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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기원전 86년) 사기열전(史記列傳)
주나라의 역사가 집안인 사마 가문의 후손이며, 아버지인 사마담은 전한의 천문, 달력, 기록을 맡아 처리하는 부서의 장관인 태사령으로 천문과 달력에 밝고, 고전에도 통달하였다. 20세경 낭중(郎中)이 되어 무제를 수행하여 강남(江南)·산둥(山東)·허난(河南) 등의 지방을 여행하였다.
태사령
사마천이 36살 때인 기원전 110년, 사마담은 태산에서 거행된 무제의 봉선 의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한 것을 분하게 여기다가 병이 나서 죽었는데, 죽을 때 아들 사마천에게 생전부터 편찬하던 역사서의 편찬을 완료해 줄 것을 부탁한다. 기원전 108년, 사마담이 세상을 떠나자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태사령이 되었다.
태초력
사마천의 나이 42살쯤 역법을 개정하여 태초력을 기원전 104년 무제 (태초 원년)에 완성하였다. 그 후 부친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릉 사건
기원전 99년 무제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던 장군 이릉이 패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보고받은 무제는 진노하여, 이릉의 처분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중신 회의 열었다. 신하 모두 이릉을 비난하고는 이릉의 가족 모두 능지 처참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사마천은 이릉의 충절과 용맹을 찬양하고 두둔했기에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사마천은 태사령의 직책에서 파면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사마천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사형을 면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 즉,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을 받는 것 둘뿐이었다. 이 벌금의 액수라는 것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서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직책으로 받는 녹봉으로 이 벌금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궁형을 받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였으나, 사마천은 《사기》의 완성을 위해 궁형을 받아들였다(궁형으로 인하여 고환이 제거되어 그의 초상화에는 수염이 없다). 궁형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마천은 아버지의 대부터 편찬중이었던 역사서 《사기》의 편찬을 완료하였다.
중서령
그 후 무제의 신임을 회복하여 환관 최고의 관직인 중서령(中書令)에 임명되었다.
업적
그가 중국 최초의 임금인 황제(黃帝)에서 무제에 이르는 역사를 인물별로 나누어 쓴 〈사기〉 130권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획기적인 역사책이다. 이런 형식을 기전체라고 하는데, 연대순으로 써가는 편년체와 함께 역사 기록 방법의 하나이다.
먼저 소개한 플루타크 영웅전은 그리스에서 기원후 100 년경에 살았던 플루타크가 기원전 800 년경부터 기원후 50 년경까지 살았던 그리스와 로마의 뛰어난 인물들에 대한 일대기를 적은 책이다. 이 사기 열전은 기원전 100 년경에 중국 한나라에 살았던 사마천이 기원전 1000 년 경에서 기원전 100 년경까지의 중국에서 활약한 여러 사람들의 삶에 대해 분석한 글이다. 사마천의 일가(一家)는 오래 전부터(거의 천 년 간) 중국의 역사를 기술하는 직위에 있었으며, 사마천 역시 한(漢)나라 역사를 편찬하는 최고 책임자로 있었으므로 역사의 서술에 대하여는 플루타크보다 전문가라고 보아야 한다.
사기는 130 편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열전이 70 편이다. 열전은 분량으로는 사기 전체의 반 이상이며, 내용에 있어서도 사기의 다른 부분(본기(本紀), 세가(世家))보다 상당히 좋다고 평가된다. 한 편에 한 인물만 논한 것이 아니므로 사기 열전에 나오는 인물은 적어도 200 명이 넘는다. 그 각각의 인물이 자기의 최선을 다하며 난세(亂世)를 사는 모습이, 한문학(漢文學)의 신(神)이라고까지 불리는 사마천의 필치로 예리하게 묘사되어 있다. (참고로 한문학을 하는 어느 교수님의 표현으로는 우리나라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한문의 천재(天才)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
소설 삼국지(이 사기가 저술되고 300 년이 지난 시대)에서도 나라가 혼란스러울 때 수습 방법을 찾기 위해 조용히 앉아 사기 열전을 읽는 모습이 나온다.조선조 중엽에도 마음을 기르기 위해 사기 열전을 읽는 우리 선조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세종대왕께서 우리 선비들이 사서 삼경만 읽고 역사를 읽지 않는다고 걱정하신 내용이 있는데 그 역사책 중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던 것이 이 사기일 것이다.
[司馬遷 ?∼? (백과사전의 내용)
중국 전한시대(前漢時代) 역사학자. 자는 자장(子長)·태자공(太子公). 산시성〔陝西省〕 샤양〔夏陽〕 출생. 출생 연대는 BC 145년 또는 BC135년이라는 두 설이 있고, 사망 연대는 미상이다. 어렸을 때부터 고문(古文)으로 쓰여진 전적(典籍)을 배웠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적을 탐방하여 견문을 넓혔다.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은 무제(武帝)가 거행한 태산(泰山)에서의 봉선의식(封禪儀式)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해 괴롭게 여기다가 분사하였는데, 죽기 전에 고대로부터 당시까지의 역사를 저작할 것을 사마천에게 부탁하였다. BC 108년 아버지에 이어 태사령에 임명된 사마천은 먼저 역법개정에 종사하여 BC 104년 태초력(太初曆)을 완성하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통사(通史) 편찬에 착수하였다.
BC 99년 한(漢)나라 장군 이릉(李陵)이 흉노와 싸우다가 패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생겼다. 이릉의 처분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일가 멸족의 의견이 대다수를 차지했으나 사마천 혼자만 이릉의 충절과 용감함을 칭찬하고 변호했으므로 무제의 격분을 사서 궁형(宮刑)에 처해졌다. 몇 년 후 출옥하여 중서령(中書令) 직책으로 복귀하였다. 그 뒤 정신적 타격에도 꺾이지 않고 용기를 내어 통사 저작에 전력을 기울여 마침내 《사기(史記)》 130권을 완성하였다. 그
가 《사기》를 저술한 직접적인 동기는 아버지의 유언에 의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분사(憤死)와 이릉사건을 통해 인간의 운명에 대한 큰 의문을 품게 된 사마천은, 사실의 정확한 검토를 통하여 인간의 종합적 가치를 결정하고 인과관계의 불합리성을 하늘(天) 대신 수정하는 일에서 역사학이 지니는 특별한 의미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시대는 다음과 같이 아주 독특한 기간이다.
중국의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여러 나라가 서로 지혜를 다 해 힘을 겨루는 과정에 참가한 모든 사람의 전기가 있으며, 사상적으로는 제자백가(諸子百家)로 통칭되는 모든 철학자들이 다 들어 있으며,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진(秦)나라로 통일되는 데 기여한 사람들의 일대기가 모두 있으며, 통일된 막강한 진(秦)나라에 반란을 일으켜 다시 여러 나라로 갈라지게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으며,이것을 다시 통합하는 과정에서 한(漢)과 초(楚)로 나뉘어 긴 전쟁을 하는 동안 양(兩)편에서 자기의 능력을 다 한 장수와 문관들의 능력이 적혀 있으며,한(漢)나라로 통일된 후 통일에 기여한 사람들의 후일담(後日譚)이 있다.
또한 통합된 한(漢)나라를 체제를 갖추고, 막강한 무력을 가진 북쪽의 흉노를 우리 동양에서 유럽으로 쫓아낸 사람들의 전기(傳記)가 있다.
이 책은 플루타크의 영웅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을 취급하고 있으므로 전체적으로 속독을 하며 이해하기는 어렵다. 우리 조상님들은 일상의 대화에서 이 책의 인물들을 예로 들어가며 여러 가지 말씀을 하셨다. 우리도 백이숙제의 이야기, 관중과 포숙의 우정(관포지교), 말잘하는 소진과 장의, 맹상군, 염파와 인상여(교문경지교(刎頸之交; 목자를 문, 목 경)), 한신 장군이 다른 사람의 가랑이 사이로 지나간 것 등의 이야기는 초등학교 때 들어본 것 들이다. 이 모든 이야기의 원전(原典)이사기열전이다.
앞으로 소개할 논어, 맹자, 서거정의 필원잡기, 이율곡의 석담일기 등 책에서는 사기열전의 여러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앞으로는 우리나라의 여러 좋은 책도 소개하려 한다. 그러나 서양 여러 나라에서도 기원전 1000 년경부터 기원후 100 년경까지의 그리스와 로마의 책들이 현재까지도 많이 인용되며, 보통의 대화에서도 자주 언급된다. 성경의 신, 구약의 대부분이 이 시기에 이루어졌으며, 호머의 일리어드와 오디세이, 플라톤의 대화편,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책들, 그 외의 그리스의 철학책들이 이에 속한다.
이 책들은 현재의 영국, 프랑스, 독일과는 하등의 연관성이 없다. 그러나 이들 나라의 가장 중요한 책 목록에서 위의 책들이 빠지지 않는다.
중국의 책들이 우리나라의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도외시될 수 없다. 세계 어느 나라 책이라도 정신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알아야만 한다.
여러 권으로 되어 있을 때의 분량은 그 중 한 권의 쪽 수를 표시한 것이다.
사기 열전(列傳)만으로도 작은 분량이 아닌 데, 위와 같이 여러 출판사에서 계속 새로운 번역으로 출판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잘 팔리기 때문일 것이다. 여러분이 만약 이 책을 사고 싶으면 직접 대형 서점에 가서 번역이 마음에 들고 잘 읽히는 책을 고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앞에서 소개한 책들도 마찬가지이나 이 책은 특히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번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제본이 튼튼한가, 오래 갈 수 있는 장정인가도 살펴서 책을 선택해야 한다. 내가 처음 산 사기열전은 이미 헤어지고 손만 대면 찢어져서 새로 마련하였다.
참고 1; 사기열전에 나오는 사람의 이름은 다음과 같이 여러가지다.
성과 이름이 있으며, 그 사람의 자(字)가 있다. 그 후 별호(別號)가 있다. 만일 살아서 어느 지방의 영주(領主)가 되었으면 그 지방의 이름을 딴 다른 칭호가 있다.
예를 들면 상앙의 경우는 성은 공손씨이고 이름은 앙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개념으로 부르는 이름은 '공손앙'이 되어야 한다. (공손이라는 성도 지방 왕의 자손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이 사람을 상앙으로 부르는 이유는 그가 '상(商)'이라는 땅의 영주(領主)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기열전에서는 상앙을 그 사람이 처한 위치에 따라서 여러 이름으로 부른다. 즉 위의 여러 명칭을 이 사람이 살아가는 나이에 따라서 계속 변경하며 서술한다. 이것이 가장 정확한 방법일 것이나 혼동한 우려가 많고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여기서는 가장 보편적이 이름 하나를 택하여 그대로 부르기로 한다.
우리나라 세종대왕의 경우도 이름은 '도'라고 하셨으며,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충녕대군이라 불리셨으며,왕위에 계실 때는 임금님이라 불리셨다. 돌아가신 후 조선 시대의 우리 선조님들이 이 분에 대한 글을 쓸 때는 "영묘(英廟)께서는 ..."이라고 적었다. 세종대왕의 능은 현재도 영릉(英陵)이라고 불린다.
참고 2; 춘추 전국시대에는 진이라는 나라가 여럿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나오는 진나라는 거의 모두 이 시대를 통일한 진(秦)나라를 말한다.
거의 같은 시대에 시대에 진(晉; 춘추시대에는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였다. 이 나라가 한, 위, 조의 세 나라고 나뉘는 것이 확정된 때가 전국시대의 시작이라는 것은 여러분이 외고 있을 것이다.), 진(陳; 약한 나라이나 역사적으로는 중요하다.)이 있었다. 시대는 다르나 삼국지의 사마중달의 아들이 세운 진(晋)나라도 있다.
앞으로 나올 중요한 사람의 생존 연대를 정리해 보았다. 읽으면서 참고하기 바랍니다.
문왕기원전 1100 년 경
백이, 숙제 기원전 1100 년 경
서주시대(西周時代, BC 11세기∼BC 771)
무왕 기원전 1100 년 경
강태공기원전 1100 년 경
주공 기원전 1100 년 경
[서양에서는 일리어드, 오디세이의 시기와 비슷합니다. 또한 조금 후이기는 하나 성경책 구약의 다윗과 솔로몬이 이 시기에 해당합니다.]
공화원년 기원전 841; 동양 역사의 정확한 편년의 시작
그리스 1 회 올림픽기원전 778; 서양 역사의 정확한 편년의 시작
동주시대(東周時代, BC771∼BC249)
관중(管仲)?∼BC 645
포숙
桓公 ? ~BC 643(BC 685~BC 643). 춘추 5패(五覇)의 한 사람이다.
합려闔閭 BC515∼BC496
노자 공자와 거의 동시대이나 나이는 많았으리라 추정
공자BC 552∼BC 479
상앙?∼BC 338
소진 [蘇秦 ?∼BC317]
장의 [張儀 ?∼BC 309]
맹자기원전 4 세기 전반
장자 [莊子 BC365?∼BC290?]
맹상군 [孟嘗君 ?~BC 279?]
평원군 [平原君 ?~BC 251]
한비 [韓非 BC280?∼BC233]
진시황 [始皇帝 BC 259~BC 210]
유방 [한 고조(高祖) BC247?∼BC195]
항우[項羽 BC232∼202]
제 1 백이(伯夷) 열전 p 9
백이(伯夷), 숙제(叔齊)는 고죽군의 두 아들이다[기원전 1100 년 경]. [이들의 아버지인] 고죽군은 [둘 중] 아우인 숙제를 후계자로 세우려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매 숙제가 형인 백이에게 왕위를 양보하였다. 그러나 장자인 백이가
"아버지의 명령이니 어길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도피하였다. 숙제도 또한 임금이 되기를 좋아하지 않고 도피하였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가운데 아들을 임금으로 세웠다. 이에 백이, 숙제는
"들으니 서백 창[주나라의 문왕]은 늙은이를 잘 부양한다고 한다. 우리 어찌 그에게 가지 않겠는가?"
하고 서백에게로 갔다. 가보니 서백은 돌아가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이 아버지의 신주를 수레에 싣고 문왕(文王)이라는 존호를 올리고서 동쪽으로 은나라의 주(紂)왕을 치려 하고 있었다. 백이와 숙제는 말고삐를 붙잡고 간하였다.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장사도 지내지 않고 이에 전쟁을 일으키려 하니 효도라고 할 수 있는가. 신하인 제후로서 임금인 천자를 시해(弑害)하려고 하니 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는가."
무왕의 좌우에 있던 군사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태공망 여상[임주(任註); 강태공]이
"이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이다."
하고 보내게 하였다.
무왕이 은나라의 어지러움을 평정하매 온 천하가 주나라를 종주국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백이, 숙제는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의를 지켜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고 지냈다. 굶어서 죽게 되었을 때에 노래를 지었으니 그 가사는 이러하다.
저 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캐네.
무왕은 포악한 방법으로 주왕의 포악함에 교대하였건만
그 잘못을 알지 못하네.
신농, 요순, 하우의 도가 홀연히 사라졌으니
내 어디로 가서 몸을 의탁할 것인가.
[임성삼의 주(註); 공자의 논어(論語)에서는 중국의 가장 완벽한 왕으로 무왕의 아버지 문왕을 들고 있으며, 무왕도 거의 완벽한 왕으로 평가한다. 동일한 책에서 백이와 숙제도 완벽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서로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던 양쪽을 모두 다 옳은 사람들로 평가하였다는 것은 그 시대의 성숙하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말해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즉 무왕, 백이, 숙제가 다 옳은 것이다.]
[주 周 백과사전에서
고대 중국의 왕조. 주(周)는 서주시대(西周時代, BC 11세기∼BC 771)와 동주시대(東周時代, BC771∼BC249)로 나누어지며, 동주시대는 대략 춘추전국시대에 해당된다.
전설에 따르면 주나라의 시조는 요(堯)임금을 섬겼던 후직(后稷)이라고 한다. 그 뒤 주족(周族)은 융적(戎狄) 사이에 섞여 살았고 공류(公劉) 때에는 빈(山西 또는 陝西省)에서 살았으며 고공단보(古公亶父;太王)에 이르러서 산시성〔陜西省〕의 지산〔岐山〕 땅(周原)에 도읍을 옮겼다. 이때부터 다음 왕인 계력(季歷;王季) 때에 걸쳐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정벌하고 발전하여 문왕(文王) 때에는 서백(西伯)이라 칭하여 새 도읍을 풍(豊;陝西省西安)에 세우고 은왕조(殷王朝)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다음의 무왕(武王)은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여 여상(呂尙, 강태공) 등 제후를 거느리고 주왕을 쳐서 나라를 멸망시키고 호경(鎬京;陝西省西安)을 도읍으로 정해 주(周)왕조를 세웠다.]
p 10
어떤 이는 말한다. [주; 아래는 저자 사마천의 말이다.]
"하늘의 도는 친(親)하고 소원함이 없어, 항상 선인(善人)의 편에 있다"고.
백이와 숙제같은 이는 선인(善人)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어짊을 쌓고 행동을 깨끗하게 함이 이와 같았건만 그러고도 그들이 굶어죽다니!
또 공자는 70 명의 제자 가운데서 "안연(안회)은 학문을 좋아한다."고 칭찬하였다. 그러나 안회는 자주 끼니를 굶었으며 술 지게미나 겨밥 같은 악식(惡食)도 실컷 먹지 못하였다. 그리고 일찍 죽었다.
하늘이 선인(善人)에게 보답해 베풀어줌이 그 어찌 그러한가?
도척(주; 그 시대의 유명한 강도)은 날마다 죄없는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생간을 회쳐 먹었다. 포악하고 패려하고 방자하여, 수천 명의 도당을 모아가지고 천하를 제멋대로 돌아다녔으나, 마침내 장수하여 목숨대로 살다가 죽었다. 이런 것은 그러한 사례 중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고 명백한 것일 뿐이다. 근세의 사례를 살펴본다면 행동이 절제가 없어서 오로지 남이 꺼리고 싫어하는 악행(惡行)만을 일삼는데도 일평생을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며 부귀(富貴)가 여러 대를 두고 끊어지지 않는 자가 있다.
(그런가 하면) 혹 땅을 가려서 디디고 적합한 때를 기다려서 말을 하며, 큰길이 아니면 다니지 않고 공정한 일이 아니면 분발하지 않는데도 화난(禍難)과 재앙을 만나는 사람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이런 사실에 대해서 미혹(迷惑)하고 있다.
소위 천도(天道)라는 것은 정말로 이런 것인지, 아닌지를.
[임성삼의 주(註); 천도 시야 비야(天道是也非也)라는 말의 원전이 이곳이다.]
제 2관중, 안영 열전
관중(管仲; ?∼BC 645, [참고로 공자는 BC 552∼BC 479]) 이오(夷吾)는 영상 지방 사람이다. 젊었을 때에 항상 포숙아(鮑叔牙)와 사귀었으며, 포숙은 그가 재주와 지혜가 있는 사람임을 알았다.
관중이 빈곤하여 항상 포숙을 속였으나, 포숙은 끝까지 잘 대우하고 그가 속이는 일을 가지고 말하지 않았다.
얼마 뒤에 포숙은 제(齊; 중국의 우리나라 인천에서 가장 가까운 산동반도)나라의 공자 소백(小白)을 섬기고 관중은 공자 규(糾; 꼬을 규, 걷어 들이다)를 섬겼다. 소백이 임금이 되어 환공(桓公? ~BC 643)이 되고 공자 규는 죽었으며, 관중은 체포되어 갇힌 몸이 되었다. 포숙이 관중을 환공에게 추천하였다. 관중이 등용되어 제나라의 정치를 맡았다. 환공이 패자(覇者)가 되어 제후들을 규합시키고 천하를 바로 잡은 것은 다 관중의 계책에 따른 것이다.
관중이 말하였다.
"내가 처음에 곤궁하였을 때에 포숙과 함께 장사를 한 일이 있다. 이익을 나눌 때 나는 내 자신에게 많이 배당하였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탐욕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일을 도모한 적이 있었는데, 다시 곤궁하게 되었다. 그러나 포숙은 내가 어리석어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운(時運)이란 유리한 때도 있고 불리한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세 번 벼슬을 하여 세 번 임금에게 쫓겨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불초(不肖)하여 쫓겨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때를 못 만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싸움에서 세 번 싸우다 세 번 달아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 노모(老母)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싸움에서 패하니 같은 편 소홀은 거기에서 죽었으나 나는 붙잡혀 옥에 갇혀 치욕을 달게 받았다. 그러나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이 없는 사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소절(小節)을 굽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공명이 천하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성삼의 주(註); 관중은 참으로 많은 일을 겪고 나서 출세하였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이고 나를 알아주는 이는 포숙이다."
포숙은 이미 관중을 환공에게 추천하고 자신을 그 아래 지위에 있었다. ... 천하의 사람들은 관중이 재주와 지혜 있음을 칭찬하기 보다는 포숙이 능히 사람을 알아보는 것을 칭찬하였다.
관중은 정사를 맡아 제나라의 정승이 되자 보잘것없는 작은 제나라가 바닷가에 있음을 살리어 물화를 유통시키고 재물을 축적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대를 강하게 만들었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을 세상 풍속과 같게 하였다.
[임성삼 주(註); 중국에서 가장 뛰어난 국무총리로 손꼽는 사람이 관중이다. 그가 나라를 위해 한 일이 바로 위의 것이다.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하면 총리의 임무가 거의 충족되는 것이다. 덧붙이면 국민들과 같이 즐기면 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저서 〈관자〉에서 말하였다.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알게되고, 의식(衣食)이 넉넉해야 명예와 치욕을 알게된다.
위에서 법도(法度)를 지켜야 육친(부, 모, 형, 제, 처, 자)도 친애 단결하게 되고,
사유(四維(밧줄 유); 예, 의, 염, 치)가 신장되지 않으면 나라는 드디어 멸망한다."
물이 근원에서 나와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민심에 순응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므로 그 이론은 평범하고 가까웠으며 실행하기는 쉬웠다.
백성들의 풍속이 하고자 하는 것은 그대로 하게 해주었고, 백성들의 풍속이 좋아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제거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능력있는 사람이 시행하는 정치란 따르기에 어렵지 않은 것인가?]
그의 정치하는 방법은 화를 복으로 만들고, 실패를 성공으로 전환시켰다.
...
환공이 북방의 산융(山戎)을 정벌하게 되었을 때에 관중은 그 기회를 이용하여 [북방의] 연나라에 압력을 가하여 그 나라의 시조인 소공의 어진 정치를 다시 시행하게 하였다.
환공이 (노나라 장수) 조말에게 (단도로 위협 당하여 제나라가 노나라에서 빼앗은 땅을 돌려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관중이 (환공에게 진언하여 땅을 돌려주어 모든 나라에) 믿음성을 보이게 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제후들의 마음이 제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주는 것이 곧 취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 정치의 요결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관중은 부유하기가 공실(왕)에 비길 만하였으나 제나라 사람들이 그를 사치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관중이 죽은 뒤에도 제나라는 그의 정치 방법을 따라 지켜서 항상 제후 중에서 강성하였다.
[임성삼의 주(註); 논어(論語)에도 관중의 이야기가 세 번 나온다.]
그 뒤 백여 년이 지나서 안자(晏子, 안평중 영; [임성삼 주(註); 공자와 같은 시대, 두 나라 임금이 서로 만났을 때 제나라의 대표는 안자였고, 노나라의 대표는 공자였다.])가 나타났다.
제나라의 영공, 장공, 경공을 섬겼는데 절약하고 검소하며 힘써 실행하는 것으로 제나라에 중용(重用)되었다. 그가 이미 제나라의 정승이 된 뒤에도 반찬으로 두 가지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집안 여자들은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그가 조정에 있을 때에 임금이 그와 말하게 되면 그의 말은 정당하고 정직하였으며, 임금이 그와 말하지 않을 때에는 그의 행동은 고결하고 올발랐다.
나라에 바른 도가 있을 때는 곧 명령에 순종하고, 나라에 바른 도가 없을 때엔 곧 명령이 바른 것인가 그른 것인가를 저울질하여 바른 것이면 좇고 바르지 않은 것이면 좇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3 대 동안 제후 사이에서 이름을 날렸다.
[임성삼 주(註); 젊었을 때는 이것이 쉬운 것 같으나, 실제로는 매우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특히 공무를 담당했을 때 이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특히 어려운 것 같다.]
월석보(越石父 [임성삼 주(註); 여기의 '아비 부 父' 자는 사람의 이름에서는 보로 읽는다])는 현명한 사람인데 체포되어 묶이어 있었다. 안자가 길을 가다 만나게 되었다. 안자는 자기 수레의 완쪽 말을 풀어주고 그를 속죄시켰다. 그리고 그를 자신의 수레에 태워서 돌아왔다. 그러나 집에 도착한 안자는 월석보에게 인사 한 마디 하지 않고 자기의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에 월석보가 절교할 것을 요구하였다. 안자는 깜짝 놀라 의관을 정제하고 사과하며 말하기를,
"제가 비록 어질지 못하나 그대를 어려움에서 구출하였는데 어찌 그대는 절교를 요구하는가?"
하자 석보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들으니 군자는 자기를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굽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뜻을 편다고 합니다. 내가 묶이어 있을 때에는 저 포졸들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느껴 깨달은 바가 있어서 나를 속죄하여 주었으니, 이것은 나를 아는 것입니다. 나를 알면서 무례하게 대한다면 진실로 묶이어 있을 때보다도 못한 것입니다."
안자가 그를 맞아들여 상객(上客)으로 삼았다고 한다.
안자가 제나라의 정승이 되어 외출하는데, 그의 마부의 아내가 문틈으로 그의 남편을 엿보았다. 자기의 남편은 정승의 말을 모는 사람이 되어 네 필 말에 채찍질을 하면서 의기양양하여, 매우 스스로 만족해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그의 아내는 이혼하기를 청하였다. 남편이 그 까닭을 묻자 아내는 이렇게 말하였다.
"안자는 키가 6 척도 못되지만 몸이 제나라의 정승이 되고 이름이 제후 사이에 드날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의 외출하는 모습을 보니 뜻과 생각이 깊으며 항상 스스로 몸을 낮추고 있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키는 8 척이나 되나 남의 경마잡이 하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마음은 스스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떠나가고자 하는 겁니다."
[임주(任註); 척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시대에 따라 다르다. 이 때는 주나라의 척으로 약 20 cm이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영조척을 사용하고 있어 30.3 cm이다. 주척은 이 영조척으로 6 촌 6 푼이다(3.03 cm x 6.6 = 19.998 cm). 그러므로 안자의 키는 120 cm 였다.
공자님의 키가 9 척 6 푼이라고 하였으니 192 cm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장인(長人)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그 뒤부터 그녀의 남편은 스스로 억제하여 겸손하게 되었다. 안자가 이상하게 여겨 그 사유를 물으니 사실대로 아뢰었다. 안자는 그를 추천하여 대부(大夫)로 삼았다.
태사공은 말한다.
내가 관씨의 저서 〈관자〉에서 목민, 산고, 승마, 경중, 구부 등의 각 편과 안자의 저서인 〈안자춘추〉를 읽었다. 그 말한 것이 자세하였다.
가령 안자가 지금 살아있다면 나(사마천)는 비록 그를 위하여 말채찍을 잡는 천한 일도 즐겨 할 정도로 그를 흠모한다.
[임성삼 주(註); 사마천이 이 정도로 존경하는 인물이 사기 전체에 걸쳐서 안자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도 이 두 책이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판되어 있다. 후에 안자춘추를 소개할 것이다.]
제 3노자(老子), 한비자 열전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와 이야기하였다. 노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 ..... 군자는 성덕(盛德)이 있으나 그 용모는 우매한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대의 교만한 기상과 욕심 많음과 얼굴과 태도를 꾸미는 일고 산만한 뜻을 버리라. 그런 것은 그대의 몸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내가 그대에게 할 말은 이것뿐이다."
공자는 돌아가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새가 잘 난다는 것을 안다. 물고기가 잘 헤엄친다는 것도 안다. 짐승이 잘 달린다는 것도 나는 잘 안다. 달아나는 자에게는 그믈을 칠 수 있고, 헤엄치는 것은 낚시질할 수 있으며, 나는 것에게는 주살을 쏘아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용에 대하여는 나는 그것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다. 그는 용과 같은 존재이다."
노자는 도와 덕을 닦아서, 그의 학문은 스스로 숨기고 이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힘쓰는 것이었다. 노자는 작위(作爲)함이 없이 저절로 교화(敎化)되게 하고 맑고 고요하게 있으면서 저절로 바르게 되게 하였다.
[임주(任註); 도덕경은 짧으니 언제 한 번 소개하려 한다. 아주 맑고 고요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주나라에 살더니 주나라의 덕이 쇠미하게 되는 것을 보고 드디어 떠나게 되었다. 함곡관에 이르자 관을 지키는 관리인 윤희가 말하였다.
"선생께서는 장차 숨으시려고 하시는데, 귀찮으시더라도 저를 위하여 글을 지어주십시오."
이에 도덕경 상하편 5천 언으로 도와 덕의 뜻을 말하고 가버렸는데, 그의 최후를 아는 사람이 없다.
장자[莊子 BC365?∼BC290?]의 이름은 주(周)이다.
그의 학문은 넓어서 엿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요점은 노자의 말에서 시작하여 노자의 말에 귀결(歸結)한다. 그러므로 그의 저서 10여만 언은 대체로 거의가 우화(寓話)이다.
당세의 노성(老成)한 학자라도 장자의 논리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지 못하였다.
그의 말은 넓고 심원한데다 제멋대로 자적(自適)하였으므로 왕공, 대인으로부터는 훌륭한 인재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임주(任註); 장자는 시원하고 통쾌한 책이다. 10만 자가 넘어 분량이 많기는 하나(이 사기 전체는 52만 6천 5백 자) 상당히 재미있다. 통상적인 개념을 뛰어 넘는 생각이 대단히 많다. 남과 말을 하여 이기기를 원하는 사람은 장자를 읽으면 효과를 볼 것이다. 그러나 장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논어를 좋아하는 사람과의 역사적인 대결에서 항상 패배하였다. 말싸움에서 이긴다는 것이 실제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예이다. 올해 상반기에는 소개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의 경우 주역을 읽어 이해하는 정도보다는 훨씬 손쉽게 장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중국에 역사와 우리나라 상고사에 대해 혜박한 지식으로 말씀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중국의 역사를 하, 은, 주, 춘추전국, 진, 한, 후한, 후진 등으로 변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앞으로 공부하려고 합니다. 다시 한 번 고견에 예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