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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Royal Navy
Sekkan Sakurai(1715~1790)가 그린 유비, 관우, 장비.
명나라 시대 [삼국지연의]의 표지 (1591).
중국의 역사 중 일반인들이 가장 많이 접해본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서기 3세기에서 후한(또는 동한)이 무너지고 위-오-촉으로 갈려 전쟁을 벌인 ‘삼국시대’일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중국의 삼국시대에 대하여 가진 관심은 삼국시대의 실제 역사가 아니라 15세기 명(明)나라때의 인물인 나관중(羅貫中)이 쓴 역사소설인 [삼국연의(三國演義)]에 기인한다.
나관중의 [삼국연의]에는 물론 역사적 사실도 들어있지만 기본적으로 소설이기 때문에 사건의 선후가 뒤바뀜은 물론, 소설적인 과장도 들어있고 어떤 인물들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하지도 않았던 일을 덧붙이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역사적 사실여부가 분명치 않은 민간의 전승까지 접목시켰다. 이 때문에 [삼국연의]는 스펙터클하고 장대한 서사(Epic)로 거듭났지만 후세인들에게 삼국연의의 내용과 실제 삼국의 역사 사이에 약간의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삼국연의의 내용과 상관없이 중국의 삼국시대는 엄청난 격변기였으며 중국의 역사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였다. 전, 후한을 통틀어 약 400년간 중국대륙을 다스린 한조(漢朝)가 무너지고 군웅(群雄)들이 난립하고 이를 통일하기 위한 경쟁과 전쟁을 거치는 와중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이후의 중국 역사에 길이 남는 영향을 미치게 된다.
후한 왕조가 겪고 있던 위기의 원인은 이전의 전한시대에 발생하였다. 한나라의 군제는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원칙하에 운영되었다. 평상시에 땅을 일구던 농부들이 전시에 병사로 징집되는 방식이다. 그러나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병사를 내보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피해야 하는 금기이다. 서한의 군제는 23세에서 56세까지의 성인남자들에게 2년동안 병역을 부과하였다. 해당 지역의 성인남자들이 징집되면 변경지대나 황도(皇都)에서 1년, 그리고 자신의 출신지에서 1년을 병사로 복무하게 된다. 지방에 있는 병사들은 매년 8월에 소속 군(郡)을 다스리는 태수 앞에서 훈련과 열병(閱兵)을 하도록 되어있었다. 물론 근현대만큼 행정체계가 면밀하지 못한 고대의 특성상 얼마나 철저하게 훈련이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전한의 남성들은 최소한의 군사훈련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는 일정숫자의 훈련된 보병들을 확보할 수는 있지만 중국 왕조들의 주적(主敵)인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병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즉 기병을 육성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한의 무제(武帝)는 대규모의 기병대를 만들어 위청과 곽거병 등의 지휘하에 흉노족의 본영을 격파하고 그 세력을 크게 약화시키지만 그의 무리한 대외정벌로 문제(文帝)와 경제(景帝)가 쌓은 국부(國富)가 탕진되면서 경제가 파탄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 무제는 정복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정복의 결과로 한나라에 편입된 북방 이민족들을 변방에 배치하여 다른 이민족들을 막게 하였다. 이민족 병사들이 초반에 침공군을 막아주는 동안 중원에서 정벌군을 모아 침공군을 무찌르는 방어전략을 택한 것이다.
대외정벌에 적극적이었던 무제 이후 전한의 정권을 외척들이 좌지우지하면서 정치가 매우 혼란스러워지고 AD 8년에 외척인 왕망(王莽)이 황위를 찬탈하면서 전한은 멸망하였다. 그러나 왕망의 신(新) 왕조는 도처에서 일어나는 반란세력을 누르지 못하고 멸망하고 AD 23년에 광무제가 후한을 건국한다. 광무제의 후한이 등장하면서 전한 왕조 내내 존속하였던 병농일치의 군제는 일제 변화를 맞게 된다. 우선 AD 30년에 각 지방에서 군사들의 훈련과 지휘를 담당하였던 도위(都尉)제도가 폐지되었다. 이듬해에는 연례열병행사가 모두 폐지되었다. 이는 전한-후한 전환기의 혼란 속에서 인구가 줄고 조세(租稅)가 급감하여 아무리 병농일치라고는 하지만 군대를 동원할 때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광무제 유수가 군(郡)과 도위 중심의 제도를 폐지한 또 다른 이유는 중앙의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병력이 지방에 생겨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유수의 후한 건국에는 지방 호족들의 도움이 결정적이었고 이러한 호족들은 유수가 광무제로 등극한 후에 정치적인 대가를 요구하면서 벼슬과 함께 사실상의 자치를 보장받으려 하였다. 호족들의 자치가 보장된 상태에서 지방 장정들이 군사훈련을 계속 받을 경우, 유사시에 중앙정부에 불만을 가진 세력에 이 장정들이 포섭될 수 있기 때문에 사전 방지 차원에서 지방군사들의 훈련을 중지시킨 것이다.
후한 정부는 병농일치의 농민출신 병사들 대신 고위귀족들의 자제들을 지원형식으로 받아들여 금군(禁軍)을 만들었다. 아울러 감옥에 차고 넘치던 사형수들과 죄수들을 사면하여 병사로 만들어 주는 대신 이들을 변방으로 보내어 근무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나라에 귀부하는 유목민들을 기마부대로 삼아 역시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후한시대 지방행정의 기본단위는 군과 현이었다. 군과 현은 작은 단위였기 때문에 태수나 현위가 야심이 크더라도 다스리는 지역이 작고 인구가 적어 군대를 대규모로 양성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후한 중기에 지방관들에 대한 일종의 감찰 직책이었던 자사(刺史)에게 보다 넓은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관의 지위(州牧)가 부여되면서 이러한 사정은 바뀌었다.이때부터 군현보다 거대한 주(州)로 지방권력의 축이 이동했고 많은 인구와 농지를 보유하게 된 각 주의 목(牧)들이 대규모 군대를 육성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삼국연의]에는 유비가 도겸에게서 서주(徐州)의 목(牧)자리를 받는 장면이 있고 목으로서 상당한 수의 군사를 동원하여 타 지역의 분쟁에 개입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소설상의 설정이 아니라 주목은 실제로 그러할 권한이 있었다.
이와 함께 당시 점증하는 이민족의 습격, 농민들의 봉기 때문에 주목들에게는 실질적으로 군사적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권한이 필요하게 되었다. 결국 이전에 사공(司空)들, 즉 현대의 장관에 해당하는 중앙관료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방군의 지휘권은 자사(이후 주목)들이 가지게 되었다. 아울러 군사의 지휘권과 지방관들에 대한 감찰권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관할하는 지역의 인사권까지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조정의 직접적인 명령 없이도 관할지역의 관리들을 임명하고 파면할 수 있게 되면서 지방의 군사권과 행정권을 모두 장악하였고 각 주의 목들은 독립왕국을 다스리는 군벌로 부상했다. 이 때문에 지방관들의 힘이 막강해지면서 혼란기와 군웅할거가 도래하게 되었다.
[삼국연의]에 등장하는 환관들의 전횡은 11대 황제인 환제(桓帝)때부터 본격화된다. 환제가 외척 양씨의 세력을 꺾는데 역시 환관들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환관들은 양씨들을 몰아낸 후 조정에서 건드릴 수 없는 자들이 되었고 이 세력이 유명한 당고의금(黨錮之禁)을 일으키며 영제(靈帝)때의 유명한 십상시(十常侍)로 이어진다. 십상시의 권세는 천민 출신의 하(何)씨를 황제의 후비(后妃)로 밀어올리고 그녀가 황제의 아들을 낳아 황후(皇后)가 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영제가 죽은 후 벌어진 권력투쟁에서 하씨의 아들이 한의 소제(少帝)로 등극하면서 하황후는 태후가 되고 그녀는 오빠 하진(何進)에게 대장군의 지위를 주었다. 하씨들이 새로운 외척세력이 되면서 환관세력과 갈등을 빚었고 외부세력과 힘을 합하여 환관세력을 없애려 하였다. 이때 하진에게 동조한 인물 중에는 하북의 유명한 사족(士族)출신인 원소(袁紹)와 서량의 동탁(董卓)등이 있었다. 그러나 하진의 모의를 알아챈 환관들이 오히려 선수를 쳐서 하진을 죽이고 그 일족을 몰살하는 이른바 ‘십상시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환관들을 제거하려는 세력들에게 좋은 명분을 주었다. 이미 군대를 동원한 원소 등은 황궁에 난입하여 환관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벌였고 2000명의 환관이 참살당했고 이로서 조정을 뒤흔들던 환관들의 세력이 꺾였다. 그러나 환관토벌을 명분으로 같이 거병하였던 서량의 동탁은 수도인 낙양에 들어오자마자 소제를 폐하고 그 동생인 진류왕을 헌제(獻帝)로 세웠다. 이에 원소 등은 동탁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연합군을 결성하고 동탁은 이를 피하여 서한(西漢)의 수도이던 장안으로 수도를 옮겼다. 외척과 환관들이 암투를 벌이는 동안 매관매직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고 변방의 장수들은 거의 독립세력이 되었으며 주목(州牧)들의 권한이 급상승하면서 조정이 통제하기 힘든 지방세력이 곳곳에 생겨났다. 원소가 결성한 호족연합군중 대부분이 한 지역을 장악한 주목이나 자사출신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동원한 군대를 해체하지도 않았고 이를 기반 삼아 혼란한 정국에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였다. 정치가 어지러워지면서 백성들의 세금 부담도 늘어났고 대호족들은 더 많은 땅을 점유하게 되었다. 후한은 점차 기존의 체제로는 유지가 어려운 한계상황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황권(皇權)의 약화, 외척의 전횡, 환관들의 득세, 이로 인한 백성들의 이반, 그리고 중앙의 약화를 틈탄 지방세력의 강화로 동한 왕조는 위기를 맞이하였고 일반 백성들은 구원을 갈망하였다. 이때 등장한 것이 태평도(太平道)였다. 태평도는 하북성 출신의 장각(張角)이란 인물이 창시한 도교 계통의 종교로서 신앙과 부적을 통한 기복과 질병의 치료, 그리고 새로운 세상의 출현을 내세우며 혼란과 수탈에 시달리던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비록 교단 자체는 장각이 만들었지만 태평도는 [삼국연의]에도 등장하는 도사인 우길(于吉)의 사상과 저서에 바탕을 두고 만들었다. 하북성에서 시작한 태평도는 백성들 사이에 급속하게 퍼져 불과 수 년 만에 화북과 하남 지역에서 신도 수십만을 확보하였다. 그리고는 일부 환관들과 관리들과 결탁하여 중앙정부를 약화시키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하자 184년에 본격적인 봉기의 기치를 올린다. 장각은 당시에 유행하던 오행종시설(五行終始說)을 이용하여 한나라의 상징이 불(火)이기 때문에 화의 기운이 다하면 흙(土)이 성(盛)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에 태평교도들은 창천(푸른 하늘)로 대변되는 한조(漢朝)가 망하고 황천(누런 하늘)이 도래한다며 누런색을 스스로의 상징으로 삼아 누런 색의 띠를 머리에 둘렀고 이 때문에 황건당(黃巾黨)이라고도 불렸다. 이들이 난을 일으켰으니 바로 태평도의 난(亂), 또는 황건적의 난이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장각이 일으킨 난은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 그리고 말세론적 교리가 주는 강력함으로 인하여 지금의 하북, 하남, 산동등 화북지방뿐만 아니라 현재의 호북, 안휘등 양자강 유역으로도 급속히 퍼졌다. 확산속도가 빠른데다가 그 세력도 만만치 않아 고질적인 병력부족에 시달리는 동한조정은 단독으로 이들을 진압할 힘이 없었다. 이 당시 동한조정은 십상시 세력이 일으킨 당고의금 사태가 진행 중이었고 많은 관료와 귀족들이 힘을 잃고 물러나있었다. 이때 지방의 태수로 있던 황보숭이 이 사태를 해결하려면 황제의 재산과 궁궐의 말들을 토벌을 위하여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황제는 이런 무례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때 황궁수비대 일부를 제외하고는 중앙의 군단이 유명무실한 상태였기에 황제는 대규모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던 황보숭과 같은 지방세력가들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그러나 황보숭을 위시한 세력가들이 공짜로 병사들을 동원하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는 황건군 토벌에 공을 세운 자들에게 벼슬과 상을 줄 것을 건의했다. 이 전투에서 황보숭과 주준이 공을 세워 정계의 실세가 됨은 물론 기도위(騎都尉)의 벼슬에 있던 조조라는 젊은이가 전투 중 위기에 처한 토벌군을 구하는 공을 세워 이후 중앙으로 진출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황보숭의 토벌군은 여남과 창정 지역의 황건집단도 연이어 격파하였다. 그리고 그 해 말에 장각의 동생들인 장량과 장보의 집단을 각각 무찔렀다. 이로서 황건군은 그 구심점을 잃고 수그러들기 시작하였다.
황건의 난이 실패한 이유는 종교적인 운동이었던 탓도 있지만 군사적인 요인도 있다. 종교적인 운동으로 시작한 황건집단의 종교이념은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데는 좋았지만 이들을 조직화된 군대로 유지하기 위한 행정이나 보급, 군사훈련의 체계를 세우지 못하였다. 교단이 아닌 통일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 없었기에 사실상 반독립적으로 활동한 지방의 봉기군들은 군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약탈에 의존하였고 이는 자신들의 기반이었던 농민들을 교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역효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황건의 난이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폭제로서의 작용을 하였다. 태평도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중앙의 무능은 더욱 돋보였고 이미 상당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지방세력들은 중앙정부로부터의 자치를 이루게 되었다. 누런 하늘은 서지 못하였지만 이들이 촉발한 거대한 움직임으로 인하여 푸른 하늘은 결국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삼국시대는 하나의 왕조가 멸망하고 유력한 세력끼리 싸움을 벌이다가 가장 강한 나라가 통일을 하는 중국사의 전형적인 패턴을 따르는 것 같지만 실상은 매우 복잡하다. 삼국시대는 단순히 위-촉-오 삼국의 쟁패로만 설명될 수 없다. 삼국시대는 사실 이후 전개되는 중국사의 구도를 결정하였다. 삼국시대의 혼란으로 인하여 천자의 당위적 권위는 실종되고 지방세력의 발호가 일상적인 일이 되었으며 북방과 서방에 있던 이민족들이 중원에 대거 진출하며 연의에 묘사된 낭만과는 거리가 먼 혼돈과 분열, 그리고 파괴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한나라가 열리면서 구축하고자 하였던 안정적인 질서가 실종되고 세력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집어삼키는 것이 당연시되었으며 이 때문에 이후의 중국사에서는 고대의 천명(天命)은 예전에 있었던 당위성을 상실하고 다만 실제의 힘을 가장하는 명분론으로 변하였다. 아울러 이민족의 유입과 함께 한인(漢人)들이 이전에 개척이 되지 않은 지역으로 들어가면서, 삼국의 뒤를 이은 남북조 시대에는 한족과 이민족의 혼합이 일상적인 일이 되었고 이들을 통합하기 위하여 보다 정교한 중화주의적 이념이 등장하였다. 즉 한족의 문화적 개념인 ‘중화’를 중심으로 사방의 이민족을 정복/교화하는, 또는 설령 한인들이 패하더라도 이민족을 한족의 ‘위대한’ 문화로 감화시키는 중국인의 천하관이 나타나는 것이다.
동한 왕조가 각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후 각축을 벌이게 되는 세력은 크게 화북세력, 강남세력, 관중/서량세력, 그리고 파촉세력으로 나뉠 수 있다.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역은 당시 대부분의 농경지와 인구를 포함하고 있는 화북(현재의 하북, 산서, 산동, 하남)이었다. 이 지역의 주요 군웅들을 살펴보자면 현재 하북성 북부와 요녕성 서부에서 세력을 구축한 공손찬, 현 하북성에서 농경지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명문귀족으로서의 막강한 힘을 지닌 원소, 그리고 하남과 산동 일부의 본거지에서 힘을 키우던 조조였다.
앞서 동탁이 소제(少帝)를 폐하고 진류왕 유협을 헌제(獻帝)로 세우자 각지의 자사들과 주목들이 동탁의 토벌을 명분으로 하는 토벌군을 일으켰다. 그러나 동탁은 본격적으로 싸우는 대신 189년에 수도인 낙양을 불태우고 헌제를 서한의 수도인 장안으로 옮기고 아예 장안을 수도로 선포하였다. 낙양이 황폐화되면서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던 동한 조정의 권위는 회복불능의 지경이 되었고 동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려던 자사들과 주목들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렸다. 동탁은 천자를 끼고 서량과 관중을 토대로 권력을 다시 구축하고자 하였지만 192년에 부하장수 여포에게 죽음을 당하면서 그의 세력 역시 지리멸렬되었다.
청나라 때 [삼국연의]의 판본 중 원소(좌)와 동탁(우).
동탁이 죽은 후 장안은 이각과 곽사가 차지하게 되었고 천자는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지방세력을 견제할만한 최소한의 권위도 실추된 상태에서 군웅들의 세력 다툼은 본격화되었다. 원래 자사나 주목들은 중앙의 조정에서 임명하는 것이었지만 이때 군웅들은 그들의 지위에 대한 사후승인을 요청할 뿐 직위를 세습하면서 지역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유형으로 형주를 다스리던 유표, 서촉(익주)의 유언, 강남의 손견등이 있다. 이들은 명분상으로는 아직 황제의 신하였지만 사실상 왕과 같은 지위를 획득하였고 이들이 다스리던 지역은 실질적으로 개인 왕국이었다.
조조. 흑산적을 토벌하고 흉노족의 추장을 대파하면서 그의 위상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 걸쳐 세력기반을 다진 다른 군웅들과는 달리 조조(曹操)에게는 가산을 정리하고 가신들을 모아 만든 소규모 군대밖에 없었다. 비록 황건적 토벌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 하였지만 십상시의 천하에서 그 기회는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조조는 황건적 이후 태행산맥 지역에서 일어났던 흑산적(黑山賊)을 토벌하면서 동군태수에 임명되었고 북중국에 대한 상시적인 위협이던 흉노족의 추장 어부라를 대파하면서 그의 위상은 급상승하였다. 192년에 과거 황건적의 잔존세력이 수십만씩 몰려다니면서 지금의 하북성과 산동성 북부를 휩쓸자 조조에게 이들을 토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산동성 북부에 이른 황건적 집단은 역시 이들을 토벌하러 나온 연주자사 유대의 군대를 격파하고 생존을 위한 광범위한 약탈을 자행하였다. 이때 유대 밑에 있던 포신이란 인물이 군을 모아 이들을 토벌하려고 나서면서 동군태수로 있던 조조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조조는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였고 기병대의 이점을 십분 발휘하여 기병이 거의 없는 황건적을 수장(壽張)에서 크게 무찔렀다. 패배한 황건적들은 제수(濟水)까지 밀려나 물러날 수 없는 지경까지 몰렸다. 이때 조조는 황건적들을 이끌던 거수들에게 자신을 따른다면 죄를 묻지 않음과 동시에 정착지를 주겠다고 제안하였고 황건적들은 이를 받아들여 다시 농민이 되었다. 조조는 이들 가운데서 장정들을 군사로 뽑아 훈련시켰는데 후일 조조 군대의 핵심인 청주병(靑州兵)이 되었다.
수년 후 195년에 동탁의 부하였던 이각과 곽사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헌제는 장안을 빠져나와 196년에 옛 수도였던 낙양으로 돌아왔지만 폐허가 된 낙양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때 연주의 목(牧)이었던 조조는 재빨리 낙양으로 진군하여 신하를 자처하며 황제를 모시겠다고 하였고 황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아울러 폐허가 된 낙양보다는 허창이 더 지내기가 나을 것이라며 수도 자체를 허창으로 옮기고 허창은 허도(許都)가 되었다. 이로서 황제의 신병을 확보한 조조는 승상이 되었고 이후 군웅들과 쟁투에서 명분상의 우위를 지닐 수 있게 되었다. 이 와중에서 하북성을 놓고 쟁패를 벌이던 북방의 효웅(梟雄)들인 원소와 공손찬의 싸움은 계교(界橋)의 전투에서 원소가 대규모 노병(弩兵)을 동원하여 공손찬의 주력 기병을 크게 깨면서 원소쪽으로 기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손찬 세력은 멸망하였다.
이미 원소와 공손찬의 싸움으로 화북의 군소세력은 정리된 상태이기에 이때 화북을 놓고 원소와 싸울 수 있는 상대는 조조, 그리고 하비에 둥지를 튼 과거 동탁의 부하인 여포(呂布)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비에 있던 여포는 198년 조조와 싸움에서 패하고 조조는 지금의 하남과 산동성 서부를 아우르는 지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하북을 통일한 원소과 조조의 결전이 이루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삼국연의]에서 인덕(仁德)의 표상처럼 묘사되는 유비는 이 시점에서 이곳 저곳 몸을 의탁하는 식객에 불과하였다. 나관중의 소설에서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으로 나오는 유비는 유송(劉宋)의 사가인 배송지에 의하면 한 경제(景帝)의 후손 임읍후의 자손이라고 나와 있다. 그러나 그의 출자가 어떠하건 간에 당시 그는 아무런 세력도 없는 시골의 젊은이였다. 설사 실제로 황실의 일족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황실로부터 멀어진 잊혀진 황족이었다. 우리나라 역사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그는 몰락양반, 즉 잔반(殘班)에 불과하였다.
유비, [역대제왕도권(歷代帝王圖卷)] 중 촉주유비(蜀主劉備) 부분이다.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아버지가 일찍 죽은 후 그는 다행히 부유한 친척의 후원으로 명사(名士)인 노식의 문하에서 공손찬과 함께 공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비록 돗자리 만들면서 생활하기는 하였지만 나름대로 고향에서 힘깨나 쓰는 자들을 모으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등 ‘네트워크’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아 싸우러 나갔고 이 과정에서 평생지기가 되는관우와 장비를 만났다고 한다. [삼국연의]에 나오는 ‘도원결의’가 실제로 이루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유비의 출신지인 탁현에서는 유관장 ‘삼형제’를 모시는 사당을 지어놓고 여전히 제사를 지내고 있다.
유비는 황건적과의 싸움에서 세운 공으로 근처의 현령이 되었다가 이후 황건당의 잔존세력이 서주(徐州)에서 난리를 일으키자 다시 의군을 조직하여 싸웠다. 이 싸움에서 세운 공으로 지금의 강소성 북부에 있는 고당(高唐)현의 현령이 되었다. 그러나 동탁의 장안천도 후 내전이 벌어지고 유비는 이 난리통에서 고당현을 잃고 과거 노식의 문하에서 같이 배웠던 공손찬에게 몸을 의탁하여 함께 원소와 싸우게 된다. 당시 공손찬은 서주목(徐州牧)인 도겸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는데 도겸은 조조군의 침공을 받자 공손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공손찬은 부하인 전계(田楷)와 유비에게 구원군을 맡아 출전하게 하였다.
이때 여포가 조조의 중요한 근거지인 연주를 침공하면서 조조는 서둘러 후퇴하였고 도겸은 유비에게 같이 있어줄 것을 요청하면서 유비는 서주 근처의 소패에 머무르게 되었다. 유비는 서주의 유력자인 미축(麋竺)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서주에서의 기반을 굳히고 도겸이 죽자 미(靡)씨 일족의 지원을 받아 서주목이 되려 하였으나 원술(袁述)의 침공가능성 때문에 망설인다.
그러나 유비는 그의 사형(師兄)이라 할 수 있는 공손찬을 버리고 원소의 ‘승인’을 얻어 서주목이 된다. 돗자리 짜던 잔반(殘班)이 커다란 주(州)의 주목이 된 것이다. 사실 공손찬을 버리고 원소에게 가는 것이 [삼국연의] 상의 선인(善人)이미지와는 맞지 않을 수 있지만 그 당시의 상황 자체가 이해에 따라 이합집산을 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던 만큼 유비의 행적이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러나 이후 유비 역시 몸을 의탁하러 온 여포에게 쫓겨나 결국 원소에게 가게 되며 원소의 식객으로 조조와 원소의 큰 싸움을 관전하게 되었다.
공손찬을 누르고 하북의 패자가 된 원소는 조조와의 싸움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당시 가장 좋은 농경지였던 하북 지방을 차지하였고 병력의 수도 우위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명망있는 거족(巨族)출신으로서 많은 호족과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그이기에 환관의 자손인 조조 따위와 자신을 비교할 수 없다는 오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기 200년에 조조와 싸우러 갈 때 그는 보병 10만과 기병 1만을 합쳐 11만의 대군을 몰아 황하 북변의 여양(黎陽)으로 향하였다. 많은 병력을 동원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대군(大軍)을 먹이느냐, 즉 보급의 문제인데 원소는 생산성 높은 농경지를 모두 장악한 만큼 축적한 군량도 많았고 수운(水運)을 통한 보급상황도 좋았다. 서진이 중원을 통일한 후 서진의 사관인 진수(陳壽)의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의 ‘원소전’에 의하면 원소의 모사인 저수가 양군(兩軍)을 평가하면서 ‘조조의 군대는 정예지만 수가 적고 우리(원소측)는 병사가 많고 보급상황이 좋으니 싸움을 서두르지 말고 지구전을 하자’고 하였다.
관도대전 직전의 원소와 조조 영지 (붉은 색이 원소, 푸른색이 조조).
이에 따라 원소는 싸움을 서두르지 않았지만 몇 가지 실책을 범하였다. 일단 그는 본거지에 병력을 거의 남겨두지 않고 보유한 군사 거의 전부를 몰고 나왔다. 이 때문에 수적 우위를 점할 수 있었지만 패할 경우 세력을 보존할 길이 없었다. 아울러 보급전과 지구전에 의존한 전략도 좋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전쟁이 길어지면 고향을 떠나 있는 병사들이 지치고 전쟁의 불확실성이 증폭되면서 내부 갈등이 심해지기 때문이다.
일단 원소군은 황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상황을 끝내고 도하하여야 했다. 결국 병력의 우위를 내세워 도하에 성공하기는 하였지만 선봉 기병부대가 조조군의 유인전술에 말려 전멸당하면서 맹장인 안량과 문추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공교롭게도 안량을 죽인 것은 서주에서 흩어진 후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던 관우였다. 강을 건넌 원소군과 이를 막아선 조조군은 참호를 파고 대치전으로 전환하였다. 원소군은 우위를 점하기 위하여 토산을 쌓아 참호와 목책 뒤에 숨어있는 조조군을 공격하였고 조조군은 발석차(發石車)로 돌을 날려 토산을 무너뜨리면서 반격하였다. 그러나 대치가 오래되면서 병력이 적은데다가 보급도 좋지 않은 조조군은 상황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었다.
서주에서 쫓겨난 유비도 원소편에서 이 전투에 참전하였는데 황건적 출신인 유벽이란 인물과 함께 조조의 본거지인 허도 근처의 반란군을 지원하면서 조조군을 교란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조조의 명을 받은 조인(曺仁)군의 공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졌고 또 다른 부대를 맡은 서황은 원소군의 보급행렬을 요격하여 불태워 버렸다. 이에 원소는 순우경에게 1만을 주어 뒤이어 오는 수송부대를 호위하게 하였고 물자를 오소(烏巢)에 두었다. 황하를 이용한 수운(水運) 보급의 이점을 이용한 조치였고 조조군이 강을 건너 오소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조조가 친히 5천 군사를 이끌고 오소의 병참기지를 불태우면서 전세는 조조쪽으로 급속히 기울었고 놀란 원소는 조조가 빠진 본진을 공격하였으나 원소의 장수인 장합과 고람이 패하고 조조군에게 항복하였다. 이에 사기가 완전히 꺾인 원소군이 황하를 다시 건너려 할 때 조조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고 원소군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원소는 겨우 업까지 돌아갔으나 다시 세를 회복하지 못하였고 아들들이 골육상쟁을 벌이다가 원담은 조홍에게 패하여 죽고 원희와 원상은 원씨 가문을 도와주던 오환족의 땅으로 들어갔으나 조조는 군사를 보내 오환까지 격파하였다. 이에 원씨 형제들은 요동의 공손씨에게 도망하였으나 요동의 지배자인 공손강은 원씨 형제의 목을 베어 조조에게 넘겼다. 조조는 원씨 세력을 일소하면서 명실 공히 화북의 제왕이 되었다. 이제 화북을 온전히 손에 넣은 조조는 한나라의 땅 전체를 통일하고자 하였다.
북쪽을 통일한 조조는 그 시선을 남쪽으로 돌렸다. 조조는 화북에서 원씨의 잔당을 소탕하는 일이 끝나자 천자의 이름으로 군웅들을 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군을 휘몰아 남쪽으로 향하였다. 208년에 조조가 20만 대군을 편성하여 향한 곳은 형주였다. 이때 마침 유비는 남쪽으로 도망하여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조조는 형주를 점령하여 양자강 중류를 장악하여 손씨의 동오 세력을 압박함과 동시에 잠재적인 도전세력인 유비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목표를 세우고 남하하였다. 조조는 다소 어려운 싸움을 예상하였지만 형주는 유표(劉表)가 죽은 후 후계문제로 인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주목의 자리를 물려받은 유표의 아들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면서 형주 점령은 싱겁게 끝났고 유비는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 유비는 하구(河口)쪽으로 피신하였고 207년에 합류한 제갈량을 오나라에 보내어 동맹을 맺었다.
형주를 점령하여 오나라를 압박하려고 한 조조는 형주에서 마음을 고쳐먹고 동맹을 맺은 손권-유비세력과 전면전을 하기로 결심하였다. 내심 오나라의 수군 세력이 마음에 걸리던 조조는 형주의 수군을 손에 넣음으로 오의 수군과 싸워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고 자신이 이끌고 온 병력과 형주의 병력을 합쳐 24만의 대군을 이루었으니 5만 남짓의 손-유 동맹군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조는 자신이 100만대군을 거느리고 있다는 심리전을 펴서 오나라의 여론을 흔들었고 이 때문에 오나라에서는 일단 항복하여 당장의 화를 피하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때 오나라가 다스리던 지역은 온전히 한인(漢人)들의 땅이 아니었다. 비록 한(漢) 제국의 영토였기는 하나 오지가 많았고 한인들은 만인(蠻人)이라고 불리는 원주민들과 온전히 융합되지 못하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손권은 아버지인 손견이 기초를 닦고 형인 손책이 기반을 다져놓은 오나라를 내놓기를 거부하였다.
손권. [역대제왕도권(歷代帝王圖卷)] 중 오주손권(吳州孫權) 부분이다. 보스턴 미술관 소장.
이때의 한나라 지도만 보아도 한나라의 통치가 온전하게 이루어진 북부와는 달리 남부에 ‘빈 공간’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한나라의 지방행정조직에 완전히 편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양에서 농업의 근간으로 인식되는 쌀농사는 아직 이때까지 광범위하게 퍼지지 못하고 양자강 유역의 일부 지역에서만 행해지고 있었다. 후한 말기에도 중국인의 식생활은 밭작물 위주였다. 이를 후한 말기 쟁패의 틀에서 보자면 조조나 원소는 이미 농경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행정조직이나 국가인프라가 갖추어진 땅을 놓고 싸운 것이지만 손씨(孫氏) 일족은 남들이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지역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고 있었다. 그렇지만 손씨가 다스리던 지역을 구성하는 소위 ‘강동 6군’의 인구는 후한 때에 약 590만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한나라가 AD 2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서 한나라의 인구가 5900만이었으나 양자강 이남지역에는 당시 한나라 인구의 10분의 1정도밖에 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삼국이 서진에 의하여 통일된 이후 쓰여진 진수의 [삼국지]에는 위나라의 인구가 440만, 오나라가 230만, 촉이 90만이라고 되어있다. 물론 이는 행정체계가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상태의 조사여서 정확한 수치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략의 수치라고 보아도 위나라의 인구가 오+촉을 크게 상회하는 것이다. 손씨의 오(吳)는 내부의 정리가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조조가 이끄는 24만 대군의 침공을 받으면서 다시 존망의 위기에 서게 된 것이다.
조조 군이 함선을 확보한 것은 사실이지만, 형주에 있던 수군만으로는 승선요원이 태부족이었고, 결국 북방출신의 병사들을 배에 승선시킬 수밖에 없었다. 물에서 전투한 경험이 없는 병사들은 함상의 흔들림을 견디지 못하고 멀미를 하면서 배에 오르는 것을 기피하였다.
그래서 조조가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것이 쇠사슬에 의한 함선 고정이었다. 함선의 흔들림을 줄여 배에 더 많은 병사를 실으려는 생각이었다. 이때는 활 이외에는 배에서 쓸 수 있는 장거리무기가 없어, 수상전투는 대개 궁시(弓矢)에 의한 사격전과 함상백병전으로 판가름이 났다. 이 때문에 병력의 우위는 육전뿐만 아니라 수전에서도 상당한 우세를 가져다 줄 수 있었다. 아울러 이 시기에 강상(江上)전투에서 쓰이던 전술중의 하나가 높은 배위에서 작은 배에 쇳덩이 등 무거운 물체를 떨어뜨려 공격하는 것이었다. 조조의 함대는 거선(巨船)들을 확보하면서 전투에서의 수적 우위(병력과 함선)를 보장함과 동시에 투하(投下) 공격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었다.
수군전력이 우위인 손씨들로서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강을 방벽으로 삼고 있는 지역의 특성상 수군이 상대적으로 많기는 하였지만 수군이 패하면 조조군을 막을 수 있는 병력이 충분치 않았다. 아울러 양자강 남쪽의 드넓은 땅을 차지하기는 하였어도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곳은 도성인 건업 주변 밖에 없었다. 조조군은 강남으로 깊숙이 들어갈 필요 없이 오의 수군을 무찌르고 건업만 점령하면 손씨 정권은 속절없이 붕괴될 수 있었다.
강가의 벼랑에 새겨진 ‘적벽’ 글자. <출처:Wikipedia.org>
하지만 전쟁은 조조의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풍토병이라는 다른 재앙이 조조군을 덮쳤기 때문이다. 북방에서 온 병사들이 습지로 가득한 양자강가에 오자 환경이 바뀌면서 탈이 나는 병사들이 많았다. 사실 역사서에는 풍토병이라고만 기록하고 있으나 여러 가지 증거와 정황을 보았을 때 조조의 병사들은 단순히 환경이 바뀌어서 탈이 난 것이 아니라 기생충에 감염되었을 확률이 높다. 조조군이 동오와 결전을 치르기 위하여 양자강가에 진을 쳤다면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부식은 강에 수식하는 물고기와 민물조개인데 이들은 기생충의 숙주가 되기 쉽다. 실제로 적벽에서 멀지 않은 장사(長沙)에서 발견된 마왕퇴(馬王堆)의 묘에서 나온 미이라에서 간(肝) 주혈흡충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정사의 기록에도 조조군의 상당수가 ‘풍토병’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마왕퇴의 증거로 미루어볼 때 이는 세균성 전염병이라기보다는 기생충 감염일 가능성이 높다.
배에 익숙하지 못한 병사들이 멀미를 하고 기생충병으로 죽기 시작하면서 조조의 군대는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손씨 정권은 수적(水賊)들을 써서 조조군에게 수시로 기습을 가하였다. 소규모 부대로 배에 올라 병사 몇 명 죽이고 달아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적벽 전투에서 동오의 주장(主將)중 한 명이었던 감녕(甘寧)이 수적출신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오나라가 수적들을 이용하였을 가능성은 많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배들을 마구 습격하니, 함선 지휘관들은 경계를 위하여 병사들의 하선(下船)을 금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함상생활에 익숙지 못한 북방병사들의 체력은 지속적으로 떨어졌다.
동오는 이때를 노리고 있었다. 배를 모아 동오의 수군과 결전을 하려던 조조의 계획은 물 건너가고, 조조는 오림에 대선단을 정박하여 둔 채 어찌 할 것인지를 고심하였다. 지속적인 기습과 체력저하로 조조군의 기민한 대처능력이 떨어졌을 때 오군(吳軍)은 잘 타기 쉬운 물질을 가득 실은 돌격선들을 조조의 선단 쪽으로 밀어보냈다. 조조군의 함선들은 돌격선이 부딪치자 불타오르기 시작했고 선단에 대화재가 발생하였다. 오림의 강안(江岸)은 갈대밭이어서 불이 갈대로 옮겨 붙으면서 ‘천지사방’이 화마에 휩싸였다.
조조의 수군은 거의 전멸하고 정예인 기병을 포함한 조조의 육군은 수군을 구출하는 일을 포기한 채 남군(지금의 호남성 강릉)방면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상당수가 병으로 사망하기는 하였지만, 육군이 전투로 입은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조조는 남군에서 버티려 하였지만 조조의 군사는 멀리 나온 원정군이었기 때문에 변변한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결국 조조는 남군을 포기하고 형주 본성으로 철수한다. 북방을 통일한 후 형주를 병탄하고 여세를 몰아 남방까지 통일하려던 조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북방에서 유목민과 처음으로 싸우던 농민 병사들이 유목민들의 기마전에 고전을 하듯이 조조군은 오(吳)의 수상(水上) 게릴라 전술과 기습전에 녹아났다. 이는 단순히 조조 개인이 실패한 것이 아니라 북방세력이 남방을 접수하려는 시도가 좌절된 것을 의미한다. 적벽에서 조조의 실패로 말미암아 북방세력은 향후 70년간 양자강 남쪽을 넘보지 못한다.
이로서 동오의 독립은 보장이 되었고, 떠돌이였던 유비는 참전에 대한 반대급부로 형주 북부를 얻어 세력을 키워나갈 기반을 확보하였다. 일찍이 제갈량은 세력균형책으로서 ‘천하삼분지계’를 주창한 바 있다. 중원을 이루는 세력이 서로 견제하게 만듬으로써 전쟁의 빈도를 낮추고 천하를 안정시킨다는 것이었다. 유비와 동오가 적벽에서 이김으로써 중원은 세 나라로 갈리고 ‘천하삼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적벽에서 크게 패한 조조는 당분간 남방을 정벌하려는 뜻을 접었다. 군사적 피해도 피해지만 새로운 위협이 등장하였기 때문이다. 마씨(馬氏)일족을 위시한 관중과 서량의 토호 10여명이 ‘타도 조조’의 기치를 올린 것이다. 그러나 관중연합군은 꺼져가는 한조(漢朝)에 대한 충성심으로 조조와 싸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중국 역사상의 반란세력들은 약탈형, 세력유지형, 왕조건국형의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약탈형은 민란세력이 단순히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움직이며, 세력기반을 마련한다던가 나라를 세운다거나 하는 정치적인 목표는 없다. 장씨 삼형제가 사망한 후의 황건잔당이나 흑산적이 이에 해당한다. 세력유지형은 대개 어떤 지방의 토호세력이 난세를 만나 자신의 영토와 세력권을 지키기 위하여 군사를 일으키는 유형이고, 필요에 의하여 기타 정치세력과 이합집산을 하고 작은 나라를 세우기도 하지만, 대륙을 통일하고 황제자리에 오를 생각은 없다. 마지막이 바로 나라를 세우고 군주가 되어, 궁극적으로는 중원을 하나의 정권아래 통일을 시키려고 하는 유형이다. 조조나 원소, 손책은 모두 중원을 하나로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군사를 키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마씨와 서량-관중 군벌들은 천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적벽대전에서의 대패 이후 조조는 동오와 유비라는 강적을 앞에 두게 되었다. 일전에 원소와 싸우기 전에 여포를 정리하였듯이 유사시에 위협이 될 수 있는 모든 세력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고도로 군사화된 서량과 관중의 군벌들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위수(渭水)지역의 농토와 초원의 마필, 유목민들과의 싸움에서 단련된 보병, 그리고 유목기병들까지 있었다. 관중-서량군은 조조가 그들을 적대시하는 기미가 보이자 대규모로 군을 동원한다. 이때 화북의 패왕이었던 조조는 이를 구실삼아 관중으로 진격한다.
전통적인 강군의 고장인 관중-서량의 연합군은 전투력이 강했지만 연합군의 최대약점은 지휘권이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약 10명의 군벌들이 자신들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연합군을 이루었기 때문에 공을 다투면서 서로에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였다. 혼성군(混成軍)의 최대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지휘권 분열이 나타난 것이다.
한편 관중-서량 연합군은 전략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제한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관중 밖으로 본격적으로 진출할 계획이 없었던 연합군의 최대 관심사는 조조군이 관중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일이었다. 그리하려면 우선 관중과 중원간의 관문인 동관(潼關)을 막아야 했다. 하남(河南)에서 관중방면으로 진격하는 군대는 동관을 지나야 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조조는 외통길인 동관에 대한 정면공격보다는 우회하는 방법을 택하였고, 그 선봉을 서황(徐晃)에게 맡긴다. 서황의 우회기습공격으로 관중-서량연합군에서는 비상이 걸렸고 이를 양봉이 저지하려다가 패하면서 조조의 군이 위수 북쪽 지방을 장악한다. 이때 연합군은 조조군이 위수를 건너 장안을 공격할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조조군은 다시 한 번 연합군의 허를 찌른다. 조조군은 위수를 다시 건너기는 하였지만 장안으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남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과 합세하여 동관을 앞뒤에서 친다. 결국 동관은 함락당하고 조조의 대군이 대거 관중으로 진입한다. 조조는 가후의 계책에 따라 관중군과의 화의에 임하였지만 이는 지연술이었다. 위수의 북쭉으로 간 조조군은 위수를 역(逆)도하하여 위남(渭南)을 서쪽에서 치고 이에 조조의 본군이 화의를 결렬시키고 공격을 개시한다. 동관을 함락시킬 때 썼던 작전의 재연이었다. 서량군은 대패하였다. 조조는 서량과 관중의 군벌들을 쓸어버리면서 든든한 군사기지를 얻음과 동시에 장안을 차지하여 명분상의 우위가 더욱 더 높아지게 되었다.
한편 형주에 있던 유비는 조조가 언제 다시 쳐내려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조조와 손권의 사이에서 불안해하였다. 형주가 비록 양자강 중류의 요충이기는 하였지만 유비는 외적으로부터 안전하면서 안정적으로 세력을 키울 수 있는 기지가 필요하였다. 이에 유비는 수비의 이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서촉에 관심을 두었다. 서촉은 좋은 농토와 목초지가 널려있는데다가 난리통에서 비껴있는 곳이라 세력과 군사를 키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때 서촉은 아버지인 유언(劉焉)의 익주목 자리를 물려받은 유장(劉璋)이 다스리고 있었다. 익주는 일견 평화로웠지만 사실은 유씨 일족과 기존 호족들간에 상당한 갈등이 있는 상태였다. 유장은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아울러 유장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입지강화를 위하여 유비를 끌어들이려는 세력들도 있었다. [삼국연의]에도 등장하는 장송, 법정 등의 군소귀족이었다. 사실 익주 내에서도 유비의 숨은 의도를 아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반대의 목소리는 그대로 묻혀 버린다. 익주에서의 절대 권력을 장악했지만 조조 같은 거대세력을 두려워하던 유장은, 어느 정도 힘이 있어도 자신보다 월등히 강하지 않은 유비가 적절한 이용대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장이 안이하기는 하였지만 자기 영토안의 세력균형에 대해서까지 무지하지는 않았다. 유장이 유비를 불러들인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는 조조가 관중으로 출병한 시기와 맞물렸고 유비는 익주 내외의 이런 상황을 적절히 이용한다. 유장을 설득하여 북방의 장로와 조조를 방비해야 한다며 군사를 빌리고 얻은 군사들을 회유하였다. 유비는 자신이 원래 형주에서 데려온 병력에다가 회유된 유장의 병사들, 그리고 익주 북부 맹달의 군사를 합쳐 약 약 3만 정도의 군사를 마련한다.
유비의 원래 계획은 익주 내부의 장송으로 하여금 유장을 제거하고 유장군이 지리멸렬하는 사이 재빨리 군을 진격시켜 성도에 무혈입성한다는 계획이었으나, 음모가 발각되어 장송이 처형당하게 되자 전면전밖에 없다고 판단, 가맹관에서 그대로 남진한다. 유장의 군대는 병력이 태부족이었다. 유비는 재빨리 면죽을 함락하고 낙성을 포위한다. 설상가상으로 유장에게 방어군을 얻어 이끌고 나온 유장의 신하 이엄조차 유비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나 낙현 싸움에서 유비가 새로 얻은 군사 방통이 승부를 서둘다가 화살에 맞아 죽으면서 유비의 군은 추진력을 잃고 수세에 몰렸다. 이에 유비가 형주에 있던 그의 군사와 장비, 제갈량 등을 불러들이자 전세는 다시 역전되고 익주의 각 군현이 무너졌다. 이윽고 굳건히 버티던 낙현마저도 무너지자, 유장은 구원의 가능성 없이 철저히 고립이 되었고 유비군이 성도를 포위한지 수십일 만에 성을 나와 항복한다. 시골 출신의 떠돌이 잔반 유비가 마침내 오랜 기다림 끝에 ‘세 조각의 천하’중 한 곳을 차지한 것이다. 중산정왕의 후예임을 강조하면서 중국전역을 떠돌던 유비는 더 이상 떠돌이도 아니었고, 단순한 하나의 군웅도 아니었다. 명백히 중원의 세력균형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한 지역의 패자(覇者)가 된 것이다.
유비는 서촉을 점령하여 단단한 본거지를 마련하였지만 214년경에 조조가 한중(漢中)에 자리 잡고 있던 오두미도(五斗米道) 교단을 무찌르면서 서촉(西蜀)의 지리적 이점은 대부분 사라지고 말았다. 촉한의 최대 이점은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침공이 어렵다는 것인데 한중은 서촉과 북쪽의 관중 사이를 가로지르는 진령산맥 중간에 있었다. 위나라가 한중을 점령하였으니 진령산맥은 지리적인 방벽으로서 무력화 된 것이다. 수월하게 한중에 진출한 조조는 급할 것이 없었다. 엄청난 인구와 군사력을 확보하고, 공격에 유리한 지역까지 차지하였기 때문에 여유를 두고 침공준비를 하였다. 이와 반대로 유비에게는 엄청난 위기상황이었다. 유비에게는 한중을 점령하고 있는 위군을 격파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유비는 서촉 전역에 거국적인 동원령을 내리고 최소한의 수비군을 제외한 서촉의 정예병 거의 전부를 동원하였고 그 수가 5만에 이르렀다. 유비가 서촉 점령전을 시작할 때도 지휘한 병력이 불과 3만 남짓이었다. 조조의 침공에 맞서 5만을 동원했다는 것은 유비와 서촉 정권이 얼마나 조조의 한중 점령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위나라의 10만 대군을 서촉의 신생정권이 이기느냐의 여부에 따라 서촉이 번영하고 한나라 중흥의 명분을 이어갈 수 있느냐, 또는 나라를 기틀 위에 세우기도 전에 사라지느냐의 상황이 된 것이다.
형주를 보유하고 있을 경우 촉한의 기본전략. 익주와 형주에서 동시에 공격을 상정하고 있다. <출처:Wikipedia.org>
조조의 원정군은 장합과 하후연이 이끌고 있었는데 장합은 전술적 능력이 뛰어난 현장 지휘관이었고 하후연은 무력이 뛰어난 맹장이었다. 이에 맞서 유비는 장비, 황충등의 장수와 함께 익주 출신으로서 새로이 합류한 법정을 군사로 삼았다. 조조의 위나라 정권은 서촉을 침략하기 이전의 사전 정지작업으로 장합을 파군(巴郡)에 보내어 서촉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의 깃발을 올린다. 이에 장비가 장합과 싸우러 갔는데 위서(魏書) 장합 열전에서는 단순히 이기지 못하고 남정(南鄭)으로 돌아갔다고 되어있으나, 촉서(蜀書) 장비 열전에는 장합의 군사가 겨우 10명만 살아남는 대패를 당했다고 기술되어있다. 장비가 서전을 승리로 이끌기는 하였지만 싸움이 급한 쪽은 준비를 착실히 한 조조가 아니라 싸움을 빨리 끝내야 하는 유비였다. 한중 정군산 근처에 도착한 유비는 협곡이라는 현지의 지형을 이용하여 병력을 분산하여 게릴라식 공격을 하고 공격을 하지 않을 때는 북치고 소리를 지르는 방법으로 위군을 흔들어놓는다. 위군의 힘을 빼놓은 촉군은 위군의 진지에 불화살과 인화물질을 사용한 화공을 가한다. 계속되는 전투로 지쳐있고 진영에 화재가 발생한 위군은 전열이 완전히 무너지고 지휘관에 의한 통제가 안 되는 상태에서 촉군의 돌격을 맞는다. 그리고 난전 중에 황충의 칼에 하후연이 죽는다.
만약 한중 전투의 승패가 뒤바뀌었더라면 이른바 [삼국연의]에서 말하는 육출기산(실제 기산공격은 두 번. 원정이 여섯 번)도 없었을 것이고 오장원도 없었을 것이다. 아예 촉한 자체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촉한을 차지한 유비는 한중에서 조조군을 이김으로써 하늘에 제를 올리고 221년에 한중왕의 위(位)에 오른다.
유비가 유장을 몰아내고 한중에서 승리하여 촉한 정권의 기반을 다지는 동안, 관우는 서촉을 가로막고 있는 산맥의 동쪽에서 외로이 형주를 ‘파수’하고 있었다. 형주에 주둔한 촉한군은 위나라에게 매우 껄끄러운 상대였고 수도인 허창의 턱밑에 겨누어진 비수였다. 형주를 가지고 있는 한 촉한은 관중과 중원을 둘 다 노려볼 수가 있는 것이었다. 마침 위나라가 지배하고 있던 형주 최북단의 남양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군은 곧 진압되지만 관우는 이로 인한 혼란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군사를 일으켜 형주북부를 접수한 후 위나라까지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위나라는 이에 우금과 방덕을 보내어 관우의 북진을 막게 하였지만 관우의 홍수작전으로 위군은 서전(緖戰)을 크게 패하고 형주의 최북단까지 촉한이 차지하는 듯싶었다. 그러나 위와 오는 이미 밀약(密約)을 맺고 있었고 오나라 사령관 여몽의 꾀병작전에 속은 관우는 형주 본성의 수비군까지 차출하여 번성 전역에 투입한다. 여몽은 많은 병력과 배를 동원하여 상인과 상선으로 위장한 뒤 양자강의 북안(北岸)에 도착하여 촉한의 수비병들을 모조리 사로잡았지만 이런 상황을 전방에 있는 관우에게 알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오군의 북상으로 관우는 앞뒤로 협공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형주 북부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오나라의 장수인 주연과 반장이 관우가 도주할 만한 길을 모두 끊었고, 관우는 마지막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양아들인 관평과 함께 오군(吳軍)에 사로잡혀 결국은 참수당한다. 이로써 서촉이 적벽대전 이후 10년 이상 보유하고 있던 형주는 위나라와 오나라가 사이 좋게 차지하였고 촉나라는 완전히 서촉의 산악지대에 고립되고 말았다.
동오와 조위에게 형주를 잃은 촉한은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건국세력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관우가 죽은 것 외에도 중원으로의 유일한 통로인 형주가 상실된 것이다. 바로 촉한 건국의 명분인 ‘위나라 타도’를 이루는 발판을 잃는 것을 의미했다. 건국세력과 토착세력간의 알력이 불식되지 않은 상태에서 건국세력의 핵심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위나라 타도와 한실(漢室) 중흥(重興)의 명분을 잃으면, 곧 유비를 위시한 건국세력이 촉한을 통치할 명분을 잃어버리는 것이었고 내부의 정국불안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명분 삼아 오나라를 치기로 하였다.
그러나 유비가 손권을 치기로 한 것을 단순히 복수심의 발로라고 보기는 힘들다. 유비는 단순히 관우의 죽음에 분개하여 대군을 휘몰아 나간 것이 아니라, 촉한의 군사력으로서 동오로 하여금 형주를 내놓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일단 동오군이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차지한 것이 219년이고 이릉전투가 벌어진 것은 3년 뒤인 222년이니 동오는 촉한의 복수전을 대비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3년이 지난 후에 공격을 했다는 것은 유비도 일시적인 분을 못 이겨 나온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계산을 하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른 부분도 그러하지만 [삼국연의]로 인하여 이릉전투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많이 퍼졌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촉한의 침공이 오나라로써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사 어디에서도 그런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오나라가 촉한군의 공격을 위험하게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다. 위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자국을 번국(藩國)이라고 낮추어 부르면서 도움을 청한 것을 보면 오나라의 상황도 상당히 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삼국연의]에서 묘사한 것처럼 ‘나라의 힘을 모아 싸울 수밖에 없는’ 지경은 아니었다. 유비는 황권, 풍습, 장남 등의 장수와 5만 군사를 거느리고 오나라로 쳐들어간다.
유비가 군을 몰아 나오자 동오에서는 육손을 대도독으로 하고 주번, 반장, 송겸 등을 지휘관으로 하여 5만의 군대를 출전시킨다. 유비는 속전속결을 할 것 같았지만, 오히려 실패의 가능성을 최소화하려는 지공(遲攻)을 전개한다. 군을 두 부분으로 나뉘어 황권의 부대는 장강의 북쪽을 따라 진군하고 유비는 강의 남쪽을 따라가며, 지역세력에 대한 포섭작전을 병행하고 효정(현재 호북성 장구 토가족 자치현)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오군은 촉한군이 진격해 와도 전투를 회피하고 물러서기만 하였다. 유비군이 수로를 택하지 않고 육로를 택한 만큼 물러날 시간은 충분했다. 이릉전역에서 오군이 취한 작전을 보면 유비군의 전선을 늘어뜨리려 한 유인책으로 보인다. 유비가 공격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222년 1월에는 동오의 장수 송겸이 촉군의 진영 5개를 격파하고 그 수비 장수들의 머리를 베었다고 되어있다. 진영 5개를 격파했다면 언뜻 대규모 전투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투는 여름인 6월까지 계속이 된다. 정월에 대패를 당한 유비가 6월까지 전투를 계속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송겸이 유비 군과 벌인 전투가 게릴라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게릴라전은 계속되었고 동오군 부대들에 의한 집요한 기습 때문에 촉한군은 험지를 선택하여 무려 50개의 방어진지를 짓는다. 남쪽의 유비 군이나 북쪽의 황권군 할 것 없이 그 진영은 형편없이 늘어졌다. 촉한 병사들은 계속되는 습격에다가 오랜 원정으로 지치기 시작하였다. 이때의 상황을 [삼국지] 오서 ‘육손 전’에서는 “현재는 매우 오랫동안 출병하여 우리의 편의를 차지하지 못했고, 병사들은 피곤하고 사기는 떨어졌으며, 또 새로운 계책은 없다” 라고 전하고 있다.
육손은 다수의 소규모 부대를 동원하여 마른 풀과 인화물질을 지고 분산된 촉한군의 각 진영 근처로 다가가게 한다. 뒤이어 무려 40곳의 촉한군 진영에서 화광(火光)이 하늘을 찔렀다. 촉한군이 불을 끄려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효정의 본진에 육의(陸議)가 이끄는 오나라의 대군이 들이닥쳤다. 본군 이외의 부대들을 분산시킨 촉한군의 배치 때문에 동오군은 어느 지역에서나 병력의 우위를 가지고 촉한군을 각개 격파하였다. 이때 장남과 풍습 등 촉한군의 주장(主將)들이 전사하고, 유비에게 회유된 만족(蠻族)의 왕인 사마(沙摩)도 난전 중에 죽었다. 촉한군은 거의 전멸하였고 온 나라의 국력을 기울인 촉한 정권의 형주 탈환전은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
동오의 승리는 3년 전 오나라가 형주를 차지했을 때의 결과를 재확인시켜주었다. 형주는 다시 오나라의 영토로 굳어졌고 촉한은 이릉전투 이후 다시는 동진(東進)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동오가 일시적으로 배신을 했더라도 위나라를 분명한 적으로 설정한 촉한 정권으로써는 두 적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속마음은 쓰렸겠지만 촉한의 승상인 제갈량은 오히려 동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다시 위나라와 싸우는데 주력하였다. 인구도 많지 않은 상태에서 5만이 넘는 군사를 잃은 촉한으로써는 이릉전투에서의 피해를 만회하는데 여러 해를 허비해야 했다. 225년에 물자가 풍부한 남방을 정벌하여 그나마 피해를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었고, 227년에야 전쟁준비를 시작하여 228년에야 가정(街停)으로 출격한다. 이에 비하여 오나라는 강남을 확고히 차지한다. 이릉전투에서 승리한 이듬해인 222년에 손권은 오(吳)의 왕으로 등극한다. 오나라의 입지가 확고해졌고 이는 후일 강남에 남조정권들이 들어서는 발판이 되었다.
형주의 상실로 인하여 위나라의 중심을 향한 진격로를 잃은 촉한의 공격로는 3000미터대의 산이 즐비한 진령산맥을 통과하는 길뿐이었다. 그러나 군사를 동원하는데는 수만의 군대의 보급을 위하여 엄청난 양의 장비(수레)와 우마(牛馬)가 필요하고 수레를 모는 수레꾼들과 수레 기술자들도 필요하게 된다. 대량의 보급품 수송은 평지에서 조차 어려운데, 제대로 된 도로도 없는 높은 산악지역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보급의 난제를 제갈량은 목우(木牛)와 류마(流馬)라는 수송수단을 만들어서 해결하였다.
진령산맥 최고봉인 태백산(太白山)의 설경.
촉한은 위나라 공격이전에 이릉에서의 패배에 따른 엄청난 타격 때문에 국가를 내부적으로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다. 때문에 개발이 아직 안 되어 있고 군사력이 약한 남쪽으로 쳐들어간다. 이때 새로 확보한 복속지에서 물자가 나왔고 후일의 기록에는 촉한이 다시 부강해졌다고 하고 있다. 227년에 촉한이 군을 동원하면서 모인 병력은 약 3만 정도에 이르렀고 일단 새로 육성된 군단들을 북쪽 한중(漢中)으로 이동시킨다. 위나라 공격의 정당성은 제갈량이 촉한의 2대 황제인 유선(劉先)에게 올린 ‘출사표’에 잘 나타나 있다.
(…)선제(先帝)께서는 창업을 절반도 이루지 못하고 중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지금 천하는 셋으로 분열되고 익주는 피폐해졌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사느냐, 죽느냐 하는 위급한 때입니(…)그 때문에 지난 5월에 노수(瀘水)를 건너 황무지로 깊숙이 들어갔습니다. 지금 남방은 평정되었고 군대와 무기도 이미 풍족하므로 마땅히 삼군(三軍)을 거느리고 북쪽의 중원을 평정해야 합니다. 바라는 것은 우둔한 재능을 다하여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을 물리쳐 한 왕실을 부흥시켜 옛 도읍지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그렇지만 유비와 함께 하였던 신하들이 노쇠하거나 사망한 이 시점에서 인재부족이 촉한의 발목을 잡았다. 이 북벌에는 제갈량이 아끼던 마속이 같이 참전하였는데 ‘마속’은 촉한정권에 그나마 남은 인재였고, 남방공격에서 공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실전경험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소위 촉한의 오호장(五虎將)중 조운을 제외한 4명이 이미 사망하였고, 자연적인 수명을 다해가는 ‘1세대’의 인재들을 대체할 인재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위나라는 역전의 명장인 장합에게 5만의 군사를 주어 촉군의 공격을 막게 하였다.
촉한이 구사한 군사작전에서는 외부의 지원세력을 먼저 확보하려는 시도가 선행이 된다. 군사력이 많지 않은 촉한으로써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의 공격 이전에 강족의 분파들인 동강(東羌)이 반란을 일으키다가 조진과 장합에게 패하여 위나라의 강압적인 통치하에 있는 상황이었고 촉한은 이들의 협력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다. 여기서 촉한군의 작전은 거점 확보를 통한 농성전과 기습전이 되었어야 한다. 근처 지형에 익숙한 노수호와 동강족의 협력까지 확보하였으니 여러 지점을 요새화시키고 장합의 대군과 대치하면서 강족을 동원하여 지형을 이용한 소규모 기습전을 감행하여 위군의 전력을 소모하는 작전으로 나섰어야 한다. 어차피 험한 지형이니 대규모 회전은 어려웠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대장(大將)의 소임을 맡은 마속은 장합의 병력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촉한 병력 거의 전부를 동원하여 산 위에 진을 친다. 마속의 결정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리 비이성적인 것은 아니었다. 추정하건데 마속은 병력이 적으면 지형이나 기타 요소를 이용하라는 병법의 이론을 충실히 따랐던 듯싶다. 위군에 비하여 병력이 열세(3만 대 5만)이었던 만큼, 산 위에서 농성하면서 위군을 지치게 만들면 위군은 보급의 문제 때문에 물러날 것이라는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좁은 산길의 위군을 요격하여 무찌를 수도 있다는 기대를 했을 수도 있다. 감제고지에 올라간 만큼 자신의 부대가 오히려 유리하다는 생각을 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장합은 마속이 진을 친 산 위에 식수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산에서 내려오는 모든 통로를 봉쇄한 후 촉한군에 대한 ‘말려 죽이기’에 들어갔다. 식수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은 마속의 병사들은 곧 목이 마르기 시작하였고 탈수현상에 시달렸다. 마속은 탈수에 의한 사망자와 탈주병이 속출하자 탈출 작전을 감행하였지만 무기력한 병사들은 그의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오직 왕평만이 1000명의 병사를 수습하여 질서 있게 후퇴할 수 있었다. 마속의 패배는 촉한의 북벌계획에 치명타를 입혔고 이에 제갈량은 마속과 그의 부장 장휴, 이성을 참하고 말았다. 3만 명이라는 병력을 잃은 촉한군은 더 이상 새로 차지한 영역을 유지할 힘이 없었다.
제갈량 <출처:Wikipedia.org>
여기서 왜 제갈량은 위연이나 오일 등의 노련한 장수들을 택하지 않고 이론가인 마속을 택하였는가라는 의문이 나올 수 있다. 만약 제갈량이 일개 지휘관이었으면 달리 생각할 수 잇는 여지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서량지역을 공격하는 동안 한중이 공격을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중에 조운, 위연, 오일 등을 남겨놓은 것이다. 아무리 서량을 얻더라도 한중을 잃으면 촉한으로써는 결정타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 보자면 제갈량은 북벌에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제갈량 개인의 탓이라기보다는 촉한이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다. 한 나라를 책임지는 승상으로서 국가를 가지고 도박을 할 수 없었고 촉한은 1차 북벌에서 얻은 것이 아무도 없었다. 어렵게 확보한 3군도 지키지 못했고 오히려 남만 정벌로 얻은 국력으로 힘들게 육성한 군사력을 탕진하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왔다.
가정에서의 패배 이후 촉한은 다시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촉한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가정 전투 이후 위나라는 229년에 촉한을 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촉한은 장군 진식과 제갈량이 직접 나서 무도와 음평을 확보하고 진령 산맥 이남으로 공격해 들어오는 위나라의 옹주자사 곽회(郭淮)에게 패배를 안겨주고 위나라의 침공군을 격퇴한다. 비록 위나라보다 전체적인 국력이 약할지는 몰라도 군사력에서는 녹녹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어서 제갈량이 다시 한 번 북벌에 나서게 되고 [삼국연의]에서 클라이맥스로 묘사되는 오장원(五丈原) 전투로 이어진다. 불세출의 영웅 제갈량의 마지막 출격이며, [삼국연의]에서는 결국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실패한다고 묘사되어있다. 뒤에 벌어지는 이야기는 곁 가지 정도로 취급된다. 그렇지만 제갈량의 오장원 공격이 이루어진 것은 서기 234년, 즉 촉한의 건국으로부터 겨우 13년이며 촉한이 멸망하려면 아직 29년이 남아있었다. 이른바 육출기산이나 오장원의 전투는 한 인물에 대한 초점 때문에 기타 사건들이 조명되지 못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오장원 전투는 사실 촉한과 오나라의 합동공격이다. 조위를 정벌하자는 명분을 내걸고 촉한과 동오가 적벽 이후 다시 손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촉한의 여론은 출병 이전부터 둘로 갈라지고 있었다. 계속하여 건국의 명분이자 창건군주인 유비의 유지(遺志)인 위나라 정벌을 계속해야 한다는 쪽이 우세했지만, 촉한의 영역을 지키고 더 이상의 팽창은 그만두어야 한다는 여론도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때의 촉한의 국가적 딜레마를 제갈량의 ‘출사표’에서 엿볼 수 있다.
지금 백성들은 궁핍하고 군사들은 지쳐 있습니다. 그러나 할 일을 그만둘 수는 없는 것이, (할 일을 그만둘 수 없음은 곧) 멈추어 있으나 움직여 나아가나 수고로움과 물자가 드는 것은 똑같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일찍 적을 도모함만 못합니다. 그런데도 한 고을의 땅에 의지해 적과 긴 싸움을 하려 하시니 이는 신이 알 수 없는 여섯 번째 일입니다.
제갈량은 반대의 의견, 즉 “한 고을의 땅에 의지해 적과 긴 싸움을 하려 하는” 일단의 주장을 철저히 일축한다. 건국의 명분도 명분이거니와 이는 제갈량의 전략적인 판단이었다. 자기의 세력권만을 보전하려는 논리는 일개 군벌의 논리이다. 지키기만 하다가는 지치게 마련이다. 촉한이 위나라를 공격을 하건 안하건, 촉한은 위나라에게 있어 점령대상이었다. 촉한이 싸우기를 포기하고 자리만 지키면 결국 국력이 압도적인 위나라에게 먹힐 수밖에 없었다.
오장원 전투를 위하여 촉한이 동원한 병력은 무려 10만에 이르렀다. 촉한의 국력이 성장했다기 보다는 촉한의 승상 제갈량이 자신이 죽기 전에 목표를 이루겠다는 강한 의지로 남은 국력을 ‘쥐어 짠’것이다. 촉한의 역량으로 볼 때, 그리고 지리적 조건과 보급체계로 볼 때 싸움을 빨리 이기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촉한은 산지를 넘어서 보급을 해야 하는데 비해서 내선(內線)의 이점을 가진 위군은 촉한군이 스스로 물러가기를 가만히 기다리면 되었다. 위군 사령관인 사마의는 이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촉한군의 어떠한 도발에도 넘어가지 않고 그 위치를 고수하였다. 이에 관중에서의 전투는 장기전이 되었지만 큰 전투는 전혀 다른 지방에서 발발한다. 촉한과 협약을 맺은 오나라가 위나라의 합비성을 공격한 것이다.
이때 손권은 스스로 10만을 동원하였다고 과시하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삼국시대 역사상 동오가 동원한 최대의 병력이 된다. 중앙의 원군이 도착하려면 여러 날이 걸려야 하는 상황에서 합비를 맡고 있던 위나라 장수 만총은 농성전 준비를 한다. 손권의 동오군은 일단 상륙할 때 공격을 받지 않자, 위나라의 병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예상이 맞았다고 생각하고 당당하게 합비로 향하였다. 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공성무기들도 앞세웠다. 그러나 합비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고 공성의 난전 와중에서 손권의 조카 손태가 난전 중에 화살을 맞고 죽는다. 많은 병력을 잃고 공성무기 대부분이 불타고 주요 지휘관까지 잃은 오군은 사기가 완전히 꺾인다. 위의 명제(明帝)가 10만을 동원하여 합비로 달려오고 있었지만 구원군이 아직 수춘(壽春)에 이르기도 전에 오군은 전면 철수한다. 한 번 싸움에 패하고 도망한 것이다.
제갈량이 기획하고 촉한과 동오가 양면협공을 펼친 삼국의 대전(大戰)은 결국 위나라의 호수비로 원점으로 돌아갔다. 촉한이나 오나라나 전에는 동원해보지 못하였던 최대의 병력을 동원하고도 얻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또 국력을 기울인 위나라 정벌이 실패하자 촉한에서 내분이 일어나 최강의 장수이던 위연(魏延)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왕평에게 패하여 죽는다. 제갈량의 뒤를 이은 강유 (姜維)는 내부안정이나 국력을 회복하려는 시도 없이 무리한 북벌을 수 차례 감행한다. 제갈량의 유지를 잇고 국시를 유지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계속되는 내분과 북벌은 취약한 촉한의 국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결국 촉한은 이후 외부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오히려 위나라의 침공을 받는 등 나날이 약해지다가 263년에 멸망하고 만다.
263년에 촉한이 멸망하자 중원을 사실상 양자강을 기점으로 한 남북조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때의 북조(北朝)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가 아니었다. 위나라가 촉한을 멸망시킨 지 불과 2년 만에 사마소의 아들이자 사마중달의 손자인 사마염 이 위나라 황제 조환을 폐하고 왕조를 차지하여 진(晋)을 건국하고, 자신은 진의 무제(武帝)가 되었던 것이다.
황제로 등극한 사마염은 조조의 농민우대정책을 하나, 둘씩 폐지하고 호족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주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미 동한말기부터 한 지역을 차지하고 사실상의 영주행세를 하고 있던 귀족들은 조조 생전에는 숨을 죽이고 있다가 사마씨를 정점으로 모였고 진왕조의 창건과 함께 자신들의 권익을 되찾는데 성공하였다. 진(晋)의 무제가 호족우대정책을 시행했던 것과는 달리 남방의 손호는 적극적인 중앙집권정책을 시행한다. 기록에는 손호가 신하들보다 무당들의 말을 더 신뢰하고, 여러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고 심지어는 자기의 후(后)중 한명인 주씨를 죽였다는 등의 기록으로 가득차 있다. 전형적인 왕조의 말기증상처럼 보이지만, 동양에서는 새로이 창건된 왕조가 자(自) 왕조의 당위성을 입증하고 전(前)왕조 멸망의 필연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전 왕조의 실정(失政)을 과대평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손호의 행동을 반드시 폭정(暴政)의 증거로만 볼 이유는 없다. 오히려 연호를 바꾸고 주위 측근들을 제거함은 중앙 집권력을 강화시키는 일련의 작업이라는 증거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손호의 독재정치는 오나라를 뒤흔들어놓았다. 274년에는 임해태수 해희가 관직을 빼앗기고 강제 노동형에 처해질 위기에 몰리자 반란을 일으켰다가 그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276년에는 상동태수 장영과 회계태수 거준을 산민(算緡: 세금)을 보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하여 그 목을 각 지방으로 보내 본보기로 삼았다. 일반 백성도 아니고 태수쯤 되는 고위 지방관이 세금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해당 지방의 호족들과 담합한 조직적 반항이라고 볼 수 있다. 손호의 불운은 계속되었다. 279년에 교주(交州: 현재 광서장족 자치구와 베트남)의 태수 수윤(脩允)의 부장(副將) 곽마(郭馬)가 수윤이 죽은 후 동오 전체를 뒤흔드는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수윤과 곽마는 현지에 오래있으면서 그 지역의 병사와 주민들과 돈독한 관계를 쌓아왔는데 손오가 호구와 세금을 정확히 파악하여 중앙에 편입시키려고 하자, 현지 주민들과 힘을 합하여 대규모 봉기를 일으킨다. 동오에서는 위기를 느끼고 승상 장제를 총사령관으로 한 토벌군을 파견한다.
이때가 바로 진나라가 노리던 기회였다. 물론 서진이라고 상황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감숙성 쪽에서 독발선비의 수장인 독발수인이 군사를 일으켜 진군(晋軍)을 수 차례 격파한다. 중앙에서 토벌군을 동원한 후 겨우 감숙성 쪽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때 동오의 교주에서 곽마의 반란이 일어난다. 곽마가 일으킨 반란의 불길이 동오 전역으로 번지자 독발선비를 진압하느라 지쳐있는 상태였지만, 무제 사마염은 동오를 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서기 279년 음력 8월, 가충(賈充)을 대도독으로 임명하고 수십명의 쟁쟁한 장수들과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동오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단행한다.
서진군은 양자강을 따라 전방위적으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애초부터 동오군이 어느 한 곳을 틀어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서진의 진동대장군 사마주(司馬伷)는 양자강 하류의 도중(涂中: 현재 안휘성 전초와 육합 사이에 있다)으로 진격하였고 안동장군 왕혼(王渾)과 양주자사 주준(周浚)은 우저(牛渚: 현재 안휘성 당도), 건위장군 왕융(王戎)은 양자강 중류인 무창, 평남장군 호분은 강릉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했던 것이다. 마침 이때 두예의 군은 강릉의 오군을 무찌르고 강릉을 점령한다. 양자강 중류 북안(北岸)을 모두 차지한 진나라 군대는 이윽고 형주 남쪽으로 내려가 계양과 영릉도 모조리 점령한다. 양자강 중류와 형주 전체가 진나라에게 넘어간 것이다. 왕준과 당빈은 나머지 지휘관들로부터 병력을 이양(移讓)받는 식으로 병력을 합친 다음 하구(夏口)와 무창(武昌)도 평정한다.
이제 손호에게는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다. 신하인 설영(薛塋)과 호충(胡沖)등에게 서신을 들려서 진나라 침공군의 사령관들인 왕준, 사마주, 왕혼에게 항복의 뜻을 전했다. 건업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왕준이었다. 손호는 스스로를 묶고 왕준 앞에 나아가 동오왕의 인수를 바치고 공식적으로 항복하였다. 이로서 229년에 손권이 건국한 오나라는 51년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동오가 멸망함으로써 중원은 다시 하나의 왕조아래 통일이 된다.
원래의 역사적 공식대로라면, 전쟁을 벌이던 세 개의 나라가 하나로 합쳐졌으니 이제 중원에는 평화가 찾아와야만 했다. 적어도 진 무제(武帝) 사마염이 제위에 있는 동안에는 모든 것이 평화로운 듯이 보였다. 그러나 진 무제가 죽고 그의 중신 중 한 명이던 가충(賈充)의 딸인 태후 가남풍(賈南風)이 정권을 농단하면서 왕자(王子)들간의 경쟁을 부추겼고, 이는 서진을 무너뜨리는 이른바 팔왕(八王)의 난 (亂)으로 이어진다. 중원은 대규모 전투로 초토화되면서 서진은 무너지고 북방과 서방에서 선비족, 저족, 강족 등의 유목민들이 중원에 대거 진출한다. 결국 양자강 북부의 중원은 유목민들과 변방민족이 장악하게 되고 서진정권의 잔당들이 살아남아 양자강 남쪽으로 이동하여 동진(東晋)을 세우고 겨우 나라의 명맥을 이어간다.
그러나 진 무제 이후의 대란(大亂)을 단순히 가남풍의 작란(作亂) 하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왕자들간의 경쟁심리가 표면적인 이유이기는 하지만, 이미 난(亂)의 씨앗은 삼국시대에 심어졌다고 보아야 한다. 삼국시대의 많은 사회적인 변화와 오랜 전란으로 인한 국가와 그 백성들의 군사화(軍事化), 북부 왕조인 위(魏)에서의 기마병 육성에 따르는 기마와 유목민 전사들의 대규모 유입, 오나라의 강남지배로 인한 강남의 한화(漢化), 그리고 동한말기 호족들의 발흥과 진나라의 호족용인정책은 서진이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지 못할 경우, 중원이 언제든지 다시 갈라질 수 있는 소지를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중원은 강력한 제왕이 죽자마자 다시 혼란의 시대로 접어들고 말았다. 삼국은 천하통일과 평화를 위해서 나아간 시대가 아니라 남북조 (南北朝)와 5호16국 (五胡十六國)이라는 더 큰 혼란기를 열었던 것이다. 결국 천하태평이란 과제는 다시 멀어지고 중원의 통일은 수백 년을 더 기다려야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