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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청계천 복원공사 기공식-
청계 고가 철거 시작
청계고가 철거작업이 2003년 7월 10일
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사진은 청계8
가 고가도로 상판이 철거되는 모습이다.
2003년 7월 1일, 1976년 완공돼 서울
근대화의 대표적인 상징이었던 청계고가
도로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로써
2년 3개월의 대역사(大役事)가 시작 되
었다.하늘에는 ‘경축 청계천 복원공사’라
는 애드벌룬이 떴고, 청계고가도로의 마
지막 모습을 보려는 시민들이 오후부터
몰려들었다.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시민들도
많았다.기공식 행사에서 이명박 서울시
장은 “회색빛 콘크리트가 상징하는 반생
명의 그늘을 과감히 걷어내고 서울을 살
아 숨쉬는 도시로, 보다 안락하고 인간답
게 살 수 있는 쾌적한 삶의 쉼터로 만들
자”고 말했다.
서울시는 태평로에서 신답철교 간 5.8
km 구간을 3개 공구로 나눠 오는 2005
년 9월까지 청계고가와 삼일고가, 청계
천 복개도로 구조물을 철거하고 청계천
을 맑은 물이 흐르는 하천으로 복원할
계획이다.
한편, 청계고가도로가 폐쇄된 첫날인 이
날 서울시내 주요도로는 당초 예상을 깨
고 일부 병목구간을 제외하고는 큰 혼잡
은 없었다. 그러나 출근시간대에는 서울
강동지역과 동·북부 지역 차량들이 몰리
는 도로에서 극심한 정체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시민들이 대중교통을 이
용했기 때문인지 시내 대부분의 도로가
평소와 비슷한 교통흐름을 보였다.
▶2015년 ‘영국판 쉰들러 리스트’
니컬러스 윈턴 경 별세
2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 나치의 눈을 피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 어린이 669명을 영국으로 탈출시킨 ‘영국판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 니컬러스 윈턴 경이 1일 106세로 세상을 떠났다.
체코슬로바키아 수용소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영국으로 옮기던 시기의 윈턴. 왼쪽 사진은 말년의 윈턴 경 모습.
그는 1909년 영국에서 부유한 독일계 유대인 가정의 자녀로 태어났다. 성인이 된 뒤 독일·프랑스 은행에서 국제금융 업무를 담당하다가 영국으로 돌아와 주식 중개인으로서 안정적 경력을 쌓았다. 안락한 삶을 즐기던 그는 1938년 12월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당시 그는 크리스마스에 스위스로 스키 여행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 난민들을 위해 자원봉사하던 친구가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난민 수용소를 찾아간 그는 나치의 잔혹성에 경악했다. 수용자들 모두가 나치에 의해 살던 집과 가게를 잃고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된 사람들이었다.
윈턴 경은 전쟁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수용소의 어린아이들이 가장 걱정됐다. 그는 재산을 털어 아이들을 영국으로 데려올 기차 등 교통편과 위탁 가정을 찾을 때 필요한 입양 서류를 마련했다. 발각되면 자신마저 위험에 처할 수 있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다. 총 8차례에 걸쳐 아이들을 기차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탈출시켰다. 영국까지 무사히 건너온 아이들은 신문 광고 등을 통해 입양 가정을 알선해 줬다. 입국 서류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영국 세관을 찾아가 수차례 설득하고, 국경을 통과할 때 뇌물을 건네야 했던 적도 있다.
이렇게 669명을 구출한 뒤, 윈턴 경은 50년간 자신이 한 일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비밀은 50년 뒤인 1988년, 다락방을 청소하던 아내가 아이들 사진과 산더미 같은 서류를 발견하면서 밝혀졌다. 아내의 계속된 질문에 그는 마지못해 털어놓았다. 그가 자신이 한 일을 오랜 세월 말하지 않았던 이유는 죄책감 때문이다. 1939년 9월 1일, 250명의 아이들을 실은 마지막 열차가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열차 운행이 통제됐다. 그 뒤로 아이들 소식은 듣지 못했다. 윈턴 경은 구출하지 못한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왔던 것이다.
비밀을 털어놓은 뒤 그는 아내에게 서류를 처분하라고 했지만,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말도 안 돼요. 이건 그 아이들 삶이 담긴 기록이에요.” 윈턴 경의 이야기는 아내에 의해 영국 BBC 등에 소개됐고, 곧 세계 각지에서 그가 구출한 아이들로부터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만든 영화감독 카렐 라이츠, 영국 노동당 의원 앨프리드 덥스, 미국 대학 석좌 교수 등 유명인과 사회 지도층도 여럿 있었다. 669명의 아이들이 낳은 자녀와 손주까지 합하면 그에게서 직·간접적 도움을 받은 일명 ‘니키의 아이들’은 5700명에 이른다. 윈턴 경은 2002년 ‘니키의 아이들’ 5000여명과 감동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는 2003년 영국 정부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작년엔 체코 정부가 주는 국가 최고 훈장을 받았다. 윈턴 경이 사망한 1일은 8차례의 대탈주 중 가장 많은 인원(241명)이 영국에 도착한 날이었다.
▶2009년 러시아 국민가수
류드밀라 지키나 사망
▶2008년 MS, 빌 게이츠 회장 은퇴
▶2006년 제주도,
제주특별자치도로 승격.
▶2006년 하시모토 류타로
전 일본 총리 사망
행정 개혁으로 일본에 ‘작은 정부’ 노선을 뿌리내린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68) 전 일본 총리가 2006년 7월 1일 별세했다. 하시모토 전 총리는 지난 6월 초 복통으로 입원해 대장 절제수술을 받은 뒤 위중한 상태였다.
하시모토 료고(橋本龍伍) 전 후생상의 장남이라는 집안 배경과 정책 수립 능력을 겸비한 하시모토 전 총리는 1963년 국회의원 당선이후 작년 정계 은퇴까지 14회 연속 국회의원 당선, 후생상, 대장상, 자민당 정조회장, 간사장 등 일본 정계의 요직을 섭렵했다.
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와는 묘한 라이벌 관계였다. 1995년 하시모토가 자민당 총재에 당선됐을 때 대항마(對抗馬)로 나선 고이즈미가 낙선했고, 2001년 고이즈미가 총재에 당선됐을 때는 하시모토가 대항마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고이즈미 총리의 ‘작은 정부’ 개혁은 행정, 재정, 교육, 사회보장 등 이른바 ‘하시모토 6대 개혁 플랜’에서 각론만 바꾼 것이란 평가다. 1부(府)22성(省)의 정부 조직을 1부12성으로 줄인 것도 하시모토의 작품이었다.
하시모토는 소비세를 인상해 경기에 찬물을 끼얹는 바람에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 총리직을 2년 6개월 만에 마감했다.“ 식견은 있으나 인망이 부족하다” “화류계에서 가장 싫어하는 정치가”라는 소리가 따라다녔다.
1996년 7월 총리로서는 11년 만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기도 했다.
▶2004년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 첫 재판 개최
1일 재판을 받은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30분의 재판 동안 피고인이 아닌 통치자 같았다고 외신들이 2일 보도했다. 후세인은 “전(前) 대통령이냐”는 질문에 “현직이다. 이는 국민의 뜻”이라고 강변했고, 변호인을 구해줄 수 있다는 판사 발언에는 “미국은 내가 스위스 은행에 수백만달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라고 농담했다. 재판 뒤 호송하려는 교도관들에겐 “천천히 하쇼, 나는 늙은이오”라고 말했다.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첫 재판을 TV를 통해 지켜본 이라크인들은 분노와 동정 등이 뒤섞인 반응을 보였다.
후세인이 1988년 5000명의 쿠르드족을 학살한 북부 할라브자의 주민들은 한목소리로 ‘복수’를 부르짖었다. 키르쿠크 출신인 한 쿠르드족은 후세인이 젊은 판사 앞에 서 있는 광경을 “아름다운 정의”라고 표현했다. 후세인의 사촌 알리가 지시한 공격으로 자녀 6명을 잃었다는 사람은 “희생자들 앞에서 재판하라”고 주장했다.
후세인의 지지세력인 수니파 국민들은 “후세인은 이라크를 해치려는 사람들만 공격했다”고 항변하며 동정했다. 그의 고향인 티크리트의 한 식당 종업원은 TV를 보고 눈시울을 붉히며 “후세인이 저런 꼴을 당하는 걸 보느니 죽는 게 나았다”고 말했다. 수니파가 다수 거주하는 라마디 주민도 “최소한 후세인 시절엔 안전했다”며 “사담 시절이 더 살기 좋았다”고 비판했다.
후세인 재판은 아랍권 전체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러나 아랍인들의 반응은 엇갈렸다.레바논의 알 안와르 신문은 1면 사설에서 “아랍에 어떤 죄를 짓든 지도자를 법정에 세우는 전통은 없다”고 지적했다. 이라크의 침공을 받았던 쿠웨이트의 정보 장관은 후세인을 “전범”이라고 비난하며 “극형에 처하라”고 촉구했다.
▶2004년 영화 ‘대부’ 명연기
말론 브랜도 타계
영화 ‘대부’에서 마피아 돈 콜레오네 역으로 유명한 미국배우 말론 브랜도가 2004년 7월 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숨졌다.
이날 세상을 뜬 말론 브랜도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명배우의 한 명이었지만, 타고난 반항아 기질 때문에 미국 영화계에서 이단아로 취급됐다.
1924년 미국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태어난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가 퇴학당한 뒤 뉴욕으로 가 19세 때인 1943년 연극 배우로 데뷔했고, 4년 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주인공을 맡아 돌풍을 일으켰다. 은막에는 1950년 ‘더 맨’의 하반신 불수가 된 군인 역할로 데뷔했다. 그는 당시 실감나는 연기를 하려고 퇴역 군인의 병실에서 한 달 가까이 보내기도 했다.
1952년 ‘혁명아 사파타’로 칸 국제영화제 남우주연상을, 1954년 ‘워터프론트’의 부두노동자 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1972년 ‘대부’에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연기를 보여 두 번째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으나, 미국원주민 정책에 항의하며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밖에도 ‘와일드 원’, ‘지옥의 묵시록’,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등 수많은 영화에서 강렬한 연기로 영화팬을 사로잡았다.
영화 "대부"와 말론 브란도
1973.3.27 영화<대부>로 받게 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부하다
말론 브란도를 사랑하는 사람이든 미워하는 사람이든 입을 모으는 것은 그가 타고난 배우였다는 것이다. 수많은 미국의 명배우들을 배출한 액터스 스튜디오 출신이자 액터스 스튜디오가 추구하는 메소드 연기(맡은 역에 동화되어 감정을 느끼며 연기하는 것)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브란도는 20세기의 대표적인 반항아들을 연기했다. 그 모습은 브란도의 실제 삶과 닮아 있었다.
할리우드 영화가 미국 원주민을 다룬 방식에 항의하며 아카데미상을 거부하다
브란도가 1973년 제45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무하고 대신 내보낸 리틀페더 공주
<대부>가 선을 보인 이듬해 3월 27일에 열린 제 45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메소드 연기의 달인 말론 브란도에게 남우주연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브란도는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언에서 열린 이 시상식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를 대신하여 단상에 오른 것은 아메리카 원주민 사친 리틀페더 공주였다. 브란도는 그녀를 대신 내보내어 자신의 수상거부 의사를 밝혔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미국 원주민(인디언)을 묘사하거나 다룬 방식에 항변을 하며 이런 이유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리틀페더 공주가 손에 들고 단상에 오른 것은 브란도가 작성한 장문의 연설문이었다. 하지만, 소란스러운 상황에서 2분 이상 단상에 머물기는 어려웠다(이 장면은 동영상으로 쉽게 검색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녀는 무대 뒤에서 15쪽의 연설문을 모여든 기자들에게 읽어주었다. “우리는 200년 동안 그들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그들을 속여 그들의 땅에서 쫓아냈고 … 그들을 거지로 만들었다.” 브란도의 수상 거부와 대리 연설로 인해 제 45회 아카데미 시상식장은 술렁거리고 있었다.
정작 브란도 자신은 이 광경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보았다. 자신의 연설에 대한 아카데미의 반응에 무척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이 일을 계기로 세계인들이 미국 인디언 학살의 야만적인 역사를 알게 될 거라 생각하며 기뻐했다. 이 사건은 아카데미의 역사에서 두고두고 회자됐다. 시상식에 참석했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명연기였다. 할리우드 체제는 그가 울타리 안으로 돌아와 착한 아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브란도는 그 순간에 모든 사람을 흔들어 버렸다. 사실 그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 시상식은 아주 따분했다.”
영화<대부>속의 아들 '마이클 코를레오네'는 닉슨 대통령의 시대를 상징한다는 주장도
1972년 3월 11일에 미국에서 개봉된 <대부>의 결과는 상당히 놀라운 것이었다. 개봉 직후에 <대부>를 전국적으로 배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흥행성적은 천천히 올라갔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에 모이면 이 영화만은 꼭 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고,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에서 상영되기를 초조히 기다렸다. 그 결과 <대부>는 미국 내의 배급 수수료로 8,500만 달러를, 해외시장에서는 약 1억 5,0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대부>는 그 이전까지 <사운드 오브 뮤직>이 지니고 있었던 ‘사상 최대의 성공작’이라는 명예를 빼앗은 것이다.
<대부>주인공 비토 역을 맡아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펼친 말론 브란도
<대부>는 당시에는 신진급이었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과 마리오 푸조의 훌륭한 각본, 배우 브란도와 알 파치노의 명연기가 조화를 이룬 작품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성공에 대해서도 때로는 비판적인 시선을 던질 수 있다. 그것은 한 시대를 풍미한 영화로서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감정을 이끌어냈으며, 시대가 속한 정치 현실과 무관할 수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할리우드의 평론가인 데이비드 톰슨은 <대부>의 유례 없는 대성공에 모두가 들떠서 흥분할 일만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결말이 돈 코를레오네의 죽음과 함께 새로운 인물인 마이클 코를레오네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1972년도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면, 이러한 변화는 닉슨 대통령이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1970년대와 겹쳐진다. 그런 점에서 마이클의 자리는 닉슨 시대와 연결이 된다. <대부>가 보수적인 정치 시대의 상징으로 해석될 수 있는 설정이다.
'미국원주민운동' 창립에 관여,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펼치다
다시 브란도의 행적으로 돌아와 보자. <대부>를 선보인 1972년에 브란도는 또 다른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다. 그는 유럽에서 주목 받는 감독인 베르나르도 베루톨루치가 연출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촬영하기 위해 파리에 있었다. 중년의 미국인 폴을 연기하는 브란도의 파격적인 연기는 <대부>와는 또 다른 충격을 예고하고 있었다. 1972년 가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뉴욕영화제에서 시사회를 열었을 때 ‘뉴요커’에 평론을 쓴 폴린 카일은 격앙된 톤으로 “브란도가 한 인물을 깊이 파고들어감으로써 그 인물 속에 다른 어떤 배우보다 많은 것을 융합해 넣었다”고 평가했다. 새로운 전성기였다.
두 편의 영화를 통해 뜨거운 반응을 이뤄내고, 아카데미상을 거부한 뒤 3년 동안 브란도는 자신이 창립에 관여한 ‘미국원주민운동(AIM)'에 에너지를 쏟아 부었다. 브란도는 이제까지 이와 같은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적이 없었다. 그런 만큼 환멸도 컸다. 배우라는 직업은 항상 오해와 왜곡 속에 놓이게 마련이다. 일부 인디언들은 브란도의 행동에 냉소를 보냈고 좋지 못한 소문도 많았다. 그런 가운데 브란도에 대한 지지는 지속적인 편이었다. 미국원주민운동의 여러 지도자들을 위해 보석금을 내주었으며, 최고 지도자 몇 사람을 자기 집에서 지내도록 해 주기도 했다.
1972년에 선보인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이러한 관심은 영화제작으로도 이어졌다. 브란도는 ‘수족’ 출신의 원주민 러셀 민스와 함께 원주민 학살에 대한 시나리오를 써보려고 시도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도 몇 번의 자리에 동참했지만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다. 한편 아서 펜 감독이 연출한 서부극 <미주리 브레이크>(The Missouri Breaks, 1976)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브란도는 5주간 일을 하고 125만 달러를 받는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추가로 수익의 일정 부분을 받기로 했다. 가능한 단기간에 최소한의 노력을 들여 많은 돈을 벌었고, 남은 기간 동안에는 자신이 하고 싶은 후원 사업들에 힘을 기울였다. 이는 브란도의 주요한 계약 방식이 되었다.
<지옥의 묵시록>으로 칸 영화제를 사로잡다
<대부>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이어 브란도의 연기가 돋보인 영화는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과 또 다시 손을 잡은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 1979) 이었다. 1976년 필리핀에서 촬영을 시작해 1979년이 되어서야 완성된 영화이다. 조셉 콘라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을 베트남 전쟁으로 바꾼 시나리오 속에서 브란도는 130킬로그램이나 되는 살집을 지닌 커츠 대령을 연기한다. 커츠 대령을 살해해야 하는 임무를 띤 윌라드 대위 일행이 베트남을 지나 캄보디아 깊숙한 곳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커츠 대령은 마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도살장의 소처럼 자신에게 가해진 운명을 받아들인다. 코폴라 감독은 커츠 대령의 죽음을 소가 도살되는 장면과 함께 편집하여 그의 죽음을 신화적인 차원으로 만들어 낸다. 원작의 대사를 빌어 ‘호러, 호러, 호러’를 외치는 최후의 장면은 유명하다. 이 작품은 <양철북>(Die Blechtrommel, 1979)과 함께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였다.
블란도, 그 거칠고 섹시한 반역아의 태도는 로큰롤을 예고했다
1924년 4월 3일 미국의 중서부에서 태어나 바람기 많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으로 고통을 받았던 브란도는 자서전을 통해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권위에 도전해 성공하는 것에 커다란 만족감을 느꼈다. 나는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그 뒤로도 내가 무가치하게 느끼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내가 왜 무가치한 것에 적의를 가지고 반응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은 그의 전기를 다루는 수많은 저작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사항이다.
액터스 스튜디오를 통해 엘리아 카잔과 인연을 맺으며 그는 배우라는 날개를 본격적으로 달기 시작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 1951),<워터프론트>(On the Wat erfront, 1954)로 시대의 반항아이자 아이콘이 된 브란도는 무대와 스크린과 연출을 오가며 연기를 통한 삶의 편력을 펼친다. 특히, <워터프론트>에서 형제로 출연한 로드 스타이거와 택시 뒷좌석에서 입씨름을 벌이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동생 테리 역을 맡은 브란도는 자신의 인생이 망가진 것은 형 찰리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이 장면은 브란도가 전 인생에 걸쳐 보여준 일관된 태도일 수 있다.
영화 <대부>의 한장면
브란도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들을 살펴보면, 그는 항상 자신의 처지를 남의 탓으로 돌리기 일쑤였고, 영화 촬영 중 제작에 지장을 초래하는 언행을 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스크린 위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이 여전히 매력적인 것은 그 자신이 완전한 인물이 아니라 핑계 대고, 스스로 통제 못하는 불완전한 인간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연기하는 것은 브란도가 짊어진 배우로서의 과업이었다. 그 시작은 1947년 12월 3일. 브로드웨이 배리모어 극장에 올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무대를 통해서였다. 카밀레 필레아는 이 시절부터 꽃을 피운 브란도 연기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브란도, 그 거칠고 섹시한 반역아, 도대체 말이 없고 한없이 건방진 그 태도는 1960년대 세대의 위대한 예술 형식, 즉 로큰롤을 예고했다.” 브란도가 연기한 것은 미국의 얼굴이었다.
Marlon Brando 의 출연작 - The Score(2001), The Island of Dr. Moreau(1996), Don Juan DeMarco(1995), Apocalypse Now Redux(1979), Superman: The Movie(1978), Last Tango in Paris(1973), The Godfather(1972), On the Waterfront(1954), Julius Caesar(1953), A Streetcar Named Desire(1951)
http://www.imdb.com/name/nm0000008/ http://en.wikipedia.org/wiki/Marlon_Brando
대부1
https://youtu.be/Vg1NwRhSiAo
대부2
▶2004년 카시니-호이겐스호,
발사 7년 만에 토성 궤도 진입
[2004년]카시니-호이겐스호, 발사 7년 만에 토성 궤도 진입
2004년 7월 1일 카시니 호이겐스호가 보내준 토성 고리 영상.
미국과 유럽(EU)의 공동 토성 탐사선 ‘카시니-호이겐스’가 지구를 떠난 지 7년 만인 2004년 7월 1일, 가스와 먼지 입자로 이뤄진 토성의 고리를 무사히 통과, 예정된 궤도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고 미국 항공우주국(NASA)이 밝혔다.
카시니호의 토성 궤도 진입 과정은 ‘손에 땀을 쥐는 초긴장의 연속’이었다. 카시니호는 얼음 덩어리가 둥둥 떠다니는 고리 사이를 무려 15만8000km나 헤치고 나아갔으며, 이 과정에서 안테나가 우주선 본체를 보호하는 방패 구실을 했다.
‘카시니’란 이름은 17~18세기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지오바니 카시니에서, ‘호이겐스’는 17세기 네덜란드 출신 과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에서 각각 따온 것.
카시니호는 1997년 발사된 뒤 약 7년간 35억km의 우주를 날아갔으며, 앞으로 4년간 토성 궤도를 76바퀴 돌면서 토성과 그 위성들을 관찰하게 된다. 태양계에서 여섯 번째 행성이자 목성 다음으로 큰 토성은 가스와 먼지 고리로 둘러싸여 있다는 점에서 태양계 초기 모습과 유사해 태양계 생성 과정을 밝히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됐다. 토성의 고리 사이에 있는 검은 줄무늬는 카시니에 의해 처음 발견돼, ‘카시니의 틈’으로 명명됐다.
▶2003년 유럽 사형제 전면 폐지.
▶2002년 독일서
여객기-화물기 공중 충돌
▶2002년 김병현 선수, 미국 진출 4년 만에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올스타 첫 선발
▶2001년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씨 타계
국내 보수우익 진영의 원로 오제도 변호사가 2001년 7월 1일 숙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84세였다. 오 변호사는 1950년대 수많은 간첩·대공 사건을 수사해 `반공 검사` `사상 검사`로 유명했으며, 그후 반공연맹 이사 등 사회활동을 벌이며 반공 이념을 펼치는 외길을 걸어왔다.
오 변호사는 1917년 평남 안주에서 출생해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뒤 1946년 서울지검 검사로 임관했다. 검사 시절 김삼룡·이주하 사건 등 수많은 간첩·대공사건을 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활동상은 1960~70년대 TV, 라디오, 소설 등의 단골메뉴였다. 이승만 정부 시절 야당탄압에 맞서 집권층과 맞싸우다 수감된 뒤 이 전 대통령이 모함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오 검사 내가 잘못했소"라고 사과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4·19혁명 직후 국회에서 `오제도 검사 파면 동의안`이 상정됐다가 부결되자 검찰을 떠났다. 5·16 쿠데타 이후에는 검찰총장직을 제의받았으나 거절, 반혁명 1호로 수감되기도 했다. 유신과 5공시절 국회의원으로 잠시 정치권에 몸담기도 했다. 1997년 `불순세력` 발언으로 법정에 선 박홍 전 서강대 총장 등 보수우익 인사들에 대한 활발한 변론 활동을 폈다.
1998년에는 망명한 전 북한노동당 비서 황장엽씨와 의형제를 맺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신의주학생의거기념회장, 한국반공연맹이사, 북한탈출동포돕기운동본부 회장, 무궁화회 회장, 월간 `사상 21세기` 회장을 지냈다.
▶2000년 직장의료보험-
지역의료보험 통합
▶1999년 제1회 코리아 인터넷 서바이벌 게임
100시간 동안 외부와 격리된 채 인터넷을 통해 주문한 생활용품만으로 살아가면서 일상업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제1회 코리아 인터넷 서바이벌 게임’이 1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역삼동 삼성애니텔(오피스텔)에서 시작됐다.
외국어대 박성래(60) 교수, 쎈서테크 김석완(51) 사장, 신한은행 황정국(35) 대리, 주부 박정연(27)씨, 광운대 대학원생 윤소라(25)씨, 조선일보 황순현(32) 기자 등 6명의 참가자는 이날 오전 8시 30분 행사장에 모여 간단한 건강진단을 마친 뒤 수저 1벌과 가운 1벌, 생수 2통, 두루마리 화장지 2개만을 지급받은 채 인터넷 서바이벌 게임에 들어갔다.
참가자들은 행사기간에 의-식생활을 해결하면서 ‘호적등본 신청해 행사장으로 배달 받기’, ‘미국 대학의 과학사 커리큘럼 조사하기’, ‘개인 홈페이지를 가진 여성 네티즌 20명에게 이메일 보내 답장받기’ 등 각각 10개의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또 이날 행사장 옆에 마련된 인터넷 서바이벌 체험장에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로커스 김형순 사장, 탤런트 추상미씨, 프로야구선수 이승엽씨 등 유명인사도 찾아와 1∼2시간 동안 인터넷 서바이벌 게임 참가자와 똑같은 상황에서 각기 인터넷 활용수준에 맞는 과제를 풀면서 인터넷을 체험하고 돌아갔다.
▶ 1997년 홍콩 주권, 중국에 귀속
1백50년 만에 걸친 영국의 홍콩 통치가 막을 내렸다. 강택민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부는 1997년 7월 1일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38분간 거행된 주권 교체식을 통해 아편전쟁으로 빼앗긴 홍콩의 주권을 되찾았다고 연설했다.
중국의 홍콩 통일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흡수했다는 역사성과 향후 대만을 포함한 대중화경제권의 본격 가동이라는 점에서 시선을 모았다. 영국의 아시아 경영도 이로써 마감됐다.
본격적인 경축행사는 이날 저녁 시작됐다. 오후 6시30분 홍콩 콜로세움에서는 해방군 밴드의 중국 국가연주속에 오성홍기가 게양됐다. 특히 한국의 소프라노 신영옥, 첼리스트 장한나양 등이 중국계 미국인 첼리스트 요요마와 함께 출연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1997년 미국 영화배우
로버트 미첨 사망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마릴린 먼로와 공연해 우리에게도 친숙한 미국 영화배우 로버트 미첨이 1997년 7월 1일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79세였다.
1950∼60년대의 대표적 미국배우 중 하나로 1백80cm의 키에 다부진 체격, 무뚝뚝한 이미지로 `남성적`이라는 평을 받았던 미첨은 `돌아오지 않는 강` 외에도 `라이언의 딸` `십자포화` `엘도라도` `케이프 피어`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1945년 `GI 조 이야기`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로 딱 한번 올랐을 뿐, 끝내 아카데미상은 수상하지 못했다.
미첨은 1917년 8월 미국 코네티컷주 브리지포트에서 출생, 2살 때 열차사고로 아버지를 여의고 영국군 소령이었던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14살 때 가출, 폭력조직 가담혐의로 6개월 간 복역하기도 했으며 1937년 캘리포니아에서 아마추어 연극배우로 처음 무대에 서기전까지 광부, 선원, 권투선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는 1942년 `레더 버너즈`로 영화에 입문해, 1945년 `GI 조 이야기`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미첨의 트레이드 마크인 졸리는 듯한 눈은 만성적인 불면증과 무명 권투선수 시절 입은 상처로 눈이 나빴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Robert Mitchum 의 출연작 - Dead Man(1995), Cape Fear(1991), War and Remembrance(1988), The Last Tycoon(1976), Ryan's Daughter(1970), The Longest Day(1962), Cape Fear(1962), The Night of the Hunter(1955), Second Chance(1953), Angel Face(1952), Where Danger Lives(1950), The Big Steal(1949), Blood data-on the Moon(1948), Rachel and the Stranger(1948), Out of the Past(1947), Crossfire(1947), Story of G.I. Joe(1945)
http://www.imdb.com/name/nm0000053/ http://en.wikipedia.org/wiki/Robert_Mitchum
▶1996년 실업급여제도 실시
1996년 7월 1일부터 실업급여제도가 실시됐다. 30인 이상 종업원을 가진 사업장의 근로자는 1995년 7월부터 월급에서 고용보험료가 매달 1만원 안팎씩 원천징수되었는데 이를 12개월 이상 낸 사람이면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무조건 회사를 떠났다고해서 다 받는 것은 아니다. 본인 잘못으로 해고됐거나 정당한 사유없이 스스로 떠나면 해당되지 않는다. 예들 들어 금고 이상의 형을 받아 쫓겨났거나 고의적인 기물 파손, 공금유용·착복·횡령, 허위서류 작성, 기밀누설 등 회사에 손해를 끼쳐 해고되면 받지 못한다.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경우는 건강이나 가정사정, 근로·고용조건상 불가피할 때다. 채용 당시 약속한 보수 등 근로조건이 실제와 다를 때, 임금체불, 가정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먼 직장으로 전근받아 그만두는 경우 등이 해당된다. 신기술 등이 도입돼 적응하기 어렵거나 체력이나 신체기능이 떨어져도 인정된다.
실업급여는 기본급여와 취직촉진수당으로 나뉘는데 기본급여는 짧으면 1개월 길게는 7개월까지 받는데 이는 나이와 보험료 납부기간에 따라 다르다. 취업촉진수당은 재취직을 위한 활동비인 것이다. 실업급여를 받으려면 실직 즉시 가까운 지방노동관서의 직업안정과에 가서 실직을 신고하고 구직신청을 한 뒤 고용보험과로 가서 실업급여 신청서를 써내야 한다. 2주일이 지나도 직장을 얻지 못했으면 다시 고용보험과로 가서 실업인정일을 지정받는다. 그 뒤 2주마다 열심히 구직활동을 벌였지만 재취업하지 못했음을 증명하면 실업인정일로부터 2주 단위로 개인통장으로 실업급여가 온라인 지급된다.
▶1996년 KBS, 위성시험방송 실시
1996년 7월 1일 오전 10시 KBS가 위성시험방송의 첫 전파를 발사, 우리나라도 위성방송 시대에 진입했다. KBS는 이날 오전 10시 신관 TV공개홀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이석채 정보통신부장관, 오인환 공보처장관, 홍두표 KBS사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위성시험방송 개시 기념식`을 갖고 위성방송의 개막을 알렸다.
케이블TV에 이은 또 하나의 뉴미디어가 실용화되고, 본격 디지털시대를 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이벤트였다.
KBS는 이날부터 인도네시아 상공에 떠있는 무궁화위성을 이용, 위성채널 2개로 시청자들에게 위성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위성방송 개시일인 7월 1일 오후 2시10분엔 야구선수 박찬호가 소속된 LA 다저스와 콜로라도 록키스의 경기를 1채널로 위성중계했다.
시청자가 KBS 위성방송으로 직접 느끼는 가장 큰 차이는 LD수준의 고화질과 CD수준의 고음질, 16:9의 광폭화면이 디지털 위성방송의 3대 특징이었다. KBS 위성방송은 기존 홍콩 스타TV나 일본 NHK 위성방송과는 달리 첨단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는데 큰 차이가 있다. 디지털 위성방송은 미국 디렉TV, 일본 퍼펙트TV에 이어 KBS가 세계 세번째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통신위성이 아닌 방송위성을 이용한 디지털 위성방송으로는 세계 최초였다.
▶1995년 로만 헤르초크
제7대 독일연방 대통령에 취임
▶1995년 부동산실명제 실시
▶1992년 한국-우크라이나
과학기술협력협정 체결
▶1991년 수입상품 원산지 표시제 도입
▶1991년 `초원의 집`의 배우
마이클 랜든 사망
`보난자` `초원의 집` 등 많은 TV 인기드라마에 출연, 한국TV 시청자들에게도 친숙한 마이클 랜든이 1991년 7월 1일 간암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배우이며 극작가, 제작자, 감독으로도 활약한 랜든은 긴 곱슬머리와 따뜻한 미소로 건전 드라마에 주로 출연해 왔으며, 이 같은 성격의 드라마를 집필하거나 제작해왔다.
뉴욕 태생으로 본명이 유진 오로위츠인 랜든은 1957년 영화계에 데뷔한 뒤 TV 조역 등을 주로 맡아왔다. 그러다 1960년대 87개국에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TV장기연속극 `보난자`에서 `리틀 조`역을 맡으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는 1973년 마지막회가 나가기까지 14년 간 계속됐으며, 미국에서는 7년 동안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그는 이 드라마에 출연하던 중 로라 잉걸스 원작의 `초원의 집`을 극화, 대부분을 직접 감독하고 자신이 주인공을 맡아 자상한 아버지로서의 이미지를 굳혔다.
또 죽은 사람이 천사로 환생,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줄거리의 `천사의 미소`를 집필, 제작하고 출연했다. 그는 보난자 등 시리즈물에 출연하면서 "대스타가 되겠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 1주일에 120알의 신경안정제를 먹으며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Michael Landon 의 출연작 - Little House Years(1979), The Loneliest Runner(1976), Little House data-on the Prairie(1974), Bonanza(1959) http://www.imdb.com/name/nm0001446/ http://en.wikipedia.org/wiki/Michael_Landon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평양에서 개막(~8일)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1989년 7월 1일 개막됐다. `반제연대성및 평화와 친선`이라는 구호아래 평양에서 개최된 이 행사에는 전대협 대표 임수경을 비롯,179개국 2만여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남한의 88서울올림픽 개최에 대응, 북한이 유치한 평양축전은 1947년 2월 체코의 프라하에서 첫 대회가 열린 후 동양에서는 최초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행사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15만명의 군중을 수용한 `5월 1일 경기장`의 개막식에 이어 2일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평양축전행사는 정치,문화예술,체육행사 등으로 나뉘어 진행됐는데 이 가운데 정치행사 프로그램이 83%, 문화행사가 17%정도를 차지했다.
▶1987년 전국 전화 완전자동화
▶1983년 경남도청 창원 이전
▶1983년 국제전화 자동화
▶1983년 중국, 모택동 격하.
등소평 추앙운동
▶1983년 금융실명거래제 실시
▶1981년 전두환대통령 아세안 방문
에서 이광요 싱가폴수상과 회담
▶1981년 대구,인천시 직할시로 승격
(10개시 광명, 정주, 나원, 송탄, 태백,
영천, 김해, 동두천, 금성, 서귀포 신설)
▶1979년 소니 워크맨 등장
미일 경제역전이 고정된 1970년대, 일본 수출품의 특징이 집약된 제품이 소니의 워크맨이었다. 단일회사 품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가전제품이라는 워크맨은 소니 창립자 이부카의 “미국 출장가는 비행기속에서 음악을 듣고 싶다”는 한마디로 태어났다.
이부카는 귀국 뒤 제품에 만족했고, 시장에 팔 물건으로 고치기 시작했다. 개발기간은 불과 4개월, 가격은 창립 33주년을 기념해 3만3000엔으로 책정됐다. 이름은 당시 유행하던 수퍼맨과,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란 상품컨셉을 감안해 만들어졌다.“워크맨은 영어가 아니다”란 비판이 나와 수출 초기 미국 ‘사운드 어바우트’, 영국 ‘스토어웨이’(=밀항자), 스웨덴 ‘프리 스타일’ 등 3가지 이름으로 팔렸다. 그러나 이미 일본을 방문했던 여행객들이 대거 구매한 뒤여서 이내 워크맨이란 이름을 회복한다.
그 이름은 판매 2년 만인 1981년 프랑스 사전 ‘푸치 라 루스’에, 1986년엔 영국의 대표적 사전 ‘옥스포드 잉글리시 딕셔너리’에 실렸다. 워크맨 1호기 ‘TPS-L2’가 나온 뒤 테이프, CD, MD용 등 600여 기종이 선보였고, 1999년 11월 현재 2억대 가까이 팔렸다.
▶1980년 김포국제공항관리공단 발족
▶1977년 미국상원 중성자탄 개발 허용
▶1977년 부가가치세제 실시
부가가치세가 1977년 7월 1일부터 전국적으로 시행에 들어갔다. 이는 전해 12월 22일의 부가세법 공포에 따른 것이었다. 부가세 도입은 복잡한 간접세 체계를 간소화하며 근거과세를 원칙으로 하고 수출상품에 대한 간접세의 완전 면세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는 한편 간접세의 부담을 덜어 투자를 촉진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정부는 부가세 제도 도입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영수증 주고받기를 생활화 하기로 하고 물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7백95가지 공산품과 56종의 서비스 요금의 구 간접세 부담률을 조사, 적정원가와 적정마진 사정 작업에 착수하는 한편 관련사업자들의 세금계산서 작성방법과 확정신고요령 등을 계몽했다. 또 실행세율을 기본세율 13%보다 3%포인트 낮게 조정했다.
▶ 1977년 의료보험제도 실시
의료보험제가 1977년 7월 1일 국내에서 처음 실시됐다. 실시 첫 해인 1977년에는 상용 근로자 5백인 이상을 고용한 전국 5백2개 기업체와 20개 공업단지 등 모두 5백22개소의 근로자와 부양가족 3백50만명을 대상으로 했다.
의료보험조합은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1종 조합과 지역 주민 대상의 2종 조합으로 구분했으며 5백인 미만의 사업장도 근로자 3분의 2가 동의하고 보사부 장관의 인가를 받으면 조합을 설립할 수 있고 일반 지역 주민도 발기인 30인 이상의 서명을 얻어 5백인 이상이 가입하면 2종 조합을 설립할 수 있게 했다. 의료보험조합에 가입한 근로자(피보험자)들의 보험료는 월보수의 3~8% 범위내에서 조합정관에 따라 정하도록 하되 보험료의 절반을 피보험자가, 나머지 절반은 사용자가 부담토록 했다. 2종 조합은 보험가입자와 부양가족을 기준, 조합정관에 따라 일정액을 매달 내게 했다.
▶1976년 한국수출입은행 발족
▶1976년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수립
▶1974년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 사망
▶1973년 전자 키보드 발명자
해먼드 사망
▶1970년 우편번호제 실시
▶1969년 신세계백화점,
국내 첫 백화점카드 발급
▶1968년 핵확산방지조약(NPT)에
62개국이 조인
핵보유국의 증가를 방지할 목적으로 핵확산금지조약(NPT)에 1968년 7월 1일 5대 강국을 비롯, 62개국이 조인했다.
1995년 핵확산금지조약 회의장 모습.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핵보유국은 핵무기와 이와 관련된 것을 비핵국의 핵제조에 어떠한 원조도 할 수 없으며, 비핵국은 핵무기와 관련된 어떠한 것도 스스로 제조할 수 없고, 비핵국은 원자력 이용을 평화적 목적에 한정하고 원자력의 군사적 목적으로서의 전용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 원자력기구의 보장조치를 수락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1970년 3월 5일 국제적으로 발효됐으며 한국은 1975년 3월 19일 국회동의를 거쳐 1975년 4월 23일부터 발효됐다. 1999년 6월 현재 세계 187개국이 가입했다.
▶1967년 유럽공동체(EC) 결성
▶1966년 프랑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서 탈퇴
▶1963년 국산 기계식 교환기 개통
▶1962년 르완다-브룬디,
벨기에로부터 독립
▶1961년 국제방송국(HLSA) 개국
▶1961년 가나-말리-기니
아프리카제국연합 결성
▶1961년 한국전력 발족
▶1960년 소말리아,
영국-이탈리아로부터 독립
▶1960년 가나,
영국연방내 공화국으로 독립
▶1957년 유엔군 사령부,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동
미국정부가 1957년 7월 1일자로 일본 동경에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를 해체하고 극동군사령부와 함께 있던 유엔군사령부를 서울로 이전했다. 또한 유엔군사령관이 주한 미8군사령관을 겸임토록 했다.
유엔군사령부 서울이전 및 신임 사령관 취임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오른쪽)과 미군 수뇌부.
유엔군사령부의 서울 이전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對韓 신 무기배치방침표명(5.22)에 뒤이어 신형 F100제트기단 한국배치(6.27), 미 제1기갑사단 한국이동(8.1) 등으로 구체화된 극동미군사력의 전진배치 정책과 월남전 개입 움직임과 맥을 같이 한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북한은 7월 28일 판문점 정전위원회에서 휴전협정 군사조항 폐기를 요구했고 유엔군측은 북한의 요구를 거부하는 등 휴전선 일대에 긴장이 고조됐다. 이날 서울 용산 미8군사령부 연병장에서 열린 유엔군사령부 서울이전 및 신임 사령관 취임식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장면 부통령 등 한국의 3부요인과 한·미 군수뇌부가 모두 참석했다.
▶1955년 미국 FOA를
ICA(국제협조처)로 개편
▶1954년 일본 자위대 창설
1954년 7월 1일 일본 자위대가 창설됐다. 전쟁에서 패한 후 헌법에 의해 무장이 금지된 일본이 재무장을 하게 된 계기는 공교롭게도 한국전쟁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일본 주둔 7개사단 병력의 대부분을 한국전선에 긴급 출동시키는 바람에 일본 전국이 치안공백 상태와 안보 무방비상태에 놓이게 되자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는 1950년 7월 요시다 당시 일본 총리에게 경찰력과 해상경비력의 강화를 지시했다. 이를 근거로 1950년 8월 24일 창설된 것이 `경찰 예비대`이고, 이는 오늘날의 자위대 모체가 됐다.
경찰예비대는 1952년 8월 보안청 산하 경비대(육군)와 보안대(해군)로 분리되면서 표면상 경찰조직에서 군대성격으로 발전했고, 1954년 7월 1일부터는 정식 군제로 바뀌면서 항공부대가 창설돼 비로소 육ㆍ해ㆍ공군을 갖춘 자위대가 됐다. 자위대는 정원이 7만5천명에서 11만명으로 불어나면서 사단조직에 해당하는 `관구대`, 야전군에 해당하는 `방면대`를 창설, 명실상부한 군대조직을 갖추게 됐다.
2년 후인 1956년 7월에는 일본 정부에 국방회의란 것이 설치돼 방위력을 계획적으로 증강하기 시작했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국방의 기본방침` 제3항에는 `국력과 국정에 상응하는 자위에 필요한 한도 내에서 효율적인 방위력을 점진적으로 정비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어, 일본은 이를 근거로 1958년부터 3∼6년 단위의 중ㆍ단기 방위력 증강사업을 계속해 오고 있다.
▶1953년 유럽 12개국,
유럽원자력연구회의(ENRO) 설립
▶1951년 콜롬보계획(동남아
경제개발협력) 성립
▶1950년 미국 지상군 처음 한국 도착
1950년 7월2일 대전역에 도착한
스미스부대.
▶1950년 캐나다함대 한국출동
▶1948년 국회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
▶1946년 미국,
비키니에서 최초의 공개 핵실험
1946년 6월 25일 마샬군도 비키니섬
에서 실시된 수중폭파실험 장면.
▶1946년 인도 봄베이서
힌두-회교도간 대충돌 폭동화
▶1944년 미국 브레튼우즈서 연합국
44개국이 참가 UN국제통화금융회의
개막
▶1940년 드골장군,
영국서 자유프랑스정부 수립
▶1933년 서울~동경간 직통전화 개설
(7.15부터 전화통화 시작)
▶1926년 장개석,
군벌타도를 위한 북벌 개시
▶1925년 광동에 국민정부 성립
▶1921년 중국 공산당 결성
▶1921년 보츠아나의 초대 대통령
(1966-80) 카마 출생
▶1912년 순수 서정시인 백석 출생
▶1911년 제2차 모로코사건 발발
▶1909년 영국,
석탄갱부의 8시간 노동제 허락
▶1906년 경인-경부철도,
일제통감부의 관리하에 들어감
▶1905년 고고학자 도유호 출생
▶1905년 일본 제일은행 경성지점,
한국중앙은행으로 발족
▶1905년 독일-프랑스 협정 성립
(모로코의 영토보전 협약)
▶1901년 노벨상 창설
(12월 10일 첫 시상)
노벨상 메달 모습.
https://youtu.be/kuf2AAyHk6s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