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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길을 걸어간다.
다른 한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연극이다.
- Brook, Peter -
#01
“미안, 미안. 시은아 내가 많이 늦었지.”
“아니야, 나도 방금 왔어.”
가볍게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민화가 의자를 빼내어 건너편에 앉는 동안 곁눈질로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나와 민화의 약속시간이 38분하고도 20초 전이었다는 것을 바지런히 나에게 알려주고 있는 시계. 하지만 나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은 채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창 밖에서 매미들이 시끄럽게 울어댄다. 그것들 몇 년 동안 땅에만 갇혀 있으면서 목청만 더럽게 크게 키운 모양이라고 그렇게 생각에 빠지고 있는데 시야에 갑자기 하얀 것이 들어온다. 그 바람에 이제 막 공상에 빠지려던 나는 정신을 다잡고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왔다. 고개를 들어 민화를 바라보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화려한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 손톱 색이 바뀌었다. 타오르는 빨간색. 이번에도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몇 달, 몇 년을 머리를 쥐어 싸매고 썼을 원고를 넘겨주며 눈을 반짝이는 그녀를 가만히 보고 있자 나도 모르게 입에서 짧은 한숨이 나왔지만 이내 재빠르게 나는 그 한숨을 미소로 감추어버린다.
“이번에는 또 뭔데 이렇게 갑자기 만나자고 한 거야?”
“대본.”
“대본?”
“응, 연극 대본.”
“아아, 네가 몇 년 동안 완성시키려고 노력했다는 그 대본?”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심하게 그녀의 모습이 들뜬 것 같다고 생각하기는 했었다. 그래, 이 종이뭉치는 바로 그녀가 나에게 몇 년 전부터 쓰고 있다고 줄곧 말해왔던 그 대본이었던 것이다. 그 특별하고도 특별한, 하지만 그만큼 나에게는 불편할 대본.
“시은아, 이거 꼭 공연하자.”
“민화야.”
“아니, 우선 읽어봐. 읽어 라도 봐. 너 말이야 계속 그렇게 도망만 치면 뭐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해?”
“......”
“이 대본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너 잘 알고 있잖아.”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사실, 내가 뭐라고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어떤 의미인지 아니까 두말 하지 않고 공연을 하자, 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아님, 난 이 대본. 읽고 싶지도 않다고 그렇게 말해야 하는 걸까. 문득 목이 말라 오는 것을 느끼며 테이블에 있는 컵을 들어 입에 대었다. 차가운 얼음물을 입 안 가득 머금었다가 물만 먼저 삼켰다. 입 안에 남아 있는 얼음의 찬 기운을 만끽하며 혀로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장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누구지, 저 남자는. 머릿속을 스쳐가는 장면 속 사람의 얼굴이 생소하다고 느끼게 되는 경험은 생각보다 즐겁지는 않다.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 어떤 것이 나의 과거에 있을 수도 있다는, 그런 것이니까 말이다.
“민화야, 그런데 나 대본 받아 놓은 것들이 많아서.”
“이 작품이 중요하다는 거 너도 알잖아.”
“그래도 나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잖아.”
“그래. 대표님하고도 이야기해보고 다른 분들하고도 한 번 나눠서 읽어봐. 다들 이 작품 공연하고 싶다고 하실 거야. 분명해.”
손을 뻗어 종이를 쥐고는 빠르게 스르륵 넘겨보았다. 길이로 보아, 대충 1시간 10여분 정도의 공연이 되려나. 다시 앞장으로 넘겼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내가 혹시 모르고 2장을 한꺼번에 넘긴 것일까 싶어서 다시 한 장을 앞으로 넘겼지만 역시나 이상했다. 대본의 가장 첫 장이 백지였던 것이다.
“제목이 없네.”
“제목, 네가 정해줘.”
“자기가 쓴 작품에 자기가 제목을 붙여야지.”
“아니야. 내가 이 연극을 쓴 이유는 널 위해서잖아. 읽어보고, 준비하면서 이 작품에 어울리는 제목을 네가 네 손으로 적어 넣어.”
“민화야…. 꼭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거야?”
머리가 아파온다. 물론 그 날 이후로 매우 정기적으로 편두통이 찾아오긴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두통은 그 느낌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혀졌다. 생각보다 두통의 정도가 강하다. 말을 할수록 심해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앞에 놓인 종이를 들어 서둘러 가방에 넣고, 급한 일이 생겼다고 대충 둘러대며 카페를 나선다.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 사이로 작지만 확실한 민화의 목소리가 나의 귀에 파고들었다.
“네 스스로…. 기억해 내.”
+ + + +
“여보세요.”
「어디야.」
“아…. 웬일이야?”
「웬일은 무슨. 밥 먹자. 어디야, 데리러 갈게.」
“아….”
완전히 뒤로 넘어뜨린 운전석에 누워 얼굴을 덮고 있던 차가운 손수건을 치워버렸다. 깨질 듯 했던 두통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상태였고, 핸드폰을 귀에서 살짝 떼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저녁 6시네. 도대체 얼마나 이곳에 누워있던 거지. 의자를 똑바로 세우자 어둑어둑해진 바깥이 보인다.
「시은아? 괜찮아?」
“아, 응. 잠깐 의자 좀 똑바로 세우느라.”
「차 안이야? 운전 하는 거야?」
“아니야. 잠깐 피곤해서 누워있었어.”
「그럼 다음에 볼까? 너 몸 안 좋으면 얼른 집에 들어가서 쉬어.」
“아니, 괜찮아. 너 오늘 공연 없는 날이잖아. 밥 먹자.”
「괜찮겠어? 무리 안 해도 되. 오늘만 날은 아니잖아.」
“환자 취급 하는 거 지겹지도 않아? 정말 괜찮아. 맛있는 거 먹으면 더 괜찮아질 거야. 그러니까 만나자.”
「…미안. 그런 뜻이 아니었어.」
“뭐가 미안해. 지금 연습실 앞에서 전화하는 거지? 그 근처니까 금방 갈게. 기다려.”
지혁이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로 핸드폰을 닫아 버렸다. 시동을 걸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다 빨간불에 멈추어 섰다.
“하아….”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했었는데 나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오고 만다. 나의 짜증을 들어줄 때마다 나오는 지혁이 특유의 표정이 생각났다. 분명 방금 전화를 받으면서도 그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라디오 전원을 키자 내가 즐겨듣는 라디오의 오프닝곡이 차 안에 울려 퍼진다. 그리고 DJ의 멘트가 시작되었다.
「그르누이는 굉장히 예민한 코를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냄새만 맡고도 이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어떤 것인지 모두 알아맞히는 재능이 있었지요. 그가 천상의 향기에 끌렸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여자 아이의 몸에서 나는 너무나도 달콤한 향을 맡은 그르누이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살해하고 말았지만 죽음 후 향기가 모두 사라지는 것을 깨닫고는 향수 제조 방법을 배워 그 향기를 가둬놓기 시작하죠. 결국 그는 아름다운 소녀들을 살해해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향수를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살인죄로 잡히게 되고 공개 처형을 당하게 되는데, 그르누이가 만든 향수에 사람들이 마음을 빼앗겨 그는 결국 무사하게 됩니다. 어느 날, 그르누이는 자신이 만든 지상 최고의 향수를 모조리 몸에 뿌리고 거리를 걷습니다. 그 향기를 맡고 사람들은 하나, 둘 그르누이를 둘러쌉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향수..”
이 라디오 프로의 오프닝은 종종 소설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곤 했는데 오늘은 파트리크 쥐스킨트라는 작가의 작품인 ‘향수’의 줄거리로 문을 열고 있었다. 나는 그 책을 읽어보았기 때문에 DJ가 말해주지 않은 책의 마지막부분을 잘 알고 있다. 그 끝은 상당히 기괴하기도 하고 어찌보면 허무하기도 해서 기억에 아주 또렷이 잘 남아있었다. 초록불로 바뀐 신호에 맞추어 차를 움직이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네, 오늘 오프닝은 독일의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로 시작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이 소설을 얼마 전에 읽었어요. 그리고 작년인가, 제작년에 영화로도 제작되었을 정도로 인기가 있는 소설이죠. 읽으면서 주인공 그르누이가 갖고 있는 능력이 나에게도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도 해봤었는데 말이에요. 아, 지금 게시판을 보니까 그 끝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고 써주시는 분들이 몇 명 계신데요. 제가 일부러 끝을 말씀 드리지 않았어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왠지 이럴 것 같다고 올려주시는 결말을 보니까 상당히 재밌는 상상이 많으시네요. 어떤 분은 사람들이 그르누이를 왕으로 추대했을 것 같다고도 하시고, 어떤 분은 그르누이에게 향수를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다가 그르누이가 향수를 넘기지 않자 죽였을 것 같다고도 하시고. 진짜 결말은 여러분이 직접 읽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요즘처럼 더운 날에 시원한 곳에 앉아 책을 읽는 것도 훌륭한 피서가 아닐까 생각이 되네요. 그럼 노래 듣고 와서 이어갈게요.」
항상 느끼고는 있지만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은 참 골치 아픈 것인 것 같다. 같은 것을 듣고도 그렇게나 다르게 생각하게 되는 것만 보아도 말이다. 누군가 ‘아.’라고 말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어.’라고 생각되어질 수도 있는 것. 아니면, 누군가 ‘아.’라고 말을 했는데 누군가는 새까맣게 기억하지 못하는 것.
‘나 같은 사람이지.’
인간을 만든 신은 잔인하게도 모두 다르게 생긴 만큼 모두들 다른 생각을 갖아야만 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 틀림없다. 인간을 사랑해서 그렇다고는 하겠지만 그런 지독한 애정이 우리들에게는 독이 될 때도, 아니 독이 될 때가 더욱 많을 것인데. 쓸데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되었고 그새 나의 차는 목적지에 다다랐고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지혁이가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빨리 왔네.”
“생각보다 차가 안 막혔어.”
아까 사소하게나마 말다툼을 한 탓일까. 우리 사이에 조용한 정적이 깔렸다. 도착하기 직전에 라디오도 꺼버린 탓에 그야말로 차 안은 차가운 공기를 내뱉는 에어컨만이 위잉 소음을 만들며 돌아가고 있었다. 연습 후에 샤워를 하고 나온 건지 지혁이에게서 나는 샴푸 냄새가 차 안을 조금씩 잠식한다. 나는 말없이 다시 차를 움직였고, 우리가 자주 가는 일식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피곤한 건지 곁눈질로 본 옆에서는 지혁이가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고, 이 틈을 타서 꽂아 놓은 CD를 재생시켰다. 엊그저께 듣고 그대로 꽂아놓았던 드뷔시의 앨범이 1번 트랙부터 재생되며 차 안의 어색한 공기를 조금 사라지게 만들어준다. 이 곡은 그와 나 둘 다 좋아하는 곡이니까.
“공연은 잘돼가?”
결국 아까의 말다툼의 시작이 나였던 것 같은 죄책감에 내가 먼저 침묵을 깼고, 자는 줄만 알았던 그의 입에서 듣기 좋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응. 그럭저럭.”
“그럭저럭이면 마음에 안 드나 보네.”
“뭐, 그렇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
“조금.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흐응. 마지막 공연이 이번 주말이었나?”
“으응.”
“힘들겠다.”
“조금. 어떻게든 되겠지.”
연극배우에게 있어서 자신이 연기해야 하는 배역의 행동이 이해 불가라면 그것은 상당히 좋지 않은 일이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는 배우 자신이 아닌 등장인물이 되어야 하는데, 자신이 연기해야 할 그 배역의 행동에 납득하지 못한다면 결국 거짓 연기를 해야 하니까 말이다. 물론 연기를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연기는 진실 되지 못했으니 배우 자신이나 관객들이나 모두 100% 몰입을 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이번 주말에 갈게.”
“하아. 그 때까지는 할 수 있으려나.”
“무리는 하지 마.”
“그래도 공연이 끝날 때 까지 캐릭터를 확실히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는 드문데.”
“그럴 때도 있는 거지. 작품이 안 맞았다고 생각해.”
“응, 그럴게.”
잠시 후,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가게의 문이 보였고 나는 지혁이를 먼저 들여보낸 후 마당 한쪽에 차를 주차했다. 시원한 차 안에 있다가 문을 열고나오니 더운 공기가 훅 파고들었다. 역시나 여름은 싫다는 생각을 하며 종종걸음으로 가게 문을 열었다.
+ + + +
“시은씨, 시은씨?”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뇨. 언제나 여름이 지나갈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맞다. 시은씨 여름이 제일 싫다고 했었지.”
허허, 웃음을 비치는 공연 기획 담당자를 바라보며 머슥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오늘은 얼마 전에 민화가 나에게 넘겨줬던 대본을 들고 기획사를 찾았다. 안 그래도 올 겨울 쯤에는 작품을 하나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고 민화의 도발 아닌 도발에 나름 오기도 생겨서 종이 뭉치를 가방에 쑤셔 넣고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다. 물론 그녀의 대본을 찬찬히 한글자도 놓치지 않고 읽어보았다. 행여나 이 글을 읽은 후 나에게 엄청난 충격이 몰려오면서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게 되려나 기대도 했건만 읽는 동안 내가 느꼈던 것은 연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약간의 불편함. 그 불편함이라는 것은 예를 들면 아무 것도 없는 하얀 눈밭에 검은 얼룩이 툭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한 불편함과 비슷한 것이었다. 알지 못하는 조그마한 것이 계속 내 의식 한구석을 툭툭 건드리는 것 같은 느낌. 하지만 그것에 비해 민화가 써내려간 꽤나 흥미로운 이 작품을 공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해서 그런 감정은 애써 무시하는 중이었다.
“괜찮은데 말이지. 남자 두 명만 나와서 극을 90분 동안 이끌어 나가는 게 조금 걸리네.”
“늘어질 것 같다고 생각하시죠?”
“뭐, 사실 그 걱정이 가장 크긴 해. 남자 둘이서 90분 동안 대사를 내뱉는 거니까 말이야. 뭐 뮤지컬같은 경우에는 일인극, 이인극이 흔하니까. 하지만 거기에는 노래가 들어가고 춤도 들어가니까 관객들이 조금 덜 지루해 하는거지. 연극에서 일인극이나 이인극을 잘 하지 않는 건 아무래도 극이 지루해지는 것을 걱정해서 그런 거겠지. 그리고 이 작품 제목 말이야, 아직 안정해진 거야?”
“...네.”
“흐음, 뭐 깊게 묻지는 않을게. 사정이 있겠지.”
그의 말에 싱긋 웃으며 한숨을 폭 쉬었다. 최근 들어서 실험적인 작품들이 많이 쓰여 지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일인극이나 이인극은 잘 보이지 않는다. 웬만한 내용이 아니고서야 작품이 늘어질 수도 있는 염려가 있을뿐더러 한명이나, 두 명이 이끌어 나가는 극은 배우의 역량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를 못 믿으시겠다는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지. 내가 시은씨 능력이야 잘 알고 있으니까. 하기로 마음만 먹으면 극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아. 또, 캐스팅하고 홍보에도 많이 좌우될 게 분명해. 혹시 생각해 둔 배우가 있는 거야?”
“흐음. 사실 아직 없어요. 딱히 보이지가 않더라고요. 제가 최근까지 어떤 상황이었는지 아시잖아요.”
“그렇지. 요즘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직 잘 모르겠구나. 어쨌든 내가 기획서 써서 위에 올려볼게. 시은씨는 캐스팅을 한 번 고민해봐. 정 떠오르지 않으면 오디션이라도 봐야지.”
“네, 알겠어요. 연락주세요.”
“응, 잘 가. 아, 커피 잘 마셨어.”
“네. 다음에 뵈요.”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건물을 나섰다. 시계를 보니 5시가 조금 지나고 있었다. 지혁이 마지막 공연이 7시에 시작하니까 공연장 근처에 있던 카페에 잠깐 앉아 있다가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기획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공연장이 있어서 차는 그대로 주차장에 세워두고 길 건너 카페로 들어갔다.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고 해도 차가운 음료수를 그리 좋아하지 않기에 따뜻한 라떼를 한잔 시켜 창가에 가 앉았다. 5시가 넘어서도 햇빛이 쨍쨍한 창밖을 바라보다가 대본을 꺼내서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에 가방에서 꺼내어 막 첫 장을 넘겼을 때,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선글라스를 낀 남자가 커피 한 잔을 내려놓는 것이 보인다. 그 모습이 왠지 익숙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착각이겠지 생각하면서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 찰라 그 남자의 것이 분명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굵지도 얇지도 않은 적당한 중저음.
“덥군.”
행여나 그 남자의 옆에 다른 누구라도 앉아있는 걸까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어중간한 시간대라 그런지 카페에 사람이 얼마 없었고, 더더욱 나와 그 남자 주위에는 우리 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앉아있지 않았다. 이 남자 나한테 말을 한 것일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의 입이 다시 한 번 벌어졌다.
“이런 더운 날은 매미도 지쳐서 안 우는 것 같은데.”
“저한테 말하신 건가요?”
“그럼 여기에 당신 말고 다른 사람도 있나?”
“아니, 그건 아닌데.”
“맹하군.”
순간 얼이 빠진 표정이 되어버렸다. 이 남자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처음 만나서 대뜸 말을 시키더니 이제는 맹하다고 하다니. 한마디 쏘아 붙여줄 생각에 그를 향해 몸을 틀었는데, 앞머리를 만지며 선글라스를 벗은 남자가 날 돌아보았다. 잠깐, 내가 이 남자를 어디서 봤지? 상당히 깔끔하게 잘생긴 얼굴. 검은 진주를 박아놓은 것 같이 깊은 눈동자. 이런 얼굴이라면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날텐데 이상하게도 ‘익숙함’이라는 단어만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내 귓가에 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나의 물음에 그가 내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는데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수가 없었다. 뭐지, 이 느낌은. 이건 말도 안돼. 왜 내가.
“혹시 말이에요.”
마른 침이 넘어갔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생전 처음 보는 남자를 보면서.
“혹시 우리가 알던 사이 인가요?”
머릿속이 새하얘질 정도로 어떠한 감정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보지.”
그리고 그 감정은 흔히 우리가 ‘그리움’이라고 부르는 감정이 맞을 것이다. 가게를 나서는 그 남자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나는 작년 여름날의 만남을 기억해냈다. 연극을 보고 나왔을 때 만났던 한 남자. 그 때 내가 느꼈던 것도 방금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내 기억의 서랍들을 뒤져보아도 전혀 찾을 수가 없는 얼굴인데, 그 당시에도 이러한 당혹감을 느끼며 한동안 자리에 멈추어 서 있었지. 혹시 헛것이라도 보는 걸까 생각했지만, 그의 앞에 놓여 있던 에스프레소의 커피 향기가 조금 전까지 그가 내 옆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나온다.
“젠장. 이게 무슨 기분이야.”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소설을 연재하게된 Renai 라고 합니다ㅎ 르네라고 불러주세요-
위험한 동화는 연극을 소재로 쓰게된 소설이에요.
부족해도 재미있게 봐주세요 :)
업데이트 쪽지를 원하신다면 <R>을 붙여주세요
첫댓글 R 자꾸 마주치는 남자와는 무슨 관련이 있길래 그리움이란 감정을 느끼는 걸까요..... 흠, 다음편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크리스마스 잘 보내셔요~
비밀은 서서히 밝혀지겠죠 :) 크리스마스는 잘 보내셨나요 ~ 전 명동에 갔다가 사람에 휩쓸려 다녔답니다..ㅜㅜㅜ 다음편은 오늘 안에 가져올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