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제삿날 편지
최 병 창
음력 동짓달 열 아흐레
거칠어가던 겨울눈과
빗줄기가 가늘어지다가
한쪽 하늘을 빠끔하게 드러냈네요
아마도 할머니께서 오늘을 어찌 알고 오시고 있는지 불어오던 겨울
바람도 잠시 멈추려는 듯 안온한 듯 하기만 하온데
할머니, 할머니께서 그토록 걱정하시던 큰손자 놈이 오늘 또 할머니
기일을 맞아 할머니 영정 앞에 천하의 죄인처럼 엎드려있습니다
할머니 지금쯤 어디만큼 오시고 있나요
매년 이맘때쯤이면 영정으로 할머니를 마주하며 할머니의 사랑을
그리워하던 옛날옛적의 말썽꾸러기 큰손자였건만 옛날을 추억하기란
큰손자란 놈이 이미 할머니만큼 훌쩍 늙어버렸기에 할머니에 대한 기억
만큼은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소중하답니다
대문도 방문도 활짝 열어놓았으니 협소하지만 반갑게 맞이하시고
좌중 하시어 일 년 만의 해후를 기리옵소서 그리고 할머니께서 그토록
아끼시고 사랑하시던 제 아버지인 큰아들과도 반갑게 만나셔서 오늘의
해후만큼은 영원히 기억되게 하시옵소서
할머니와의 기억만큼은 더 이상 늙지 말고 항상 그대로였으면
좋겠는데 몸이 먼저 늙어가고 있으니 생전의 할머니 댁 다락방 속에
감춰 두었다가 내주시던 곶감 속 씨방만큼은 지금도 여전하지 않을까요
비록 간소한 소찬이지만
큰손자 정성으로 마련하였사오니
마음껏 흠향하시옵고
가시는 길 부디 평안히 가시옵소서
오늘 동짓달 열 아흐레
할머니께서 이승을 떠니신 잊지 못할 기념일이옵니다.
< 2023. 12. >
등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