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uation 1.
훈련소로부터 열차로 용산역에 도착했다. MP들이 경계하고 있었다. 영등포 보충대로 이동했다. 새로운 상황에서 벌어지는 불확실한 행위들은 공포로 깔려있었다. 거기엔 남한산성 육군교도소로 부터 풀려난 집총 거부자 들이 움직이고 있었고 밤이면 그 누군가가 막사를 가로 지르는 전선주의 선로에 모포를 절연체로 삼아 이웃 막사에 침입하여 물건을 훔쳐 간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보여주는 감옥생활의 단면과 체험은 가히 지옥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칫솔대로 만들어진 에로행위 조각 소품은 장인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보충대 입소 이틀 만에 화단 정비작업을 지휘하든 선임하사가 야전삽으로 정수리를 얻어 맏는 하극상으로 사망 사고가 발생, 팽팽한 긴장감이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덩달아 골로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순간이 흘러갔다.
-때마침 어릴 때 인삼을 많이 먹어 체력이 남다르다는 마을 친구 K를 조우했다. 유도대학 재학 중 입대하여 전방으로부터 탈영하여 이곳에 자진 입소의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됐다는 후배였다.
막사마다 돌아다니며 고향 친구들이 스쳐가는 가를 명단을 보고 찾아왔다. 구원자 처럼 나를 반겼고 포옹했다. 그 반가운 맛은 짜릿한 안도감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 막강 파워를 갖고 있었다. 어느 날 취사 행열 순서 문제로 7:1로 싸움이 붙었으나 유도실력을 발휘하여 제압해 버리는데 놀라웠다.
어디로 가나 먼저 입대한 고향 까마구(?)가 든든한 배경이 되어 준다는 것은 하늘이 부여한 인지상정 아니겠나?.
- 사흘 후 미군트럭이 왔다. 인계인수작업이 끝났다. 3대의 트럭에 분승한 우리들은 비포장도로의 자욱한 흙먼지를 뒤로하고 어디론가 질주했다. 맨 앞에는 찬란한 유니폼의 미군 MP 짚차가 칸보이를 했다.
어윽~ 군 생활에도 내일이라는 미래가 도래하는 시간도 있는가 희망을 안았다.
Eascom(부평) 에 도착했다.
우리들은 DDT 파우더를 한바탕 뒤집어 섰다. 인간물건 소독이었다. 그리고 샤워룸에서 따끈따끈하게 몸을 씻었다. 향기로운 비누와 흰 타월을 받고 '샤워'라는 미군들의 문화에 접속하게 됐다.
"Z카!"
다림질이 잘된 카키복 차림의 미군 하사관은 얌전한 인상에 인간미가 풍기고 있었다. 그는 맑은 안경을 콧잔등 위에 살짝 걸치고 있었다. '까'발음이 파열되어 '카'로 퍼저나왔다.
"Z까!"
의자에 앉은 미하사관 옆에 선 통역 병장 계급장의 카투사가 불안전한 발음을 확실하게 교정하여 내 뱉었다. 물론 그도 깔끔한 차림의 카키복을 입고 있었다. 흰 팬츠를 내린 나의 하체 중앙에 눈길을 쏘았다. 명령대로 성기를 검사했다. 명령이다. 수치는 따위는 허영이다. 여기는 군대다.
"OK! 돌아서 항문!"
카투사 병장이 몸을 돌리라는 수신호와 더불어 항문을 보일 수 있는 자세를 취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OK, 다음!"
이렇게 해서 80여명의 KATUSA 배속 명령을 받은 졸병들은 두서너 개의 바락크를 돌며 신체검사를 받고 사지 운동능력도 테스트를 받았다.
그중엔 전방에서 차출된 일병급 사병들도 있었다. 나는 훈련소로 부터 악몽 같은 신병훈련을 마치고 자격시험을 치룬 후 카투사로 배출된 것이었다. 동료 훈병들로 부터 선망의 시선을 받았다.
- 용산역 프렛홈에 내렸을 때는 비루먹은 말 새끼로 둔갑해 있었다. 고참 사병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의 지시에 따랐다. 혼이 빠진 망망한 거동은 인간이 겪는 주어진 상황에서 얼마나 비참해지는 가와 전락하는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검사 모두를 통과했다. 서프라이에서 각종 의류와 보급품을 받아 더불 백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수령 사인을 했다. 내가 얼빵한 영문 사인을 끌적거려 내밀자 메부리 코를 한 백인하사의 시선이 왔다. 약간의 미소가 스며있었다.
"어쭈, 이 자슥 제법 놀고 있네!"
환영인지 비하인지 나는 그의 표정을 정확히 읽을 수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미군들의 병영문화속의 일원으로 굴러가게 되었다. 메스홀로 이동해서 낯설은 식사도 했다.
카투사 입영 신병관리는 매우 질서정연하게 집행됐고 나는 모처럼 인간 대접을 받는 영향권에 진입한 듯한 안도를 가졌다. 내가 새벽 입영열차에 꿈틀거리는 인간물건으로 내동댕이 쳐지고 훈련소에서 아카시아 향기가 코끝을 스쳐갈때 인간세계의 역경을 알게 됐다.
그리고 자유에의 동경을 느꼈다. 행군, 사격, LMG를 메고 스러질때, 커피색 논바닥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도 생의 진행은 이루어진다고 믿게 된다. 화장실 소변로 청소가 불량하다고 그곳에 까까머리 대갈통을 쳐박고 원산폭격을 당했고 야전곡괭이 자루로 얻어 맏고 뻗어버렸든 기억들-에서나는 인간 환경변화 적응 능력을 배웠다.
다시 더블백을 메고 트럭에 실려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주둔지의 메인게이트를 지나며 곳곳의 군 바락크가 여기저기 널려있는 지역엔 높은 철조망과 원형 철조망이 그 주둔지를 에워싸고 있었다. 비행기 활주로가 있었고 비행소음이 주둔지 상공을 가르고 있었다.
駐屯地. K-6, 캠파운드. 내 추억의 군생활 편린들이 거기 있다. 낯선 긴장감과 내 자화상 같은 회랑의 기억들이 지금도 회전하고 있다.
- 이기, 60여년을 넘긴-어게인 이바구!.
-end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4.01.11 17:18
첫댓글
남자 분들의 인내력은 대단합니다.
상상도 못할 생활 속에서 어떻게 잘 견디며 살아 온 것인지?
생활인으로서 남성들의 역할도 가슴 저미도록 아픈데
그 이전에 군 생활의 자존감마저 버리고 살아야 했으니.......쯧.
여자가 아니,
아내가 할 역할은 토닥여 주고 빈 자리 메우는 역활 밖에.
다른 분은 모르겠고, 바람새 개인적으로 여자로 잘 태어났구나 위로하기도 한답니다.^^
밖앗 세상은 너무 험난해서요.ㅋㅋㅋ
60여 년을 넘긴 추억담 들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디서 이런 야그 듣겠습니까? 그쵸?
동문들의 이야기, 생각들은 대사카페에서만 들을 수 있어서 더욱 친근감이 가네요.
남은 시간들 건강하게 즐겁게 오직 나만을 위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본인이 그렇지 않다고 하시니 믿을 수밖에 없지만, 비억한 시기, 00군번으로 민간인은 출입도 못하는 최전방, 칼날같이 싸늘한 달빛과 매서운 바람속에서 '추위에 떨지말고 넘어 오라'는 이북 생방송을 들으며 포탄창고 보초를 서다 가끔 일요일날 단체 외출차 전곡역에서 본 카츄샤! 마치 낚시바늘에 뀐 곳감을 차다보며 침을 삼키던 여우 같이 부럽기 짝이 없이 바라보면서도 한켠으로는 얼매나 줄 좋고 돈 있으면 저렇게 되었을까 싶어 쌍욕이 저절로 나왔던 것만 기억합니다. 그래도 제대는 먼저 했을 겁니다.
전방에서 만난 계급이 높은 고향 후배! 나도 그런 경험이 있는데 .... 어찌나 반갑고 좋고 미안하고 고마운지 당해 본 넘은 이해합니다. ㅎㅎㅎ. 건강하소. 부산넘
김능자 님!
당대의 기억공간이 레트로 로서 가치를 지니는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 병영문화의 대비로 - 한 인간사의 예정설에 기대는 망토로 구성된것이 아닌가 싶어요.
정서공유에 감사합니다.
늑점이 님!
저는 교보혜택을 못받은 케이스로 "와라바시군번"정규 복무였죠. 어느 순간들에는 차라리 전방 사단 복무에 동경을 가지기도했습니다.
그건, 그 안에서도 GI들의 눈을 피해 시병들의 춋대뼈를 까고, 아구통을 날리는 이탈된 군사문화 잔재가 끼어들어 미치게 만드는것이었죠!
하여간에 임팩트 짜릿한 軍 시절 이바구 빼면 꼰대들도-재미가 없죠. 참~ 누구에게나 대하소설이 되는거죠? 그만큼 늙어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