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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목자 여호와
시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1-6 / [여호와는 나의 목자; 다윗의 노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그 무엇이 부족하리오. 2) 편히 쉬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시고 고이 쉬라 시원한 시냇가로 데려가시네. 3) 내게 생기 불어넣으시고 똑바른 길로만 이끌어 주시니 주님이 아니고서야 주님의 이름 아니고서야 어찌 그러리. 4) 나 죽음 그늘 드리운 깊은 골짜기 지난다 해도 아무런 두려움없이 가리라. 주께서 내 곁에 함께 계시니 목자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와 막대기처럼 인도하여 주시니 하고 많은 시름 사라져 버리고 이 마음 이렇듯 든든하여라. 5) 원수들 두 눈 뜨고 쳐다보는데 보란듯 이것 앞에 잔칫상 차려 주시고 귀한 손님 대접하듯 기름 발라주시며 잔이 흘러 넘치라 하고 부어 주시네. 6) 아, 그 누가 이렇듯 행복하리오. 이처럼 포근하리오. 주님의 손길 살아 생전 끊이지 않으리니 이 목숨 살아 숨쉴 동안에 주님의 전에 오래도록 살으리이다.
시편 23편은 시편의 나이팅게일, 시편의 진주로 여겨지는 불멸의 노래입니다. 이 시의 한 줄 한 줄 속에는 다윗이 평생 동안 체험한 강렬한 시적 영상들과 고백이 가득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1-3) 본문은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로 시작하여 ‘자기 이름’으로 마칩니다. 목자라는 칭호는 히브리인의 전통에서 하나님에 대한 가장 오래된 칭호 중 하나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4개의 동작을 통해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고’, ‘소생’, 즉 다시 생기를 주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신앙 고백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의 목자’와 ‘나의 영혼’은 짝을 이루고 ‘푸른 풀밭’과 ‘의의 길’이 그 대칭으로서 짝을 이루며, 목자가 양을 이끌어 가는 곳과 양의 복된 모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양은 목자를 순순히 따를 때 안정과 평안이 보장됩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4) 다윗은 ‘비록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라는 위급한 상황 속에서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십니다’라고 말하며 인생의 극심한 위험 중에서도 늘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사망의 골짜기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는 최대의 위기 속에서 위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가 다윗의 중심축입니다. 사망, 음침함, 두려움은 전쟁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이며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의 무기로서 목자의 거룩한 군사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임마누엘의 모습입니다.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5-6) 다윗은 자신을 영화롭게 해주신 하나님을 잔칫상을 베푸는 친절한 주인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승리자들을 위하여 베푸는 축하 잔치를 의미합니다. 한편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잔치에서 특별히 귀중한 손님들에게 머리에 향기로운 기름을 발라주는 풍습이 있었습니다(시 133:2). 이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매우 귀한 존재로 여기셨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본 단락에서 시편기자는 여호와의 집으로 글을 맺습니다.
적용: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는 천진난만한 고백이 아닙니다. 그것은 쓰디쓴 경험과 전쟁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성숙한 열매입니다. 당신의 열매는 무엇입니까?
여섯 살짜리 아이가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갔다가 한눈을 팔다 엄마의 손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아이의 시야에서 엄마가 사라지자 두려워진 아이는 엄마를 부르기 위해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엄마'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이름 석 자를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녀석아, 사람들도 많이 보는데 엄마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면 되겠어?" 그러자 아이는 "엄마, 여기에 엄마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제가 엄마를 부르면 사람들이 다 돌아보지 않겠어요? 그래서 엄마 이름을 불렀어요." 자신의 이름은 단순한 단어가 아닌 인생과 정체성이 깃들어 있는 사람 그 자체입니다.
< 설 교 >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시 23:1-6 / 김홍도 목사
등산 간 사람이 산꼭대기가 아무리 아름답고 공기 좋고 신선해도 반드시 산밑으로 내려와야지 산꼭대기에 머물러 살 수는 없습니다. 산밑에 골짜기에는 공기가 탁하고 불쾌한 것이 많지만 내려와야 하는 것처럼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신선한 산꼭대기와 같은 인생을 살 수는 없습니다. 평안과 기쁨과 행복만이 있는 삶을 살 수는 없습니다. 가끔 슬픔과 고난과 죽음이 있는 골짜기를 통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환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 어른거릴 때, 불안하고 초조하고 죽고 싶을 정도로 앞길이 막막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마치 기차를 타고 여행하다가 갑자기 캄캄한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을 때가 있습니다.
시편 23편에서 다윗도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수없이 많이 통과한 경험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가장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다윗 왕,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정을 받은 다윗 왕은 누구보다 더 많은 환난 고통을 당하며 캄캄한 죽음의 골짜기를 많이 통과했던 것을 그가 쓴 시편 전체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마 다윗처럼 핍박과 비난과 원수의 공격을 많이 받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절망에 빠져서 "아! 내가 전에 하나님 앞에 크게 범죄했더니 이제 하나님이 나에게 저주하시고 벌하시나보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보다."하고 절망하고 자포자기하고 말았을 터인데 23장 6절에 보면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 고난과 고통 중에서도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을수록 형제들의 시기와 미움을 더 많이 받고 억울한 고통을 더 많이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많이 받을수록,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사람일수록 남달리 시기와 질투와 미움을 많이 받고 더 많은 사탄의 공격을 받게되는 것입니다. 시시하게 믿는 신자는 그런 고통과 시련을 안 받습니다. 더욱 마귀 편에 든 사람은 핍박도 하지 않습니다. 환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과 사랑을 의심해선 안됩니다.
당대의 의인이라고 했던 욥도 이런 무시무시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한 사람입니다.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산이 불타고 도적 맞아서 다 날아갔습니다. 10자녀가 집이 무너지면서 다 죽었습니다. 온 몸에 악창이 나서 구더기가 바글바글하고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아침이 되면 빨리 밤이 왔으면 좋겠다하고 밤이 되면 빨리 날이 밝았으면 좋겠다고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욥에게 그것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주셨습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욥 13:15). 또 말하기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하는 메시야의 오심을 예언한 굉장한 계시도 받았습니다.
사도 요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했습니다. 그는 밧모섬에 귀양가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고독과 불안과 슬픔 속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요한에게 영원의 커튼을 열어서 하늘의 빛을 보여주셨고 천국과 천국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자기를 기다리고 계심을 보았습니다. 그 굉장한 장면을 보고 기쁨에 차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어떤 믿음으로 무장해야 되겠습니까?
1. 지금도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극심한 고통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떠나셨거나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 어느 때보다도 가까이 계셔서 지켜보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신앙을 피력했습니다. 어떤 주님이 함께 하시는가 하면,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진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지팡이"는 목자들이 양들의 앞길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막대기"는 사자나 곰이나 악한 짐승이 나타날 때 때려잡고 쫓아 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캄캄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찌라도 대 목자장 되시는 주님이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주시고, 원수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지켜 주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8-20절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절대로 주님이 우리를 고아처럼 외롭게 홀로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해선 안됩니다. 히브리서 13장 5-6절에 ".....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고난을 견디지 못하여 불평하기를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결코 사망의 골짜기로 통과할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의심해선 안됩니다.
2. 원수 앞에 차려준 잔치상을 보아야 합니다.
23편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서 "상을 베푸셨나이다"하는 것은 금메달, 은메달 같은 상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맛있는 음식을 잘 차려 놓았다는 뜻입니다(Thou preparest a table before me in presence of my enemies). 즉 원수들 보는 앞에서 잔치상을 베풀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탄의 공격을 받고 원수들에게 고통을 당할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시기 위해서 맛있는 잔치상을 베풀어주시면서 "자! 너희들 보아라"고 할 때가 있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과 환난을 당할 때에는 좌절하지 말고 "주여, 이 환난 후에는 무슨 상을 베풀어주시려고 합니까? 감사합니다" 해야 합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고 돌아왔을 때 열 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해서 백성들을 절망에 빠뜨리고 울부짖게 만들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들은 다 그들의 칼날에 죽게 되었고, 살아 남은 사람은 노예로 잡혀가게 되었고, 기골이 장대해서 우리는 그들 앞에 메뚜기 같습니다. 그 성벽은 철옹성벽이라 도저히 난공불락입니다."라고 절망적인 보고를 했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문제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다 정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기골이 장대한 장수라서 우리가 메뚜기 같이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들이 메뚜기 새끼만도 못하고 여리고 성이 아무리 견고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종잇장만도 못하다는 믿음의 눈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무서운 환난을 당했습니까? 부정적인 눈으로 본 사람들은 금란교회는 건축도 못하고 풍비박산 당해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주셨습니까? 얼마나 교회가 부흥됩니까? 제가 얼마나 건강합니까? 교인들이 근래에 와서는 설교가 더 능력 있고 은혜가 넘친다고들 합니다. 하나님이 원수의 목전에서 큰상을 베풀어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원수의 비난과 공격을 당해도 결코 좌절하거나 자포자기해서는 안됩니다. 원수의 비난과 공격을 받을 때 금방 망할 것 같고 죽을 것 같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이사야 51장 7절에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로다"고 했습니다. 즉, 비난하고 훼방하는 원수들은 좀이 옷을 먹어 없애듯이, 양털을 벌레가 먹어 버리듯이 다 없어지는 날이 오지만 너희는 영원히 있겠다는 말씀입니다.
3. 원수 앞에 설 때, 성령을 부어 주심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23편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셨는데, "기름을 부으셨다"는 것은 성령을 충만히 부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을 때 성령충만 해졌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3절에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즉 기름 부을 때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원수 마귀와 싸우러 나갈 때 사탄의 공격을 받을 때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평안할 때는 성령의 능력이 안 나타납니다. 제가 믿기는 삼손이 그렇게 능력의 은사를 받았지만 보통 때는 평범한 사람과 같았을 것으로 봅니다. 블레셋과 마주섰을 때 힘이 솟구쳐 올랐을 것이고, 원수와 싸우기 시작할 때 힘이 솟아올랐다고 봅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에 섰을 때 성령께서 담대한 믿음을 주시고 물멧돌 던질 때 힘을 주시고 명중시킬 수 있게 해 주셨다고 봅니다.
저는 부흥회 인도할 때마다 수 백 번 느끼는 것은 도무지 은혜 끼칠 것 같은 느낌이 안 들고 강단에 설 자신도 없는데 성령께 의지하고 강단에 올라서면 능력이 임하는 것을 수 백 번 체험합니다. 설교 준비할 때 성령의 역사를 많이 체험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이 감당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그때 그때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11절에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잡은 이와 권세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그때 필요한 지혜와 담력과 능력을 주십니다. 시편 92편 10절에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들소의 뿔은 사자도 당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환난과 고통을 제하여 주시겠다는 약속은 하신 일이 없지만 그 고통과 환난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극심한 고통을 많이 당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몸에 사탄의 찌르는 가시까지 있는데 그것을 뽑아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 고난을 다 알고 있다. 네 육체에 찌르는 가시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고통과 환난을 제거해 주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주시겠다는 말씀이고 또 그것이 지나놓고 보면 크게 유익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시험 당할 즈음에" 고통, 환난이 올 때 그때 그때 원수의 목전에 설 때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1-32절에 "....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 늘 밝고 평안한 생활만 할 수 없습니다. 어둡고 캄캄한 죽음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지금도 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② 원수 앞에 차려준 잔칫상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③ 캄캄한 골짜기를 지날 때 이길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다
시 23:1-6 / 조용기 목사
<서론>
오늘 저는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오래 살지 못해 짐승들에게 잡혀서 찢깁니다. 다른 모든 짐승들은 자기 방어 수단이 있어요. 이빨이 무섭다든지, 뿔이 사납다든지, 잘 달린다든지 그런 것인데 양은 그런 것이 없어요. 뿔도 튼튼하지 못하고 이빨도 강하지 못하고 발톱도 없고 멀리 달려갈 수도 없고 십미터 앞은 캄캄하게 안보이고 목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양입니다. 그러나 목자가 있으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강한 목자가 양을 지키면 양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강한 목자가 지키므로 안전하게 살고 푸른 풀밭으로 이끌어 주셔서 푸른 풀밭에서 누이신다고 말했습니다. 양은 배가 부르지 않으면 절대로 안 누워요. 밤새도록 풀을 뜯습니다. 그러나 배가 불러야 눕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보니까 양은 목자의 인도를 쫓아서 푸른 초장에 누인다고 했습니다. 나는 행복하다. 만족하다. I''m happy. 그리고 쉴만한 물가에 가서 호수에 물을 마시고 쉴 수 있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는 그 구절을 참 좋아해서 어려울 때 그 구절을 늘 사용합니다. 내가 곤란한 가운데 부족함이 많이 다가오고 어려운 시련이 있을 때 주여,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다고 하셨으니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부족한 것은 다 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만족합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편안해지고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역사를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뭡니까? 하나님 주신 약속을 마음속에 꽉잡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아무리 역경이 다가와도 말씀대로 된다고 말씀에 매달리고 말씀을 주장하면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이룰 수밖에 없는 것은 거짓이 없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영혼이 생기에 충만하고 행복과 기쁨으로 충만하고 의롭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같이 계셔서 나에게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그래요.
예수님을 우리의 목자로 삼으면 모든 삶에 플러스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플러스인생, 삶에 환경이 다가와서 보탬이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는 왜 플러스인생이 될 수 있느냐. 예수님이 목자가 되어서 언제나 우리가 있으면 플러스 예수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플러스 인생과 같이 사니까 우리는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어요. 빌립은 광야에 나가서도 예수님을 계산에 안 넣고 자기 혼자만 계산하니까 실패했지요. 안드레는 광야에 나갔을 때 예수님을 플러스 하니까 문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사는데 여러분 혼자 살려고 하지 말고 플러스 예수님, 예수님과 함께 생각해보고 의논하고 기도하고 믿으면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항상 너와 같이 하느니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으니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된다.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러면 여러분 주님 나와 함께 갑시다. 플러스로 인생을 사십시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붙잡아 주세요. 거짓이 없으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로 삼고 플러스 인생을 살게 될 때 언제나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부족하다.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플러스 인생으로 예수님이 강한 능력으로 같이 계시기 때문에 긍정적인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왜 그렇게 유명하냐. 그는 17살쯤 되는 초립동이었지만 어른들보다도 적군의 장수보다 더 위대한 것은 예수님을 플러스로 보태어서 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본론>
1. 예수님은 나의 목자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의 목자뿐 아니라 나의 목자.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3)
늘 같이 하지 않습니까? 푸른 초장에 눕도록 풀을 뜯어먹게 해주시고 쉴만한 물가에 가서 쉬게 해주시고 마음을 소생시켜서 행복하고 만족하게 해주시고 바른 길로 이끌어 주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플러스 인생 예수님만큼 플러스 인생으로 좋은 것이 없습니다. 저는 가만히 살아온 길을 요사이 종종 생각해 봅니다. 옛날에는 죽는데 대해서 별로 깊이 생각 안했는데 요사이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필연적으로 인생은 죽는데 사는 것보다 죽는 날이 가깝다 말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면서 어떻게 살아왔나 생각하니 예수님이 플러스해서 산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시험과 환난은 많이 당했지만 부족함은 없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예수님이 함께 계시니 플러스 삶을 살았다. 예수님이 없었을 때는 마이너스가 많았습니다. 피투성이가 되고 고통을 당하고 절망적일 때도 많았는데 예수님이 계시고 난 다음부터는 어느 곳에나 주님이 플러스 인생을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땅이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신 것처럼 공허하고 혼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내게 다가와 있을지라도 나의 가슴위에 날개를 퍼덕 거리면서 나는 독수리같이 덮어주시는 이가 계시는데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철학이 아닙니다. 학문이 아닌 것입니다.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족한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로 11절에도 보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내가 온 목적이 내 양을 이끌어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려고 왔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주님이 우리 위해서 목숨을 버릴 정도로 관심을 가지고 플러스 인생을 살도록 해주겠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예수님은 우리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 말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의 죄와 허물, 질병과 가난과 저주와 죽음을 대신 짊어졌습니다. 정말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 깨닫고 보면 왔다입니다. 왔다에요. 보통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플러스인생을 살도록 해주시니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살아서 운행하고 역사하시는데... 제가 언제나 서양에서 우리 교회를 연구하러 온 목사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면 그 말을 합니다. 그 사람들은 꼭 묻습니다. 어떻게 교인들이 교회를 저렇게 꾸역꾸역 찾아오나. 우리 미국이나 구라파에서는 안 오는데... 교회 나오는 수가 날로 줄어들고.. 저렇게 많은 교인이 안 나오는데 어떻게 한국은 그렇게 나오느냐고 내가 하는 말은 좀 자세히 보세요. 저 사람들이 교회를 다 찾아올 때 기쁨이 충만하고 활기차게 들어오는 것을 보면 누가 같이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누가 같이 오느냐. 예수님이 같이 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함께 인생을 살아주기 위해서 오면 우리에게 의롭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의 홍수에 휘말려가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어떻게 의롭게 삽니까? 죄가 만연한데... 그런데 예수님을 플러스 인생으로 모시고 들어오면 예수님은 은혜로 공짜로 우리에게 의롭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의로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의로움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부끄럼 없이 나갈 수 있는 깨끗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격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의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지요. 그리고 또 거룩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거룩한 삶을 절대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허물이 많은 사람이라 나쁜 일 생각하고 나쁜 말하고 나쁜 일하고 나쁜 습관이 있고 이 나쁘다는 것을 재낄 수 있는 힘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같이 계시면 우리에게 나쁜 삶을 다 제하여 주시고 거룩한 삶으로 덧입혀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1절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성령이 우리를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해주시면 그 다음에 성령이 우리를 씻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물로 씻어 깨끗하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의롭다함을 얻고 거룩하게 되고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17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우리의 약한 것을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친히 담당해 주시고 그리고 우리 병을 대신 짊어져 주시는 것입니다. 한평생 병 없이 온전히 살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분들이 좀처럼 있지 않아요. 다 크고 적은 병을 앓게 돼요. 그런데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병을 대신 짊어져 주겠다. 이게 또 플러스 알파입니다. 병이 들면 예수께로 더 의지하게 되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병을 대신 짊어지게 되므로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 하는 것은 만족하지 못하지요. 복 받은 삶을 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만나면 인사할 때 복을 받으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God bless you.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진짜로 믿고 말합니까? 안 믿고 말합니까? 믿고 말하는 사람은 진짜 가까운 사람이고 그냥 말하는 사람은 습관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왜 습관적으로 말하느냐. 할 말이 없으니까 그 말이라도 하고 헤어지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우리 보고 내가 네게 복을 준다는 것은 진짜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 우리 다 같이 소리 내어 함께 읽어 보십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을 보고도 주님이 우리에게 복을 안준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이것을 보고도 예수 믿는 생활은 복 받은 생활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 알고 있어요? 잘못 알고 있었지. 예수 믿는다고 뭐 부자가 되겠노. 저는 핍박 많이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예수 믿고 하나님께서 복 준다는 말을 하다가 기복신앙을 전한다고 이단 삼단이라고 욕을 많이 얻어 먹었는데 참말을 가르치니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러니 사람들이 용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고 있거니와 예수님이 너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심은 자기가 가난해서 우리로 부요케 하게 하겠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요 하나님 아들로써 남의 집에서 늘 셋방살이로 살고 들과 산에서 잠을 주무시고 얻어먹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은 너희들 잘살게 하기 위해서 전셋집에 돈 주고 가는 것과 한가지입니다. 미리 너희를 위해서 부요의 축복을 예금해 놓고 가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뒤에는 예수님이 예금해 놓은 것이 많습니다. 여러분 찾아서 먹으라구요. 자세히 찾아보세요. 여러분 앞에 예금 통장이 있을 것입니다. 많이 저금되어 있어요. 발견하거든 여러분만 잡수지 않고 저도 좀 보내 주십시오. 우리는 플러스 인생으로 예수님과 함께 살면 예수님이 복을 우리가 누리며 살고 그 다음에는 가장 놀라운 것은 죽음이 다가와도 겁낼 것 없는 것은 천국 영생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서 사는 삶이 보장이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7장 17절에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눈물을 흘리면서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다시는 눈물이 없도록 만들어 주시겠다. 울지 않고 살 수 있도록 해주신다. 사람들이 가난하고 헐벗고 못살게 되면 마음도 약해져서 원망 잘나오고 눈물도 잘 흐릅니다.
2.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고 했는데 여러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생활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사는 이 생활 자체가 천당이 아닙니다. 여러분 집이 천당인 사람 한번 손들어 봐 주세요. 나도 좀 가서 배우려고... 천당이 없지 않습니까? 모두 다 우리가 사는 자체가 적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큰 죽음의 골짜기가 우리 삶인 것입니다. 삶 자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담대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역시 플러스 알파로 주님이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님이 함께 하시면 주님의 손에 있는 막대기와 지팡이가 같이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막대기는 뭡니까? 막대기는 짐승이 오면 치는 무기요, 지팡이는 뭐냐, 길을 찾아가는데 필요한 지팡이인 것입니다. 목자는 지팡이와 막대기를 가지고 짐승들이 오면 막대기로써 치고 보통 때는 지팡이로 가지고서 양들이 가는 길을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십자가 몽둥이와 십자가 지팡이로 함께 계신 것입니다. 짐승이 오면 마귀를 지팡이로 막대기로 치고 어려운 골짜기를 지날 때는 지팡이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는 우리와 같이 계신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하리라. 그날에는 너가 내 안에 내가 너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 성경만큼 우리와 같이 있겠다고 보장하는 가르침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사망의 골짜기인데 그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우리에게 주님이 오셔서 죄와 허물을 책임져 주신다. 우리가 죄를 짓고 허물 많은 인생들의 죄와 허물을 친히 책임져 주신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올 때 자기들이 무화과 잎사귀로써 앞치마를 해 입었습니다.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니 서로 부끄러우니까 앞치마를 해 입었는데 사람이 무화과나무잎으로 앞치마를 만들어 입으니까 햇빛이 나면 그만 쪼글쪼글해져요. 햇빛이 나면 쪼글쪼글 해져서 영원한 옷이 될 수가 없어요. 그와 같이 오늘날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쪼글쪼글해지고 마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이 무화과나무 잎사귀를 앞치마 해서 입고 나가도록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가죽을 벗겨서 가죽옷을 만들어서 입혔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고 나가는 사람에게도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고 가죽으로써 옷을 만들어 입혀서 반영구적인 옷을 입혀서 내보낸 것입니다. 상징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히기 위해서 상징적으로 이번에는 짐승을 잡은 것이 아니라 아들을 잡았습니다. 그 아들을 잡아서 그 의로운 옷을 벗겨서 여러분과 나에게 입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의 의로운 옷을 받아 입고 보혈로써 씻고 의롭게 되어서 나갈 수 있으니 주님께서 죄와 허물의 삶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로 3절에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하나님이 오셔서 죄와 허물을 사하시고 마귀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졌다는 것입니다. 공중에 마귀가 권세를 쥐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권세를 쥐고 있으면서 이 세상에 그 영향력을 미쳐서 모든 세상 사람들이 세속을 따라 살고 하나님을 따라 살지 않도록 악을 퍼부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따라서 사는데 예수를 믿으면 보혈로 씻어버리고 주님의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시고 우리와 같이 계시므로 우리는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망의 권세에서 건저내사 그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겼습니다. 여러분과 나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고 말하는 것이 다르고 행하는 것이 달라져서 두 종류의 사람이 세상에 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만 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질병과 저주의 삶도 예수님은 철저히 제하여 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저주를 받아서 쫓겨났기 때문에 저주란 무섭습니다. 아무리 일을 해도 살게 되지 않습니다. 늘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실패하고 낭패에 부딪히는 것입니다. 이 저주의 삶을 축복의 삶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무에 매달렸습니다. 저주받은 자는 나무에 매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하여 나무에 못박혀서 매달려서 저주를 청산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11절에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질병과 저주의 삶을 주님께서 대신 살아주었기 때문에 병들어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고침을 받아 건강해질 수 있고 저주도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것은 저주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주 트레이드마크가 붙었습니다. 너는 나 때문에 영혼이 잘된다. 범사가 저주에서 해방되어서 잘된다. 강건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흑암 가운데 살고 고난 중에 허덕이고 저주의 병이 날뛰어도 이 말씀 속에 서서 기록되었으되 하나님 말씀하시기를 내 영혼이 잘된다고 하기 때문에 나는 영혼이 잘된다. 범사에 잘된다고 하므로 나는 범사에 잘된다. 강건하다니까 나는 강건하다. 그 외에 다른 것하고 나는 타협하지 않는다. 나는 절대로 너를 따라가지 않는다. 여러분이 마음에 생각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에 영혼이 잘되는 것으로 생각이 점령당하게 하십시오. 범사가 형통하고 잘된다고 늘 생각하고 그것이 마음을 점령하게 하십시오. 언제나 나는 강건하고 건강하다는 것을 시인하십시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하늘나라 문화가 마음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성령이 와 계시므로 하늘나라 문화가 여러분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하고 틀린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혼이 잘 안됩니다. 범사가 고통스럽습니다. 여러 가지 질병에 걸려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우리하고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망과 음부가 다가와서 고통이 다가와도 언제나 여러분은 밝고 맑고 환하고 소망찬 인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세상 사람들은 탄식합니다만은 우리는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광풍을 피하는 것 같이 될 것이요 폭우를 가리우는 분같이 될 것이요 마른 땅에 냇물같이 될 것이요.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과 같다. 야~ 광풍이 불어 닥칩니다. 경제적인 광풍, 가정에 문제가 광풍처럼 생활의 문제가 광풍처럼 불어올 때 광풍을 피하는 곳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광풍을 피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께 부르짖으면 예수님이 여러분을 피하게 해주셔서 광풍을 피하는 것, 폭우를 가리우는 것, 폭우가 쏟아지면 도시가 물에 다 떠내려가고 물에 잠기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그러한 세상환난이 다가와도 우리에게는 폭우를 가리우리는 것이 될 것이요. 마른 땅에 모든 것이 말라 비틀어지고 죽는데 마른 땅에 시냇물 같은 분이 있다.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아주 초목, 곤충이 다 못사는 곤비한 땅에 바위 그늘이 되어서 우리를 피하게 해 주신다. 그러므로 여러분 플러스 알파 되어 가면 이러한 예수님이 곁에 따라 다니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광풍이 불어와도 겁나지 않고 폭우가 내려도 떠내려가지 않고 마른 시냇물이 없는 곳에도 시냇물이 흐르게 해주시고 곤비한 삶속에 쉴 수 있는 바위가 되어 주신다. 공짜다. 값없이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것입니다. 좋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알파로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죄와 허물도 겁나지 아니하고 질병과 저주도 겁나지 아니하고 사망과 음부의 삶도 겁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갈보리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주님은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안위해 주시고 바라봄의 법칙이 승리하는 것같이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광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고 탄식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불뱀을 보내어서 불뱀이 사람들을 물매 여기저기에서 수없이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그때 잘못했다고 모세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불뱀이 떠나게 해달라고 하니까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하니까 불뱀을 만들어가지고서 장대에 매달아라. 쳐다보는 사람마다 생명을 얻는다. 빨리 놋으로 불뱀을 만들어서 장대머리에 못으로 박아서 머리를 저기 쳐다보라. 저기를 쳐다보면 죽지 않는다. 뱀에 물려서 독이 올라 얼굴이 시뻘개진 사람도 얼굴을 들어서 그 뱀을 쳐다보면 다 살아났었습니다. 끝까지 뱀을 안 쳐다본 사람은 죽었습니다. 니고데모 보고 주님 하신 말씀이 그것인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만든 뱀을 쳐다본 사람마다 독이 다 나가고 살아난 것처럼 이 세상에서 나를 쳐다본 사람마다 다 살아난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우리를 보시고서 나를 보라. 다 이루었다. 내가 너희 죄도 다 값아 버렸다. 불의도 다 씻어버렸다. 너희 병도 내가 책임졌다. 너희 저주도 내가 갚았다. 너 죽음도 내가 짊어졌다. 다 이루었다. 사는 것만 남았다. 안 믿고 죽지 말고 믿고 살아라.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주여, 믿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으니까 어려울 때도 바라보고 슬플 때도 바라보고 외로울 때도 바라보고 고통스러울 때도 바라보고 좋을 때는 바라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슬플 때는 바라보고 위로를 받고 답답할 때는 바라보고 승리를 얻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에 이런 생활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이런 놀라운 비결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3. 원수의 목전에서 차려 주시는 밥상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살면 원수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인생은 생존경쟁으로 네가 사느냐. 내가 사느냐의 투쟁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경쟁자가 생기고 원수가 생겨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발상을 바꾸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꿔라. 인간의 생각으로써는 원수가 오면 저 원수를 그냥 죽여 버릴까. 저 원수 때문에 내가 통곡을 할까. 어떻게 할꼬? 어떻게 할까요? 나를 물고 찢고 손가락질하는 원수를 어떻게 할까요? 나에게 물건 갖다 주고 난 다음에 물건 값을 다 뽑아가 버리고 나에게 안 갚는 것 어떻게 할까요?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쥐어박아버리고 고소하고 강제로라도 보복을 하기를 원치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생각을 달리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가 오면 그것을 미끼로 삼아서 진수성찬을 차려주마. 그러므로 원수는 오히려 우리에게 밥상 가져오는 심부름꾼에 불과한 것입니다. 원수가 오면 밥상도 차려오거니와 원수가 안 오는데 밥상도 없습니다. 원수가 오면 그 원수가 여러분에게 고통을 갖다준 만큼 하나님은 밥상을 차려다주는 것입니다. 손해 안나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기름을 바른다는 것은 일을 잘되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공하게 만들어 주신다. 그러므로 원수의 공격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원수가 공격하면 하나님이 원수 보는 앞에서 우리를 더 성공하게 만들어 주셔서 원수가 기절초풍을 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5절에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환난이 오면 환난 때 주님께서 그것을 미끼로 삼아서 건져내고 오히려 여러분 영화롭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한번 과거를 돌이켜 보십시오. 고통당할 때 좋은 일도 많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고난은 좋은 일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좋은 일이 있기 전에 반드시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갑자기 좋은 일이 생겨나면 그 대가로 고통을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일만 있으면 좋은 일을 누릴 수가 없어요. 고통을 통해서 좋은 일이 생겨나면 그 좋은 일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알고 그 좋은 일을 누릴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늘날도 여러분이 하나님 아버지 부르시면 아바 아버지라고 불러라. 그렇게 말합니다.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굉장히 친밀하게 하루 종일 그림자가 몸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같이 계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로 버림 안 받으니까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
요한복음 14장 16절로 18절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또 다른 보혜사, 왜 또를 붙였습니까? 예수님이 내가 처음 보혜사고 그 다음에 성령은 또 보내시는 다른 보혜사다. 보혜사는 무엇이냐. 보혜사는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보내신 우리의 도우미가 보혜사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성령 도우미가 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첫 도우미로써 우리에게 와서 도와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부활해서 승천하고 난 다음에는 성령으로 보혜사로 오셔서 여러분과 나에게 예수님과 똑같은 도우심을 베풀어 주시면서 떠나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헬라어로 프뉴마라고 합니다. 프뉴마는 바람으로 해석하고 성령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휴~ 제가 숨을 쉬었습니다. 프뉴마를 쉬었습니다. 여러분도 숨을 한번 쉬어 보십시오. 휴~ 그 숨을 쉴 때 여러분 보통 공기를 느낍니까? 안 느끼지요? 자동적으로 숨을 쉬고 있지요? 건강할 때는 자동적으로 숨을 쉬고 숨이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성령은 프뉴마이기 때문에 성령이 여러분 속에 계시면서도 여러분이 모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안 보인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항상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성령님께 의지하십시오. 인격자이기 때문에 우리와 대화를 하면 대화를 해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성령님 함께 갑시다. Dear, Holy spirit Let''s go! Let''s go! 함께 가십시다! 그 말 꼭 해요. 오늘도 저 자리에서 일어나서 강단에 나올 때 Dear, Holy spirit Let''s go! 함께 갑시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니까요.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여러분이 도와달라면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해서 보혜사가 오고 보혜사 뒤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삼위일체로 와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여기 보십시오.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리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세상은 성령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세상에 같이 있느냐. 마귀가 세상 사람들하고 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성령을 못 받는 이유는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데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시며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님 나와 함께 계시지요? 우리 형제, 자매하고도 같이 있지 않아요? 아멘! 성령은 고요하고 잠잠하게 그를 바라보면 우리 생각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 속에 플러스 알파로 다른 생각이 떠오릅니다. 성령이 생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거라구요. 제가 설교할 때 더욱 느끼는 것은 한참 설교를 하는데 내가 계획도 아니하고 연구도 아니했는데 생각이 마음속에 숨소리처럼 싹 지나갑니다. 생각이.. 아, 성령이 이 말씀을 하라고 하시는구나. 그럼 내가 그 말을 해요. 하고나면 다시는 그런 생각이 안나요. 다른 생각이 떠올라와요. 그리고 중요한 논쟁을 할 때 성령님 나 논쟁을 하는데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논쟁을 하는데 내가 생각지 않은 말도 생각도 자꾸 떠올라와요. 그럼 그 생각을 붙잡아 내 논쟁하는데 사용을 하면 나중에 보면 기가 막힌 대답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들리는 목소리로 말하지만 성령은 우리 생각을 통해서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해놓으면 생각이 안정되고 잠잠하고 조용한 가운데 성령이 생각을 집어넣어 주면 우리가 잘 알아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번 따라 해주세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로다. 이 세상에 제일 무서운 것이 버림받는 것입니다.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 생활하는 사람 중에 60이 넘은 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십시오.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40대, 50대에는 한참 사회생활을 하다가 60대가 되면 은퇴하고 나오면 이제는 지위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지위를 따라서 찾아오던 사람들, 돈 보고 따라오던 사람들 다 떠나갑니다. 외로워지는 것입니다. 외로워짐이 제일 무섭습니다. 고독이 제일 무서운 거에요. 그런데 성령은 고독한 사람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예수님께 오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과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 여러분 외로울 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버리지 않고 천당 갈 때까지 손잡고서 가주시는 것입니다. 외롭지 않고 마지막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서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4.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
마지막에는 선하시고 인자하신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짧게 하겠습니다. 성찬 떼야 되니까.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야훼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내가 죽어도 천당에 가서 영원히 살 것이니까 마지막 인생을 절대 긍정적인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나는 못한다. 안 된다. 할 수 없다. 슬프다. 고통스럽다. 외롭다. 죽으면 절망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고 여러분은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기쁘다. 좋다. 행복하다. 나는 천국집이 만들어져서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28,32)
우리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와 같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해 주실 것이다.
<결론>
그러므로 오늘 예수를 믿는 사람들, 인본주의자는 패망하고 말 것이지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곳에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된 것을 늘 마음에 기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나를 버리지 않고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예수님, 나의 목자
시 23:1-3 / 조용기 목사
<서론>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예수님, 나의 목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양은 목자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다른 동물과 달라서 방어 무기인 날카로운 뿔도 없고 발톱도 없습니다. 그리고 공격무기도 없습니다. 목자가 항상 곁에 있어서 막대기와 지팡이를 가지고 지켜줘야지 안 지켜주면 언제나 사자나 곰의 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양은 시력이 대단히 근시여서 10m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목자가 반드시 인도해줘야지 안 그러면 언덕에 떨어지든지 벼랑에 떨어지고 뒹굴고 다치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자가 반드시 양은 지키시고 이끌어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에 비유되고 예수님이 목자로 비유되는데 우리가 예수님 따라서 살기 위해서는 항상 예수님을 절대 믿고 순종해야 되는데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스스로 보호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이 너무나 사납고 무섭기 때문에 세상과 같이 싸울 수 없습니다. 또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루하루 살고 있을 따름입니다. 내일 일을 잘 아는 예수님께 우리 일생을 맡기고 또한 우리를 지켜주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나가면 안전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렸잖아요. 양들을 사랑하는 것은 말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찢어주시고 피를 흘려 주시기까지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목자로 모셨으면 우리 마음속에 항상 외워야 될 것은 내게 부족함이 없이 해주시는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외워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주님이 선한 목자로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에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족한 대로 내버려 놓지 않기 때문에 항상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을 가지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있게 해주신 것을 기대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생각이 긍정적이 되어야 되고 꿈이 긍정적이 되어야 되고 믿음이 있어야 되고 입술로 긍정적으로 고백해야 되기 때문에 없는 것도 있다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예비해 주시기 때문에 선한 목자가 있으므로 없는 것도 있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하나님이 충분히 있는 것을 공급해 주는 꿈을 꾸고 믿고 입술로 나는 가지고 있다. 축복 받았다. 나는 모든 것이 풍족하다. 부족함이 없다고 긍정적으로 말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목자 되신 예수님이 그런 양들을 돌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하든지 태어날 때부터 없는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없습니다. 힘도 없다. 능력도 없다. 건강도 없다. 청춘도 없다. 돈도 없다. 집도 없다. 남편도 없다. 아내도 없다. 자식도 없다. 전부 없는 것만 바라보고 없는 것을 생각하고 없는 것을 꿈꾸고 없는 것을 믿고 없는 것을 입으로 말하고 사는데 그러면 언제나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우리 목자가 있기 때문에 있다고 늘 생각하고 목자가 계시기 때문에 있는 것을 꿈꾸고 목자가 있기 때문에 있게 만들어 줄 줄 믿고 목자가 계시기 때문에 나는 모든 부족함이 없게 된다고 입으로 시인하면 그러한 사람에게 목자는 부족함이 없도록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부족함을 가지고 사는 것은 참 괴롭습니다. 그러나 목자인 예수님이 계시면 부족함이 없도록 주님이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푸른 풀밭에 누이심
그는 우리의 풀밭은 십자가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풀은 풀밭에 누이신다고 말했는데 우리 풀밭이 어디 있느냐고 찾을 필요 없는 것은 십자가 밑이 우리 풀밭인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푸른 풀밭을 만들어 놓았는데 무슨 풀밭이냐. 아무리 죄를 지었어도 용서와 의의 풀밭을 만들어 놓아서 십자가 밑에서 용서를 먹고 의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거룩함과 성령충만의 풀밭이 있습니다. 거룩하게 되고 성령충만하게 된 은혜를 먹을 수가 있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의 풀밭입니다. 저주에서 해방되고 형통의 풀을 먹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치료와 건강의 풀밭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가 나음을 얻었다고 우리는 치료를 받고 건강을 얻어서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부활 영생 천국의 풀밭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밑에서 주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부활하고 영생천국을 얻는 약속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느 곳에 가든지 세상 사람이 모르는 푸른 풀밭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알 수가 없어요. 십자가도 모르고 예수도 모르기 때문에 어디에 무슨 풀밭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항상 주님께서 예비한 풀밭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용서받고 의롭게 된 풀밭이 있어요. 거룩하고 성령 충만한 풀밭이 있어요. 저주에서 해방되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풀밭이 있어요. 치료받고 건강을 얻는 풀밭이 있어요. 부활 영생 천국의 풀밭이 있어요. 그것을 예수님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항상 바라보고 항상 감사하고 항상 풀밭이 있다고 주장하고 기도로써 구하면 그대로 주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풀밭이 있는데 주님께서는 이 풀밭에 우리를 누이시는 것입니다. 그냥 풀밭에서 네 마음대로 있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의지하면 누이신다는 것은 만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양들이 여러분 풀밭에 누울 때는 짐승의 공격이 없을 때 눕게 되고 충분히 먹었을 때 눕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풀밭에 눕게 하실 때는 모든 짐을 맡아 주겠다고 할 때 풀밭에 우리가 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있는데 어디 누워서 빈둥빈둥 놀 수가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다 맡아 주실 때 우리는 풀밭에 누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주님께 항상 무거운 짐을 맡겨야 되는 것입니다. 농구 시합을 할 때 농구선구들이 볼을 끊임없이 던지지 않습니까? 볼이 오면 또 받아서 케이지를 향해서 던지고 던지는 것처럼 여러분 예수님 앞에 무거운 짐을 자꾸 던지십시오. 오면 또 던져 놓고 또 오면 던져 놓고 그래서 짐을 하루에도 수십 번 맡기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편안하게 쉬도록 눕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은혜의 손길로 우리를 돌보아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사야 40장 11절에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은혜의 손길로 돌보아 주시고 부족함이 없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은 예수 믿는 생활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려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제일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생활을 하고 나니까 나만 괴로울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도움이 필요한데 도울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경에는 너희가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족함이 없게 축복을 해주시므로 우리가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올바르게 먹으면 주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살펴보시고 우리를 통해서 축복을 준비하고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 목자를 알아야 우리 마음속에 평화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무가 뿌리가 없으면 흔들리고 언제 넘어질지 모르잖습니까? 우리는 뿌리가 있어야 되는데 세상 사람들은 뿌리가 없어서 늘 흔들리지만 우리는 뿌리가 있기 때문에 뿌리에 의지해서 믿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토비 도슨이라는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프리스타일 스키에서 동메달을 딴 한국계 미국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981년 2살 때 부산 시장에서 엄마를 잃어버리고 미아가 되어 울고 다니는 것을 미국 콜로라도에 있는 스키 강사 부부가 입양을 해서 거기에서 자라났습니다. 한국계 미국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스키를 열심히 연습해 가지고서 올림픽에 동메달을 땄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는 마음이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뿌리를 알 수 없습니다. 양부모는 좋지만 자기 친부모가 누군지 모르니까 늘 불행했습니다. 그런데 2007년, 그는 한국에 와서 매스컴의 도움을 받아 오랫동안 못 봤던 아버지를 26년만 만났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평생에 그렇게 마음에 흡족하고 만족하기는 처음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자기를 버린 아버지인데 아버지가 키우지도 못했는데 아버지를 만나자 그렇게 마음이 흡족하고 편안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뿌리를 찾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인간 존재의 뿌리인 아버지를 찾은 것입니다.
초대 교부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당신 품에 안기기까지 내 영혼은 언제나 불안에 떠나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뿌리가 없으면 불안해요. 공포가 늘 마음에 있어요. 그러나 뿌리가 있으면 내가 뛰어가서 의지할 수가 있어요. 여러분의 뿌리는 하나님 아버지인 것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야훼께로다. 야훼가 여러분 뿌리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뿌리에게로 뛰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붙잡고 있으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홍수가 나도 떠내려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자 되신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참된 평안과 안식을 얻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은혜의 손길로 돌보아 주시고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항상 마음속에 부족함이 없다는 그러한 인식을 가지기 바랍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삽니다. 그가 나의 목자이기 때문에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 그러므로 아침에 일어날 때도 나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다가 점심때도, 저녁때도 나는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산다고 그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삶을 산다고 생각해야 되고 그리고 마음속에 항상 꿈꾸고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꿈꾸어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어야 돼요. 눈에는 아무 증거 안 보이고 믿어야 돼요. 그리고 입술로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함이 없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의로움에 부족함이 없다. 거룩함에 부족함이 없다. 건강에 부족함이 없다. 축복에 부족함이 없다. 천국에 부족함이 없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이것을 다 채워 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밑에 목장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와서 누워서 안심하고 주님의 은혜의 손길을 붙잡고 살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은 대로 살면 정말로 너무나 귀하고 놀라운 삶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같이 계신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말로 형용할 수 없습니다.
2.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심
그 다음에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솟아나는 생수가 있습니다. 십자가 밑에 나가면 말씀의 생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생수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성령도 생명수 아닙니까? 십자가 밑에 하나님 성령이 내려오시는데 요한복음 7장 37절로 39절 다같이 읽어 보십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성령이 오시면 마음속에 생수가 또 넘쳐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7절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여러분, 목마르다는 것은 참 고통스럽습니다. 저녁에 홀로 앉아 있을 때 마음에 버림받은 심령, 마음의 고독,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공포가 마음을 휘돌아 갈 때 마음 깊이 의지할 곳 없는 슬픔이 강물처럼 흐를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왜 자살하느냐. 자기 마음으로 자기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슬프고 너무나 외롭고 너무나 캄캄하고 그러므로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 주님께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주여,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고 성령으로 위로해 주시옵소서. 부르짖을 때 성령께서 내려오셔서 말씀으로 위로해 주셔서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고 평안이 생기고 감사가 생겨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체험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죽을 것 같은 마음이 새로워지고 살 용기가 생기고 희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어디냐. 행복이란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고 감사가 있어야 행복한 것입니다. 그 행복은 주의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들 통해서 행복을 얻으려고 하면 실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 나가서 짐을 풀어 놓고 내가 죄를 회개하고 내 마음속에 행복을 허락해 달라고 부르짖어 기도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기쁨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소망과 감사를 부어 주시면 앉아 있으면서 마음이 달라지고 일어나서 춤을 추고 싶은 생각이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닌 것입니다. 은혜의 강물이 우리 마음속에 넘쳐나는 것입니다.
수가 성 우물가의 여자 보십시오. 그는 남편을 5명이나 가졌다가 6번째 남편하고 살 때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고 조롱하니까 아침에 물 길러 오지 않고 대낮에 길러 왔습니다. 사람 없을 때.. 그때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앉아 계시다가 이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하고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물 좀 달라고 하니까 어떻게 당신이 유대인으로써 사마리아 여자 나 같은 사람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물을 마시면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은 인생의 삶의 행복을 추구하는 간절한 열망을 가진 여자로서 남편을 5명이나 갈아재끼고 6번째 살 정도 같으면 보통 여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하기를 네 남편 데리고 오너라 하니까 남편이 없습니다. 네 말 맞았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다 차버리고 여섯 번째는 남편 아닌 오다가다 만난 남자 데리고 있다. 그래가지고서 네 마음속에 외로움과 고독함과 슬픔과 좌절과 절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주는 생수를 마시면 남편 다섯을 갈아치우지 않아도 마음에 만족이 온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드러내시고 그 여자에게 생수를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당장 달라졌어요. 물동이를 두고서 너무 좋아서 사마리아 시내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피하던 사람들에게 와보라.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 내가 남편 5명이나 갈아재낀 것도 다 알고 계시더라. 나는 축복을 받았다. 그래가지고서 사마리아에 모든 사람들이 그 여자를 따라 나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마리아에 더 있어달라고 간청을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수를 주시면 만족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수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저는 50년 동안 목회하면서 많은 어려움을 당해서 사는 것이 무엇인가 회의가 들어올 때가 많았습니다. 예수 믿는 목사이면서 어떤 때는 혼자 앉아 있는데 마음에 염려와 근심이 짓누르고 슬픔이 꽉 들어차고 다 버림받은 고독한 인생을 혼자 사는구나. 살아갈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 생각이 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럴 때 언제나 십자가 밑에 나가서 예수님 바라보고 내 마음속에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 내 마음이 외롭고 고독합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이 슬픔과 이 고독과 이 외로움과 이 좌절감을 주님이 채워주시고 주님이 돌보아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면 희한하게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희한하게 마음이 싹 달라지고... 안정이 되고 사는 즐거움이 마음속에 회복되는 것입니다. 목사인 나도 그런데 일반 평신도인 여러분이 그런 것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저주받은 세상이요,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이라. 반드시 그런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계시므로 예수님을 잊지 말고 예수님께 찾아가면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께는 언제나 쉴만한 물가로 가서 물을 마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면서 좌절하고 낙심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이 언제나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심
셋째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영혼을 소생시키는 것입니다. 살려내는 것입니다. 지치고 피곤하고 낙심된 영혼을 다시 살려 일으키는 것입니다. 낙심되고 좌절된 사람이 주님께 엎드려 기도하고 난 다음에 생수를 받아 일어날 때가 많지 않습니까?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시편 103편 1절로 5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야훼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독수리는 한 70년 삽니다. 그런데 독수리는 40년이 되면 환갑이 와요. 독수리는 환갑이 오면 환갑 때 산위에 가서 바위에 앉아서 부리로 바위를 쳐서 부리를 뽑아 버립니다. 그리고 바위에서 발톱을 때려가지고서 발톱이 다 빠져 버립니다. 그리고 뒹굴어가지고서 날개가 다 빠집니다. 알몸이 되어서 태양을 바라보고 먹지도 않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둥이가 새로 나와요. 발톱이 새로 나와요. 털이 새로 나와요. 청춘이 새로워져서 그 다음에는 힘차게 하늘을 향해서 날아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은 30년을 독수리가 새롭게 되어 사는 것처럼 여러분 독수리가 새로워지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앙망하고 기다리면 그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사이는 70년 평균 살고 80년, 90년, 100살까지도 산다고 하는데 살아도 기진맥진해서 살면 안되잖아요.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같이 살기 위해서는 주님께 예배드리고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을 앙망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독수리가 태양을 바라보고 있을 때 주둥이가 새로 생겨나고 발톱이 생겨나고 털이 새로 생겨나는 것처럼 여러분에게 새로운 믿음, 소망, 사랑, 의, 평강, 희락이 생겨나며 용기와 힘과 사랑과 행복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독수리같이 하나님을 바라보면 요한삼서 1장 2절처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영혼이 잘되는 역사가 일어나고 범사에 잘되는 것이 일어나고 강건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사야 58장 11절에 있는 말씀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야훼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하나님을 앙망하고 예배드리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에게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 주는 것은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사야 32장 1절로 2절에 있는 말씀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보라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며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하나님을 앙망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해주시는데 예수님께서는 광풍을 피하는 곳이다.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광풍이 불어옵니까? 예수님 안에서 광풍을 피해서 마음에 평안을 얻게 되고 폭우를 가리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폭우를 주님 가리워 주셔서 우리가 물에 떠내려가지 않게 만들어 주시며 마른 땅에 냇물 같아서 마른 땅에 냇물이 없으면 모든 생물이 다 죽는데 마른 땅의 냇물 같고 곤비한 땅에 바위와 같다. 쉴 곳이 없는 곳에 뜨거운 곳에 바위 그늘에 쉴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것, 마른 땅에 냇물 같고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아서 우리가 주를 앙망하면 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겠다고 우리 하나님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성경을 통해서 알고 알고서 이를 기도하면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슬하에서 내 영혼이 새로워져서 하늘로 날아올라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해서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의라는 것은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게 만들어 주는 힘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혈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의의 선물을 주셔서 죄를 지은 적이 없는 것처럼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의 선물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로 10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우리들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직접 의롭게 만들어 주시고 의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갈 동안에 죄를 이기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역사해 주셔서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죄를 멀리할 수 있는 용기와 힘도 주시고 죄와 끈도 끊을 수 있는 힘도 에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힘으로는 안됩니다. 목자가 우리를 도와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예수가 없으면 이 세상에 아무리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부귀나 영화나 돈이 있어도 외롭습니다. 가장 큰 이 세상의 고통 중의 하나가 외로움입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외롭고 권세 있는 자는 권세 있는 자대로 외롭고 사람들은 다 우리를 손가락질하고 정죄할지라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한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거듭거듭 용서하시고 제2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우리와 같이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므로 우리를 늘 푸른 초장에 눕게 하셔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은 주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아예 주님께 한번 의지해 보십시오. 죽을까 싶어 오지를 못하는데 죽으면 죽겠다고 하고 맡겨버리면 주님이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께 맡겼다가 안 돌봐주면 나만 손해보지 않느냐 그렇게 하는데 아예 손해 볼 요량하고 맡기십시오. 아예 죽을 요량하고 맡기십시오. 옛날에 내가 어릴 때 우리가 아버지가 마루 끝에 서있는 나를 보고 용기야 뛰어라! 뛰어라! 내가 안아주마. 내 생각에는 아버지가 안 안아주면 나는 떨어져서 박살날 것이다. 그래서 내가 못해요 그러니까 아버지를 안 믿느냐?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는 것 알지? 그러므로 뛰어라. 그래서 내가 우리 아버지 보고 아버지 나 뛴다! 하나, 둘, 하나, 둘 아 못 뛰어! 내가 안아줄테니까 뛰어라! 하나, 둘, 하나, 둘 아이구 나는 겁이 나서 못해. 아버지가 나중에 화를 내십니다. 내가 너의 아버지라는 것을 모르느냐? 뛰어라! 그래서 나중에는 눈 딱 감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각오를 하고 뛰니까 아버지가 덥썩 받아주시더라구요. 한번 받아주니까 그 다음에는 아버지만 있으면 아버지 나 뛴다~ 뛴다! 아버지가 뛰어와서 안아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어떻게 믿느냐. 죽기 아니면 살기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하나님 믿는다고 불꽃 가운데 던져 넣겠다 했는데 나중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불꽃 가운데서 건져내 주실 것이요. 안 건져 내주더라도 우리는 우상에 절하지 않겠다. 믿음을 믿을 때 죽기 아니면 살기로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십일조 드리고 교회 성수주일하고 그 다음에는 주님께 내어 맡기게 되기를 내 삶을 다 내어 맡기고 주님께서 푸른 초장으로 이끌 것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행복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고독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워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동정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은 여러분을 이해, 동정, 사랑할 수 없지만은 주님은 이해하고 동정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걸머지실 때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고 슬프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여러분의 처지를 다 아시고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도움을 베풀지 않고 구해야 주시는 것입니다. 구하지 아니하면 안 주시는 것입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구하면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항상 주님이 목자되신 것을 마음속에 생각하고 목자가 여러분을 이끌어 가는 것을 꿈꾸고 믿고 입술로 시인을 해서 시편 23편을 늘 외우십시오. 저는 하루에도 몇 번이고 시편 23편을 외우는 것입니다.
저가 나의 목자가 되어서 푸른 초장에 눕게 하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셔서 내 마음속에 위로를 받고 나를 의롭게 소생시켜 주셔서 전인구원을 주시고 성령으로 이끌어 주시는 이 주님이 계시므로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빽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 때도 훌륭한 빽이 있으면 여러분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습니까? 자식들도 부모가 있을 때 마음이 든든하고 좋지 않습니까? 그와 같이 이 세상 사회에서도 연줄이 있어 사람들은 대학교나 고향이나 씨족사회 줄을 잡으려고 애를 쓰는데 우리에게 제일 좋은 줄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위해서 십자가를 걸머지신 사랑하는 주님이시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아들로써 우리를 동생들로 만들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맏아들로 삼기 위해서 이 땅에 보내시고 여러분과 나를 예수님의 동생으로 다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똑같이 구원을 받고 예수님과 같이 하늘나라에 올라가서 살 사람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귀한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 오셨습니다.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저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러분께서 예수 그리스도 목자와 함께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시여, 우리의 목자가 되셔 지금도 우리 가운데 와 계심을 감사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 가운데 와 계시며 우리가 믿음으로 주를 따를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돌보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푸른 초장에 누이시는 주님, 우리 모두다 이끌어 푸른 초장에 누워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만들어 주시옵시고 쉴만한 물가에 나가서 마음에 안식과 휴식과 행복을 얻게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힘으로 의롭게 살 수 없사오니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의롭게 살 수 있는 힘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불러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을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같이 사랑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 모든 우리에게 기적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1)
시 23:1-3 / 조용기 목사
뉴질랜드는 양의 수가 인구 수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또 그곳에는 목자가 필요없습니다. 전 국토가 목초지이고 사나운 짐승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냥 양을 방목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습니다. 국토의 대부분이 메마르고 험해서 물이 귀하고 목초지가 많지 않으며 사나운 짐승도 많습니다. 그곳에는 목자의 도움이 없이 결코 양이 살아날수가 없습니다. 목초와 샘물은 목자가 찾아내어야만 하고 밤낮으로 목자가 양무리와 함께 해야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은 이스라엘의 양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목자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시편 23편에는 ‘여호와는 목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여호와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 목자께서 우리를 어떻게 돌보십니까?
1. 푸른 초장에 누이심
오늘날 우리의 푸른 초장은 어디입니까? 갈보리 십자가 밑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서 가꾸신 것이 바로 십자가 밑의 푸른 초장인 것입니다. 푸른 초장에는 우리가 먹고 자라날 수 있는 놀라운 은총의 축복이 있습니다. 푸른 초장에서 어떠한 은총을 우리가 받을 수 있습니까?
첫째 죄사함과 의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목자 예수님이 만드신 푸른 초장에 가면 그 보혈로 말미암아 이루어 놓으신 목초가 있습니다.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용서와 의와 영광과 화목을 얻는 놀라운 영양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둘째 거룩한 초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초장 밑에 가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과 마귀를 다 내어 쫓으시고 거룩함과 성령충만을 주십니다. 셋째 치료의 초장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신데 치료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밑에 있는 초장에 치료의 목초가 자라게 하신 것입니다. 넷째 형통의 초장을 발견합니다. 이 세상은 가난의식, 패배의식, 절망의식으로 꽉 들어 찹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예비한 초장은 우리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시는 초장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아브라함의 축복을 주시는 초장인 것입니다. 다섯째로 영생복락의 초장입니다. 우리가 다른 곳에 가서 보면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지만 십자가 밑에 가면 죽음은 삶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벗어버리고 새사람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영광 가운데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생복락의 초장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 밑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 마련한 초장을 항상 기도로써 방문하고 거기에 주님이 예비한 오중복음의 은혜의 풀을 늘 마음속에 믿음으로 받아 먹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2.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심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마음에 기갈이 다가오고 목마름이 다가옵니다. 행복과 평화의 기쁨의 목마름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들의 목마름을 채워주십니다. 목마른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마시면 뱃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납니다. 이 생수의 강은 바로 성령의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와서 구하여 생수의 강을 체험하면 그 생수의 강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세속에 때묻고 죄악이 우리를 붙잡지 않습니까? 가는 곳마다 죄악이 발목을 잡고 세속의 때가 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능으로 의롭게 살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생수를 마시면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생수는 평강의 생수입니다. 세상에 염려와 근심 바람이 불어오지 않습니까? 마음에 불안과 초조가 꽉 들어찹니다. 그럴 때도 주님 앞에 엎드려서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하고 성령을 향하여 입을 넓게 열면 우리의 지각을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성령으로 우리 마음속에 채워주는 것입니다. 이 성령이 우리를 채워주는 평안 때문에 이 불안한 세상 속에서도 평안하게 살 수 있고 불안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목자가 생수를 주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목자장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희락의 생수를 주십니다. 인생들이 얻는 부귀, 영화, 공명을 통한 기쁨이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성령이 우리 갖다주는 희락, 이것이 있어야 삶의 참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주셔서 우리를 하늘 나라 체험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의의 생수가 흐르고 평강의 생수가 흐르고 희락의 생수가 흐르도록 우리 목자께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수는 마시고 나면 목마르지 않습니다. 세상 물은 마시면 또 목마르고 또 목마르지만 주님이 주시는 생수는 끊임없는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갖다줍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생수는 포도주와 젖이 되는 것입니다. 포도주는 기쁨을 줍니다. 그리고 젖은 우리가 마음에 영양실조를 면하게 해줍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시면 우리에게 취할 정도로 기쁨을 주시고 마음에 영양을 공급해 건강한 심신을 가지고 살게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목자가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되신 예수께 나아가서 그를 구하면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3. 영혼을 소생시킴
너무나 힘든 일을 하고 지치거나 더위나 추위에 고생하면 기운을 잃고 마음이 완전히 퇴락해집니다. 그때 충분한 영양분과 휴식을 취하면 소생하지요. 오늘날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지치고 피곤하고 낙심한 우리들을 소생시켜 주시는 역사를 합니다.
예수님 목자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사 기도하게 하므로 소생시켜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사 세속에 찌들고 죄악에 빠진 우리들을 회개하게 하시고 통회하고 자복하게 하시므로 우리의 영과 마음을 소생시켜 주신 것입니다.
다시 살아 일어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위기에 처했을 때 마음을 고치시고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생명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때문에 늘 말씀을 가까이 해야 됩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은 사람은 마음이 병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영양실조가 걸리고 더 악화가 되지요. 이러므로 말씀의 떡을 먹어야 우리가 소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인데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 아니십니까? 생명의 떡을 먹으므로 우리가 주리지 않게 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했는데 우리 영혼이 사는 떡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살면서 지치고 피곤한 우리의 심신을 기도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소생케 해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다시 용기와 힘을 얻게 해주는 것입니다.
4.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심
우리 한국에서는 옛날에 훌륭한 가문에 태어나면 그 가문을 위해서 자식들을 엄하게 교육시켰습니다. 가문을 위해서 엄하게 교육하지요. 하물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을 때 우리를 내동댕이쳐 놓고 키울 줄 압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 때문에 그 이름을 따라 자녀가 된 우리들을 의의 길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다 허물과 죄로 죽어서 마귀의 밥이요, 마귀의 종으로 살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살려주셔서 하나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목자되신 예수님은 새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십자가에서 지음받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또 성경은 썩어질 구습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옛사람은 아담의 성품,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은 별도리 없이 세속의 썩어진 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스스로 우리가 새롭게 못하지요. 오직 예수를 믿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 놀라운 능력을 통해서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은 살아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따라 지음을 받은 새사람을 우리들에게 입혀 주십니다. 죄와 사망의 누더기 옷을 벗기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을 입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늘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어야 됩니다.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로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믿음은 느낌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의지로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입술로 시인하십시오. ‘나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지내고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다. 마귀야 나는 새사람이 되었다. 누더기를 입고 썩어진 구덩이에 들어가 있지 않는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새사람이 되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산다. 사단아 물러가라’고 입으로 강하게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생각이 달라지고 믿음이 달라지고 바라봄이 달라지고 입술의 고백이 달라지면 새롭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양들로서 우리의 목자 되신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기르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목자가 누군지 알아야 양들이 목자를 따라가며 목자의 손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좋은 목자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이 목자앞에 우리가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목자를 바라보고 목자를 따라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좋은 목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이끌어 주시고 승리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2)
시 23:4 / 조용기 목사
이스라엘의 유다 광야에 가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엄청나게 거대한 계곡이 있습니다. 그 계곡의 변두리에 서서 계곡 아래를 내려다보면 정신이 아찔하고 현기증이 납니다.
그곳은 떨어져서 살아남는다 해도 다시 올라올 수 없는 험악한 계곡입니다. 다윗은 그 계곡을 비유해서 인생이 그처럼 위험하고 절망적인 골짜기를 지난다고 할지라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은 그 계곡을 지으신 주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고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왔고 또 지나갈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생의 목자로 모신 사람은 두려움이 없이 지날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 요셉이 체험한 사망의 골짜기
구약성경을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온 대표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17살에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벌거벗김을 당하고 마른 우물에 던져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형들이 그를 죽이려고 마른 우물에 던졌는데 그 우물안에는 요셉만 있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같이 계시지 않으셨으면 그 우물은 물이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원래 우물은 물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이 없는 마른 우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형들은 아라비아 대상이 오는 것을 보고 요셉을 우물에서 건져내어서 아라비아 대상에게 은 20냥에 팔았습니다. 종으로 팔려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사람들이 보기에는 요셉이 벌거벗은 몸으로 혼자 종으로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확신과 평안인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함께하신다는 이 신앙이 우리에게 큰힘이 되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이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10년 동안 종살이 할 때도 주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창세기 39장 2절로 4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으로 있는데도 주께서 함께하시므로 요셉은 형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종살이 한다고 버림받아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여호와를 경배하고 섬겼기 때문에 종살이라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하나님이 같이 하셔서 형통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형통케 하는 것입니다. 좋을 때만 형통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내려가는데 그 골짜기 속에서도 형통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요셉은 종살이 10년 동안 형통하게 되어서 그 주인이 가정총무로 삼았습니다. 지위가 높아지고 생활이 편안하게 될 때 그는 불행하게도 또 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9장 7절로 18절에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처에게 이르되 나의 주인이 가중 제반 소유를 간섭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임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그가 요셉이 그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질러 부름을 듣고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그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이 말로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코자 내게로 들어 왔기로 내가 소리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꾀어 동침하기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면 우리의 생활을 형통케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보디발의 아내가 눈짓을 하고 유혹을 하는데 눈 딱 감고 모른체하고 악행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는 것같이 모시고 살았습니다.
하루는 주인 집에 사무를 보러 들어갔다가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끌어안고 동침하자 하매 도망을 치는데 그만 그의 옷이 벗겨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요셉이 겁간하러 왔다고 고함을 치니 옷을 벗어 놓고 달아났다고 모함을 했습니다. 그리고 퇴청한 보디발이 이 사실을 듣고 대노했습니다. 아마 요셉을 안 죽을 만큼 때리고 짓밟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시위대 뜰에 갇혔습니다. 이렇게 억울하게 맞고 시위대 뜰에 들어갔으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이럴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주님이 요셉과 같이 계셨습니다.
창세기 39장 20절로 23절에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 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감옥에서도 형통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요셉은 3년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감옥에 있는 동안 애굽 바로의 떡 장관과 술 장관이 범죄해서 시위대 뜰 감옥에 들어왔습니다. 그때 요셉이 그들을 시중들었고, 그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는데 꿈대로 떡 장관은 교수형을 당하고 술 장관은 다시 지위가 복구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꿈을 꾸었습니다. 한번은 살찌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와서 나일강에서 풀을 먹고 있는데 그 뒤에는 파리한 일곱 암소가 나와서 그 살찐 암소를 다 잡아 먹고도 역시 파리했습니다. 잠을 깼다가 또 꿈을 꾸었는데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와 있는데 쇠약하고 동풍에 마른 일곱 이삭이 나와 풍성한 이삭을 다 잡아 먹고도 역시 쇠약했습니다.
잠에서 깬 바로가 이것을 해석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을 때 그 술 장관이 시위대 감옥에 갇혔을 때의 일을 이야기하며 요셉을 추천했습니다. 그래서 바로가 요셉을 데려오게 하매, 바로의 앞에 선 요셉이 바로의 꿈을 멋지게 해석했습니다. 이 꿈은 애굽에 임할 7년 풍년과 7년 흉년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대책까지 말을 해주었습니다.
요셉의 해석에 감동한 바로가 ‘이렇게 지혜있고 총명하고 여호와의 신이 함께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 너를 국무총리로 삼노라’라고 발표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니까 인생의 고난이 합력하여 유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만 바라보면 좌절하고 절망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와 함께 계셔서 범사에 형통케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요셉이 뭐라고 간증했을까요? 형들이 애굽에 더부살이 왔을 때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뜨자 겁을 내어서 요셉에게 간구하매 요셉이 ‘두려워 마소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캄캄한 동굴에 있더라도 하나님은 동굴을 터널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크고 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다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알아야 될 것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들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들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다 떠나도 주님은 함께 계셔서 악을 선으로 변화시키는 역사를 하십니다.
2. 바울이 체험한 유라굴로의 풍랑
바울이 유대에서 잡혀 로마의 백부장 율리오에 의해 다른 죄수들과 함께 로마로 압송되어 갔습니다. 그들이 지중해를 항해할 때 미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계시를 받았습니다. 사도행전 27장 9절로 10절에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행선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저희를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가 있으리라 하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율리오에게 풍랑을 경고하며 겨울을 지나고 가자고 권고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 율리오는 바울의 말보다 선장의 말을 더 들었습니다. 아무리 선장이 경험이 많고 항해 지식이 많다 해도 하나님이 바울에게 계시적인 지식을 말했는데 바울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백부장 율리오는 선장의 말을 더 듣고 죄수 바울의 말을 무시하고 항해를 계속하다가 유라굴로라는 거대한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7장 14절로 20절에 “얼마 못되어 섬 가운데로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대작하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끌어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저희 손으로 내어버리니라 여러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폭풍을 만난 그들은 이틀만에 짐과 배의 기구를 모두 던져 버리고 정처없이 풍랑에 밀려갔습니다. 하늘은 칠흑같이 어둡고 해와 달과 별은 보이지 아니하고 파도는 치고 모든 사람들이 토하고 토하다가 이제는 토할 것도 없고 기진맥진해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센 풍랑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바울이 그곳에 탔으므로 주께서 함께 계셨습니다. 주의 사자가 바울에게 나타나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사도행전 27장 21절로 26절에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러나 우리가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 밑에 파도는 치고 배는 파선위기에 있는데 놀라운 빛이 비추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함께 계시는 주님께서 바울에게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다스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그 배가 파선하지 않고 멜리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추워서 불을 붙일 때 바울이 수풀을 들어 불에 던지는데 그 속에 있던 뱀이 뜨거우니까 나와서 바울의 손을 물었습니다. 그 뱀은 아주 지독해서 물리면 당장 독이 올라 넘어져 죽는데 바울은 조금도 상처입지 않고 죽지 않으니까 사람들이 바울을 달리 생각하게 됐습니다. ‘저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고 생각하며 아파 누워있던 그 섬 추장의 아버지를 고쳐줄 것을 간청해 바울이 안수해서 낫고 병자들이 나으매 융숭한 대접을 받고 그들은 다 다른 배로 로마까지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때 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주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8절로 9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같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3.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할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될까요? 주께서 항상 함께 계심을 생각하고 그것을 굳세게 믿고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는 것같이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늘 바라보고 그리고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0절에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주님이 계신 주소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소는 여러분의 주소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그 처를 같이 하겠다고 하셨으니 우리가 외롭게 버림받지 않는 것은 확실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는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십니다. 때문에 이 지식을 우리가 마음속에 간직해야 되는 것입니다. 불안과 공포를 믿지 말고 이 지식을 따라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서 늘 주님이 같이 계신 것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됩니다. 그리고 입술로 강하게 시인해야 됩니다.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는 것입니다. 입술로 시인하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강하고 담대하게 하여 해를 두려워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른다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죄만 지어서 형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면 그 두려워하는 대상으로 말미암아 형벌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병을 두려워하면 그 형벌로 병이 들어옵니다. 가난을 두려워하면 그 형벌로 가난이 옵니다. 낭패와 실망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면 우리의 삶속에 낭패와 실망이 다가옵니다. 내가 속으로 두려워해도 좋고 안 두려워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입니다. 두려움에는 그에 따른 형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절로 7절에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늘 외웁니다. 두려움이 다가오면 그 두려움에 상대해서 ‘두려움아 물러가라.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하나님이시니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이 내게 어떻게 하리요. 천인이 내 곁에서 만인이 내 곁에서 넘어지나 이 재앙이 내게 가까이 오지 못하노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일점일획도 변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알고 믿고 바라보고 시인하면 그 말씀의 역사가 우리의 삶속에 오늘날도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불안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쟁의 공포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핵문제와 이라크 전쟁을 TV로 늘 보고 있지않습니까? 이라크 전쟁의 그 무시무시한 참상을 바라보고 다음은 한반도에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우리 마음속에 다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불안의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없는체 하지만 마음속에 사실은 이 불안의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 생명보험 가입률이 30퍼센트에서 50퍼센트까지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채무나 재산에 관한 유언장을 작성해 주는 일이 늘어났다고 말합니다. 또 정치상황 변동에 따른 세대간 이념 갈등이 심하므로 불안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나이 많은 50대 이후의 사람들을 보고서 수구반동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러니 나이먹은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굉장한 소외감을 느낍니다. 무슨 말과 행동만 해도 젊은이들이 수구반동적인 사람이라고. 그러면 나이먹은 사람은 뭐라고 말합니까? 보수주의적인 시각에서 젊은놈들은 빨갱이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념적인 갈등이 우리의 한국에 크게 골이 생겼습니다. 사실 제가 해방 후에 자랐지만 해방 후에 좌우로 나뉘어 이념의 갈등이 굉장히 심했는데 오늘날 그와같은 형상이 되었습니다. 북한은 자꾸 그것을 죽입니다. 우리 국민적인 갈등을 가져오고 국민적인 대결이 일어나고 혼란이 오게 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북한이 우리 한국사회에 이념의 혼돈을 가져오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젊은이와 그들의 부모의 세대가 서로 등을 돌리고 갈라지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정부부처 내 서열파괴가 사회로 확산되어서 이제는 높고 낮은 것이 없어지는 그런 고통 속에 처했습니다. 선배가 뭐며 후배가 뭐냐. 먼저 있는 사람 나중인 사람 서열이 무슨 소용 있느냐? 상당한 혼란과 정신적인 갈등을 이 사회가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으로 경기불황이 다가와서 모든 일이 안되잖아요. 지금 수출도 잘안되고 사업도 잘안되고 그리고 신용불량자가 증가되고 실업이 증가하고 있잖아요. 물가상승으로 실업률이 상승하고 직장인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통계청 발표에 보면 2월 실업자수가 82만 2천명인데 이중에 20대, 30대 실업자만 40만 4천명입니다. 지난 2년 동안 비교하면 지금이 실업률이 최악에 달해 있습니다. 그리고 부유층은 재산의 투자처를 몰라서 불안합니다. 돈은 있는데 이 돈을 어디 투자를 해야 될지 알지 못하고 자기들의 사회적인 지위가 낮아질 것을 두려워해서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거기에다가 국내에서는 돼지 콜레라가 발생해서 돼지들이 떼를 지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부터 출발하여 온 동남아와 유럽을 휩쓸고 있는 괴질도 두려운 것입니다. 말세에 흉악한 질병이 돌겠다고 했는데 오늘날 의학으로도 병원균을 발견하지 못하는 괴질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불안으로 인해 각종 수련회를 갖고 마음 다스리는 모임이 많이 있습니다.
마음에 관련한 서적이 1년내 1백종이 넘게 발간이 되고 점집이 호황을 하고 심리치료하는 신경정신과가 성황하고 많은 사람이 그곳에 정신적 치료를 받으러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온 20세기 역사는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전쟁에서 직접 죽은 수와 관련된 학살자 수를 합치면 1억 2천만에서 1억 8천만의 사람들이 지난 20세기 동안에 전쟁으로 죽었습니다. 1945년부터 90년까지 전쟁이 없었던 날은 겨우 3주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말세에는 전쟁과 전쟁 소문을 들을 것이요. 처처에 온역과 기근이 있으리라’ 여러분, 이런 괴질이 돌지요. 처처에 기근이 있지요. 전쟁으로 말미암아 전쟁과 전쟁이 있는 것만 아니라 소문이 빗발칩니다. 옛날에는 전쟁이 나도 소문이 안났습니다. 왜냐하면 TV나 인터넷이 발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나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라크 전쟁은 지금 나고 있는 사실을 지금 싸우고 있는 사실을 인터넷, TV를 통해 우리 눈앞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과 전쟁 소문이 처처에 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실날이 눈앞에 다가온 것은 사실입니다.
오늘날 이런 여러가지 연고로 우리 사회는 불안과 공포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고 온 세계가 그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골짜기를 지날 때 아무리 점집을 찾아가도 소용이 없고 신경과 치료를 받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와 같이 해주셔서 우리를 건질 자는 우리의 목자,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다고 하신 그 예수께서 선한 목자가 되셔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와 손잡고 함께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세에 마지막 때에 무엇보다 더욱 우리는 잠에서 깨어나 기도하고 우리 목자의 손을 잡고 이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그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에게 안심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팡이는 주님의 인도하시는 손길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절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목자요, 우리들은 그의 양입니다. 그러므로 목자되신 주님은 우리들의 이름을 다 아십니다. 우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주님은 지팡이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잠언 3장 5절로 6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히브리서 4장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시고 보좌에서 기다리기 때문에 담대하게 나가서 이 어려울 때 주님이 우리를 인도해 달라고 우리가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주님의 지팡이가 우리를 안위하시고 주님의 막대기가 또한 우리를 안위하십니다. 막대기란 주님이 구원하시는 권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막대기로 짐승을 치지 않습니다. 주님의 전능한 권능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3장 5절로 6절에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두려움을 버리고 우리 주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5절에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안위하시며 주님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크고 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안 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목자도 같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시편 91편 14절로 1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지금도 우리 위에서 인도하시고 건져 주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말씀을 우리가 오늘 받아들여야 됩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 1장 6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4)
시 23:6 / 조용기 목사
한평생을 함께 살아온 부부라도 상대를 정확하게 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정확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복음의 가장 위대성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사람 가운데 사시면서 사람과 대화하고 교통하면서 영광을 나타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어떤 종교보다 위대한 점인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이 넘치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늘 시편 23편 6절에는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신 목자이십니다.
1. 선하시고 인자하신 목자 하나님
누가복음 10장 30절로 37절에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내려가던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게 된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옵니다. 굉장한 기대를 가지고 ‘제사장이여 나를 도와달라’고 말했으나 제사장은 그를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꾸짖고 그냥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법을 가르치고 시행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법을 어긴 자를 정죄하고 벌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제사장은 강도 만난 사람을 율법의 눈으로 보고 부주의함을 꾸짖고 정죄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뒤에 레위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에게도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잠시 와서 그를 보고 종교의식을 집행하고는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종교의식을 행하는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성수를 뿌리고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고 종교적인 의식을 베풀어도 그 죽은 자는 살아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사마리아인 한 사람이 그리로 오게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3절로 34절에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이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율법의 안경을 쓰고 보면 허물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자비와 긍휼의 안경을 끼고 보면 모든 허물을 덮게 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피투성이가 된 사람을 율법의 안경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자비와 긍휼로 이 사람을 보았습니다. 지금 당장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도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고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준 것입니다. 바로 이 사마리아인은 선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선한 분이라고 스스로 고백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로 11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주님은 우리를 돕고 치료하고 살리기 위해서 오셨지 우리의 결점을 지적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며 종교나 의식을 가르치기 위해서 오신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짊어지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한없으신 선하심과 인자하신 모습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입니다.
2. 십자가 상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
우리는 하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몸을 찢고 피를 흘리며 우리를 위해서 고생하신 것을 바라보고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우리는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죄인들의 죄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그 맑은 눈으로 우리 죄를 들여다 보시면 견딜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가 대낮같이 드러날 터이니 정죄감을 느끼고 심판을 당하고 우리는 좌절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우리에게 용서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눈으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서 사랑과 긍휼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용서를 바라보지 심판과 정죄를 바라보지 않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로 7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비와 긍휼의 눈으로 보시기 때문에 손을 내밀어 우리를 건져내시고 살리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키사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는 놀라운 은총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양은 연약할 뿐 아니라 다른 동물과 달리 길을 잃으면 다시 되돌아오는 귀소본능이 없기 때문에 목자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이사야 53장 6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5절에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도 하나님을 떠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께 스스로 찾아오지를 못합니다. 양은 목자가 찾아서 데리고 와야 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셔서 길 잃어버린 우리들을 찾아서 죄악에서 건져내 주셔야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우리 죄를 사하시고 죄악에 빠진 우리를 친히 찾아오셔서 건져내어 집으로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선하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세상과 마귀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세상과 마귀의 종이 되어 세상과 마귀가 시키는 대로 부정부패 속에 살아왔습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놀라운 해방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는 해방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와서 해방시켜 주어야 합니다. 마귀에게 포로가 되어서 죄의 종노릇 하는데 강한 자, 우리 주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밧줄을 끊고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해방을 주었으므로 우리는 주 안에서 얼마나 놀라운 은총을 받았는지 형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함과 성령을 주셔서 거룩하게 살게 해주십니다. 우리 스스로 거룩하게 살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모든 사람들은 극도록 부패해져서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를 씻어주실 뿐 아니라 성령을 주셔서 우리에게 거룩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거룩한 성령이 우리 속에 계시므로 이제는 더러운 것을 피하고 거룩함을 좇아 행할 수 있는 힘도 주시고 소원도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7절에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속에 계시겠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리의 영 성령은 거룩한 영입니다. 거룩한 영이 우리 속에 오시면 우리가 거룩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하신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마귀에게 눌려 병들고 고통당하는 심신을 치료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에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 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복음과 함께 병을 고치고 약한 자를 치료해 준 주님은 좋으신 주님이신 것입니다. 자비하심과 선하심이 넘치는 주님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세상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승리를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선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항상 복을 주시지 화를 주시지 아니하십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때문에 가난해졌습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풍찬노숙을 하셨습니까? 바로 우리 때문에 주님은 이런 고생을 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사랑의 주님이 아니십니까? 자비와 긍휼과 선하신 주님이 아니십니까?
나아가 선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천국을 주십니다. 베드로후서 3장 12절로 13절에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세에는 처처에 온역과 지진과 기근이 있으리라고 했는데 요즘 ‘사스(SARS)’를 보십시오. 병원균도 찾지 못하는 괴질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말세의 병이 아닙니까? 이 세상은 마지막을 향해서 달음질 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심판의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지만 하나님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하늘과 새땅이 나타난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우리를 이 새하늘과 새땅으로 인도하는 목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15절로 17절에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보좌 앞에서 주님이 친히 목자가 되어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생명수 강가에서 생명수를 마시게 하시고 우리 스스로의 눈에 눈물을 다 씻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신 목자이신 것입니다.
3.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하심
이 세상을 사는 사람들은 결국에는 다 죽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항상 인간을 협박하고 있습니다. 안 죽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 것은 정한 이치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죽음을 다 끌어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무덤에 들어간 지 사흘만에 죽음을 다 청산해 버리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에 빚을 지지 않았습니다. 안 믿는 사람은 죽음에 빚을 졌기 때문에 죽음의 빚쟁이에게 끌려서 사망으로 들어가지만 우리는 죽음의 빚을 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빚을 청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오더라도 우리는 죽음을 능가하고 영광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지상 이스라엘 국가와 장차 지상에 이룩할 천년왕국에 관하여 주로 말씀하시고 사후 영혼에 관해서나 천국에 관해서는 거의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후 영혼의 문제와 천상 천국에 관한 계시는 예수님과 사도들을 통하여서 분명히 우리에게 나타나신 것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혼불멸과 천국에 관해서 거듭거듭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시험, 환난, 핍박이 다가와도 몸은 죽일 수 있어도 영혼은
못 죽인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몸도 죽이고 영혼도 죽일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분명히 영혼은 몸을 떠났어도 영혼이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로 17절에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같이 예수 안에서 사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음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보다 먼저 잠자는 자들도 주님과 함께 있다가 주님 오시는 날에 함께 데리고 와서 부활의 몸을 얻을 것이고 우리는 이땅에서 주님께서 강림하심을 맞이하게 되면 부활의 몸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죽음이란 아무런 힘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로 3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데리러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목자가 우리를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질 때 목자가 와서 우리의 손을 잡고 데리고 가시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로 21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믿음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믿는 자는 이긴 자인 것입니다. 이긴 자는 예수님과 함께 보좌에 앉게 해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도 늘 영혼불멸과 천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막집이란 천막집입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면 날라가고 찢어지고 없어지는 장막집입니다.
이 장막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8절로 10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약하고 추하고 더러운 몸으로 영원히 살 것은 아닙니다. 부활은 너무나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절로 54절에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 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이 썩을 것이 썩지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바로 여러분과 나의 미래의 신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성경은 분명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겠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추한 것이 영광스러운 것을, 육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우리가 주님 앞에 환호성을 부르면서 얼싸안고 기뻐 뛰며 춤출 날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 선생은 삼층천에 갔다와서 이 사실을 보고 난 다음에는 늘 마음속에 그리워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했으나 바울 선생은 늘 천국 천성을 바라보고 그곳에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빌립보서1장 21절로 23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주의 사업 때문에 할 수 없이 머물러 있지만 차라리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것이 더 좋다고 말한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기록한 천국의 모습은 더 아름답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절로 7절에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도 이기는 자가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이김은 이것이니 곧 믿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주님이 예비한 이 영광스러운 곳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못 가봤다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사도 요한을 통해서 대표적으로 이미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신문기자가 상황을 보고하듯이 우리에게 보고해 놓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절로 5절에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의 초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마음에 희망과 꿈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의 모든 삶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 달은 이번 달보다 영원한 미래는 현재보다 영원히 좋아질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시편 23편의 결론은 우리가 평생토록 선하심과 인자하신 목자 예수님과 함께 살다가 죽음이 오면 저 건너편에 예비된 아버지의 집 천국에 들어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시편 23편)
이것이 우리들이 오늘날 살아가는 형편입니다. 우리들은 고아와 같이 버려 놓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님이 오셔서 잃어버린 우리를 찾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서 피값으로 마귀와 죄악의 소굴에 빠진 우리를 건져내고 찾아 주셨고 이 땅에서 성령을 보내사 같이 하여 주셨고 육신의 장막집을 떠날 때는 우리를 데리고 아버지 집에 가도록 인도해 주시는 우리 목자가 되신 것입니다. 이 목자께서 오늘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버리지 아니하고 함께 계시므로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믿고 아버지 품에 안겨서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 23:1-6 / 김광일 목사
아프리카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캐나다에서 토양학 박사학위를 받은 필립 켈러(W. Phillip Keller) 박사는‘양과 목자’라는 저서에서 8년 동안 목장을 운영하면서 양을 쳤던 경험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목자는 여름동안에 양떼들을 멀리 방목장으로 데리고 갑니다. 그곳은 고지대인데 양들은 거기서 지내면서 풍부한 목초를 뜯어 먹습니다. 그러다가 눈발이 날리게 되면 목자는 양떼를 이끌고 목장이 있는 낮은 지대로 돌아옵니다. 이때 내려오는 과정에서 지나게 되는 곳이 골짜기입니다. 양들의 입장에서는‘목자가 겨울에 잘 지낼 수 있게 할 것이면 왜 골짜기로 이끌어 가는가’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골짜기는 산과 산 사이에 있는 계곡이라 위험한 곳이고 하루 중 햇볕도 얼마 들지 않는 음침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높은 절벽위에서 골짜기로 바위나 흙더미가 쏟아져 내릴 위험성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목자는 골짜기를 지날 때 더욱 양들에게 가까이 있으며 신경을 곤두세워 돌보게 됩니다. 푸르고 넓은 초장에서 지낼 때는 목자가 양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지만 골짜기를 지날 때는 양떼를 지켜주고 돌보아야 하는 때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양 떼와 목자가 가까워지는 때가 바로 골짜기를 지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언제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됩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즉 인생에서 가장 외롭고 두렵고 험하고 힘든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을 더 가까이 모시게 됩니다. 평탄하고 형통한 길을 걸을 때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즉 목자이신 여호와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시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시입니다. 3천여년을 두고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이 시편을 애송해 왔습니다. 몇 줄 안 되는 시편 23편이 인간에게 준 위로와 소망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습니다. 외로운 사람들, 위태한 중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임종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시편 23편은 놀라운 은혜를 끼쳤습니다. 이 아름다운 시편 때문에, 다윗은 모두에게 사랑받는 인물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았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 군대가 벌벌 떨 때에도 소년 다윗은 그 상황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 는 단 하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바로‘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의 믿음이었습니다.
복음성가로 만들어진 시편 23편이 있습니다. 다같이 부릅니다. “1.여호와 나의 목자 내게 부족 없네 푸르른 초장 위에 나의 몸 누이시네 (후렴) 선한 목자 오 나의 목자여 생수가 넘치는 곳 날 인도 하시네 2.내 영혼 소생하며 자기 이름 위해 의의 길 인도하니 골짜기 두렴 없네 3.주님의 지팡이가 안위하네 나를 주께서 원수 앞에 상으로 베푸시네 4.기름을 머리 위에 바르시는 주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함 따르리니 (후렴) 선한 목자 오 나의 목자여 생수가 넘치는 곳 날 인도 하시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와 사이를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다윗과 하나님의 사이는 양과 목자의 사이입니다. 여기의 관계는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목자 되심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에 비로소 작동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의 믿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로 인도하시나이다
‘희망의 오페라’의 저자이며, 동양의 파바로티라고 불리는 성악가 조용갑 집사는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의 술과 도박, 폭력으로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신문배달, 우유배달, 군고구마 장사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철공소에 취직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소망이 없는 그의 인생에 목자가 되시어 인도자가 되어주셨습니다. 출석하던 교회의 담임목사 권유로 성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레슨 받을 돈이 없어서 성악가들의 음반 테이프를 들으면서 혼자 연습을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이탈리아 산타체칠리아 음악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14년간의 유학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20여 차례의 국제 콩쿠르에 입상하고, 300회가 넘는 유럽 오페라 무대의 주인공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고백합니다.“하나님은 거친 파도 앞에 선 저에게 희망의 등대가 되어 주셨습니다. 드라마틱한 인생의 무대로 이끌어주셨습니다. 앞으로 저의 꿈은 희망을 잃은 채 절망 속에 주저앉은 사람들에게 희망의 오페라를 전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도전하면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니 이루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우리가 드릴 가장 좋은 기도는‘저를 인도해 주십시오’입니다. 하나님께서 판단하시고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이 선하게 인도하여 주십니다. 목자는 양을 설득하지 않습니다. 양에게 무슨 설명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목자가 앞서 가면 양은 뒤를 따를 뿐입니다. 목적지도 목자가 알고 목표도 목자가 알고 방향도 목자가 알고 양을 인도합니다. 양들은 묵묵히 목자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판단을 해서 인생길을 살아간다면 피곤합니다. 쉽게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긴장하고 스트레스에 눌리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자로 인정하고 인도를 받으면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지시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길을 찾으면 잘못 찾아 방황할 수밖에 없고 후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의의 길로 가게 됩니다. 안심할 수 있습니다. 최선의 길로만 가게 됩니다. "
둘째로 안위하시나이다
바실레아 슐링크((M.Basilea Schlink)는‘사랑의 승리’라는 글에서 중국의 문화혁명 때 엄청난 핍박은 받은 기독교인들을 소개하였습니다. 지하 교회를 섬기던 장로가 끌려가서 죽도록 매를 맞고 풀려난 뒤에 간증한 내용입니다. 장로는 감옥에 끌려가 240대의 매를 맞았습니다. 살라고 때리는 게 아니라 죽으라고 때리는 것이라 죽도록 아팠습니다. 매일같이 맞고, 쉬었다가 또 맞고, 쉬었다가 또 맞고, 그렇게 계속해서 240대를 맞았는데, 맞던 중에 장로는 스데반을 생각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천사의 얼굴 같았고 눈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에게도 예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가까이 오셔서 품에 안으시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안으시고 상처를 어루만져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도 아프지가 않았습니다. 아무리 때려도 안 아프더랍니다. 그뿐 아니라 맞을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모진 고난과 십자가 형벌로 인해 상처로 뒤덮인 주께서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를 껴안으시는 것이 여호와의 안위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뜻하지 않은 사고나 질병이 고통스럽게 할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 때, 바로 그때 안위하시는 목자이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안위’의 사전적인 의미는‘마음을 위로하고 몸을 편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은‘위로(comfort)’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목자 되신 하나님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신과 함께 하셨으며 그 덕에 자신이 해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시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순간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과 지팡이와 막대기로 자신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순간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혹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느라고 피곤하고 지친 삶은 아니십니까? 두렵고 막막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 순간 하나님이 우리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목자이셨던 여호와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축복하시나이다
경상남도 시골에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6.25때 군에 입대했고, 월남 전쟁에도 참전했습니다. 27살의 나이에 별을 달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 어머니를 찾아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경찰서장을 대동하고 어머니 앞에 큰절을 올리고 별이 달린 모자를 그 앞에 놓고 “어머니, 어머니 곁을 떠났던 그 자식이 별을 달고 어머니를 찾아왔습니다.”그런데 어머니는 시큰둥해 하셨습니다.“그 별은 언젠가는 떨어질 똥별이다. 나는 네가 하늘의 별을 달기를 원한다. 네가 어느 지역에 가서 어떤 위치에 있든지 거기서 복음 전하는 일, 성전세우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아니될 게야.” 그는 그때부터 하나님을 향한 신앙으로 4성 장군이 되었고 국방부장관이 되었습니다. 바로 김성은((金聖恩) 장관입니다. 그는 가는 곳곳마다 복음을 전했고, 군부대에 수많은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그가 전역한 다음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땅을 팔아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예배당 사진을 찍어서 어머니 앞에 찾아갔습니다.“어머니 예배당을 지어서 하나님 앞에 봉헌했습니다.”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나는 네가 목사가 되기를 위해서 기도했다. 그런데 네가 목사는 되지 못했지만 이제야 네가 하늘의 별을 달았구나. 그 예배당을 통하여 뭇 심령들이 하늘의 별이 되어 오르게 될 것이다. 이제야 네가 땅에서 썩고 떨어질 별이 아니라 하늘의 별을 달았구나”라며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김성은 국방장관은 ‘나의 잔은 넘치나이다’라는 회고록을 통해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통해 영원히 빛나는 별의 축복을 얻었노라 간증하였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고대 중동지역의 풍습에 의하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군인들에게 왕이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포로들도 잔치에 함께 참석하여 승리한 군인들이 잔치상을 받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다윗에게 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상을 베푸심을 기억하십시오. 축복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목자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다윗이 부족함이 없으며 언제나 잔이 넘치는 축복의 삶을 살게 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여호와가 목자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호와를 목자로 삼고 하나님만 따르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해가 되던 이해가 되지 않던 목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고집하며 살았습니다.
영국의 연극배우가 명예훈장을 받았습니다. 사회자가 그에게 청중들을 위해 대사를 암송해 줄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는 쾌히 승낙하면서 무엇이든 신청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연로한 목사가 제의합니다.“시편 23편을 암송해 주시겠습니까?”“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마친 후 목사님께서도 읊어 주셔야 합니다.”이윽고 배우는 감정을 잡으면서 시편 23편을 암송했습니다. 넋을 잃고 듣던 청중들은 암송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잠시 후 나이드신 목사도 암송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분위기는 숙연해져 갔고 암송이 끝났을 때 한 사람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배우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저는 여러분의 귀를 울렸지만, 목사님은 여러분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저는 단지 시편 23편을 알고 있었지만, 목사님은 목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호와가 목자이심을 아십니까? 목자이신 하나님만으로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목자를 따르는 양은 행복합니다. 가장 안전하고, 가장 배부르고, 가장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모시는 사람 또한 행복합니다. 부디 여호와를 목자로 삼아 좋은 곳으로 인도받으시기 바랍니다. 안위하심으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축복을 받음으로 어떤 환경에서도 언제나 잔이 넘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1-6 / 최응희 목사
오늘 시편 23편 속에는 목동으로 광야와 골짜기로 양을 몰던 다윗의 경험과 믿음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다윗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르기만 하면, 안전하고, 평안하며, 풍성해지는 양들의 모습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생각해 내었습니다. 목자의 인도와 돌봄 속에서 누리는 은혜와 기쁨을 다윗은 한 마디로 요약하여 노래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오늘 다윗의 이 노래가 우리도 함께 부르는 기쁨의 노래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1.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 영혼의 잔을 채워주십니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영혼의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육신만의 안전과 편함으로 참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영혼이 채워져야 참 만족과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영혼을 채우시는 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참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 은혜 안에서 내 영혼이 쉽을 얻고, 소생함을 얻습니다. 이렇게 내 영혼의 잔을 채워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체험과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양이 가장 미련한 동물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양은 지독한 근시여서 바로 코앞의 물체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한 번 벌렁 넘어지면 제 힘으로는 절대로 못 일어난다고 합니다. 더구나 유대라고 하는 땅은 아주 척박한 땅일 뿐 아니라 험준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서 조금만 방심하면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는 위험한 곳이 많은 곳입니다. 비도 별로 오지 않기 때문에 물도 흔치가 않은 지역입니다. 이런 곳에서 위험한 지형을 미리 알아 잘 인도해 주고, 좋은 꼴이 있는 곳으로 인도해 배불리 먹게 해주고, 목이 마를 때 맑고 얕은 물로 인도해 마시게 해주는 목자는 양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밤에는 잠자지 않고 눈을 부릅떠 울부짖는 짐승들에게서 지켜 줌으로서 양들이 편안히 잠들 수 있고, 쉴 수 있게 해주는 목자의 역할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목자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먹이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인생의 목자와 같은 분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목자가 되셔서 자신을 인도하실 때에야 자신의 빈 잔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외롭고, 힘든 인생길에서 오직 주님 만이 자신의 목자가 되셨고, 그 음성을 듣고 따를 때에만 자신의 인생의 잔이 기쁨과 만족과 감사로 차고 넘치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목자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은혜를 체험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러하기를 축복합니다.
‘필립 켈러’ 는 원래 호주에서 양을 치는 목자였는데 목사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목사가 된 후「목자의 눈으로 본 시편 23편」이라는 책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양은 네가지 경우에만 풀밭에 드러눕는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주변에 맹수가 없어야 편안한 마음으로 풀밭에 눕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양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화목해야 눕는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몸에 빈대 벼룩이 있을 때는 절대로 풀밭에 눕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충분히 꼴을 먹고 배가 불러야 풀밭에 드러눕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문제들을 없애 주시고 우리 영혼이 충만하게 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평안함과 풍성함과 충만함이 넘쳐나서 은혜의 푸른 풀밭에 눕는 기쁨이 늘 있기를 축복합니다.
2.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잔을 채워주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 고백은 하나님께서 영혼뿐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인도해 주시고, 지켜주시고, 물리쳐 주시는 것에 대한 고백입니다. 실제로는 다윗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부모님에게도, 형제들에게도,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사랑과 존경을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처럼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외치게 된 것을 보십시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러한 고백을 하게 했을까요? 그 대답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인생의 상처를 능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고통을 능가하는 하늘의 위로가 그의 영혼 속에 넘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부요함이 자신의 삶에 상처를 주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경험한 쓰라림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온 영혼으로, 온 마음으로, 온 인격으로, 온 삶으로 몸소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서 얻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에게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형제에게서도, 가족에게서도, 자식에게서도, 그 화려한 물질적 환경에서도 얻을 수 없는 그 만족과 기쁨을 하나님에게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담아서 그가 하는 노래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나이다.’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주님의 은혜가 내게 크고 놀라우십니다!’ ‘제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하시는지요!’
♬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놀랍고 놀랍다 놀라우시도다! ♬
인생은 언제나 좋기만 하고 평탄하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는 험준한 산과 깊은 골짜기도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을 살아갈 때 그리스도인들도 고난과 고통을 겪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탄의 시험으로 고통이 오기도 하고, 때로는 죄로 인하여 매를 맞는 경우도 없지 않고, 실수함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믿을 때 언제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믿음의 지팡이를 의지하고, 능력의 막대기로 길을 헤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을 믿으십시오. 비록 고통과 고난의 시간 속에 있을 때에도, 사망의 음침한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십시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함께 하심을 믿으십시오.
3. 목자이신 하나님은 내 수고의 잔을 채워주십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目前)에서 내게 상(床)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원수의 눈앞에서라는 말은 꼭 무슨 원수 맺은 사람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어려운 문제 앞에서, 그 힘든 과정 가운데서, 그 외로운 시간 속에서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 문제 속에 있을 때는 그 시간이 영원할 것 같았고, 그 힘든 시간 속에 있을 때에는 나만 외로이 이 어려움을 짊어진 것 같았는데, 하나님께서 보고 계셨고, 하나님께서 알고 계셨고, 하나님께서 기억하셔서 그 수고와 그 어려움과 그 외로움을 위로해 주시고, 알아주시고, 갚아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니 어찌 내 잔이 넘치지 않겠습니까! 주의 사랑으로 넘치고, 주의 은혜로 넘치고, 그리고 나의 감사로 넘치고 감격으로 넘치고, 기쁨으로 내 잔이 넘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수고를 기억하십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건 몰라주건, 사람들이 알건 모르건 하나님은 아십니다. 내 깊은 속과, 내 남모르는 눈물을 아십니다. 마찬가지로 내 남모르는 하나님 사랑을 받아 주십니다. 남모르는 충성을 받아주십니다. 내 속 깊은 진심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라디아서6:9
‘내 원수의 目前에서 床을 차려주신다’는 말씀은 사람들이 몰라주었지만 하나님은 알아주시고, 채워주시고, 갚아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끝까지 충성하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좀 힘들어도, 지금 좀 답답해도, 지금 좀 어려워도, 지금 좀 부족해도, 때가 될 때 하나님께서 그 수고의 열매를 거두게 하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시는’ 은혜와 복으로 여러분의 잔을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의 믿음의 되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이 여러분의 목자이십니다. 양은 지독한 근시여서 한치 앞도 잘 못 보지만 귀는 밝아서 목자의 음성을 잘 구별합니다. 아무리 옷을 바꾸어 입어도 자신의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눈은 잘 안보이지만 소리는 잘 듣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요한복음10:27
여러분 모두 선한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를 받아 험한 세상에서 늘 평안하고 안전하고 풍성한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여러분의 입에서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이 고백이 노래처럼 흘러나오기를 축복합니다.
교회, 하나님이 목자이신 양 무리
시편 23:1~6 / 이수영 목사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관계를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비유는 아버지와 자녀의 비유이겠지만 그에 못지않은 비유가 신랑과 신부의 비유이며 또한 목자와 양의 비유입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의 백성은 양 무리 같은 존재이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목자 같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 치는 목자가 양들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잘 아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에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목자의 목양하는 모습을 오늘 본문인 시편 23편보다 더 잘 보여주는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시편 23편의 저자로 알려진 다윗은 바로 양 치는 목동이었고 그는 자기 자신의 목양의 경험을 통해서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본문 2절에 보면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합니다. 양에게 있어서 목자는 푸른 풀밭에 누울 수 있게 해주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들을 푸른 풀밭에 눕게 해주고 물가에서 쉴 수 있게 해주는 일은 목자에게 있어서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목자가 많은 수고와 자기희생을 치러야 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선 양이란 동물이 풀밭에 편안히 눕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양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가 주변에 보이지 않아야 합니다. 양은 아주 겁이 많고 의심이 많은 동물이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물체가 시야에 들어온다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가 들리면 불안해서 누워있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 마리 양이 놀라서 뛰기 시작하면 다른 모든 양들도 덩달아 뛰는 바람에 삽시간에 혼란이 일어나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들을 편히 누워 쉬게 하기 위해서는 목자는 쉬지 않고 부지런히 주위를 살피며 양들을 불안하게 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둘째, 양들이 풀밭에 편안히 눕기 위해서는 양들을 귀찮게 하는 요소들이 없어야 합니다. 양은 아주 신경질적인 짐승이어서 하루살이 같은 것이 눈앞에서 어른거리기만 해도 그걸 참지 못하고 그래서 눕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양들을 편히 누워 쉬게 하기 위해서는 목자는 양들을 귀찮게 하고 짜증나게 하는 벌레나 곤충들을 열심히 쫓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셋째, 양들이 풀밭에 편안히 눕기 위해서는 배가 고프지 않아야 합니다. 양들은 만족스러울 만큼 배불리 꼴을 먹기 전에는 절대로 눕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목자들은 양들이 편히 누워 쉴 수 있도록 좋은 꼴을 풍성히 먹이기 위해서 늘 많은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넷째, 양들이 풀밭에 편안히 눕기 위해서는 양들 자체 안에서 평화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양을 양순하고 평화의 상징인 짐승인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양들끼리만 내버려두면 힘없고 어린양들은 힘세고 못된 양들 때문에 늘 시달리며 좋은 자리는 언제나 빼앗기기 때문에 잠시도 편안히 누워 쉴 틈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모든 양들이 골고루 편히 누워 쉬게 해주기 위해서 목자는 특별히 신경 써서 양들 사이를 잘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위해서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물을 먹이러 갈 때에도 먼저 그 물이 양들에게 안심하고 먹일 수 있는 깨끗한 물인지, 물가에 양들을 귀찮게 하거나 양들에게 해로운 벌레들이라도 없는지 세심히 살펴본 후에야 양들을 데려갑니다. 또 양들에게 가장 좋은 물은 새벽 동트기 전에 풀잎에 맺히는 이슬이라고 하는데 좋은 목자들은 양들에게 그 물을 먹이기 위하여 새벽잠을 설치면서 양들을 일일이 깨워 풀밭으로 이끌고 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고 합니다. 양들이 만족하며 “우리가 쉴만한 물가로 인도되었구나”라고 여기게 되는 것은 목자의 지극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본문 3절에 보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합니다. 이 말 속에는 은혜 넘치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양은 몸이 둥글고 다리가 짧아서 그런지 나뒹굴기 잘한다고 합니다. 평평한 곳인 줄 알고 누우려다가 조금만 웅덩이진 곳이면 쉽게 나뒹굴게 되는데 한번 배를 하늘로 향하고 나뒹굴게 되면 제 발로 다시 서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뿐 아니라 스스로 일어서려고 발버둥 치다보면 체내에서 기포가 형성되어서 혈액순환을 막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날씨가 흐리고 바람이라도 좀 불 때에는 3일 정도 버틸 수 있지만 뙤약볕이 내려 쬐는 때에는 단 세 시간 만에도 질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이 양을 치면서 가장 신경을 써야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어느 구석인가에 한 마리라도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나뒹굴어 있는 양이 없는지 살피는 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말씀 중에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 아흔 아홉 마리 양을 두고 나서는 목자의 비유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양 한 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 목자가 제일 먼저 생각에 떠올리는 것은 그 양이 어딘가에서 배를 하늘로 향하고 나뒹굴어 있지나 않나 하는 것이며, 그것은 1분 1초가 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양을 발견했을 때 목자는 그 양을 얼른 바로 세워 가슴에 안고 전신을 잘 마사지 해 주어야 하며, 그렇게 하면 질식해 가던 양이 정신을 차리며 되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는 말은 내가 어디서 무슨 변을 당해 죽어 가는 일이 있을지라도 곧바로 내게 달려와 나를 살려 줄 목자 같은 분이 바로 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3절 뒷부분에는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는데 이 말 속에도 참으로 깊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양은 습관성 동물이어서 자기들끼리만 다니게 내버려두면 한 번 가본 길로만 계속해서 다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풀이란 풀은 다 뜯어먹고, 더 이상 풀이 없으면 뿌리까지 다 캐먹으며, 또 다니면서 싸놓는 배설물로 땅을 산성화시켜 다시는 회복이 불가능한 땅으로까지 만들어놓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풀밭이라 할지라도 목양이 불가능한 땅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그것이 곧 불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자가 목양에 성공하려면 무엇보다도 유의해야 하는 일의 하나가 양들을 여러 목초지로 차례로 번갈아가며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좋은 목자에 의해 인도되기만 하면 양들은 목초지를 버려놓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적당히 남겨놓는 배설물은 오히려 목초지가 잘 유지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의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불의를 행할 수밖에 없는 양들을 의를 행할 수 있게 해주는 목자처럼 하나님은 불의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의의 길을 가도록 인도하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합니다. 낮은 평지에서 양들을 치다가 더 이상 꼴을 먹일 목초지가 없어지면 높은 산지대로 새로운 목초들을 찾아 양들을 이끌고 가는데 그 길이 종종 험하고 가파르기도 하며 또 사나운 산짐승들이 나타날 수도 있고 해서 양들에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들은 양 손에 각각 지팡이와 막대기를 들고 가는 목자가 눈에 보이는 한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발을 잘못 디뎌 골짜기나 가시덤불에 떨어지게 되면 끝이 둥글게 휜 지팡이로 목이나 다리를 걸어 끌어올려 줄 것이고, 맹수가 나타나면 막대기로 물리쳐 줄 것이라고 철저히 믿기 때문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목양관습에 따르면 목동이 처음 양치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인근 숲에 가서 튼튼한 나무에서 싱싱한 가지를 하나 꺾어 그 나뭇가지를 자기의 체격과 팔 길이에 맞게 적당히 자르고 잘 다듬어 막대기를 만든 다음 그것을 휘두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맹렬한 훈련 끝에 어떤 짐승이나 적수가 나타나도 그 막대기로 능히 물리칠 수 있을 만큼 완전한 무기를 갖춘 후에야 아버지나 형님에게서 양 몇 마리를 물려받아 목자의 일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들에게서 목자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와 막대기는 그들이 절대로 안전할 수 있다는 보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백성을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하게 지켜주시는 목자와도 같은 존재시라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하는데 그것은 아무리 양들을 노리는 위험요소들이 널려져 있는 가운데서도 목자는 양들이 마음 놓고 꼴을 먹을 수 있도록 밥상을 차려준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한편으로는 아무리 험준하고 위험한 고지대에서도 목자는 밥상처럼 평평한 목초지를 찾아 양들을 인도해줌을 뜻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양들이 뜯어먹을 풀들 사이에 양에게 치명적인 독초들이 섞여 있다 하더라도 목자들은 미리 그것들을 다 솎아낸 뒤에야 양들을 데리고 가기 때문에 양들은 마음 놓고 뜯어먹을 수 있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양들을 위해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에게 그러하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하는데 이것 또한 양들을 돌보는 목자의 세심한 주의와 책임감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양의 콧구멍 입구는 늘 물기가 촉촉해서 종종 거기에 벌레가 기생하는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 벌레는 양의 콧구멍에다 알을 까기도 하고 또 거기서 애벌레가 나와 콧구멍 속으로 파고 들어가기도 하는데 그렇게 되면 양에게 통증도 일으키고 때로는 실명하게도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성마른 짐승인 양은 그것을 참지 못해서 땅바닥이나 나무 등걸이나 바위에다가도 머리를 찧고 코를 비비대다 보면 상처가 나거나 깨져서 피를 흘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면 목자는 상비약처럼 지니고 다니는 올리브기름을 곧바로 그 상처에 발라주어 낫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라는 말 또한 양을 기르는 목자의 지극한 정성과 배려를 엿보게 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다치고 상처받고 깨지고 피 흘리는 일이 있어도 어김없이 찾아와 고쳐주고 살려주는 목자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분에 넘칠 정도로 감사하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그 말 자체만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숨어있는 표현입니다. 목자들은 밤에 들판에서 양들을 지킬 때가 많으므로 추위나 오한이 날 때에 대비해서 물병에 술을 약간 탄 물을 늘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들도 오한이 날 때에는 목자가 그 술 탄 물을 따라 마시우곤 하는데 양들에게는 목자의 품에 안겨 그가 따라주는 물 한 잔 받아 마실 때보다 더 행복해할 때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의 그 행복감의 표현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그의 백성에게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목자로 둔 양 같은 백성이라면 부족한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 시편의 저자가 본문 첫 절에서 먼저 한 말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한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23편의 모든 구절 뒤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양을 치는 목자의 사랑과 정성과 돌봄이 어떤 것이며 양들을 위한 목자의 책임감과 수고와 희생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모가 자기 자식들에게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 목숨의 위험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로 당신의 백성에게 그러한 목자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6절에서 결론을 내리기를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합니다. 왜냐하면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를 것”이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런 목자처럼 하나님께서는 평생토록 오직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선언하셨고 그 선언이 진실임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확증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목자 되신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그 하나님하고만 일생을 함께 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걸으라 하시는 길이 따르기 힘들고 이해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자기 목자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가는 양 같이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종종 얻는 것 없고 손해만 볼 것 같으며, 배부름도 시원함도 편히 쉼도 재미도 없고, 피곤과 오해와 조롱과 실패와 위험밖에 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그야말로 물 한 방울, 풀 한 포기, 구름 한 점 없는 광야를 걷는 것과 같이 여겨질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는 당장에 안 보여도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만 따라가면 거기에 진정한 기쁨과 만족과 성공과 평안과 행복이 있음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악하고 험한 세상에서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이 어쩌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것 같이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양손에 지팡이와 막대기를 드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는 불의의 길밖에 갈 수 없는 우리 인간들이 의의 길을 가는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의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따르는 것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양 무리인 우리들이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믿음의 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이것이 오늘 우리 모두의 신앙고백과 삶의 다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따르는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며 참된 만족과 평안, 치유와 회복, 그리고 구원과 부족함이 전혀 없는 영원히 복된 삶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 양 무리를 교회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 최초로 창립 126주년을 맞은 이 교회에 귀빈으로 초청되어 오신 여러분, 우리와 함께 하나님이 목자이신 양 무리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시 23:1-6 / 정용섭 목사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할 하나님의 말씀은 시편 23편 1절에서 6절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러한 내용이죠. 시편 23편 1절에서 6절까지 아주 짤막한 내용입니다. 일단 제가 먼저 읽을테니까 여러분은 따라서 눈으로 보십시오.
[1]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2]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5]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잘 아는 거죠. 같은 목소리로 내용을 생각하면서 읽겠습니다.
[1]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2]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3]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4]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5]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부어 내 머리에 발라 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6]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아마 시편 전체 150편 중에서 가장 많이 애독되는 시편이 바로 이 23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겁니다. 유대인들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분명히 23편을 가장 많이 읽는다고 볼 수 있어요. 찬송가도 그러고 어린이들도 많이 외울 정도로 아주 익숙한 그러한 내용입니다. 이렇게 23편이 우리들에게 가장 친근하게 가장 많이 읽혀지는 이유는 보기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두 가지예요.
하나는 23편의 언어가 친근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시편 그 단어들을 보면 조금 울적하기도 하고 아주 힘들다고 하는 자기 하소연이기도 하구요. 또 어떤때는 심지어 자기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는, 다 없이 해달라고 하는 그런 단어들이 있고 그러한 부담스런 부분들이, 내용들로 들어가면 거기에도 깊은 영성이 있습니다만 일단 이 단어들이 풍겨주는 느낌으로만 본다면 이 시편 23편은 앞에 있는 시편들하고는 전혀 다르게 따뜻하고 평안해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는게 아닌가 싶습니다.
두 번째 23편의 내용이 종교의 진수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예요. 뭐 시편 전체가 성서신앙을 바르게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기는 있습니다만 여기에는 조금 더 진수에 가깝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 내용은 우리가 차츰 공부하겠습니다만 그냥 1절에서 본다고 하더라도 아쉬울것 없는 참된 만족을 이야기하잖아요. 늘 아쉬움가운데 있는데 종교적 깊이에 들어가게 되면 아쉬울 것 없는 정말 만족스러운 실질적인 그런 삶이 아쉬울 것 없는 어떤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의 진수라고 할 수 있구요. 하나님이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은총이다 이런 것들이 1절에서 6절까지 아주 여기에 중요하게 그리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또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어요. 내용이 종교의 참맛을 우리들에게 전달해준다. 두가지를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시편 23편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깝게 읽혀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얼핏 보기에는 이거는 어린이들도 외우고 가깝게 하기 때문에 천진난만한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어떤 감수성 이런 데 있는 신앙을 표현한 거다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착각입니다. 이거는 청소년들의 감수성이 아니라 오히려 인생살이를 다 거친, 인생의 여러 가지 풍파를 다 거진 나이가 들어서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관조한다고도 볼 수 있고, 그리고 이건 전체적인 것을 조망한다고 볼 수 있고, 그런 관점인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어린이들 청소년들 신앙이 아닌, 원숙한 삶의 우여곡절을 다 거친 노련한, 어떤 면에서 표현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나온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6절까지 한 절씩 내용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시편 23편1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제목을 이렇게 붙이면 좋아요. 주님은 나의 목자, 야훼는 나의 목자,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하는 이 목자. 독일어로 히르케,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부르면서 이 시편을 인제 쓰고 있습니다. 이 목자라고 할 때는 어떤 개인적인 관계라고 보다도 공동체 전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양의 무리잖아요. 목자가 양 한 마리 키우는 것 봤어요? 수 백마리, 수천마리 무리되어 있는 것처럼 이 목자라고 단어를 통해서 이스라엘 전체 무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이런 것들을 내다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호칭을 하면서 하는 말이 아쉬울 것이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들 어떠세요. 이러한 신앙이 실질적인 어떤 것이었을까? 아니면 아니었을까 하는 것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을 것 입을 것 부족했다고 하는 것 다 알죠? 또 양도 사실은 이스라엘 땅이 척박하기 때문에 물과 풀이 늘 부족해요. 사실 이거는 신앙적인 문제입니다. 그 당시는 목마르고 배고픈데 지나놓고 주욱 보면 부족한 것 없었다 이러한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은 현재 당장 목마르고 좀 배가 고파도 이미 지나간 것으로 생각해서 이 삶을 돌아보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 너무 크게 확대되어서 여기 있는 진을 다 빼는데 신앙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노래를 하듯이 이미 다음 시간에 가버리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이것은 어쩌면 인생의 노하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80살 되었다고 생각해 보아요. 여러분들이. 난 그렇게 생각할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 내가 5년후에 몇 년후에 죽을때가 된 나이가 되었다 그렇다면 내 인생을 어떻게 회고할 것인가 그런 생각을 종종 합니다. 현실적으로 이렇게 살기는 하겠지만 이거는 현실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사람을 비디오로 돌려보듯이 하는 그러한 삶이다라고 하는 거죠. 만일 그렇게 된다면 실질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삶을 그렇게 돌아볼 수 있다면 힘을 뺄 수 있죠. 이것 때문에 아등바등 하지 않을거 아니겠어요. 이미 지나간 필름을 돌아보는 건데. 이런 눈을 어떻게 갖겠어요. 이건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삶을 돌아볼때만 가능한 거예요. 이것이 말 장난은 아닌거예요. 이런 현실 삶이 고되니까 이걸 모면하기 위해서 그냥 일부러 생각만 그렇게 하자 아니라 세상살이 정말 그런거거든요. 그걸 우리가 뚫어보지 못하기 때문에 아주 작은 어려운 어려움 때문에 우리 영혼까지 손상되는 우리 삶 자체가 헝클어지는 그러한 일들이 부지기수죠.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그렇게 삽니다. 아쉬울 것 없다 이런 영적인 상태가 필요합니다. 사실은 곰곰이 따지고 보면 아쉬울 것 없죠. 아주 절대적인 궁핍, 그러니까 북한 주민들, 정말 힘든 주민들, 우리 바로 육이오 직후라든지 이럴때 말고 지금과 같은 세대에서는 사실은 아쉬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프지만 않다면 최소한도로 건강하기만 한다면 노동을 해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아쉬울 게 없다. 풍족하다. 실질적인 삶인데 상대적인 빈곤함에 너무 많이 휘둘려 있는 것 같습니다.
1절 후반절과 2절에 굉장히 그림과 같은 장면이 묘사되고 있어요. 푸른 풀밭에 놀게 하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한다. 구약 성서학자 제가 참고한 시편을 주석한 사람의 말을 빌리니까 여기에 히브리어의 고유한 뉘앙스가 있다고 하네요. 그런 것들을 독일어나 다른 말로는 번역해 낼 수 없다고 합니다. 히브리어만이 요 구절에서 말하는 게 있는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곳으로 집중된다고 해요. 이게 무슨 말인지 설명이 더 필요하기는 한데요. 시간에 대한 이해가 히브리인들에게는 독특했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는 늘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넓혀서 생각하잖아요. 따로 따로 다른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히브리 언어 구조속에 이 모든 것이 하나님안에서 하나로 결합된 어떤 그러한 세계를 내다본다는 것입니다. 시간에 대한 이해가 그들에게는 독특한 거예요.
이렇게 상상하는 것이 좋아요. 제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 하고 연계되는 건데 나중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혹은 하나님품에 안겨서 혹은 다른 말로 하자면 궁극적 생명에 참여해서, 또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한다면, 예수의 부활생명에 참여해서 우리가 지금 몸을 갖고 살았던 이 지구안에서 살았던 삶을 다시한번 되돌아 본다면 결국 과거로 된 게 아니라 하나님안에서 현재가 된다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안에서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히브리인들이 볼 때 영원한 현재라고 하는거예요. 이게 확 와닿지 않을거예요. 우리는 늘 과거 현재 미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요. 과거가 바로 현재, 영원한 현재, 하나님안에서 미래 완성된 생명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 모든 흘러간 시간들이 과거가 아니라 그냥 어떠한 방식인지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 안에서 융해가 되어서 영원한 현재가 된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제가 칼국수 먹었는데요 국수안에 밀가루도 있고 고춧가루도 있고 멸치 국물 이런 것이 다 포함되었지만 위속에 들어가서 다 소화되어서 영양소가 되어서 하나가 되버리잖아요. 영양분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았던 살고 있는 시간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라면 융해가 되어서, 위속에서 소화가 되어 하나가 되듯이 영원한 시간속에 들어간다고 하는겁니다. 그러한 뉘앙스가 이 히브리어 안에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늘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주신다고 하는 미래이지만 동시에 현재인, 미래가 현재 안에 들어오는 그런거죠.
3절, 3절 후반절에 보면 목자 자신인데 그 분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 분은 바로 우리의 길이다. 인도하시는 길이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요. 요건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하나님앞에서 새로운 시간이해와 더불어서 시간의 신비인데 우리가 살아왔던 삶도, 먼 미래에 혹은 과거인 동시에 현재인데, 미래와 현재를 하나로 생각해야 되어요. 하나님의 시간에 들어가게 되면 오늘 우리가 살아왔던 모든 삶의 것들이 하나님이 인도 하는 길로 우리가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거는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요. 다시 한번 제가 이렇게 표현해야 되겠네요. 먼훗날, 제가 먼훗날이라고 하는 것은 종말론적인 시간입니다. 생명이 완성되는 시간입니다. 그 훗날에 우리의 삶을 회상하면서 우리는 결국 이렇게 이해하게 될 거예요. 주님께서 나의 인생 길을 인도하셨다. 그러한 것들을 시인들을 미리 경험한 것이죠. 얼마나 놀라워요. 우리는 그러한 것을 모르고 매일 아등바등하면서 살잖아요. 왜 이럴까 왜 저럴까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안되면 불편하구요. 모든 것을 자기 주관성에 다 두드려 맞추려고 하니까 세상이 헝클어져 버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길을 생각해야 된다니까요. 그러면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이예요. 지금 당장 돌맹이에 넘어지는 것 같아도 그러한 것들도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들로 오게 됩니다.
이러한 영성이 우리들에게 필요한데요. 이게 잘 안되요. 사실은 잘 안되요. 왜 안되느냐 하면 여러분들이 아실 겁니다.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건데 자기가 너무 중요합니다. 제가 자주 쓰는 단어로 나르시시즘, 자기연민이예요. 자기 속에 딱 갇혀 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달걀처럼, 새가 알속에 숨어 있잖아요. 안에만 있으면 따뜻해요. 그러나 완전한 생명이 아니거든요. 우리는 알안에 갇혀있는 상태로 모든 세계를 판단하려고 하니까 이거는 도대체 이해가 안되는 거예요. 모두가 자기를 힘들게 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는거예요. 그냥 좀 힘빼고 내버려두고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는 길이다 맡겨야 되고 그걸 못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신경성 병도 걸리고 인간 관계도 정말 나빠지고요. 인간을 이용하려고 그러잖아요. 자꾸만. 그리고 자기의 생명도 손상당하고 이게 악순환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이었다. 그러한 영적인 성숙한 자세를 조금 유지해야 되겠습니다.
그 문제를 시편기자는 4절에서 자기가 젊었을 때 경험한 것을 다시 한 번 회상하면서 이야기하는 거예요.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이 계시오니 무서울 것이 없어라.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 여러분 이거 우리 인생에 찾아와요. 이거는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어요.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뭐 시집장가 잘가서 사회적인 직분도 갖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을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여러 가지 면에서 그런데 불치의 병에서 걸린다거나 사업이 망한다거나 그런 것만이 아니라 그렇게 좋은 쪽으로만 살게 되면 어느 순간엔가 큰 허무에 휩싸이게 될 거예요. 인간은 생활환경이 좋은 것만 갖고는 인간은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이 영적인 동물이라서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이거는 아주 실질적인 그러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회피하거나 자극적인 무엇을 산다거나 취미 생활에 아주 집착한다거나 아니면 권력을 얻기 위해서 비인간적인 행동을 한다거나 그렇게 하긴 하거든요. 그건 인제 악순환이죠.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가 오게 되는데 이 시편기자가 그런 경험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요거는 다윗의 시에 좀 가깝기는 해요. 다윗이 직접 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다윗의 삶에 이런게 많이 있었잖아요. 다윗의 삶을 반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막대기와 지팡이. 하나님의 막대기와 하나님의 지팡이가 우리의 삶에 활동하는 거거든요. 문제는 그것을 우리가 못보는 거지요. 하나님의 막대기과 지팡이를 못 보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왜 하나님의 손길을 우리가 못 볼까요? 이게 여러분 우리가 잘 생각을 해야되요. 불치병에 걸렸다고 하면 삶이 완전히 정말적인 것 같죠. 그렇지 않아요. 정말 자기의 생명을 포기하면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불치병에 걸렸다 진단받으면 정말 이 땅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손길을 의지하게 되면 놀라운 평화를 얻게 됩니다. 나도 개인적으로 그러한 불치병 진단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처음에는 좀 힘들겠지만 난 괜찮을 거라고 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길이 있기 때문에 거기서 평화를 얻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이 땅에서 50년 더 사는 거나 아니면 조금 적게 사는거나 시간적인 계산은 차이가 없는 거니까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있다 그걸 알아야 하는데 그걸 못보는 이유는 지금 우리앞에 놓여있는 것이 너무 크게 부각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게 다르게 보일 수 가 없는 거죠. 이게 참 비극인거에요. 예. 이 시편기자가 아무 걱정 할 것 없다. 1절에서는 아쉬울 것 없다 이야기하구 4절에서는 걱정할 것없다 이야기하구요.
여기서 한단계 더 나가서 5절에 보면 놀라운 표현을 합니다. 원수들 보라는 듯. 원수들은 누구일까요? 니까짓게 잘되나 보자. 원스들은 늘 많죠. 어쩌면 우리의 친구가 원수가 될 수 있어요. 겉으로는 뭐 좋다 좋다 하면서도 흥 그래봐야 너가 어떻게 되겠냐? 사람들은 늘 경쟁하니까 그런 옆에서 노려보고 있는 사람들을 뜻하겠죠. 그걸 내가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요.
여기서 시편 기자가 놀라운 단어들을 세 가지 이야기합니다. 보이죠. 상, 기름, 잔 요 세가지 단어만 갖고도 우리가 묵상을 하기 시작하면 많은 내용들이 들어올 수 있겠네요. 시간이 많이 필요하겠네요. 상 기름 잔 상을 차려주셨다. 무슨 뜻인가요? 잔치상 같은거죠. 하나님이 우리를 중요한 손님으로 초대하셔서 많은 먹을 거리를 올려놓은 상을 차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빈 말이 아니죠. 독일어로 성서주석한 사람이 써 놓았던데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손님으로 초대해주시는 가스트게버, 영어로는 아마 host라고 하나요. 초청해 주는 주인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하나요. 하나님은 이 땅위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풍성한 것을 상에 차려 주시고, 잔치상을 베풀어 주셨고, 그리고 기름을 머리에 발라주셨다. 여성들이 좋아하는 향수를 뿌려주는 거예요. 그리고 잔. 포도주잔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당시에는 포도주가 모든 면에서 중요한 요소였는데요. 전체적으로 풍요로운 향수 냄새를 풍기면서 먹을게 많은 상다리,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음식과 그리고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포도주잔, 이게 아주 문학적인 용어들을 통해서 시편기자가 하나님이 우리를 손님으로 초대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보여요? 이게 안보이면 우리는 불평하면서 살게 되는 거죠. 우리가 손님이라는 사실을 놓쳐 버리는 거죠. 늘 주인처럼 생각해서 주인대접 안해주나. 금만 안해줘도 불평하죠. 나만 이렇게 손해보나. 이게 반복되지 않습니까? 손님이라고 하는 것과 더불어서 이미 우리 주인은 너무나도 풍성한 것을 우리들에게 준비해주셨다고 하는 겁니다. 그게 뭔지는 제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되겠죠. 그거가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없는 사람이예요. 오늘 저녁에 먹은 한 그릇 먹은 밥, 혹은 국수 이게 얼마나 놀라운 우주론적인 사건인지. 이거는 우주에서 우리만이 이렇게 먹을 수 있는 아주 놀라운 먹을거리고 그러한 감격이거든요. 이것이 너무 지천으로 널려 있으니까 우리는 그게 얼마나 값진, 우리 주인이 베풀어주신 상인지, 상에 올려진 음식인지 그걸 모르고 살아가요. 이렇게 좋은 믿음의 식구들끼리 만나서 예배드리고 대화하고 가족을 꾸리고 하는 이러한 모든 생명현상들, 이런 모든 순간순간들까지 이런 것들이 다 놀라운 하나님의 상이며 기름이고 잔이다.
마지막으로 6절에 시편기자가 모든 것을 결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은총과 복에 겨워산다. 은총과 복 이거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여기서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 팔자 늘어졌다 그 차원이 아니라는 것 알죠.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와 같은 순간들이 많이 있었어도 인생을 다 뒤돌아보니 이게 다 하나님의 은총과 복이었다. 그게 다 하나님의 시간안에서 그 은총으로 융해가 되버린거죠.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마지막 구절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영원히 주님집에 거하리로다. 이것이 매일 예배에 참석한다. 교회당에 와서 산다 그런 뜻은 분명히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죠. 생명의 신비와 환희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과 일치되어서 살아가는 삶, 그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시겠죠. 이게 얼마나 시편 23편이 중요한지. 이거를 제발 그냥 좋으니까 그러려니 그런 사람이나 그렇겠지 나는 지금 힘든 일이 많아서 안된다 이렇게 하면 그건 참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이미 우리들 앞에 하나님이 많은 거를 차려주셨는데도, 준비해주셨는데도 다 그런 것을 전혀 은총과 복으로 여기지 못하고 온통 자신의 개인적인 불안과 불만, 힘든 것 그런 것에만 우리의 삶이 소진된다면 우리는 진주를 받은 돼지와 같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제목이 ‘주님은 나의 목자’라고 했어요. 오늘 저도 새롭게 말씀을 준비하면서 늘 듣고 외우고 찬송으로도 많이 부르기도 했는데 새롭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 이게 보통시가 아니구나. 하는 그러한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러한 시편 23편 기자의 영적인 깊이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는 아주 오래전 어떤 시인의 놀라운 신앙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바로 우리 삶의 목자이십니다.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분인줄로 믿습니다. 비록 우리의 삶 앞에 이런 저런 해결해야 될 문제들, 크고 작은 문제들, 혹은 음산한 골짜기와 같은 일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 모든 길이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길인줄을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지팡이와 막대기가 되어주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우리가 걱정하겠습니까? 오늘 시편 기자처럼 아쉬울 것 없다는 그리고 걱정할 것 없다는 그러한 신앙을 저희들에게 허락해주십시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
시 23:1 / 이성희 목사
요즘에 암이라면 모두가 떱니다. 그런데 암보다 더 무서운 병이 있다고 합니다. ‘운동부족병’이란 병입니다. 부족은 모든 면에서 나타나는 증세입니다. 그래서 경험부족, 수면부족, 산소부족, 메모리부족, 운동부족, 용량부족, 물 부족, 이해력부족 등 부족이란 말이 많이 쓰입니다. 부족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 ‘필요한 양이나 기분에 미치지 못함’입니다.
인간의 삶은 모든 면에 부족함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인간은 부족하기 때문에 채웁니다. 채우려는 인간의 욕심은 때로는 더 큰 부족을 만들게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자신의 부족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생활에는 항상 만족하게 생각하고, 자신에는 항상 부족하게 생각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지혜에서 옵니다. 만족할 때 행복이 있고, 행복을 아는 것이 곧 지혜입니다. 욕심 없는 마음 자세는 행복을 낳게 됩니다. 욕심은 그 자체가 부족을 낳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적당히 모자란 가운데 그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기 위하여 노력하는 나날의 삶 속에 행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행복은 물질적 풍요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만족할 줄 아는 마음에서 생깁니다.
“자기도취가 필요한 것은 정치가와 프로 레슬러와 여배우밖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도취나 과시는 자신에게 부족함을 느낄 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자신에 대한 자긍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과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내는 당당함은 오히려 아름다워 보입니다.
성경은 두 벌의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라고 합니다. 바울도 남의 옷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자족이란 두 벌의 옷을 가지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일용할 양식만 가지고도 만족하게 사는 법입니다.
“知足不辱(지족불욕)하고, 知止不殆(지지불태)하니, 可以長久(가이장구)하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족함을 알면 욕보지 아니하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오래오래 편안하게 살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만족하면 욕을 보지 않습니다. 약간의 욕심이 큰 화를 불러 일으키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2%의 부족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아주 근소한 부족을 의미합니다. 2%라도 부족하면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2%가 아주 큰 차이를 가지고 오기도 합니다. 이 2%를 어떻게 채울까요? 사람에게는 완전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2%는 누구나 하나님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이 2%를 채우십니다. 사람에게 100%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은사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에게 만능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불공평하게 만드시지 않습니다. ‘삼손 신드롬’이란 책에 보면 강한 사람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약점이나 허점이 있다고 합니다. 강자가 가진 약점이 있습니다.
만족이란 ‘마음에 모자람이 없이 충분하고 넉넉함’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문제입니다. 만족이란 마음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많아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부족입니다. 아무리 없어도 마음에 차면 넘칩니다.
고린도후서 3:5에는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부족을 채우고 만족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부족을 알고 하나님 때문에 부족을 채우며 늘 넉넉하게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부족함을 모르는 삶의 비결은 이렇습니다.
첫째, 여호와가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23:1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합니다. 시편 23편은 가장 아름다운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시는 주기도문 다음으로 많이 노래된 시입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설정한 것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며 공감이 됩니다. 이 시는 모든 경우에 가장 적절한 시입니다. 시편 23편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플 때나, 성공했을 때나, 실패했을 때나 다 해당되는 시입니다. 모든 경우에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시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합니다. 나의 목자는 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내가 나를 잘 아는 것 같아도 내가 모르는 내가 있습니다. “목자”란 말에서 나를 먹이시는 자, 치는 자이심을 고백합니다. 나의 목자는 초장을 아십니다. 좋은 물이 있는 시내를 아십니다. 나에게 위험한 곳을 아십니다. 파리 떼가 있는 곳을 아십니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초장으로 인도하십니다. 목이 마르면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늑대가 나타나면 지팡이로 막으십니다. 파리 떼가 머리에 붙으면 기름으로 바르십니다. 너무나 나를 잘 아시기에 부족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상에는 먹을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지역은 52%뿐입니다. 인류에게 닥쳐오는 물 전쟁은 가장 심각한 전쟁이 될 것입니다. 10년 뒤에는 물 부족이 20억 톤이 될 전망입니다. 물 부족 인구가 2025년에는 30억 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는 목자이십니다. 그 분이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면 되는데 왜 부족할까요? 인간의 욕심이 부족하게 만듭니다. 몇몇 사람의 독점이 부족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환경파괴가 부족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풍성케 하시는 목자신데 이런 인간의 실수와 잘못이 모자라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함이 없게 하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분이 나를 너무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지으셨기에 내가 구하기 전에 아십니다. 요한복음 10장에는 예수님은 선한 목자라고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압니다. 이름을 각각 불러냅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의 목자는 자기의 양과 남의 양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자기 양을 아는 것이 목자의 본능입니다.
저는 늘 규칙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합니다. 일 년에 한 번 하는 종합건강진단 외에 제가 약한 곳을 일 년에 두 차례 정도 가서 검사를 합니다. 저를 봐주시는 의사는 순환기내과에 한 분, 이비인후과에 한 분, 치과에 한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의사선생님들은 나보다 나의 몸을 더 잘 아십니다. 입을 벌리고 들여다보면 잘 관리하는지 마구 사용하는지 다 아십니다. 내가 내 자신을 잘 아는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합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나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십니다. 사람마다 몸의 구조가 다 다릅니다. 같은 사람이 엄밀하게 따지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다른 사람을 다 알고 계십니다. 저의 약점은 바이러스나 박테리아가 제일 잘 아는 것 같아요 조금만 무리하면 감기에 걸리는데 꼭 목에 신호가 옵니다. 목이 약하다는 증거이겠지요? 이렇게 사람마다 약한 곳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다른 사람을 다 알고 계십니다.
어느 우울한 설교자가 숲 속으로 산책을 합니다. 설교자는 새 군사시설로 들어갔습니다. 경계 순찰하던 경비병이 설교자에게 소리쳤습니다. “정지, 누구요? 왜 여기 온 거요?” 설교자는 갑자기 어리둥절해졌습니다. “뭐라고 하셨죠?” “당신은 누구요? 왜 여기 온 거요?” 설교자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제가 생각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상기시켜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고는 돌아 나왔습니다. 내가 누군지, 내가 어디가 약한지, 내게 무엇이 부족한지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양인 나를 목자인 그 분은 알뜰히 알고 챙기고 계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족합니다. 잠언 27:20에는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삽니다. 이 곳은 만족함이 없다고 합니다. 하늘나라는 반면에 만족함이 있는 곳입니다. 사람의 눈도 그렇습니다. 만족함이 없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눈을 통하여 우리 뇌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간디는 말합니다. “우리 사회는 필요를 위해선 충분하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
인간은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부족을 채워 만족하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기근이 들게 하사 의지하는 양식을 끊으신 하나님이십니다(시 105:16). 그 하나님은 광야생활에서 메추라기를 주시고 하늘양식을 내리사 그들로 만족하게 하셨습니다(시 105:40).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시는 목자이십니다.
둘째, 여호와로 말미암아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35에는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왜 부족한 것이 없었지요? 가져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왜 부족한 것이 없지요? 사람의 만족이란 물질의 양에서 오는 것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만족이란 가진 것에 비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구상에서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들을 보세요. 부자 나라들이 아닙니다. 작년에 보면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호주 옆의 작은 섬나라인 비누아투라고 합니다. 그리고 푸에르토리코, 콜롬비아, 나이지리아, 이런 나라들이 행복한 나라들입니다. 소유가 만족하게 하고, 행복을 준다는 말은 서구 문명의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참 만족은 여호와로 말미암습니다. 주님 한분으로 만족하는 것이 참 만족입니다. 이 세상을 다 얻어도 주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이 없어도 주님을 얻으면 만족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비유 가운데 보화의 비유나, 진주장사의 비유가 바로 그렇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팔아 하나만 얻어도 만족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줘도 안 바꿀 만큼 가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베드로나 마태와 같은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그 좋은 직장과 직업을 다 버리고 주님 한분만 보고 따라갔습니다. 신앙의 위인들과 수도사들이 그랬습니다. 세상의 좋은 직장과 직위를 버리고 주님을 위해 헌신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주님을 따르고, 증거하고, 핍박받고, 순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위대한 삶을 살고 값비싼 만족을 얻은 삶입니다.
지난 번 말레이시아에 가서 들은 얘기입니다. 얼마 전 말레이시아 방송가에 심한 충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나라에서는 무슬림이 아니면 지위를 얻는 것이나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느 인기 앵커우먼이 무슬림을 가장하고 앵커우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그녀는 기독교인인 것을 감추고 앵커로서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녀가 커밍아웃한 것입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발표한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엄청난 불이익이 올 것이 뻔한 일입니다. 결국 그녀는 방송국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후에 호주로 종교적 망명을 갈 것 같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슬림의 개종은 곧 죽음입니다. 이런 위험하고 생명을 위협을 받는 일이지만 주님 한 분이 더 귀중하여 자신을 죽이는 용기가 만족입니다.
2세기에 ‘디오그네터스 서신’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이렇게 적힌 구절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모든 사람을 사랑했지만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모든 것에 풍성했다. 그들은 학대당했지만 학대하는 사람들을 축복했다. 선행을 베풀었지만 행악자로 처벌받았다. 처벌받는 가운데 새 생명을 얻고 기뻐했다”. 자신의 불이익에도 여호와를 선택한 것은 이 선택이 곧 영혼의 만족이며 삶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5:10에는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라고 합니다. 세상의 것에는 결코 만족함이 없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세상보다 크기 때문입니다.
‘다행증’(euphoria)이란 병명이 있습니다. 근거가 없는 병적인 행복감을 의미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볼 때 행복의 근거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 병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근거도 있고, 병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족하고 행복한 분명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이 여호와입니다. 그리스도입니다.
빌립보서 4:11~13 에는 바울의 위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 때문에 부족이 없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것이 만족입니다. 시편의 기자도 103: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이 얼마나 멋진 말씀입니까?
결 론
만족케 하시는 여호와의 이름은 성경에 많습니다. 앞날이 두렵고 혼란합니까? ‘여호와라’ 즉 우리를 돌보시는 목자에게로 달려가십시오. 하루하루 먹고 입는 일을 염려하십니까? ‘여호와이레’, 예비하시는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너무 커다란 도전에 직면하여 있습니까? ‘여호와살롬’,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몸이 아프고 불편합니까? ‘여호와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진찰하십니다. 적진에 고립된 병사와 같은 느낌을 가집니까? ‘여호와닛시’, 깃발이 되시는 하나님께 피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모든 면에 만족케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시편 90:14에는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라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아시지요? 신앙입니까? 열정입니까? 사랑입니까? 그 부족을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부족을 다 채우고 만족하게 하여서 일생을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자와 양
시 23:1 / 이필재 목사
웬만한 교인들은 시편 23편은 다 암송합니다. 다른 분들도 다 암송하도록 하십시오. 그만큼 비중이 큰 성경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비중이 큰 시편 23편을 제가 오늘 갈보리교회에서 처음 설교합니다. 얼마 전 서울에 있는 모 대학에서 설교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갔었습니다. 학생, 교수 한 2천여 명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친 후에 총장님께서 책 1권을 저에게 선물해 주셔서 그날로 다 읽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줄거리 한토막이 오늘 제 설교준비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지금 한국 어느 대학에서 교수로 계신 분이 옛날 20대 시절에 독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오랫동안 거기서 공부하는 관계로 아예 독일 시민권 자격을 가지고 독일인 자격으로 대학을 다녔다고 합니다. 함께 공부하는 유대인 친구가 한명 있었는데 이 유대인 청년은 사실 살아남기 위해서 유대인 신분을 감추고 대학을 다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항상 뭔가 중얼중얼 거리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시간만 있으면 하늘을 쳐다보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겁니다. 그래서 물었다고 합니다. “너는 항상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그게 무슨 소리냐?” 그랬더니 “내가 유대인이다.” “알고 있다.” “네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내가 말해주겠다. 시편 23편을 암송하는 것이다.” “그것을 왜 그렇게 날마다 암송하느냐?” “지금 우리 유대인은 언제 잡혀서 죽을지 모른다. 히틀러 비밀경찰에 의해서 잡혀가고 있는데 언제 내 차례가 될지 모른다. 이 불안감을 시편 23편을 암송하고 나면 다 해결이 된다. 여호와는 내 목자시니…. 그래서 나를 위해서 암송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청년도 “나도 시편 23편을 암송하겠다.” 이렇게 해서 둘이서 함께 히브리어로 시편 23편을 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친구는 유대인 청년이라는 것이 발각이 되어서 그와 그 가족이 잡혀서 트럭에 실려서 죽음의 가스실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친분을 가지고 살던 이 한국 청년은 그 친구가 죄도 없이 죽을 것을 생각하니까 도저히 견딜 수 없이 슬퍼서 그를 실고 가는 트럭을 자전거를 타고 죽을힘을 다해서 ‘이 친구가 죽으면 나도 죽어야지. 죄도 없는 사람이 이렇게 죽으면 되나?’ 그리고 따라가는데 트럭에 따라가는 유대인 친구가 포장을 걷고 바깥으로 얼굴을 쑥 내밀고 자전거를 타고 따라오는 자기를 보면서 활짝 웃으면서 시편 23편을 큰 목소리로 외우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도 따라가면서 똑같이 시편 23편을 막 암송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열심히 따라가다가 그만 자전거가 돌에 부딪히면서 곤두박질을 해서 자기는 길바닥에 쓰러졌고 그 친구는 먼지가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서 그날 가스실에서 죽었답니다. 그런데 2차 대전 때였으므로 이 한국 청년도 독일 시민권자라서 결국 전쟁이 점점 치열해지니까 군대에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러시아 군에게 포로로 잡혔답니다. 이제는 반대로 러시아 연합군에 의해서 하나씩 끌려 나가서 독일군들이 또 총살을 당하게 되었는데 자기 차례가 되었답니다. 총을 겨눈 상태에서 “마지막 할 말이 있느냐?” 물었습니다. “있습니다.” “해라.” 그래서 거기에 있는 독일 사람도, 러시아 사람도,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는 히브리어로, 유대인 방언으로 시편 23편을 암송했답니다. “미즈모르 레다위드 아도나이 로이 로 에흐싸르!” 막 암송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은 저게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는데 집행관이 깜짝 놀란 겁니다. “야! 네가 어떻게 아도나이 로이를 아느냐?” “나 하나님 믿는 사람이다.” “그렇구나.” 그러더니 “나는 유대인이다. 연합군에 가담했다. 그래서 러시아편에서 지금 장교로 이 전쟁을 하는 것이다. 나도 23편을 항상 외우고 있다. 왜냐하면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너 그거 끝까지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다.” “합창하자.” 그래서 사형수와 집행관이 함께 “미즈모르 레다위드 아도나이 로이 로 에흐싸르!” 하면서 유대나라 말로 시편 23편을 막 암송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저게 무슨 말이야? 왜 둘이 합창을 하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끝까지 마쳤습니다. 그랬더니 집행관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군인은 비록 악마의 제복인 독일군의 제복을 하고 있지만 독일군이 아니다. 내가 점검했더니 이 사람은 연합군이다. 한국인이 히틀러에게 강제로 끌려왔을 뿐이다. 풀어주어라.” 그래서 살았답니다. 지금 은퇴를 하시고 아주 연세가 많으신 데도 대학에서 히브리어를 열심히 가르치고 계십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자신이 모든 신자들을 양으로 말씀하시고 자신은 목자로 조명해 주셨습니다. 저는 농촌에서 어린 시절을 살았기 때문에 10대 시절에 누구 집에나 시골에는 동물을 많이 기르지 않습니까? 소도 기르고 돼지, 개, 닭… 여러 가지 동물을 기릅니다. 저는 10가지 동물을 길러봤습니다. 그런데 다른 집이 절대 기르지 않은 양을 길러본 것이 제 목회에 큰 도움이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은 여러 가지 나쁜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방향 감각이 둔해서 스스로 갈 길을 찾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목자가 모시고 다녀야 하는 동물이 양입니다. 진돗개는 수백리 밖에 갖다가 몰래 집어 던져도 제 집을 찾아옵니다. 하다못해 저 산 속의 숲의 새들도 그 넓고 넓은 산에 손바닥만 한 둥지를 지어두었어도 거기를 틀림없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양은 찾지 못합니다. 양의 시력은 정확히 보이는 게 10미터이고 희미하게 보이는 게 20미터입니다. 방향 감각이 없습니다. 어디로 갈지 모릅니다. 그래서 위험에서 피할 줄 모릅니다. 여러분! 동물의 왕국을 보시면 모든 동물이 얼마나 재빨리 자기 위험을 감지하고 재빠르게 피하는지 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은 피하지 못합니다. 땅을 보면 땅벌이라고 있는데 그것을 밟고 서있습니다. 벌이 나와서 쏘면 빨리 도망가야 합니다. 그런데 양은 가만히 앉아서 그것을 다 맞고 죽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미련하게 영혼이 금방 죽을 자리인데도 빨리 뛰어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이게 우리 사람의 목숨입니다.
그 다음에 양은 방어 무기가 없습니다. 하다못해 개미도 자기를 해치려는 적에게 아주 공격적 일침을 가하는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은 없습니다. 제 친구 목사님은 낚시 취미를 가지고 있는데 월요일 아침이면 새벽기도를 마치고 벌써 낚시터에 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주 맛있는 고기를 낚아서 좋아했답니다. 그게 넙치인지 가오리인지 잘 모르겠는데 둥그렇고 끝에 꼬랑지가 나와 있는 큰 고기를 잡았는데 너무 좋아서 ‘이야! 내가 오늘 이걸 다 잡다니!’ 아주 맛있게 생각을 하고 그 아가미에 걸려있는 낚시 바늘을 신나게 뽑고 있는데 드러누워 있던 가오리가 꼬랑지를 슬쩍 들더니 낚싯바늘을 빼고 있던 손을 공격을 했습니다. 앰뷸런스가 와서 실어갔습니다. 의사 말이 까딱하면 죽을 뻔했다고 했습니다. 간신히 살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지금도 손을 보면 “이게 그거다.” 그러는데 오목하게 파여져 있습니다. 친구들이 보면 항상 놀립니다. 가오리한테 죽을 뻔 했다고 “가오리다. 가오리다. 한방에 가오리다.” 양은 물고기만도 못합니다.
그 다음에 자존심과 고집은 모든 동물 중에 가장 강합니다. 이사야 53장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자기 고집대로 각자 갑니다. 얼마나 고집과 자존심이 강한지 양은 목줄을 메지 못하는 짐승입니다. 목줄을 메어놓으면 스트레스 받아서 오래 가면 죽습니다. 항상 방목해야 합니다. 제가 경험한 것 말씀드리면 제가 목적하는 바가 있으니까 목줄을 만들어주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 양 목줄은 그런 줄 알도록 아예 태어날 때부터 해주어야 한답니다. 중간에는 절대 못합니다. 그래서 목줄에다 고리를 걸어서 내가 목적하는 데다 데려다 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목줄을 잡아당기면 죽어도 안갑니다. 하도 안가서 “오늘은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한번 시합을 해보자.” 저도 그때 10대 후반이니까 힘이 세던 시절이었습니다. 세게 잡아당기니까 안 옵니다. 어떻게 하느냐? 마당에다 양쪽 발톱을 박습니다. 끌면 불도저가 땅을 미는 것처럼 밀고 옵니다. 목이 떨어져 나가도 절대로 안갑니다. 해보십시오. 오죽하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내가 죽는 길밖에 없다고 십자가에 죽으셨겠습니까? 양은 높은 곳으로 가길 좋아합니다. 양은 잃어버리기 쉬운 동물인데 아래로 내려오면 동네이기 때문에 찾습니다. 그런데 점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항상 찾아가야 합니다. 성경에 잃어버린 양이 있지 않습니까? 길을 갈 때 절대 빨리 못가는 동물이 양입니다. 천천히 제 고집대로 갑니다. 빨리 몰면 더 천천히 갑니다.
오늘 말씀에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는데 막대기는 다른 동물의 접근을 방어하는 무기이고 지팡이는 양을 인도하는데 쓰는 도구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고 했는데 유대 나라 산들은 우리나라 산 모양과 절대 다릅니다. 떨어지는 날이면 수십 길 떨어져 죽습니다. 제가 이스라엘 유목민을 찾아갔을 때 그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느낀 것은 ‘이 세상의 어떤 직업도 이것보다는 낫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남루한 천막 하나를 모래밭 위에다 쳐놓고 돌멩이 세 개를 갖다 놓고 그 위에다 시커먼 솥단지 하나 걸어놓고 밀가루 반죽해서 그것만 매일 먹고 삽니다. 물이 없어서 세수를 못해서 온 집안 식구들이 집단 거지 떼 같이 보입니다. 낮이면 아열대 기후를 견디면서 양떼를 보호해야 하고 밤이면 양을 잡아먹으러 달려드는 짐승들이 수없이 모이니까 그것을 쫓아야 합니다. 예수님 탄생하실 때 성경 기록을 보십시오. “베들레헴 목자들이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밤에도 제대로 못잡니다. 그래서 유목민 사회에서 좋은 목자는 누구인가? 네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위험하지 않은 곳을 찾을 줄 아는 목자입니다. 푸른 초장, 잔잔한 시냇가 이것을 찾아내야 합니다. 두 번째는 맹수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목자입니다. 세 번째는 양을 잃어버리지 않는 목자입니다. 네 번째는 양을 살찌게 하는 목자입니다. 결국 목자는 양을 위하여 희생적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대로 양이 된 우리들은 어떻게 하는 것이 목자의 사랑을 받는 것인가? 양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장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청각이 발달했습니다. 탁월한 청력이 양의 장점입니다. 특별히 자기 주인의 음성 분별에 대해서 아주 민감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주인과 같은 음성을 흉내 내서 양을 부릴지라도 쉽지 않습니다. 목자들은 누구나 허리에 피리를 차고 다닙니다. 대나무로 된 것이 있고 소뿔을 깎아서 만든 피리 이렇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목자가 피리를 불면 양들은 목자의 위치가 주변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듣고 신변에 안전을 느끼고 아주 편안해 합니다. 또, 이 피리 소리는 다른 공격 짐승들의 접근을 막는 효과가 있습니다. “목자가 있으니까 너희들 접근하지 말라.” 다윗도 사실 이 목동 생활을 하다가 출세의 기초가 되었지 않습니까? 실로 짠 돌팔매질하는 끼가 있습니다. 가죽으로 된 것과 실로 짠 것 이렇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주님의 양된 자들은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따라가면 됩니다. 요한복음 10장 1~5절 주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주의 인도의 피리 소리를 들으면서 따라오는 겁니다. 양된 교인들의 장점이 있습니다. 청각이 발달했습니다. 이것은 너무 지나치게 발달을 해서 목사가 설교를 잘하는지 못하는지 금방 판단을 합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 준비하고 나왔다, 안하고 나왔다.” 보지도 않았으면서 금방 판단합니다. 신학생들보다도 이 면에서는 더 잘 압니다. 요리를 만들지는 못해도 맛을 아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 발달한 청력으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 틀림없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 시편 23편입니다. “여기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라는 문장이 있는데 올리브기름을 양의 머리에 발라주면 어떤 효과가 있는가? 사막성 기후의 독성 있는 파리나 모기가 끊임없이 달려드는데 올리브기름 향취가 파리와 모기를 쫓아내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양의 그 목자 복장을 보면 십자로 되어 있습니다. 한쪽에는 피리가 달려있고 한쪽에는 올리브 기름병이 있고 손에는 지팡이가 있습니다. 목자의 전통적 복장 모습입니다. “그 기름을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보호가 내게 임하였으니” 그런 말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렇게 되면 나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님의 음성을 잘 듣고 그 인도함을 잘 따르는 양무리는 아무 부족이 없다는 뜻의 신앙 고백이 됩니다.
그러면 이 양은 어떻게 변하는가? 단점 투성이의 문제아였지만 장점만 있는, 가장 쓸모 있는 주님의 제자로 변하는 것입니다. 어떤 쓸모가 있는가? 제일 먼저 양은 모든 제사의 희생물입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흘리시는 주님의 보혈을 상징하는 양의 피가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죄가 많은 사람이라도 양 한 마리 희생하면 번제를 드려서 모든 죄를 속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재료로서 양은 쓰임을 받게 되니까 거룩한 양이 되어 버립니다. 두 번째는 인간들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모든 역할을 다 담당하는 게 양입니다. 양은 인간에게 가장 맛있는 요리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는 맛이 없는 쓸모없는 양이었다가 주의 음성을 듣고 따르면 주님이 가장 즐겨하시는 사역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양은 우유를 생산하는데 인간에게 가장 고단백질, 건강 보탬을 해줍니다. 현지에서 생산되는 양젖은 젖소 우유보다 언제나 배나 비싸게 판매가 됩니다. 신앙 좋은 주님의 양들은 온 세상 구원 사역에 가장 영양가 높은 생산력 있는 사역자로 변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 다음에 양털은 인간의 몸을 보호해주는 가장 따뜻한 옷감을 제공해 줍니다. 해마다 몽골에 선교팀이 수없이 가지 않습니까? 겨울에 가보십시오. 영하 40도입니다. 그러나 아무 문제없습니다. 양고기를 많이 먹기 때문에 지방질이 많아서 추위를 안 느끼고 양털로 짠 스웨터를 하나 입으면 영하 40도도 넉넉히 견디어서 다들 스웨터 하나씩 사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입을 필요가 있습니까? 너무 더워서 여기 한국의 기후에는 절대 못 입습니다. 저도 아주 최고로 좋은 것으로 하나 사왔다가 입을 기회가 없어서 그 다음에 몽골 가서 몽골 사람 주고 왔습니다. 양 가죽은 각종 생활필수품에 재료로 쓰임을 받는데, 여러분! 성경도 제일 처음에는 양피지 성경이었습니다. 양을 잡아서 가죽을 햇볕에 말려서 딱딱해진 겉장에다 성경을 쓴 것이 보존되어 지금 우리가 이렇게 활자 성경을 가지고 있는데 양들이 희생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이 주의 음성을 듣고 이 목자를 잘 따르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귀중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적 사역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앞에는 언제나 두 가지 길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따르던가 아니면 목자의 음성을 거역하고 다른 길로 가든가 그렇습니다. 유목민을 가리켜 ‘베두인’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도 생활이 똑같습니다. 밤에 잠을 잘 때 양무리 곁에서 함께 잠을 자다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신속하게 반응해서 양떼를 지킵니다. 목자이신 주님은 항상 우리 곁에서 우리의 상황을 살피시고 가만히 계신 것 같아도 언제나 내 주변에 신속한 대응을 하는 보호자로 항상 계시다는 것을 다윗이 목자 생활을 통해서 확실했기 때문에 이렇게 훌륭한 신앙 고백을 한 것입니다. 우리 다 다윗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시편 23편을 히브리 방언이 아니지만 한국어로 다 같이 한번 큰 소리로 읽겠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할렐루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시편 23:1-6 / 성홍모 목사, 영주교회
“티보잉 열풍, 하나님을 자랑하라 - 팀 티보우(Tim Tebow)” 영상을 보신 후에 말씀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시고, 하나님만을 사랑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계에 드러내야겠습니다. 곳곳에서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각자가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을 드러내어야겠습니다.
오늘 교독문은 시편23편을 새번역으로 읽었습니다. 이 시편23편은 기독교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을 맛소라 사본이라고 합니다. 오랫동안 유대의 티베리아스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 맛소라 학파의 랍비들이 가지고 있었던 성경입니다. 맛소라 성경에는 이 시를 시작하면서 ‘다윗의 시’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미즈모르 레다비드”라고 하여 다윗의 시라고 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1절 속에 들어가 있지 않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1절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다윗은 목동 생활로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목자인 왕이 된 사람입니다. 다윗이 이 시편23편을 저작하였습니다.
시23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시편이기 때문에 이 시를 가지고 설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시는 매일같이 암송하는 시요, 사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암송하면서 기도하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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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모르 레다비드” 다윗의 시라는 말입니다. “예호바 로이” 그러나 읽을 때나 말할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야훼, 예호바라고 하지 않고, ‘아도나이’라고 해야 합니다. ‘나의 주’라는 뜻입니다. “아도나이 로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 “로 에흐싸르” 내게 부족함이 없다, “빈옷데 데쉐” 연한 풀의 초장에, “아르비체니 알 메 메누호” 잔잔한 물가로, 쉴만한 물가로, “예비나할레니” 그가 나를 인도하신다. 시23편을 히브리어 원문을 들어보겠습니다.
장신대 장영일교수님이 쓴 ‘유다광야에서 읽어 보는 시23편’이란 책에서 한 이야기로 책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한 대학에서 라틴어를 가르치는 연세가 많으신 한 교수님은 라틴어만이 아니라, 히브리어도 잘 하시는데, 히브리어를 잘 하게 된 동기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제2차대전 당시 독일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 함께 공부하는 유대인 친구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유대인 친구는 두 시간 정도 수업을 한 후에 쉬는 시간이면 항상 알아들을 수 없는 시 한편을 소리 내어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그 친구가 외우는 시는 성경의 시편23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시편을 왜 암송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의 말은 이 시편을 외우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상쾌해져서 공부가 잘 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아도나이 로이, 로 에흐싸르...”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에게 불행히 찾아왔습니다. 나치의 핍박을 피해 은신처에 숨어 있던 유대인 친구가 나치의 비밀경찰에 붙잡혀 끌려간다는 소식을 독일인 친구가 듣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급히 그곳으로 달려갔을 때, 유대인 친구와 그의 가족들은 이미 트럭에 실려서 어디론가 떠나고 있었습니다.
독일 친구가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아 친구의 얼굴이라고 보려고 눈물범벅이 된 채로 트럭을 따라가는데, 갑자기 트럭 밖으로 친구가 고개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친구는 뜻밖에 웃는 얼굴이었습니다. 그 때 그 친구는 갑자기 소리를 높이 무엇인가를 외치기 시작했는데, 다름 아닌 시편23편이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가스실로 끌려가면서 미소를 지으며 시23편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뒤따라 가다가 돌부리에 부딪쳐 자전거에서 떨어졌는데, 그 트럭을 이미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유대인 친구가 잡혀간 후에 독일을 최후 발악을 하면서 더 많은 학생들까지 징집하였습니다. 그 독일인 친구도 군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전선에 투입되면서 러시아에서 연합군에게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독일인 포로들을 총살하는데 끌려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에 가스실로 끌려가면서 시23편을 암송하던 친구를 생각하며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자고 다짐하였습니다. 함께 포로된 독일 병사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총알에 쓰러지는데 드디어 친구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고 하니 말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친구가 떠나면서 암송하였던 시23편을 히브리어로 천천히 소리 내어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그러자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져가고 자신도 알 수 없는 힘과 용기와 평안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연합군 장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목청을 돋우어서 같은 히브리어로 시23편을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연합군 장교는 러시아계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장교는 독일 친구를 풀어주라고 하였습니다. 어안이 벙벙하여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은, 그가 비록 독일군 악마의 제복을 입고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백성입니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시편23편은 암송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어려운 순간에도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겠습니다.
이 시편을 하루에 다섯 번씩 암송하여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도 있습니다. 번민과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어느 목사님이 시23편을 하루 5번 암송하라고 처방하였는데, 그가 이 말씀에 붙잡히고 이 말씀의 주인이신 목자 하나님에게 붙잡혀 성공하였다고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은 히브리어 “예호바 로이”라고 하는데, 구약 성경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상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목자라고 하는데,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목자가 되시기에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라”라고 합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목자가 항상 인도해주고, 따라다녀야 합니다. 양이란 짐승은 정말 약한 짐승입니다. 모든 것, 먹고 마시는 것, 안전하게 사는 것까지 목자가 보살펴주어야 하는 짐승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목자, 자기의 목자라고 고백하는데, 과연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쩌다 막연히 예배하는 하나님은 아닙니까? 날마다 높이고, 항상 모시고, 감사하면서 찬송하는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나에게도 하나님이 계시고, 나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도 하나님의 종이 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시편18:1-2에서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나의 힘, 나의 반석, 요새, 건지시는 분, 하나님, 바위, 방채, 구원의 뿔, 산성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 나의 하나님, 나의 생명이시요, 영원히 사랑하고 예배하는 나의 창조주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시기에 하나님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다윗은 천성적으로 양을 사랑하였고, 양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자나 곰 같은 짐승과 싸웠습니다. 돌팔매질을 잘하는 것은 그가 양을 지키면서 배운 것으로 블레셋의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전쟁에 참전한 형들의 안부를 알기 위해 전선에 갔다가 골리앗을 죽이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 후로 사울의 사위가 되었고, 사울의 미움을 받아 수년간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적국 블레셋에 망명할 수밖에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가 수많은 전쟁을 겪고, 죽음의 골짜기를 다니던 중에 건짐을 받았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그의 신앙고백의 절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시23편을 내었습니다.
이 시의 배경을 보면 고대 근동지방에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고, 목자는 곧 양의 생명이었습니다. 양은 겁이 많고, 어둔하고 어리석은 가축입니다. 시력도 좋지 않아 10m 이상을 바라보지 못하기에 여러 맹수의 밥이 되었습니다. 날카로운 이빨도 없으며, 발톱도 무디고, 발목마저 약하여 빨리 달리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소극적으로 행동하고, 무저항적이며, 의존적으로 모방을 잘하고 항상 무리지어 다니고 있습니다. 사람이 잡아서 죽이면 반항도 못하여 그래서 항상 신에게 드리는 제물이 되었습니다. 몸은 항상 지저분하고 더러워져 목자가 목욕을 시켜주지 않으면 몸에 묻은 오물로 인해 악취가 나고 질병에 걸리기 쉬운 동물입니다.
양에게 목자가 필요한 가장 빠뜨릴 수 없는 이유는 무서울 정도의 식성이 문제입니다. 무한대의 식욕과 예민한 청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절제시키지 않으면 배가 터지도록 먹습니다. 나뭇가지는 물론 풀뿌리까지 남기지 않습니다. 한 장소에 두 주 이상 머물면 그 지역의 모든 식물은 큰 나무를 제외하고, 뿌리째 남기지 않고 다 먹어 치우기에 황무지도 바뀌게 됩니다.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어치우는데, 관광객들이 버리고 간 플라스틱 병도 먹어버립니다. 그러다가 양들은 창자가 찢어져 죽게 됩니다.
양이란 짐승이 아주 무력하지만, 청력이 예민하기 때문에 멀리서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목자를 잘 따라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선한목자이십니다. 요10:11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하셨고, 요10:14-15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습니다. 요10:16에 “또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이었으나 주님은 당신에게 주어진 양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목자는 천성적으로 긍휼한 마음이 있고, 어린 짐승이라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기에 목자가 됩니다. 목자의 착하고 인자한 성품이 양들을 먹이고 보호하면서 목양하는 것입니다.
목자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명예를 걸고 자기에게 맡겨진 양떼를 생명처럼 아끼며 돌아봅니다. 하나님이 선한 목자가 되시는 것은 당신의 이름을 걸고 그 이름 때문에, 사랑과 애정으로 돌아보아 주십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짐승을 대적하시고, 한 마리의 양이 죽음의 골짜기로 다닌다고 하여도 내버리지 않고 찾아오시고 건져주십니다.
유대의 골짜기는 험하기로 유명합니다. 해발 -450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골짜기가 유대에 있습니다.
마침내 목자는 양들을 하나도 낙오되지 않게 인도하여 양의 우리에 들여 평안히 안식하게 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원수 대적들에게서 건져내시고 하루 풍성한 꼴로 배부르게 하시다가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셨습니다. 우리는 어린 양들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두려움과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힘든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잊어버리면 두려움에 빠지고 절망하게 됩니다.
잘 아는 복음성가로 만들어진 시23편이 있습니다.
“여호와 나의 목자 내게 부족 없네
푸르른 초장 위에 나의 몸 누이시네
선한 목자 오 나의 목자여
생수가 넘치는 곳 날 인도 하시네”
우리의 입에는 찬송이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찬송가399장은 21세기 찬송가에 새로 들어온 성가곡입니다. 학생 때에 이 곡을 즐겨 불렀는데, 화음도 잘 맞고 가사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린 양들아 두려워 말아라 주님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그 양떼들을 항상 지키신다.
오직 믿음 믿음으로 두려움 없으리 오직 믿음
오직 믿음 믿음으로 두려움 없으리 오직 믿음”
우리는 찬송을 불러도 이렇게 힘이 되는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어떤 한 목사님이 이웃 교회에 시무하는 후배 전도사님으로부터 그의 교회 주일 밤 예배에 설교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기로 약속을 하고 날짜가 거의 되어갈 무렵이었습니다. 이웃 교회의 전도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주보에 실기 위해 설교제목과 성경본문을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본문은 시편 23편 1절부터 6절까지요." 그러자 전도사님은 "그러면 제목은요?" 하고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제목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전도사님이 받아 적으면서 "그 다음에는 요?" 하고 물었습니다.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든지 그 뒤에 뭐가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약속한 주일 저녁 예배에 그 이웃교회를 찾아갔습니다. 안내를 받아 강단으로 올라가 자리에 앉아 주보를 펼쳐 보았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밤 예배 설교제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해?"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기가 콱 막혔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란 제목을 주고 핀잔처럼 전도사에게 한 말인데, 연이어 제목으로 붙여놓았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은 찬송을 하면서도, 눈을 감고 기도를 하면서도 제목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설교를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이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목사님은 "그래, 제목대로 설교를 하자!" 하고 결심을 했습니다. 준비한 설교의 원고를 덮고 전혀 새로운 각도로 설교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목을 바꾸니 성경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목사님은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은 푸른 풀밭의 싱싱한 풀을 원하십니까? 맑은 시냇가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시편 23편에 나오는 양은 그 풍성한 풀밭에서 풀을 뜯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누워 있습니다. 너무 배가 불러서이겠습니까, 아니면 욕심이 없어서이겠습니까? 양은 배가 불러도 몇 시간씩 계속 풀을 뜯고 또 뜯어 먹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단순하고도 분명합니다. 목자에게서 오는 참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내가 그 분의 양이 되니 참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렇게 외치자 온 교회 성도들이 "아멘, 아멘~"하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양들이 가장 안전할 때에는 목자를 따라갈 때입니다. 그러나 양들이 가장 불안을 느낄 때는 목자를 떠나 자기 혼자 다닐 때입니다. 여러분,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나에게는 목자가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고 외치면서 부족함이 없는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시 23:1-6 / 김동호 목사
저는 지난 주 호주를 다녀왔습니다. 지난 화요일이 귀국이었는데 여러분들도 아시는 바와 같이 그날이 큰 태풍이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역대 5위 권 정도의 강력한 태풍이라는 예고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지금 말라위에 가 있는 큰 아이와 한국에 있는 아이들이 걱정하는 문자를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 그것이 걱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 혼자 비행기가 과연 갈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를 판단하여야 하고 그리고 그 비행기를 제가 몰아야만 한다면 아마 걱정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항공사나 아니면 기상청 같은 곳에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저들은 저하고는 다른 시스템과 기술로 항공기가 이착륙을 할 수 있는지를 판단할 터인데 요즘 실력과 수준을 생각하면 그것은 크게 염려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비행기는 예정보다 약 30분 정도 늦게 출발을 하였습니다. 태풍 때문이었습니다. 착륙할 때에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항공사의 시스템과 그리고 지금 비행기를 조종하고 있는 기장이 오랜 비행경력을 가지고 있는 베테랑이니 조금도 염려하실 것이 없다는 멘트였습니다. 비행기는 평시와 다름없어 보이게 잘 착륙하였습니다. 제 생각과 판단이 옳았습니다. 항공사와 기장을 믿었었는데 제 믿음대로 된 것이었습니다.
살다보면 태풍과 같이 큰일들이 우리에게 불어 닥칩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 그리고 판단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우리를 위협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요즘 저를 가장 두렵게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범행들입니다. 특히 여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입니다. 제게는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손녀 딸들이 있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저는 그런 뉴스를 볼 때마다 저희 아이들 생각을 합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저도 저희 손녀 딸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생명을 걸고서라도 아이들을 지켜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 생명이 그 일에 별로 큰 힘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큰 힘이 아니라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 힘과 능력 밖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제 큰 아이로부터 메시지가 왔습니다. 큰 아이는 지금 말라위에 가 있습니다. 저희 재단이 사역하고 있는 곳에서 약 차로 한 시간 정도 거리에서 에이즈 퇴치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재단 직원들은 그물리라에 있고 저희 아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 직원들은 대양누가병원 안에서 기숙사와 사무실을 얻어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말라위의 상황이 참 쉽지 않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거의 지난 일 년 내내 경제가 워낙 좋지 않아서 주유소에 휘발유 공급이 제 때 되지 않았습니다. 주유소에서 휘발유를 사기 위하여 보통 서너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서너시간을 서도 앞에서 기름이 끊기면 그냥 돌아와야 하는 상상 할 수 없는 일들이 말라위에는 있습니다. 요즘은 수도국이 파업을 하여 수돗물이 끊겨 어렵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크게 염려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편한 일일 뿐이지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힘이 없으니 공권력도 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제일 걱정하는 일은 치안문제입니다. 말라위 사람들은 품성이 착하답니다. 그래도 그 착한 품성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경제가 너무 나쁘기 때문입니다. 저희 재단도 그물리라 사역을 인수하기 바로 직전 사무실에 강도가 들어 모든 것을 다 털어 갔었습니다.
저희 큰 아이가 있는 대양누가 병원도 벌써 세 번이나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수사조차 이루어지 않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제 새벽에는 병원 기숙사에 하이에나 떼가 나타나 주차해 놓은 자동차 타이어를 다 물어 뜯어 놓고 갔답니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제 아들과 저희 직원들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들을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냥 다 포기하고 돌아오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큰 태풍이 있었지만 그냥 뚫고 한국으로 귀국하였듯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태풍 같은 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며 살아가려 할 것입니다.
항공사와 조종사를 믿듯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저는 이 신앙고백이 좋습니다. 그리고 저는 정말 그 신앙고백처럼 하나님을 믿습니다.
꽤 오래 전 어머니께서 영동세브란스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신 적이 있었습니다. 방광이 늘어져서 자꾸 소변을 지리셔서 그 방광을 제 자리로 올려 붙이는 수술이었습니다. 수술하기 전 사촌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형, 고모 그 수술을 받으면 안 돼’ 자기 장모가 똑같은 수술을 받으셨는데 경과 좋지 않아 고생을 하신 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생의 말에 의하면 방광을 일 미리가 올라가도 안 되고 내려와도 안 되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어서 수술 후에도 고생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경우 동생을 믿지 않고 의사를 믿습니다. 동생 말이 거짓이어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술을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의사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냥 수술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동생의 전화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저는 누구에게 사적인 부탁을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성격입니다. 그런데 그 때는 좀 달랐습니다. 병원에 누가 아는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병실에 주보가 한 장 있었습니다. 병원에 원목실이 있고 환자들을 위한 예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보에 목사님 성함과 연락처가 있었는데 그 옆에 원장님 성함도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성함을 보니 제가 잘 아는 장로님이셨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원장실로 달려갔습니다. 원장실이 2층인가 그랬었는데 계단을 올라가다가 멈추었습니다.
어머니의 수술이 완벽하게 되는 일이 원장 손에 달린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냥 도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일층 의자에 기도를 하려고 앉았습니다. 그때 오늘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오늘 본문 말씀 시편 23편이 머리에 떠 올랐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족함이 없다는 말씀이 그렇게 마음에 와 닿을 수가 없었습니다.우리 어머니의 방광을 일 미리도 올라가지 않게 내려가지도 않게 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우리 하나님 밖에 없으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우리 어머니 수술하는 의사의 손을 붙으시사 우리 어머니 방광 일 미리 올라가지도 않고 내려가지도 않게 해 주세요” 우리 어머니 수술은 제 기도대로 되었습니다.
다윗은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의 생에는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특 A급 태풍이 많이 불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하태평이었습니다. 다윗은 시편 3편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리로다. 내가 누워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으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 3:1-6)
오늘 본문의 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정말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에게도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었지만 다윗은 조금도 그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하태평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실제로 살았습니다. 골리앗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벌벌 떨 때에도 소년 다윗은 그 상황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막내가 다섯 살 때 손을 잡고 골목을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골목 맞은 편에서 5학 년 짜리 아이 하나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보자 제 막내가 저에게 일렀습니다. “아빠 저 형아가 나 때렸어” 복수해 달라는 말이었습니다.
못들은 척 그냥 지나가려 했더니 막내가 제 손을 뿌리치고 내려가 그 5학 년 짜리를 발로 한 대 차주고 왔습니다. 그때 제 막내의 그와 같은 모습을 보면서 저는 다윗이 골리앗을 어떻게 이겼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 여섯 살, 골리앗 5 학년, 하나님 80kg !!!...."
저는 제 손녀 딸들의 앞날과 안전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저는 말라위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 아들과 직원들의 안전을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제 손이 미치지 않는 일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윗처럼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맞으십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우리에게 부족한 일이 많이 생깁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목자이시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다고 했는데 왜 그런 일들이 생기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목자가 아니시기 때문일까요? 누구에게는 목자가 되어 주시고 누구에게는 목자가 되어 주시지 않으시기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에게도 능치 못하실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23편의 모든 고백은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구절에 달려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말은 다윗과 하나님의 관계와 사이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다윗과 하나님의 사이는 양과 목자의 사이라는 것입니다.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입니다. 짝 사랑으로 결혼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나도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도 나를 사랑했기에 결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내는 나를 사랑했지만 내가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거나, 나는 아내를 사랑하는데 아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변함이 없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자 되심은 우리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에만 작동이 되는 진리입니다.
독일 뤼벡교회의 낡은 벽에 붙어 있는 돌 판에는 ‘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라는 시가 새겨져 있답니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러보지 않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 따라 걷지 않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하면서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강하다 하면서 존경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을 때에 나를 탓하지 말라.’
저는 제 손녀 딸의 안전과 행복을 위하여, 말라위에서 일하고 있는 우리 아들과 직원들의 안전과 사역의 성공을 위하여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에 승부를 걸겠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믿음의 관계에 집착하겠습니다.
늘 주라 부를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을 따르겠습니다. 늘 하나님을 빛이라고 부를 뿐 아니라 우러르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늘 길이라고 부를 뿐 아니라 실제로 그 길을 따라 걷겠습니다. 하나님을 삶이라 부를 뿐 아니라 실제로 의지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존귀하다 말로만 하지 않고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섬겨살겠습니다. 하나님을 강하다 강하다 말로만 하지 않고 진심으로 믿고 존경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의로우신 분이시라고 말로만 하지 않고 늘 두려워하며 살겠습니다.
그래서 다윗처럼 저도 여호와가 저의 목자가 되게 하겠습니다. 저의 모든 삶을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결정하시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든 삶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게 하겠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유명한 고백을 합니다.
믿음이 능력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지만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요 실상입니다. 저는 믿음에 생명을 걸고 싶습니다. 항공사와 조종사에게 결정과 판단을 맡기고 강력한 태풍이 지나가는 당일 비행기를 타고 비행기에서 잠이 들듯, 내 인생을 단 번 무너트릴 강력한 태풍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께 내 인생과 삶을 내어 맡기고 주가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이 땅에서도 천국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목자이십니다.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목자이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잔이 넘치는 삶
시 23:1~6 / 김광일 목사
폴 칼슨(Paul Carlson)은 아프리카 콩고 의료 선교사였습니다. 수많은 흑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면서 하루에도 100여명씩이나 치료를 해주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칼슨 선교사님, 피곤하지 않습니까? 너무 과로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칼슨이 대답합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과 가까이 생활하기 때문에 피곤을 알지 못합니다. 매 순간 보람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 후에도 칼슨은 계속해서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을 전하며 의료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반란군에게 피살을 당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주머니에서 포켓 성경을 발견하였는데 첫 장에 ‘평화(Peace)’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암흑의 대륙 아프리카에서 더위와 빈곤과 질병에 맞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싸우던 칼슨은 비록 순교자가 되긴 했어도 하나님이 목자 되심을 믿고 항상 잔이 넘치는 평안의 삶을 살았던 증거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을 믿고 따를 때 우리의 잔도 넘치게 될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목자와 양에 비유하여 묘사한 전형적인 전원시로서 시편의 백미라고 부릅니다. 저자 다윗은 5절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인생은 긴 세월 동안 고통을 당하였기에 이러한 고백이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런데 험한 인생을 살았던 다윗이 어떻게 “내 잔이 넘치나이다” 노래할 수 있었습니까?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가능하였습니다. 상처뿐인 인생, 끊임없는 배신과 복수, 가슴을 찢는 슬픔이 따라다녔지만 상황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목자 하나님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에 은혜가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 빈 잔을 두셨습니다. 그 잔이 은혜와 사랑으로 가득 찰 때 비로소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며 살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생들은 빈 잔을 물질의 소유, 쾌락, 명예 같은 것으로 채우려 하지만 채워지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그 잔이 채워지며 넘치는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잔이 넘치는 삶’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다윗은 어떻게 고백하였습니까?
첫째로 나를 소생시키시니
코칭(coaching) 전문가 서우경 박사는 ‘예정’이라는 저서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불교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불교 대학원까지 공부한 열성 불자였습니다. 31살 되던 해, 대학원 졸업논문을 마무리하던 새벽 3시경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갑자기 입에서 방언이 터져 나왔고 교회에 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교회에 못 가도록 그녀를 집안에 가두었습니다. 그때부터 몸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온갖 약을 써도 안 되고 체중이 30㎏이나 줄어 생명이 위험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때 신앙을 가진 후배의 도움으로 기도원에서 금식하는 가운데 성령의 능력으로 소생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가족이 예수를 영접하였고, 남편 역시 복음 증거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신학을 공부한 그녀는 연세대학교에서 코칭을 가르치며 복음 전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소생케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그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17년 전까지 주님과 상관없는 불신자로 살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서른세 살에 예수를 만났을 때 나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신 분이셨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오늘도 살아 계셔서 나와 같은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했을 때, 이미 창세전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예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주님은 3년 동안 불치병으로 누워 지내던 나를 찾아오셔서 모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주의 성령을 보내시고 동행해주시는 기가 막힌 일이 기적처럼 내 삶에 일어났습니다. 불가능한 일, 도저히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라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의 ‘소생’은 ‘하야’인데 살아있다는 의미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이 영혼을 살아있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생명력이 끊임없이 공급되는 것 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기에 하나님과 관계가 중요합니다. 시인 다윗은 영혼이 침체 상태에 있다가 회복되는 경험을 하였기에 그 하나님이 살려주셨다고 찬양합니다.
양은 뒤집히면 목숨이 위태하게 됩니다. 몸집에 비해 다리가 짧아 균형을 잡기 힘들어 뒤집히면 일어나지 못합니다. 공포에 사로잡힌 향은 버둥거리다가 혈액순환이 안 되어 결국 숨이 멎어 죽고 맙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뒤집혀진 양이 있는가 항상 살피며 뒤집혀 버둥거리고 있는 양을 보면 즉시 세워 줍니다. 혹시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까? 뒤집혀 버둥거리는 양처럼 어찌해야 할바를 모를 때가 있습니까? 목자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뒤집힌 양을 바로 세워 주는 목자처럼 하나님께서 영혼을 소생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목자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잘못된 길을 갔다 할지라도 돌아오기만 하면 다시 소생시켜 주시는 하나님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나와 함께 하시니
장영일 교수의 ‘유다광야에서 읽어 보는 시 23편’에 나오는 글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신학대학 교수가 가끔 학생들 앞에서 시편 23편을 히브리어로 읊으며 눈물을 뚝뚝 흘리셨습니다. 이상히 여긴 학생들이 묻습니다. “교수님! 시편 23편이 그렇게 감동적이십니까?” 학생들의 궁금증에 교수는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습니다. “학생 시절, 유대인 청년과 함께 공부를 하였는데 그 유대인 청년은 혼자 있을 때 항상 히브리 원어로 다윗의 시를 암송하는 것이었다. '아도나이 로이, 로 에흐싸르...' 그때 나도 그 유대인 청년을 따라 시를 외우게 되었는데 바로 시편 23편이었다. 히틀러 정권 시절에 그 유대인 청년은 아우슈비츄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입술에서는 시편 23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 또한 러시아 전선에 투입되었고 불행히도 포로로 잡혀 처형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총살의 위태로운 상황에서 나는 유대인 청년이 암송했던 시편 23편을 깊은 감동 가운데 읊고 있었는데 총살을 진행하던 유대계 장교가 '시편 23편 다윗의 시를 암송하는 자는 그가 비록 적군이라 할지라도 그는 결코 악한 사람이 아니다'라며 나를 풀어주고 안전한 장소까지 데리고 가주었다.” 시편 23편에 나타난 하나님이 어려운 순간에 함께 하셨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다면 분명히 하나님은 함께 하시사 잔이 넘치는 삶을 체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생명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의 흘리신 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평탄하게 지날 수 있도록 만드셨습니다.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하늘가는 길도 동행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못할 곳은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혹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십니까! 목자 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믿으시기 바랍니다. 죽음의 골짜기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담대하게 지나가시기 바랍니다.
필립 켈러(Phillip Keller)는 목자 일을 하며 양떼를 키웠던 경험을 ‘양과 목자’라는 저서를 통해 이렇게 전합니다. “여름이 끝나고 골짜기를 지나 겨울의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양들에게 가장 위험한 시간입니다. 그 시간은 목자들이 긴장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양들이 어떻게 될까봐 한 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고 주목합니다. 가까이 밀착하여 함께 하는 목자들로 양들은 생명이 보존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양들은 골짜기에서 기쁨의 소리를 지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사망과 시련의 골짜기에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생명의 골짜기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나를 안위하시니
작가 론 멜(Ron Mehl)은 ‘The Cure for a Troubled Heart (상처받은 마음의 치유)’ 라는 책에서 아들의 이야기를 합니다. 절망에 빠진 아들은 방향을 잃은 배처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짐작하였지만 ‘왜 그러냐?’ 고 물을 수 없었습니다. 더 괴로울까봐, 더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였습니다. 게다가 자신이 해결해 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절망에 처한 아들을 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위로할까?’ 고민하던 아버지는 밤이면 아들이 자는 방으로 가서 옆에 누웠습니다. 눈을 뜨고 천장을 쳐다보며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 생각하였으나 도무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누웠다가 나왔습니다. 다음날도 아들이 자는 방에 들어가 옆에 누웠습니다. 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왔습니다. 여러 날 아들 방에 들어가 옆에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아버지가 조용히 들어와 옆에 눕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이 없어도 아버지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아버지도 자신 때문에 괴로워하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생각했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다. 내 마음을 이해해주시는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가?’ 큰 위로를 얻은 아들은 마침내 절망을 떨치고 일어나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 4절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에 나오는 ‘안위’의 사전적인 의미는 ‘마음을 위로하고 몸을 편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은 ‘위로(comfort)’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목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양을 치는데 지팡이와 막대기를 사용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목자의 경험을 떠올리면서 지팡이와 막대기가 바로 안위 즉 위로의 상징인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중동에서 목자들이 사용하는 지팡이는 끝이 구부러져 있고 부드러운 갈고리가 붙어 있습니다. 목자들은 길에서 넘어진 양을 보면 지팡이로 양의 목을 걸어서 일으켜 세웁니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진 양은 지팡이로 건져 올리기도 합니다. 구조하는 역할을 감당하는 목자의 지팡이가 보이지 않을 때 양들은 마음에 심한 불안을 느낀다고 합니다. 지팡이를 보아야 안심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위로를 잊을 수 없었습니다. 목동에 불과한 자신을 왕으로 높이 세우시고 지켜주셨습니다.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 때마다 강력한 지팡이로 끊임없이 위로해 주셨습니다. 때로 세상이 더 커 보이고, 원수의 공격이 더 강해 보이고,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순간도 있었지만 지팡이와 막대기로 언제나 위로하시는 목자 하나님이심을 믿었기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작은 도시에 음식점이 있었는데, 30년 동안 그곳에서 성우 같은 목소리로 손님들을 매료시킨 연극배우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시편 23편을 분위기를 살려가면서 감동적으로 낭송했습니다. 낭송이 끝나자 손님들이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한쪽 구석에서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이 일어났습니다. “나는 오늘로 100살이 되는 탐 롤린스(Tom Rollins) 목사입니다. 저도 시편 23편을 좋아하는데, 한번 암송해 보겠습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시편 23편을 천천히 크지 않은 목소리로 암송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도다.” 백발이 성성한 목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뺨을 적셨습니다. 좌중이 숙연해졌습니다. 깃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습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들이 들려왔습니다. 조금 전에 같은 시편을 낭송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은 배우는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번도 이러한 반응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오늘 저도 똑같은 시편 23편을 낭송했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이렇게 다를 수 있습니까?” “당신은 시편 23편을 잘 낭송 했습니다. 물론 시편 23편을 잘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시편 23편에 나오는 그 목자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와 당신의 다른 점입니다.” 아는 것 자체로는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목자와 양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잔이 넘치는 삶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십니다. 목자가 되시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의의 길로 인도받을 수 있습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목자 되시는 하나님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부디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안위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잔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
시 23:1-4 / 이대성 목사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 여러분! 사실 요즘 우리 일상의 삶은 너무나도 힘들 뿐만 아니라, 어떨 때는 두렵기까지 합니다. 때로는 이런 저런 부담감과 어려움이 몰려와서 급기야 태산같은 곤경을 당하기도 합니다.
다윗은 이를 오늘 본문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표현을 썼는데요?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이는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골짜기’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헤쳐 나가기 힘든 크나 큰 곤경을 당해서 급기야는 ‘사느냐 죽느냐?’ 생사의 기로에 놓여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2절에서 표현한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와는 전혀 다른 절체절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겁니다. 다윗은 70년을 살았는데 그 70년의 생애 동안 꽤 많은 위기를 겪었습니다.
심한 경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도 있었습니다. 20대 청년시절 전부를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면서 여러 차례 죽음의 고비도 넘겼습니다.
30세에 왕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다윗은 수많은 전쟁에 출전해야 했고 내치와 외교의 가중된 업무로 만만치 않은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통치 말년에는 아들 압살롬과 아도니야가 차례로 반역을 시도함으로써 다윗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과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경험은 다윗의 실제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련은 정말로 가혹해서 그것으로 인생이 다 끝장날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극도의 좌절과 절망, 감당하기 힘든 슬픔과 고통,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곤경, 분명 대낮인데도 앞이 캄캄하고 땅이 꺼지는듯한 충격을 받고서는 죽을것만 같은 절박한 위기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이 고백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혹여 지금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가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련 없는 인생은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유독 나만 그 같은 시련을 겪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있어 고난은 필연적으로 따른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그런데 여러분? 시편 23편 말씀처럼 실제적으로 목자의 인도함을 받는 양들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언제 양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될까요? 첫째로, 양이 자기 멋대로 가다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양이 자기 멋대로 가다가 점점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양은 목자가 자기를 찾아 주기만을 고대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비유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강조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양이 스스로 길을 찾아 양떼에 합류한다거나 스스로 목자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둘째는 그렇게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양을 목자가 끝까지 찾아낸다는 겁니다. 이를 시편 23편과 연관시켜 보면 목자를 잃은 양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는 양입니다. 이때 양에게는 크나 큰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자기 스스로 바른 길을 찾을 수 없음을 알고는 목자가 자기를 찾아 주기만을 고대하면서 신음합니다. 그러던 중 목자의 소리가 들리고, 자기에게로 가까이 다가올 때 양은 비로소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안위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다윗도 이런 시련을 자초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와 간음한 후 이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야를 홀로 적진에 버려 두어 죽도록 방관했습니다. 한마디로 살인 방조죄, 살인 교사죄를 저지른 겁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습니다. 아들들 사이에서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고, 그 결과 집안 내에 피비린내가 진동함으로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한동안 경험해야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다윗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인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살 수 있습니다. 오직 이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인이 스스로는 하나님을 찾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기만 하면 자기 스스로 어둠에서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사람은 대체로 아주 절망적인 상태로 떨어져야 비로소 자신의 무능력을 절감하고 하나님께로 나아옵니다. 시편 119편 67절 말씀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그래서 파스칼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을 섬기라고 제게 건강을 주셨지만 세상을 위해 전부 다 써버렸습니다. 이제 나를 일깨워 주시려고 제게 병을 주셨습니다.”
C.S.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사람에게는 무서운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는 습성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고통은 귀머거리에게 알아듣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확성기다.’라고 썼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로 말미암아 크나 큰 곤경을 당했을 때 그들의 회개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기도 하십니다.
요즘 제가 새벽마다 출애굽기를 강해하고 있는데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모세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어디 매장지가 없어서 여기까지 데리고 왔느냐고 아우성을 쳤던 겁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기적을 행하십니다. 홍해를 갈라 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시편 106편 7절과 8절 말씀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주의 기이한 일들을 깨닫지 못하며 주의 크신 인자를 기억하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으니 그의 큰 권능을 만인이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그러므로 여러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는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때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생명의 빛이 비침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만이 나의 구원자이심을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비로소 나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임마누엘 하나님을 내가 경험하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 믿는 자들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 얻게 되는 가장 큰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에 오히려 나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 노래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목자가 의도적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양들을 이끌고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양들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양들이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할 때 적잖은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고통을 참고 인내하면 이내 곧 좋은 길이 펼쳐지고, 시원한 생수가 흐르는 시내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목자는 이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의도적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 22-33절을 보면 어느 날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나절 동안 무리들을 돌보고 섬기느라 너무나도 바빴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다 되어 가는데도 무리들은 떠나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남아 무리들을 해산시키기로 하고, 제자들만 먼저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22절) 그것도 재촉해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제자들이 호수 가운데서 큰 풍랑을 만난 겁니다.
시간을 계산해 보면 적어도 6시간 동안이나 그것도 한밤 중에 제자들은 풍랑과 사투를 벌여야 했습니다. 그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밤 4경 즉 새벽 3시-6시쯤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로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이 타고 있던 배에 오르셨을 때 비로소 풍랑이 잔잔해 졌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휴식이 필요했던 제자들에게 안식을 주시지 않고, 온 몸으로 풍랑과 맞서야 할 고통의 바다로 내 모셨을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좀더 일찍 오셨더라면 제자들은 고생을 좀 덜했을 텐데, 왜 6시간 동안이나 지체하셨을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고난 중에 있는 자기 사람들에게 반드시 찾아오시는데 그 찾아오시는 시간은 전적으로 예수님께 달려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 바로 그때가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때라는 사실입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전에 알던 예수님이 아닌, 아주 새롭고 놀라운 예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진정 나의 주, 나의 구원자로 내 마음과 내 몸에 깊이 각인되는 것입니다.
풍랑을 헤치고 물 위로 걸어서 오신 예수님, 바로 그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풍랑이 멎고 조용해진 것을 목격한 제자들은 단체로 예수님께 절하면서 ‘당신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소리치고 있습니다.
복음서 어디를 보더라도 제자들이 단체로 예수님께 절하면서 신앙을 고백한 적은 없었습니다. 바로 조금 전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임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풍랑을 가르고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고 바람이 그쳤을 때 그들 모두는 즉시 배 안에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주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주님이 아니었습니다. 생생한 나의 구원주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대부분이 이성적으로 깨달아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나를 찾아오신 놀라운 주님을 내가 직접 체험했기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게된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위기의 때, 절망의 때라고 생각할 바로 그 순간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우리의 믿음을 한 단계 더 성숙한 차원으로 끌어 올려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8-10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아멘!
시편 150편 중에서 다윗이 지은 시편이 가장 많은데 그 다윗의 시편들 중에 우리들에게 은혜가 되는 시편들은 고난 중에 부르짖었던 회개 시편들과 탄원 시편들입니다. 대표적인 두 편을 들자면 51편(회개시)과 57편(탄원시)입니다.
이 두 시편을 살펴보면 다윗이 겪은 시련이 자기 죄 때문에 비롯된 것이든지 하나님의 숨겨진 섭리 때문에 겪은 시련이든지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환난과 시련 중에 다윗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간절히 구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은 하나님만이 나의 빛이시며 나의 피난처이시며 나의 구원자이시라고 분명히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을 경험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실 것을 신뢰하면서 구원의 하나님을 향해 미리 찬송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결과 다윗은 자신이 평소에 믿고 고백한 그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하시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이것이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신앙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자기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물론 오늘 본문은 성도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 전혀 두려움이 없을 것이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어떠한 해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성도들도 인간인지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 두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해로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라면 결코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왜입니까? 그 해가 우리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수는 있어도 우리의 머리는 상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저와 여러분을 끝까지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과 같은 엄청난 시련은 결국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닫는 영적 성장의 기회가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선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고난 가운데 찾아오신 하나님의 임재를 온전히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의 경험이 다윗을 믿음과 영성이 깊은 선한 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위대한 시인으로 만든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저 이대성 목사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깨어 있었을 때에는 100% 고난의 시절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제 믿음이 가장 크게 성장했습니다. 고난의 시기에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얼마나 완전하시고 위대하신 분인지 깨닫게 된 겁니다.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 겁니다. 고난 중에 임마누엘의 경험이 저에게 있어 가장 큰 자산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도에게 있어서 최고의 자산은 시련의 밤을 통과할 때 얻게 되는 임마누엘의 경험인 겁니다. 그 임마누엘의 경험을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는도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의 필수품입니다. 그런데 모양과 크기와 용도에 있어서 이 두 가지 도구는 차이가 납니다. 지팡이는 타원형 손잡이가 있고, 길이가 꽤 깁니다. 그런데 막대기는 지팡이보다 작아서 주로 허리에 찹니다.
지팡이는 양들이 가야 할 길을 지시하거나 넘어진 양들을 일으켜 세울 때 사용하는 반면에, 막대기는 끝에 쇳조각이 붙어 있어 양들을 공격하는 짐승들을 내쫓을 때 사용합니다.
은 골짜기를 지날 때 맹수들이 출몰하기도 하는데, 바로 그 순간 목자는 허리에 차고 있던 막대기를 빼서 맹수들을 공격해서 쫓아 버립니다. 따라서 목자의 막대기는 양들을 짐승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양들은 골짜기를 지날 때 잘 넘어집니다. 그 순간 목자의 지팡이는 유용하게 쓰여집니다. 양들은 넘어지면 제 발로 일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새끼를 밴 양이나, 풀을 많이 먹어서 배가 잔뜩 부른 양이나, 살이 많이 찐 양들은 스스로 일어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러다가 결국 나동그라지면 등을 땅에 대고 네 발은 하늘을 향해 허우적거립니다. 일어나려고 계속 발버둥 치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아예 괴성을 지르며 발광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위 속에 아직 소화가 덜된 음식물에서 가스가 많이 배출되어 온 몸에 퍼지게 되는데, 그 가스가 혈액 순환을 막아 양을 더 빨리 탈진하게 만듭니다. 날이 무더우면 급기야 죽기까지 합니다.
또한 그렇게 넘어져서 바둥거리고 있는 양들은 영락없이 짐승들의 표적이 됩니다. 그러므로 넘어진 양들을 목자가 빨리 찾아서 지팡이로 일으켜 주지 않으면 양들은 치명적인 해를 입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자주 양들의 수효를 헤아려 봅니다. 숫자가 부족할 때는 먼저 양떼 가운데 넘어져 있는 양들을 찾아 지팡이로 일으켜 세워 줍니다.
그래도 숫자가 부족하면 뒤에 처진 양이나 낭떠러지에 떨어진 양을 찾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 갑니다. 뒤처진 양들을 보면 지팡이로 갈 길을 가리키면서 이끌어 줍니다. 낭떠러지에 떨어진 양에게는 지팡이 손잡이를 내려서 끌어 올립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고 표현한 겁니다. ‘안위하다’라는 원어의 뜻은 ‘위로하다. 동정하다. 안심시키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는 미완료형 동사로써 주님의 안위하심이 끊임없이 지속된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항상 안위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 분은 바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의 별명이 보혜사인데 그 뜻은 항상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릴 도와주시고 상담하시고 위로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넉넉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있어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할 때 다윗이 가졌던 이 임마누엘 신앙을 본받는 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이 임마누엘 신앙을 가진 성도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시련의 때에 사람의 방책을 구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특별하신 임재와 섭리하심을 간절히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 간구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가장 적절한 때에 임마누엘 신앙을 똑똑히 체험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위로의 선지자 이사야는 실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사야 40장 27-31절입니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러분! 절체절명의 순간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오직 하나님을 찾고, 오직 하나님께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 길만이 살 길이요, 그리하면 우리 모두 다 임마누엘의 놀라운 경험을 반드시 하게 될 것이라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줄로 믿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는 우리 모두는 엄청난 시련의 밤에도 전혀 염려하지 않고 다윗처럼 기쁘게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다같이 4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유명한 상담 신학자 래리 크랩은 그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이 세상의 일몰은 천국의 일출로 이어진다!”
성도들에게는 절망이 오히려 찬란한 희망으로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빛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이 임마누엘 신앙보다 더 귀하고 놀라운 경험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생생하게 만나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엄청난 시련이 다가올 때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의 문을 닫으실 때 반드시 다른 문을 열어 주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문제를 주시고는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가 그 해답을 찾기까지 기다리십니다. 따라서 길이 사방으로 꽉 막힌 것 같아도 반드시 우리에게 더 좋은 길이 예비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혹여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다면 오히려 임마누엘 하나님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이내 곧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곧바로 여러분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의 목자요, 여러분은 그 분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여러분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면 하나님은 더더욱 기쁘게 여러분을 만나러 오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전에 알았던 하나님 정도가 아닌, 이전에 전혀 알지 못했던 “크고도 놀라우신 하나님”을 반드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믿는 자들의 최고 자산이요 보배는 임마누엘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나와 늘 함께하심을 믿는다면 ‘만사 오케이!’ 내 삶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어 나를 이끌어 주신다면 나는 죽음의 다리도 당당히 찬양하며 건너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면 도대체 무얼 염려하겠습니까? 도대체 무얼 두려워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험한 세상에서 참된 자유를 얻는 해답은 오직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는 겁니다.
1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The Lord is my shepherd!” “주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선한 목자이신 주님이 나를 지켜주시고, 막아주실진대 늘 항상 ‘내 잔이 넘치나이다!’ 찬양과 경배를 하나님께 돌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