夢幻의 遺跡들 -2-
옛집을 파묻고 남북으로 이어진 街道는 항상 지축이 흔들거린다.
동서를 잇는 陸橋는 을씨년스런 구조물로 地形 환경과는 부조화의 모델 격이다.
나는, 이 육교를 넘어 나의 유-청소년기를 보낸 돌아오지 않는 마을의 골목길 생활- 그 빈티지 한 기억의 조각들이 마모된 화석으로 저장고에서 새로운 포맷으로 등장하게 한다.
-지금은 가족들의 환영들이 개울물에 뜬 포말처럼 흘러간다.
- 일몰의 노을이 서산의 그림자로 내려앉을 때쯤 텃밭 키큰 옥수수와 나무 울타리에 대형 줄을 쳐놓은 왕거미를 쇠죽 쑤며 불지핀 부엌 작대기로 악행을 자행하든 일- 초가집 위에 핀 박꽃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얼기설기 엮은 삽작문 밖은 논밭이어서 계절의 순환으로 논벼 이슬을 쓸어 담아 먹는 시기도 있었고, 엎어지면 코 닫는 넓은 보리밭에 은하수로부터 이탈한 流星이 낙하한 지점을 명확히 찍어 놓고도 그 殘骸를 발견하지 못한 분통 터진 유년의 鄕愁가 서려 있다.
-집 밖을 나가 마을 중심부로 기는 길 트라이 앵글지가 되는 곳에 깊은 우물이 있고 낡은 원형 세멘트 디펜스 난간에 항상 찌그러진 두레박이 걸려있어 물을 길어 먹고 빨래도 하는 곳- 이웃에 천연두를 앓아던 마음씨 착한 누나 벌 처녀가 항상 얼굴을 피했고, 그 옆엔 선머스마 같은 처녀가 동네 조무레기들에게 뻑하면 페널티를 고하고 고함을 내지르며 지게 작대기를 휘두르든 그대들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노?
집 집마다 宅號만 부르면 가족구성과 숟가락 숫자까지 헤아린다.
문산 댁으로 불리든 기와 큰집으로 가는 주된 골목길은 철웅성 같은 사나운 키큰 탱자나무로 둘러쳐진 사과밭을 끼고 있었는데 사과가 일광에 빛을 발할 때 몰래 좀 따 먹을가 껄떡거려 보지만 살인적 방어벽 때문에 애를 태웠다.
- 탱자나무꽃이 피는가 싶다가 탱자가 탱탱하게 익어 가면 고놈의 향기에 코끝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할배는 거의 매일처럼 이 골목으로 지팡이를 짚고 우리 집에 와서 엄마가 채에다 걸러주는 탁주를 한 사발식 느긋하게 자시고 큰집으로 가셨다.
그 탱자나무- 가시로 논에서 잡은 고디(우렁이)를 파먹는 데는 최고였다. 그리고 몸에 고름이 괴는 종기가 났을 때, 탱자 가시로 푹 찔러 외과 수술기로도 쓰였다.
다들 그렇게 성장해 왔다.
탱자 골목길 중간에 약간 특이한 구조의 분위기를 가진 초가집은 낮은 흙 돌담으로 앞가림을 했고, 부엌 칸은 비스듬한 경사로 협소해 보였다. 방 2개에 대나무 한지 창살의 외짝문을 가졌다. 모두가 농사일에 매달렸지만, 토착 원주민이 아닌 이 집은 택호도 없이- 앉은 미싱기를 돌려 수선을 하고 바느질 솜씨가 좋아 먼 마을에서도 주문하는 한복, 고급 의상, 壽衣를 만들었고, 그냥 ‘옷집-미싱집’이라고 불렀다.
항상 집안이 조용하고 정갈한 분위기에 재봉틀 소리가 돌~ 돌~ 돌~ 들려 나왔다가 멈추기를 반복하였다. 부부간은 화목한 것 같았다. 이따금 집안 텃밭에서 채소를 기르기 작업하는 모습이 전형적 농촌에서 낭만적(?)으로 보였기 때문 아니었나 싶다. -하여튼 이 집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엄마가 밥상머리에서 들려준 이바구 때문이었다. 그 집의 남자가 야심한 밤에 아내가 돌리는 미싱기 옆에서 통곡을 한다는데 아내는 일상의 매뉴얼로 여긴다는 것이다. 술 취정 하는 것도 아니고, 주민들도 알게 모르게 이따금 페러디 급 논평을 했든거 같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이따금 그 집 앞에서 탐색의 눈길을 쏘았다.
그 집에서 조금 나가 ㄱ자로 꺽기는 코너에는 작은 정미소가 있어- 친구의 아버지가 발동기의 앞 코부분의 투박한 스프링을 누르고 둥근 쇠비퀴를 힘껏 돌려 시동을 걸어 벨트를 연결하면 쿵쾅 쿵쾅 쏴하는 소리가 폭풍처럼 울려 퍼지고 기름 냄새와 등겨의 입자들이 안개같이 풀풀 날려 나왔다.
그 이웃엔 크고 작은 잡목과 대나무로 엮은 울타리를 친 소형 초가집엔 해방정국에 일본으로 귀환하지 못한 젊은 일본 여인이 있었다. 이따금 ‘기모노’ 차림과 굽 높은 ‘게다’를 신고 바쁘게 따그닥 따그닥 황급히 이동하든 모습이 보였는데, 잔존 사연의 벽으로 기피 생활에 젖어있는 듯했다. 아마도 미싱 집과 교류가 있는 모양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憐憫의 눈으로 바라보는 듯 음식을 나눠 먹기도 했다..(해방의 격랑 속에서도 우리 지역에서는 소수 잔류 일본 여인들을 그렇게 박해하지 않았다고~)
대가리 빡빡 깍고, 후줄 거래한 촌놈아(兒)가 당대 일본 여인의 실물 자태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한 집 건너 뒤쪽에는 주민의 사랑을 받든 夭折한 長鼓의 전설적인 달인이 폐결핵으로 가난한 생애를 살았다.(나는 이분을 철들어 알고 대화를 나눈 적도 있다), 그 옆엔 오랜 기간 폐가로 존치된 큰 초가집이 있었는데 도깨비 반상회가 열릴듯한 곳이되어 우리동네 惡童들의 아지트 겸 浪人들의 음습한 간이 驛舍가 되기도 했다.
어느 차가운 겨울날, 사락눈이 두두두두 내리는 날 밤. 큰집에서 제사를 마치고,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는 무명장야(?)의 등불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집 앞에서 밤에만 우는 남자의 Ost를 취재(?) 한답시고 안테나를 세우고 서성거렸다. 물론 동네 떵개들이 요란하게 짖어됐지_
등불을 밝히고는 있었지만 그림자 없는 고요한 적막이 서려 있었다, 어미개와 똥강아지 1마리와는 약간의 친분을 쌓아 놓았던 터라,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은밀하고도 작은 소리로 독그~~ 워리 워리~라고 윙크를 보냈다. 그땐 개만 보면 ‘독그(Dog)’ 아니면 ‘워리 워리’로 불러 됐다.
평화롭던 밥공기가 흔들렸다.
“거기 누고?”
나는 사각통 호롱등불을 들고 종종 걸음으로 달아났다.
그때, 통곡의 남자, 祭事日, 호롱등불의 전설(?)은 - 世波에 밀려가 있었지만, 노령의 센티멘탈은 코딱지 뜯어먹든 시절 타임튜립 회랑으로 들락거리는 남루한 여행자가 된다.
지금- 기이한 샤먼의 파동인지, 임팩트한 휴먼轉移 靈感인지 -그 통곡한다는 그분의 진갈색 중절모, 자상했든 짧은 소통- 그 가족에 대한 관심은 忘却 속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이미지가 되돌아온 것은 머꼬?
그는 전시에 미군과 3.8선을 넘어 부칸 주민들에게 선무공작의 일원으로 “삐라”를 뿌리든 공군 소속 군인이었다는 풍설로 알게 되었고- 그는 도시로 삶을 옮겼다는 것이다. 그 통곡이란 미닝은? 아무래도 단독자로서 인간의 외로움이란 해석을 던져도 생판 틀린 것은 아니리라? 이제 와 미지의 아쉬움이 크다.
그 골목길을 답사하지 못했다. 귀가 후 탱자 골목을 스카이뷰로 모두 훑어보았지만 탱자의 모습은 간데없고, 모든 집들이 현대식의 가옥 구조로 변형되었고 골목길은 포장길로 변해있어 당시의 모습은 시간 속에 소멸의 길을 걸어왔음을 보여준다.
-삶은 때때로 신경 안정제보다 환상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공유하고 잡다! 영혼에 비(悲) 내린다. 끙!
當代와 대비되는 넘어진 술잔의 ‘눈오는 네온가’란 탄식의 노래는 있어도-「눈오는 호롱불 등잔 街」는 -
夢幻 속의 夢遊일 뿐이디.---------
-End-
첫댓글 어쩌면 자서전적 내용같네요. '옥수수와 나무울타라', '두레박과 얽은 누나', '탱자가시의 효용', 특히나 외과수술기로서 기능했음은 지금도 팔뚝에 흔적이 남아 있으니
감개가 무량입니다. 참말로 내겐 '夢幻의 遺跡들' 이 아닌 바로 엊그제의 일 같은 기억입니다요. '삶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고 합디다만 아무튼 지금도 스위치를 넣으면
부팅이 되고 작동이 되니 어제의 일은 그대로 두고 오늘에 충실하다보면 좋은 내일로 이어지겠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요. 건강하소. 부산넘
늑점이 님!
김능자 님!
초겨울 비가 내리고 있내요! 감사합니다.
아침 눈 뜨면 습관이 된 카페 출근. 빨간 등불이 켜져 있어 들어 왔다가
옛 외갓집에 온듯 낯 익은 풍경에 반가운 눈물이 펑펑 쏟아졌습니다.
반갑다기보다 죄스러움의 눈물이겠지요.
그치질 않아 달아나듯 떠났다가 종일 이리 서성, 저리 서성거리며 목놓아 울었습니다.
우리 옛 시골 풍경.
일본서 6세에 한국에 와서 첫 머문 곳이 경산 자인이었습니다.
문화가 다르고 생활이 열악한 곳에 적응하지 못하는 딸을 위해
내 엄마는 대구로 이주해서 까탈스런 딸을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훗날.
첫 외손녀가 보시고 싶어서 둘째 삼촌에게 집안 터전을 맡기시고
대구로 이사 오셨으니 무척 불효손이지요.
모두들 지구를 떠났습니다.
은혜를 갚을 수 없게 되어서야 철이 드네요.
크게 발전된 한국의 모습을 하늘에서 보시고 계실 것입니다.
덕분에 안구 청소 자~~알 했습니다.ㅎㅎㅎ
김능자 님!
당대, 그 어릴때 삶의 감성은 성장 이후 보다 더 뚜렸한 편린들로 -우리들 가슴마다에 있죠.
이제 추억하는 일로 계절은 바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