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ethoven, Piano Sonata No.29 'HammerKlavier'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9번 ‘하머클라비어’
Ludwig van Beethoven
1770-1827
Emil Gilels, piano
Grand Hall, Moscow Conservatory
1984.01.26
Emil Gilels - Beethoven, Piano Sonata No.29 in B flat major, Op.106 'HammerKlavier'
고금의 피아노 음악 가운데서 으뜸으로 대접받는 곡
베토벤이 피아노 소나타 29번의 작곡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1817년입니다. 그 다음 해까지 작곡해 1819년 출판됐습니다. 이른바 ‘고고한 양식기’라고 불리는, 베토벤의 창작 후기입니다. ‘하머클라비어’는 그 시기의 입구에 놓여 있는 곡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무렵의 베토벤은 완전히 귀가 들리지 않았고 타인과의 대화는 필담으로야 가능한 상태가 됩니다. 이때부터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826년까지, 베토벤의 창작 편수는 눈에 띄게 줄었지만 그야말로 서양음악사의 가장 높은 봉우리라고 할 만한 곡들이 태어납니다. 뭐가 있을까요? ‘하머클라비어’를 포함한 말년의 피아노 소나타 4곡, 종교음악 <장엄 미사>, 마지막 교향곡인 9번 ‘합창’, 생애의 마지막 2년 동안 집중했던 다섯 곡의 현악 4중주 등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29번의 악보 머리에 ‘Grosse Sonate fur das Hammer-Klavier’라고 썼습니다. 그래서 이 곡은 ‘하머클라비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지요. 베토벤의 악보에 밝혀 놓은 것처럼 ‘하머클라비어’는 그때까지의 피아노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거대한 소나타’입니다. 베토벤은 4개의 악장에 장대한 스케일과 난해한 테크닉, 심오한 정신세계를 아로새겼습니다. 아마 고금의 피아노 음악 가운데서도 으뜸으로 대접받는 곡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하머클라비어’는 ‘비창’이나 ‘월광’, ‘열정’ 등에 견주자면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곡은 아닙니다. 감상자뿐 아니라 피아니스트들에게도 난곡(難曲)으로 손꼽히는 곡입니다. 연주시간이 40분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큰데다 테크닉으로도 매우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체력과 더불어 고난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곡이지요. 일설에는 런던의 피아노 제조업자 브로드우드에게 선물 받은 하머클라비어, 그러니까 망치로 현을 때려서 소리를 내는 개량된 피아노 덕택에 베토벤이 이 곡을 쓸 수 있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베토벤이 작곡에 착수한 것은 하머클라비어를 선물 받은 때보다 1년 앞선 시점이었던 까닭에 그다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진 않습니다.
1악장: 알레그로
1악장은 이 소나타의 교향악적 규모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딴다다단단’ 하는 강력한 화음을 제시하면서 시작하지요. 모두 4마디입니다. 장엄하고 확고한 강주(强奏)입니다. 반면에 이어지는 4마디는 아주 여립니다. 그렇게 강약의 대비를 보여주면서 시작합니다. 그 대비는 악장이 끝날 때까지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 반복을 거듭하면서 음악이 확장되는 장면들이 광대무변하게 펼쳐지는 악장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귀에 착착 감기는 선율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베토벤 음악의 본질은 ‘선율’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면 좋겠습니다. 그보다는 음악의 전체적 구조를 음미하시기를 권합니다. 그렇게 구조를 맛보려면 음악을 여러 번 반복해 들어야 합니다.
2악장: 스케르초. 아사이 비바체
2악장은 간주곡 성격의 스케르초입니다. 3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악장인데 전체 4악장 중에서 가장 리드미컬한 진행을 보여줍니다. 반복적인 리듬으로 주제를 제시하는 장면, 빠르고 매끄럽게 펼쳐지는 음표의 상승과 하강에도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왠지 씁쓸하고 냉소적인 유머가 자유로운 기풍으로 펼쳐지고 있는 악장입니다.
3악장: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아파시오나토 데 콘 몰토 센티멘토
3악장은 ‘하머클라비어’에서 가장 길고 심원합니다. 아다지오 소스테누토(Adagio Sostenuto), ‘느리게, 한 음 한 음을 깊이 눌러서’라는 지시어가 머리에 붙어 있지요. 아주 느릿한 걸음의 명상적 선율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애수와 비탄을 머금은 첫 번째 주제가 연주되고 두 번째 주제는 그보다 좀 더 환한 느낌으로 펼쳐집니다. 아마도 당시의 베토벤이 처해 있던 심경이 그런 것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찍이 베토벤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약간의 몽환, 그러면서도 청명한 슬픔의 기색이 완연합니다. 그렇지만 역시 베토벤답게 음악적 긴장의 끈을 한시도 놓지 않습니다. 코다(종결)로 들어서기 직전, 음악이 거의 꺼질 듯이 잦아들었다가 다시 상승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코다에 도달하지요. 먼저 두 번째 주제를, 이어서 첫 번째 주제를 여리게 연주하면서 마치 일종의 체념처럼 악장의 막을 내립니다.
4악장: 라르고 - 알레그로 리솔루토
마지막 4악장은 라르고의 느릿한 서주로 시작합니다. 이 역시 몽환적인, 혹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어서 알레그로 템포로 전환되면서 활달한 연주가 펼쳐집니다. 그러다 다시 라르고로 침잠했다가 음량이 차츰 고조되면서 템포가 다시 빨라집니다. 매우 테크니컬한 악상들이 빠른 손놀림으로 연주되지요. 이어서 바흐의 푸가를 연상케 하는 기법이 종횡무진으로 펼쳐집니다.
푸가란 간단히 말해 하나의 성부를 다른 성부가 대위법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뜻합니다. 베토벤은 후기로 올수록 푸가 기법을 많이 사용했고, 특히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작곡했던 현악 4중주 ‘대 푸가’에서 그 정점을 이룹니다. 마치 쫓고 쫓기는 듯한 악상들이 긴박감 있게 펼쳐지다가 포르테시모의 강렬한 연타로 대곡의 마지막 방점을 찍지요. 피아노 한 대로 그려내는 교향악이 그렇게 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