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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세기말 빈과 어깨를 나란히 한 자신감 넘쳤던 부다페스트
색채, 취향, 소리, 말씨, 심정적 분위기까지 절정에 달했던 도시
역사가 존 루카스가 비할 데 없는 문명의 초상화로 그려내다
1900년의 부다페스트는 우리를 끌어당긴다. 1900년의 빈과 파리처럼. 부다페스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햇빛 찬란한 정오의 도시였고 빈과 쌍둥이 형제였다. 『부다페스트 1900년』은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역사가 중 한 명”이라 불린 존 루카스가 헝가리 역사의 최절정기인 1900년을 단면으로 잘라내 쓴 것으로 뛰어난 문학성과 서정성을 발휘한다. 이 책은 한 도시에 대한 회고록이다. 회고는 흔히 향수를 자극하지만, 감상에 머무는 것은 헝가리인들의 특성도 아니고 루카스의 특성도 아니어서 책은 이를 뛰어넘는 통찰력과 도시(민) 관찰, 분석력을 보여준다.
1900년에 부다페스트는 유럽에서 가장 젊은 대도시였다. 25년 동안 인구는 세 배, 건물은 두 배로 늘어났다. 서정성 짙은 민족이었지만 그럼에도 부다페스트인들은 19세기의 사고방식, 태도, 말투로부터 빈 사람들보다 더 빨리 벗어나는 중이었고, 정치와 의회 영역에서도 새로운 양식, 태도, 표현이 등장했다.
저자는 이 도시의 면모를 하나씩 분해해나간다. 그 방식은 좀 엄격한데, 즉 1900년을 기점으로 도시의 물리적·물질적 상황, 사람, 정치, 예술과 지적 삶, 정신의 성향을 차례로 다룬다. 이 도시는 이중적 성격이 짙어 분석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부다페스트 태생이면서 훗날 미국으로 건너가 역사학자로서 연구했던 만큼 그는 모국과 멀고도 가까운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부다페스트에는 세련된 도시 감성과 거친 지방성이 공존했다. 또 헝가리적이면서 세계주의적인 정교함이 동시에 빛을 발했다. 루카스는 다시없을 그 운 좋았던 시기에 켜켜이 쌓인 자갈 속에서 희귀한 금속들을 건져내는 방식으로 이 책을 쓴다. 읽다보면 앞 단락의 분석을 뒤엎는 방식으로 뒤 서술이 이어져 동시대 속에서도 부다페스트는 앞뒤 얼굴이 다르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그 도시의 특성이었고, 저자는 누구보다 그 특징을 잘 포착해낸다.
🏫 저자 소개
존 루카스
부다페스트 출생. 어머니가 영국과 영국 문화에 호의적인 시각을 지녀 영국 기숙학교를 다녔고, 유대인인 어머니에 의해 가톨릭 신자로 자라났다. 그 덕분에 어린 시절 모국어인 헝가리어뿐만 아니라, 당시 헝가리인이 손쉽게 공부할 수 있었던 독일어, 그리고 미래에 귀중한 언어적 자산이 될 영어를 완벽하게 공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46년 봄, 루카스는 부다페스트대학에서 유럽 외교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때쯤 이미 그는 헝가리에 소련의 꼭두각시 정권이 수립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에 따라 미국인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1946년 여름 미국으로 이주했다.
필라델피아에 정착해 체스트넛힐 칼리지에서 역사학 교수직을 얻었고, 여러 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았으나 1993년 은퇴할 때까지 그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컬럼비아대학, 존스홉킨스대학, 터프츠대학, 프린스턴대학, 펜실베이니아대학, 프랑스의 툴루즈대학에서 초빙교수나 객원교수로서 가르쳤고, 1992년에 는 부다페스트대학ELTE에서 초빙교수직을 역임했다.
루카스는 역사란 쉽게 가르쳐야 하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강한 믿음을 지녔다. 즉 역사가들만의 학문적 소통 도구가 되는 것을 반대했으며, 전문적인 학자들의 용어보다는 일상 용어로 가르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저서로 『열강과 동유럽』 『냉전의 역사』 『유럽의 쇠퇴와 발흥』 『역사의식 또는 기억된 과거』 『현대의 소멸』 『마지막 유럽 전쟁』 『1945년: 원년』 『필라델피아: 귀족과 속물, 1900~1950』 『거대해진 민주주의: 20세기 미국의 역사』 『원죄인의 고백』 『대결: 1940년 5월 10일~7월 31일, 처칠과 히틀러의 80일간의 투쟁』 『20세기의 끝과 현대의 끝』 『목적지는 과거』 『세월의 실타래』 『런던의 5일, 1940년 5월』 『처칠: 몽상가, 정치가, 역사가』 『한 시대의 끝에서』 『민주주의와 포퓰리즘』 『기억된 과거』 『1941년 6월: 히틀러와 스탈린』 『조지 케넌: 인물 탐구』 『피, 고생, 눈물, 땀: 긴박한 경고』 『마지막 의례』 『제2차 세계대전의 유산』 『역사의 미래』 『우주의 중심에 있는 우리』 등이 있다.
📜 목차
머리말
1장 색채, 말씨, 소리
2장 도시
3장 사람
4장 정치와 권력
5장 1900년 세대
6장 불행의 씨앗
7장 그 이후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 책 속으로
도나우강은 빈보다 부다페스트에서 더 빠르고 깊게 흘렀다. 강물은 종종 낮은 부두까지 범람했고, 소용돌이치는 물 덩어리의 모습과 굉음은 두려움을 일으킬 정도였다. 4월 말에는 진줏빛 안개가 굽은 강과 다리와 부두를 휘덮고 언덕 위 왕궁까지 들이쳤다. 이 빛은 긴 여름 아침을 거쳐, 성숙하고 선명한 늦은 9월까지 계속되었다.
--- p.55
부다페스트의 가을은 짧았다. 어쨌든 가을의 아름다움은 너무도 빨리 성숙해버리는 여인처럼 또는 헝가리 남성의 우울처럼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해 질 무렵에 날아다니는 것만이 아니라, 1900년경 부다페스트에 살던 헝가리 최고의 작가들도 마음속에 가을을 품고 있었다.
--- pp.58~59
부다페스트는 문학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고대 헝가리어는 19세기 초의 애국적인 작가와 고전주의자들이, 때론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어휘를 보강하고 재구성함으로써 풍부하고 힘이 넘치는 유연한 언어, 서술적·시적·서사적 표현이 가능한 언어가 되었다. 그러나 헝가리어는 유럽 언어 중 고아와 같은 처지였다. 헝가리어는 라틴어, 독일어, 슬라브어 계열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헝가리 문학은 헝가리 지역 외에서는 메아리도, 반향도, 평판도 얻지 못했다. 19세기 내내 오직 한 명의 헝가리 작가 요커이 모르의 작품만이 외국에서 종종 번역되었지만, 그나마 1900년 무렵에 그의 소설은 형식과 범위에서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1900년 부다페스트는 문학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헝가리 작가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19세기 국가의 문학적·문화적·정치적 부흥기에 활동한 위대한 시인과 작가 중 부다페스트 출신은 없었다. 1900년에도 이런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들 모두는 중력에 끌리듯 부다페스트에 이끌렸다. 그들이 부다페스트에 살게 된 것이 단지 그들의 작품을 구매해주는 신문사나 출판사가 가까이 있다는 장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 도시의 분위기가 필요했다.
--- pp.62~63
1900년은 부다페스트 역사의 이정표이자 전환점으로, 연대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00년의 부다페스트는 서양 문화의 가장 중요한 두 수도인 1900년의 빈과 1900년의 파리와 대조를 이룬다. ‘아름다운 시절’은 기분 좋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문구이지만, 구舊프랑스의 위기와 19세기의 사상·이상·기준으로부터의 탈피는 파리에서 1900년이 되기 15년 전 또는 25년 전에 벌써 시작되었다. 빈에서도 1900년은 흥미로운 예술적·지적 증상과 불안한 징후를 드러내며 오스트리아 세기말의 종말을 고하던 시기였다. 부다페스트에서는 불행(권태)이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부다페스트는 빈에 뒤처졌다. 그러나 무엇이 “뒤처지는” 것이고 무엇이 “앞서는” 것일까? 그렇다. 구자유주의의 위기, 구식 정치와 자본주의 질서의 와해, 도시의 사회적·재정적 균형의 붕괴 같은 것은 부다페스트보다 빈에 이미 7년 전, 10년 전, 12년 전에 찾아왔다. 물론 빈에서 생긴 일이 1900년 무렵 빈 사람들이 얕잡아보던 제국의 쌍둥이 동생 수도 부다페스트에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프로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부다페스트와 헝가리인, 그 반 야만적인 국가와 장소를 멸시했다. 그러나 빈 사람들이 몰랐던 것―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은 1900년의 부다페스트에서 빈보다 훨씬 더 빠르게 19세기의 사고방식, 시각, 태도, 심지어 말투까지 다른 방식으로 바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pp.81~82
1900년경 부다페스트 공공 건축의 특이함은 기념비적 건축이 많았다는 점이다. 특이하다고 표현한 것은 거대 건축물이 세기가 전환되던 시점을 전후한 헝가리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이런 경향은 (아마도 유감스러운 일이겠지만) 헝가리 민족의 자부심이 과도하고 거창하게 분출되던 시대의 흐름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특이함은 헝가리의 전능함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낙관적인(헝가리의 민족 성향이 낙관주의보다는 비관주의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상한 것이다), 그리고 이해할 만한(그러나 변명의 여지가 없는) 근시안적인 감정 때문이었다.
--- p.116
화려한 관용구와 긴 문장을 느린 속도와 리듬으로 말하는 낡은 헝가리식 표현 습관은 오래된 가문이나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되었다. 공식 언어, 정부 언어, 군사 언어에는 오스트리아처럼 관료적이며 의례적인 문구와 표현이 많았다. 말하는 방식을 포함해서 무슨 일이든 빨리빨리 피상적으로 불손하게 처리하는 부다페스트의 행동 양태는 다른 일에서처럼 특히 최근에 부다페스트로 상경한 젠트리 계층에게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 pp.193~194
🖋 출판사 서평
부다페스트인의 이중적 속성: 빛과 어둠
이 책은 빛나는 1900년을 묘사하기 위해 가장 어두운 색조로 문을 연다. 바로 그해 5월에 치러졌던 화가 문카치 미하이의 장례식 장면이다. 향과 몰약이 미풍에 흩날리고 중세 스타일로 장식된 영구차를 여섯 마리의 검정말이 끌었다. 예식은 국장國葬으로 치러질 만큼 문카치는 위엄 있고 프랑스에서도 이름을 날렸지만, 이 장면이 첫 페이지에 등장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다. 루카스는 그의 세계적 명성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기 어렵다며 오히려 화가 시네이 메르셰 팔에게 조명을 비춘다. 즉 이전 세대의 부고를 들은 독자들은 환한 1900년으로 진입할 수 있다. 메르셰 팔은 앞 세대를 넘어설 만한 기량을 지녔고, 그것은 헝가리적인 것이기도 했다. 이런 식의 날카로운 선별 작업은 저자가 책 속에서 헝가리의 문학, 예술, 역사, 정치 등을 아우르는 가운데 계속 들이대는 기준이다.
시점은 1900년경으로 정해졌으니 이제 도시의 지리적·공간적 특징을 살펴보자. 부다페스트의 가장 좋은 점은 무엇보다 그 위치다. 이곳은 거대한 도나우강이 한가운데로 흐르는 유일한 대도시였다. 부다페스트에서 북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도나우강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곧장 굽이쳤다. 도나우강이 굽은 곳은 강과 언덕과 땅의 비율이 절묘해 화가들이 천국처럼 여겼고, 강굽이 사이로 나타나는 푸른 회색빛 대기에 도시의 전경이 단숨에 드러났다. 1900년에 부다는 3개 구역, 페스트는 7개 구역으로 형성돼 있었다.1900년경 파리나 베를린이 시골의 특성을 잃은 채 매연 낀 도시였던 반면, 부다페스트는 국제성과 지방성이 혼종된 다른 매력을 발하고 있었다.
1900년의 부다페스트는 사회적 유동성이 높아 사람들은 이곳으로 저절로 끌어당겨졌다. 다만 유동성은 늘 불안감을 동반하기에, 사람들 마음속엔 전통에 대한 존중부터 질투로 맥박이 뛰는 시기심 그리고 이 두 감정이 뒤죽박죽된 심리까지 섞여들어 있었다. 도시의 이중성은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 많은 면에서 자유주의적이었지만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도 점점 섞여들었고, 부르주아 문화는 봉건적 요소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도시적 요소에 시골의 특징이 포함돼 있었고, 빠른 변화 속에서도 사람들은 안정을 갈구했다. 더욱이 저자는 눈에 띄진 않지만 19세기를 지배했던 감정, 즉 “존경받고자 하는 욕망이 모든 계층에 만연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부다페스트의 노동자들은 도시 부르주아들의 습관과 삶의 방식을 모방할 뿐 아니라 이것을 실제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했다.
저자 루카스는 도시를 들여다보면서 동시에 부다페스트인들의 마음을 꿰뚫어본다. 현대 도시의 물적 기반은 그 도시인들의 정신을 지배하기도 하고, 거꾸로 그 정신이 도시를 창조하기도 한다. 저자는 헝가리인의 언어 습관을 뛰어나게 분석하는데 이 역시 피와 독이 된다. 독백의 경향이 강한 헝가리인들은 “대화의 부재로 처참한 정치적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다시 말해 그들은 수사학에 도취되는 경향이 있었고, 이것은 치명적인 자기중심주의 경향을 만들어냈다. 또 이 민족에게 지배적인 감정은 비관주의였다. 하지만 비관주의 속에서 분별없이 배태된 낙관주의로 인해 헝가리 시문학은 순진무구함의 매력을 발산했다. 저자의 분석은 한발 더 나아간다. “이런 식의 낙관주의는 후속 세대가 저지르게 될 수많은 엄청난 정치적 실수의 예비 작업이었다.”
한 국민의 마음 상태를 이렇듯 자신 있게 분석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루카스는 1867년의 ‘대타협’으로 탄생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의 문제를 심도 있게 분석하면서 그 국민의 속마음을 다음과 같이 읽어낸다. “그 마음 상태는 허세와 낙관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동시에 의심과 질투로 괴로워했다.”
1900년 세대와 부다페스트적 기질
저자는 1900년을 분석하면서 “1900년 세대”라는 용어를 정의한다. 우선 이 세대는 1900년을 전후해 형성된 일단의 무리를 뜻한다. 다만 이 시기보다 몇 년 늦게 태어났지만 여전히 그 시대의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사람들, 1875년부터 1905년 사이에 태어나 눈에 띄고 독특하며 크게 성과를 냈던 이들도 포함된다.
이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헝가리 학교들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던 1880년대와 1890년대에 학생이었고, 감상적인 헝가리 스타일과 수사학을 떨치려는 의지가 확고했다. 특이하고 새로웠던 기민성도 이들의 공통점이었다. 낡은 관습과 편협한 전통에서 벗어나려 했던 이들 작가, 화가, 작곡가, 철학자, 과학자 등은 더 도시적이고 세계적인 것을 목표로 삼았다. 물론 다른 한쪽에는 현대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도시화·세계화 문명에 별로 관심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헝가리 시골의 민속 문화에 깊이 침잠하거나 거기에 감춰진 표정을 희구함으로써 자연에서 영감을 얻고 자신만의 표현법을 창조하려 했다(이들이 창조한 세계가 보편성이 덜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외에 헝가리 바깥으로부터 거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헝가리를 거시적으로 표현하려던 사람들도 있었으니, 극작가 몰나르 페렌츠, 작곡가 버르토크 벨러, 작가 크루디 줄러다.
저자는 특히 크루디 줄러를 파고든다. 그는 크루디에 대해 “그의 진미珍味는 항상 그의 마음속에 신선하고 준비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며 격찬한다. 크루디는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된 작품이 거의 없지만, 가장 위대한 헝가리 작가 중 한 명이다. 번역이 안 된 이유는 크루디의 기억과 상상력에 쌓인 정신적 토양 때문으로, 그의 글은 헝가리의 사물·장소·시간에 관한 암시로 가득 차 있다. 게다가 그의 산문은 느린 첼로 곡처럼 오르내리는 서정적 빛깔 때문에 다른 언어로 구현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어디 엔드레 역시 루카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는 한동안 1900년 세대의 주인공으로, “번개의 섬광” 같은 인물이었다. 평범했던 이 시인은 1906년 갑자기 언어와 시각이 폭발했다. 새로운 단어, 새로운 직유와 은유, 새로운 운율과 박자가 그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냈는데, 깊고 울퉁불퉁하며 운율이 있고 쓰라린 헝가리다운 것이었다. 루카스는 그를 단 한마디로 압축한다. “그는 존재 그 자체였다.”
저자에 따르면 1900년 세대에게는 두 가지 새로운 특징이 있었다. 첫째, 수학에서 시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재능은 광범위하게 펼쳐졌다. 둘째, 헝가리 역사상 처음으로 1900년 세대는 본질적으로 부다페스트 세대였다. 특히 1900년의 부다페스트에 대해 얘기할 때 논쟁의 여지가 없는 것은 문학과 책에 대한 존중, 학문적·직업적 성취에 대한 존중, 재능 있는 아마추어들의 창의성에 대한 존중이 넘쳐흘렀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 특징이 1900년 그 도시에서 완벽하게 균형을 이뤘던 것을 간파해낸다. 나아가 ‘부다페스트 기질’이란 것도 밝혀낸다. 그것은 빠른 결정력, 놀라운 다재다능함, 삶의 즐거움에 대한 욕구로, 독일적 특징과 대비되는 것이었다.
1900년 신구 세대의 시각차는 사실 문학보다 회화 쪽에서 훨씬 더 뚜렷했다. 신세대의 공통점은 뭐였을까? 이 세대는 색채감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구름 뭉치 아래에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을 묘사하는 데 탁월했다. 헝가리 화가들의 특이점은 그 시절 시골로 갔다는 것인데, 이는 유럽 다른 지역 화가들이 자석처럼 수도로 이끌렸던 것과 완전히 대비됐다. 가령 1895년 홀로시 시몬은 젊은 동료와 학생들을 데리고 뮌헨을 떠나 헝가리 동부의 작은 마을 너지바녀에 정착했고, 50여 명의 화가와 함께 살았다. 1899년과 1901년에는 각각 괴될뢰와 솔노크에 화가들의 촌락이 형성됐다. 이런 선택은 보헤미안적인 자유분방함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그들의 삶은 마치 워크숍 같았다. 시골로의 낙향은 이들이 민족주의적인 것을 추구했다는 뜻이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였는데, 이 화가들 모두 선배 세대가 주제로 삼던 감성적 역사나 민족주의를 회피했기 때문이다. 자연을 보는 그들의 눈에는 좀더 깊은 헝가리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새로운 세대는 1906년경 헝가리 음악, 그림, 산문, 시 분야에서 전통과 기존 형식을 깨뜨리고 언어, 색채, 소리에서 헝가리다운 영감을 찾아내며 혁명을 이뤄냈다. 저자는 두 가지 요소로 이 우연성을 설명한다. 하나는 헝가리 예술계의 변화에 있어 부다페스트가 맡았던 중심적 역할이다. 화가들은 너지바녀에서 작업했고, 버르토크와 코다이는 트란실바니아의 깊은 계곡 마을을 휘젓고 다녔지만, 토론하고 전시하고 공연한 곳은 바로 부다페스트였다. 다른 하나는 헝가리 역사상 처음으로 이런 예술을 받아들이고 소비할 대중이 부다페스트에 존재했다는 점이다. 한 세대 전만 해도 페스트에 오페라 극장과 교향악단은 하나도 없었고 서점 몇 곳과 미술 중계상 몇 명이 있을 따름이었다. 1900년경 이 모든 것은 바뀌었다. 다른 유럽 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부다페스트의 부르주아들은 문학 명사들뿐 아니라 배우, 음악가, 작곡가, 가수, 화가, 조각가 등을 받아들이고 열렬하게 추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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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욕망이 흘러넘쳤던 1900년의 부다페스트를 그려낸다. 하지만 그 욕망은 슬픔과 자매였다. 즉 이 도시의 시끌벅적함 아래로는 애잔하고 우울한 색조가 흘렀다. 이 도시는 장조와 단조의 뒤섞임, 낙관주의와 비관주의의 공존, 빛과 어둠의 혼합이 지배했는데, 이것은 부다페스트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조건처럼 주어졌다.
1900년 빈은 신경과민 상태였지만, 부다페스트는 그렇지 않았다. 이 도시의 삶에는 많은 어려움, 불만, 그림자, 어둠이 있었지만 아직 과거와 결별하려는 명확한 의지나 미래에 대한 자의식 강한 의심은 없었다. 헝가리인의 어조는 종종 우울했지만, 말씨와 소리와 색채와 맛과 촉감의 물질적 즐거움을 포함한 삶의 욕구는 풍부했다. 당시 부다페스트의 에로틱한 삶 역시 빈의 그것보다 덜 신경질적이었는데, 남녀 관계에 관한 여러 문헌에서 이런 점은 꽤 명백히 나타난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이 도시의 1900년경 초상, 분위기, 거기 살던 사람들, 그들의 성취와 고전을 뛰어난 예술적 기교로 그려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