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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장. 죽음에서 벗어나다.(兩世爲人)
옷장 속은 답답하고도 매우 어두웠다. 만약 이심환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와 같은 상황 아래서 옷장에 갇혔다면 아마 질식과 긴장으로 인해 미쳐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심환은 오히려 마음이 매우 안정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그는 우선 자기의 마음부터 안정시킨다. 아무리 조급해 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영영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아니, 이게 무슨 짓들이에요? 당신들은 강도인가요?"
이심환은 이 말을 듣자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는 자신이 맨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영영이 강도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영영은 비록 다른 것은 잘 배우지 못했지만 거짓말을 하고 시치미를 떼는 것은 임선아가 무색할 정도였다.
그러나 나타난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리저리 헤매며 무엇인가 열심히 찾고 있는 듯했다.
그때 영영의 고함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곳은 저희 아씨의 규방인데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함부로 들어오는 거죠?"
이제야 들어온 사람이 입을 열었다.
"우린 너희 아씨를 찾으러 왔다."
이 음성은 매우 부드러웠고 듣기도 좋을 뿐만 아니라 웃음까지 섞여 있었다. 나타난 사람은 의외에도 여인이었다.
이심환은 설마 여자가 이곳을 찾아올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영영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두 분께선 저희 아씨를 찾아오신 것이라고요? 그렇다면 저희 아씨를 알고 계시나요?"
그 여인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물론 알고 있다. 그리고 매우 절친한 친구이다."
영영이 웃으며 눈을 곱게 흘겼다.
"그렇다면 진작 말씀해 주실 것이지 저는 두 분이 강도인 줄만 알았잖아요?"
그 여자도 웃으며 되물었다.
"우리가 정말 강도처럼 보이느냐?"
"두 분께선 정말 뭘 모르시는군요. 지금의 강도는 옛날과 달라 어떤 강도는 두 분보다 더 아름다워 강도질을 하기 전에는 강도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라니까요."
영영은 정말 영리한 소녀였다. 그녀는 은근히 상대를 모욕하면서도 입에 담지 못할 더러운 말은 한 마디도 섞지 않았다.
이때 또 다른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희 아씨께선 어딜 가셨느냐? 좀 불러 주겠니?"
이 음성은 매우 낮았고 약간 쉰 듯했지만 듣기에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이심환은 이 음성이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고 느꼈지만 누구인지는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영영이 웃음 섞인 음성으로 대꾸했다.
"저희 아씨께선 며칠 전 이곳을 떠나셔서 지금은 저 혼자 있어요. 그러니 두 분께선 무슨 용무가 계신지 모르겠으나 제게 얘기해 보세요."
그 여자가 약간 의아한 음성으로 물었다.
"언제쯤이면 돌아올까?"
"모르겠어요. 아씨께선 아무 말씀이 없으셨는데 제가 어떻게 감히 여쭙겠어요?"
그때 다른 한 명의 여자가 냉랭하게 웃었다.
"우리가 오니까 나갔다니 이처럼 우연한 일이 어디 있다지? 혹시 우리가 온다는 것을 알고 미리 피한 게 아닐까?"
이 말은 보통 감정의 말이 아니었다. 혹 그녀들은 남편이 이곳에 와 바람을 피우기 때문에 따지러 온 것이 아닐까.
그러나 영영은 여전히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두 분께서 아씨의 친구라면 두 분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왜 피했겠어요?"
그 여인은 약간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사람은 다 만나도 친구는 만나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하는 소리가 아니냐?"
그러자 한 여인이 다시 냉랭하게 말을 받았다.
"어쩌면 그 친구들에게 미안한 일을 무수히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영영은 웃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두 분께선 참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이렇게 좁은 곳에 숨었다면 어디에 숨었겠어요?"
"그래? 내 비록 이 방에 대해선 익숙지 않으나 만약 내가 숨는다면 어디엔가 숨을 곳이 반드시 있을 거야."
영영은 등 뒤에 있는 옷장을 두들겼다.
"그렇다면 이 옷장 속에 숨었겠군요?"
이렇게 반문한 그녀는 생긋 웃으며 다시 보충했다.
"그러나 옷장 안에 숨는 게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알고 계시나요?"
그 여자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맞다. 너희 아씨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옷장 안에 숨을 수 있겠느냐?"
여자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그러나 지금 너희 아씨가 이 옷장 속에 없다면 이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누구냐?"
영영은 짐짓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누구라니요? 이 옷장 안에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여자는 매섭게 다그쳤다.
"만약 옷장 안에 사람이 없다면 너는 어째서 옷장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는 거냐? 우리가 너희 아씨의 옷을 훔쳐갈까 봐 겁이 나서 그러느냐?"
영영은 몸을 심하게 움직이면서 두 여인을 번갈아 보았다.
"제... 제가 언제 옷장 문을 막았다는 거죠?"
여인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것 봐, 꼬마 아가씨. 자넨 비록 총명하기는 하지만 너무 어려. 우리 같은 여우를 속이려면 몇 년 더 있어야 한다. 알겠느냐?"
이에 이심환은 비록 옷장 안에 갇혀 있어서 영영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지금 그녀의 표정이 매우 흉하게 변해 있을 것이라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자신의 심정 또한 매우 고통스러웠다.
한 남자가 옷장 속에 숨어 있는 것이 발각된다는 것은 별로 유쾌한 일이 못된다.
더구나 이심환은 지금 두 여자가 자기를 어떤 사람으로 여길는지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여자의 음성은 매우 가늘고 부드럽기는 했지만 말 한 자 한 자에 가시가 돋쳐 있는 것으로 보아 보통 무서운 여자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한 여자는 비록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완전히 시비적인 어투였고 임선아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두 여자의 발걸음소리로 미루어 보아 공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모르긴 해도 임선아와 비교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 같았다.
이심환은 머리가 어지러워 지금 옷장 안에 있는 인간이 자신이 아닌 임선아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 두 여자에게 호되게 혼이 나길 원했다. 임선아는 남자들을 상대하는 방법은 잘 알고 있겠지만 여자를 대하는 방법은 별로 모를 것이다.
"흠....."
그때 영영의 신음 같은 한숨이 새어나오는 것과 동시에 옷장 문이 열렸다.
이심환은 그만 두 눈을 감았다. 그는 이 두 여자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했으면 하고 속으로 열심히 원했다.
이때 그 여자는 옷장 안에 임선아가 아닌 다른 남자가 숨어 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매우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얼마쯤 멍청하게 서 있던 그 여자는 까르르 웃으며 영영에게 물었다.
"호호호호... 이 사람이 누구인데 이곳에서 자고 있는 거지?"
영영은 더듬거리며 겨우 대꾸했다.
"그... 그 사람은 제 사촌오빠예요."
그 여자는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하며 빈정거렸다.
"정말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나도 어렸을 땐 가끔 사랑하는 사람을 옷장 속에다 숨겨 두었지. 그런데 언젠가 한 번 발견이 되었을 때 나도 사촌오빠라고 변명을 했었다."
그녀는 짐짓 재미있는 듯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어째서 세상 여자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촌오빠라고 하길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그보다 더 좋은 칭호는 없을까?"
영영은 귀엽게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저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아마 다음번엔 사촌오빠라고는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재미있는 아가씨군. 철도 없고 말이야."
이때 쉰 음성의 여자가 더 지체하기 싫은 듯 말했다.
"임선아가 이곳에 없으니 우린 그만 가기로 하죠."
그러나 정작 옷장 앞에 선 여자는 다른 속셈이 있는 듯했다.
"뭐가 그리 급하지? 우리 기왕 온 김에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하자."
이심환은 옷장 문이 열린 순간 진한 향기를 맡았다. 그런데 그 향기가 점점 짙어지는 것으로 보아 그 여자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마간의 답답하고 지루한 침묵이 흘렀을 때 그 여자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아가씨, 아가씨는 비록 어리기는 하지만 남자를 선택하는 데는 상당한 솜씨와 조예를 갖고 있군."
그러자 영영의 웃음 섞인 맑은 음성이 뒤따랐다.
"이곳엔 남자들이 없어요. 설사 있다고 한들 아씨께서 전부 차지하시니 저는 어쩔 수 없이 이런 남자를 택할 수밖에요."
그 여자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이심환을 탐색하듯 온몸을 두루 살폈다.
"어째서 이런 남자를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냐? 이 사람은 비대하지도 마르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생김새도 괜찮고 더 나아가선 여자에 대한 경험도 매우 많은 것 같은데."
영영은 그제야 말할 구실을 찾은 듯 수다스럽게 떠들었다.
"그래요. 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물론 괜찮기는 하지만 너무 잠자는 것을 좋아해서 탈이에요. 한번 잠들었다 하면 세상이 두 조각이 나도 일어날 줄을 몰라요."
그 여자는 재미있다는 듯 다시 까르르 웃어댔다.
"호호호호... 어쩌면 너무 피곤했는지도 모른다. 너같이 어린 계집애를 만났으니 당연히 피곤하기도 할 거야!"
그러나 영영은 불만스럽다는 듯 앙칼지게 말했다.
"그렇지만 나이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그 여자는 눈알을 굴리며 시종 이심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렇구나. 너 같은 계집아이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은 것 같다. 마침 나라면 알맞겠구나."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한바탕 방이 떠나가라 웃어젖히고 난 후 다시 이었다.
"이것 봐, 아가씨. 만약 이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게 주는 게 어때? 대신 이 사내보다 훨씬 젊고 멋있는 남자를 소개해 줄 테니까."
그녀는 이심환을 본 순간 갑자기 음탕한 여자로 변해 버렸다. 여자는 입으로 웃고 떠들며 손을 내밀어 마치 어린아이를 안 듯 이심환을 안아 올렸다.
이렇게 되자 이심환은 자연히 두 눈을 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순간 이심환은 두 눈을 떴다가 하마터면 놀라 그 자리에서 기절을 할 뻔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심환을 안은 여인의 나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많아야 스물 대여섯밖에 되어 보이지 않았고 생김새도 그다지 미운 편은 아니었다. 백옥같이 흰 피부에 두 눈은 왕방울만 했고 입은 방금 따온 앵두처럼 붉고 탐스러웠다. 그리고 웃는 얼굴에는 보조개까지 패이는 것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얼굴 윤곽을 빼놓고 그 외의 것은 차마 두 눈을 뜨고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여인의 턱은 세 겹이나 비곗살로 주름이 졌고 몸은 살찐 암퇘지보다 더욱 비대했다. 이런 여인의 품에 안긴 이심환은 마치 푹신한 솜이불에 누워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심환은 그렇게 음성이 부드럽고 또 웃음소리가 방울이 짤랑거리는 것 같은 여인이 이처럼 비대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심환은 여태까지 각양각색의 여인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이렇게 비대한 여인은 보다 생전 처음이었다.
일개의 남자가 이런 여인의 품에 안긴다면 차라리 접시 물에 빠져 죽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러나 이심환을 더욱 놀라게 만든 것은 또 한 명의 여자를 본 순간이었다.
그 여자는 매우 아름다웠다. 그리고 몸집 또한 날씬했고 물 찬 제비와도 같았다. 그 날씬한 몸에 온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남색 옷을 온몸에 꽉 달라붙도록 입고 있었는데 또 옷소매는 바람에 타는 듯 매우 넓었다. 그녀의 이런 자태는 마치 선녀가 구름을 타고 날아다니는 것과 같았다.
이 여인은 바로 다름 아닌 이심환에 의해 손이 하나 부러진 남갈자였다!
이심환은 절로 기나긴 탄식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남갈자는 이심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듯 아무런 표정도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심환을 안고 있는 비대한 여인은 웃을 때엔 온몸이 지진을 만난 듯 흔들거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는 이심환도 마치 커다란 지진을 겪고 있는 듯했다.
영영은 약간 당황해 하며 크게 소리쳤다.
"그 사람은 몹시 더러워요. 몇 달 동안 목욕도 하지 않았으니 어서 그를 내려놓으세요. 그의 몸엔 이가 들끓고 있을 뿐 아니라 빈대도 우글거리고 있어요."
비대한 여인은 눈을 크게 뜨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더럽다고? 어째서 더럽다는 거냐? 설사 그의 몸에 빈대가 있다고 해도 나는 상관없다. 남자의 몸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라면 그 남자의 체취가 묻어 있을 게 분명하니까."
이렇게 말한 그녀는 간드러지게 웃어젖히더니 다시 말했다.
"호호호호... 그저 남자의 냄새가 나는 것이라면 나는 무엇이나 다 좋아하니까."
영영의 표정은 정말 보기 딱할 만큼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그러나... 그는 술귀신일 뿐만 아니라 더럽기가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사내예요."
비대한 여인은 계속 그녀의 말을 받아넘겼다.
"술귀신이라고? 주량이 많은 사람일수록 사내대장부다운 기질이 있다."
이렇게 말한 그녀는 이심환의 얼굴을 한 번 쓰다듬더니 다시 말했다.
"당신이 만약 술을 좋아하신다면 내 기꺼이 그 시중을 들겠어요. 어떠한 일들은 술을 마신 후 더 흥미가 있을 테니까 말이에요."
영영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상황 아래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날카롭게 소리쳤다.
"평소에는 매우 담담하고 무게가 있으나 여자를 보면 갑자기 가벼워지는 남자들을 색귀라고 하죠. 그러나 그런 여자들더러는 어떻게 칭해야 하나요?"
비대한 여자는 영영의 그 말을 듣자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턱의 주름살을 흔들며 웃어젖혔다.
"호호호호... 그런 여자도 바로 색귀다. 내가 바로 그런 여색귀다. 나는 남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 알겠느냐?"
영영은 싸늘하게 비웃었다.
"그럼 남자들이 과연 당신을 좋아할까요?"
"오냐. 내 비록 살이 찌기는 했지만 여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남자들은 뚱뚱한 여자들이 겨울엔 따스하고 부드러우며 여름엔 시원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비대한 여인은 이심환을 내려다보며 만족한 듯 웃고 나서 다시 말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이 사람은 곧 알게 될 것이다."
순간 영영은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웃는 것이 마치 금방 미쳐 버린 것 같았다.
비대한 여인은 두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어째서 웃는 거냐?"
영영은 그래도 웃음을 그치지 못하고 겨우 대꾸했다.
"당신의 몸이 너무 크고 또 미련스러운 것에 대해 웃고 있는 거예요."
미련한 여인은 그녀를 쏘아보았다.
"내가 어째서 미련하다는 거냐?"
영영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이심환을 가리켰다.
"당신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그러자 비대한 여인은 오히려 반문해 물었다.
"그렇다면 넌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영영의 표정은 이 순간 매우 어른스러웠다.
"당신은 설마 저 사람의 사촌동생은 아니겠죠?"
비대한 여인은 조금도 막히는 데 없이 대답했다.
"너는 대환희여보살(大歡喜女菩薩)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았겠지? 내가 바로 여보살좌하의 지존보(至尊寶)다. 나는 남자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다 잡아먹는다."
영영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대들었다.
"하지만 저 사람을 잡아먹을 땐 조심해야 할 거예요. 목에 걸리기 십중팔구일 테니까."
지존보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날렸다.
"나는 유수한 남자들을 다 먹어 왔지만 여태까지 목에 걸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말한 그녀는 싸늘한 눈초리로 영영을 노려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이것 봐, 꼬마 아가씨. 내 좋은 말로 전하겠는데 일찌감치 입 다물고 있는 게 좋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눈도 감고 있는 게 좋겠군."
그러나 영영은 더욱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그러나 최소한 당신은 그가 누구인지 알아야 할 게 아닌가요?"
지존보는 냉랭한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내가 알고 싶으면 직접 물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나는 이 자의 이름을 알기 전에 남자라는 그 사실만으로도 족하다."
지존보는 더 이상 말하기 싫은 듯 남갈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 부탁하겠는데 이 애를 좀 끌어내 가다오. 우선 이곳에서 몸 좀 풀어야겠으니. 그러나 절대 훔쳐보아선 안 된다."
순간 이심환은 전신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심한 구토를 느꼈다. 혈도가 찍혀 꼼짝달싹할 수도 없는 몸이라 이심환은 남갈자가 자신에게 복수하는 셈치고 단번에 자신을 죽여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남갈자는 생전 처음 보는 사내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 본체만체 하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다는 말인가.
이렇게 잠시 동안 이심환의 숨통을 조이는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남갈자가 갑자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저 남자는 나도 필요해요."
순간 지존보의 안색이 싹 변했다.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남갈자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한 자 한 자 분명하게 말을 했다.
"나도 저 남자가 필요해요."
갑자기 지존보의 두 눈에서 공포스러운 흉광이 무섭게 폭사되어 나왔다.
"네가 감히 나의 남자를 빼앗으려는 거냐?"
남갈자는 갑자기 어디서 용기가 생겼는지 지존보를 냉랭하게 노려보았다.
"꼭 빼앗아야만 되겠어요."
일순 지존보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수없이 그 변화를 반복하더니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오냐. 네가 만약 꼭 이 남자를 갖고 싶다면 우리 자매끼리 충분히 상의할 여지가 있는 일이 아니냐?"
남갈자는 표독스럽게 그의 말을 잘랐다.
"나는 그의 몸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의 목숨이 필요해요."
지존보는 그제야 안심한 듯 음탕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잘 되었구나. 내가 이 남자와 한바탕 즐긴 후 죽여도 되지 않겠느냐?"
그러나 남갈자는 양보할 기색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저 자를 죽이고 난 후 재미를 봐도 되지 않나요?"
지존보의 두 눈에 노기가 가득 떠올랐으나 여전히 웃으면서 말했다.
"내 비록 남자를 매우 좋아하기는 하지만 죽은 사람에겐 흥미가 없다."
남갈자는 이제야 두 눈을 크게 뜨고 이심환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지금 저 자는 죽어 있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죠?"
지존보는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저 자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혈도가 찍혀 있기 때문이다. 내겐 저 자를 움직이게 할 방법이 있다."
남갈자는 정색을 하며 냉랭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저 자가 움직이게 되면 나는 저 자의 목숨을 가질 수가 없어요."
이때 영영이 끼어들더니 냉랭하게 소리쳤다.
"맞아요. 만약 그가 움직이게 되면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될 거예요."
지존보는 그녀를 쏘아보며 노기 띤 음성으로 소리쳤다.
"그렇다면 이 자가 도대체 누구라는 말인가?"
영영은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매섭게 내뱉었다.
"바로 그 유명한 소이비도예요!"
순간 지존보는 그만 그 자리에 굳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일순간, 그녀는 이내 믿지 못하겠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떼었다.
"나... 난 믿을 수 없어. 만약 이 자가 진짜 이심환이라면 어째서 너 같은 어린 것에게 반했겠느냐?"
영영은 초롱초롱한 눈을 크게 뜨고 대꾸했다.
"그가 나에게 반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반한 거예요. 그래서 난 당신들이 빨리 그를 죽이기를 희망하고 있어요."
지존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소리쳐 물었다.
"너 그게 무슨 소리냐?"
영영의 표정은 몹시 야멸찼다.
"저희 아씨께선 제게 말씀하셨어요. 만약 한 남자에게 반해 그 남자를 좋아하게 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그를 정복할 것이며 만약 그렇지 못하면 다른 여자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죽이라고 했어요."
지존보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길게 탄식을 터뜨렸다.
"난 네가 그처럼 악랄한 줄은 미처 몰랐다."
영영은 쉬지 않고 핍박해 들었다.
"당신은 그래도 저 남자가 필요해요? 당신에게 그만한 담량이 있나요?"
지존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천천히 말했다.
"여자에게 파묻혀 죽는다면 지옥에 가서도 풍류객(風流客)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이 이심환 같은 남자와 하룻밤의 정을 쌓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남갈자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침을 삼키며 계속해서 말했다.
"너도 너무 조급해 하지 마라. 내가 이 사람과 재미를 보고 난 후에 너에게 죽일 기회를 줄 것이다."
남갈자는 그를 냉랭하게 노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존보는 다시 이었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너를 돕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그러니 너도 최소한 내 체면은 세워줘야 할 게 아니냐?"
남갈자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이렇게 말했다.
"남자의 손이 끊어져 있어도 흥미가 있다는 말이군."
지존보는 이미 육욕에 눈이 뒤집혀 있었다.
"두 손이 부러졌다 해도 상관없다. 단지 다른 곳만 부러지지 않았으면 되는 것이다."
남갈자는 매정하게 소리쳤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그의 손을 끊어 놓겠어요."
지존보는 무엇이라 반박을 하려다가 그녀의 싸늘한 표정을 보자 이내 입을 다물고는 잠시 후에 말을 꺼냈다.
"좋다. 그럼 오른손이 필요하냐? 왼손이 필요하냐?"
남갈자는 이제야 이심환의 존재를 의식한 듯 얼굴에 살기를 가득 떠올리며 이를 갈아붙였다.
"그가 나의 오른손을 잘라 놓았으니 나 역시 오른손을 끊어야 합당한 일이죠."
지존보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의 오른손을 잘라라.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 피를 많이 흘리지 않아야 한다. 흥이 깨지니까 말이다. 그저 너의 그 갈자 꼬리로 한 번 긋기만 하면 되겠지."
남갈자는 순순히 응했다.
"그렇게 하죠."
남갈자는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이때 영영이 새파랗게 안색이 변해 소리쳤다.
"정말 당신들은 그를....."
영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존보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달랬다.
"어린 아가씨, 너무 가슴 아파하지는 마시게."
이 순간 남갈자의 손에서 이미 파란 광채가 폭사되어 나오고 있었다.
"으악!"
동시에 처절한 비명이 온 방 안에 울렸다. 이어 이심환의 몸은 방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그런데 그 비명은 이심환의 입에서가 아니라 지존보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라는 것을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비명소리가 터지는 동시에 이심환은 방바닥에 굴러 떨어지고 지존보는 남갈자를 향해 미친 듯 덮쳐갔다.
그러나 남갈자는 가냘픈 허리를 돌리더니 옆으로 일곱 자나 피해 갔다.
지존보의 몸도 비록 비대하기는 했지만 그 동작은 마치 물 찬 제비와 같이 경쾌하고 신속했다. 지존보는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남갈자의 손을 재빠르게 낚아챘다.
순간 남갈자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그러나 반대로 지존보의 안색은 검푸르게 변했고 가뜩이나 큰 두 눈이 앞으로 툭 튀어나온 게 그처럼 공포스러울 수가 없었다.
지존보는 남갈자의 손을 낚아챈 후 이를 갈아붙였다.
"네 이년, 네가 감히 내게 암산을 전개하려고 하다니 내 먼저 너를 죽여주마!"
지존보의 이 말이 끝나는 동시 헝겊이 찢어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며 남갈자의 손은 소매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이때 남갈자는 뒤로 대여섯 걸음이나 물러났는데 그녀의 표정에는 고통의 빛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존보가 잘라낸 것은 바로 남갈자의 오른손이었다.
그때 남갈자가 요사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호... 지금 너의 손에 잡혀 있는 게 무엇인지 한번 보아라."
지존보가 움찔하여 오른손을 들어 보니 반쯤 찢어져 나온 소매 안에는 푸른 광채가 번뜩이는 갈자 꼬리가 들어 있었다.
이제 보니 남갈자는 이심환에게 오른손이 잘린 후 자신의 병기를 잘라 그 상처 부위에다 붙이고 넓은 소매로 감쪽같이 감추고 있었던 것이었다.
남갈자는 계속 냉랭하게 말했다.
"내 갈자 꼬리에 묻은 독에 중독이 되면 일곱 걸음도 못 가 즉사를 하고 만다. 그러나 너 같은 인간은 세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이년, 어디 두고 보자!"
지존보는 고래고래 악을 쓰며 육중한 몸을 놀려 미친 듯 다시 덮쳤다.
그러나 남갈자의 말대로 지존보는 세 걸음도 채 옮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남갈자는 더 이상 지존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심환을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남갈자는 고개를 숙이고 싸늘한 눈초리로 한참 그를 노려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곡은 임선아를 찾아갔기 때문에 죽은 것이에요. 그리고 내가 오늘 이곳에 온 것은 임선아와 결판을 내기 위한 것이지 당신과 어떤 상관이 있어 온 건 아니에요."
그때 영영이 끼어들면서 말했다.
"당신은 그와 얘기를 하면서 어째서 그의 대답을 듣기 위해 혈도를 풀어 주지 않는 거죠?"
그러나 남갈자는 그녀의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비록 내 손을 하나 잘라 놓았지만 내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어요. 이것으로 내겐 당신에 대한 약간의 은혜가 있는 것이에요. 나는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은원을 가장 분명하게 가렸어요.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조그만 은혜를 입었던 까닭에 당신이 저런 여자에게 능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어요."
이심환은 속으로 길게 탄식을 터뜨렸다. 그는 남갈자가 이런 여자일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남갈자는 이심환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어조를 싹 바꾸었다.
"지금 나는 당신에게 진 빚을 갚았어요. 그러니 당신도 내게 빚진 것을 꼭 갚아야 해요. 대가로 지금 나는 당신에게서 오른손 하나를 끊어 가겠어요. 당신은 너무 억울하다고 생각지 마세요."
이때 이심환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더니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순간 남갈자는 그만 그 자리에서 넋을 잃었고 영영 역시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심환은 비록 오른손을 자유스럽게 움직일 수 있었으나 자신의 소이비도를 발출하지 않았다!
남갈자는 이심환의 손을 내려다보며 일시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랐다.
영영은 정신을 잃고 있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당신, 당신의 손이 어떻게 해서 갑자기 움직이게 되었죠?"
이심환은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아까부터 운기를 해서 혈도를 풀었지만 공력이 부족해 마지막 일관을 뚫지 못했소. 그런데 방금 지존보의 품에서 떨어지는 순간 마지막 일관이 뚫린 거요. 말하자면 그녀가 나를 도운 것이지."
영영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그에게 다그쳤다.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남이 요구하는 대로 손을 순순히 내미는 거죠?"
이심환은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남갈자를 향해 천천히 말했다.
"남낭자, 당신의 그 요구는 절대 과분한 것이 아니요. 나는 결코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것이오. 자, 그러니 어서 내 오른손을 끊으시오."
남갈자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장탄식을 터뜨리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세상에 과연 이러한 사람이 있을까? 세상에 이런 사람이 과연 있다는 말인가?"
남갈자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홱 몸을 돌려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그때 이심환이 뛰어 일어나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기다리시오!"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
즐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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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독~2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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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잘보고갑니다
즐감~!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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