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의 노래 1
월트 휘트먼
나는 나 자신을 기리고 나 자신을 노래한다.
내 믿는 바를 그대 또한 믿게 되리라
내게 속하는 모든 원자(原子)가 그대에게도 속하기 때문
나는 빈둥거리며 내 영혼을 초대한다.
나는 한가로이 기대이며 헤매이며 여름 폴의 이파리를 바라본다.
나의 혀, 내 피의 원자가 이 토지, 이 공기로 빚어졌고
나를 이렇게 낳아 준 부모도 독같이 부모에게 태어났고
그 부모에게도 또 부모가 있다.
지금 빈틈없는 건상체인 서른일곱의 나는
숨지는 날까지 그치지 않기를 바라며 여기 첫 걸음을 시작한다.
신조나 학파는 내버려 둔 채
지금 상태에 만족하여 잠시 물러서지만 그러나 잊어버리진 않으리라
좋든 궂든 항구에 정박하여 나는 허용하리라
자연이 타고난 정력으로 거침없이 말하는 것을
[작가소개]
휘트먼[ Walt Whitman ]
<요약> 19세기 미국의 시인. 시집《풀잎》은 종래 전통적 시형을 벗어나, 미국의 적나라한 모습을 찬미했다. 3판에 이르러는 ‘예언자 시인’으로의 변모를 드러냈다. 산문집 《자선일기 기타》가 유명하다.
출생-사망 : 1819.5.31 ~ 1892.3.26
국적 : 미국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미국 뉴욕주 롱아일랜드
주요저서 : 《풀잎 Leaves of Grass》,《자선일기 기타》(1882)
뉴욕주 롱아일랜드 출생. 아버지는 목수였는데, T.페인(1737∼1809)의 인권사상 등에 심취하였고, 어머니는 네덜란드 이민 출신으로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풍을 지녔다. 4세 때 브루클린으로 이주, 가정사정으로 초등학교를 중퇴하여 인쇄소 직공으로 있으면서 독학으로 교양을 쌓았다. 1835년 고향에 돌아가 초등학교 교사, 신문 편집 등에 종사하였다. 그 후 뉴욕으로 옮겨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기 시작하여, 1846년에는 브루클린의 미국 민주당계 일간지 《이글 Eagle》의 편집자가 되었다. 그러나 1848년 ‘프리 소일(free soil) 운동’을 지지하는 그의 논설이 민주당 보수파의 분노를 사게 되어 사임, 전부터의 염원이던 프리 소일파의 주간신문 《자유민 Freeman》을 창간하여 그 주필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또다시 민주당 보수파의 공격을 받고 겨우 1년 만에 사임하였다.
1850년대에 들어서자, 그는 합승마차의 마부석 옆에 앉거나 나룻배에 타거나 하여 민중의 생태를 관찰하고, 또는 아버지의 목수일을 도우며 많은 시간을 독서와 사색으로 보냈다. 이 내부침잠(內部沈潛)의 시기를 거쳐서 그의 시인으로의 전신(轉身)이 이루어졌다. 1855년 시집 《풀잎 Leaves of Grass》을 자비출판하였는데, 이것은 종래의 전통적 시형(詩型)을 크게 벗어나 미국의 적나라한 모습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찬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제3판(1860)에 이르자, 새로 수록된 《카라마스》 등의 시군(詩群)을 통해서 사랑과 연대(連帶)라고 하는 일정한 주장이 표면화하기 시작하여, 이른바 ‘예언자 시인’으로의 변모를 드러냈다. 논문 《민주주의의 미래상 Democratic Vistas》(1871)에서도 미국사회의 물질주의적인 경향을 비판하고, ‘인격주의’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1862년 겨울, 남북전쟁에 종군 중이던 동생 조지가 부상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1863년 이후는 관청에 근무하면서 워싱턴의 병원에서 부상병을 간호하기도 하였다. 어떻든 남북전쟁을 극복하고 통일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은 그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었으며, 자신의 고통과 죽음을 견디는 젊은 병사들의 모습을 직접 목격한 경험은 그의 마음속에 미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1865년, 남북전쟁을 소재로 하는 72페이지의 작은 시집 《북소리 Drum-Taps》를 출판하고, 이듬해 링컨 대통령에 대한 추도시(追悼詩) 《앞뜰에 라일락이 피었을 때 When Lilacs Last in the Dooryard Bloom’d》를 포함한 24페이지의 《속편(續編)》을 출판해서 곧 《풀잎》(4판, 1867)에 재록(再錄)하였다.
1873년에 중풍의 발작이 있었으나 요양에 전념, 1879년에는 서부 여행, 1880년에는 캐나다 여행도 할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 1882년에는 산문집 《자선일기(自選日記) 기타》를 출판, 문명(文名)도 높아졌다. 1884년에는 《풀잎》의 인세(印稅)로 세운 뉴저지주 캠던의 미클가(街) 자택에는 내외의 방문자가 빈번히 드나들었다. 그러나 체력도 약해졌지만 그 자신은 점차 염세주의로 기울었으며, 1888년 재차 중풍이 발작한 후, 1892년 폐렴(肺炎)으로 세상을 떠났다.
[네이버 지식백과] 휘트먼 [Walt Whitman]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