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의 말을 듣다보면 귀를 씻고 싶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쌍욕이나 과다하게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말 폭탄을 던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쓰는 말이 도저히 상대가 돌려줄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반국가 세력’이란 말은 상대에게 어떻게 돌려줄 수 있는가? 이런 말은 들었더라도 돌려줄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대응할 수 있는 말은 유일하게 똑같이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말일 수밖에 없다.
의회(議會)란 문자 그대로 내 의견을 가지고 의견을 가진 상대와 토론하고 논쟁하는 모임이다. 받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면 거기서 진전되는 것이 없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연극이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쟤가 받을 수 없잖아. 다시 말해봐.” 배우들을 가르치는 곳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교수는 학생이 대사를 할 때마다 그게 상대 배역 학생이 받을 수 있는 말인지 아닌지를 계속 묻는다. 상대가 말을 받을 수 있게 말하면 그건 말이고, 그렇지 않으면 말이 아닌 텍스트에 쓰인 대사에 불과하다.
인류학의 증여론에서는 사람의 관계가 세 단계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먼저 줘야 하고, 주면 받아야 하고 그리고 받으면 돌려줘야 한다. 이 세 단계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면서 관계는 지속된다. 이 중 하나라도 이뤄지지 않으면 그 즉시 관계는 중단된다. 주지 않으면 아예 관계가 만들어지지 않고, 주더라도 받지 않거나 받을 수 없으면 그다음 행동인 돌려주는 행위가 없다. 돌려줄 수 없거나, 돌려주지 못하면 흐름이 끊기고 관계가 단절된다. 공동체란 받으면 돌려줄 거라는 기대와 그 기대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만 유지되고 지속되는 것이다.
말을 주고, 받고, 돌려주기 위해서는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어야 한다. 아무리 같은 언어공동체에 속해 같은 단어로 낄낄거리던 동료라도 조금만 벗어나면 관계 자체가 파탄 나버리기도 한다. 예를 들면 “오늘 참 화사하게 입으셨네요”라는 말이 옷을 잘 고르는 것에 대한 칭찬의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상대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모욕적인 말이 될 수도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국 정치의 문제점은 첫째, 서로에게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은 대화하며 논의를 진전시킬 의사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말의 대상이 정치권 내의 상대가 아니라 자신의 지지자들이다. 토론과 논쟁을 진전시킬 유일한 말이 ‘받을 수 있는 말’인데 이 말을 할 능력도 의사도 없으니 시민의 법과 생활 사이의 간극은 점점 더 커진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나오게 할지는 명확하다. 사람들은 민주주의에 지치고 부정적이 될 것이다.
무대 위로 올라가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말을 할 의사가 없다면 차라리 주먹싸움밖에 없다. 말로 말고 주먹으로 하시라. 그래서 말의 역할과 가치라도 보존해주시라. 물론 이 주먹싸움이 흥행에 성공할지는 모르겠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와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실제 링 위에 올라갈지도 모르니 말이다. 말로도 주먹으로도 쓸모없는 당신들을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다.(엄기호 사회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