는 시간도 적고 정신차리게 하는
효과도 적다는 것을 알았다.
비판 : 지금 초등학생 숫자세기 놀이 하고 있는가? 법기거사는 자신의 책에서 수행과는 아무 의미도 없고, 거론하는 것 자체가 번거로운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일들을 자신이 느끼면 마치 대단한 성과인 것으로 스스로 대견해 하고 있다. 내 생각에는 손가락보다는 발가락을 사용하는 편이 눈에도 띄지 않고 더 효과적일 것 같다.
몸으로 하는게 더 상위의 수행이겠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못하니 염주를 듭니다.
<원문55쪽>
첫째는 화두를 들 때 항상 입천정에 혀를 붙이고 하라는 것이었다. 그 법문을 듣는 순간 ‘이렇게 좋은 법이
있는 걸 여태 몰랐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지금까지 나는 무엇을 먹을 때나 말을 할 때가 아니면 입천정에 말아붙인 혀를 펴는 일이
없게 되었다. 잠이 들어 혹시 꿈을 꾸더라도 꿈 속에서 말을 할 때에는 혀를 움직이지만 말이 끝나면 즉시 다시 입천정에 혀를 말아붙이게 되었으며
잠이 깰 때 혀가 입천정에서 떨어져 있는 경우는 지금까지 한번도 없었다.
비판 : 화두를 들며 혀의 운용을 몰랐다니, 이건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서두에 의심법인 화두는 관법, 염법 이후에 수행해야 하는 법이라스스로 밝혔으니, 화두를 들것이 아니라 관법을 해야 맞는 수준아닌가? 이건 그렇다치고 “꿈속에서 말을 할 때에는 혀를 움직이지만”이라고했는데 그러면 거사는 옷 벗는 꿈을 꾸고 일어나면 벌거숭이가 되는가? 거사는 서문 끝에 “이 글에 의지하여 열심히 수행하면 돈오하여 대자유인이 된다”라고 확신 장담 했는데, 그 수행이란 것이 “꿈속에서도 행동은 현실 같이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란 말인가? 대자유인은 커녕 몽유병 환자나 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혀를 말아붙이는건 손에 염주를 들고 관하듯이 항상 의식이 남아있게 하는 기법입니다.
할수 있다면 하는게 좋습니다. 저는 못합니다..
<원문 57쪽>
경봉 스님을 만난 뒤 6년 동안을 하루에 보통 18시간 좌선을 하며 젊음을 다 바쳤지만 화두는 타파되지
않았다. 오랜 후 회상해 본 것이지만, 그 당시에 나는 경전이나 조사어록 같은 것이 번역되어 있지도 않아 『선문촬요(禪門撮要)』외에는 책을
읽어보지 못했고, 선지식의 법문도 들어보지 못했으며, 경봉 스님으로부터 나의 수행에 대해 깊이 있는 점검과 세밀한 가르침도 전혀 받아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의심의 주제가 뚜렷이 부각되지도 않았고 의심하는 방법 또한 바르게 적용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결국 화두가 타파되지
않았던 것이다. 즉, 의심의 주제에 대한 간절함이 생기지 않아 수많은 시간을 답보상태로만 있게 되었던 것이다.
비판 : 화두타파가 안된 이유로 법문도 못 듣고 경전도 못 본 무지 때문에 의심의 주제에 대한 “간절함”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간절함은 신심과 마음의 작용에 의하는 것이지 識에 의지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오히려 그래서 “불립문자”를 내세우는것이거늘, 이거 혹시 교정을 보지 않아 잘못 수록된거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법기거사는 “수행법의 정립”이 이 책의 백미라 스스로 평하였는데 과연 白迷는 白迷임에 틀림없다.
오매일여가 될만큼 수행하였지만 화두타파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물이 100도에서 끓는데 98도나 99도라면 끓을수가 없죠. 본인 스스로 한층더 정진하거나 옆에서 쳐주는게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꽃병이 깨진다거나 자빠진다거나 선사의 할 등..이런다고 다 되는건 아니죠. 인연이 있어야 합니다.
<원문 58쪽>
그렇지만 ‘옴마니반메훔’을 염하면서 익혀놓은 24시간 끊어지지 않는 오매항일(寤寐恒一)함 삼매 덕분으로
의심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화두가 염으로 이어져 오매일여(寤寐一如)를 더욱 다져주는 계기가 되었다.
비판 : 화두(의심)가 염으로 이어지다니, 처음에 수차 수행차제를 관→염→의심 이라 단정지어 놓고 어찌 의심에서 염으로 역행하는 경계를 오매불여를 다져주는 계기라 하는가? 거사는 참으로 특이한 수행법을 경험하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화두는 바로 대학에 가는것이라 기초가 부족할수 있고, 그러기에 그밑의 것을 다져주는게 효과가 있을수도 있습니다.
<원문 61쪽>
오히려 출가하게 되면 절생활에 적응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려 수행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어 스님의
갑작스런 출가 권유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판 : 58쪽에 이미 오매일여에 이르렀다는 거사가 절생활 적응에 시간이 걸려 수행에 방해가 될까 당황 했다는데, 정작 당황스러운 것은 나다. 그 적응에 몇 년이라도 걸린다는 말인가? 아니면 자신은 스님 체질이 아니라는 말인가? 차라리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라는 상식적인 고백이 수행자 답지 않을까 한다.
내향적인 사람이라면 적응에 시간이 걸림이 당연합니다.
성철스님 같은 태양인이라면 오히려 절을 휘어잡겠죠.
<67쪽>
이 화두를 타파하고도 오랜 후에 조사어록을 보고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원문에서
‘유별전지법하야(有別傳之法何也)’ 다음에 가섭 존자께서 “아난아!”하고 부르니, 아난 존자께서 “예!”하고 대답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 부분이
빠져 있었다. 이 부분이 있으면, 첫째, 화두로 들때 말이 너무 많아 산만하여 집중력을 떨어뜨릴 염려가 있었으며, 둘째, 의심이 방향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어 구경각(究竟覺)에 이르지 못할가능성이 있었다.
비판 : 이 말의 요지는 “화두가 길면 산만하고 의심이 방향이 분산된다, 그래서 화두는 길면 안된다”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은데 공안 중에는 잘 알려진 <무문관> 제1칙인 조주구자(趙州狗子)에서 나온 “무”를 비롯해 “이뭣고”, “시심마”, “뜰앞의 잣나무”같이 거사의 요구에 맞는것도 있지만 단하소불(丹霞燒佛)이나, 더욱 제42칙인 여자출정(女子出定)등의 이야기 같은 허다한 공안들은 어찌 처리할꼬. 이곳에서도 역시 거사의 개인적 취향(?)을 보편화 시키려는 노력이 보인다. 그 노력과 받아들임이야 거사의 문제이지만 이것을 “구경각에 이르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선언적 단정은 불교의 헌법인 삼법인의 “제법무아”는 안중에도 없는 과감하지만 뒷감당하기에는 곤란한 용감성 아닐까?
#참고---무문관 제42칙 여자출정(女子出定) 화두
세존께서 계시던 때 문수(文殊)가 모든 부처님 모인 곳에 이르니 모든 부처님께서 각기 본래 처소로 돌아갔는데 다만 한 여인만이 부처님 가까이에서 삼매에 들어 있었다. 이에 문수가 부처님께 "왜 여인은 부처님 가까이 있는데 저는 그러지 못합니까?"라고 물었다.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이 여인을 삼매로부터 깨워 그대가 직접 물으라."라고 하셨다. 문수가 여인을 세 번 돌고 손가락을 한 번 탁 퉁겨서 범천(梵天)에 이르러 그 신통력을 다해도 깨울 수 없었다. 세존께서 "가령 백천의 문수라도 이 여인을 정(定)에서 나오게 하지는 못하리라. 아래로 12억이란 모래 수와 같은 국토를 지나 망명(罔明) 보살이 있는데 그가 능히 이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잠깐 사이에 망명 보살이 땅에서 솟아 나와서 세존께 예배를 하였다. 세존께서 망명에게 명을 내려 망명이 여인 앞에 이르러 손가락을 한 번 퉁기자 여인이 정에서 깨어났다.
화두가 길면 불편한 점은 있을겁니다. 하지만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오히려 편할수도 있겠지요.
<원문71쪽 ~72쪽>
그 당시 몸만 약간 피곤한 정도였으므로 잠을 전혀 자지 않는 것이 어디까지나 한계인가를 보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다. 보통 때에도 정진하는 것은 잠이 들어 꿈을 꾸거나 깊은 잠이 드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몸을 전혀 쉬지 않고 얼마나 지탱할 수 있는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비판 : 책 41쪽에서 이미 “수행이 어묵동정일여에 이르렀다”고 하신 거사가 술집과 다방 좀 다녔다고 심신이 피곤하여 용맹정진이 끝나버렸다 하였다. 솔직히 나는 이 비판을 쓰면서 몇번씩 확인한 것이 있다. 이 책이 정말 법기거사가 직접 쓴 것인가 하는 의문이 가라앉지를 않기 때문이다. 혹, 출판사에서 기술한 것은 아닐까? 그 제자가 들은데로 쓴다는 것이 아직 불문에 든지 오래지 않아 거사의 뜻을 잘못 표현한 것은 아닐까? 그런데 분명 거사가 쓴 것인데도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리고 더욱 한심하고 피곤한 일은 왜 나 같은 변변한 수행력도 없는 중이 와병중에 이짓을 해야한단 말인가? 하지만 나는 이미 육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원력으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거사의 책을 “요약경”으로 부르는 이들을 위해 요藥만 좋은 것이 아니라 내藥도 중생들에게는 쓸만하다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요약경이라 감히 經을 표방한 <영원한 대자유인>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나의 비판은 계속될 것이다.
자기가 익숙한것에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도 덜피로하고 그렇지 읺은것에는 많이 피로함이 당연합니다.
강거사는 아마도 내향적인 성격 같은데 그렇다면 활발한 사람보다 더욱 피곤할겁니다.
<원문 72 ~ 73쪽>
혼신의 힘을 다하여 화두를 드는데 코피가
터지는 일이 세 번이나 일어났다. 여기에서 일단 멈춰서 생각해보니 ‘반메훔하는 이 물건이 뭣고를 계속 들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해산
스님으로부터 받은 ‘교외별전화두’를 들기로 결론을 내렸다.
비판 : 법기거사의 자기 발견은 언제나 유별나다. 단지 코피 터지는 일을 육체적 피로에 연관짓지 않고, 더욱 수시로 화두를 바꾸는 사람이 당연하며 사소한 육체적 반응을 화두의 간택이 잘못된 탓으로 돌린다. 이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또 수행과도 관계없는 “분별심”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자기확신에 빠진다. 아마 그 당시 코피가 거사 말대로 한번이 아니라 세번이나 났기 때문인 모양이다. 이쯤해서 거사에게 분별심의 과오를 유마경의 한 대목에서 인용해 주는 일은 부질없는 일 일까?
=유마경 중=
“그때에 유마힐의 집에 한 천녀(天女)가 있어 여러 어른들이 설법하는 것을 보고 듣고서 그 몸을 나투어 하늘의
꽃(天華)을 제보살과 대제자들 위로 뿌렸다. 꽃이 제보살들 위에 이르렀을 때에는 다 땅으로 떨어져 내려갔으나 대제자들 위에 뿌려진 꽃들은 제자들
몸에 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기네 신통력으로 그 꽃을 떼려고 애를 썼으나 떼어 내지를 못했다. 그때에 천녀가 사리불에게
물었다. ‘왜 꽃을 떼어 내려고 하십니까?’ 사리불은 대답하기를 ‘이 꽃은 여법(如法)하지가 않소. 그래서 이것을 떼어 내려고 하는 것이오.’
천녀가 말했다. ‘이 꽃이 여법하지 않다고 말하지 마시오. 왜냐하면 이 꽃 자체는 분별 따위를 하는 일이 없소. 당신이 스스로 분별상을 일으키고 있을 따름입니다.’
만약 출가자가 불법에 있어서 분별하는 바가 있으면 그것이야말로 여법치 않는 것이오. 일체제법이 곧 해탈의 상인 것이오. 만약 무소분별이라면 그것이 곧 여법한 것이요. 저 보살들을 보시오. 왜 꽃이 달라붙지 않느냐 하면 그들은 이미 일체의 분별상을 끊어버렸기 때문이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겁이 많다고 합시다. 그러면 귀신이 곧 그 허점을 치고 들어오는 것이오. 이와 같이 제자들은 생사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색,성,향,미,촉이 그 허점을 노려 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미 두려움을 떠난 사람에게는 일체의 오욕이 아무 짓도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번뇌 망상의 악습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꽃이 몸에 달라붙는 것뿐입니다. 번뇌의 악습이 다 없어진 사람에게는 꽃이 달라붙지를 않습니다.”
코피 운운 하는것은 확실히 좀 우스운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화두를 바꿔도 별탈 없을만큼 강거사는 이미 경지에 도달해 있습니다.
<원문73쪽>
그리고 그 의심하는 방법을 찾던 중 경봉 스님의 법문 중에서 들은 ‘부처님의 사대의문’을 원용하기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좌선 중에는 항상 옆에 종이와 볼펜을 두고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종이에다 적어두어 그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기로
했다.
비판 : 좌선 중 화두에 대한 의심은 안하고, 그 방법을 생각하며 메모를 하다니 이것은 참구가 아니라 의심을 識의 연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알음알이”에 불과하다. 내 소견은 천박하니 이번에는 거사도 인정하는 육조 혜능의 단경에서 적절한 문구를 대비시켜 보겠다. 단경도 굳이 돈황본을 택한 이유는 전해오는 단경중 돈황본이 후대 첨삭의 오해가 없기 때문이다. 아래 글과 거사의 “가장 좋은 방법 찾기”를 대비시켜 보겠다.
#돈황본단경 중 (좌선법에 대한 귀절)
순간순간 생각할 때에 모든 법 위에 머무름이 없나니, 만약 한생각이라도 머무르면 생각마다에
머무는 것이므로 얽매임이라고 부르며 모든 법 위에 순간순간 생각이 머무르지 아니하면 곧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머무름이 없는 것 으로
근본을 삼느니라.
念念時中 於一切法上無住 一念若住 念念卽住 名繫縛 於一切法上 念念不住 卽無縛也 <是>以無住 爲(127)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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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더라도 돌아가는게 아닙니다. 대학교 공부를 하니 자연히 무리가 따르고 중고등학교 공무를 잠시 하는겁니다.
물론 의정,의단이 생기면 이럴 필요는 전혀 없지만 말입니다.
<원문73쪽>
그리고 그 의심하는 방법을 찾던 중 경봉 스님의 법문 중에서 들은 ‘부처님의 사대의문’을 원용하기로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좌선 중에는 항상 옆에 종이와 볼펜을 두고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종이에다 적어두어 그중에서 가장 좋은 방법을 찾기로
했다.
비판 : 좌선 중 화두에 대한 의심은 안하고, 그 방법을 생각하며 메모를 하다니 이것은 참구가 아니라 의심을 識의 연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알음알이”에 불과하다. 여기서 거사가 찾고자 했던 “의심하는 방법”에 대한 참고자료를 보고, 거사가 찾아낸 방법에 대한 다음 번의
비판과 비교해 보시라.
간화선에 대한 참고문헌은 참으로 구하기 어렵다. 흔치않은 참고자료이니 소홀히 보지 말았으면 한다.
참고자료(“큰 의심”에 대하여)
「종교란 무엇인가」西谷啓治저 (1961)영문판 “What is Religion?” 39~42쪽
"수행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온갖 소리를 듣는 자신의 주체 그 주인공에 대해서 의심해야한다. 온갖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을
듣는 어떤 주인공이 자신속에 있기 때문이다. 소리는 귀로 듣지만 그렇다고 해서 귓구멍이 그 듣는 주인공이라고 할 수 없다. 귓구멍이 그 듣는
주인공이라고 한다면 죽은 사람도 소리를 듣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죽은 사람도 귓구멍은 뚤려 있으니까….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한다. 소리를
듣는 이 주인공 이것이 과연 무엇인가?
망상과 잡념이 일어나더라도 개의해서는 안된다. 다만 전심전력으로 깊고 또 깊게 의심해야한다. 어떤 목적도 어떤 기대도 가져서는 안된다.
심지어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도 안되고 그런 마음을 갖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된다.
마치 천진한 어린아이와도 같아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의심을 해도 그 듣는 주인공을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수록 알지 못하는 그 자리에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전후좌후를 보지말고 오직 한마음으로 의심에 파고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은사람같이 되어야 한다. 심지어는 자기가 거기 있는 것도 잊어야
한다.
그리하다 보면 텅빈 무심한 상태가 될 것이다. 그 상태에서도 의심을 들고 있어야 한다. 이 듣는 주인공이 무엇인고 그리하여 마침내 자기가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된 것조차 모르고 의심하고 있는 것조차 모르게 되며 자기가 없어지고 오직 의심덩어리만 남을 때 후련히 큰 깨달음이 올 것이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이 또는 완전히 죽었다가 되살아나듯이…"
저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개개인마다 격차가 있을터이니 섣불리 말하긴 어렵지만
제가 선정에 들어갔을때는 그 공간 자체가 나였습니다. 즉 내가 모든것이었죠. 성법스님은 잘모르겠습니다..
<원문74쪽>
2) 의심하는 방법은 다음의 네 가지 방법으로 회광반조해야 한다.
1.
도각문전찰간척(道覺門前刹竿斥)하라고?
2. 어째서 도각문전찰간척(道覺門前刹竿斥)이라 그랬을까?
3.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4.
교외별전이 왜 도각문전찰간척(道覺門前刹竿斥)일까?
비판 : 거사는 드디어 識의 연장에서 네가지 방법을 발견하고 스스로 탄복한다.앞에서의 교토학파의 대표 격인 西谷啓治(니시타니 게이지)의 언급은 접어두고라도 화두를 타파하는 방법은 모든 識의 작용을 억제하고 마음으로 마음을 타파하는 것이거늘 왠 과정이 그리도 복잡한가?
그리고 2,어째서 3,무엇 때문에 4,왜 의 근본적 차이는 무엇인가? 내가 보기에는 어감의 차이가 약간 느껴지기는 하지만 이것을 독립된 하나의 방법으로 해야 한다함은 차라리 “도각문전찰간척” 화두에 4가지 종류가 있다하고, 새 공안을 만드는 편이 나을 듯 싶다.
의심의 방법이니 어떻게든 의심할수만 있으면 됩니다.
<원문75쪽>
나는 그런 말에 상관하지 않고 열심히 화두만 들었는데 ‘반메훔하는 이 물건이 뭣고?’ 화두를 들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잠도 거의 없어졌다. 마음 속에는 네 가지 방법으로 의심하는 외의 다른 것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야말로 미망(迷妄)의
경계가 거의 물러가니 또렷또렷한 심광(心光) 속에서 의심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초조함이라든가 피곤함이라든가 하는 그런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모든
것이 가벼워졌다.
비판 : 거사는 지금까지 스님을 만날때마다 화두를 바꿔 들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선지식의 가르침인양 기뻐하다가 공부의 벽에 부닥치면 매번 특별한 이유를 스스로 창출해 냈다. 다시 말하지만 화두의 의심은 오롯이 털끝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한마음이어야 활구의 참구가 되는법이다. 이번에는 “반메훔하는 이 물건이 뭣고?” 화두로는 소득이 없었고, “도각문전찰간착”을 앞에서 말한 네가지 방법으로 의심하여 성과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반메훔하는 이 물건이 뭣고?” 할때 이미 네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더라면 “도각문전찰간착”까지 와서 네가지로 나누는 번거로움을 피할수 있었지 않았을까?
지금 화두가 강거사에게 더 맞는겁니다.
의심[의문]을 가지게 하는 화두가 사람마다 똑같을리가 없습니다. 다 업장이 다르니 관심도 다른게 정상입니다.
<원문79쪽~80쪽>
아무리 생각해도 막히는 것은 전혀 없었지만 표현 방법이 미숙함을 알았다. 화두를 타파하여 의심은 다
풀렸으나 어떻게 앞길을 헤쳐 가야 할지를 전혀 알 길이 없어 오히려 더 답답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때껏 30년 이상을 정진해 오면서 스승없이
속가(俗家)에서 수행하여 돈오(頓悟)에까지 이를 수 있었지만 이때만은 혼자서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비판: 거사는 자기 말 대로 정말 표현 방법이 미숙하다. 화두를 타파하고 30년 정진후 돈오(頓悟) 했다는 이가 앞길을 몰라 답답해 하다니, 미적분은 아는데 구구단은 모르겠다는 소리와 같으니 답답한 사람은 바로 나다. 그렇지 않으면 돈오한 것이 아닌데 감히 돈오를 자청하고 있는것 인데, 이 문제가 왜 심각한지를 밝혀보겠다. (앞으로 비판할 83쪽 '修行佛行'의 언급과도 연관이 있다) 우선 참고 자료를 신중히 살펴보고 다시 비판하고자 한다. 이번에는 퇴옹 성철의 해설도 덧붙인다.
#참고 자료1
돈황본 단경 중(끝부분의 돈법이 거사의 돈오라 여기면 된다)
자성의 마음자리가 지혜로써 관조하여 안팎이 사무쳐 밝으면 자기의 본래 마음을 알고, 만약 본래 마음을 알면 이것이 곧 해탈이며, 이미
해탈을 얻으면 이것이 곧 반야삼매며, 반야삼매를 깨치면 이것이 곧 무념이니라. 어떤 것을 무념이라고 하는가?
무념법이란 모든 법을 보되 그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으면, 모든 곳에 두루하되 그 모든 곳에 집착치 않고 항상 자기의 성품을 깨끗이 하여 여섯 도적들로 하여 오고감에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이 곧 반야삼매이며 자재해탈이니 무념행이라고 이름하느니라.
온갖 사물을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항상 생각이 끊어지도록 하지 말라.
이는 곧 법에 묶임이니 곧 변견이라고 하느니라. 무념법을 깨친 이는만법에 다 통달하고, 무념법을 깨친 이는 이는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돈법을 깨친 이는 부처의 지위에 이르느니라.
自性心地 以智惠觀照 內外明(名)徹 識自本心 若識本心 卽是解脫 旣得解脫 卽是般若三昧
悟般若三(178)昧卽是無念 何名無念 無念法者 見一切
法 不著一切法 遍一切處 不著一切處 常淨自性 使六賊 從六門走出 於六塵中 不離不染 來去自由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行 莫百物不思
常(當)令念絶 卽是法縛(傳) 卽名邊見 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頓法者 至佛位地(179)
=성철해설=
*돈견본성(頓見本性 본래 성품을 단박에 봄)... 내외명철하면 이것이 곧 식심(識心 마음을 앎).해탈.무념이고,
무념은 곧 불지라 하였다. 내외
명철은 묘각이며, 식심은 견성(見性 성품을 봄)이므로, 견성하면 묘각해탈이요 불지무념이다. 그러므로 견성하면 곧 성불인 것이다.
본
사이트 http://www.sejon.or.kr/main/main_zen.htm
#참고자료2
선문촬요(이는 거사도 보았다는 책이다) 달마 혈맥론 중
만일 스스로가 분명히 깨달았다면 배우지 않아도 되며,미혹한 사람과는 같지 않거니와 검고 흰 것을 분별치 못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편다고
망언 (妄言)을 한다면, 부처님을 비방하고 법을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런 종류는 빗발같이 설법을 하더라도 모두가 악마의 소리요, 부처의 말씀은
아니다.
이런 스승은 이미 악마의 왕이요, 제자는 악마의 백성이 되어서 미혹 한 사람들은 그의 지휘에 따라 모르는 사이에 생사의 바다에
헤맨다." "오직 성품을 보지 못한 사람이 망령되이 부처라 하나 이런 중생들은 큰 죄인이어서 많은 중생들을 속여서 악마의 경계에 들게 한다.
만일 성품을 보지 못하면 설사 12부경을 모두 연설하여도 모두가 악마의 말 이요, 악마의 권속일지언정 부처의 제자는 아니다. 이렇게 검고 흰것
을 가릴 줄 모르거늘 무엇에 의하여 생사를 면하리요 ? 만일 성품을 보면 부처요, 성품을 보니 못하면 중생이다. 중생의 성품을 떠나서 부처의
성품을 얻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부처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 중생의 성품이 곧 부처의 성품이다. 성품 밖에 부처가 없는지라 부처가 곧
성품이니, 이 성품을 떠나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깨달음 외에는 성품을 얻을 수 없느니라."
비판계속 : 성철의 해설 중 내외명철에 관한 부분은 거사의 책 125쪽부터 거론되니 다시 논하기로하고, 단경에서는 돈법에 이르면 즉 돈오하면 부처라 했고, 혈맥론에서는 인용 서두에 보듯이 분명 “만일 스스로가 분명히 깨달았다면 배우지 않아도 되며”라고 밝혀져 있다. 자, 이제 거사는 자신의 돈오를 철회하든가 아니면 혈맥론에서 말하는 “검고 흰 것을 분별치 못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편다고 망언 (妄言)을 한다면, 부처님을 비방하고 법을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런 종류는 빗발같이 설법을 하더라도 모두가 악마의 소리요, 부처의 말씀은 아니다. 이런 스승은 이미 악마의 왕이요, 제자는 악마의 백성이 되어서 미혹 한 사람들은 그의 지휘에 따라 모르는 사이에 생사의 바다에 헤맨다." 에서 처럼 <악마의 왕>이 되기에 이르렀다.
내가 앞에서 왜 심각하다고 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진퇴양난의 거사를 위해 방법을 제시해 본다.
그나마 인정했던 달마, 육조마저도
다 죽이는 것이다. 돈오는 본래 부처와 보살도 죽이는 法인데, 더욱 거사가 다 죽여놓은 조사들에 둘만 더하면 되지 않는가?
돈오와 돈오후의 돈수,점수는 다릅니다. 명확하게 돈오했으면 시간을 보내며 업장을 녹여야 합니다.
내가 진리인걸 알기에 붓다라 생각할수도 있고 업장을 닦은후에 붓다라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원문81쪽>
나는 아직까지는 스님을 당해낼 만큼 재간이 미치지 못함을 알았다. 이것은 깨침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다루는 능력 여하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나는 여태껏 속가에 살면서 경전이나 어록을 거의 보지 못했고 귀동냥도 없었으므로
스님을 당해내기에는 역부족임을 알았다.
비판 : <영원한 대자유인>의 이런 대목을 대할 때 나는 참으로 곤혹스럽다. 반박할 여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도저히 법기거사의 정신세계에 무척이나 헷갈려 그 진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분명 스스로 “돈오”했다 장담을 했었다. 그 돈오란 구경각을 말하는데 여기서의 “깨침”과도 같은 경지이다. 물론 박성배 교수와 같이 “깨침”과 “깨달음”을 구분하는 이도 있다. 이것은 불교의 수행의 핵심 용어들-거사가 이 책에서 주로 사용하는 ‘오매일여’, ‘돈오’, ‘삼매’, ‘구경각’등을 포함하여-이 말하는 이와 받아들이는 이의 정신적세계와 언어적 한계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인데, 이러한 모든 상황을 매우 폭넓게 인정한다 하더라도 거사의 “용어”는 대단히 작위적이며 일관성이 없고 더욱 그 표현의 “타이밍”이 매우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앞에서의 돈오나 지금의 깨침은 불교를 아는 누구든 그 의미가 구경각(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렀다는 말로 받아들일 것이다. 아마 성불로 단정하여 사용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실제 93쪽에서는 돈오, 견성, 성불, 구경각을 같은 의미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분명 「돈오하면 구경지극(究竟至極)의 “깨침”」이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거사는 “깨침의 차이가 아니라 사람 다루는 능력의 차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의 거사의 “깨침”은 그 수준이 초등학생이 한글을 깨쳤다 정도의 수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니면 돈오, 견성, 성불, 구경각은 같지만 우리말인 “깨침”은 다른 수준의 말인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돈오 했다, 깨침에 이르렀다는 이가 걸핏하면 俗家핑계나 경과 어록을 보지 못한 이유를 들먹인다
. 삼매관성이나 화두타파에서는 나름대로의 지견과 논리(비록 비판은 했지만)로 생각해줄 수도 있지만 이런 부분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솔직히 죽어가는 불교에 큰 쟁점을 던져주는 거사를 당당히 자랑스럽게 받아들이고 싶어도 이런 부분에 이르면 화가 나버린다.93쪽의 “수행자가 돈오하면 수행방편이 나오던 곳인 자성을 보게 되므로 견성이라고 하며, 돈오하면 중생의 속성은 부처의 속성으로 바뀌므로 성불(成佛)이라 하며, 돈오하면 구경지극(究竟至極)의 깨침이므로 구경각(究竟覺) 등으로 부르게 된다.”이 얼마나 호쾌한 말인가? 역대 조사의 어록에서도 볼 수 없는 멋진 설명 아닌가? 나는 이 말이 <영원한 대자유인>의 압권이라 생각하고, 셀수 없이 읽고 또 읽었다. 마치 빈센트 반 고흐나 램브란트의 명작 앞에 떠나질 못하고 종일 서 있듯이… 하지만 답답하게 앞에서도 말했듯이 다른 이들이 다 못 푸는 미적분을 푸는 방법을 제시는 하면서도, 왜 구구단은 못 외우느냐 말이다!
위없는 견성을 했어도 업장 녹이는건 따로 해야 할일이고, 성법스님은 그것까지 포함해서 말하는거 같군요.
돈오의 해석차이라 보여집니다. 이미 붓다인지 업장까지 녹여야 붓다인지.
<원문89>
중생(衆生)이란, 무기(無記)와 번뇌(煩惱)라는 속성이 주체(主體)인 자성(自性)을 망각하게 하고
어둡게[昧]하여, 속성이 삶을 주재(主宰)하는 존재를 말한다. 따라서 중생은 그 속성이 주재한 것은 인(因)이 되어 연(緣)을 만나면 과(果)로
받는 피동의 육도윤회(六道輪廻)만 계속하는 업생(業生)인 것이다. 부처란, 중생이 수행에 의하여 무기와 번뇌를, 망각하지 않음인 불망(不忘)과
어둡지 않음인 불매(不昧)로 그 속성을 바꾸어, 주체인 자성이 삶을 주재하는 존재를 말한다.
비판 : 중생과 부처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는데, 비판의 요점은 중생의 속성에 따로 “무기”란 영역을 부여한 것에 대함인데, 달마어록과 돈황본단경을 보면 그 “무기”의 영역이 중생의 속성의 어느 부분에도 없다. 거사의 견해가 맞다면 달마와 혜능이 틀렸다는 말이 된다. 해당부분을 추려보았다.
#참고자료1-- 달마어록 本性論 중
자신의 본성을 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처다. 그렇지 않은 자는 누구든지 중생이다. 그러나 중생의 본성과 따로 떨어진 곳에서 부처의 본성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런 것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중생의 본성이 곧 부처의 본성이다. 이 본성을 벗어나서는 어떤 부처도 없다. 부처는 우리의 본성이다. 이 본성 외에 더 이상의 부처도 없고 부처 외에 더 이상의 본성도 없다.
#참고자료2--돈황본 단경 중
*사람의 성품은 본래 청정하되 망념이 있어서 진여를 덮고 있으니 망념이 없어지면 본래의 성품이 깨끗하니라.
人性(姓)은 本淨이로되
爲妄念故로 盖覆眞如하니 離妄念하면 本性(姓)이 淨하니라 -敦 298
성철 해설: 망상이 소멸하면 본래로 청정한 자성이 스스로 드러나니, 이것이 식심(識心 마음을 앎)이며 견성이다.
*자성(자기의 성품)이 미혹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자성이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니라.
自性을 迷하면 佛卽衆生이요 自性을 悟하면
衆生이 卽佛이니라 -敦 315
성철 해설: 불(佛)은 구경묘각(究竟妙覺)이며, 십지(十地),등각(等覺)도 미혹중생이니, 정오정각(正悟正覺 바르게 깨치고 바르게 깨달음)이 아니다. 식심견성은 정오정각을 말함이니, 그것은 구경묘각이라야 한다.
비판을 마치며 告함
법기 강정진거사의 <영원한 대자유인>(이하: 대자유인)은 확실히 유별난 책이다. 적어도 지난 10여년 동안 나는 이와 같은 책을 접한 일이 없다. 유별나다는 말은 긍정과 부정의 극단을 보이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말인데, 이제 대자유인의 비판을 마치며 보다 큰 문제제기를 하고자 한다.
사실 나는 대자유인을 사두긴 했어도 읽어보지는 않았다. 솔직히 관심 밖이었다. 특히 앞에 ‘서울대생을 출가시킨’이란 붙임이 상업적인 그저
그런 책이려니 하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대자유인을 비판하는 책이 출간되어 구입하였다.
출가자가 출간한 비판서이니 그
책을 보면 대자유인의 내용과 비판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나는 그 비판서를 보며 상당히 의아스러웠다. 비판서에 쓰여진 대자유인의
내용이 그 정도 수준이라면 그 비판의 어리숙함에 출가자로서 부끄러움을 느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대자유인의 서문과 수행모임 대표의 글을 보면 이 책은 1996년 봄에 처음 출간된 것으로 되어있다. 그 후 지난 5월 개정판을 내며 불교수행에 관한 본격적인 내용의 책으로는 드물게 지금까지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는 유별난 책이다. 나는 한번의 비판의 글을 쓸때마다 자유인을 거의 한번씩 읽다시피 하였다. 이것은 나로서는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물론 남의 책을 비판한다는 것이, 그것이 일반 교양서적이나 소설의 비평이 아닌 불교의 핵심을 다룬 책이라면 그 정도의 수고는 당연할 수 도 있다.
가감없이 말하건데 내가 소장하고 있는 서적은 전집을 제외하고도 3000권을 훌쩍 넘는다. 그리고 본 “불교경전 총론”의 자료를 올리기 위해 최근 2~3년간 본 책만 해도 500권에 족히 이른다. 이제는 책을 보는 이력이 붙어 웬만한 단행본은 목차와 각 章별로 몇페이지만 읽어도 그뜻이 파악된다. 그런 의미에서도 대자유인은 역시 유별나다.
대자유인은 거사의 수행의 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1부와 그 후 수행불행(修行佛行)의 경지에 이른 거사가 수행방법에 대해 이끌어 주는 나머지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수행불행이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부처로서 행하는 일을 말한다. 정리하면 자유인은 2부 이후의 법기거사의 성불선언과 교화와, 자신의 성불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 1부로 확연히 나눌 수 있다.
나의 비판은 1부에서 그치고 있는데, 이것은 계획된 일이 아니다. 비판을 하다보니 1부와 나머지 부분의 비판이 상당부분 중복되기 때문에 더
이상의 비판은 무의미하다는 판단에서 이다. 물론 1부 이후의 부분에서도 내가 동의 할 수 없는 부분이 여전히 있다.
대표적인 것이
무기(無記)란 용어의 사용처 중 일부는 무기공(無記空)이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논쟁의 대상”이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선 자유인에 대해 아직도 가시지 않는 의문은 수행의 과정을 기술한 1부와 그 후의 내용이 전혀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이 느껴진다는 것이 다. 1부의 용어를 보면 도무지 일관성이 없고, 더더욱 그 표현과 언어의 구사가 어설프기 짝이 없다. 그 자체 문맥으로 보아도 앞뒤가 맞지 않는 곳이 허다하다. 예를 들어 돈오 후에도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는 식인데, 거사는 분명 돈오는 성불의 경지인 구경각이라고 밝히고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거사가 스스로 수행불행에 이르렀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 말은 “나는 부처가 됐다’는 선언과 같다. 禪家의 상식은-거사의 경계에서 상식을 논하는 것은 우습겠지만-깨달음이란 그 자체를 이루었을 때 주변사람은 물론 정작 당사자도 모른다고 한다. 나는 이 두 가지만 제외하면 법기거사와 대자유인은 오히려 폄하되고 있다고 확신한다.
거사의 사상은 육조와 성철스님의 “돈법(頓法)”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어느 부분에서는 성철스님과는 또 다른 “섬세함”도 지니고 있다. 특히 돈오점수란 말은 있을 수 없고, 굳이 표현하자면 점수돈오라 해야 한다는 말과 조사의 格外에 대한 언급, 현재 한국불교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거사의 말과 경계가 거사가 주장하듯 성불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 나의 생각인데,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 출가와 재가를 떠나, 법거량의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근세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견성”(이 말은 육조나 성철스님, 법기거사 모두 돈오,구경각과 함께 성불과 같은 의미로 쓴다. 나는 견성만은 다른 개념으로 정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했다 하는 자칭 타칭 선지식들과 오도송이나 열반송을 남길만한 어느 스님에게서도, 또한 현존하는 어느 큰스님에게서도 참다운 의심이 제기되는 법문이나 글을 본적이 없다. 물론 성철스님의 경우는 예외이지만. 이 말은 그 분들의 불교는 경전과 조사어록에 너무나 충실하고 당연한 말이어서 따로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는 참으로 불경스럽고 외람된 표현이다. 하지만 사실인 것을 어찌하랴!
성철스님의 위대함은 우리에게 살아있는 불교를 열어 주셨다는 점이다. 보조를 주장하는 이 들에게야 청천병력 이었겠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나는 성철스님이 달라이라마보다도 훌륭하시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것은 법기거사의 경우에도 적용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내가 바람
난 사람 감시하다가 같이 바람난 것과 같은 경우는 분명히 아니다.
다만 출가해 계를 받고 몇 년만 지나면 중 된 것이 마치 신분상승이나 큰
벼슬이나 한 듯이 생각이 굳어져 가는 현실속에, 단지 재가자라는 이유만으로 또 허물이 있다 하여, 그의 수행의 경계까지 무시하고 냉대하는
그야말로 속된 일이 佛家에서는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내가 비판을 마치는 변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돈점의 논쟁과 같이 대자유인도 “쟁점의 대상”이 되어 실종되어가는 한국의
불교를 살아 숨쉬며 성성한 불교로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제가 보기에는 강거사의 말이 대부분 일리가 있고 수긍할수 있는 내용입니다.
저는 원래 불교인이 아니고 구도자였기 때문에 이런저런 잡다한 지식을 자연스레 접하였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때 강거사의 말이 대부분 수긍이 갑니다.
성법스님은 자기의 테두리 혹은 불교의 테두리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한거 같습니다.
이미 이글들을 쓴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 두분다 많은 진전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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