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전도 및 선교 여행에 있어 실질적인 기지이자 본부이고 센터와 같았던 수리아 안디옥 교회가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아래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아래 본문 이후에 보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역사들 가운데 여러 일꾼과 응답과 섭리들 등이 더해짐과 함께 예수님의 천국 비유처럼 마치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되고 새들이 깃들임 같이 되며, 또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이 됨과 같이 신기할 정도로, 그 누구도 상상 못했을 정도로 부흥 이상의 일들, 기적 이상의 일들이 갈수록 더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그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된 바울과 바나바와 실라를 통해 당시 아시아의 각 나라와 지역들 뿐 아니라 마게도냐의 빌립보 성을 기점으로 유럽 대륙에 복음이 전해 졌고, 특히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바울에 의해서는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서 적어도 2년 이상 복음이 집중적으로 증거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복음은 아메리카 대륙과 오늘의 아시아 대륙, 각 대륙들, 모든 열방으로 확산되게 되었고..
오늘 이 시간까지도 계속 진행 중인 것이며, 세상 끝 날까지 이른다고 볼 수 있는 것이고, 진정 따지고 보면 다른 그 누구보다 오늘 우리들이야 말로 그러한 안디옥 교회와 별개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디옥 교회의 시작과 부흥들, 계속된 진행과 열매들 등에 있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은 아래 본문 직전인 19절에서 “그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라고 증거된 말씀과 아래 본문 처음에서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라고 증거된 말씀에서 잘 발견할 수 있는 것이듯이..
비록 구브로와 구레네의 극소수 인원들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나를 통해, 아무렇게나가 아닌 사역과 전도들이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끔찍하게 순교를 당한 스데반으로 인해 심히 비통하고 두려우며 처참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도, 게다가 자신들도 얼마든지 그렇게 죽임 당할 수 있는 현실과 위기 속에서 도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절망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비겁해지거나 자포자기하거나 세상과 타협하거나 원망하기보다는 그렇게 도피하는 중에서 온갖 불편함과 위험들이 많았을 것임에도, 게다가 멀리까지 갔고 여러 불안정들 투성이였음에도, 심지어는 거기서도 당시에 온 세상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나 여러 모양의 대적들에 의해 위협과 봉변들, 위험과 심각들이 어떤 식으로든 있을 수 있었던 실상이었음에도 오히려 정반대로 치열하게 복음을 전했을 정도의 믿음이었던 것으로..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복음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자들, 본질적으로는 참으로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을 정도의 말씀의 신앙, 말씀대로의 믿음, 신실하고 절실하며 뜨거웠던 말씀의 열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름 아니라 바로 그 정도까지의 말씀의 신앙과 함께 그렇게 까지나 놀라운 사역과 전도들, 기적 이상의 부흥과 열매들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으로 실상 그와 같은 이치와 실제들이 조금이라도 이상하거나 특이할 수 없는 것임은 그들이 전했고 그 이름으로 기도했던 구주 예수님부터가 본질적으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말씀대로 모든 구원을 다 이루신 분인 것이기에 그와 같은 말씀의 신앙이야 말로 다른 그 무엇보다도 구주 예수님과 그로 인한 모든 사안과 역사들에 있어 가장 합당한 것이기 때문인 것이고, 게다가 그러한 모든 은혜와 역사들을 창세 전부터 계획, 약속, 준비, 진행하시면서 그의 시간에 따라 하나하나 나타내시고 누리게 하시며 성취해 나가시는 모든 주권과 통치와 섭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근본적으로는 말씀으로 존재, 창조, 통치하시는 분인 것이며, 뿐만 아니라 그 위치와 역할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영이시자 구주 예수님의 이름에 약속되신 분이며 시공을 넘는 전지전능의 하늘의 힘으로 모든 실제와 누림들이 되게 하시는 성령님께서도 단적으로 말씀의 영이 아니실 수 없는 것으로..
그렇듯 근원적으로는 우리 인생들이 이 세상에서, 또한 세상 끝 날과 부활과 영생에 이르기까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하늘의 힘과 구원의 일들, 온갖 응답과 이적들, 사람이 할 수 없는 부흥과 열매들 등에 있어 모든 중심과 근본과 실체이신 분인 것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라는 그 존재와 개념 상 구약과 신약 시대, 오늘날 우리들, 모든 인류 역사들, 심지어는 천지창조와 창세 전, 세상 끝 날과 영원에 이르기까지 잠시라도 분리, 별개, 변개이실 수 없는 반면 언제나 함께 이시고 그 역할에 따라 완벽하게 조화되시며 완전히 하나되시어 한 뜻을 이루시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본질적으로는 그 자체가 바로 말씀이시고 오직 말씀으로 하나되시어 말씀과 함께, 말씀대로 모든 것을 실행하시고 다 이루시는 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사실들은 오늘날 우리들에 있어서도 주님 안에서의 두 세 사람의 모임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작을 수 없고, 어떤 식으로든 그로 인한 기적 이상의 응답과 역사들, 상상도 못할 부흥과 열매들이 결코 불가능일 수만은 없는 것임을 내포하고 증거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약속이 되어 있는 것인데 좀 더 정확하게는 제대로 된 말씀의 신앙을 가진 두 세 사람들과 함께 인 것이고, 진정 그들이 어느 정도의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인가가 결코 작을 수 없는 기준과 관건이 아닐 수 없는 것이자 실상은 생각 이상, 상상 이상으로 깊이 직결된 것으로..
사실상 조금만 살펴보고 분별해 봐도 오늘 우리들의 기도의 응답 한 번, 예배 한 번의 열납에 있어서도 말씀의 신앙이, 어느 정도의 말씀대로의 믿음인가가 결코 상관이 없을 수 있거나 동떨어질 수 있는 자체가 아닌 것이고, 더 나아가 베드로를 통해 성전 미문의 나면서부터 못 걸었던 자가 구주 예수님 이름 한 번으로 그 자리에서 일어서게 된 사건에 있어서도 그때 당시의 베드로는 구주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고 심지어는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며 부인했던 때와는 완전히 반대였던 때로 실제로 목숨까지 아끼지 않았던 말씀의 신앙이던 시기였으며, 사도 바울을 통해 에베소 땅에 영적 대각성과 부흥의 역사들이 일어났을 때도 그때 당시의 바울은 말씀 신앙의 결정체이자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을 정도이던 때였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세를 통해 홍해 바다가 갈라지게 되었던 것도,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됨에 있어서도, 다윗이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게 됨에 있어서도, 엘리야를 통해 갈멜산에 하늘의 불이 내리게 됨에 있어서도, 다니엘이 사자 굴에서 살 수 있었던 것도, 느헤미야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벽의 재건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성경 속의 모든 신실한 믿음의 선배들과 그들로 인한 하나님의 역사와 응답과 이적들에 있어서도 모두 다 하나 같이 본질적인 공통점은 말씀의 신앙이 아닐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며, 게다가 그 하나하나, 한 사람 한 사람에 있어 정말 어느 정도까지의 말씀의 신앙, 말씀의 열정이었는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사도행전11:20~21)
*양범주목사의 '21세기 두란노서원'/2024년 6월 29일(토)1부/사진 조연진사모, 이미지 박원영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