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든두살의 할머니.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인 할머니는
몇 해 전에 작고한 부군과 함께 부부 의사로 명망이 높은 분이었다.
남편 되는 J박사는 1년 반 가량 병상에서 고생을 하다가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나갔다.
병상에서 하고 싶은 말도 못 하다가 작고한 남편의 영혼이나마 만나보고 싶어 H할머니는 반신반의하며 나를 찾아왔다.
40이 넘도록 출가하지 않은 셋째딸을 따라온 할머니의 모습은 곱고 깨끗했다.
개성이 고향이라고 했다.
드디어 식이 시작되었다.
딸의 결혼을 기원하고, 무엇보다 영감의 그림자라도 확인하고 싶은 심정으로 할머니는 숨소리조차 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내 시간의 벽을 허물고 J박사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는 느닷없이 나를 향해 힐난을 하는 것이 아닌가.
“왜 딸애 이름으로 나를 불렀소? 큰아이도 있고 우리 집사람도 있는데….”
나는 모녀가 원하는 대로 딸의 이름으로 박사의 영혼을 불러낸 것인데,
버젓이 큰아들도 있고 또 부인도 있는데
셋째딸 이름으로 자기를 불러낸 것이 매우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살아 생전에 무종교를 신념으로 삼았던 J박사는 전통적인 가풍을 유지해 온 분이었다.
특히 고려 말기의 충신이었던 포은 선생의 직계 후손임을 자부하며 평생을 보냈다.
관혼상제 등 양반 집안의 풍습에 철저해서 전통 예법을 몸소 실행에 옮겼던 분이기도 했다.
그런 분이었느니 딸의 이름으로 초혼한 것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끝내 부인 이름으로 바꾸고 나서 다시 J박사와 대면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J박사의 심기는 편치 않은 듯했다.
아내에게 건넨 첫마디 역시 질책하는 말이었다.
“왜 내 수의에 끈을 매지 않았소?”
필자를 비롯해 동참자들은 어리둥절했다. 수의 끈이라니….
뒤에 알게 된 사연이지만,
J박사가 운명을 하고 병원에서 염을 한 다음 관 뚜껑을 덮고 마무리를 하고 보니 수의 끈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고 한다.
아무려면 수의에 끈을 매지 않았을까 싶었고 또 관을 열 상황도 아니어서 그냥 내버려두었던 것인데,
바로 그 부분을 J박사가 질책한 것이다.
H부인은 J박사를 지극히 사랑하며 평생을 살아왔다.
그렇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살아 생전 하지 못한 말을 저 세상에 간 남편에게 하고 싶어 찾아온 것이다.
그런 부인을 향한 남편의 무심함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노부인은 남편에게 대해 조금도 섭섭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분은 그런 분’ 이라며 오히려 죽어서도 ‘호걸풍’의 풍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대견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J박사 영혼의 불편한 심기는 계속되었다.
특히 큰아들이 못마땅한 듯했다. 큰아들은 외국에 나가 살고 있었는데, 며느리가 교인이어서 시아버지의 제사를 제대로 모시지 않았다.
그런 점들이 J박사 영혼을 못마땅하게 하는 원인이었다. 그는 큰아들에 비해 사위에게는 고맙다는 뜻을 전했다.
당신의 유택(산소)을 외국에 나가 있는 큰아들을 대신해서 사위가 정성껏 가꾸고 있었는데, 그 일을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노부인은 남편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살아 생전 모습 그대로 권위적인 몸짓 하며 호걸풍의 행동으로 한바탕 휘젓고 있는 남편을 노부인은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내 앞에 등장한 그의 친구들은 30여명에 달했다.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인사들이 동행했다.
그분들의 이름을 노부인에게 말하자 바로 생전에 남편과 어울리던 분들이라고 반가워했다.
그중에는 유명한 모 상사의 L씨도 있었다. 이승의 아내와 저승의 남편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친구들에게 부인의 음식 솜씨를 은근히 자랑하곤 했단다.
아내는 생전의 모습 그대로인 남편의 풍모에 한없이 신뢰와 연모의 마음을 머금고 있었다.
남편도 아내의 마음을 꿰뚫어 알고 있었다.
의식이 마무리될 즈음에 노부인이 손수 지은 편지를 남편의 영전에 올리는 순서를 가졌다.
딸이 그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구구절절이 남편에 대한 애틋한 연모의 정이 배어 있는 글이었다.
순애보, 바로 그것이었다.
드디어 의식이 끝났다. 다시금 J박사와 그 일행이 영혼의 세계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차 법사, 참 고맙소. 우리집에 가서 대접을 잘 받으시오.”
J박사는 마지막 예의를 깍듯이 차리고 작별을 고했다.
모든 과정을 지켜본 노부인은 매우 만족해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노부인은 의식을 치러 가는 과정에서 확실하게 남편의 실체를 깨닫게 되자 더없이 흐뭇해했다.
노부인은 삶에 대한 희열을 느꼈노라고 했다. 남편과 살아온 일평생에 대한 보람을 느낀다고도 했다. 그리고 이런 자리를 가능하게 해준 나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노부인은 영혼의 실체를 알게 된 것에 대한 경이로움에 나이도 잊은듯 들떠 있었다.
노부인의 편지를 여기에 적어 본다.
‘영이시여,
생전에 성실과 신의로 살아오셨고, 자식 교육도 그런 길로 인도하셨기에 그 뜻을 따라 오늘날까지 제각기 열심히 건강한 가운데 가정 생활을 잘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나 또한 평안한 가운데 아이들을 위해, 또한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남은 여생을 고통받지 않고 평안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기원하고 있습니다.
무한한 우주 안에 티끌만도 못한 인생, 어느덧 여든두해를 살아오면서 많은 어려운 고비마다 참고 이겨내었지요. 지금도 내 자신과 싸우며 생을 이끌고 있습니다.
몸도 늙어 마음대로 움직이기 힘들기에, 이제 집에서 좋은 책을 읽으며 음악도 듣고 TV도 보면서 자연과 벗하고 사니 마음이 편하고 행복하답니다.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일 없이 욕심부리지 않으며 모두 다 용서하는, 그야말로 평안한 나날이랍니다. 더욱이 자식들 효도도 받고 그저 감사한 일뿐이지요.
당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손을 잡고 병상 옆에 지켜 앉아 기도 드렸지요.
마지막 숨이 끊어지고 나서 나는
“천주님이 영혼을 맡아 주시고 낙원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하고 ---조용히 세 번을 빌고 당신을 보내 드렸답니다.
이제 제 나머지 기원은 모든 고통과 번뇌를 잊고 천상 낙원에 들어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라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소원합니다. 가족 모두 건강하고 가정 생활을 충실히 지켜가고 있습니다. 더욱 이들을 건강하게 지켜 주고, 바른길로 인도해 주며, 평화로운 삶이 되도록 보살펴 주십시오.
당신의 명복을 축원하옵니다.
당신 영전에 깊이 머리 숙여 비오니 받아 주소서.
당신의 아내가.’ |
첫댓글 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