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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힐(倉頡)과 한자(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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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이 창힐을 문자를 만든 최초의 인물로 아는 것은 회남자, 한비자 같은 고대문서에서 그렇게 전하기 때문이다. 좀 더 후세의 문서인 '설문해자(設文解字)라는 문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다. 황제(黃帝)의 사관(史官)인 창힐이 새나 짐승의 발자국이 찍힌 것을 보고 처음 글자를 만들었다....
그런데 우리의 환단고기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통지(通志)' 씨족략엔 '치씨는 모두 치우의 후예'라고 되어 있고 '창힐은 고신(요임금의 아버지)과 더불어 모두 치우씨의 후예이다. 대극성에서 태어나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산동의 회북으로 옮겨 살았다.'고 하였으니....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자부선생(신시시대의 학자)께서 칠회력(曆)을 만드시고 삼황내문경(道家文)을 천폐(天陛)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이에 칭찬하셨다. 삼청궁을 세우사 거기에 거하시니 공공, 헌원(황제), 창힐, 대요(황제의 스승)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
환단고기에서는 신시 시대의 녹서(鹿書)라는 문자가 탄생한 경위를 이렇게 말한다.
환웅천왕은 신지(神誌) 혁덕에게 명하여 문자를 만들게 하셨는데....어느날 무리와 더불어 사냥을 나갔다가 한 마리 암사슴을 보고 활을 당기려는 순간 사슴이 사라져 그 뒤를 쫓다가 모래 위에 남겨진 사슴의 발자국을 보았다. 마침내 깨닫고 말하기를, 기록을 남기는 방법은 문자를 만드는 길밖에 없다고 하며 돌아와 깊이 생각한 끝에....
그렇게 탄생한 것이 녹도문(鹿圖文)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물론 신시 시대의 문서들은 녹서로 기록된 것이었다.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은 자부선생이 헌원에게 주어 그로 하여금 마음을 씻고 의(義)로 돌아오게 한 것이다....경문은 신시의 녹서로 기록되어 세 편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녹서는 그 이름이 뜻하듯이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만든 문자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 한자의 창시자 창힐도 짐승이나 새의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창안했다는 것이다.
이 창힐은 무척이나 신화적인 인물이다. 중국인들이 최고의 조상으로 치는 황제와 같은 시대에 살았고 황제의 사관을 지냈다는 그는 눈이 네 개인 인간이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양쪽에 둘씩 네 개의 눈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까? 그가 이중적인 문화성을 띈 인물임을 나타내고 있을 것이다.
공공, 헌원(황제), 창힐, 대요(황제의 스승)의 무리가 모두 와 여기서 배웠다....
후한시대의 한 무덤벽화 속에서 발견된 그의 모습은 네 개의 눈을 가졌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위의 그림) 그러면 신들은 왜 창힐을 네 개의 눈을 가진 사람으로 탄생시켰을까? 아니면 그런 신화를 만들었을까? 창힐이 황제 밑에서 사관을 지냈다면 역사를 기록할 문자가 필요했음은 분명한 일이다. 그래서 문자를 고안했지만 그 문자는 창힐 자신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신시의 녹서를 따간 것이거나 녹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뜻일 것이다. 요임금의 뒤를 이은 순임금이 눈동자가 둘씩 네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는 신화와 같은 맥락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창힐(倉頡)이라는 이름에도 그 함축성을 담고 있다. 창고(倉)에서 문자를 탈취(頡)해 간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이 되기 때문이다. 頡은 '노략질할 갈'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글자다. 황제를 비롯한 중국의 고대 인물들은 환웅이라는 주류에서 갈라져 나간 비주류의 혈통이었기 때문에 본거지인 신시황부에 가서 많은 것을 배웠는데, 그런 과정에서 문자를 창안하게 되었다는 뜻인 것이다. 그러니 한자가 한족의 창작품이라고 고집하지 말라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한자 속에는 많은 동이족의 신화가 담겨져 있다. 이는 한자를 발전시킨 중국의 학자들이 동이 계열의 인물이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큰 배를 뜻하는 선(船)자는 배주(舟) 옆에 여덟사람이 합해진 글자다. 마치 성경의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글자가 아닌가? 노아 부부, 노아의 세 아들 부부를 합해서 여덟 사람이 탔던 배는 舟가 아니라 船이었던 것이다. 한족(漢族)의 漢자도 물수(氵) 변을 가지고 있어서 한족이 대홍수 후에 태어난 종족임을 나타내고 있다. 한족 자신들은 홍수 후에 태어났으니 홍수에 대해서 알 수 없었을 것 아닌가?
지구 태초의 이야기를 말하는 반고(盤古)신에 관한 이야기와 복희(伏犧)와 여와 남매가 혼인해서 홍수 후의 인간을 탄생시켰다는 초 고대의 신화들은 한족의 신화가 아니라 요(傜 )족과 묘(苗)족의 신화라고 한다. 삼국시대의 서정(徐整)이라는 인물이 남방족의 신화였던 반고와 복희의 신화를 가져다가 삼오력기(三五歷記)라는 책으로 펴냈기 때문에 반고는 중국공통의 신화적 인물이 된 것이다. 복희에 관한 신화도 한족의 그것과 묘족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한족의 신화가 부실한 것은 그들이 대홍수 이후에 태어난 종족임을 뜻하는 것이다.
요족, 묘족 같은 남방족의 반고에 관한 신화는 지구 태초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고, 환단고기의 '삼일신고'에서도 태초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묘족은 동이족의 선조였던 9환(桓)의 하나였다. 즉 중국의 남방족은 신시의 9환족에서 갈라져 나간 종족인 것이다.
신시시대와 단군시대의 문자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복희에게는 용서(龍書)가 있고 단군에게는 신전(神篆)이 있었으니 이들 글자들은 널리 백산, 흑수, 청구, 구려(九黎)에 쓰여졌다고 했다....
복희의 용서란 그가 용의 서상을 보고 창안했다는 8괘와 관련된 문자였을 것이다. 그런 문자들이 신시의 초기인 백산, 흑수 시대부터 쓰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군에게는 신전(神篆)이 있었으니...는 무슨 말일까? 전(篆)은 전서체라는 고대의 한자를 뜻한다. 그런데 단군시대의 전서체는 神篆이라 했으니 더 고대의 한자라는 뜻일 것이다. 神篆이 어떤 문자였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우리나라의 문자는 옛부터 있었으니....부여사람 왕문이 쓴 법류부의전(法類符擬篆)과 자부선생의 내문(삼황내문)과 태자 부루의 오행(五行)은 모두 환단시대에 나온 것이다....
법류부(法類符)란 법칙을 다루는 부적(符籍)이란 뜻이고 의전(擬篆)이란 전서 비슷한 문자라는 뜻이다. 예컨데 천간십이지(甲乙丙丁...子丑寅卯....)를 나타내는 글자 같은 것들을 모아놓은 책이 법류부의전이었을 것이다. 천간십이지는 각기 하늘과 땅의 이치를 나타내는 문자들로서 아주 간단한 문자들이며 처음에는 부적의 형태로 만들어진 글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간십이지의 문자들도 신시시대에 만들어진 것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것이 神篆이었던 것이다. 녹도문은 일반인들이 사용한 문자이고 신전은 학문적 문자였던 것이다.
옛날엔 계해(癸亥)를 썼나니 단군 구을이 처음으로 갑자를 써서 10월을 상달이라 하고 이를 한 해의 시작이라 했다. 6계(癸)는 신시씨(환웅)에 의하여 신지(神誌)에게 명하여 제정한 것으로 계(癸)를 처음 시작으로 했다.....
癸와 亥는 각기 천간(天干)과 십이지(十二支)의 마지막 글자다. 천간십이지(甲,乙丙...子丑寅,卯)는 단순한 문자들이며 한자의 최초형태였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것들이 초대 환웅의 시대에 신지(神誌-문교장관)에게 명하여 제정되었다는 것이다. 동양학의 뿌리가 신시시대에 있었음이 분명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