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계바라밀
너무나 착해서 착함을 모른다
선도 악도 없는 경지가 있다. 선과 악을 초월한 경지가 있다.
가치판단을 상실하였기에 선과 악을 구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선해서 선과 악을 모르는 경지다.
일거수일투족이 '착함' 그 자체이기에, 선행을 한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육바라밀 가운데 지계(持戒)바라밀이 바로 그것이다.
선종의 육조 헤능 스님의 《법보단경》에서 말하는 무상계(無相戒)다.
무상계란 '티 나지 않는 윤리적 삶'이다.
'티 나지 않는 베풂'인 보시바라밀을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도 부르듯이,
지계바라밀을 무상계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남을 대할 때 참으로 선한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지극히 고결하게 살지만 자신이 그렇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논어》의 〈위정편〉에 의하면 공자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志學〕,
30세에 입신하였으며〔而立〕, 40세가 되니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았고
〔不惑〕 50세에 천명을 알았으며 〔知天命〕, 60세에 귀가 순해지고〔耳順〕,
70세가 되니 "마음에서 솟는 욕망이 세간의 윤리적 잣대를 넘어서지 않았다
〔從心所慾不楡矩〕."고 한다. 이 가운데 마지막 '종심(從心)'의 경지가
바로 지계바리밀이다. 마음대로 행동해도 윤리, 도덕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선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선악에 걸림이 없는 진정한 무애행(無碍行)이다.
조직폭력배에 대한 조크가 있다. 웬지 모르지만 영화나 TV드라마
등을 보면 조폭은 몸에 문신을 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상반신을 휘감는 용의 문신을 한다든지, 팔둑이나 어깨에
'일심(一心)'이라는 한자나 '큐피트의 화살이 꽂힌 하트'를 문신한다.
'일심'은 《대승기신론》에서 가르치는 일심이 아니라
"조직의 모든 구성원들이 일심동체로 단결하자."는 다짐의 글귀일 것이다.
그런데 조폭 가운데 한사람이 팔뚝에 "차카게 살자."는 문구를 새겼다고 한다.
하루종일 악하게 살다 보니까 미안했는지,
"하루에 한두 번만이라도 착하게 살자!"는 다짐을 쓴것이라고 한다.
너무나 무식하기 때문에 철자법도 틀렸다.
이를 본 사람이 그 조폭에 대해서 더 큰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공(空) 사상에 대한 오해로 가치판단을 상실하여 선과 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도 참으로 크나큰 잘못이지만, 선과 악의 구분에 집착하면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 역시 '완전한 선'은 아니다.
'차카게 살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대품반야경》에 대한 용수보살의 주석서인
《대지도론》에 의하면, '단순한 지계행'에서는 '분노의 번뇌'가 일어나기 쉽다고
한다. 선과 악을 분별한 후 선을 행하고자 할 경우, 악을 행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날 수 있다는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착함'이란
선과 악의 구분을 초월한 지계행이어야 한다.
《금강경》에서는 뗏목의 비유를 들면서 "법도 버려야 하거는 하물며
비법(非法)이랴?"라고 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뗏목을 타고서 강을 건넌 후에는 뗏목을 버리고서 내려야 하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열반의 언덕, 공성의 경지에 도달했으면, 가르침에 대한
집착에서조차 벗어나야 진정한 열반, 진정한 공성을 체득한다는 것이다.
공성이란 우리의 인지(認知)를 정화하는 가르침이기도 하지만
윤리적 완성이기도 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지계의 삶을 살아가지만,
궁극적으로는 계의 상(相)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고결하고 착하게 살아가지만, 종국에는 자신이 고결하다거나 착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아야 '지계의 완성'이다. 무상계인 지계바라밀이다.
김성철 교수의 불교하는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