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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1년 11월 26일 연중 제34주간 토요일
그러므로 너희는 앞으로 닥쳐올 이 모든 일을 피하여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가 21,34-36)
Be vigilant at all times
and pray that you have the strength
to escape the tribulations that are imminent
and 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말씀의 초대
천사가 다니엘이 본 환시를 설명한다. 네 마리 짐승으로 표현되는 세상의 악과 권세는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무너지고, 그 나라는 하느님께 충실한 거룩한 이들에게 넘겨져 그들의 차지가 된다(제1독서). 방탕한 생활이나 세상의 근심에 빠져 사는 것은 깨어 사는 삶이 아니다. 주님께 온전한 믿음을 두고 사는 사람이 깨어 사는 사람이다. 이들에게는 세상에 무슨 일이 닥쳐도 두려움이 있을 수 없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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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깨어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세상의 온갖 유혹을 이기는 것, 죄짓지 않고 사는 것, 늘 기도하며 사는 것 등 여러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적극적인 의미에서 이 세 가지 질문을 하면서 살면 어떨지요? ‘나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이 세 질문에 대한 응답은 레오 톨스토이가 쓴 그의 단편, 『세 가지 질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은 바로 ‘지금’이라고 말합니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불확실한 시간일 뿐이지만, 지금 경험하는 이 시간은 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만난 사람은 이미 지나갔고, 미래의 만날 사람은 불확실할 뿐입니다. 오로지 지금 얼굴을 마주한 사람이 가장 필요하고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곁에 있는 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톨스토이는 이것이 인간이 세상에 온 유일한 이유라고 했습니다.
깨어 산다는 것의 적극적인 의미는 이렇게 주어진 순간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만남과 인연에 최선을 다하고, 그들에게 선을 행하고 축복하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깨어 있음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만남’과 ‘하는 일’에 대하여 자신이 바친 사랑의 깊이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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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은 삶의 마지막입니다. 개인의 죽음입니다. 종말에 관한 말씀을 ‘자신의 죽음’에 관한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해석이 쉬워집니다.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늘 깨어 기도할 것’을 명하십니다. 그것이 종말의 근본적인 준비라는 말씀입니다. 기도하며 살았다면 기도 속에서 운명하게 됩니다. 종말 역시 주님의 이끄심인 까닭입니다.
어떤 사냥꾼이 새끼 사슴을 키웠습니다.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잤습니다. 방 안을 뛰어다니며 물건을 넘어뜨려도 사냥꾼은 귀여워했습니다. 그러자 새끼 사슴은 우쭐해졌습니다. 급기야는 사냥개에게도 장난을 쳤습니다. 하지만 개들은 주인 눈치를 보며 피해 다녔습니다. 어느 날 사냥꾼이 죽었습니다. 방 안에서 뒹굴던 사슴은 즉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사냥개에게 장난을 걸다 한방에 물려 죽습니다. 죽으면서도 새끼 사슴은 왜 자기가 물려 죽는지를 모릅니다. 중국 고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위가 높고, 재산이 많고, 삶이 안정되었기에 생기는 ‘유혹’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것을 망각하면 새끼 사슴과 다를 바 없습니다. 통장에 돈을 잔뜩 남기고 죽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베풀고 나누었더라면, 그만큼 아름다운 종말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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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종말은 언제 올지 모릅니다. 하지만 개인의 종말은 추측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음으로써 나는 심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종말에 관한 모든 말씀은 죽음을 잘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
언젠가 프랑스 전쟁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가까워질 무렵 백발의 늙은 사제가 형장으로 나아가 총살형에 처해집니다. 독일 군사들에게 항거하던 지하 조직을 숨겨 주다 발각된 것이지요. 같이 일하던 젊은 사제는 눈물을 흘리며 말합니다. “신부님, 훌륭하게 돌아가 주십시오.” 그러자 노사제는 웃으면서 답합니다. “훌륭하게 사는 것에 비하면 훌륭하게 죽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네.”
사람의 일생에도 가을은 있습니다. 텅 빈 가을인지, 결실이 가득 찬 가을인지는 현실이 결정짓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쌓기만 하고 베풀지 않으면 사람들이 떠나갑니다. 텅 빈 노년으로 만듭니다. 나누고 베풀어야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결실의 노년을 만들어 줍니다.
바람이 불면 들꽃은 먼저 눕습니다. 홍수의 징조가 보이면 개미들이 먼저 이동합니다. 자연의 섭리입니다. 주님께서는 미물들에게도 그들만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누구에게나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기도입니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주시길 청하는 기도입니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어렵다는 가르침입니다. 공감합니다. 잘 살게 되면 죽음 역시 비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살면서 좋은 죽음을 바란다는 것은 욕심일 테지요. 갈수록 신자로서 살아가기가 어려워집니다. 이것은 해야 되고 저것은 해선 안 되고, 이쪽은 가도 되지만 저쪽은 가지 말아야 하고……. 망설임 없이 살아가는 신자가 몇 명이나 될는지요. 현실에서 교과서대로 산다는 것은 진정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훌륭하게 죽을 수 있는 삶’이 되겠습니까? 이에 대한 답으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죽음을 묵상하라는 것이지요. 죽으면 모든 것을 두고 가야 함을 염두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늘 그럴 수는 없겠지만 가끔은 이 가르침을 되새겨 보아야겠습니다. 아름답게 살았다면 반드시 아름답게 죽게 됩니다. 종말은 그런 것이지요.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 김순중 수녀-
루카복음 21장 34절에서 36절 말씀은 세상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결론이다. 계절의 변화를 느끼면서 종말에 대한 묵상과 일상에 대한 성찰을 미루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사랑이신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보다 더 자세하고 명확하게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실 수는 없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을 물러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술에 취하거나 세속 일에 몰두하지 말고 배신의 모든 유혹을 이겨내며 인자 앞에 부끄러움 없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주님의 날이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가운데 온 세상에 닥칠 것이기 때문에 늘 경각심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예수님이 오심을 준비해야 한다. ‘덫처럼’ 종말이 오지 않는다고 여겨 제자들의 마음, 곧 의지와 감성을 포함한 내적 자아가 하느님을 향해 있지 않으면 윤리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며 지나치게 현세 생활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마음이 현세의 쾌락과 죄스러운 생활양식으로 무디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덫이 짐승을 예상할 수 없는 순간에 잽싸게 낚아채듯 모든 사람을 덮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일상기도에 충실함으로써 신앙생활에 따라오는 박해와 유혹을 이기고 갑자기 들이닥칠 세상 종말의 심판을 모면할 힘은 하느님께만 받는다. 며칠 후 십자가에 처형되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인자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당신이 베푸실 구원을 받기 위해 하느님께 항구히 기도하라고 호소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의 재림이 확고하니까 당신 고난의 길을 따르라 하신다. 충실한 종으로서 경각심을 가지고 항구히 기도하며 그분의 재림을 준비해야 갑자기 들이닥칠 결정적 심판을 모면할 힘을 받을 수 있다.
한 해의 마지막에 서서
-조명연 신부-
한 해의 제일 마지막 날은 12월 31일입니다. 그때 사회에서는 각종 송년행사로
정신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 마지막 날에 우리들은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지를
스스로 반성하게 됩니다. 만약 한 해를 열심히 살았다면 굉장히
뿌듯하겠지요. 또한 이렇게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합당한 보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있어서 일년의 제일 마지막 날은 언제일까요?
사회와 마찬가지로 12월 31일일까요? 아닙니다. 교회 전례력상 마지막 날은
그리스도 왕 대축일 다음 토요일인 대림 제1주일 전날, 바로 오늘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오늘, 지난 한 해를 어떻게 지냈는지를 스스로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주신 일년이라는 시간을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가를, 또한 얼마나
감사했는가를…. 혹시 아무런 노력도 없이 모든 것이 저절로 내게 주어지기를
원하는 이기적인 마음만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러한 자기 반성을 하다 보면
지난 한 해가 너무나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늘 깨어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기도한다는 것은 순간순간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내 자신을 다시 올바른
길로 돌아서게 하는 것입니다. 한 해의 마지막에 선 지금, 다시금 올바른 길로
돌아가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늘 깨어 기도하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주님 앞에 서려면
-김찬선신부-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사람의 아들 앞에 서는 것.
이것이 종말에 우리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주님 앞에 설 수 있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힘”이 왜 필요할까요?
주님 앞에 서는 데도 힘이 필요한가요?
그것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일에서 벗어나야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는” 힘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앞에서 종말은 누구에게나 오는데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져서
준비 안 된 상태에서 종말을 맞이하게 해서는 안 됨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말씀은
방탕에 빠져,
술독에 빠져,
이 세상의 근심 걱정에 빠져,
한 마디로 세상에 풍덩 빠져 살다가
느닷없이 세상의 종말과 함께 휩쓸려 사라지지 말고
세상에서 빠져나와 주님 앞에 서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깨어 기도하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
“기도”야말로
세상 것들에 깨어있고 거기서 벗어나게 하는 힘이요,
하느님 앞에서 설 수 있게 하는 힘인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전삼용신부-
신학교 1학년 때 담임 신부님께서 “사제는 여자, 술, 돈만 조심하면 된다.”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저는 술을 잘 조절하지 못할 때가 많았었습니다. 신학생이 되어서는 술 마시고 실수하지 않기 위해 술을 끊어본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달 안 가서 또 시작하곤 하였습니다.
요즘에 와서야 왜 이렇게 술을 절제 없이 마시게 되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선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과학적으로도 그런 호르몬이 나온다고 합니다. 자신감도 있어져서 자신 있게 말도 할 수 있고 맨 정신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억지로 기분을 좋게 한 대가로 술을 깰 때는 그만큼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아침이 힘들어서 후회도 됩니다. 정말 많이 마셨을 때는 ‘다시는 술 마시나봐라.’라고 결심을 하지만 며칠 안 가서 다시 마시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술을 마시게 되는 이유는, 억지로라도 즐거움을 누려보려는 마음 때문이고 그 이면에는, 지금 나의 처지에 완전히 만족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말도 됩니다. 사실 자신의 처지에 완전히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평상시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은 술을 적게 마시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습니다.
“인생이 쓰면 술이 달고, 술이 쓰면 인생이 달다.”
인생이 써서 술을 찾게 되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해의 마지막인 오늘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해주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성경에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은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첫 기적이 술을 만드시는 것이었고 바오로는 건강을 위해 포도주를 조금 하라고 권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술에 취하지 말라는 말은 많이 나옵니다. 술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라 좋은 것이지만 지나치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1935년 미국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젊은이가 시대의 흐름과 여론을 수집, 분석하는 연구소를 창설했습니다. 바로 조지 갤럽의 '미국여론연구소'가 그것입니다.
이후 이 연구소는 세계적으로 기반을 넓혀나갔습니다. 갤럽이 원숙한 나이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의 최대관심사가 '행복'이란 것을 알고 그는 여론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놓고 한 텔레비전과 대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갤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생생한 종교적 체험을 가진 사람이었고,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는 마약 중독자와도 같이 외적인 힘으로 우울해진 마음을 위로해보려 합니다. 물론 취해 있을 때는 인생의 고통을 잠시 잊을 수는 있지만 술이 깨면 더 큰 공허함과 우울함이 몰려옵니다. 그래서 또 마시게 되고 그렇게 악순환 됩니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기분을 UP 시키는 것은 그것이 지나고 나면 그만큼 DOWN 된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습니까? 공짜로 기분이 좋아졌다면 나중엔 원하지 않아도 그만큼 나빠지는 것입니다. 어느 때 별 이유도 없이 기분이 갑자기 좋아지는 사람은 다시 자신도 모르게 안 좋아질 때가 있음을 깨달아야합니다. 따라서 될 수 있으면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도록 자신을 유지해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세상 어떤 것으로도 우리 자신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음을 깨달아야합니다. 아무리 인기 있는 사람도 항상 인기에 목이 마르고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도 돈을 더 갖기를 원하게 됩니다.
하느님나라에서 모든 행복이 주어졌던 아담과 하와도 또 다른 육체적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 금지된 열매까지 따먹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처지입니다.
참된 겸손은 ‘내게 허락된 것들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나에게 충분히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크고 작은 기쁨들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무엇을 원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의 교만의 죄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항상 깨어 준비하란 뜻은, 어쩌면 항상 감사하며 살라는 말로 들립니다. 우리는 미사 때 주님께 찬미가 저절로 솟아나옵니까? 하느님나라는 그렇게 찬미를 드리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나를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을뿐더러 얻기도 힘든 순간적인 즐거움들을 바라면서 불만족스런 눈으로 살아가기를 멈추고 지금까지 베풀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는 것은 다 이유가 있으려니 하고 포기하고 내가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갑시다. 그렇게 겸손해져야만 행복합니다. 이것이 어쩌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양승국신부- 가톨릭 다이제스트란 잡지가 있습니다. 이 잡지가 지닌 매력 중에 가장 큰 매력은 무엇보다도 편하고 부담 없이 읽힌다는 것입니다. 이 잡지는 신앙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하고 평범하지만 가슴 훈훈한 이야기들을 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특히 가톨릭 다이제스트사는 어려운 경영여건 속에서도 이 잡지를 전국 소년원이나 교도소, 사회복지시설, 군인 본당 등에 매월 선물하고 있습니다. 올 한해 저희 아이들을 위해 빠짐 없이 보내주신 따뜻한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12월호를 펴들었습니다. 매월 그랬듯이 이번 호에서도 가슴 뭉클한 한 사연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 쪽 형제들은 모두 가수 뺨치는 노래실력들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남편의 누님 한 분만은 돌연변이에 속한다. 유독 이분만이 음이 자유로이 왔다 갔다 하는데, 참 이상한 것은 자신의 약점을 모르는지 노래를 할 때 너무 열심히 부른다는 것이다. 그런 누님이 며칠 전에 우리 집에 오셨다. 대개의 가족 파티가 그렇듯이 대충 상이 치워지고 어린아이들에게 노래를 시키면서 재롱이나 좀 보다가 끝을 낼까 하는 참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누님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에 잠에서 깨어 너를 바라볼 수 있다면..." 확실한 음정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러나 자신 있고 당당한 목소리로 그녀는 노래를 이어 나갔다.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 "와아! 우리 누님 노래 잘한다! 그런데 아니, 이거 최신곡 아냐?" 칭찬을 받는 누님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너희 매형한테 내가 매일 노래를 불러드린단다. 그 양반이 무슨 사는 재미를 느끼겠니? 또 내가 노래를 부르면 알아듣기나 하겠어? 그래도 나는 부르고 또 불러드린다. 내가 <어때요? 나 노래 잘하죠?>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아. 눈물이 핑 돌았다. 중풍으로 쓰러진 남편을 12년 째 혼자 돌봐온 그녀의 말은 계속 되었다. "난 매일 매일 감사해. 아이들이 잘 커주었고 매형의 병도 더 악화되지 않아서 혼자 두고 얼른 미사에 갔다 올 수는 있을 정도이니까 말이야. 나 성당 반장 일도 맡았어"(손정호, 순례자의 노래, 2001년 12월호 참조). 남편의 기나긴 투병생활을 순교자적인 모습으로 감당해나가는 자매님의 모습은 참으로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의식도 없는 남편의 귓가에 대고 "사랑의 노래"를 들려주는 자매님은 마치도 천사 같은 분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두 해도 아니고 십 이년이란 세월, 회복되리라는 기약도 없는 병간호를 기쁜 마음으로 해나가고 계신 자매님의 삶은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늘 깨어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깨어 기도하라는 말씀은 결국 현실에 충실하라는 말씀입니다. 현실에 충실하다는 것은 자매님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듯 불행이 다가와도 좌절치 않는 삶, 고통가운데서도 희망하는 삶, 끝가지 이웃을 포기하지 않는 삶입니다. "매일의 삶에 철저할 때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생과 영복을 누리는 백성이 되자.
-경규봉신부-
다니엘은 환상 중에 하느님 백성이 당할 고난을 보았기에 마음이 어수선하고 근심스러웠다. 그는 곁에 있는 천사에게 자기가 본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천사는 큰 짐승 4마리는 세상의 4제국을 가리키는데, 결국 하느님 나라의 하느님 백성이 그 나라를 차지하고 영원히 이어갈 것이라고 답한다. 특히 넷째 짐승에게서 새로 돋은 뿔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 직전까지 하느님을 거스르고 하느님 백성을 박해할 적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는7년 대환란 중의 3년 반 동안이나(묵시 13,5) 하느님 백성을 극도로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이리하여 적그리스도가 일시적으로는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어 그들은 주권을 빼앗기고 멸망할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믿음 깊은 하느님 백성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주권을 얻게 될 것이다.
지상의 강대국들은 맹수와 비교할 정도로 크고 강하며 화려하다. 더욱이 넷째 짐승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것을 바수고 짓밟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강대국들이 맹수와 같은 짐승에 비교될지언정 천사나 사람에 비유되지는 않는다. 강대국들은 짐승처럼 영적인 것을 구하지 않고 물질적인 것만을 구하기 때문이다. 짐승에게는 영혼이 없다. 그래서 짐승은 영적인 것을 구하지 못한다. 진, 선, 미를 추구하지 못하고 덕을 쌓지 못한다. 짐승에게는 물질의 풍요를 누리는 것만이 필요하고, 그것이 덕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고, 그것이 덕이다. 바로 그러한 짐승처럼 강대국도 강한 힘과 물질의 풍요만을 추구한다. 그래서 다른 약소국가들을 침략하고 약탈하며 멸망시키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들에게는 승리가 덕이고, 강한 힘이 덕이다. 짐승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짐승에게 미래가 없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미래가 없다. 결국 그들은 스러져 없어질 것이다. 그토록 거대하고 강하며 화려하게 보였지만 그 모든 것들은 무너져 내리고 멸망하고야 만다.
오직 영원한 것은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을 섬기는 백성만이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주권을 가지고 영원히 살 것이다. 영혼이 불사불멸하는 것처럼 영적으로 살며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에 교회는 다시 한 번 하느님 나라만이 영원함을 강조한다. 지상의 나라가 제 아무리 강하고 크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스러져 없어지고 멸망하고야 만다는 것을 가르치며, 우리의 눈을 지상에서 천상으로 돌리도록 초대한다. 오직 영원한 나라는 하느님 나라임을 밝히며 하느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만이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누릴 것을 선포한다. 그러므로 오늘 하느님 나라를 믿고 바라며 살아감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하느님 백성이 되자.
다시 용기를 내고
- 원영배-
로스앤젤레스 대교구의 종신부제 양성과정 5년을 함께했던 동기들끼리 공원에서 야유회를 가졌다. 지난 6월의 부제품 이후 처음 모인 자리에서 서로 반갑게 음식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제 각자 본당에서 소임을 맡아 고유한 탈렌트와 은사를 살려 봉사하고 사목하는 모습에서 흐뭇함을 느꼈다. 지난 5년 동안 여정에서 고락을 함께 한 든든한 동지였다. 특히 남다른 어려움을 헤쳐 나온 제시 부제와 부인 엘로이스를 보며 시련의 은총을 묵묵히 받아 안은 그들 부부한테서 경외심을 느낀다.
2년 전 사순절 기간 주말에 가톨릭 교육대회(컨벤션)에 참석했던 모습이 생각났다. 마지막 날 대회 시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전시대를 둘러보던 두 사람과 마주쳤다. 근육을 다쳐 팔에 깁스를 하고 있던 제시에게 안부를 묻고는 다음 주말 모임(class) 때 보자고 인사하며 헤어졌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밤늦은 시간에 다른 동기한테 전화를 받았다. 제시와 엘로이스 부부의 외아들 척이 모터사이클을 타다 교통사고를 당해 방금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몇 시간 전 두 사람과 웃으며 인사하고 돌아왔는데, 그새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소방국 캡틴 제시의 아들 척은 대를 이어 소방관의 길을 걷고 있었다. 며칠 후 장례미사에 갔을 때 성당은 소방관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주차장과 바깥 도로에도 소방차들이 즐비했다. 수업시간에 이쑤시개를 늘 입에 물고 농담을 툭툭 던지던 사람 좋은 제시는 그 다부진 체격에 캡틴 정복을 차려입은 멋진 모습이었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조문을 받으면서 표정도 말도 잃은 듯했다.
엘로이스 역시 멍한 채 치미는 분노를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듯 보였다. 부제양성과정을 포기하지 않을까 동기들이 모두 걱정하며 부부를 위해 최선을 다해 기도하며 도와주기로 의논했다. 하지만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두 사람 스스로 치유되고 소명을 다지는 과정은 다른 동기생들에게 영감과 용기를 주었다. 서품식이 있기 직전 제시는 모임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하느님이 갑자기 데려가신 뜻을 금방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남은 우리에게 무언가 새로운 몫을 남겨주신 건 분명하다고 깨닫는다.”고 말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갑자기 닥치는 운명의 시간이 오면 우리는 아무리 깨어 있어도, 아무리 기도로 무장했어도 빈손으로 알몸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무력감을 경험한다. 안전을 보장해 주리라 믿었던 삶의 질서체계와 합리적인 해결책이 사라지고 혼돈 속에 빠지는 느낌에서 헤어날 수 없다. 그럴 때 위로가 되는 것은 주님이 이런 일을 미리 알고 계셨고 어려움을 덜어주기 원하신다는 사실이다. 깨어 기도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듣고 다시금 용기를 내야 한다. 언제고 닥칠 일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까치 설
-장재봉신부-
이제,
교회전례의 한 해가 마감되고 새 해가 열립니다.
이를테면
오늘이 교회의 ‘까치 설날’인 셈이지요.
어릴 적
섣달그믐 날에 가졌던
꿈과 소망을 새겨 봐도 좋겠습니다.
어릴 적에는
어른은 무엇이든 알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어도
막막하고
두렵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부지기수이지요.
문득
제자들이 탄 배가 풍랑을 만나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주무셨던 일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님을 깨워서 구해달라고 했을 때
겁에 질린 제자들을 꾸짖으셨던 일을 기억합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마태 8,26)
세상의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뜻과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의지와 달리
풍랑을 만나는 일도
인생에서 고난을 당하는 일도
상황이 힘들고 괴로운 것도
예수님처럼
모두 하느님의 섭리라 믿을 수 있다면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
평안합니다.
+++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일에 매어
백만 번의 염려나 걱정을 하는 일보다
한 번의 기도가 힘이 있는 까닭은
기도하는 마음에는
이미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새벽을 열며
어제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아주 황당한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글쎄 옛날 만화책 한 권에 천만 원이라는 것입니다. 1961년에 만들어진 만화책이라는데, 지금은 그 원본도 찾을 수가 없어서 천만 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6~70년대의 다른 만화책들도 있었는데, 그 만화책들 역시 적게는 오만 원에서 많게는 오백만 원까지의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만화책들 중에서 옛날에 우리 집에 있었던 만화책들도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 만화책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면 횡재했을 텐데, 당시에 부모님께 구박받으면서 봤던 만화책이 지금 그러한 가치를 할 것이라고 누가 알았겠어요?
당시에는 정말로 필요 없고 하찮다고 생각했던 것이 지금 이러한 가치를 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지금 소홀히 하고 있는 것 중에서 혹시 그런 것은 없는가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런데 항상 사랑 그 자체라고 말을 하면서 정작 내 자신은 주님께 한없이 소홀히 했던 점, 주님께서 그토록 사랑 좀 하라고 성경을 통해서 또한 생활을 통해서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외면하였던 저의 모습에 크게 반성하게 됩니다.
이 세속적인 삶을 강조하면서 정작 주님을 소홀히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지금 주님이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다고, 주님께서 내게 어떤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고, 성경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책일 뿐이라고, 이러한 식으로 주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당시에는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만화책이 지금 그렇게 큰 가치를 보여주는 것처럼, 지금 내 모습이 먼 훗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큰 가치를 드러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시면서 이러한 말로 경고하십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늘 깨어 기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주님과의 대화를 끊임없이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으로써 주님과 연결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지요. 바로 주님께서는 당신이야말로 구원의 통로이기에 절대로 그 연결의 끈을 놓지 말라고 늘 깨어 기도하라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악으로 쉽게 기울어 질 수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주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력으로 올해의 마지막에 서 있는 오늘, 기도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올 한 해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보살펴 주셨는지를 살펴보고, 다가오는 새해에는 더욱 더 주님과 하나 될 수 있는 은총의 시간이 되길 기도합니다.
올 한 해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반성하여 봅시다.
빠다킹신부
마무리하면서
-조명연 신부-
처음 신앙을 가질 때, 주님의 사랑을 매순간 느끼게 되고
주님 없이는 이 세상에 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게 되지요.
그러면서 일주일에 한 번 주일 미사 참석하는 것도 어려워합니다.
또한 이웃 사랑을 하라는 주님 말씀에 따라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그러한 마음도 사라집니다. 대신 저런 사람은 벌을 받아야 이 세상이
공평하다면서 그들을 내 나름대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데에만 최선을
다합니다.
이런 마음들이 생길 때가 바로 신앙의 권태기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볼 때,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대림시기에 들어서면서 새해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1년의 제일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에 사람들은 ‘내가 일 년 동안
어떻게 살았나?’
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력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우리들은 내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과연 얼마나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왔는가? 혹시 신앙의
권태기를 맞아서 주님을 멀리하며 살았던 것은 아닐까?”
-손영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다시 오실 날을 준비하여 늘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우리에게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하겠습니다. 우리는 구약의 노아의 방주와 롯의 이야기를 통해서 회개하지 않은 채 일상의 일에 몰입하고 있다가 멸망한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의 성향이 잘 변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잘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사람마다 조금씩은 차이가 있겠지만 어떤 사람이 하루아침에 마음을 고쳐먹고 새롭게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평소에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가득차 있다면 이러한 습관에서 벗어나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가 결심을 단단히 하여 하루아침에 술을 끊거나 마약을 끊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는 분명 한 생의 짧은 여정을 살아갈 유한한 존재입니다. 문제는 이 유한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세상살이 자체에 몰입한 나머지 종말의 순간을 맞는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과 그 때, 곧 예수님께서 언제 다시 오실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지를 우리가 분명하게 알고 있다면, 우리는 분명 회개하고 그 때에 잘 맞추어 준비할 것입니다. 저희 성당에서 이주일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그 때가 아마도 금요일 새벽인걸로 기억됩니다. 늦은 새벽시간 인적이 드문 때를 이용해서 도둑이 들었는데 그는 스댄으로 만들어진 정문의 대문을 훔쳐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정문이 휑하고 허전했습니다. 만일 그 도둑이 언제 올지 알았더라면 그 시간에 맞추어 그를 제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 역시 그 도둑처럼 언제 올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린다는 것은 항상 우리의 생활을 살펴보고 항상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늘 깨어 기도하는 삶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기도는 예수님과 나를 이어주는 편안하고 독보적인 대화의 장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매순간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기도를 통하여 나의 뜻이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이 관철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나의 시간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간을 살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종말의 시간이 슬픔과 공포의 시간이 아니라, 기쁨과 영광의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처럼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소서! 하고 외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잊지 맙시다. 그날이 오면 두 사람이 같은 침상에 있더라도, 두 사람이 등산을 같이 하더라도 두 사람이 일상에 평범한 생활을 하더라도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내버려 둘 것을 말입니다. 정말 필요하고 꼭 해야 할 것은 매일 우리의 삶을 점검하여 기도하는 습관을 지니는 데 있습니다. 하루에 기도할 수 있는 일정한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도록 합시다. 그것도 어려우면 적어도 아침에 일어나서 정성껏 십자성호를 긋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하루를 당신 안에서 충실히 해 나갈 수 있도록 단 몇 분간만이라도 도우심을 구합시다. 또한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며 주님의 뜻에 어긋난 것에 대해 단 몇 분간만이라도 용서를 청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기도를 많이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매순간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은 도둑처럼 닥칠 것입니다. 그러니 늘 회개하고, 늘 새롭게 살며, 늘 깨어 기다리는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불어 회개와 새로움과 깨어있음의 은총을 달라고 성령께 청하도록 합시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
-오 마리아 수녀-
늘 깨어 기도하여라. 이 문구는 2005년 나의 좌우명이었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다 올해도 역시 이 말씀을 선택했는데, 나의 이웃들은 때때로 이 말씀이 너무 어렵고 힘들지 않느냐고 한다. 참으로 자신을 살피고 예수님 안에서 늘 기도하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도한다는 것을 특정 장소나 시간에 무릎 꿇고 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에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집은 5대째 내려오는 천주교 집안이다. 그래서 이른 새벽 안방에 모여 아침기도로 하루를 시작했다. 삼종기도·조과·묵주기도·구일기도, 각종 기도문을 다 바치고 나면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내 자리는 늘 벽 쪽이었다. 가까이 베개가 있다면 끌어다가 허리에 끼우고 다시 달콤한 잠을 청하는데는 안성맞춤이기 때문이었다. 묵주기도의 선창은 돌아가면서 하는데 항상 졸다가 옆에 앉으신 어머니께서 꾹 찌르시면 잠시 깨어 선창하고, 임무가 완료되면 다시 잠에 떨어져 기도를 한 것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어린 시절에는 사실 기도하기가 싫었다. 그래서 빨리 기도문을 외우느라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가 ‘우리를 우해 빌샤’가 되기도 했다. 가끔 어머니께 이렇게 입으로 줄줄 외며 반복하고 성의 없이 하는 것이 기도가 되겠냐고 따지기도 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늘 웃기만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부모님이 보여주신 신앙생활의 모습이 나의 신앙을 성숙하게 했음을 절실히 느낀다. 가슴속에 기도하고자 하는 열정을 길러주고 기초를 놓아주신 두 분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가족이 모여서 함께하는 기도는 참으로 중요하다. 습관적으로라도 기도를 하다 보면 주님과 더욱 가까워짐을 느낀다. 요즘은 가족이 모일 시간이 없다고들 하지만 적어도 식사 전후 기도나 또는 텔레비전 시청 뒤끝이라도 짧게나마 기도를 하는 게 어떨까?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기도는 기도하면서 배운다”라고 하셨다.
-도정호 신부-
제 수첩에 기록된 것을 보면, 95년 여름 신학생 5학년이었을 때 여름방학을 하고 모든 신학생들이 주교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주교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금 세상은 거센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물질주의와 사치, 향락, 쾌락 등 찰나주의의 거센 소용돌이에 쉽게 휩쓸리게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자주 가지면서 거센 물결을 거슬러 갈 수 있도록 해야합니다. 늘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은 돌아가신 이갑수 주교님께서 10년 전에 말씀하셨던 그때의 상황보다 더 어두워진 듯 합니다. 돈의 위력 앞에 힘없이 무너지면서 하느님의 영역인 생명까지, 고귀한 인격까지 사고파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지금 현재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흥청대며 먹고 마시면서, 세상일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해 주고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수녀님께서 이런 권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아무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변치 않으시니
인내가 모든 것을 얻게 합니다.
하느님을 소유하는 이에게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고
오로지 하느님으로 충분합니다. .
눈에 보이는 것들에게 마음이 현혹되어 스쳐 지나갈 것을 놓지 못해서 연연하고, 붙들고 결국 영혼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져 중심을 잃고 흔들리게 되는 것을 데레사 수녀님은 분명하게 인식하셨는가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늘 깨어 기도하면서 하느님 안에서 사셨던 성녀 데레사 수녀님은 세상 일에 맘을 빼앗기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넓은 문으로 몰려갈 때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좁은 문으로 가실 수 있었던 분이셨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이분처럼 살아갈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사는 이곳을 신앙인답게 달리생각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기를 쓰고 살고 있는 이 세상 이후에 대해서 누가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까?
인간의 마지막에 관해서 누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습니까?
인간 죽음 이후에 관해서는 누가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까?
인간의 처음과 세상의 근원에 대해서 누가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까?
교회가 아니면 누가 해 줍니까?
이 교회 안에서 깨어있을 이유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 교회 안에서 사제로 사셨던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께서는 감옥에 있으면서 교우들에게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 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가지고 있어도 쓸데없다”고 말입니다.
오늘 아침 주님은 우리들에게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복음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흔들리며 중심을 잡지 못하고 마냥 휩쓸려 가고 있는 듯한 우리들 삶을 돌아봤으면 합니다.
어린이들이 가지고 노는 수많은 장난감, 모두들 값비싼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싶어하는데.......그렇지만 맞으면 맞을수록 더욱더 중심을 잡고 있는 팽이가 유난히 머리 속에 그려집니다.
아름다운 심포니
-백광현 신부 -
예수님은 흥청대며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일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는 경우
어떤 것을 올바로 바라볼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집착과 애착 안에서 사는 삶은
눈을 밝혀 주지 못하기 때문에 주변을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저는 음악을
잘 알지 못하지만 한때 클래식을 좋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걸어다니거나
차를 타거나 노상 베토벤의 심포니를 듣곤 했습니다. 음악에 빠져 있을 때
옆에 누가 있는지 관심조차 없었습니다. 행여나 이 멋진 순간을 방해받지나
않을까 오히려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지인 한 분이 제게 “너 베토벤의
심포니를 좋아하는구나. 나는 네가 사람들이 사랑하면서 만들어내는 심포니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깨달으면 더 좋겠어”라는 말을 던졌습니다. 그 순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음악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이 만들어 내는 가장 완벽한 심포니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심포니가 울려퍼집니다.
오늘 이 심포니를 들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늘 깨어 기도하여라.”
걱정은 내 몫이 아니야
-민경철 신부-
열심히 살아보려고 했던 행동들인데 괜한 오해를 받고, 독기 서린 말마디에
상처를 받기도 하면서 끙끙 앓기도 합니다. 인간적인 힘으로 이겨내기 힘든 일을
당하면서 한동안 술이 친구가 되기도 하고, 한 번 빠져버리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늪과 같은 문제 속에서 그저 답답함으로 신음하기도 합니다.
사실 걱정이란 것이 내 몫이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죠. 걱정하고 있는 것이
경험상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이 별로 없는데, 그리고 고민하는 것이
옛날에 있었던 과거의 일들이 많은데, 또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바보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깨어 있어라”라는 말씀 안에는 우리의 근심, 걱정, 고민을
당신께 맡기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 그리고 말씀에
내 눈과 귀를 열어 놓고 있으라는 말씀이십니다.
답을 혼자가 아니라 같이 찾자고 초대하는 말씀인 것이지요.
예수님을 외톨이로 만들거나 그 반대로 나 자신을 외톨이로
만드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일상의 근심 속에서도
-신금재-
지난 주일에 어머니 칠순 잔치가 있었다. 며칠 전부터 초대장을 만들고 케이크를 주문하느라 마음이 분주했고, 바로 전날에는 꽃바구니를 만들기 위해 꽃가게를 여러 번 다녀와야 했다. 잔칫날, 어머니와 성당 노인회를 함께하는 분들을 초대해서 점심식사를 했고 가까이 지내는 교우들도 참석해서 기쁨을 나누었다. 즐거워하시는 어머니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무척 기뻤다.
잔치를 마치고 난 다음 수요일,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 가면서 지난 주 활동을 돌아보았다. 묵주기도도 제대로 못했고, 협조 단원을 돌보지도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일상의 근심으로 내 마음이 무뎌진 것이리라. 예수님은 “조심하여라”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신다.
나는 가끔 우리가 처음 이민 오던 날 풍경을 떠올리곤 한다. 캘거리 공항에 발을 디딘 때는 2월 중순 한밤중이었다. 온 천지가 하얀 눈으로 덮여 설국에 온 것 같았지만 모든 것이 낯선 우리에겐 두려움뿐이었다. 남편 베드로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장으로서 식구들을 이끌고 가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을 느꼈을 것이다. 나 역시 아이들이 새로운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지 걱정되었다. 무사히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갈 수 있을지, 이곳 캐나다 아이들과 잘 어울려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민생활 6년이 지난 지금, 두 아이는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에 진학했다.
이제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불러주셨다고. 모든 것을 예비해 놓으신 그분은 우리를 보살펴 주시고 우리를 도구로 쓰신다고. 예수님은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아시면서도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셨고 저녁이 되면 올리브산에 올라가서 기도로 밤을 지내셨다. 우리도 깨어 기도하면서 언젠가 주님 앞에 서게 될 날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항상 깨어 기도하여라.
-김웅태 신부-
오늘 복음[루카 21:34-36] 말씀 중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직결된 아주 중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항상 깨어 기도 하여라!"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씀하시는 데는 그 이유가 있는데 이미 앞에서 루가 12:25 이하에서의 말씀인 사람의 아들이 오셔서 구원하여 주시겠다는 말씀과 아주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그때 그날은 다시 말해서 심판 하시는 날에는 공포와 기쁨, 영광이 이 세상에 함께 있던 것을 분명하게 둘로 가르시는 때인데, 그것은 그 때만의 일이 아니라 지금의 삶의 태도와 계속 연결되어 있는 결과라는 것을 암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흥청대며 허송 세월을 한다든지, 쓸데없는 세상일로 마음을 빼앗기는 지금의 행동이 가지고 올 불행을 면하려거든 또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나 분명히 번개처럼 닥쳐올 것이므로, 지금 여기서부터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기도를 한다는 것은 우선 듣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사실 듣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또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듣는 것은 곧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시키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더러 기도하라고 계속해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대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기만을 내세워서 교만하게 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자신의 동네에 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행하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 하나 연결되어서 좋은 열매를 맺어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그날 두려움 없이 그분 앞에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권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과 밀접히 연결될 수 있는 길이고, 그것이 최후의 심판날에 우리가 구원될 수 있는 우리의 행동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선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나 자신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무슨 일을 하도록 우리 자신에게 항상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시는지 깊이 생각해 보고, 예수님이 시키시는 대로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삶을 살아 가도록 노력합시다.
연중제34주간토요일
- 박재철신부-
알파요 오메가의 하느님
-박상대신부-
“늘 깨어 기도하라.”(36절) 이것이 한해 전례달력의 마지막 날에 선포되는 메시지이다. 우리가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이를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하기 위함이며,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재림하시는 인자(人子)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기 위함이다. 우리가 전례력의 마지막 주간을 지내면서 매일미사의 복음을 묵상한 바에 의하면 인자의 재림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하나는 재림의 순간이 눈으로 알아볼 수 있는 묵시적(?示的) 징조나 표징과 함께 장엄하게 다가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도둑(마태 24,43; 루가 12,39)이나 덫(35절)처럼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들이닥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하나를 선택하려거나 어느 것일까 하고 점치려 하지 말라. 잘 못 골랐다간 낭패를 본다. 그러므로 둘 다를 염두에 두는 것이 상책이다.
인자의 재림은 준비된 ‘바로 그 날’에 일어날 사건이 되겠지만, 사실상 ‘갑자기’ 들이닥친다는 데 매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있듯이(루가 17,21) 인자의 재림도 반드시 미래의 어떤 사건만은 아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어 영광의 몸으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마태 28,20), 인자의 재림은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된 사건이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더 이상 옛적의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 새 창조를 향하여 그 여정을 시작하였고, 서서히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자의 재림은 예수님 편에서 볼 때, 별다른 사건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 편에서 볼 때, 이 사건은 나자렛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계획이 완성됨을 증명하는 사건이고, 그분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우주 계시적 사건이며, 영광의 그분 앞에 서게 될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사건이 될 것이다.
우리는 올 한 해 동안 독서와 복음말씀을 통하여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의 발췌된 성서를 읽음으로써 성서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성서는 누구에게나 그를 읽는 사람에게 필요한 의미를 제공한다. 그렇다고 성서가 자신이 담고 있는 모든 내용으로 세상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의 정형(定形)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처음이 어떤 모양이었으며, 그 마지막 또한 어떤 모양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서 또한 인간에 의해, 인간의 언어로 기록되었기에 그 모양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가 서 있는 극히 제한된 그 자리와 시간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시키며, 전역사의 차원으로 극대화시킨다. 다시 말해서 성서는 세상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갈 것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것의 알파(Α)요, 오메가(Ω)이시기 때문이다.
더러는 길게 살고, 더러는 짧게 사는 것이 세상이지만, 누구에게나 탄생과 죽음은 세상의 창조와 종말의 의미를 가지며,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한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창조부터 종말에 이르는 세상 전역사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나의 존재가 사람들 앞에서는 비록 하찮은 것으로 보일지라도 하느님 앞에서는 결코 그럴 수 없다. 내가 없으면 창조도 없고 종말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그러기에 스스로 최선을 다해야 하는 나만의 삶을 소중함과 자랑스러움으로 살도록 하자. 그리고 그 삶을 사는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을 만들자.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시작하신 일, 그 일을 당신 뜻에 맞게 질서 지워주시고, 용기와 지혜로써 진보하도록 이끌어 주시며, 은총과 자비하심으로 그 마침을 채워주실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