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회 현대수필문학상
글로 엮은 책 한 권이 아무리 뛰어난들
-이미경 수필집 <구피의 몸 털기>
이상열
흰 종이가 하늘이라면, 글자는 그 위에 떠서 돌아다니는 구름이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비구름, 솜구름, 깃털처럼 흩어졌다 하여 권운, 줄지어 있는 양떼구름, 팝콘처럼 생긴 뭉게구름, 다 구름이다. 좋은 구름, 나쁜 구름 따로 없다. 그냥 다른 구름이다. 같은 모양은 없다. 언어가 그렇다. 자기 모양이 있듯이 자기 목소리가 있다. 대기권 밖에서 자기 목소리가 만들어진다. 나지막한 소리, 졸린 목소리, 거칠고 우렁찬 소리, 권위적 목소리, 야한 소리, 웃기는 소리, 미친 소리, 아찔할 정도로 자극적인, 아슬아슬한 소리, 못~된 소리,그리고 착한 소리들.. 이렇게 백지 위에서 흐르다가 한 편의 글. 한 권의 책이 된다. 둘도 없는 자기 소리를 내는 한 사람을 만난다. 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왔든 그의 삶은 대체 불가능하다. 삶이 고유하기에 작품도 고유하다. 작가 이미경이 그렇다. 작품에서 키워드는 셋이다. 시집과 언어와 시선이다.
먼저, 시점에 관해 살펴보자. 수필의 시점은 일인칭이다. 화자는 수필 작품 안에서 '나'다. 독서 행위가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화자와 독자 사이에 거리가 발생한다. 인물과 독자 사이의 친밀감의 정도를 '서술적 거리'라고 하자. 일인칭 화자의 말을 시종 듣고 있어야 하는 독자는 느끼는 게 있다. 단조로움이다. 전 작품이 일인칭이라는 장르적 단조로움을 어떻게 극복할까. 이미경의 <구피의 몸 털기>는 한 시점 안에서 화자의 위치 변화를 통해 인물과 독자의 거리를 전략적으로 조절했다. 우선, 화자의 위치가 주인공의 자리인지, 관찰자의 자리인지가 중요하다. 작가가 주인공 일수록 독자는 친밀감은 얻되, 정보는 잃는다. 반대로 작가의 위치가 관찰자일 때 독자와의 간격은 멀어진다. 동시에 등장인물과 대상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는다. 이 책에서는 시점의 전략을 눈여겨볼 만하다. 즉, 주인공 시점과 관찰자 시점이 절묘하게 혼용을 이루고 있다.
보자.
쌍꺼풀이 있는 선한 눈매에 맵시도 고왔던 할머니의 큰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여름이면 손수 만든 하얀 모시 저고리에 풀을 먹인 후 반듯하게 다려 입었다.
-<은비녀>에서
일단, 서술적 거리는 멀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인물을 관찰한다.
멀기 때문에 할머니의 전체적인 정보를 얻는데 용이하다. 그럼, 좀 더 가까이 다가가 보자.
과연 나에게 바꾸고 싶은 것은 머릿결뿐이었을까. 키도 좀 더 컸으면 좋겠고, 쌍꺼풀이 있는 큰 눈이었으면 했고..
-<노랑머리>에서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다. 따라서 확실히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갈수 있다.
인물의 목소리와 감정이 스며 있다. 독자는 정보를 희생하는 대신 화자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친밀해졌다는 의미다.
돌아오는 길, 버스 정거장까지 100미터 남짓한 거리를 걸었다. 남편은 내 손을 잡고 박인희 노래 "그리운 사람끼리 두 손을 잡고"를 불렀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빨리 뛰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서 잠들 때까지 그랬다. 잠을 설쳤다.
- < 다시 잡은 손>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의식의 흐름을 느낀다. 사고와 감정이 진행되는 과정을 보게 되는 대목이다. 이 순간 독자는 화자에게 생성된 정서적 일치를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한 시점 안에서 화자의 위치를 변화시킴으로 서사의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화자의 시선을 통해 사건을 간접 경험하게 함으로 몰입감을 높이거나. 때로는 관찰이나 관조를 통해 인물의 내면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다음은 작가의 언어다. 이미경의 언어는 참 참하다. 군더더기 없는 단정함, 휘청거리지 않는 안정감, 능청스러운 도치나 거북한 반복도 억지스러운 유려함도 없다. 그냥 반듯하고 착하다. 뭐가 문젠가. 수필 언어는 이래도 된다. 아니, 이래야 한다. 작가의 언어 속에는 추억의 기록을 넘어 무엇인가가 있음을 느낀다. 생기다. 읽는 내내 빛바랜 흑백 사진 같은 장면이 이렇게도 강한 잔상을 남길 수 있나 싶은 생각을 지을 수 없다. 실제의 힘, 진실의 장르에서 오는 감흥이다. 어찌 보면 실시간 현상 같고, 어찌 보면 생방(生放) 같다. 날 것의 생명력, 그 자체로도 충분히 특별하다.
그럴 때가 있지 않나. 하드코어적인 변형과 전환, 그리고 밑도 끝도 없는 허구와 상상력, 어찌 수필과는 그렇게 멀어 보일까. 예술을 가장한 문학 귀족주의에 지칠 때, 끝도 없는 말장난에 피로감을 느낄 때, 우리는 이런 '착함'에 마음이 무너진다. 사람이 착하면 어린아이라도 무섭다. 나는 안 착한데, 내 속은 시궁창인데, 내 앞에 맑고 투명한 사람이 서 있다 치자. 그를 통해 내가 보여 그가 무섭다.
착함은 무서움이다. 착함이 주는 순정의 서슬을 아는가. 무지막지한,끝장 보는 서사는 그 무엇보다 힘이 있다.
친구 순이와의 이별을 다룬 작품의 한 대목이다.
어느 날 직장으로 전화가 왔다. 순이 엄마였다. 순이가 보고 싶어 하니 병원으로 와달라고 했다. 병원이라는 단어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불길한 예감에 그곳으로 가는 다리가 떨렸다. 병실에는 고통스러워 하는 순이가 있었다. 나를 보며 겨우 입을 열어 작고 힘없는 소리로 "보고 싶었다."라고 하면서 손을 잡았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기웠다.
-<10월의 어느 날>에서
단문의 연속, 사건의 연속이다. 연속적인 사건 나열이 왜 단조로운가. 여기서 중요한 건 유창하거나 날렵한 언어적 기법이 아니라 진실을 담은 내용이다. 내용 자체로 독자의 정서는 이미 요동친다. 여기서 언어를 전환하고자 하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진실성에 흠집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 작품은 실패다. 정상에 와서는 안개를 걷어야 한다. 그래야 봉우리가 보인다. 정점에 와서는 언어를 착하게, 담백하게 구사했다. 성공이다. 장르가 수필이라서 그렇다. 수필의 언어는 비 전환적이다. 대상을 언어로 표현할 때 전환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따라서 전환적 언어 (시적 변형, 소설의 허구)에 대한 배반이 수필의 정체다.
이것은 문학을 추구하는 수필 언어의 멍에요,한계다. 그러나 한계의 다른 측면이 있다. 한계를 고수하다가 자기 안에서 스스로 정체성을 곧추 서운다. 수필 바깥 장르에서 유혹한다. 논픽션은 또 다른 픽션인가. 진실한 고백은 새로운 창작물 인가.어쩌면 그 이상일 수 있다. 그 어떤 허구물과 창작 기법도 견고한 진실을 흔들 수 없다.
다음은 작가의 시선이다. 사소한 것들에 대한 시선이 깊다. 작가 이미경이 사소한 것에 천착하는 까닭은 뭔가. 크고 화려한 것에 대한 콤플렉스인가, 맹목적 거부감 때문일까. 작가의 자서(自序) 라 할 만한 글 <구피의 몸 털기 >의 한 장면이 이 물음에 답을 준다.
"구사일생한 녀석은 갑자기 몸을 털기 시작했다. 유리잔이 흔들릴 정도였다. '죽어가는 몸부림인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다니. 실수한 나에게 주는 벌이구나' 중얼거리며 유리잔을 손으로 감싸주었다." 민물고기 한 마리의 죽어가는 몸부림에 '실수한 나에게 주는 벌'로 여기는 작은 것에 대한 마음은 결코 작지 않다. 사소한 것을 사소하게 여기지 않기, 문학이 이런 정신 아닌가. 대단한 것이 여기 있노라고 설레발치지 않기다. 시선을 작고 디테일한 곳에 두면 세계는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되레 커진다.
그의 사소한 것에 대한 사유는 <환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한 대목을 보자. "먹잇감을 물고 온 제비 부부는 그들 입에 골고루 먹이를 줬다. 행여 못 먹는 녀석이 있을까 봐 바라보는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했지만." 이건 우리나라 시골 처마 밑에 있는 장면이다. 어디 가슴이 조마조마할 일인가. 작은 사물이지만 부여된 시선은 크다. 크고 작음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다. 평범한 것을 특별하게, 사소한 것은 중요하게 보는 작가의 시선이 특별한 것이다. 중심부에서 비껴간 한 사람에 대한 글이 있다.
작품 <열다섯살 소년>의 한 문장이다. "열다섯 살 소년이 우리 집 머슴살이를 한단다." 슬쩍 억장 무너지는 문장이다. 시대가 어땠기에,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소년은 이런 설움 짙은 생을 마주했을까.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많았던 소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세월 지나 작가는 기억의 잔해 속에서 건져 올려 다시 보듬는다.
소년 등에 실린 소꼴의 의미를 몰랐으니, 몸과 마음의 고단함도 헤아리지 못했다. 외양간에서 소에게 여물을 주는 그의 등이 쓸쓸해 보일때도 모른 체했다. 외로워서 홀로 눈물을 삼켰을 그의 처지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소년은 일 년 만에 어머니와 함께 우리 집을 떠났다.
-<열다섯 살 소년>에서
중심부가 아닌 소외되고 약한 자에 대한 시선이 특별하다. 그것이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포인트다. 작은 곳을 향한 시선이다. 너와 나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는 타자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경청하여 의미 있는 둘을 추구했다. 이것은 하나가 아닌 둘이 같이 존재하는 방식을 찾아내거나, 불가능할 경우 타자를 또 하나의 중심으로 세웠다는 의미다. 작고 소소한 타자의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서사 속에 당당한 중심이 되게 했다. 작가에겐 그런 DNA가 있다. 그런 시선을 지닌, 그런 인간다움의 DNA다.
그리고 사람이다. 시점, 언어, 시선 세 영역을 관통하는 존재가 있다. 사람이다. 이미경 의 글 반경은 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다. 그녀는 사람을 좋아한다. 스치는 사람, 떠난 사람, 함께 화투 친 사람, 은비녀를 꽂은 할머니, 열다섯 살 머슴, 먼저 떠난 순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사람 자체를 좋아한다. 그들안에서 웃고, 울고, 화투 치고, 여행 가고, 함께 손잡고 걷고, 함께 흔들리고,함께 살아내고 동행한다. 그녀에게 사사로운 사람은 없었다.
그녀가 만난 모든 사람은 특별했고,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 특별하다. 미(美)가 아니라 생(生)을 쓴 작가, 그러니 우리에게도 사람 냄새나는 이미경 그녀가 특별하다.
이미경은 타인에게 어떻게 불릴까. 노랑머리, 어린 타자, 손녀, 딸, 순이에게 미경, 손녀에겐 할머니, 수필가님, 화투 잘 치는 사람 회초리 맞던 아이, 우물로 들어간 아이, 썰매 타다 논도랑에 곤두박질쳐진 아이, 은퇴 후 햇살 비켜 가며 청계천 징검다리를 걷는 여자, 라인댄스 차차차 스텝 밟는 여자, 남편과 첫손 잡은 날 둥둥둥 가슴에서 북소리 듣던 사람, 그리고 노트북 앞에 앉아 삶을 쓰는 작가. 뭐라고 불러도 다 이미경이다. 작품과 작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이미경은 자신만의 내용을 가지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를 표현한다. 참한 글쓰기에다 식지 않는 삶의 열정으로 버무려놓으면 이미경 체가 된다. 결정적인 것은, 글로 엮어 탄생한 책 한 권이 아무리 뛰어난들, 발치 끝 외줄처럼 흔들리는 마음 스스로 붙잡
아가며 온몸으로 살아온 작가의 경이로운 분투에 비할 수 있겠는가.
이상열
문학평론가 2012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2015년 (에세이스트) 평론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