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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장. 여자 거인(女巨人)
유룡생의 검법으로 말할 것 같으면 비단 신속할 뿐만 아니라 그가 사용하는 탈정검은 더할 수 없이 날카로운 것이다. 이심환은 이것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인간의 육체로서 이 일검을 막기란 매우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완전히 상상에서 벗어났다.
"악!"
순간 경악에 가득 찬 비명이 터져 나오는가 싶었는데 유룡생은 마치 탄력성이 강한 나무에 부딪힌 듯 튀어나와 그 반대쪽에 있는 여자의 몸에 쓰러졌다.
그 여인은 담담하게 웃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 유룡생을 꼭 안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유룡생이 뻗쳐낸 검은 정확하게 대환희여보살의 목 가운데 꽂혔다.
그러나 대환희여보살은 고통의 빛은커녕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단정하게 앉아 이심환을 쳐다보며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이심환은 그만 그 자리에서 넋을 잃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환희여보살은 목에 있는 비곗살로 검을 꽉 끼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공력에 대해서 이심환은 비단 보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듣지도 못했다.
대환희여보살은 가볍게 웃으며 입을 떼었다.
"뚱뚱한 여자에겐 뚱뚱한 대로 좋은 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시겠소?"
이심환은 탄식을 터뜨리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여보살께선 정말 놀라운 공력을 지니셨군요."
이심환은 이 점에 대해선 시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그녀보다 더 살이 찐 사람은 결단코 없기 때문이었다.
이심환이 묵묵히 서 있으려니까 대환희여보살이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당신의 비도가 백발백중이라는 것을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소. 나의 보물단지와 같은 수양아들도 당신의 그 일도에서 피해 내지를 못했으니까. 물론 당신 자신도 매우 자부심을 갖고 있겠지."
이심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대환희여보살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당신의 비도를 믿고 이곳에 온 게 분명하겠지."
대환희여보살은 목에 꽂힌 검을 뽑아내더니 미소를 지으며 다시 이었다.
"그러나 당신의 비도가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이심환은 다시 탄식을 터뜨리더니 씁쓸하게 웃었다.
"죽이지 못할 거요."
"호호호... 그럼 당신은 아직도 남갈자를 데려갈 생각이 있소?"
이심환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순간 대환희여보살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러나 이내 다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당신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다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재미있는 사람이야. 그런데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그녀를 데려갈 생각이오?"
이심환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천천히 생각해 보면 무슨 방법이 나올 거요."
"좋소. 그렇다면 이곳에 남아 천천히 생각해 보시오."
이심환은 주위를 둘러보며 넉살좋게 말했다.
"이곳엔 향기로운 술이 있으니 며칠 있어도 무방할 거요."
대환희여보살의 음성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술은 절대 그냥 줄 수가 없는 것이오."
"그러면 여보살께선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대환희여보살은 잠시 뜸을 들이고 있다가 음탕하게 웃었다.
"본래 나는 당신이 늙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소. 그런데 당신은 볼수록 호감이 가고 매력이 넘치는 남자요. 그러니 딴 생각 말고 나와 여기서 며칠 지냅시다. 그러면 내 남갈자를 순순히 내주겠소."
이심환 역시 지지 않고 맞섰다.
"당신이 나를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나는 당신이 너무 비대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만약 당신이 그 몸에 있는 살덩어리를 일백 근 정도 없앨 수 있다면 나는 며칠이 아니라 몇 달이라도 당신과 함께 지낼 수 있소. 그러나 지금은....."
여기까지 말한 그는 잠시 멈추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 솔직히 말해 도무지 구미가 당기지 않소....."
순간 대환희여보살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이놈. 보자보자 하니까 정말 방자하기 이를 데 없구나!"
이렇게 소리친 그녀는 육중한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이심환의 사방에 앉아 있던 몇 명의 여인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녀들은 비록 비대하기는 했지만 행동은 결코 느리지 않았다.
여인들은 일어서자마자 코끼리와 같은 육중한 다리를 움직여 천천히 이심환을 향해 육박해 들어왔다.
여인들 중에서 가장 마른 사람이 이심환의 세 배는 되었는데 그녀들이 주위를 둥그렇게 에워싸자 쥐새끼 한 마리도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천장도 매우 낮아 이심환은 공중으로도 날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밑으로도 숨을 수 없는 것이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아니 그것은 잠깐 감수한다손 치더라도 여자들의 이 육중한 몸을 보니 절로 구토증이 났다.
여인들은 점차 가까이 다가오면서 마치 이심환을 산 채로 찢어 죽이려는 것 같았다.
완전히 포위된 이 상태에서 이심환이 설사 비도를 전개해 낸다고 하더라도 한 번에 한 사람밖에 처치할 수가 없으므로 실로 난감할 뿐이었다.
소위 남자가 여자에 의해 할켜 죽는다는 것은, 이심환은 그 다음에는 차마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때 대환희여보살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 이심환, 너는 소림사의 나한진까지도 무사히 돌파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를 돌파하기는 약간 어려울 것이다."
대환희여보살의 웃음소리는 갈수록 점점 커졌고 온 누각이 그녀의 웃음소리에 의해 지진을 만난 듯 크게 흔들렸다. 아니 그뿐이 아니라 누각을 받치고 있던 기둥까지도 삐걱거렸다.
순간 이심환의 두 눈동자가 빛났다. 그는 갑자기 영영을 생각해 낸 것이다.
영영은 지금 아래층에 있다.
그녀는 물론 이심환이 죽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지 않을 것이며 무엇이든 방법을 생각해 낼 것이다.
펑! 그때 갑자기 경천동지할 폭음이 터지더니 온 누각이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우르릉, 꽝 하는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리는 가운데 누각 위에 있던 사람들이 속속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그리고 지붕이 갈라지면서 커다란 구멍이 하나 생겼다.
'이때다!'
이심환은 속으로 소리치며 그 뚫어진 구멍을 향해 물 찬 제비처럼 뛰어올랐다.
이심환은 지붕 밖으로 빠져나오며 대환희여보살도 자기의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필경 떨어져 내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떨어져 내렸다면 설사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반나절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러나 이심환의 상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대환희여보살은 그 몸놀림의 동작이 놀랍게도 신속했을 뿐만 아니라 경공 또한 대단했다. 이심환이 막 지붕 위를 뚫고 나왔을 땐 다시 거센 폭음이 터지더니 대환희여보살도 지붕을 뚫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거대한 풍선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것 같았으며 그녀의 거대한 덩치에 의해 사방 주위는 칠흑처럼 어두워졌다.
누각은 계속해서 밑으로 붕괴되어 내려갔고 회색 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라 밝은 달빛을 가렸다.
이심환은 고개도 한 번 돌리지 않고 평사낙안(平沙洛雁)이라는 초식을 전개하여 지상으로 가볍게 내려섰다.
그 순간 대환희여보살의 미친 듯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하하하하... 이심환, 넌 내 눈에 띈 이상 결코 도망가지 못한다!"
고함소리와 동시에 육중하고 거대한 몸이 이심환을 향해 번개같이 덮쳐왔다. 순간 이심환은 갑자기 태산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거대한 압력을 받았다.
이심환은 그때 손을 뒤로 내뻗었다. 한광이 번쩍 하는 순간 소이비도가 드디어 오색 광채를 발하며 앞으로 날아갔다!
비도는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다!
대환희여보살의 얼굴에선 즉시 시뻘건 선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번에 이심환이 던져낸 비도의 목표는 그녀의 목이 아닌 눈이었다.
이심환은 눈외에 다른 곳을 명중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눈을 겨냥한 것이었다.
"으하하하... 하하하....."
그러나 대환희여보살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멎지 않고 사람의 간장을 조일 듯 터져 나왔다.
이심환은 이 순간 전신에 소름이 오싹 끼치는 것을 느끼고 급히 몸을 돌렸다.
차가운 달빛이 비치는 아래 대환희여보살은 선혈을 비 오듯 흘리며 계속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무덤을 파고 나온 여자 거인(巨人)이 걸어오는 것 같았다.
대환희여보살은 비단 고통을 느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웃으면서 말했다.
"이심환, 내가 이미 널 본 이상 너는 결코 내게서 도망갈 수가 없다! 너에게 비도가 몇 개나 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서슴지 말고 모두 던져라. 이런 칼이라면 열 개가 아니라 백 개라도 내 맞아 줄 수 있다!"
그러더니 대환희여보살은 눈에 꽂힌 칼을 뽑아 우지끈 씹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강철로 만들어진 비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입에서 엿처럼 녹아 버렸다.
이심환은 정말 이런 사람을 처음 보았다.
아니 심지어 저것이 인간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태고적부터 생존해 온 거대한 야수와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비도가 백 개가 있어도 그녀를 무너뜨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이때 갑자기 대환희여보살이 미친 듯 고함을 터뜨렸다. 그 고함소리는 얼마나 크던지 주위 경물이 심하게 흔들렸고 무서운 해일이 육지를 삼키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이심환은 어떤 싸늘한 광채를 발하는 물건이 그녀의 가슴을 꿰뚫고 나온 것을 보았다.
이어 그 싸늘한 물건 끝에서 시뻘건 선혈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이심환은 유룡생이 대환희여보살의 등 뒤에 와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의 넉자 길이에 가까운 탈정검이 대환희여보살의 살 속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끼아악!"
대환희여보살이 다시 짐승 같은 고함을 내지르자 유룡생의 몸은 공중으로 붕 떠오르더니 바로 그녀의 발밑에 떨어졌다. 동시에 대환희여보살의 산더미 같은 육중한 몸이 그의 몸 위로 쓰러졌다.
우지끈 하며 어떤 딱딱한 물체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보아하니 유룡생의 뼈마디가 모두 박살이 난 게 분명했다.
대환희여보살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겨우 말을 꺼냈다.
"이놈, 네놈이 감히 나를 암살하다니....."
유룡생은 그녀의 밑에 깔려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면서 대꾸를 했다.
"오냐, 미처 생각도 못했겠지....."
"나는... 네놈을 매우 관대하게 대해 주었는데....."
유룡생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뒤범벅되어 있었으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받았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바로 오늘이 있기를 기다려서였다....."
유룡생은 대환희여보살의 밑에 깔려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때 대환희여보살의 몸이 심한 경련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즉시 유룡생의 몸에서 굴러 떨어져 내려왔다.
이 순간 유룡생은 눈앞이 가물가물했으나 이심환의 수심에 가득 차 있는 두 눈을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매우 안정되고 편안한 두 손이 얼굴에 흐르고 있는 땀을 닦아 주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이 두 손은 비록 수시로 남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손이지만 또 언제라도 남을 도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손이기도 했다. 이 손에는 항상 살인을 하는 칼이 쥐어져 있기도 하지만 때때로는 동정이 쥐어지기도 했다.
유룡생은 문득 가슴에 뜨거운 감사를 느끼고 애써 미소를 지으려 했으나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러나 유룡생은 있는 힘을 다해 억지로 입을 떼었다.
"나는 유룡생이 아니요."
이심환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당신은 유룡생이 아니요."
유룡생은 다시 헐떡거렸다.
"유... 유룡생은 이미 죽었소....."
이심환은 암담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유룡생은 이미 죽고 없소."
유룡생은 숨이 금방이라도 넘어갈 듯했다.
"당신은 오늘 유룡생을 보지 못했소."
이심환은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나의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소."
이때 유룡생의 입가에 처량한 미소가 떠올랐다.
"당신과 같은 사람을 친구로 사귈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행운아일 거요. 그러나 나는....."
유룡생은 숨을 헐떡이며 마지막 한 가닥의 숨을 끌어올리기 위해 잠시 멈추더니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나는 당신의 손에 죽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오!"
어느덧 밤의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아침이 밝아왔다.
단풍나무숲 밖에 세 개의 새로운 무덤이 생겨났다. 그것은 바로 유룡생과 남갈자 그리고 대환희여보살의 무덤이었다. - 무덤을 만든 사람들은 대환희여보살의 문하들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은 여보살의 죽음에 대해 조금도 슬픔을 느끼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 누각을 파괴시킨 사람은 과연 영영이었다.
영영은 이심환이 살아난 것에 대해 그리고 자기가 한 행위에 대해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떠들었다.
"저는 그저 기둥만 흔들었을 뿐인데 누각 전체가 무너져 내리더군요. 만약 저의 행동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당신은 산 채로 깔려 죽었을 거예요."
영영은 떠들다가 대환희여보살의 문하들이 아무런 슬픔의 표정도 짓지 않고 묵묵히 떠나는 것을 보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여 물었다.
"아니 저들은 어째서 사부를 대신해 복수할 뜻이 없는 걸까요?"
이심환은 길게 탄식을 터뜨렸다.
"그것은 대환희여보살이 자기 배만 채우기 바빠 저들을 전혀 살피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영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어요. 원래 인간이란 자기 배만 부르면 다른 사람 생각은 하지 않으려는 습성이 종종 있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다시 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저들을 이대로 보낼 생각인가요?"
이심환은 담담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게는 저들을 먹여 살릴 능력이 없다."
영영은 입술을 깨문 채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이심환을 흘겨보며 앙칼지게 외쳤다.
"만약 한 사람을 먹여 살리라면 할 수 있겠어요?"
영영은 소리쳐 묻더니 눈알을 데구르르 굴리며 재차 말을 이었다.
"그 여자는 많이 먹지도 못하고 또 많이 마시지도 못해요. 고기를 잘 먹지 않으니 매일 야채나 두부 따위만 먹어도 돼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그 여자는 밥도 음식도 잘 만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잘 때엔 이부자리까지 봐 주며 또 아침에 일어났을 땐 머리까지 빗겨 주지요."
이심환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한쪽 눈을 감았다.
"그런 사람이라면 혼자라도 편히 살 수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나를 따라 고생을 하지?"
영영은 곧 울음을 터뜨릴 듯 양 볼이 퉁퉁 부었다.
"지금 당신의 마음속엔 남갈자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아요. 그 여자의 허리는 내 허리보다 더 날씬했지요."
이심환은 씁쓸한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너는 어째서 내 마음속에 남갈자밖에 없다고 생각하느냐?"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그녀를 위해 당신은 죽음까지도 불사했어요. 사실 그녀는 이미 죽었고 또 당신이 그렇게 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데도 말이에요."
이심환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살아 있을 때 나의 친구라면 죽어서도 내 친구인 것이다."
영영은 눈을 크게 뜨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렇다면 나는 당신의 친구가 아니란 말인가요?"
"물론 친구지."
"그런데도 당신은 죽은 친구를 위해선 목숨까지 내걸고 싸우면서 살아 있는 친구에겐 이리도 무관심하신가요?"
영영은 눈시울을 붉히면서 계속 따지고 물었다.
"저는 집도 없고 어디 의지할 곳도 없는 외톨박이예요. 그런데 당신은 제가 한길을 방황하면서 남의 집 찬밥이나 얻어먹는 것을 보고만 있을 작정인가요?"
그러나 이심환은 말이 없었다. 단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이심환은 이 소녀가 갈수록 하는 말이 청산유수처럼 늘어가는 것을 느꼈다.
영영은 이심환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하면서 연신 그를 흘기며 원망스런 어투로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만약 절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 저희 아씨를 찾을 수 있죠? 그리고 당신의 친구인 아비는 또 어떻게 찾는다는 말인가요?"
숲 속은 조용했고 계속해서 영영의 투덜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아비는 마침 자리에서 일어나 국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쇠고깃국은 매우 향기롭고도 진했다.
아비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두 손으로 그릇을 들고 천천히 마셨다. 눈동자는 그릇 옆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시고 있는 국에 대해서는 그 맛이 어떤지 전혀 맛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임선아는 아비의 맞은편에 앉아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요사이 당신의 혈색이 매우 좋아졌어요. 앞으론 거르지 말고 국을 좀 더 드세요. 자, 이 국물은 몸에 매우 좋다니까 뜨거울 때 마셔요. 식으면 기름이 떠서 아주 맛이 없어져요."
아비는 그녀의 말이 다 끝나자 국사발을 들어 단숨에 다 마셔버렸다.
임선아는 아비의 입가를 가만히 닦아 주면서 말했다.
"맛있어요?"
아비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자 임선아는 다시 물었다.
"한 그릇 더 갖다 드릴까요?"
아비는 여전히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임선아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만족한 듯 방그레 웃었다.
"물론 그래야죠. 당신은 원래 식사를 적게 하니 국이라도 많이 마셔야 돼요."
그러면서 이내 부엌으로 달려갔다.
집 안은 매우 간소했다. 최근에 새로 단장을 한 듯 부엌에는 장작을 땐 그을음이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이 이곳에 온 지는 불과 이틀밖에 되지 않았다.
임선아는 다시 따뜻한 한 그릇의 국을 아비에게 갖다 주었다.
"이곳은 비록 크지는 않지만 시장은 많아요. 다만 고기를 사기가 좀 곤란할 뿐... 한 근에 거의 십전이나 받는다니까요."
아비는 고개를 숙인 채 국물을 두 모금 들이키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우리 내일은 쇠고깃국을 먹지 말도록 합시다."
임선아는 매우 의아해 하며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무엇 때문이에요? 쇠고기를 싫어하나요?"
아비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무거운 어조로 대꾸했다.
"물론 먹고는 싶지만 형편이 그렇지가 못하지 않소?"
임선아는 웃으며 온화한 음성으로 그를 위로했다.
"돈 때문이라면 그렇게 걱정하지 마세요. 여우 가죽을 팔아서 모은 스물일곱 냥의 은자는 아직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요."
아비는 푹 하고 무거운 한숨을 내뿜었다.
"그것도 언젠가는 다 쓰게 될 거요. 그리고 이곳엔 여우 사냥을 할 데도 없지 않소?"
임선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우선 급한 대로 써야죠. 그리고 제겐 또 방값이 있잖아요?"
아비는 갑자기 검미를 세우며 무서운 어조로 내쏘았다.
"그러나 그 돈은 쓸 수가 없소."
"어째서 쓸 수 없다는 거죠? 그 돈은 훔쳐온 것도 아니고 또 빼앗아 온 것도 아니며 남의 삯바느질을 해 주며 열 손가락으로 한 푼 두 푼씩 번 돈이란 말이에요."
첫댓글 감사
즐독~2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즐감
즐감
아비가 마음에 변화가 일고 있군
잘보고갑니다
잘읽었습니다
잘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