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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5일 오늘의 역사
2023년 경기도 포천 폭설 블랙아이스로 44중 추돌사고 발생
2023년 한국인 2명 등 72명 탄 항공기 네팔서 추락 68명 이상 사망
2022년 남태평양 섬나라 통가 해저 화산 폭발로 쓰나미 경고 발령
남태평양 통가 부근 해저에서 15일 발생한 특수한 형태의 화산폭발로 쓰나미 경보가 발령되면서 해안지대 주민들이 고지대로 대피하는 등 공포의 대피가 시작되었다. 쓰나미 경보는 하와이, 알래스카, 미국의 태평양 연안에도 선포되었다.
위성영상에 폭이 5km에 달하는 화산재와 증기, 가스 구름이 20km 상공까지 치솟고 있음이 나타났다. 이어 15일 오후 5시26분 2차 분화가 발생했다. 수도 누쿠알로파 해안선을 넘어 홍수가 발생했다. 통가의 투포우 6세 국왕은 왕궁에서 마타키우아에 있는 별장으로 경찰과 군대가 호위를 받으며 대피했다
이 화산 폭발은 61메가톤(Mt)에 달하며 사상 최대급 화산폭발이다
2022년 코로나로 집회 금지된 상황에서 민주노총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민중 총궐기대회 강행
2009년 뉴욕 허드슨강에 여객기 불시착
미국 뉴욕에서 2009년 1월 15일(현지시간) 고층빌딩이 밀집한 맨해튼 바로 옆 허드슨강에 승객과 승무원 등 150여명이 탄 여객기가 불시착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날 오후 3시30분께 승객 150명과 승무원 5명이 탄 US항공 소속 1549편이 맨해튼 48번가와 가까운 허드슨강에 떨어졌다.
사고 비행기는 에어버스 A320 기종으로, 뉴욕 라과디아 공항을 출발해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으로 향하기 위해 오후 3시26분께 이륙을 한 직후 새떼와 충돌해 2대의 모두 엔진이 멈추면서 이륙 몇분만에 강에 비상착륙을 했다.
사고 비행기 조종사는 강에 불시착하기 전에 승객들에게 새와 두번 이상 부딪혔다면서 불시착에 대비하라고 안내 후 강으로 착륙을 시도했다.
뉴욕시 구조대원들과 해안경비대 등은 비행기가 강에 떨어진 이후 선박을 통해 구조작업에 나서 물에 창문까지 잠긴 비행기 문을 열고 승객들을 구조해 배로 옮겨 태웠다.
승객 중 부상자들은 인근의 뉴욕과 뉴저지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며 뉴욕시 소방국은 78명이 부상했다고 밝혔다.
2001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중국 방문(~20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2001년 1월 15일부터 20일까지 6일간 중국을 방문했다. 종래와 달리 베이징은 경유만 하고 일정의 대부분을 상하이에서 보냈다. 심지어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직접 상하이를 방문해 김위원장과 정상회담을 가질 정도로 그의 상하이방문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그는 상하이에서 정치적 냄새를 전혀 풍기지 않고 철저한 ‘시장경제 탐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상하이 도착 다음날인 17일 창장 하이테크 단지내의 일본 NEC반도체 공장을 시찰했으며, 푸동 개발구 정부와 진차오 수출가공단지도 방문했다. 18일에는 자본주의 꽃이라는 상하이 증권거래소를 방문, ‘자본의 힘’을 실감했으며, ‘제국주의’로 비난해왔던 미 GM자동차 공장도 방문했다. 이같은 그의 행적은 그동안 중국식 개혁 개방 노선을 사회주의 정통노선에서 이탈했다면서 내심 비판하던 태도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김위원장이 중국 방문을 마친 후 북한이 중국식 개혁 개방노선을 채택할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북한 방송들도 김위원장의 중국 방문 소식을 20여분 간에 걸쳐 상세히 보도하면서 과거의 보도 태도와 달리 김위원장의 참관 소감까지 소개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2001년 백남억 전(前) 공화당 의장 별세
백남억 전 의원은 형법학자 출신으로 구 공화당 정책위 의장, 당 의장 등을 역임한 원로 정치인이다. 공화당내 JP계 구주류가 쇠퇴했던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신주류 실세 그룹이었던 ‘4인 체제’의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4인 체제’는 1969년 3선 개헌을 주도, 박정희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얻었지만, 1971년 10월 2일 야당이 제출한 JP계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에 동조, 통과시킴으로서 박 대통령의 격노를 샀다.
백 전 의원은 경북대, 동국대, 건국대 등의 교단을 거쳐 대구대 대학원장을 지낸 뒤, 4·19직후 참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63년 민정 이양 때 공화당에 참여, 1979년까지 6,7,8,9 대 의원을 역임했다.
정계 은퇴 후에는 장기간 칩거하다 ‘4인체제’의 일원이었던 김진만 전 국회 부의장의 아들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의 권유로 한국자동차보험 회장, 동부화재해상보험 회장 등을 지내기도 했다. 1993년 이후엔 민족중흥동지회 회장을 맡아 박 전 대통령 추모행사 등을 주관해 왔다.
2001년 박세리, LPGA클래식대회에서 우승
박세리가 미국 여자 프로 골프(LPGA) 투어 2001년 첫 대회서 우승을 차지했다.
박세리는 15일(한국 시각)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 그랜드사이프러스 리조트에서 끝난 LPGA 투어 개막전 ‘유어라이프바이타민스클래식 골프 대회’에서 합계 13언더파 203타로 1위에 올랐다. 이로써 박세리는 1999년 11월 페이지넷 투어챔피언십 우승 이후 14개월 만에 다시 LPGA 정상에 서면서 9번째 우승을 기록했다.
이번 개막전 우승으로 박세리는 상금 15만 달러(약 1억 9000만 원)를 거머쥐며 올해의 맹활약을 예고했다. 박세리는 지난 해 LPGA 투어서 무려 11차례나 10위 안에 드는 등 늘 상위권에서 맴돌았으나 우승에는 이르지 못했었다. 전날 3위였던 김미현은 공동 10위에 머물렀다.
2000년 `발칸 백정` 아르칸 피살
‘발칸의 백정’ 으로 불린 아르칸이 2000년 1월 15일 암살됐다. 본명이 젤리코 라즈나토비치인 아르칸은 이날 베오그라드 인터콘티넨탈 호텔 로비에서 입과 눈, 관자 놀이에 총탄을 맞고 사망했으며 현장에선 38구경 리볼버 권총 탄창이 발견됐다.
아르칸은 자신이 조직한 악명높은 민병대 ‘타이거즈’ 를 이끌고 크로아티아-보스니아 내전에 개입, 악명을 떨쳤고, 1999년 코소보에서도 인종청소를 자행,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아왔다. 17살 때부터 범죄 경력이 있는 아르칸은 1970년대에 스웨덴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에서 은행강도를 자행, 적어도 두 차례나 투옥된 바 있다.
이후 고향 구 슬로베니아 공화국으로 돌아와 도박과 밤무대 비즈니스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열정적인 성격은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흘러 1990년 민병대 ‘타이거즈’ 를 창설하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유고 대통령과도 교분을 쌓게 됐다. 미국과 영국은 아르칸 피살 소식에 그를 법정에 세울 수 없게 됐다며 유감을 표명했다.
1998년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첫 정상회담
1997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내 헤브론시에서 이스라엘 철군에 관한 협정 조인
1992년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경제협력 추진 위해 평양 도착,
김우중 회장 방북 결과=1992년 상반기 가동 목표로 아시아 최대규모의 남북합작 봉제공장을 해주에 건설 합의, 평남 만포에 남한 기업이 진출할 2백만 평 규모의 대규모 경공업단지 조성해 의류 컬러TV 냉장고 신발 양식기 가발 봉제완구 면방직 등 8개 공장 세우기로 합의(김달현 부총리 겸 대외경제위원장 서명)
1992년 유고슬라비아연방 사실상의 해체 시작
유럽공동체와 영국이 1992년 1월 15일, 전해 6월에 독립을 결의한 유고연방의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 대해 독립국가로서 수교를 할 것이라고 발표함으로써 유고연방은 사실상 해체의 길에 들어섰다. 프랑스, 벨기에, 독일도 이들 국가들과 곧 외교관계를 수립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유럽공동체는 마케도니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에 대해서는 소수민족의 권익보호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았다고 판단, 독립승인을 연기했다.
유고연방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티토를 중심으로 한 공산당정권의 지배하에 균형을 유지해 오다 1990년대에 들어 지배가 흔들리기 시작, 역사적인 민족간의 증오가 표면화되면서 연방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991년 각종 국제경기 단일팀 구성 위한 제2차 남북체육회담 개최
1991년 언론인, 국사학자 천관우 사망
1990년 한국-알제리 국교 수립
1989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열차 충돌 100명 사망
1987년 김만철 일가 11명 북한 탈출
김만철씨 일가 11명이 북한을 탈출한 지 24일 만인 1987년 2월 8일 특별전세기편 으로 서울에 도착, 귀순했다. 이로써 첫 가족단위 탈북 사례가 되었다.
1987년 1월15일 새벽 1시. 북한 함경북도 청진시의 바닷가에선 북한군의 삼엄한 경비망을 피해 68세 노인부터 11세 어린이까지 김만철 일가 11명이 배에 올랐다. 그들은 오직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기 위해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한다. 김만철은 당시 북한군 해안경계부대의 군의관이었기에 항해가 자유로운 어로감시선을 훔쳐 탈 수 있었다. 그들이 가려고 했던 ‘따뜻한 남쪽 나라’는 사실 인도네시아였다고 한다. 무작정 동쪽 공해상으로 향했던 배가 엔진 고장을 일으켜 표류하다가 20일 오후 일본 해상보안청 순시선에 발견되어 쓰루가항으로 예인됐다.
일본에서 조사를 받으며 남한행을 희망했지만 조총련 관계자가 통역을 맡았던 까닭에 북한도 김씨일가의 탈북을 알게 되었고 이후 남한과 북한은 각각 일본에 자국으로의 인도를 요청하게 되고 민감한 외교문제로 비화된다. 결국 일본 정부에 의해 추방형식으로 대만으로 보내진 다음 이들의 의사에 따라 한국으로 귀순하게 된 것이다. 목숨을 걸고 북한 땅을 탈출한 지 24일 만이다.
1987년 백령도 인근에서 저인망어선 동진27호 납북
한편 김만철 일가가 북한을 탈출하던 그날, 백령도 인근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여수 선적 저인망어선 ‘제27 동진호’가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북된다. 엿새 뒤인 1월 21일에 북한적십자가 대한적십자를 통해 송환 의사를 전달할 때까지만 해도 김만철 일가의 탈북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김씨 일가의 탈북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동진호 선원 12명의 송환을 거부했고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중 6명은 남북이산가족 만남에서 만났지만 나머지 6명은 생사조차 불분명하다.
1981년 민주정의당 창당
1981년 1월 15일 민족, 민주, 정의, 복지, 통일을 5대 이념으로 내건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이 창당됐다. 전두환씨를 비롯, 신군부세력이 중심이 된 민정당은 주요 기구로 전국대의원대회, 중앙집행위원회, 사무국, 시도위원회 등을 두었으며 그 해 3월 전두환씨가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곧이어 제1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함으로써 제5공화국의 집권여당이 됐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창당 후 최대의 위기를 맞았으나 대표위원 노태우의 6.29선언으로 위기를 수습하고, 12월16일 대통령선거에서 다시 승리했다. 그러나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총 299석 중 125석을 차지해 여소야대라는 불안정한 정국을 맞이하며 1990년 2월 9일 민주당, 공화당과 합당하여 민자당을 탄생시키고 해체됐다.
9년 만에 해체된 민정당은 건국이래 당의 주인을 바꿔가며 연속집권한 유일한 정당이면서도 ‘집권도중해체’ 라는 또 다른 기록을 세웠다. 민정당은 국민투표에 의한 재집권으로 헌정사상 초유의 정권재창출을 이룩했다
1980년 문공무, 일본 요미우리신문 서울지국 재개설을 허가(1977년 5월 폐쇄)
1976년 박정희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영일에서 석유 발견해 매장량 조사중이라고 언명
1974년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 긴급조치 1호 위반혐의로 장준하, 백기완 구속 발표
1973년 미국 베트남전쟁 전면정지 발표(27일 평화협정 조인 28일 정전)
1971년 이집트, 아스완 하이 댐 완공
1968년 이탈리아 시실리에 강진, 6,000명 사망
1966년 나이지리아 육군 쿠데타 이론시 사령관 실권 장악
1966년 백낙청, ‘창작과 비평’ 창간
‘창작과 비평’(창비)은 ‘문학과 지성’(문지)와 더불어 1970년대 국내 지성계에 끊임없이 자양분을 공급해 준 ‘지성의 산실’이었다.
‘창비’를 창간한 주역은 백낙청(1938~)이다. 백낙청은 경기고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59년 브라운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60년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돌아와 군에 입대했다. 1963년 서울대 영문학과 전임강사를 거쳐 조교수가 된 백낙청은 순수문학이든 관변문학이든 기성문단에 도전하겠다며 1966년 1월 15일 132쪽 분량의 ‘창작과 비평’을 창간했다.
창간호(1966년 겨울호)에는 편집인 백낙청의 권두 논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를 비롯 장 폴 사르트르와 찰스 라이트 밀즈의 번역글, 김승옥과 이호철의 단편소설 등이 실렸다.
한자 표기를 줄이고 가로쓰기를 도입한 창간호 2,000부는 지식인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어 그런대로 팔려나갔으나 2호부터는 실적이 좋지 않았다.
창비가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것은, 백낙청이 박사과정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에 앞서 ‘창작과 비평사’라는 이름의 잡지사를 설립한 1969년이었다. 이문구, 황석영, 신경림, 김남주, 현기영, 강만길, 리영희 등 스타 글쟁이들이 창비와 인연을 맺었다.
1974년 1월 창비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도서출판 ‘창비’를 설립해 단행본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창비는 유신 정권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호철, 송기원, 윤흥길, 조태일, 이문구, 황석영 등 창비 문인들이 ‘개헌청원지지 문인 61인 선언’(1974.1)에 대거 참여하고 1974년 11월 결성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설립을 주도하며 박정희 정권에 저항했다.
1965년 제2한강교 개통
1964년 키프로스 평화회담
1962년 서울시 시민헌장 선포식
1962년 광화문 전화국 개국
1959년 신보안법 발효
1957년 독립운동가 지청천 장군 사망
1956년 소련, 제6차 5개년계획 발표
1951년 파푸아뉴기니 래밍턴산에서 화산가스와 먼지 분출로 4천여 명 사망
1950년 한일무선전화 개통
1948년 분광태양사진기를 발명한 프랑스의 물리학자 델랑드르 사망
1947년 입법의원 반탁 결의
1946년 국방경비대 창설
1946년 1월15일 남조선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으며 약칭 국방경비대 라고도 한다
광북 후 미군정은 1946년 1월 군정청에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국군준비대, 건국치안대 등의 기존 사설 군사단체를 해체한 후 치안유지대에 부족한 경찰력을 보충하기 위해 남한의 8도 도청소재지에 중대를 편성하였다
1946년 1월15일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지금의 육군사관학교)에서 1개중대를 창설한 것을 필두로 각 도청소재지에 1개중대를 편성하고 같은해 6월15일 조선경비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총참모장 밑에 인사국·정보국·작전교육군·군수국·재정처·의무처·법무처·감찰감실·통신과· 군감대를 두었다
1947년 6월 남조선 과도정부가 수립되자 통위부로 흡수 되었고 1947년 12월1일까지 3개여단(서울, 부산, 대전)을, 1948년 5월까지 5개여단을 편성하였다
주요임무는 간부 양성을 위한 유학생 파견, 군사영어학교 및 남조선 국방경비사관학교 설립과 국가 중요시설의 경비, 좌익세력의 폭동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9월1일 국군으로 재편되었고 9월5일 대한민국 육군으로 개칭 되었다
즉 국방경비대는 오늘날 육군의 모체이다
1945년 북조선중앙은행 창립
1943년 미 국방부 건물(펜타곤) 완공
1934년 네팔에 진도 8.3 지진 사망 1만7천 명, 네팔의 오늘은 ‘지진의 날’
1929년 마틴 루터 킹 목사 출생
1925년 소련 스탈린 집권, 트로츠키 실각
1919년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피살
독일의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1919년 1월 15일 독일 군부의 사주를 받은 갱단에 의해 피살됐다.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유태인 상인의 딸로 태어난 로자는 20세기 초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정치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1898년 제2인터내셔널의 주도적 단체였던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했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혁명노선을 지지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바르샤바로 가 투쟁에 가담했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로자는 사회민주당이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지지하자 반대의사를 표명하며, 폴란드 사회민주당과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을 창설해 혁명을 통한 전쟁 종식과 프롤레타리아 정부수립을 위해 매진했으나 결국 반혁명 세력에 의해 혁명 동지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피살됐다.
그는 국제 공산주의 단체에서 유일하게 레닌에 대적할 수 있는 이론가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마르크스 이후 가장 뛰어난 지식인 혁명가’, ‘불꽃 여인’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로자의 사상은 현실 속에선 뜻을 피우지 못했지만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유럽 사회민주당의 개량주의에 모두 불만을 느끼는 상당수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녀의 사상은 1960년대 유럽을 풍미했던 뉴레프트 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1918년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출생
1915년 윤상태, 서상일 등 30여 명 달성에서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결성
1910년 영국 총선거에서 자유당 압승
1909년 나철, 대종교 창시(음력)
1909년 1월 15일(음력) 나철이 단군 숭배를 기본으로 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창시했다. 당시 일제치하 속에서, 나라의 기틀을 확립하고 민족을 부흥시키는 힘은 민족 의식 고취라고 생각하여 동료 오기호 등과 함께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하고 700년 동안 단절됐던 `단군교`를 세웠다. 단군교 창시 1년 만에 `대종교`로 개칭했다.
대종교의 근본정신은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 인간(弘益人間)`의 정신으로 민족의 평화와 복지를 향상시키려는 데 있었다.
대종교는 항일독립운동에 앞장 서 항일구국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3.1운동 이후에는 중국에서 동포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청산리 대첩에서도 대종교인의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 1911년에는 만주에서 항일무장단체인 중관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대종교는 3대교주 윤세복이 취임한 이후 많은 교인이 체포·학살되는 등 일본으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받았고,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이 생기자 지하로 숨었다가 해방이후에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1908년 수소폭탄 개발한 미국의 핵물리학자 에드워드 텔러 출생
1906년 선박왕 오나시스 출생
1896년 영국, 프랑스 샴보호조약 선언
1842년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조셉 브로이어 출생
1777년 영국 탐험가 쿡 하와이제도 도착
1759년 대영박물관 개관
1759년 1월 15일 세계최초의 공공박물관인 대영박물관이 개관했다. 18세기 영국의 학자인 한스 슬로언 경이 국가에 6만여 점에 이르는 수집품을 기부하고 사망하자, 의회가 박물관을 세워 사람들에게 개방하게 됐다.
처음, 박물관은 런던 외곽인 몽태규 하우스에 있었지만 1850년에 이사해 지금까지 런던 블룸스버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후 1881년 자연사 소장품들은 사우스켄싱턴의 자연사박물관으로 옮겼고, 민족학 부문 소장품은 1970년에 웨스터민스터 벌링턴가든스의 인류박물관에 따로 전시했다.
대영박물관은 44개의 이오니아식 원기둥으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고 94개의 전시실에 이집트, 그리스, 로마, 아시아 등지에서 발굴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주요 소장품으로는 타우네레, 엘긴 대리석 조각, 크니도스의 데메테르 여신상, 소크라테스의 소형상,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흉상 등이 있다. 2000년 11월 구석기 유물부터 청자, 백자 등 250여 점의 수집품을 전시한 한국관이 신설되었다.
1622년 프랑스 극작자 겸 배우 몰리에르 출생
1597년 정유재란
1433년 조선, 일식 발생
69년 제6대 로마제국 황제 갈바 암살
제6대 로마제국 황제 갈바가 제7대 황제인 오토에 의해 69년 1월 15일 암살됐다. 즉위 7개월 만의 일이었다. 오토의 사주를 받은 갈바의 근위대는 로마 중심지인 포로 로마노에서 가마에 타고 있던 갈바 황제를 끌어내려 살해했다. 보름전에 집정관에 취임한 비니우스와 30세였던 갈바의 양자 피소도 함께 살해됐다.
오토가 갈바를 살해한 이유는 게르마니아군 7개 군단이 갈바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사령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의했기 때문이었다. 게르마니아군은 라인강 상류를 지키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 루푸스를 해임하고 후임에 비텔리우스를 임명하자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판단, 갈바에 반기를 들고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런 시대변화를 읽고 있던 원로원 의원 오토는 이 기회를 놓치면 자기한테는 영원히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 갈바를 살해하게 됐다.
69년 제7대 로마제국 황제 오토 즉위
황제의 근위대를 사주해 갈바 황제를 살해한 오토가 69년 1월 15일 제7대 로마제국 황제에 올랐다. 원로원 의원도 오토가 살해범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대세에 따라 마지못해 이를 승인했다.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Marcus Salvius Otho)는 공화정시대부터 명문 귀족가였던 갈바와 달리 신흥 원로원 계급에 속했다.
그의 아버지는 2대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의 문하생으로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비롯해 많은 요직을 거친 인물이었다. 로마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오토는 소년시절부터 다섯살 아래인 네로와 함께 어울렸으나 성인이 되어 네로에게 자신의 부인 포파이아를 빼앗기고 제국의 서쪽 끝에 있는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쫒겨나는 슬픔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임지(任地)에 도착한 오토가 실의에 빠지지 않고 선정을 베풀어 현지 주민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갈리아 총독 빈덱스가 네로 타도의 기치를 들었고, 타라코 속주 총독 갈바가 거기에 홍응해 일어나자 어느 속주 총독보다 먼저 갈바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황제가 된 갈바에 의해 로마로 돌아온 오토는 게르마니아군이 자신의 사령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어수선한 틈을 타 갈바를 살해하고 황제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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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289년 맹자 세상 떠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