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밥 먹는 사람은 외 1편
강연호
혼자 밥 먹는 사람은 외로워서 강해 보인다
기억의 부력은 놀라워서 언제든 기어이 떠오른다
너무 오랜 낮잠으로 불어터진 얼굴을 짓이기며
스쿠터가 슬리퍼를 끌 듯 지나간 게 전부인 오후다
세계가 고요하면 긴장해야 한다
목련의 실핏줄이 아프게 터지는 계절인데
꽃말처럼 흩어지는 신파를 거두며
찻물이 끓는 동안 입술이 식혀야 할 이름이 있다
혼자 노래하는 사람은 쓸쓸해서 강해 보인다
당신의 문체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얘기에 귀를 기울이던 당신
당신에 대한 기억은 귀로 시작되더군
당신은 서술어를 잠시 머뭇거리는 버릇이 있고
당신은 부정인지 긍정인지 모를 표정을 자주 짓고
그럴 때 세상은 비스듬히 깊어지는 것이어서
나는 내 속내를 털어놓는 줄도 모르고 다 털어놓아야 했지
누군가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먼 길을 가기로 작정했다는 것이지요
이쯤 해서는 내 입술이 당신의 귀에 살짝 닿기도 했을라나
인생은 미완성이라고 누가 한 말은 탄식일까요 비명일까요
완성이었다면 더 살고 싶은 마음이 도대체 생겼겠어요?
유행가 가사에 인생을 실어 나르기 시작하면서
이윽고 줄줄 나를 흘리는 나를 발견하는 순간의 부끄러움을
스스로 못 이겨 조금씩 말이 늘어지고 서술어를 잠시
머뭇거린 것인데, 아 이건 당신의 버릇인데
당신의 버릇조차 닮아 가는 나를 들켜 얼굴이 벌게질 때
당신은 부정인지 긍정인지 모를 그 표정은 어딘가 참 익숙하다며
누군가와 많이 닮았다며 쫑긋 귀 기울여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얘기에 더 바싹 다가앉은 것인데
말하자면 내가 기어이 가장 먼 길을 가기로 작정하게 만든 것인데
참 오래고 오래된 얘기인데 당신의 귀는
참 오래고 오래된 얘기인데 당신의 문체는
― 강연호 시집, 『하염없이 하염없는』 (시인의일요일 / 2023)
강연호
199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 비단길 』 『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 『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 『 기억의 못갖춘마디 』 등. 현재 원광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돌이킬 수 없어서 다행인 날들의 기억
첫 시집 『비단길』을 혜성처럼 시단에 등장한 서정주의자. 이후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기억의 못갖춘마디> 등의 시집으로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우리 시의 서정적 가치를 지켜냈던 강연호 시인이 드디어 11년 만에 돌아왔다.
그는 이전 네 권의 시집에서, 일상의 삶이 품은 비애를 가만히 추적하며 슬픔과 허무의 맥을 짚어나갔다. 이번 시집 <하염없이 하염없는>역시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우려낸 듯한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 중년을 건너가는 삶이 거느린 비루한 삶의 풍경과 마음의 얼룩을 첨예한 보석의 언어로 펼쳐낸다. 일상의 삶이 품은 슬픈 비애를 가만히 추적하며 슬픔과 허무의 맥을 짚어나가는 서정적인 체험을 독자에게 선사하며, 독자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의 파동을 일으킨다. 그는 서정의 연금술사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다른 빛깔들로 자기 시 속에 촘촘히 수놓는다.
그의 시선은 이따금 밖을 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안을 향해 열려 있기를 꿈꾼다. 삶의 쓸쓸함에 대해, 고요에 대해, 우리를 글썽거리게 하는 것들에 대해 가만가만 중얼거린다. 이전보다 훨씬 두터워진 사유를 통해 느릿느릿 그려낸 세상은 쓸쓸하고 서럽다. 그런데도 그의 시들은 따뜻하고 감미롭다. 언젠가 안도현 시인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내팽개치고 싶은 과거도 지루한 일상도 그에게 와서는 단단하게 빛나는 한 편의 시”가 된다. 고요하고 섬세하고 낮으막한 것들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눈떠가는 기쁨은 적지 않다. 그의 시가 지닌 미덕이다.
그는 전에 쓸쓸하고 다정하게 말했으나 이제 다정하고 쓸쓸하게 말한다. 깊어졌는데, 밝아졌다. 솟아난 말과 빚은 말을 한데 엮고 일상을 모아 인생을 쓰는데, 한 자리를 오래 천착해 얻은 작은 발견들은 반전의 의외성에 거두어져 홀연 흡족한 완결에 이르는 것 같다. 부분을 정성으로 매만진 사람은 저도 몰래 전체를 돌보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이 책에선 버릴 말을 찾기가 어렵다.
쓸쓸하고 다정했으나 이젠 다정하고 쓸쓸한,
그 마음의 풍경 속으로 초대합니다
천생 슬픔을 타고난 시인이 있다. 지독한 외로움에 허방을 짚으며 청춘의 한 시절을 건너온 시인은 11년 만에 세상에 내미는 다섯 번째 시집에서 한층 더 깊어진 목소리로 노래한다. 번잡한 세상에서 몇 걸음 물러나 스스로를 소외시킨 것처럼 보이는 강연호 시의 주체는 한층 더 깊어진 외로움과 쓸쓸함을 이번 시집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를 읽으며 이십 대 청춘을 보낸 나로서는 엄살은 줄고 시선은 너그럽고 웅숭깊어진 이번 시집 수록 시들을 읽으며 함께 나이 들어가며 여전히 공유하는 감각을 지닌 시인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위로받았다.
“한때는 무엇인가에 미쳤던 적도 있었”고 “가슴이 뜨거웠던 적도 있었”으며 “사랑을 잃고 운 적도 있었”던 “고독한 아이”는 “한때는 질문으로 세상을 밝힌 적도 있었”지만 이제 “그는 잘못 간직하여 그를 잃은 자”가 되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세월 앞에서 그도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면서” “침묵은 깊었으나” “여전히 캄캄한 세상은 이제” “질문하는” 이가 없어서 “질문으로 남았다”(「고독한 아이」). 고독도 아이도 사라진 곳에 잘못 간직하여 자신을 잃어버렸다는 쓸쓸한 자각이 뒤늦게 온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가야 하는 상갓집을 다녀오는 길”에 “보란 듯이 서로 싸우는 유족들을 만나고” 와도 “남의 집안 문제는 관여할 바가 아니어서/다들 묵묵히 문상을 하고 조의봉투를 내밀고/육개장을 먹고 돌아들” 가는 쓸쓸한 일상을 사는 일이다. 조문 후에 노래방에 가서 “전인권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오랫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노랫말을”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그냥 잘못 부르기로” 하는 시의 주체는 “젊어서 외로웠지만, 세상에 혼자였지만/그래서 버둥거릴 수 있었”음을 안다. “이제 일도 있고/돈도 있고 마누라와 자식도 있고/술친구도 있”지만 “견딜 만한 외로움을 잃어버”(「외로움을 잃어버렸죠」)린 나이가 되었음을 그는 고백한다.
강연호의 이전 시집이 외로움과 쓸쓸함의 정서에 기대고 있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외로움과 쓸쓸함의 정서를 그리면서도 그것에 강해 보인다는 힘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기억의 부력은 놀라워서 언제든 기어이” 과거의 정서가 떠오르지만 “꽃말처럼 흩어지는 신파를 거두며/찻물이 끓는 동안 입술이 식혀야 할 이름이 있다”고 시의 주체는 말한다. 이제 신파를 거두고 뜨거운 감정을 식혀야 할 시간임을 강연호의 시는 알고 있다. “혼자 밥 먹는 사람”이 이전과 달리 “외로워서 강해 보”이고 “혼자 노래하는 사람”이 “쓸쓸해서 강해 보”이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이때 혼자 밥을 먹고 노래하고 하는 행위는 무리에 휩쓸려 다니는 삶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행위이자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홀로’의 감각에 가깝다. 무리에 휩쓸려 다니는 삶의 방식은 어찌 보면 바깥에서 존재를 증명받고 싶은 일종의 인정 투쟁에 가까운 행위로 볼 수 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혼자 밥을 먹고 노래하는 것은 생활인으로서의 삶과 시를 쓰는 삶을 바깥의 흐름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로 선택하겠다는 주체의 선언으로도 볼 수 있다. 시집의 첫 시로 이 시가 실려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라는 공동체가 도대체 가능하기는 한 건지 회의를 품으면서도 강연호 시의 주체는 ‘공동체’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못한다. 달리 희망을 걸 데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취약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공동체의 가능성은 열릴 것이다. 그것은 경청의 감각을 타자에게로 확장하는 일이기도 하다.
“추위가 꽃을 피”우고 “위협받을 때/생은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봄에 피는 꽃”을 보며 강연호 시의 주체는 깨닫는다. “이제 봄인가/잠깐 나왔다가/미처 들어가지 못한/꽃눈이 피어/꽃이 되는 꽃”이 “봄에 피는 꽃”이라고 한다. “내가 못 살아/내가 왜 못 살아/미련해서 미련을 못 버리는/갈증이 꽃을 피”우듯 강연호의 시도 혼자의 시간을 지나 제각기 다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이다.
― 시인의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