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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목자 여호와(2)
시 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 설 교 >
쉴만한 물가
시 23:1-6 / 임영수 목사
여름이 되면 사람들이 먼저 계획하는 일이 휴가입니다. 유럽에서 여름 휴가철에는 민족 대이동을 방불케할 정도로 휴가 인파의 물결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년중 삶의 목표가 휴가를 위해 사는 것 처럼 휴가를 중요시 합니다.
저도 때때로 쉼이 필요할 때 휴식을 갖기 위해 하던 일을 멈추고 한적한 곳을 찾아 나서기도 합니다. 휴가철에 휴가를 계획할 때 경제문제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부딪히는 문제가 어디에 가서 쉴만한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쉴만한 곳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쉴만한 곳을 찾아 가보면 쓰레기, 각종 소음, 무질서, 오염된 환경으로 오히려 휴식이 되지 않을 때가 있군합니다.
그래서 저는 과거에는 휴가철이 아니더라도 쉼이 필요할 때에는 외국에 있는 조용한 기독교 공동체를 찾아가서 얼마동안 휴식의 시간을 갖곤 하였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순례의 여정에서 일하는 것 못지않게 적절한 쉼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쉼이 없는 삶에는 언제나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고, 쉼이 없는 삶에서는 그러한 생의 문제들을 긍정적으로 처리해 갈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시편23편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매우 애용하는 시입니다. 저는 이 시간에 이 시편에서 특별히 1∼3절에 설교의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본문 2절에 '쉴만한 물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쉴만한 물가''를 반복해서 반추해 볼수록 신선한 느낌이 가슴 깊이 스며듭니다.
이 시에서 시인은 하나님은 "그의 목자라" 했고, 목자이신 하나님이 그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그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고달픈 인생의 도상에서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자족은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 영적인 것입니다.
물질적 풍요는 정신과 영적 결핍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 자족은 물질적 궁핍으로 인한 결핍까지도 크게 문제시하지 않고 자족하며 살게끔 해줍니다. 그만큼 영적 자족의 능력은 강합니다.
우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쉴만한 물가'에서 채워지는 몇가지 중요한 것들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쉴만한 물가"에는 영적 충전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여정에서 영적 충전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베터리가 소모되면 더 이상 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 행로에서 쉼이 없을 때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모두 소진 됩니다. 에너지가 소진될 때 우리의 미래는 닫혀지게 되고, 삶의 의욕을 상실하게 됩니다. 현실에서 도전해오는 문제들을 해결해 갈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자꾸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어가게 됩니다.
다음으로 "쉴만한 물가"에서 우리는 좀더 높은 곳에서 생을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건물을 볼 때 밑에서 보는 것과, 옆에서 보는 것은 다릅니다. 그리고 앞에서 보는 것도 다릅니다. 우리가 높은 곳에 올라가서 볼 때 그 건물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생을 보는 관점도 어떤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 다릅니다. 쉼이 없을 때 생을 자꾸 부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우리의 사고가 편견과 독선, 아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생을 좀더 높은 곳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쉴만한 물가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을 좀더 통합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생의 본질적인 면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생을 보다 원만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다음 '쉴만한 물가'에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가는 우리의 삶의 태도를 바꾸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본의 아니게 타율, 즉 체면, 경쟁심, 두려움, 초조감에 의해서 빨리 흘러가는 시류의 물결을 타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생의 방향도 상실하게 되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병들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매우 피상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우리 시대에 생의 절대 진리처럼 강조되고 세뇌되고 있는 것은 약삭빠름, 성공을 위한 처세술, 비위맞춤, 시대의 조류에 잽싸게 적응해 가는 것, 빨리빨리 유행의 모델로 바꾸어가는 것 등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것이며, 다른 사람보다 앞서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유형의 사고와 삶의 태도가 쉴만한 물가에서는 매우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불란서 작가 피에르 쌍소(Pierre Sansot)의 책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읽어본 분이 계실 것입니다.
쌍소는 그 책에서 세상은 모든 일을 빠르게 척척 처리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들은 많은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쌍소는 현대는 느리게 살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느림"은 개인의 자유를 일컫는 가치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쌍소의 "느림"이 쉴만한 물가에서 우리가 회복해야할 삶의 태도라 생각됩니다. 쌍소가 말하는 '느리게 사는 지혜'는 모두 아홉가지입니다. 그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느리게 사는 지혜는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입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흘러가는 시류의 흐름에 편승해서 그냥 대중과 함께 뛰어가지 않고 때때로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자신의 생의 목적과 의미를 확인하고 자기의 페이스에 따라 생을 살아가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자기만의 시간은 거의 잃어버려가고 있습니다. 혼자있는 시간에도 인터넷, 매스미디어에 얽매어 그러한 것들에 예속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신뢰할만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참된 지혜는 신뢰할만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는데서 얻게 됩니다. 거기서 우리는 생의 얽혀진 타레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도 있습니다.
생의 문제로 고통하는 사람들이 누구에겐가 자신의 내면의 문제를 이야기 하고 싶어합니다. 그들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들어줄 수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눌 수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들은 너무 귀를 기울여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서로 자기 것만을 주장하며, 상대방을 매도하려고 합니다.
세 번째 "기다릴 것- 가장 넓고 큰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기다릴 것이 없는 생을 사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기다림은 아이때, 젊은이 때에만 있지 않습니다. 이 기다림은 우리가 어떤 태도로 인생을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언제나 말초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에 매달려 사는 사람에게 기다림은 없습니다. 언제나 시기심, 초조감, 경쟁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에게도 기다림은 없습니다. 기다림은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 가운데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와 관련이 됩니다.
넷째, "마음의 고향 - 존재의 퇴색한 부분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마음의 고향이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합니다. 마음의 고향이 없는 삶은 불행 합니다. 우리의 마음의 고향은 소박한 삶을 사랑하는데서 생깁니다. 소박한 삶을 사랑하는 사람, 허영에 들떠서 살아가지 않는 사람, 어디서나 신실한 관계를 맺고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마음의 고향이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건이나, 삶의 문제들을 기쁘게 긍정적으로 받아드릴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우리가 주고 받는 말, 우리의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소화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섭섭함, 분노, 소외, 아픔, 스트레스가 더욱더 가중됩니다. 이러한 삶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갈 수 있는 길은 '쉴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쉴만한 물가'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가 그러한 장소 입니까? 시인이 말하는 쉴만한 물가는 어떤 구체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이곳은 영적 의미를 지닌 무형의 장소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쉴만한 물가는 하나의 표상으로써 진리와 만남의 장소입니다.
ㅇ 먼저 쉴만한 물가는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좋은 믿음의 친구와 함께게 앉아 꾸밈, 허세, 경쟁에서 해방되어 마음 속에 있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는 만남에서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만나는 상대가 마음을 열고 서로 진실을 교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닐 때 쉼이 없습니다.
ㅇ 그 곳은 우리의 생의 얽힌 문제에 대해 해결의 길을 제시해주는 한권의 책과 마주하여 있을 때입니다. 마음의 양식이 되는 좋은 책은 우리에게 정신적인 휴식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0 하던 일을 다 중단하고 조용하고 한적한 자연 가운데로 들어가 자연과 함께 하는 곳입니다. 자연은 우리의 피곤을 씻어냅니다. 우리는 자연에서 새로운 삶의 영감을 얻게되고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ㅇ 그곳은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갖는 시간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경쟁, 중독, 분노, 염려에서 해방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갖는 것 이상 더 좋은 "쉴만한 물가"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교제에서 독수리가 날개치며 하늘을 오름과 같은 향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여정에는 '쉴만한 물가'가 필요합니다. 금번 여름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름 휴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은총의 기간이 여러분의 삶을 더욱더 생기있게 만드는 기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생을 다시한번 새롭게 긍정하고 시작할 수 있는 뜻있는 휴가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 나라와 가까워지게 합니다.
"휴일을 맞으며"
이 날을 기다려 왔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생각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
정겨운 사람들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는 것
그리하여 영혼을 맑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 휴식이 저를 보다 인간이 되도록 도와줍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들을,
삶과 사랑, 시간의 흐름
인간의 선함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법들이 있습니다.
당신은 기다리십니다
우리 자신이 고요해져서
당신의 선물 뒤에 있는 당신의 사랑을 알아채리기까지.
그리하여 삶의 여정에서 새로운 희망과 힘을 찾게 하십니다.
고요의 시간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하는 일보다
저 자신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만나는 사람들
제가 저의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은
저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저입니다.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란
보다 사랑을 주는
다 살아있는
보다 인간이 되는 것임을 저는 자주 잊습니다.
당신을 제 마음안으로
이 침묵의
편안히 쉴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새 생명, 새 희망, 새 힘을 제게 주십시오
매일의 치열한 경쟁의 일터에서 보지 못하던 것을
이 휴식의 시간에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저를 인간이, 보다 깊은 인간이 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값을 매길 수 없는 선물들
저의 가족, 저의 친구들, 제 삶안에 있는 모든 사람
사물의 아름다움. 소리, 빛, 그리고 풍경들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건강, 저의 육체, 저의 마음
일하고 움직이고 쉴 수 있는 자유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매순간 새롭게 받는 선물인 삶
이처럼 풍요롭고 다채롭게 어우러진
삶의 빛깔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이 순간의 고요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의 현존
결코 저를 버려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함께하심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기쁨에 넘치는 마음으로
당신의 선물들에 찬탄을 보냅니다.
삶을 노래하며
은총을 찬미합니다
매순간이 은총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땅의 여정에서 매순간을 소중히 하렵니다.
지금 이순간 당신의 눈을 들여다보며
저의 삶은 당신께서 점화하신 불꽂으로 타오릅니다.
참된 만족을 원하십니까?
시 23:1-6 / 박조준 목사
오늘 아침 읽은 시편 23편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아마 성경 중에 이 시편 23편만큼 많이 읽혀지는 성경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 시편 23편을 암송하시는 분도 많으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시편 23편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적극적이고 희망에 가득찬 믿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시편을 쓴 다윗은 베들레헴들에서 양을 치는 목자의 생활을 해본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양과 목자와의 관계를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아니가 많아서 그의 살아온 일생을 돌아보면서 이 시를 쓰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자신의 일생에 범죄와 패배로 얼룩진 오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나간 과거에 사로 잡혀 소용없는 후회를 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보면 다윗은 사도바울과 비슷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산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일 생각했습니다마는 바울은 "뒤엣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을고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다"고 했습니다. 새해를 마지 하여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다윗의 시 23편을 한 절씩 생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전에 미국의 어느 큰 회사에서 사장님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후임 사장님을 모셔야겠는데 이사회에서는 오랜 시간 숙의 끝에 아주 파격적인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보통인 경우 부사장이나 전무가 사장이 되는데 회사의 이사회에서는 수천 명의 사원의 근무 성적을 조회해서 가장 유능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통솔력이 탁월하고, 인간관계가 원만한 청년 사원을 일약 사장으로 옹립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으로 말하면 이보다 큼 출세가 어디 있으며 영광이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사장으로 취임하여 큰 회사의 사장 자리에 앉고 보니 밖에서 보던 그렇게 좋은 자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물건 많이 만들어야만 재고 없이 판매해야지요, 수천 명의 사원 중에는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많지요, 이런 저런 생각에 마음을 쓰다 보니 밤에 잠도 잘 오지 않고, 밥맛도 없어지고, 의욕이 줄어들고, 자신감이 살아져 결재를 하려하면 두려움이 앞서서 사인을 할 때 손이 떨리게 까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 사장은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별로 치료의 진전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는데 하루는 정신과 전문의 선생님이 "사장님, 제가 최선을 다해 치료해 드리고 있습니다마는 좋은 분 한 분을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그 분을 만나 뵈면 사장님에게 많은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렇습니까? 선생님, 그분이 누구 신데요?" "예, 그분은 찰스 알렌이라는 목사님이신데 Houston. TX에 계십니다" 이 사장님은 정신과 의사님의 소개를 받고 회사 비서실에서 연락을 하여 약속을 받고 약속한 그 날에 회사 자가용 비행기로 Houston, TX 에 있는 감리교 목사 찰스 알렌을 찾아갔습니다.
젊은 사장의 사정이야기를 다 들으시더니 알렌 목사님은 조그마한 종이에 처방을 하나 써 주면서 "사장님, 여기 도움이 될 수 있는 처방을 섰는데 성경 시편 23편을 하루에 다섯 번씩 읽으세요, 일어나자마자 한번, 조반 잡숫고 한번, 점심 드시고 한번, 저녁 잡수시고 한번, 그리고 주무시기 전에 한번 읽으세요. 잘 아시는 말씀이니까 빨리 빨리 읽으실 수도 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마시고 천천히 한 글자 한 단어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하는 것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음미해 가면서 읽으세요. 그리고 사장님이 바쁘실 터이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좀 시간이 있을 때 다섯 번 읽으면 되지 않겠나? 하실런니 모르는데 그렇게 하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가령 하루에 약을 다섯봉지 먹어야 하는데 식전에, 조반후, 점심후, 저녁후, 취침전에 한 봉지씩 먹어야 할 약을 바쁜데 그럴 것 뭐 있나 시간 있을 때 먹어야지 하면서 다섯 봉지의 약을 한 봉지에 털어 넣어 먹고 물 마시면 아무런 효과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시키는 대로 반드시 하세요.
이 젊은 사장은 알렌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일어나자 마자 한번, 조반 먹고 한번, 점심식사 하고 한번, 저녁 들고 한번,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번 이렇게 하루에 다섯 번씩 시편 23편을 정독했습니다. 그랬더니 일주일을 계속하는 동안에 큰 변화가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음이 평안 하니까 밤에 잠을 편히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밤에 잠을 잘 자니까 피곤이 덜해지고 의욕이 생기고, 밥맛이 좋아지고, 확신이 생기니까 최종 결정을 해야 한번 사인을 할 때도 힘있게 할 수 있어 큰 회사를 잘 운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남모르는 고민이 있습니까? 범사에 자신이 없으십니까? 밤에 잠이 오지 않으십니까? 구미가 없으십니까? 의심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기고, 염려와 근심에 사로 잡혀 있는 분이 계십니까? 찰스 알렌 목사님의 처방을 하번 따라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틀림없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심령이 치료받는 것을 체험하게 되실 줄 미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은 일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과의 관계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놀라운 발견입니다. 오늘 아침 성시 낭독한 시편 100편에도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자기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람 사이를 목자와 양으로 표현한 것은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지 모릅니다. 양은 짐승 중에서도 지혜롭지 못한 짐승입니다. 다른 짐승들은 밖에 나갔다가도 자기 집을 찾아 올 수 있습니다. 개는 10리 20리 아주 멀리 갔다가도 자기 집을 찾아옵니다. 닭도 밖에 밭에 나가 놀다가 저녁이 되면 다 찾아 들어옵니다. 고양이도 이집 저집 다 돌아다니다가도 자기 집에 돌아옵니다.
그런데 양은 밖으로 나갈 줄은 아는데 집에 찾아 들어올 줄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뜻을 고집합니다. 우리 사람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현명하고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늘 본향을 떠나서 이 세상에 와서 얼마동안을 살다가 우리 본향 하늘나라로 가야만 하는데 그 본향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심령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러다가 지쳐서 쓰러져 죽고 맙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행로 주변에는 갈 길을 찾아 헤매다가 지쳐서 쓰려져 죽은 영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의 갈길을 찾지 못해 헤매면서도 자기 고집이 얾나 강한지 모릅니다.
본래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양은 목자의 인도 함이 없이는 제 집을 찾지 못합니다. 길을 잃어버린 양은 목자에 의해서만 양의 우리로 돌아올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우리의 본향인 하늘나라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형편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방위할 능력도 업습니다. 우리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방편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목자입니다. 옛날 청교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갈 때만 평안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를 위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아니해서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됩니다.
철학자 럿셀의 말대로 '우리 인간은 우주를 정복할 정도로 강한 것 같으면서도 때로는 자기 마음 하나를 가누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을 때만이 안전하고 평안한 것입니다. 성 어거스팀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와 처음으로 고백한 그 말은 정말 의미가 깊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은 당신을 위하여 우리 인간을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당신 품에 안기기 전에는 참된 만족도 참된 평안도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께 돌아올 때에만 만족과 평안이 있습니다.
양은 의존하는 짐승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고 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누리는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려면 먼저 나 자신이 양과 같이 어리석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그 사실을 인정하려하지 않습니다. 왜요? 사람들은 예외 없이 교만해서입니다. 글쎄 어떤 분은 "나는 교만하지 않는데요"라고 말씀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내려오는 말 중에 "사람은 제 잘난 맛에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너나할것없이 다 교만합니다. 이 교만을 꺾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자를 미워하십니다. 교만한자를 싫어하십니다. 교만하자를 대적하십니다. 교만하자를 물리치십니다. 우리가 교만한 마음이 있는 한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으려면 내가 양과 같이 어리석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목자가 아니라 나의 목자입니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Moond신학교 총장이셨던 Sweeding 박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손자가 없으시다" 이 말씀이 맞습니까? 왜요? 가령 제가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하고 부르면 인간의 경우로 말하면 제 아들은 하나님에게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제 아들도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개인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목자도, 아내의 목자도 말고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아야 합니다.
내가 유리 방황할 때 주님이 나를 찾으셨다는 사실이 주님은 나의 목자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 주님은 나에게 죄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회개하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로 하여금 생명의 길을 걷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나의 목자가 되십니다. 시편 23편이 비록 여섯 편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이지만 '나'와 관계된 말 나의, 나를, 내, 내가, 나와, 내게라는 표현이 정확하게 열네번 나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나와의 관계입니다.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부모가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내가 예수를 믿지 않으면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아야 합니다. 이 험한 세상을 승리하시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으세요.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으면 어떤 축복이 임합니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 이 세상은 한마디로 부족한 세상입니다. 모자라는 세상입니다. 문제는 밖의 환경이나 물질적인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만족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가지면 만족할까요? 돈을 10억원가지면 만족할까요 100억원가지면 아니 1000억원가지면 만족할까요? 요사이 TV나 라디오의 뉴스를 켜면 돈 이야기입니다. 안 잡수실 것을 잡수시다가 걸린 이야기들입니다. 지겨울 정도입니다. 들어보면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밥걱정은 안 해도 될 사람들 같은데 부족해서 좀 더 먹으려다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마디로 말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가져도 만족이 없습니다. 세상의 것은 먹으면 먹을수록 더 먹고 싶고,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고 싶고 누리면 누릴수록 더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목자로 삼으면 부족함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세상 적인 것 물질적인 것 보이는 것 가지고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짐승은 먹을 것 있고 잠자리 있으면 만족합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가 저녁 배불리 먹고 들어가 잘 수 있는 집이 있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밤새 잠못자고 끙끙대며 고민하는 개 보셨습니까? 그런 개 없습니다. 배불리 먹으면 그냥 제집에 들어가 잡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업하고, 아무리 좋은 옷 입고, 아무리 좋은 음식 먹고, 아무리 좋은 집 쓰고 살아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 수면제를 복용해야만 하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 인간은 겉으로 보면 하나의 동물이지만 우리에게는 짐승이 갖지 못한 가장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입니다. 이 영혼은 하나님을 닮은 것이기 때문에 이 영혼의 만족이 없을 때 세상의 무엇을 가지고도 참된 만족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여기 어린애가 배가 고파서 웁니다. 우는 아이에게 사탕을 주면 잠시 울음을 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간 후에 또 웁니다. 왜요? 배가 고픈데 사탕을 먹어서는 만족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배가 고파서 우는 아이의 울음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까? 밥을 먹어야 합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사마리아 지방 수가동네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점심 준비를 위해 동네로 들어가고 예수님 혼자 동네밖에 잇는 우물가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런데 대낮에 물을 길러 나온 여자를 만났습니다. 옷차림은 보통이상으로 화려하게 했는데 그 모스에 생기가 없어 보였고 눈이 빛을 잃고 있었습니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동안에 이 여자는 육신 적인 향락이 전부인줄 알고 젊은 나이에 남자를 다섯이나 바꿀 정도였고 그래도 만족이 없고 지금도 남의 남자와 동거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에게 말씀했습니다.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육신의 만족을 위해서는 남자를 다섯이나 바꿀 정도로 만족을 찾아 헤매었지만 거기서 참된 만족을 누리지 못하고 시들해 있던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메시야를 찾았습니다. 그 순간 이 여인은 과거 어느 남자에게도 얻지 못한 만족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육신 적인 만족이 아니라 영적인 만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 여인은 마을로 들어가서 "내가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습니다"하며 증거 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것 가지고 만족하지 못하던 이 여인, 그래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 보던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참된 만족, 부족함이 없는 삶의 충만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주님은 나의 목자로서 부족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예기치 않았던 환난에 처했을 때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은 우리를 환난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일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과연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 에벤에셀 하실 분이 많이 계실 줄 믿습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는 길을 살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설정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놀라운 방법으로 인도하심을 받았고 보이지 않는 손과 팔이 함께 하심을 체험했습니다.
양이 자기 목자를 잃고 초장을 떠났을 때에도 목자는 양을 다시 울안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동안 곁길로 갈 염려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을 때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매일 매일 나를 푸른 초장에서 먹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불의의 사고를 만나 죽을 자리에 임했다가 겨우 살아남게 되면 "하나님이 나를 눈동자처럼 지켜 주셔서 살아남게 되었다"고 감격해 삽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경에서 건져 주신 것만 하나님이 지켜 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사고를 당하지 아니하고 지내게 된 것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사업에 문제가 생겨서 그 재산이 다 없어지고 말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우신 도우심으로 사업을 다시 하게 되고 재산도 전과같이 회복되었다면 이것은 전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사업이 이처럼 어려운 때 잘 되어 재산의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 몸의 심각한 병으로 거의 소망이 없는 자리에 있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운 병에서 고침을 받고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신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런데 특별한 병이 없이 건강하게 나날을 지낼 수 있다면 이것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은 성도의 확신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은 범사에 부족한 것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만족이 없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이 없습니다.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이 없습니다. 아무리 권력을 쥐고 있어도 만족이 없습니다. 언제나 부족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보세요. 그때 이런 고백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고백은 다윗의 고백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목자로 삼은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많은 것을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요구가 거절된 적이 많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 될 때 그것을 아끼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께 구하세요.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간구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주십니다. 믿음으로 간구하고 의심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저는 오늘까지 하나님께 간구해서 이루어진 것은 저에게 모두가 유익한 것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기 때문에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저의 고백입니다.
오늘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세상의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하지 않았습니다. 또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한 것을 생각지도 않는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말씀은 인간의 본질적인 부족에 관련된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것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 이상 다른 것을 더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목자가 되시면 그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가가 하나님을 목자로 삼았더니 평생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참된 만족을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심령에 참된 만족을 체험하실 줄 믿습니다.
믿는 사람의 발자취
시 23:1-6 / 박조준 목사
그 동안 우리는 다윗의 유명한 시편 23편을 주일마다 한 절씩 생각했습니다. 오늘이 그 마지막 시간으로 시편 23편 6절 말씀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선한 목자의 돌보심을 받고 있는 양은 어떤 일이 생겨도 그런 상황 속에서라도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있을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의 돌보심 아래 있는 양은 어떤 환경 어떤 조건 속에서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누게 되는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나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한 달이나 두 달이 아니고 1년이나 2년이 아니라 나의 평생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시면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느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더구나 이 고백은 우리 인간의 생애와 운명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랑스러운 외침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나의 선한 목자로 삼고 실제로 이렇게 생각하고 믿는 분이 우리 가운데 몇 분이나 되시니까? 우리 삶 속에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계신 분이 몇 분이나 되십니까? 물론 우리가 생각하고 계획한 일들이 기대 이상으로 잘 될 때 모든 일이 형통할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내 건강이 좋고, 수입이 넉넉하고, 가족마다 평안하고, 내 친구들이 다 나를 좋아하고, 사회에서 어디가나 인정받는다면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 몸에 심각한 병이 들었을 때 뭐라고 말할까요?
사랑하는 남편이, 사랑하는 아내가 고통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볼 때 뭐라고 말할까요?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진학에 실패했다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뜻밖에 직장을 잃고 가족들은 가난 속에 시달리게 될 때 나는 뭐하고 말할까요? 양심적으로 말해 나는 다른 사람을 중상모략한 일이 없는데 사람들이 나를 멀리하고 돌아서니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이처럼 나의 성이 무너지고, 기대와 소망이 수포로 돌아갈 때, 그래도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이 말이 터무니없는 속임수입니까?
여러분,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며 사시는 분의 간증을 들어보세요. "저도 지금까지 사는 동안 감당키 어려운 일들을 당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에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생각되었었습니다. 정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습니다. 밤처럼 어두운 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그 모든 일들이 제 생애에 유익한 것들이었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제한된 지식을 가진 저로서는 무한한 지혜와 섭리로 행하시는 주님의 섭리와 경륜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33절에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을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차라리 하나님의 간섭을 벗어나서 내 자신의 노력으로 더 훌륭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주님을 떠나고 싶어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잘못된 행동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은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따라 오심에 대하여 감사를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의심해도, 아니 주님의 품을 떠나려고 해도,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찾아내서 다시 사랑과 긍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어려움도, 어떤 재난도, 우리를 낙심하게 하거나 두려워하게 하지 아니하고 우리의 생활 중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에 큰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우리에게 날마다 새롭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한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가장 옳은 일, 가장 좋은 일을 하신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내가 비록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크신 사랑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주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나에게 계속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여기 오늘 나누게 되는 말씀의 본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주님의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주님의 양을 사랑하시고, 주님의 일을 사랑하시며, 목자로서 주님의 역할을 사랑하시는 그런 사랑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에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모자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5장 13절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다"고 했습니다. 요한 1서 3장 16절에는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나를 통해서는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A Schweitzer "내가 행복할 때 '나만 이렇게 행복해서 될까?'하는 생각을 해보라"고 했습니다.
내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에게 흘러 들어오는 것과 같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라야 하고, 내가 어디에 가든지 다른 사람에게 선과 인자를 남겨야 할 것입니다. 양을 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양의 거름은 다른 가축의 거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다고 합니다.
양들이 목장 전체에 퍼져 있으면 양의 거름을 통해서 토양이 비옥해 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대 문헌에는 양을 가리켜서 '황금발굽의 가축'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양들이 가는 곳에는 풍요와 번영이 뒤따랐습니다. 왜냐하면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양들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양들이 걸어간 곳에는 비옥한 목초지가 뒤따랐습니다. 양들이 살았던 곳에는 아름다움과 풍성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여러분 어제 밤에밖에 눈이 왔습니다. 밤에 어떤 짐승이 자나갔는지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습니까? 발자국을 보면 압니다. 소가지나 갔으면 소발자국이 났을 것입니다. 개가 지나갔으면 개 발자국이 났을 것입니다. 양이 자나 갔으면 양의 발자국이 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나간 길에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제자의 발자취가 났습니까? 우리가 다녀간 길 뒤에 축복과 은혜를 남겨둡니까? 알프렛테니슨 경이 남긴 고정 시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한번은 두 친구가 동부로 가는 길에
제 집에 들려 며칠을 지내며 일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저 더러 동부에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같이 가던 중 한 친구가 모자를 잃어버린 것을
뒤늦게야 알았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 모자를 우리 집에 두고 온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게 부탁했습니다.
집에 편지를 써서 모자를 찾아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후 내 아내에게서 답장이 왔습니다.
아내의 답장 중에는 잊을 수 없는 문장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문장은 저에게 너무나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편지를 받고 집안 구석구석을 다 뒤져보았습니다.
그러나 손님의 모자는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여기 남겨 두고 가신 것을 오직 큰 축복 하나뿐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생각하면서 저 자신을 한번 돌이켜 보았습니다. 나는 목사로서 어떤 발자취를 남기고 있나? 우리는 어떤 발자취를 남기십니까? 슬픔의 흔적을 남기십니까? 아니면 기쁨의 흔적을 남기십니까?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기대할까요? 그렇지 않으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고 차라리 잊어버리고 말까요? 우리는 우리 뒤에 축복을 남깁니까? 아니면 잊고 싶은 추억을 남깁니까? 우리를 아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될까요? 아니면 우리를 아는 것이 귀찮고 고통스러운 일 일까요?
이사야 52장 7절 말씀에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하는 자의 산을 넘는 말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한번 스스로 물어 봅시다.
'나는 어디에 가나 화평을 남겨두나? 아니면 불화를 남겨두고 있나?' '나는 누구에게나 용서를 남겨두나? 아니면 원한을 남겨두나?' '나는 만족을 남겨 두나? 아니면 불만을 남겨두나?' '나는 어디가나 희망을 남겨두나? 아니면 좌절을 남겨 두나?' '나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남겨두나? 아니면 미움을 남겨 두나?'
어떤 사람은 가는 곳마다 불결한 흔적을 남겨두기 때문에 그의 발자취를 차라리 가리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되면 큰 일입니다.
여러분, 발자취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발자취를 보면 양이 지나갔는지 이리가 지나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발자취를 보면 성도가 지나갔는지 사기꾼이 지나갔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세례 요한의 제자가 예수님이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계신 자리에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우리 선생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시면서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이때 예수님이 보통 사람이었으면 '이 사람 내가 메시야가 아니면 누가 메시야란 말인가? 이미 자네 선생이나를 향해 증거하지 않았는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말이야'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에게 뭐하고 말씀하셨습니까? 마침 그때 예수님은 병든 자 눈먼 자를 고치고 계셨는데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가서 보고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나나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하라" 하셨습니다.
나를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하는 것을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발자취는 어떻습니까? 내가 나를 아무리 서전해도 다른 사람이 내 발자취를 보고 판단할 것입니다. 저 아프리카에는 David Livingston과 Albert Schweitzer 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그들이 밟았던 검은 대륙의 숲과 평야와 마을에는 그들의 발자취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곳의 원주민들은 Livingston이나 Schweitzer는 한평생 주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뒤따른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를 무미건조하고 미지근한 기관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뜨거운 사람을 받았으면 우리도 뜨겁게 이웃을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지 못할 때 사람들은 사랑을 받기 위해 교회를 찾지만 우리의 미지근한 태도 때문에 실망하고 떠나갑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보여 줄 때 그 사람에게도 은혜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목자로서는 양이 잘 자라고, 왕성하게 번식하는 것을 보는 것이 기쁨입니다. 양들이 만족해하는 것을 보는 것은 목자의 한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목자 되시는 주님께서 이런 만족을 찾고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드릴 수 있는 주님께 대한 예물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에는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착한 행실 또는 과실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도 성령 충만히 받기 전에는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히 받은 후에 사랑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시면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따르는 동안 주님은 우리를 계속 바라보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뿐만 아니라 주님에게도 기쁨으로 드릴 동일한 선함과 인자를 보고 싶어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주님을 만족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집'은 성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넓은 뜻이 있습니다. 어쨌든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위안이요,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있을 때 아무리 밖에 폭풍이 불고, 요란하다해도 아무런 걱정이 없이 지낼 수 있습니다.
시편 23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자랑스럽고 기쁨에 넘치는 말로 시작했습니다. 이제 이 시편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는 적극적이고도 소망으로 가득찬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여기 자기의 삶을 만족하게 생각하는 양이 있습니다. 그는 목자의 보살핌을 받으며 건강하게 자라고, 편히 쉴 수 있기 때문에 목자를 떠나 곁길로 갈 생각은 해 본적도 없었습니다. 그는 목자의 세심한 관리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은 만족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한편 목자에게도 자기 양떼에 대한 깊은 애정과 헌신이 나타나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과 헤어진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건강하고 만족해하는 양은 목자에게 기쁨이요 재산입니다.
더구나 양이 여호와의 집에 거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기쁨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이와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야 하고, 목자 되신 주님은 정말 선하신 분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 권속이 된 것을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알고 다른 사람에게 이 놀라운 사실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양들은 항상 목자가 볼 수 있는 곳에 있고 싶어합니다. 양은 목자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 때 안정감과 평온감을 가질 수가 있고, 자동적으로 어려움과 위험을 이겨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목자가 함께 있는 한 양에게는 풍성한 풀밭이 있고, 잔잔한 맑은 물이 있고, 신선한 들로 통하는 새로운 길이 있고, 고원지대의 안전한 여름이 있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가 있고, 파리와 질병과 기생충을 없애는 해독제가 있고, 평온과 만족이 있습니다. 거기가 어딥니까? 양들이 목자와 함께 있는 곳입니다. 내 주 예수 계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바로 그렇습니다.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자세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으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이십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영원한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 육신도 이 땅에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70을 살고 강건해서 80을 산다고 해도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갑니다. 그리고 이 육신, 겉사람은 낡아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신의 장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장막이 새것일 때는 색깔이 선명하고, 줄이 팽팽하여 햇빛도 가리고 비도, 바라도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낡아지면 색깔도 바뀌고 줄도 늘어져 힘이 없어지고, 여기 저기 구멍이 뚫어지고, 흔들거리다가 바람이 불면 쓰러지고 맙니다. 여기에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는 영원한 집이 없습니다. 이 육신의 장막집 벗는 순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원한 집에 갑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누가 이 집에 가서 영원히 거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나의 목자로 삼은 사람입니다. 주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다"고
여러분, 이 하나님을 여러분의 목자로 삼으셨습니까?
오랫동안 교회 다녔다고 해서 하나님의 집에 가는 것 아닙니다. 교회의 직분 맡았다고 그 집에 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맞아 주십니다.
평생에 행한 일 돌아보니 못 다한 일 많아 부끄럽에 아버지 사랑이 날 용납하시고 생명의 면류관 주시리라. 하나님의 집에 가실 준비가 되셨습니까?
선과 인자가 따르는 사람
시 23:1-6 / 오창우 목사
1. 서론 - 사람이 잘되려면 운이 따라야 한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말 가운데, "하면 된다! 해서 안되는 일이 없다! 사람이 노력하는데 안되는 것이 뭐가 있냐?"이런 얘기를 하지만, 정말 일을 열심히 해도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농사를 잘지어 곡식이 익고 추수를 눈 앞에 두고 있는데, 큰비가 내려 가지고 농사를 망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험 준비 열심히 해서 올 해는 대학에 꼭 붙겠다고 했는데, 그 날 감기가 심하게 들어 컨디션이 나빠가지고 시험을 망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노력해도 안되는 경우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죽하면 성경은 축복이라고 하는 것이 `손이 수고하는대로 먹을 것이라` 이렇게 말했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잘되려면 운이 따라야 된다고 말합니다. 잘되는 사람은 보면서 이르기를 `저 사람은 운이 따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운이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운이 따른다 이렇게 얘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운이 따른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고, 우리 신앙인은 자신이 최선을 다하고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되 `그러면 된다` 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책임져주셔야 된다` 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신앙인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다윗은 자기 자신은 최선을 다하는데, 이 나의 노력에 대해서 하나님이 책임져주실 것이다 하는 말을 6절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다윗은 운이 따른다는 말 대신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른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른다" 여러분, 한번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르는 나 ○○○!" 한번 더하십시다. "나에게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른다. 할렐루야!"
우리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르게 하소서!" 여러분, 꼭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2. 그러나 이 말에 오해하지 말라! 내가 가만히 있는데, 아무 것도 안해도 다 하나님이 해주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른다는 말은 뒤에 따른다는 말입니다. 앞에 무엇인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있고 난 다음에 따르는 겁니다.
성경의 정신은 심는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두는 겁니다. 좋은 것을 심으면 좋은 것 거두고, 나쁜 것 심으면 나쁜 것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법입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이 나는 법입니다.
땀을 흘리고 정성을 드리고 난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얻으려 하는 불한당같은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복권 맞아서 부자되면 좋겠다고 하는 모양인데, 그래서 너도나도 복권사고 맞기를 원해서인지 복권장사가 잘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복권 맞아서 잘되는 일 별로 없습니다. 그런 사람 본 적이 없습니다. 남을 사기치거나 도적질 하거나 도박해서 잘사는 사람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여러분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땀을 흘려서 먹고 살 수 있는 것을 복으로 알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따르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한 성도의 2가지 자세
그럼 이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따르는 성도는 어떤 성도인가? 두 가지를 성경이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선하심이 따르기 위해서는 고난을 잘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고난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의 선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 따라하시겠습니까? "고난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의 선이 따른다. 할렐루야!"
고난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의 선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다 고난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요셉도, 이스라엘을 통일시킨 다윗 왕도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나 사도바울도 다 고난 받았습니다. 이 고난 속에 사는 것이 인생이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고난이 정의입니다.
시편에도 사람의 연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도 그 인생 자체는 수고와 슬픔 뿐이라고 그랬습니다. 고난은 사람에게 필연적입니다.
어느 교회에 속을 썩이는 교인이 있어서 `하나님 이 교인 문제 좀 해결해 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 주님이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이 "애, 너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나한테도 열두제자 가운데 가룟유다가 있었다." 예수님도 가룟유다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자기도 그 기도 안하기로 했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 얘기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바라기는 여러분이 가룟유다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 가룟유댜, 안되지요? 어떻게 가족을 배반할 수 있습니까? 직장에서 가룟유댜, 안되지요? 어떻게 직장에서 배반하는 일 할 수 있어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룟유다가 되지 마십시오. 그래서 남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입니다.
엊그저께 신문에 보니까 아버지학교 수료하는 기사가 실렸는데, 그 수료의 마지막 장면이 사진으로 찍혔습니다. 남편들이 아내들의 발을 씻겨주는 것이 수료식의 마지막입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섬기는 자가 되는 거, 이것이 복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된 사람입니다. 가룟유다 되지 말란 말입니다. 섬기는 사람되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문에도 미담으로 실리는 겁니다. 이런 아버지학교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어쨌든지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난으로 어려움의 세월을 사셨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될 지혜고 신앙인의 능력입니다.
여러분,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난이 작다고 좋고 크다고 나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고난이나 시험에 넘어지려면 접시물에 빠져 죽는 것이고, 살려면은 망망대해 파도 속에서도 살아나는 겁니다.
문제는 고난의 크기가 아니라 고난을 대처하는 마음과 방법의 문제입니다. 어떤 자세를 가지고 고난에 대처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다윗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고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나에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다윗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하나님 잘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에게도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울 것도 없지요. 왜? 인생에 고난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이것은 환경에 대한 어려움입니다. "내 원수의 목전" 사람에 대한 어려움을 얘기합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어려움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한다든지 나에게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는데 있습니다. 이런 생각 가져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다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이 고난을 대처하는 숙제를 어떻게 풀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의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누가 이 고난이 좋다고 해서 좋고 나쁘다고 해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이 문제 가운데 하나는 고난의 상황이 좋은가 나쁜가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이 고난의 의미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깨닫는 것뿐입니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니까 다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오늘 다윗이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고난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딱 하나를 의지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원수가 있어도 그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내 잔을 넘치게 하는 승리를 주신다는 겁니다.
이 말씀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고난에 대한 어두움의 그림자는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 속에서 그 고난이 얼마나 크냐 얼마나 힘드냐 이것보다 그의 영혼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기대하고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고난을 당할 때, 이 고난 속에서 고난의 아픔이라든가 고난의 크기라든가 보다는, 물론 문제가 되겠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이 고난도 기쁨으로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전도서 3장에서 만물은 다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건강할 때가 있고, 병들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고, 헐 때가 있고, 이 모든 때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얘기를 하면서 솔로몬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누구도 측량할 수가 없다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때를 우리에게 기회로 주셔서 우리가 이 때를 위하여 노고하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어떤 기회가 주어졌든지 그 기회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상관하지 않고 그 의미를 알고 그것을 위해서 생각하고 고민할 때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의 복음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얼마나 주를 위해 살았습니까? 그러면 우리 생각에 돈도 있고, 지위도 있고, 인정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핍박합니다. 그래서 쫓겨다니는 겁니다.
물론 그 속에서 사도바울을 위하는 좋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진짜 좋은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돌멩이 던질 때에 주의 종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고, 진짜 그 사람은 나를 유쾌하게 했다, 그런 사람은 진짜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도바울이 편지 때마다 이름을 쓰지 않습니까? 그 사람을 꼭 기억하고, 그 사람에게 잘해주고, 그 사람에게 꼭 도움을 주면 좋겠다, 그 사람 말 좀 들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황이 나쁠 때 같이 돌멩이 던지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구요, 상황이 나쁠 때 그를 위로하는 사람은 진짜 좋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도바울이 환경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신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 개의 가시라고 하지 않습니까? 머리가 너무나 아파 가지고 늘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머리 아프면 참 힘들거든요. 그런데 눈도 잘 안보였습니다. 안질 때문에 고통을 많이 받았습니다. 눈만 아파도 아무 의욕도 잘 안납니다. 그런데 그 뿐아니라 간질병까지 있어 가지고 설교하다가 쓰러졌던 적도 있습니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데 이렇게 주의 일을 하면 건강해야될 터인데, 육신적으로도 그가 얼마나 많이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병을 안 고쳐주셨다는 겁니다. 그러나 병을 안 고쳐주셨지만 거기서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작오하지 않게 하시려고,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가 이런 일 하는데, 저런 일 하는데, 내가 이만하면 대접받아야 하는데 하는 마음 갖게 하지 않으시려고 하나님이 어려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것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고난도 은혜라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하나님, 나에게 겸손함을 주시지 참으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 방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육신적인 질병이든지, 사업에 실패든지, 누가 나를 핍박하든지, 그러나 그 때마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무엇인가 하면 누구를 원수 삼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내가 겸손해지라는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승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높이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고난에 대한 결론으로 다윗이 이런 신앙적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를 따른다" 고난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선하다는 말은 합력하여 이루는 선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 합력하여 이루는 선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선입니다. 내가 볼 때 좋은 것만 좋은 것이 아니고, 나쁜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이 물이 사람을 살게 하는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을 분석해보면 물은 산소 더하기 수소입니다. 산소는 사람이 마시면 좋은 것입니다. 병원에 가서 호흡이 잘 안되는 사람에게 산소를 마시게 하기 위해 산소호흡기를 물려주면 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게 됩니다. 산소는 사람을 살게 하는 겁니다. 반면에 수소는 어떻습니까? 수소는 산소하고 반대로 사람이 마시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산소와 수소가 합쳐지면 사람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생명과도 같은 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이렇게 가는 겁니다.
그런데 수소도 언제나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요즘 자동차 공해가 심해서 공해 없는 자동차 만듭니다. 그런데 전기로 가는 자동차와 함께 수소로 가는 자동차가 개발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10년 안에 물에서 수소를 분리시켜 가지고 그 수소를 자동차 원료로 쓰는 자동차가 실용화된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이제는 이 수소도 나쁜 것만이 아니라 좋은 것이란 말은 듣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모든 것이 좋은 것이 다 좋은 것 아니고, 나쁜 것이 다 나쁜 것이 아님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세계2차대전 때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나치에게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600만명이나 수용소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고난과 시련과 그 죽음의 위험 속에서 살아났습니다. 이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 가지고 이것을 간증하며 다니는 코리텐 붐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이 신앙간증을 하고 맨 마지막에 자기가 가지고 다니던 수건 한 장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그 수건에 이쁜 자수가 되어 있는 겁니다. 보면서 이것이 얼마나 아름답냐고 하고 뒤집어서는 뒤를 보여주는데, 그 뒤가, 여러분, 수 놔 보신 분들은 알지 않습니까? 앞에는 아름다운데, 뒤는 어때요? 엉망진창이지요. 얼마나 엉망진창입니까? 그런데 이 엉망진창이 그렇게 아름다운 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고난의 연속입니다. 엉망진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우리 인생을 섭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뒤집어볼 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름다운 수와 같이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합력하여 이루는 선인 것입니다.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고난을 선하게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고난을 잘 감당하면 선이 따라오게 되어 있는 겁니다.
2)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따르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으라는 것이다.
여러분, 따라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양식을 잘 먹으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따른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따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양식을 잘 먹어야 합니다.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영국의 주간 잡지 중의 하나인 `더 브리티시 위클리` 에 목사들의 설교와 그 하는 사역에 대한 비판의 글이 실려서 문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독자가 다음과 같은 글을 투고했습니다.
"교회의 목회자들은 설교를 대단히 중요시하고 그것을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나는 거의 빠짐없이 30년 이상을 교회에 다닌 사람으로 3천번 가량의 설교를 들었다. 그런데 나는 대단히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을 했다. 그것은 내가 그렇게 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 단 한 개의 설교도 제대로 기억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목회자들이 설교 말고 다른 일에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는 것이 더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이 글이 실리고 난 다음에 몇 주에 걸쳐 별별 반응과 응답이 홍수처럼 밀려들어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 주간 신문은 많은 사람들의 토론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러던 중에 한 사람이 보낸 다음의 글이 실리면서, 모든 소리소문들이 잠잠해졌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는 결혼한 지 30년이 된 사람으로 그 동안 32,850번의 식사를 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아내가 요리해서 차려준 음식이다. 그런데 내 머리에 떠오른 생각은, 내가 그 많은 음식들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먹은 음식의 식단을 단 한가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와 동시에 내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나에게 그 음식들이 없었다면 나는 벌써 오래 전에 굶어 죽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양식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먹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양식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겁니다. 믈론 혼자서도 성경을 보고 먹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마다 강단에서 주시는 말씀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신토불이"란 말을 들어보지 않으셨습니까? 우리의 몸에 좋은 것은 이 땅에서 나는 음식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먹는 양식 가운데 가장 좋은 양식은 집에서 어머니가, 아내가 해주는 양식입니다. 설교자도 하나님 말씀 전하는 일을 하는데, 나는 이 설교자를 가정주부라고 생각합니다. 요리를 하지만 요리사가 아닙니다. 요리사와 가정주부는 다릅니다.
가정주부는 식단을 짤 때 그 기준을 어디에 둡니까? 물론 맛있는 것도 좋지만 맛있는 것을 매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가는 생활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경제적인 형편을 생각하면 곧 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싸고 좋은 것을 고르기도 하고 그 시절마다 유행하는 음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주부가 식단을 짤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식구들의 건강을 생각해서 식단을 짜는 겁니다. 그런데 가족들 중에는 가지 좋아하는 것을 찾기도 하고 맛있는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식단을 짤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하다 보면 편식하게 되고 건강을 해치게 되는 것은 자명합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시절, 그 때에 교인들의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공부반을 하면서 숙제를 내줬는데, 목사님 설교를 요약해서 내라는 겁니다. 그리고 요약한 설교를 다음에 모이게 되면 같이 나눕니다. 나는 지난 주일에 목사님 설교를 이렇게 들었고, 이렇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 숙제 잘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감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건강한 것입니다. 외식은 한두 번입니다. 그 외식으로 색다른 맛을 찾을 수는 있지만은 건강할 수는 겁니다. 가정에서 주는 음식을 귀히 여기고, 주부들은 집에서 밥을 먹을 수 있게 잘 준비를 해야할 것입니다. 이 주부가 자꾸 밖에 나가서 먹자고 앞장설 때에는 주부의 게으름도 있지만 식구들이 먹어주지 않고 감사하지 않으니까 자꾸 밖에서 먹자는 것입니다.
밥은 집에서 먹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맛은 부족할 수가 있고, 먹고 싶지 않은 것도 있지만 내 교회에서 주는 음식을 먹는 것이 내 건강에 좋은 것임을 믿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요즘에 인터넷도 되고, 기독교방송도 있고 하니까 얼마나 많은 설교를 듣습니까? 그런데 그 설교도 얼마나 잘하는 설교입니까? 보통 잘하는 설교라면 방송에 나오겠습니까? 그런데 그것만 좋다고 하고 내 음식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잘 먹지 않는 것은 문제입니다. 예배 시간에 무엇보다도 내 집에서 주는 음식 잘 먹는 것, 이것이 여러분의 복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다윗이 말합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음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사랑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신 사랑을 알 수가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 말씀 안에 사는 것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 이것저것 먹을 것을 찾습니다. 물론 육신적으로 먹는 것도, 지금 이 시간 산에 올라가서 `야호`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건강은 영혼이 소생할 때,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 안에 살면 형통의 은혜가 있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리라" 하나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 시편1편 1,2,3절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라" 아멘.
요한복음 15장 9,10절에서 예수님 말씀하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아멘.
하나님 말씀 안에 살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사랑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따르기를 원하면 당연히 하나님 말씀 안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임직 받은 분들을 문답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공부도 했고, 정말 이 분이 임직 받을 만한 자격이 있나, 문답을 하고 허락을 받아야 임직을 합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일군이 되십시오. 직분은 일하려고 하는 것이지, 이것을 취미나 명예의 계급장 다는 것 아닙니다. 일하십시오."그리고 두 번째로 제가 그랬습니다. "일은 하지만 일 하면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영혼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일은 잘 하는데, 사람에게 상처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귀하게 여기자 이것이 예수님의 정신이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라 그랬습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자하심이 따르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주의 일을 하고 말씀 안에 사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따라야지, 이것을 통해서 바리새인들처럼 남을 비판하고 오는 사람들을 헤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자가 되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의의 길로 인도하심을 믿고 따를 때,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마땅히 따를 줄로 믿습니다. 부탁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선과 인자가 따르는 복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4. 결론 - 하나님의 선과 인자하심이 따르는 복이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다윗은 다음과 같이 오늘의 말씀을 결론짓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마지막 절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면 하나님의 선하심이 따르고, 많은 말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먹고 살면 하나님의 인자가 나를 따르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부족함이 없는 인생! 그것을 위해 하나님의 선과 인자하심이 따르기를 바라며 그가 선택한 마지막 결론은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입니다. 여호와의 집, 하나님의 집은 천국입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임직 받는 분들은 더욱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원해서 직분을 맡든, 원치 않아서 맡든, 그리고 부족한데도 맡겨 줘서 황송한 마음으로 하든, 이 억지로진 십자가가 여러분을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하는 일이 될 수 있으면, 그것은 직분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꼭 그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먹으면서 이 고난을 하난님의 은혜로 여기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는 선과 인자하심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얘기하나 하고 마치겠습니다. 피어슨이라고 하는 유명한 과학자가 있었습니다. 나는 이 분이 무슨 과학을 연구했는지, 무슨 강의를 했는지 하나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일화에 대한 짧은 글을 봐서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하도 유명해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강의를 했는데, 언제나 그와 함께 가는 사람은 운전기사였습니다. 운전기사가 운전해서 모시고 다녔는데, 이 피어슨 박사의 강의를 하도 많이 들어 가지고, 서당개 삼 년에 풍월도 짓겠다며, 하루는 피어슨 박사가 하는 말이 `자네가 내 옷을 입고 대신 나가서 강의 좀 해` 한 겁니다. 이 운전기사가 `나 못합니다` 했으면 얘기도 안될텐데, `하겠습니다` 하고는, 피어슨 박사의 옷을 입고 강의를 하는데, 기가 막히게 하는 겁니다. 너무너무 잘하는 겁니다. 강의가 끝나고 질문을 하는데, 답도 잘하는 겁니다. 그러던 중 전혀 생각지 못했던 질문이 나온 겁니다. 그러니 당황한 것이 누구겠습니까? 피어스 박사였습니다. `저 운전기사가 도대체 뭐라고 얘기를 할까?`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얘기 하시겠습니까?
이 가짜 피어스 박사가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여러분, 내가 여태까지 여러분에게 강의도 하고 내가 여태까지 여러분의 어려운 질문에도 다 대답했는데, 지금 질문하신 분은 너무나도 쉬운 질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하고 같이 다니는 저 운전기사가 할 겁니다.`
우리는 믿음 생활 오래 하다보면 예수님보다 하나님보다 더 충성하고 잘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운전기사가 피어스 박사보다 더 강의를 잘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어려운 질문 내가 풀지 못할 때 있습니다. 그 때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만이 정답인 줄로 믿고, 그 하나님에게 묻고 사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겸손하세요. 안되는 것 억지로 풀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고난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나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먹어야 할 것,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먹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먹지 않으니까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그 하나님 안에 승리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히 따르는 그 은혜가 오늘도 이 교회를 통해 신앙생활 하는 여러분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으로 자기 목자를 삼으면
시 23:1-6 / 김동호 목사
많은 사람들이 요즘 참 살기가 어렵다는 말들을 합니다. 정치도 혼란스럽고 경제도 IMF 때 보다 더 어렵다는 이야기들을 참 많이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것이 정말 사실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곤 합니다.
이제 오십이 조금 넘은 나이이지만 지난 오십 여 년 동안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있어서 지금 보다 더 좋아서 살기 좋았던 때는 한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과거와 비교하면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큼 좋아졌는데 사람들은 왜 밤낮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만 하는지 저는 정말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김 목사는 큰 교회의 목사여서 별로 힘든 일이 없어서 그런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하실 분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겠지만, 그러나 저는 꼭 그렇다고만 생각되지 는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 온 세상과 세월은 지금과 비교도 되지 않으리만큼 힘들고 어려웠었습니다. 요즘 정치판이 이러니저러니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만 옛날 보다 많이 좋아진 정치판 아닙니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대통령의 측근이 대통령 취임 1년도 되지 않았는데 감옥으로 가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땡하고 뉴스가 시작되면 대통령을 미화하고 부추키는 홍보성 뉴스가 모든 방송에서 나왔었는데 요즘은 땡하고 뉴스가 시작되면 곤혹스러운 대통령의 모습들을 볼 수 있어서 저는 참 좋습니다.(?)
저는 요즘 대통령 조금 마음에 안 듭니다. 말 잘하시는 대통령을 뽑아 놓았더니 너무 말이 앞서서 말에 실수가 많은 것이 저는 좀 불만입니다. 다음엔 입이 좀 무거운 대통령을 뽑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저는 사견이지만 지금 대통령이 전의 대통령들 보다는 좋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아직은 좀 혼란스럽고 불안하지만 그래도 정치적으로 발전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후진국 중의 후진국형의 독재정치였습니다. 한번도 여당과 야당이 뒤 바뀐 적이 없는 말 그대로 후진국 형 정치를 하는 중에 하나였습니다. 여당보다 야당이 절대로 클 수 없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슬슬 여당과 야당이 바뀌기도 하고 여당보다 야당이 커지기도 하는 등 긍정적인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우리나라 정치에 대하여 혹독한 비판만 하는지 저는 좀 둔해서 그런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경제가 나쁘다고 걱정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그와 같은 생각과 이야기의 기준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경제는 참으로 많이 발전을 하였는데 왜 우리들은 한번도 경제가 좋다는 이야기들을 하지 않고 밤낮 경제가 나쁘다는 이야기만 하면서 살고 있는지에 대해 저는 정말 이해가 잘 안 갑니다. 우리들의 생각과 이야기대로라고 하면 우리나라는 벌써 망해서 지금 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어 있어야만 할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지금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빈곤층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평균적으로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눈부신 성장은 한 것은 사실이고 그 누구도 그와 같은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감사 할 줄 모르고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일까요? 끊임없이 불평하며, 쉬지 않고 절망만 하며 사는 것일까요? 그러면 쉬지 않고 불행하고 끊임없이 불편할 터인데 왜 사람들은 감사하고 만족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쉬임없이 불평하고 원망만 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사람들은 언제쯤 만족할까요? 도대체 우리들은 언제쯤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 수 있을까요?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하고 별것 아닌 것에도 만족하며 어떠한 형편과 처지에서도 늘 자족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일까요?
정치는 좋아질까요? 물론 좋아질 것이고 좋아지면 좋겠지만 정치가 좋아지면 과연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될까요? 경제는 좋아질까요? 물론 좋아질 것이고 또 좋아지면 물론 좋겠지만 도대체 국민소득은 몇 불이나 되어야 되는 걸까요? 대통령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국민소득 2만 불이 되면 과연 잘 살게 될까요?
사람들은 삶의 희망을 정치와 경제에 걸지만, 물론 정치와 경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그래서 우리 크리스천 중에 훌륭한 정치가와 경제인이 나와야 한다고 굳게 믿고 늘 기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삶의 희망을 정치와 경제에 걸지 않습니다.
다윗의 시편 23편을 보면 다윗은 참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의 시편에서 쓴 표현들은 세상 사람들이 좀처럼 쓰지 않고, 쓰지 못하는 표현들이었습니다. ‘부족함이 없다’ ‘나의 삶은 꼭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 누운 것과 같이 풍족하고 평안하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도 해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전혀 없다’ ‘하나님은 밤낮 나를 좋은 길로만 인도 하신다’ ‘하나님은 꼭 원수 앞에서 상을 베풀어 주신다’ ‘내 삶은 부족함이 없는 삶 정도가 아니라 철철 넘치는 삶이다’
왜 다윗은 그렇게 생각하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세상에서 가장 만족한 사람으로 살 수 있었을까요? 무엇이 다윗을 그렇게 살 수 있게 하였던 것일까요? 정치적으로 왕의 권력을 가졌기 때문이었을까요? 돈이 많아서 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할 수 있어서 그랬을까요?
그랬다면 다윗의 시편 23편 1절이 달라졌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내가 왕이 되어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는 권력을 갖게 되고 보니’라던가, 아니면 ‘내가 엄청난 부자가 되어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소유하게 되고 보니’라고 써야 옳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세상에서 가장 만족한 삶을 살았던 다윗의 시편 23편 1절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시편 23편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간단하지만 매우 분명하고 단호한 말로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의 목자를 삼았더니 ‘부족함이 없더라’ ‘나의 삶이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 있는 것 같이 늘 풍족하고 평안해 지더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가도 하나도 겁 안 나더라’ ‘언제나 가보면 좋은 길이더라, 옳은 길이더라’ ‘삶의 잔이 언제나 넘치더라’는 것이 다윗의 시편 23편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처럼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두 세 사람만 모이면 정치 이야기입니다. 택시를 타도 우리나라 택시 기사들은 대개 정치 이야기를 합니다. 그 수준이 보통이 아니어서 마치 정치 평론가 같습니다. 음식점엘 가도 사람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옆에서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목사 장로가 모여도 몇 분만 지나면 다 정치 이야기들을 대개 합니다.
정치나 경제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는 이야기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정치나 경제는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여호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셔야만 합니다.
저는 다윗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제 마음 속에도 다윗과 똑같은 감사가 있고, 똑같은 만족이 있고, 똑같은 고백이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제 마음 속에 다윗과 똑같은 감사와 만족과 고백이 있는 원인도 똑 같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때문입니다.
저는 상고출신입니다. 대학도 낙방했던 사람입니다. 신학교가 늘 미달일 때 겨우 신학대학엘 들어간 사람입니다. 집안도 명문 집안이 아닙니다. 성격도 지나치도록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때문에 세상적인 면에서의 인간관계가 아주 서툰 사람입니다. 세상 적으로 생각하면 세상에도 도저히 성공할 수 없고 조금 과장한다면 살아남기 조차 쉽지 않은 그런 유형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삶도 다윗과 비슷하게 ‘별로 부족한 게 없습니다’ ‘정말로 저의 삶도 푸른초장에 있는 것처럼 풍성하고 쉴만한 물가에 있는 것처럼 평안합니다’ ‘때때로 힘든 일도 있고 어려운 일도 있지만 걱정이 안 됩니다’ ‘지나놓고 보면 언제나 좋은 길로만 왔습니다’ ‘제 삶도 부족한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넘칩니다’
저는 공부도 썩 잘하지 못하고, 집안도 썩 좋지 못하고, 성격도 활달하지 못했지만, 대표적인 못난이었지만 하나 좋아하고 잘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믿는 것을 좋아하고 교회 다니는 것을 잘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공부를 잘하고 돈을 잘 벌고 인간관계를 잘 하는 것이 중요한 줄 알고 있는데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이 좋았습니다. 저는 정말 교회가 좋았습니다. 저는 교회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사랑했었습니다. 청량리 중앙교회는 산비탈에 있는 교회였습니다. 비가 좀 많이 왔다 싶으면 교회로 올라가는 비탈길이 물 때문에 패이곤 했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교회 걱정이 되어 학교 가기 전 가방을 끼고 새벽기도회에 갔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친 후 교회 마당의 흙을 퍼서 교회로 올라가는 비탈길을 메우곤 했었습니다. 청량리 중앙교회 마당은 평지가 아니었습니다. 교회 마당이 2층처럼 높고 낮은 곳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후 교회 마당은 평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잘 안 믿으시겠지만 그것은 저와 제 친구들이 비만 오면 새벽에 와서 그 흙을 파서 길을 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저는 교회가 좋았습니다. 저는 정말 교회를 사랑했었습니다. 제가 지금 받고 있는 복 중에 상당 부분은 제가 교회를 좋아하고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늘 마음에 은혜가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설교를 듣는 중에 은혜를 받을 줄 알았고 찬송을 부르는 중에 은혜를 받을 줄 알았습니다. 설교를 듣다가 은혜를 받으면 그 말씀대로 정말 살고 싶었습니다. 순종하고 싶었고 실천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말씀대로 다 산 것은 아니지만, 살지 못하고 산 것이 훨씬 더 많았지만, 순종하고 싶었고 실천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좋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비교적 좋습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어느 정도 저축도 하고 관리도 할 것이지만 저는 결국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 갈 작정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더 정확하고 더 빠르고 더 후한 아내를 만난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면에 있어서 아내가 저보다 한 수 윕니다. 그래서 저희 가정은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별로 어려움도 문제도 없습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한번도 이견을 가져 본적이 없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돈에 대하여 저는 분명한 간증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돈에 대하여 언제나 하나님이 저보다 빠르시고 후하시다는 것입니다. 한번도 돈에 대하여 하나님을 이겨 본 적이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좀 미련한 간증을 하고 싶습니다. 오해 받을 만한 간증을 하고 싶습니다.
저희 아내는 학교 교사였습니다. 아내가 시집을 와서 학교에서 받아 온 월급을 집에 내 놓았을 때 그 돈은 그 동안 저의 집이 매달 생활비로 쓰는 돈에 약 3배에 가까운 돈이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의 월급이 그만큼 많았다는 뜻이 아니고 저희가 그만큼 가난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넉넉해 진 돈으로 제일 먼저 한 일은 적금을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적금 둘을 들었습니다. 하나는 우리 가정을 위한 적금, 하나는 하나님을 위해 목돈 헌금을 해보기 위한 적금이었습니다. 돈이 조금 넉넉해 졌을 때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목돈을 하나님께 헌금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대로 했습니다. 3년 적금을 들어 그것을 하나님께 목돈으로 드려 보았습니다.
저는 이제껏 교회를 섬길 때마다 거의 한번도 빼놓지 않고 건축헌금을 해야만 했습니다. 건축헌금을 하는 것이 무슨 팔자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승동교회에서 교회부지를 넓히기 위하여 작정 헌금을 했을 때 저와 제 아내는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하고 싶었습니다. 집에 있는 돈을 다 털고 하다못해 아이들 돌 반지까지 다 팔아 헌금한 후 은행에서 2년 정도는 열심히 갚아야 할 만큼의 돈을 융자받아 건축 헌금을 하였습니다. 교회 장로님들이 제가 헌금을 작정한 것을 보고 당신들이 작정하려고 했던 것의 두 배를 헌금하시는 바람에 목표액을 단번에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영락교회에서도 50주년 기념사업으로 건축헌금을 하였는데 얼마 안 되었지만 작정한 헌금 외에 퇴직금까지 고스란히 헌금하고 동안교회로 왔습니다. 동안교회에 오자마자 동안교회 건축을 위하여 3년 짜리 적금을 들었습니다. 그 적금을 타서 교회에 건축헌금으로 내어 놓으면서 교인들로 하여금 건축헌금 작정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건축헌금을 작정하고 드릴 때 저도 또 다시 3년 적금을 들어 헌금 작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건축헌금을 다 드렸을 즈음 한 번 더 건축헌금을 하였습니다. 저로서는 열심히 했다는 말씀입니다.
놀라운 간증 하나를 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건축헌금을 드릴 때 꼭 건축헌금으로 드린만큼의 액수가 제 통장에 또 남아 있었습니다. 마치 엘리사의 기름병과 같았습니다. 동안교회에서 건축헌금을 하면서부터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책들이 제법 팔리기 시작하면서 인세가 적지 않게 들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 전 까지는 제가 헌금으로 하나님을 추월(?)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부터는 하나님이 언제나 저를 물질적으로 앞서셨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많은 사람들이 제 연봉을 가지고 이야기들을 하였습니다. 건방지게 들리시겠지만 높은 뜻 숭의교회의 연봉은 제게 별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헌금하며 사는 액수가 그 보다는 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훨씬 더 많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돈에 대한 제 철학과 신앙에 대하여 비판하는 분들도 많이 있지만, 그것은 제 철학과 신학일 뿐 정작 돈 그 자체에 대하여 이제는 크게 흥미가 없습니다. 엘리사의 기름병을 체험한 사람에게 기름병의 기름은 별로 중요한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단 돈 뿐 아니라 가정생활의 모든 것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간증하고 싶습니다. ‘정말 부족함을 모르겠습니다’ ‘정말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서 사는 것 같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것과 같은 때가 있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별로 겁이 나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옳은 길로 좋은 길로만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제 삶도 부족함이 없는 삶이 아니라 넘치는 삶입니다’
공부를 잘 한 적도 없고, 남달리 유능한 것도 아니지만, 그런 면에서 지극히 평범하거나 평범 이하의 수준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남달리 교회 다니는 것 좋아하고, 교회를 정말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좋아하고 부족하지만 그 말씀대로 순종해 보려고 노력 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 헌금하고 드리는 것 조금 열심히 한 것 뿐인데 거의 다윗이 받았던 복을 저도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도 정말 다윗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자신의 목자를 삼으면, 정말로 하나님과 교회를 좋아하고 사랑하면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한 고백을 하실 수 있게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시편 23편이 다윗의 시편이어서 좋은 것이 아닙니다. 다윗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다윗의 하나님은 곧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좋아하는 나에게도 다윗과 똑같은 복을 주셔서 시편 23편이 다윗의 시편일 뿐만 아니라 오늘은 나의 시편도 되기 때문에 저는 좋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시편 23편이 여러분의 개인적인 시편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예수를 믿는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정치에 너무 지나친 기대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경제에 너무 희망을 걸지 마시기 바랍니다. 좋아지면 좋겠지만 좋아진다고 꼭 좋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세상 좋아져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빠지면 말짱 헛일입니다. 혹 좀 세상 힘들고 어려워져도 하나님과의 관계만 좋아지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경히 여기며 사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만족주지 못할 세상에만 정신을 팔며 사는 것이 속상합니다. 벌써 2003년 한해가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2004년 새해에는 좀더 하나님께 정신을 팔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으로 자신의 목자를 삼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양과 같이 순종하며 사는 한해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시편 23편의 다윗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여호와 로이
시 23:1-6 / 박덕기 목사
여러 주일 동안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고유한 성호와, 그 밖의 하나님의 다른 별호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뜻을 깊이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나님 자신과 동일시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 곧 하나님의 모든 성품들을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서 보다 더 잘 알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깊이 연구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하나님의 이름들이 무엇입니까?
엘. 엘리욘. 엘로힘. 엘샤다이. 아도나이. 야훼. 그리고 야훼와 합성된 이름들로 ‘여호와 쯔바오트’ ‘여호와 이레’ ‘여호와 라파’ ‘여호와 샬롬’ ‘여호와 마케’ ‘여호와 삼마’ 등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또 다른 별호인 ‘여호와 닛시’와 ‘여호와 로이’라는 이름을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여호와 닛시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과 아말렉 족속과의 전쟁에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에 대적한 첫 번째 적국이었습니다. 출 17:8에 보면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고 했습니다. 왜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먼저 공격을 하였을까요? 아말렉인들은 장자의 유업과 축복을 야곱에게 빼앗긴 ‘에서’의 후예들로서, 그들은 항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 무리들이 자기들이 살고 있는 옆으로 지나간다고 하니 이 기회를 놓칠세라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아말렉의 침략은 큰 고통거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와 그의 신앙의 협력자인 아론과 훌, 그리고 여호수아를 세우셔서 아말렉의 공격을 격퇴하고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아말렉의 공격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모세와 여호수아였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택하시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총지휘관을 삼으셨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권능의 지팡이를 든 모세를 산꼭대기로 인도하셨습니다. 거기서 모세는 아론과 훌과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는 모세의 손에는 출애굽 당시부터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났던 지팡이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 지팡이를 쥔 손을 높이 들고, 전쟁에서의 승리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은 최초의 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는 이스라엘의 승리였으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모세는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불렀습니다. 그 뜻은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란 뜻입니다.
깃발은 그 자체로는 지극히 평범한 것으로, 그 위에 문장이 새겨져 있거나 색깔이 칠해져 있는 한 조각의 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깃발을 하나의 상징으로 볼 때, 그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고난과 역경을 뚫고 세계의 정상에 오른 젊은이들이 떠오르는 제나라 국기를 보며 눈물짓는 모습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감동을 줍니다. 그래서 깃발은 국가의 표시가 되기도 하며,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호와 닛시’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게 합니다.
1)선택의 결단을 촉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올림픽 경기 같은 때에 보십시오. 모든 선수들은 각기 자기 나라의 깃발을 앞세우고 입장하거나 퇴장을 합니다. 또 운동회 같은 때에 보면 홍군은 홍색 깃발 아래 모이고, 청군은 청색 깃발 아래 모입니다. 홍군도 아니고 청군도 아닌 중간팀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엘리야 선자자의 촉구가 무엇이었습니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지니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때의 이야기입니다. 남군과 북군이 서로 싸움으로 치열해져 있을 때에, 한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나름대로의 좋은 방법을 썼습니다. 윗도리는 북군의 옷을 입고, 아랫도리는 남군의 옷을 입었던 것입니다. 피난 가다가 유사시 남군을 만나면 윗도리만 남군의 옷을 입으면 될 것이고, 북군을 만나면 아랫도리만 입으면 되리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터를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본 양쪽 병사가 다같이 사격을 하여 결국 죽고야 말았습니다.
우리는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냐 마귀냐. 천국이냐 지옥이냐, 교회냐 세상이냐, 영생이냐 사망이냐, 축복이냐 저주이냐 중에서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승리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경축일에 길거리에 나부끼는 오색 깃발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이 깃발은 우리의 기쁨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의 기쁨을 하나님 앞에 단을 쌓음으로 나타냈으며, 그것이 곧 ‘여호와 닛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승리는 어떠한 것입니까?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의 연합군이 영국의 넬슨 제독이 이끄는 해군에게 대패하고, 워털루 전투에서도 참패했습니다. 프랑스는 패전자로서 고배를 마셨고, 영국의 온 국민들은 축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때 영국에 오래 거주하던 한 프랑스인이 영국 국적으로 귀화하게 되었습니다. 영국 국민이 된 그는 친구들에게 찾아가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친구 중 한 사람이, ‘자네가 이젠 영국 사람이 되었는데, 뭐 달라진 것이라도 있나?’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암, 달라진 게 있지. 전에는 워털루 전쟁이 나에게는 패전이었으나, 이제는 그 전쟁이 승리의 전쟁이 되었다는 것일세.’ 라고 대답했습니다. 성도들이 구원받기 전까지는 분명히 마귀에게 종속되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엡 2:2에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불순종의 아들들'은 반역하는 영, 곧 사단의 세력에 의해 조종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그분은 멸망받기로 예비 되고 패배자의 위치에 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자의 반열에 앉혀 주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장 강한 것은 돌이다. 그러나 돌을 깨뜨리는 것은 쇠다. 쇠를 녹이는 것은 불이다. 불을 끄는 것은 물이다. 물은 구름에 흡수되어 버린다. 구름은 바람에 날려간다. 바람은 사람을 어찌하지 못한다. 사람은 죽음을 향해서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런고로 죽음이 가장 강하다. 그러나 죽음보다 강한 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죽음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마귀를 이기고, 저 무서운 사망 권세까지 이기게 된 우리는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높이 들고,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며 힘차고 즐겁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2. 여호와 로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고백은 오직 하나님만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인생만이 할 수 있는 신앙 고백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부를 수 있는 인생은 오직 성도들뿐입니다. ‘여호와 로이’라는 하나님의 별호는 선민 이스라엘과 구속의 계약을 맺으신 하나님을 강조하는 별호입니다. 이는 신약 성경의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예시해 주는 별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부르는 신앙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1)하나님은 나의 지도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을 목자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그 인간적인 지도자들의 타락상을 꾸짖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고 언약하시기도 했습니다.
2)하나님은 나의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목자들이 양떼를 돌보는 일 중에 중요한 임무는, 양떼들을 악한 짐승이나 위험한 환경에서 보호하고 구해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의 압제와 광야의 위험에서 건져내신 구원의 목자로 비유했습니다. 이와 같이 목자로 비유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3)하나님은 나의 인도자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성부 하나님을, 신약 성경은 사망과 심판의 자리에서 영생 구원의 자리로 인생들을 인도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합니다. 이처럼 여호와 로이라는 별호는 하나님을 내 삶의 지도자요, 구원자요, 또 인도자로 믿는 성도들만이 신앙으로 고백할 수 있는 아름다운 별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자 되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1)영원한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십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다윗은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돌이켜 볼 때, 늘 자기 백성들에게 쉴 만한 삶의 터전을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 민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 다윗을 통해 중근동의 최대 강대국으로 만들어 주셨으며, 다윗 자신의 삶에도 수많은 환난과 고초가 있었지만, 그 때마다 모든 것을 은혜롭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안에서, 성도들의 영원한 안식의 터전을 제공해 주시는 목자임을 확신해야 하겠습니다.
2)영혼을 치유해 주십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성도들에게 하나님만이 베푸실 수 있는 은총은 치유의 은총입니다. 인생의 병중에 가장 무서운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키엘케에골은 하나님의 사랑과 단절되는 죄는 인생들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고 했습니다. 다윗 자신도 한 때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 때문에 죄의 길로 깊이 들어간 적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 회개의 길로 인도해 주셨기에, 죄의 병마에서 그 삶을 치유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시시 때때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으로 성도들의 죄를 책망하시고, 죄악의 깊은 골수까지도 치료해 주시기에, 우리가 영생의 푯대를 바라보고 전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자 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신앙은 어떠해야 합니까?
1)자족해야 합니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고백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섬기는 성도만이 할 수 있는 자기 삶에 대한 확신입니다. 선한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본 성도들은 사도 바울처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자족할 수 있는 것입니다.
2)담대해야 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와 같이 삶의 난관과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때로 양떼들에게 좋은 안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먼 길을 가야 할 때가 있었는데, 이리 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음침한 골짜기, 또는 메마른 광야의 산등성을 넘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정의 끝에는 쉴 만한 물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 삶의 위기와 역경 속에서도 목자처럼 늘 내 곁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고 강하고 담대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3)승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승리의 잔칫상, 영화로운 기름, 축배, 이 모든 삶의 승리의 상징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삶의 말년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했고, “주께서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을 의지하고 따르는 우리들에게도 반드시 이러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여호와 닛시’와 ‘여호와 로이’라는 하나님의 별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레미제라블'의 작가로 유명한 빅톨 위고는 이 소설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오늘 내가 사는 목적은 싸우는데 있다. 내일 내가 사는 목적은 이기는데 있다. 그리고 일생동안 사는 목적은 잘 죽는데 있다.’ 그는 이처럼 인생은 싸움이라고 말했습니다. 지상 교회의 다른 이름은 전투 교회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 갈 때까지 많은 싸움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질병과 싸워야 하고, 가난과 싸워야 하고, 성도를 괴롭게 하는 사탄과 싸워야 하고, 세상 유혹과 싸워야 하고,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여호와 닛시의 신약적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승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의 승리에 대한 예언적 교훈입니다. 모세가 산꼭대기에 올라가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높이 들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인류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손을 높이 들고 아버지께 기도하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연상하게 하지 않습니까? 모세가 승리를 기뻐하면서 ‘여호와 닛시’라고 외친 것은, 십자가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개가를 부르신 주님의 최후 모습을 연상키에 충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호와께서 만민을 위하여 세우신 승리의 깃발입니다. 사11:10에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호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과연 ‘여호와 닛시’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주님을 쳐다보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 주님께서 하신 말씀,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신 승리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여호와 닛시의 깃발을 높이 들고서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죄악을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사탄을 이기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2003년 3월 2일 이 시간까지 인도해 주신 ‘여호와 로이’되신 하나님께서, 금년 한 해 동안도 여러분을 인도해주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평생에 선함과 인자하심으로 함께 하시다가, 위에 있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우리의 목자장 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여호와! 나의 목자
시 23:1-6 / 김영대 목사
성경 전체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장이 있다면, 아마 시편 23편일 것입니다. 글을 모르는 유치원 아이도 이 시편23편을 암송하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인생의 황혼을 바라보는 노년층에게도 시편 23편은 많은 사랑과 위로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말 한글 성경 번역본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성경은 개역판이라고 합니다. 공동 번역, 새 번역, 현대인의 성경, 표준 새번역, 개역개정판 등 많은 번역본들이 나와있습니다. 오는 9월부터는 우리 교회의 공 예배시 개역개정판 성경으로 말씀을 봉독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편 23편은 아마 성경에서는 유일하게 지방(地方)방언으로 번역된 장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시편 23편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북한 등 여러 지방 사투리로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해당 지역 분들을 특별 낭독자로 초청하여 여러분 앞에 지방 방언으로 된 시편 23편을 낭독해 드리겠습니다. 아직 이북 버전은 구하지 못했습니다.
경상도: 이민선 집사
충청도: 장순태 권사
강원도: 심옥랑 집사
전라도: 장은모 집사
마음에 확 와 닿으십니까?
다양함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각각의 방언이 가지고 있는 맛이 다르고 색깔이 달라 이 시편 23편을 더 잘 이해하게 하고 풍성하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지방 버전을 읽으면서 누가 장난으로 만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읽어보니까 전혀 그렇지가 않았어요. 오히려 개역 성경보다도 어떤 부분은 더 정확하게 번역했어요. 아마 시편 23편을 굉장히 많이 묵상한 사람들이 이 지방 번역본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 시편 23편은 다윗이 지은 시(詩)입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양을 쳤기 때문에 양과 목자의 관계를 누구보다 더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편이 그의 소년시절에 쓰여졌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짧은 시(詩) 속에는 인생의 깊은 고민과 위험을 지난 흔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추측하기를, 아마 이 시편은 다윗이 상당한 고난을 겪은 후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고 원수의 목전에서 수욕을 당하는 아픔을 맛본 후에 기록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다윗은 많은 고난을 겪은 사람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했지만, 다윗만큼 고난을 많이 당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골리앗을 물리쳐 다윗의 인가가 높아지자 장인인 사울 왕이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 하므로 10여년 이상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 굶주리기도 했고 때로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친 체 해야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왕이 된 이후에도 아들 압살롬이 군사를 일으켜 반역하는 바람에, 아들을 피해서 신발도 못 신고 황급히 왕궁을 빠져 나와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여러분 그 고통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또한 얼마나 사람들 보기에도 창피했겠습니까?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자기 목숨을 노리고 자기를 쫓아다니니 말입니다. 또한 자기의 은혜를 입었던 신하들 가운데도 아들 편을 들어서 자기를 죽이고자 쫓아다니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바로 시편 23편은 그런 모든 고난을 겪은 다음에 지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편은 인생의 고난이 무엇인지 아는 모든 사람의 것입니다. 이 시편23편은 단순히 조잘거리는 유치원생들이 외우는 그런 얕은 시가 아닙니다. 오늘 여기 앉아 계신 분들 가운데도 자녀의 반항을 경험해 본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혹은 가족들의 불화로 가정이 흔들리는 체험을 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거친 풍파로, 실직과 부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 건강을 잃어서 좌절가운데 무릎 꿇었던 사람도 계실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여러분의 삶 전체가 흔들려 인생의 위기와 삶의 풍파를 겪어보았다면 바로 이 시편은 당신의 것입니다. 이 시는 편안하게 왕자로 태어나서 왕이 되었다가, 일생을 평화롭게 마친 사람이 쓴 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다윗의 고백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주님! 다윗의 고백 속에서 나를 발견하게 도와주십시오. 나도 다윗과 같이 삶의 고난 가운데서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저를 변화시켜 주십시오!" 이것이 이 시편을 대하는 저와 여러분의 기도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시의 첫 머리에 자신의 중심생각을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우리가 다윗의 험난한 인생과정을 생각지 아니하고 이 1절만을 보면 아!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에 아무 부족함이 없었던 모양이구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즉, 다윗의 생애는 늘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에서만 놀았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4절과 5절에 나타나듯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원수의 목전'이라는 두 구절은 하나님이 다윗의 목자이셨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나 불행을 만나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이 목자이시고 나는 그의 양이기 때문에 나의 인생에는 전혀 불행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목자이심에도 여전히 다윗은 여전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야 했습니다. 원수의 목전에 서기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궁핍과 배반 인생의 풍파 가운데서도 전혀 부족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유학시절 미국에서 어느 날 이 시편 23편 1절 말씀을 읽다가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많이 읽고 또 외우기도 한 말씀인데, 그 날 시편 23편 1절은 제게 다른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주 단순한 진리가 깨달아 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진정 나의 목자라면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저는 여러 가지로 부족감을 많이 느끼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아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이 깨달음은 제게 충격이었어요.
만일 내 마음속에 공허함이 있고, 불안함이 있고, 갈망이 있고, 절망과 외로움, 좌절, 만족감이 없다면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내 환경이 어떠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다윗은 고백하고 있는 겁니다. 어느 날 저는 이 사실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저는 제 환경 을 탓했고, 고지식한 교수를 탓했고, 이기적인 학생들을 탓했고, 때론 인도해 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탓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 시편23편 1절이 말씀이 새롭게 내게 다가왔습니다. 왜 내 마음에 곤고함이 있는가? 왜 부족감이 있는가? 그 해답을, 그 이유를 하나님은 가르쳐 주셨어요. 그것은 환경 때문이 아니라 제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요.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어 있지 않기에 제게 부족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당시 저의 인생의 목자는 박사학위였어요. 박사학위를 받게 되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하는 생각 말입니다. 그러니 박사학위를 받는 과정에 방해되는 모든 것이 불만이고 답답한 거예요. 바빠 죽겠는데 공항 데려다 달라고, 통역해 달라고, 병원 데려다 달라고, 심방 와 달라고 하는 모든 것이 귀찮은 거예요.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특별히 영적인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목사로서 얼마나 감사하고 즐거운 일인지를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만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어떤 것이 우리의 목자가 되어 우리를 인도한다면, 우리는 결코 이 땅에서 만족감이 없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일과 직업이 우리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일하며 쉬지 못하는 일 중독자가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재물이 우리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늘 불안할 것입니다. 재물이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 이 재물이 날아가면 어떻게 하나라는 불안감을 끊을 수 없을 거예요. 부족감이 있을 겁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의 목자가 된다면 우리는 늘 그 사람으로 인해 실망할 것입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여러분의 목사인 이 목사라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인생의 한계입니다. 사람은 우리를 늘 실망시키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라면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내게 부족한 일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전혀 부족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 되시며 풍요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우리의 목자이시기만 하면 문제는 해결되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그런데 왜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살면서 쉬지 못하고 힘들어하며,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불안에 사로잡혀 스트레스를 받으며 이 세상을 살아갑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시편 23편을 잘 외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전히 내 아내를 먹여 살리는 것이 누구입니까? 나입니다. 내 자식의 학비를 대는 것이 누구입니까? 나입니다. 내 삶을 책임지는 것이 누구입니까? 나입니다.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 아파트를 유지하는 것이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 자가용을 유지하는 것이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 사업을 유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모든 짐을 나 자신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이렇게 초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마 11:28)"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잘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는 줄 알고 발버둥치며 살고있습니다. 저도 제 실력으로 학위를 마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무진 노력도 하고 밤도 새고, 자료하나 찾으려고 자동차로 4시간 걸리는 워싱턴 국회도서관을 몇 번이나 갔다오고 했습니다. 얼마나 신경을 썼던지 고개가 돌아가질 않고 팔을 움직일 수 없어 톨게이트에서 손을 올려 돈을 낼 수도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편 23편 1절 말씀을 새롭게 깨닫고 나서는 마음에 자유함이 생겼습니다. "주님! 제가 학위를 마쳐야 함이 목자 되신 당신이 보시기에 필요한 것이라면 마칠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 때부터 마음에 평안이 생겼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셨습니다. 또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셨습니다! 유니온 신학교 학생이 아님에도 그 학교의 잘 꾸며진 기숙사로 인도하셨고, 그곳에는 저의 공부를 돕는 사람들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공부의 푸른 초장이 펼쳐졌고 마음에 평안을 갖게 되어 박사고시 종합시험에도 떨리지 않는 쉴만한 물가와 같은 마음이 내게 생겨났습니다. 결국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교육학으로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가진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미 말씀드린 대로 다윗은 수많은 고통과 삶의 풍파를 겪은 사람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본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뉘라서 평지만을 달리겠습니까? 뉘라서 그 인생 앞에 환한 대로만 펼쳐지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에 다 평안해 보여도, 상담을 해보면 그 마음속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남몰래 경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남몰래 눈물 흘립니다. 남몰래 괴로워합니다. 누구하나 나를 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절망감 속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요,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때로 이 사망의 골짜기가 질병으로 실직으로 부도로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로 다가옵니다. 때로 남편이 아내가 그리고 자식이 원수로 우리의 인생 앞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때로는 믿었던 친구와 이웃이 배반하여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요. 왜냐하면 주의 막대기와 주의 지팡이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풍파를 당해 보셨습니까? 또한 풍파가운데 계십니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풍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질병,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가정의 문제 등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목자 되신 주님을 신뢰하고 지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한 손에는 막대기를 드시고, 다른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드시고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무사하게 지나가게 하십니다. 믿는 자에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합력하여 그 사랑하는 자녀에게 복이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편은 다윗만의 시편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시편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고백해야 할 말 "여호와! 하나님 당신은 나의 목자십니다.“
나는 만족합니다
시 23:1-6 / 박지온 목사
오늘 건축에 대한 것을 아마 프로젝트를 통해서 지난번처럼 구체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아마 좀 보여 드리고 기도하고자 합니다. 지난번에는 임시로 그 건축 설계를 준비를 해 가지고 그렇게 했습니다 만은, 이번에 아마 건축위원회에서 구체적으로, 건축 설계 자료를 정식으로 결정하고 그리고 또 구체적인 설계는 또 들어가겠습니다 만은, 여러분들에게 어떤 모양의 교회로, 어떤 내용의 교회로 설계가 되어지는가를 말씀드리고 아마 기도하려고 그렇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아마 오늘 이 예배 마치고 난 후에 잠깐 모형도도 보고 이제는 그 확정 내지는 외형은 거의 뭐 여러분들이 특별히 온 교인들이 '뜯어고치자!' 안 그러면 그대로 확정이 되고 내용은 조금 각 부서에 의견을 따라서 또 수정하도록 그렇게 되겠습니다.
하나 하나 이렇게 건축이 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그 크신 사실을 날마다 여러분과 제가 함께 확신이 되고 또 감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건축 설계를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이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그렇게 세밀하게 설계를 하더라 구요. 세밀하게... 그래서 그 설계하는 과정이 아마 그 대략 설계가 마쳤습니다 만은, 그걸 구체적으로 설계하는 과정이 한 2개월, 3개월 또 걸린다 그래요. 이제 확정이 되었기 때문에 아마 11월 달까지 건축 설계를 완전히 마친다고 그렇게 들었는데 뭐 얼마 들어가고, 뭐가 얼마 들어가고 구체적으로 그렇게 설계가 되어집니다.
그래서 모양이나 모든 면이 그 다음에 설계하고 난 후에 교회가 건축되어지는 과정에서 어렵다 힘들다 상관없이 일단은 그대로 되어집니다. 우리 그 건축 위원들이 전국에, 또 경북 중심으로 해서 또 돌아다니면서, 어떤 교회는 설계를 완성하고 이제 그 건축을 하도록 맡겼는데 사업체가 건축을 맡아서 하다가 부도가 나서 거의 건축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붙들고 건축을 했는데도 설계 도면대로 하니까! 또 그대로 나오기도 하고...
하는 과정에서 문제나 사건들이 나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기어코 설계를 하고 설계대로 건축을 하는 과정에서 어렵고 힘든 사건이 있을 수는 있지만 결국 설계대로 이어집니다. 나는 그 이 과정 속에서 또 설계도를 집에 저 개인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또 그 설계를 다 완성하고 그 설계대로 계략 설계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일 먼저 받고는 여기에 와 가지고 이 교회를 지을 때도 그랬습니다 만은, 갖다 놓고 하나님 뭐 내가 압니까? 우리 뭐 압니까? 설계는 이렇게 해 놓았는데 하나님이 알아서 인도하십시오.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를 하면서 참 감사를 했습니다.
인간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힘들어도 기어코 설계를 해 놓으면 설계대로 집을 짓습니다. 집을 짓는다는 목표가 바로 되어 있으면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여러분과 저를 그냥 내 보내지 않습니다. 벌써 박 지 온 그럴 때는 목사가 되게 하시고, 그 다음에 송현교회 목사가 되게 하시고, 송현교회를 통해서 이렇게, 이렇게 이루어 가시겠다. 누가 설계합니까? 하나님이 다 설계하십니다.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바로 이 속에 들어옵니다. 이걸 가지고 모든 문제 해결자다. 예수 그리스도로 이 속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혹은 뭐 조금 아프다! 조금 힘들다! 계획입니다. 나는 그 몸이 아프다 이럴 때에 이걸 통해서 사실상 많은 것을 깨달았다 보다도, 뭔가 그동안 희미했던 부분이 굉장히 확인되는 것을 많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걸 통해서 제가 전국에 특별히 치유 사명자 대회나 치유하면서 전 세계까지 나가서 여러분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이 명백하게 내가 고백할 수 있었던 배경이 내가 아픈 것을 통해서 이 사실을 믿었다기보다도 사실로 와서 부닥쳤습니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의 내용이지만 그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보여주신 그런 역사!
그래서 바울이 일평생 그 뭔가 괴로운 그런 문제! 사단의 가시! 그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좌우하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역사를 전 세계에 이루었기 때문에 어떤 문제 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가 설계변경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여러분들 혹시 분명히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뭔가 문제가 있다. 계획입니다. 가만히 돌아보세요. 그 일 때문에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가 내게, 여러분에게 이루어진 사실을 보게 되거든요. 그래서 굳이 고난 받아야 우리가 눈이 열린다. 그 말 안 해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우리의 성품 잘 아시잖아요. 인도를 해 나가시는 그런 과정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뭘 또 한번 붙들어야 되느냐 하면요. 그리스도를 모르면 아무리 경건해도 종교입니다. 종교인 그러면 우상 숭배라! 우상 숭배라 말하기가 곤란하기 때문에 종교인이다! 그랬습니다. 종교인이라는 것은, 뭐 우리가 자장 대표적인 종교인이다! 다른 것이 없어요. 뭐 똑같습니다. 불교인이나 그 다음에 우리 그 무속배경! 다 똑같이 종교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역시 종교인입니다. 아무리 경건한 생활을, 혹은 착한 일을 많이 해도 모든 것이 종교인입니다. 뭐가 없으면? 그리스도가 없으면 희미한 만큼 그리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니 우리 예수 이름 붙잡았다! 그래도 희미한 만큼, 그리스도가 희미한 만큼, 뿌리를 내리고 체질이 안 된 만큼 이렇게 빠져나갑니다. 종교인은 결정적인 순간에 그리고 위기를 만나게 될 때에 기도는 하지만 특색이, 그러니 종교인 특색이 늘 그 어려운 것 같아요. 문제 만나면 기도는 해요. 기도는 하지만 기도하면서 인본주의 씁니다. 대책세우고 기도하면서 막 기도하는 중에도 하나님께 맡기고 나가면 될 것인데 자기 수단을 쓰고, 기도하면서 막 방법 생각하고 그리고 막말로 해서 기도하면서 싸우고... 부부 싸움 할 때에 보세요. 확실히 기도하면서 싸웁니다. 우리 남편 막 '좀 바꾸어 달라!' 그러고 자기가 바꿔야 되는 것은 모르고, 기도하면서... 이게 종교인의 특색이더라 구요.
왜? 하나님 앞에 기도로 맡겨버리면 되고 그 손에 우리가 의지해 버리면 되는데 그게 안 되니까!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과 권세를 의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 결국은 뭐냐?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불신앙입니다. 불신앙의 배경이 뭐냐?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참 불쌍하다기보다도 우리가 정말 기도하고 말세에 교회와 우리 자신들이 참 기도해야 될 것이 복음이 체질이 안 되고 복음에 확실히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결국 우리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 하면서도 종교 속으로 빠지는 겁니다. 복음이 안 되는 것만큼 빠지는 겁니다.
빠지게 되면 어떤 결과가 오느냐 하면, 꼭 중요한 문제가 부닥치면 '아니네!' 다른 데로 갑니다. 사건이 부닥치면 다른 데로 갑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슴에 자기도 모르게 자꾸 불평과 불만이 자꾸 나오고 이런 것이 나오면요. 종교인입니다. 예수 믿어도 그것은 복음이 바로 안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얼마나 사단이 말세에 계속해서 우리에게 침투해 들어오는 일이기 때문에, 참 이 복음의 역사를 확실히 붙잡고 그 누릴 수 있는 가장 축복된 길을 하나님이 말씀 하셨는데, 그것이 우리가 잘 아는 데로 히브리서 4장에 나오는 말씀 아닙니까! 은혜의 보좌 앞에 날마다 하나님께 담대히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 그럴 때에 또 새 힘 얻는 것이 다 복음입니다. 우리가 한번 들었다! 날마다 아무런 문제없다! 아닙니다. 늘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그래서 날마다 말씀 듣고 날마다 말씀들을 때마다 새 힘 얻고 이렇게 하는 것이 복음에 뿌리내리는 중요한 길이요. 하나님이 축복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안 되게 될 때에 결국은 어떻게 오느냐 하면요. 교회 속에서 이런 어떤 그 복음에 뿌리가 내리지 못할 때에 결국은, 결정적인 어떤 순간이 왔을 때는 착한 일을 하기 위해 애를 썼고, 노력도 하고, 선한 일도 하고 그랬지만 어떤 문제가 있느냐? 결정적인 그런 어떤 문제가 왔을 때에 사악함으로 빠져 버립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에서 대표적인 사건이 뭐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다윗에 반대되는 사울의 문제입니다. 사울이 얼마나 겸손했고 그리고 왕으로 뽑힐 정도로 칭찬 받았고 그렇게 했는데도 결국은 뭡니까? 복음을 확실히 붙잡지 못하고 하나님의 그 역사를 확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뭡니까? 자기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에 자기가 염려하고 자기 자식을 염려하고 후대를 염려하면서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축복을 받은 그리고 그렇게 국가에 대해서 헌신 충성하는 다윗을 죽이려고 몸부림치며 따라다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결국은 뭐가 들어왔습니까? 악신이 붙었습니다. 이 종교인 배경은 뭡니까?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왜 사악함이 빠지느냐? 사단이 역사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참 주의해야 될 것은, 복음에 뿌리를 놓치고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큰 교회 세웠다! 이게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의 뿌리를 놓치면 놓칠수록 어떤 문제가 오느냐? 교회 안에서 평안을 못 얻고 말씀을 바로 붙잡지 못하고 이렇게 될 때에 사단의 배경이 되니까! 교회가 결정적인 문제가 올 때에 사악함에 빠져버립니다. 이 교회 싸우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거든요. 여러분 제 정신으로 싸우는지 압니까! 바로 이 배경입니다.
그래서 정말 그 앞으로 교회가 건축되어진다! 그럴 때에 나는 밤에 늘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앞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실 때에 끝까지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일단 우리 교회에 왔다! 말씀을 붙잡고 끝까지 복음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이 설 수 있는 교인들 이게 바로 축복 중에 축복이다! 이 이상 더 다른 것이 없구나! 그래서 내가 말할 수 있는 비결이 있다 그러면, 이 말 이외에 더 할말이 없구나! 그래서 오늘도 제가 메시지를 들고 나와서 뭔가 생각을 하면서 다른 말이 필요 없구나! 여기서 치유가 나오고 여기서 모든 기도 응답이 나오게 되는구나! 이것이 지속되지 않는 한 내가 잘 하는 것 같지만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이 알면서...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면 제목을 제가 뭐라 그랬습니까? "나는 만족합니다!" 이랬거든요. 그래서 사실은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성경을 그대로 옮기려고 그러니 너무 길어 가지고 '나는 만족합니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솔직히 만족합니까? 대답이 시원찮네! 무슨 불평이 이렇게 많습니까! 사람이 뭔가 이렇게 만족하고 감사가 안 나오면 자기도 모르게 사악해지게 되어있어요.
제가 이 뭔가 몸이 안 좋고 어떤 경우냐 하면, 밥맛이 없어지더라 구요. 밥맛이 없어지니까 나도 모르게 뭐,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건 다 떠나 버리고... 그래서 사람이 뭔가 밥맛이 없고 이러니까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이잖아요. 그러면 아침에 밥을 이렇게 받게 되면 밥맛이 없어지니까! 그 옛날에 잘 먹던 밥인데도... 그리고 정성스럽게 밥맛이 없으면 신경 써서 안 해 놓습니까! 그러면 괜히 숟가락 가지고 푹푹 찔러 보고 그리고 또 '반찬이 뭐 이러냐!'생전 안 하던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옆에서 보면서 그렇게 준비해 와서 그러면요. 진짜 신경질 나는가 봐요. 그러니 또 한마디하거든요. 그러면 또 붙는 거지...
여러분 우리가 정말 하나님 앞에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사건이 안 되면요. 범사에 우리의 삶은 불평과 싸움과 문제로 터져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를 세워놓고 이런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뭐라 그러느냐? 내가 너를 만든 것은, 창조한 것은 나를 내가 찬송을 받으시기로 여러분 통해서 이사야에서 말씀한 것처럼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께 찬양을 하시기 위해서, 찬송을 받기 위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만들어 놓았습니다 만은, 이 사실이 확인이 안 되니까! 늘 뭔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축복된 은혜를 못 누리니까, 뭐냐? 불평과 불만과 많은 뭐 닥치는 데로...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죽기까지 절대로 무슨 사건이 생겨도 불평을 안 해야 되겠다. 사실은 제가 불평을 많이 하는 편이거든요. 왜냐하면, 어릴 때부터 불평할 수밖에 없는 그런... 늘 뭔가 이 비판자가 되니까! 제가 이 중직자 가정에서 보는 게 비판이고 또 들리는 것도 뭔가 교회에 대해서 중직자 가정이나 이렇게 있으면요. 자연적으로 평신도는 단순하게 뭐 그렇게 보는데, 어릴 때부터 뭐 주변에 들려 오는 것이나 앉으면 뭐 그런 이야기 나오니까! 여러분 아마도 그 교회 평신도는 잘 모르는데요. 중직자들 모여 보세요. 뭐 교회에 대해서 그렇게 말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어릴 때부터 들으니까! 그걸 나는 그때는 모두 걱정하면서 하는 이야기 같지만은, 나한테 들릴 때는 그런 것이 들리면서 뭐가 오느냐 하면, 교회에 대해서 나도 모르게 비판의식을 가집니다. 여러분들이 잘 알아들어야 될 것이 뭐냐하면, 교회에 대해서 주변에 이런 계속해서 비판하는 소리를 듣게 되면요, 아무리 내가 은혜 받고 싶어도 나도 모르게 머리가 이 구조자체가 비판하는 구조로 바꾸어집니다. 고쳐야 됩니다. 절대 축복이 안 됩니다. 그래서 물론 제가 늘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런 그 비판 구조가 있기 때문에 설교 할 때에 죄 지적은 참 잘 합니다. 꼭 꼬집어서! 그러면 여러분도 아마 들으면 '맞아, 맞아!' 그렇지만은 대안이 없어요. 또 하나님의 축복이 안 됩니다.
그래서 죄 지적은 하나님의 은혜 받으면 저절로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설교 할 때에 이걸 없애는데 상당히 많은 시간이 가더라 구요. 여러분들에게 죄 지적하는 것! 이것은 내가 뭐라 그럴까? 안 한다기보다도 복음적인 것이 아니더라 구요. 이 비판하게 되고 이러니까! 그렇게 되면 자꾸 설교가 비판하는 설교를 듣게 되면 여러분들도 그런 것만 자꾸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절대로 비판하는 이야기는 안 해야 되겠다. 혹시 누가 비판하는 소리 옆에서 하거든 하지마라 그래요. 그걸 들으면 뭐가 되느냐?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게 되요. 불신앙이 와요. 누가 들어오느냐? 사단의 통로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잘못해도! 잘못하면 기도하면 되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돼요. 하나님께서 그걸 다 이루어 주시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 자식들이나 혹은 그 남편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여러분 잘 아셔야합니다. 이것이 되면요.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하고 그 다음에 늘 그렇게 하면 비판할 일이 없어져 버려요. 비판하려고 보니까 비판이 나오는 것이지. 체질이 되어서 나오는 것이지. 안 그러면 얼마나 감사합니까! 남편요 비판할 것 뭐 있습니까! 그렇게 수고하면 땀흘리면서 자식들을 위해서 아내 위해서 애쓰는 것 보면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게 안 보이거든요. 비판하면 그 머리가 없어져 버립니다. 아내 위해서 눈만 뜨면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비판하는 눈이 없어져 버려요. 그런 게 없어져 버립니다. 그런데 그것이 생각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에서 기도할 때마다 뭐냐?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참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예수 믿고 생각이 안 바꾸어졌다! 그것은 복음이 안 되어서 그래요. 복음이 뿌리가 내리면 여기서 모든 것이 그렇게 나오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부족함이 없다라는 나는 만족하다라는 이 말이 어디서, 어디서부터 나올 수 있었던 것이냐? 다윗처럼 고생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장인한테, 그리고 나라에 특수부대를 동원해서 쫓겨다니면서도 계속해서 이 시편이 이런 감사와 이런 만족이 도대체 어디서 나올 것이냐! 그러니 다윗의 이 어려움 속에서 23편을 이렇게 나올 때에 도대체 이 말이 어디서 나올 것이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늘 첫 번 말씀 보면 바로 그 말씀이 나오죠. 1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뭐라 그랬습니까? 관계입니다! 다윗은 이 부족함이 없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 뭡니까? 관계가 확실하게 깨달아 진 겁니다. 이걸 가지고 믿음이라 그러죠. 여호와와 다윗의 관계 무슨 관계입니까? '목자와 양의 관계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구약 시대 때는 양은 목자의 음성밖에 몰라요. 그리고 목자가 가는 데로 따라갑니다. 양에게는 자기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양을 깊이 연구는 못해도 이렇게 성경학자들이 해석한 바로서는 양은 아주 지독한 근시래요. 그래서 여러분 양떼를 끌고 갈 때에 양은 앞에 가는 양의 뒷발만 보고 따라갑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제가 이스라엘 그 쪽 지역에 갔을 때에 저 산에 뭐냐하면, 줄이 쭉 나있어요. 줄이! 양은 이렇게 흩어져 가는 것이 아니고 양은 쭉 한길로 가더라 구요. 줄이 있을 때 가는데 보니까 산에 이렇게 가면 산 중턱으로 여러 갈래의 줄이 있어요.
줄이 있는데 그 줄이 왜 생기냐 하면요. 양이 딱 앞장선 그 조장인가 봐요. 조장을 하나씩 세우는데 조장만 딱 세워 놓으면 그 뒤만 따라갑니다 뒤에 것이 그 다음 그 뒤에 것은 앞의 발끝만 보고 따라 갑니다. 그러면 또 다른 조장은 밑에 줄에... 그래서 발자국이 여러 개 나지 않아요. 쭉 쭉 마치 그 토끼 길처럼 산에 줄이 서 있는 것을 봤습니다. 지독한 근시라서 그래요. 그리고 양은 목자가 딱 인도하면 인도하는 그대로 따라가는 겁니다. 양과 목자에 있어서 유대인들은 너무 속성을 잘 압니다. 우리는 그걸 잘 모르지만 너무 잘 알거든요.
그래서 그 다윗이 뭔가 다른 아내를 취하고 이제 그 비유를 들 때에 양의 비유를 들어서 같이 자고 같이 먹고 그러면서 비유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가보니까요 같이 자요 여러분 우리는 그 개새끼나 같이 자고 있지, 뭐 그런걸 상상을 못하거든요. 요즘은 뭐 돼지 새끼도 같이 자더라 만은, 아직까지 뭐 이해가 잘 안되겠습니다 만은, 그런데 그들은 양을 품고 낳으면요. 진짜 새끼를 집에서 놓고 그래요. 그래가지고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하더라 구요.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런 배경을 너무 알기 때문에 목자 잘 만났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뭐까지 한다고 그랬습니까? 생명까지 내어놓는다! 그랬거든요. 이 배경을 잘 알기 때문에 목자와 양이다. 양으로서는 최고의 목자가, 좋은 목자 선한 목자 만났다! 다 끝나 버립니다. 양의 모든 것이 다 끝나 버립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서 뭐라 그랬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목자와 양의 관계! 이 관계가 다윗에게는 확실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다 끝났습니다. 옛날에는 목자와 양의 관계라 그럴 때에 시대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그 하나님이 인간을 다스려 나가실 때에 개개인에게 인간을 다스려 나가는 역사였고 이스라엘을 선택했습니다. 나라를 선택해서 이스라엘의 국부입니다. 나라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신다고 그럴 때에 성령도 나라 위에, 말하자면 각 사람 위에 안에 아니고 그냥 이렇게 함께 나라 전체를 이끌어 가시는 그런 어떤 배경이 많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파라클레토스' 라는 원래 말이 성령이라는 것인데 '안에' 라는 말보다도 그 말이 옆에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마 그런 배경이 더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성령이 어디입니까? 안에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그게 아니었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성령이 왔다 갔다 하십니다. 기분 좋으면 오고 이게 안 되겠다 싶으면 떠나가고... 그래서 다윗이 범죄하고 난 후에 가장 염려했던 기도가 '하나님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어가지 마옵소서!' 이 기도가 다윗의 기도였습니다. 왜? 성령 거두어 가면 다윗은 안 되는 줄 아니까! 이런 배경에서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늘 관계, 관계 말씀을 했습니다 만은 모든 문제가 여기서부터 해결이 됩니다. 이게 잘되어야 돼요.
여러분과 저는 지금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는 무슨 관계입니까? 무슨 관계입니까? 아버지! 아저씨 아니죠. 혹시 여러분 기도할 때에 '아저씨!' 그럽니까? 아니잖아요. '아버지!' 믿어 버려야 돼요. 이 신앙이 확실히 와져야 여기서 믿는 만큼 확인되는 만큼 해결되는 겁니다. 이것이 잘 안 되는 것이 바로 오늘날 문제예요. 여러분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천지 만물을 다 다스리시고 나와 여러분 오장 육부를 운행하시고 다스리시는 분 아닙니까! 그러면 뭐가 문제입니까? 이게 안 되니까! 이게 불신앙이 돼요. 이게 절대로 안 믿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안 믿는 배경은 아닙니다 만은, 워낙 안 믿는 것이 체질이 되어서 그러는 건지 모르지 만은, 제가 기고할 때 이렇게 보면요. 뭘 느끼느냐 하면, 아버지는 그러니까 아침에 아들이 딱 눈을 뜨면서 아버지를 흔들어 가지고 '아버지 맞아!' 어머니를 흔들어 가지고 '어머니 맞아!' 이렇게 묻는 아들이 없습니다. 응당히 뭐, 아버지면 아버지고 어머니는 어머니고... 너무 믿기 때문에 너무 태연하죠. 아버지, 어머니 함께 계신다! 그걸로 끝입니다. 우리는 뭔가 이게 안되니까 막 악을 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기도 할 때에 물론 그렇게 기도한다 나쁘다 이전에 정말 믿으면 뭐 그렇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뭐냐하면요.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말끝마다 아버지를 붙이더라 구요.
그래서 내가 속으로 아버지가 얼마나 안 믿어지기에 한번 꼽아 봤어요. 아버지 소리 몇 번 하는지! 제가 이 말하는 배경은 여러분 솔직히 아버지라 그러면서도 이 관계가 바로 안 되어있습니다. 안 믿어요. 믿었다. 다 끝난 것 아닙니까! 여기서 모든 문제, 구체적으로 해결됩니다. 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루는 유일한 길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그리스도 확실히 붙잡고 여기에 뿌리내리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체질이 되어야 여기서부터 자연스럽게 전체가 다 해결이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이 해결 된 것 같고 쉽게 된 것 같지만 이게 잘 안되더라 구요. 그래서 이 관계가 되면요. 자연적으로 뭐냐? 목자와 양의 관계다. 목자만 인도하는 데로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다른 것들을 것도 없어요. 자연적으로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 혹시 그 뭐 아이들을 키워봤지만은 그런 배경을 조금만 가지게 되면요. 우리 기도하는 문제도 거기서부터 다 해결되죠. 자연적으로 그렇게 되면 성경 말씀을 읽게 되는 것도 자연적으로 하나님 말씀 듣는 것, 여러분 주일날 봐서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 시간입니까? 들려지게되어 있어요. 왜? 못 들으면 다른 길로 가게 되니까! 인도 받을 수 있게 이건 생명 걸고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날마다 오늘 듣는 은혜가 다르고 내일 듣는 은혜가 다릅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 은혜 주시는 역사 ! 바로이게 오늘 성경 그대로 날마다 담대하게 나가는 역사! 그래서 주일날 계속해서 자꾸 모이느냐? 바로 이 배경입니다. 그래서 공적인 모임에 하나님이 왜, 축복하시고자 약속했느냐? 이 말이거든요.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까! 류 목사님이 1부 예배인가, 2부 예배인가? 그러더라 구요. 울산에 가서 나이 많은 목사님인데 제가 아는 늙으신 목사님이신 것 같아요. 큰 교회를 지으시고 그랬습니다 만은, 아마 몸이 안 좋은데 암이 몸에 이제 들어왔는데, 그런데 그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 구요. 수술하시고 또 살이 다 빠졌습니다. 그런데 같이 식사를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그대로 제가 옮기면 의사가 '세 가지로 약속하자!' 그러더랍니다. 약속하면 해결이 된다! 위암, 아마 수술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첫째 '온 사방에서 말하는 의사가 많은데 절대 다른 의사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지 마라 내 이야기만 들어라!'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뭐냐하면요. 두 번째가 '뭐든지 음식을 먹을 때에 반만 먹어라!' 위를 좀 잘라 냈거든요. 절대 많이 먹지 마라! 셋째가 '자극 있는 음식은 먹지 말라!' 그렇게 이 약속만 지키면 당신 건강은 회복됩니다. 이러더랍니다. 그러면서 메시지 속에서 뭐냐하면, 첫 번째가 마음에 남더라 그래요.
나도 이게 실감이나요. 제가 이 몸이 아프고 이러니까요. 얼마나 의사가 많은지 몰라요. 내가 의사가 가서 어떻게 했다. 그것은 말도 묻지도 않아요. 그런 것은... 그러면서 이 사람은 절대 이러면 낳습니다. 이러면 낳습니다. 바른 사람이 어찌 여기 저기 그리고 다 좋아요. 들어보니까! 말합니다. 여러분 이 땅에 살면서 속이는 사단의 이야기는 얼마나 달콤한 이야기로 풍성한지 모릅니다. 오직 한 분의 말! 그 말만 들어야 됩니다.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말아야 됩니다.
오늘 여러분 이 시간 말씀들을 때에 누가 뭐래도 강단에서 말씀이 임했느냐! 한 주간 딱 잡고 기도하세요. 다른 것은 듣지 마세요. 그거 들으면 죽는 겁니다. 이걸 딱 잡고 계속해서 기도하세요. 왜?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그분이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분이 내게 축복하신 말씀으로 오늘 임하셨습니다. 이번 한 주간 붙잡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받아합시다. "하나님이 복 주시면 누가 거역하랴!" 왜? 복 주신다는 하나님인데 누가 반대합니까! 세상이 없어도 소용없어요. 오늘 여러분 이것 하나만 붙잡고 나가 도요. 흔들릴 이유가 없어요. 여러분과 저를 누가 세웠습니까? 하나님이 벌써 다 세우셨습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되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성경에 보면 이렇게 나오더라 구요.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를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렇게 되면 뭐가 오느냐 하면요. 자연스럽게 그 분이 나를 인도하시는 역사 속에 서게 됩니다. 그러니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 속에 들어오면 누가 인도하십니까? 말씀으로 성령이 인도하십니다. 그러면 그렇게 인도하시게 될 때에 그 인도하심에 풍성합니다. 그 인도하심이 여기에서부터 치유가 나옵니다. 여기서 치유가 나옵니다.
제가 이 요즘 뭐 여유보다도 너무 절박한 이 사실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 이제 희락이를 보면서 자기 어머니가 있으면 마음놓고 놀고 그리고 잠도 자고 그래요. 그리고 또 뭐 불안해하지도 않고 그런데 일단 없다! 그럴 때는 불안해합니다. 염려하고 그리고 조금 문제생기면 뭔가 상처받기도 하고 그런 게 있어요. 저희 어머니 있으면 괜찮아요. 여러분 치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사실로 믿습니까! 삶입니다. 치유가 여기서부터 나오는 겁니다. 저절로 됩니다.
오늘 여러분 이 말씀 듣는 동안에 하나님이 내 인생에 완전히 나와 함께 계시는 구나! 치유입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되는 동안에도 뭐가 나오느냐 하면요. 이 치유가 사실화되면 여러분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 기도더라 구요. 기도! 그래서 저는 그 기도라는 말을 많이 기도한다, 기도한다! 그러지만 사실은 제가 지금에 와서 고백을 한다! 그러면 조금 이상할지 모르지만 내가 인생에 제일 어려웠던 부분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고 많이 한다는 소문도 듣고 그랬지만은, 그래서 뭐 산으로 들로 기도한다! 그러고 심지어는 뭐 강단에 가서 들어 누워서 자기도 하고 그랬지만은 내 일생에 그렇게 힘들었던 부분이 기도입니다.
그러면 다락방을 하고 난 후에 되어진다는 배경을 가지고 기도는 되어진다. 기도는 저절로 된다는 그런 배경! 또 그 다음에 기도 속에서 뭔가 보니까,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걸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그 사실이 되기까지 사실은 어떤 면에서 한 10여 년 동안 나는 기도가 제일 어려웠습니다. 교인들한테 여러분은 어땠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우리 장로님들이 어땠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나는 확실히 확신하건대 여러분도 제일 어려운 것이 뭐냐? 신앙생활의 기도라고 봅니다. 이것만되면 다 됩니다. 이게 안 되는 배경이 뭐냐? 앞에 부분이 바로 안 돼요. 관계가 바로 안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뭐냐? 치유가 안 되어있습니다. 그게 아니면 기도가 됩니다. 이게 안 되면 기도가 되어질 수 없어요. 기도가 되느냐! 앞에 부분이 되는 만큼 기도가 됩니다. 기도가 되는 만큼 앞에 부분이 되는 겁니다. 이게 연관성이 있더라 구요. 그런데 제가 기도에 대해서 조금 말씀하고 싶은 것은 너무너무 자연스러운 배경인데, 그 동안 이게 되어진다는 배경이 잘 안 되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준비 하셨다는 말씀이 이게 실제가 잘 안되거든요. 받아합시다.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이미' 몰라요?, 알아요? 하나님이 다 아시는데 그러면 기도는 또 뭐냐? 그러니 있어야 될 것을 하나님이 다 아시고 하나님이 다 이루어 주신다. 이것이 뭐냐? 치유가 되어야 이것이 옵니다.
그러면 제가 이 아이를 데리고 지난번에 화원에 가 가지고 이렇게 유모차를 밀고 가지 못하고 이제 데리고 갔다가 내려오는데 아이가 가는 데로 내 눈이 따라 다니는 겁니다. 눈이 따라다녀요. 계속! 그리고 조금 이제 위험하다 싶으면 가까이 가서 안을 준비를 합니다. 넘어지면 붙잡을 준비를 하구요. 그때에 지가 어떻게 넘어졌다! 막 고함을 지르고 안 그럽니까! 그러면 얼른 붙잡고...
나는 기도에 대해서 이 말씀하면서 여러분 확실히 드리고 싶은 것은 기도가 어떻게 되어지느냐?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그 순간부터 여러분을 따라다니는 눈이 있어요. 밤낮 없이! 나는 자고있지만 밤낮 없이 그리고 어디든지 성령께서 눈동자처럼 하나님이 따라다닙니다. 따라다니셔요. 그 눈이 계속 따라 다녀요. 그러다가 위태한 부분이 있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더 다급하게... 넘어졌다! '아' 그러는 순간에... '아' 그러는 것이 뭐냐? 기도입니다. 기도!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는 기도는 특권이요. 기도는 의무라고 붙일 필요가 없어요. 기도는 특권이에요. 내가 문제 생겼다, 사건 생겼다! 그 길로 하나님 앞에 기도가 저절로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관계만 바로 되어 있으면 이게 저절로 나와요. 종교인들은 어려울 때마다 기도하고 자기수단 쓰지만은 복음을 확실하게 붙잡은 사람은 기도하면 끝입니다! 왜? 완전히 담당해 줄 것을 믿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권찰들한테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일 어려운 것이 기도인데 이 기도가 안 된다는 배경 때문에 왜? 전에는 계속해서 내가 기도를 뺏어냈고 얻어내었고 안 주면 금시 했고 이랬기 때문에 기도에 대한 개념이 뭐냐하면, 뭐든지 생기면 얻어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고 그 다음 뭐가 일이 되면 내가기도 많이 해서 그렇구나! 이리 돌아갑니다.
그런데 기도를 많이 하던지 적게 하던지 만족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해서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나를 이끌어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 되니까! 뭐든지 얻어내려고 그럽니다. 안 주면 신경질 내고, 안 주면 눈 부릅뜨고 왜 안주냐고 고함지르고 그랬거든요. 그러니 찬양이 안 나와요. 기도 많이 하면 찬양이 저절로 나와야 되는데 찬송이 안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영접하게 되면 저절로 된다는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시간까지 하나님께서 또 그렇게 만들더라 구요.
내가 그게 안되니까 왜냐하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을 얼마나 나쁜 하나님으로 만들었습니까! 늘 그런 마음이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요. 하나님 안 주면 하나님 안 준다고 고함을 지르고 안주면 또 굶죠! 굶다 안되면 그냥 막 죽기로 작정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악하신?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안 주려고 애를 쓰시는 분이 되어 가지고 굶어가면서 뺏어 내어야 됩니까! 이게 뭔가 우리 관념에서 기도라는 관념이 너무 잘못 되어 있어요. 기도는 찬양과 기쁨과 감사로 누리는 부분인데 이게 안 되거든요.
그래서 기도를 안 했습니다. 안 해도 되는가 보자! 오기도 있고 한 10여 년 간 어떤 면에서 제 생활이 여러분 보다시피 제가 새벽 기도를 안 나간다! 그게 안 나가는 배경 속에서 이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하나님 한번 봅시다! 까짓 거 뭐 지금까지 기도해도 그것도 안 되는데 진짜 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그렇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붙들어 주신다고 다 그랬는데 하나님이 한번 마음대로 한번 해 보세요. 그랬더니 우리 장로님들 그리고 건축위원들 막 이렇게 그러고 뭔가 이 애쓰고 그러는 동안에도 사실 나는 기도 안 했습니다. 저 옥상에 올라가서 기도할 때도 뺏어 내려는 기분이 자꾸 들어 가지고 우리 교인들이 막 부자 되게 해라! 자연적 이게 나와요. 그래가지고 그것도 접어놓아 버렸습니다. 이게 기도가 아니다 싶어 가지고...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내가 마음에 요즘 들어서 느끼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게으르고 아무것도 노력 안 하고 기도 안 하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내 자리가 내 서있는 자리가 송현교회라는 이제 우리 설명을 들으시면 알지만 참 아름다운 교회를 이렇게 설계를 해 놓았더라 구요. 그 교회 건축에 박 지 온! 나를 한 복판에 세워 놓았다. 내 기도한다 안 한다 상관없이 하나님이 다 준비하시고 이루어 놓았더라 구요. 그러면서 뭘 느끼느냐? 기도할 때마다 나는 이제 그 문제 당할 때에 어려움 당할 때에 '아' 소리만 내면 금방 와서 하나님께서 보호하듯이, 인도하시듯이, 들어주시듯이 여러분 기도하게 할 때마다 뭡니까! 응답을 준비하시고 기도하게 하신다. 다 드릴 것을 약속하시고 기도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게 너무 절실하게 믿어져요. 그러면 문제 있을 때 여러분 뭐 이렇다 저렇다 말할 것 없죠. 기도하면 되는 겁니다.
그때부터 마음속에 요즘 이제 힘을 얻는 데로 참 기도하는 것에 힘써야 되겠다! 라는 이런 마음들이 또 전처럼 막 부르짖고 기도한다! 그런 배경이 아닙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들으신다는 사실적인 어떤 믿음이 와져야 됩니다. 이 새벽기도에 대한 문제가 재해석이 되고요. 여러분 철야 기도도 그런 면에서 재해석이 됩니다. 그리스도 뿌리내리고 정말 기도하게 되면 기도하는 만큼 힘이 나옵니다. 기도하는 만큼 성령이 역사 하십니다. 기도하는 만큼 풍성해집니다. 삶이 기도하는 만큼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충만해지게 됩니다.
이걸 우리가 그냥 기도라는 그 사실들이 먼저 관계성이 바로 회복이 안 되고 치유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실이 확인 안 되면 이 기도라는 것이 늘 우리는 조급하게 되고 어렵게 되고 그래서 맨 날 어려울 때마다 기도하고 기도할 때마다 뭔가 우리는 수단 쓰고 방법 쓰고 안 되면 불평하고 이런 식으로 종교성을 가진 기도로 끝나게 돼요. 기도라는 것이 바로 조금만 이해되면 너무 필요한 부분만 아니고 쉽고 감사할 부분입니다. 너무 감사할 부분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 그러면 금방 안아 주시죠. 그러면 웃으면서 감사할 뿐이죠. 그러면 또 찬양합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의 거룩하신 그 계획 속에 하나님의 자녀로 세웠고 부름 받았고 이 일에 사용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게 감사입니다. 찬양이 나오고요. 정말 기쁨이 나오고 하나님의 그 축복과 역사가 정말 감사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마지막으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기서 이제 진정한 사명이 나와요. '아, 그렇다면 내가 이런 축복을 받았으니 내가 앞으로 살아야 될 것이 뭐냐?' 다윗은 보면 뭐라 그랬느냐 하면,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5절 보면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저는 이것을 전도라는 것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만은, 사명 그럴 때에 전도와 그 다음에 또 뭐냐하면, 여러분 앞으로 사명! 그러면 우리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재림 준비하는 겁니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러분 그 영과 그 축복과 은혜를 이미 여러분과 저는 준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때는 이 놀라운 축복을 나와 같이 항상 함께 누릴 수 있도록 해야 되겠다는 이게 사명입니다. 전도와 그리고 마지막 이 재림의 때에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축복과 역사를 준비하는 자리입니다.
여러분 다른 것보다도 이 재림의 역사를 준비하는 것 너무 귀중하죠. 그리고 이것이 조금만 눈이 열리게 되면요. 기쁨으로 교회생활 핍박이 온다. 어려움이 온다! 이게 문제가 아닙니다. 전도가 된다 안 된다. 이 사건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른 일이고 하나님의 성령이 인도하신다고 그랬으니 확인만 되면 문제없습니다. 왜? 역사 속에서 전도하면서 핍박 안 받은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도 그에게서 그 사람들이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인생을 보세요. 똑같습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조금 느낄 만 해요.
뭐냐하면 바울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 깨달았을 때에 모든 병 문제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에게 가시가 있었느냐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왜냐하면 그걸로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울이 일평생 변치 않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귀중한 축복이 되더라 구요. 바울이 고백했잖아요. 자고 하지 않도록 겸손하도록 자고 하지 않도록 그 다음에 그때마다 항상 어디입니까? 어려운 문제 있을 때마다 하늘나라 바라보도록...
오늘 아침에 우리 집에서 이 장이 나쁜지 장 속에 암이 생겼는지 모르겠다고 어째든 빨리 가면 되는 거지! 이러니까 섭섭했는지 어쨌는지 '나도 뭐 빨리 가고 싶어요!' 그러더라 구요. 공갈치는 건지 아마 진짜로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받아 가지고 나도 또 뭐 근심스러운 말이면 괜찮은데 나도 받아 가지고 나도 빨리 갔으면 좋겠다. 이 배경이 그냥 나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건강을 잃고 힘들어보니까요 세상사는 것이 힘들더라 구요. 그러면 늘 힘들 때마다 뭐냐하면, 빨리 갔으면 좋겠다. 빨리 하나님 앞에 갔으면 좋겠다.
그러나 항상 무슨 문제가 있으냐 하면 사명 못하고 가면 이 꾸중들을 것 같고 하늘 그 영광의 축복의 상을 놓치면 이것도 또 좀 뭔가 안타까운 것보다도 좀 그렇고 그렇다는 것보다도 분하고 이상하고 이러니까 사명을 다 해야 되겠는데 그러면서 만약에 내가 너무 건강하고 너무 좋다. 이제는 죽는다! 그러면 좀 겁낼 것 같아요. 아이고 좀 더 살았으면 좋겠는데 여러분 아마 혹시 건강하게 잘 사는 사람들은 그럴 겁니다. '나는 좀 더 살아야 되는데...' 이런 생각을 좀 하지 싶어요. 그래서 안 죽으려고 많이 애를 쓰는 것 같아요. 다 죽어 가는 사람은 그렇지 않아도 죽어 가니까! 얼른 갈라 그러고 그리고 이걸 도피해서는 안 되죠.
제가 바울을 보면서 뭘 느끼느냐? 복음 전파에 쉽지는 않잖아요. 세상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흑암권세에 사로잡힌 자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을 늘 보니까! 하나님 나라, 그 영광의 배경을 봤기 때문에 소원이라! 죽던지 살던지 그러니까 이 소망 속에서 이걸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고통과 절망에 빠진 그들에게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해야 되겠다! 전도라 그랬습니다. 이걸 말하지 않으면 그건 절망입니다. 그러면 '내가 화로다!' 안 그랬습니까! 여러분 이 눈이 열리면 모든 문제가 이 배경에서 이 세상 것이 좋아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이 늘 하는 말이 되어 가지고 여러분 어떻게 들을까 싶어서 내가 좀 마지막에 말을 어떻게 머리가 돌아가 가지고 그런 말이 나올까 싶은 생각도, 염려도 되고 그렇습니다 만은, 솔직히 그런 배경 들으니까 무슨 마음이 있냐 하면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먹는 것 마시는 것 잠잘 수 있으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뭐 그렇게 먹는 것 마시는 것 잠자는 것! 길거리 가 앉아 있어도 그 일이 되면 끝난 것 아닙니까!
여러분 거지들이 이상하더라 구요. 이 뭔가 이 집나가 가지고 한 3일 이상 지나고 또 3달 이상만 지나 버리면 집에 들어갈 마음이 안 생긴데요. 그게 영적 배경입니다 만은, 왜 그러냐? 걱정이 없어진데요. 잠자는 걱정이 있나 먹는 것 걱정이 있나 뭐 없어진데요. 그러면 안 들어가고 싶다고 그래요. 그렇다 그러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요.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조금 마음에 조금이라도 가슴에 담고 있다 싶으면 이 땅에 사는 것은 걱정이 안 됩니다. 먹는 것은 어떻게든 먹을 것이고 잠자는 것도 어떻게든 잘 거고 그러면 어디든지...
그래서 내가 길 거리에 나가도 좋다. 참 복음 바로 잡고 이 사실 바로 잡고 나간다면 만족이다! 이것만 되어버리면요. 어떤 문제가 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복음이 되면 되는 만큼 뭐가 옵니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감사 해야죠. 그때마다 문제 생기면, 뭐하면 됩니까?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도 내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저절로 그냥! 그러니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지금도 안 그렇습니까! 이것이 확정되면요. 눈만 깜아도, 눈을 떠도 문제 생기면 자연적 내 입에서 '아버지!' 이게 안 된 사람은 엄마! 소리 나오지 만은, 눈만 깜아도... 그러면 저절로...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문제나 사건, 특별한 문제 있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이걸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내가 크게 할 것 없어요.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과 명철로 주시는 데로 결정하는 겁니다. 얼마나 감사할 정도가 아니고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와 사건을 너무 확실하기 때문에 확인되는 만큼 절대로 딴 짓 안 합니다. 절대로 이리 저리 옮길 필요도 없고 마음이 흔들리 것도 없고요.
그리고 이것이 안 되면 뭐가 문제냐? 배경이 사단의 배경이기 때문에 사악해 진다! 이겁니다. 그러니 교회가 이걸 놓치게 되면 교회가 사악해집니다. 교회가 이것을 붙잡게 되면 교회는 너무 축복이요,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교회 올 때마다 행복하다는 마음이 들 겁니다. 오늘 이 메시지 들으면 여러분 정말 행복하다! 이렇게 되어야 됩니다. 아내 볼 때도 행복하고...
그래서 제가 오늘 그런 시각으로 성가대를 그렇게 봐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메시지를 준비하고 와서 그런지 모르지만 옷도 보니 예쁘고 얼굴도 보니 예쁘고... 전에는 뭐 보통 그렇게 봤는데, 그 여러분이 보면서 오늘 어쩐지 모르게 인사를 하는데요. 전부 귀하다! 이 자리에 앉았다!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핍박받았습니까! 얼마나 여러분 핍박받으면서 삽니까! 여기 앉았다는 사건조차도 위대한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이제 앞으로 더 위대한! 그래서 받아합시다. "남은 시간에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이 증거 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배푸시고
시 23:5 / 지태일 목사
사람은 살면서 대체적으로 후회를 많이 하게 됩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이렇게 할걸 그 때 좀더 이렇게 잘 할걸...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은 젊은 시절을 후회합니다. 내가 그 때 왜 그렇게 했지 좀더 이해하고 사랑하고 잘 할 걸 하는 일들도 많았고 사람들도 많습니다.
신앙생활에도 후회가 있습니다. "내가 그때 좀더 잘 믿었더라면" 그런 후회의 눈물이 날 때가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보니까? 제일 아까운 것이 시간입니다. 한없이 있는 것이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그 시간이 화살처럼 유수처럼 지나갑니다. 그래서 지난 세월들을 한하며 후회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후회가 없는 사람을 봅니다. 후회가 없는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삼는 인생입니다. 온갖 시련 속에서도 성공한 사람, 가장 무서운 죽음 앞에서도 후회가 없는 사람, 여러 가지 사망의 골짜기 속에서도 두려움이 없는 사람, 후회가 없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그야말로 험악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울에게 골리앗을 무찌른 것이 애매한 일이 되어 10년 이상을 사울 왕의 도망을 다니면서 고통의 눈물의 양식을 먹었던 사람입니다. 아들인 압살롬에게 쫓겨가는 설움도 고통도 있었습니다. 장인인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들고 군사를 풀어서 잡으려고 쫓아다녔습니다. 잘 데가 없어서 엔게디라고 하는 동굴에서 잠을 자는데 사울이 추격해왔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어 기적적으로 살아 남아 이스라엘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합니다. 5절 하반절에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후회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인생을 살수가 있을까요? 어떻게 원수의 목전에서도 잔치상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시23:5절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입니다.
1) 내게 상을 베푸시고
5절에서 먼저 눈여겨 볼 말씀은 ‘상을 베푸신다’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상’이란 ‘밥상’을 뜻합니다. 내 원수 앞에 상을 베푸신다는 것은 개선 잔치를 말합니다. 싸움을 이긴 후에 상을 베풀고 축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양들에게 밥상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물론 풀들이 잘 자란 푸른 초장을 의미합니다.
2) 원수의 목전에서
그러면 양들에게 있어서 원수는 누구일까요? 양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들인데 그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독초이고, 또 하나는 맹수들입니다.
이른 봄이 되면 눈이 채 녹기도 전에 목자는 양떼보다 앞서서 거칠고 높고 험한 길을 지나 고원 방목장 초장을 향하여 답사를 떠납니다. 고원의 초목들이 얼마나 잘 자랐는지를 살핍니다. 양들 앞에 베풀 상을 위하여 목초지에 대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가볍게 풀을 뜯게 할 빈터나, 오래 머물면서 충분히 뜯게 할 장소를 정합니다.
이렇게 목초지를 정하고 나면, 양떼를 이끌고 이동을 하며 풀을 뜯게 합니다. 그런데 목초지에 양들을 풀어놓기에 앞서서 반드시 목자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독초를 뽑아주는 일입니다. 독초는 양들에게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린 양들에게 있어서 독초를 뜯어먹거나 단순히 입에 넣고 씹기만 해도, 그 풀에서 나온 독으로 인해 전신에 마비 증세를 일으켜서 뻣뻣하게 굳어서 죽어 버립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들이 풀을 뜯기 전에 목초지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독초를 다 뽑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어느 일보다 무척 힘들고 고된 작업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양들에게 있어서 "원수의 목전에서 밥상을 베푸는" 작업이기 때문에 결코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양들의 생명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독초를 다 뽑아주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목자가 해야 할 일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맹수들을 감시하는 일입니다. 목자는 맹수가 쳐들어와서 양을 습격하지 않도록 지켜주어야 합니다. 맹수들은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잽싸게 공격하기 때문에, 목자는 한 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목자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속에 원수의 고역과 대적의 모든 현상에서 풍성한 상을 베풀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를 이미 체험한 것입니다.
삼상 17장에서 다윗은 불레셋 군대와 골리앗앞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상을 체험했습니다. 사울과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골리앗의 협박과 공갈에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서서 숨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과 언약도 없고 할례 받지 못한 불레셋의 골리앗이 누구기에 사실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며 담대하게 골리앗에게 나갔습니다. 다윗은 원수가 다가올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상을 베푸시고 요리해서 성찬을 만들어 먹게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다윗은 강한 믿음으로 골리앗에게 대항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의 물 맷돌이 골리앗의 이마를 쳐 넘어뜨렸습니다. 그리고 골리앗의 칼을 뽑아 그 목을 베었습니다. 그 결과 불레셋 군대들은 모두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고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하시고 골리앗앞에서도 상을 베푸셨습니다.
요한복음 10:11-15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했습니다. 이리나 맹수가 오면 삯꾼 목자는 양들을 버리고 도망을 치지만, 예수님은 도망치지 아니하고 목숨을 버릴지라도 양을 지키고 양을 위해 헌신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원수가 아무리 둘러 진쳐 올지라도 예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두라 평지에 30미터나 되는 금신상을 세우고 모든 문무백관들을 다 모아놓고 음악은 연주할 때 금신상에게 절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의 도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금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상에게 절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이때 느부갓네살 왕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그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라고 기록했습니다.(찬송가 359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없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하나님은 느브갓네살이 만든 우상앞에서도 절하지 않는다고 7배나 더 뜨거운 풀무불앞에서도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앞에 상을 베푸시는 분이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세운 금신상에 절을 하지 않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 대해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어 금신상에게 절을 하며 생명을 구해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여 그렇게 하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능히 건져 내시겠거니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에 절하지 않겠습니다."라며 왕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수들이 자신들을 공격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믿었으며, 나아가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느부갓네살 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잡아 7배나 뜨겁게 한 풀무불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풀무에 던진 사람은 세 명이었는데 순식간에 네 사람이 손을 잡고 풀무를 돌면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춤을 추는 네 번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았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나오라고 하매 그들이 풀무 가운데서 나오는데 조금의 해함도 없고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오히려 그 불속에서 그들과 거닐며 오히려 즐거운 곳이 되게 하셨습니다. 고통과 환난의 자리에서 구해내지 않으시고 함께 하십니다. 그 환경이 즐거움이 잔이 되게 하십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들을 위해 요리상을 베푸시는 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거대한 골리앗이 나타나도, 느부갓네살의 그 뜨거운 풀무불이 나타나도 하나님께서 그 앞에 상을 베풀어 주심니다.
얼마나 많은 원수들이 다윗의 생명을 노렸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위기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다윗은 하나님의 풍성한 대접을 받아온 것입니다. 여기서 `베푸시고'란 미완료 시제로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계속적인 행동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아무리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원수앞에서, 여러 가지 환란앞에서도 상을 베푸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들이 어떠한 원수 중에 있고, 원수가 우리를 지친다 할지라도 원수와 우리 사이에 우리 하나님께서 계시면서 우리들을 보호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3) 기름을 바르시고
세 번째로 5절에서 ‘기름을 바르신다’는 단어입니다.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준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언제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어야 할까요?
1) 먼저 해충을 쫓기 위해서 기름을 발라줍니다.
양들에게 있어서 여름철은 파리철이라고 합니다. 무더운 날씨와 함께 그들에게 찾아오는 쇠파리나 날파리, 코파리, 진드기나 모기 등의 해충 때문입니다. 양들은 이런 해충들로 인해 거의 미칠 지경입니다. 특별히 코파리는 양의 코에 덮여 있는 촉촉하고 끈적끈적한 점막에 알을 낳을 기회를 노리면서 양의 얼굴을 윙윙거리면서 귀찮게 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무나 바위에 머리를 사정없이 들이받기도 하고, 나무숲에 데굴데굴 구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심한 경우에는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이때 목자는 유황과 그 밖의 여러 가지 향료를 섞어 만든 올리브 기름을 양의 코와 머리에 발라줍니다. 그래서 코파리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충으로 인해 괴로워하던 양들은 일순간에 평온하게 풀을 뜯게 됩니다.
2) 또 피부병 같은 전염병이 돌 때 기름을 발라주게 됩니다.
양들은 애정과 사랑의 표시로 서로 머리를 비벼대는 것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특히 여름철에는 미세한 기생충으로 인해서 양들이 피부병에 많이 감염됩니다.
이때 피부병이 감염된 양이 다른 양과 서로 머리를 맞대고 비벼대다 보면 순식간에 다른 양들에게 퍼져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에도 목자는 기름을 사용합니다. 어느 때에는 온 몸이 피부병으로 고생하면 기름을 탄 약물 통에 양의 온 몸을, 머리까지 잠그게 해서 소독을 해주는 것입니다.
3) 또 기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짝짓기 철입니다. 선선한 가을이 찾아오면 암양들이 발정을 하는 시기여서 수양들 사이에 암양을 차지하기 위해서 큰 싸움이 벌어진답니다. 몸통에 서로 상처나 나도록 싸우기 때문에 목자는 수양의 머리와 코에 온몸에 윤활유를 발라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로 싸우기 위해 머리를 부딪칠 때 윤활유 때문에 미끄러져 버리고 맙니다. 이렇게 몇 번 하다보면 서로 멋쩍어서 싸움을 단념하게 됩니다.
이처럼 목자는 양의 머리에 기름을 발라줌으로 해충을 쫓아주고, 피부병을 막아주고, 양들간에 싸움을 막아주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다윗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며 기름을 바르시니 부족함이 전혀 없다는 고백입니다. 여기에서 기름은 잔치 때에 주로 사용되었던 향유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필수품은 아니었고 귀족들, 특히 왕실에서 주로 사용한 귀중품이었습니다. 이들 귀족들은 잔치에 참여할 때 이 기름을 머리나 수염 등에 발랐습니다.
이렇게 볼 때,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크게 높이시고 부요하게 하신 데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실제로 다윗의 왕실에는 이 값비싼 기름이 풍부했었습니다(대상27:28).
주님은 우리의 심령속에 물과 성령의 기름을 부어주십니다. 이렇게 될 때 내 속사람의 모든 필요가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윗은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잔'은 기업을 비유한 말입니다(시16:5). 이러한 잔이 단순히 가득찬 정도가 아니라 흘러 넘치고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다윗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기업을 소유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다윗이 차지한 왕실의 재산과 사유 재산은 실로 엄청난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대상27:25-31; 29:2-5). 예루살렘에 있는 왕의 창고들, 각 성읍과 촌과 산성에 흩어져 있는 창고들이 나오는데 관리자들의 이름들도 나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토록 풍성한 기업을 자기의 쾌락을 위해 사용하지 아니했고 하나님의 전(殿)을 건축하는 데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고전10:16에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첨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첨예함이 아니냐" 축복의 잔입니다. 은혜의 잔입니다.
이 축복의 잔을 채우기 위하여 우리 주님께서 고난의 잔을 마신 것입니다. 잔치이신 아들, 기름 바르는 성령, 축복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하여 내 잔이 넘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목마름은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습니다. 그렇게 목말라서 남편을 다섯이나 얻었던 수가 성의 여인이 예수를 만났을 때에 그의 갈증이 해소되고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키만큼이나 돈을 쌓고, 명예를 쌓았던 삭개오는 그 많은 부요와 지위가 그의 목마름을 채울 수 없었으나 그를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집과 마음속에 모실 때에 비로서 행복한 삶이 그에게 열렸습니다.
푸른 초장이신 쉴만한 물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목자이심으로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정말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너무도 많은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뒤집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너무 편한 웅덩이를 여기저기 찾다가 넘어집니다. 때로는 몸에 거추장스런 것들을 너무 많이 걸치고 있어서, 이런 것 저런 것 때문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영혼이 세상적인 것들로 살이 너무 쪄있어서 뒤뚱거리다가 넘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넘어질 때, 목자 되시는 우리 하나님은 얼른 달려오셔서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또 다시는 넘어지지 않도록 웅덩이를 메워주시기도 하고, 몸에 너무 자란 털을 깎아주시기도 합니다. 또 살이 너무 많이 쪄있으면, 풀이 별로 없는 곳으로 격리시켜서 우리 살을 다이어트 해주시기도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위에 이곳저곳에 숨어서 우리를 해치려고 하는 독초의 위험에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쉬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독초를 뽑아주고 계십니다.
또 우리를 해하려는 맹수의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오늘도 사탄은 우는 사자가 삼킬 자를 찾기 위해 두루 찾아다니는 것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십니다. 그래서 해충의 공격을 막아 주십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를 공격하는 전염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우리 주변에 우리를 병들게 하는 수없이 많은 전염병들이 있습니다. 먹는 것을 통해서, 입는 것을 통해서, 보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세상 쾌락 즐거움으로 권력이나 명예를 통해서 은밀히 다가 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준비하신 기름물통에 우리의 온몸을 담가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수양처럼 자기를 뽐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때에도 목자가 되시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서로 다투지 않게 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합니까? 아픔이 있습니까? 상처가 있습니까? 고통이 있습니까? 문제는 그런 아픔과 고통, 상처와 허물 속에서도, 오직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셔서 나를 지켜주신다는 것, 또 의의 길로 인도해주신다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의 다윗은 많은 고난과 아픔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습니다. 그에게 고난이 없고, 아픔이 없어서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많은 아픔과 고난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이 나의 참 목자가 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이렇게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나눈 저와 여러분, 모두 다윗처럼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의 목자가 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시기를 바람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섬기고 따르면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승리의 잔치상을 베풀어 주실 것이고,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실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의 축복의 잔이 풍성히 넘칠줄 믿습니다. 아멘.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시 23:6 / 김남준 목사
Ⅰ. 본문해설
하나님은 시인을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셨으며 죽은 자와 방불하였던 그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셨다. 사막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함께하셨으며 원수의 목전에서 화려한 식탁을 베풀어 주셨다. 또한 그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시면서 시인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쳐 주셨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을 받은 시인은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결단한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로다.”
Ⅱ. 세상이 흔들 수 없는 확신
시인은 그 모든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세상이 흔들 수 없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것이었는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자기를 따르리라는 확신이었다. “따르리니”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라다프’인데, ‘추격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 굳센 의지로 끝까지 쫓아가서 잡는 동작을 의미한다. 시인이 시련과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깨달은 사실은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자신을 추적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란 무엇일까?
A. 선하심
우선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을 관대하게 대하는 호의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선한 분이시라면 왜 이 세상에 악과 고통이 그치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이 세상이 악하기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이미 이 세상은 선하고 평화로워야 한다는 종교성을 띤 명제가 깔려 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데에서 온다. 하나님은 선이시므로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이 불행지고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들을 깨닫게 하여 당신께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다.
B. 인자하심
다음으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인데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으로 인해서 가치 없는 인간을 향해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말한다. 우리에게 어떤 장점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 자체가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혜택을 받는 것이 바로 이 헤세드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님께 피하면 주님은 그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하신다.
Ⅲ. 여호와의 집에서 살다
A. 여호와의 집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을 추격하기에 시인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다짐한다. 다윗이 살던 시대는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 전이기 때문에 본문의 “여호와의 집”은 아름답고 화려한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동식 성전인 성막을 가리킨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받은 계시대로 이동식 성전인 성막을 짓게 된다. 이스라엘이 광야 어디로 이동하든지 그 성막 주위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진을 쳤는데 그렇게 사람이 많았어도 성막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거기서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고 하나님을 뵈올 수 있었다. 이러한 이동식 성전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한 곳에 머물면서 성소의 중앙화가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성전 중심의 신앙이었다. 다시 말하면 국가적인 큰일에서부터 개인적인 일들까지 그 모든 것들을 들고 성전으로 나아가 하나님께 토해 놓았던 것이다. 인생에서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을 만났을 때, 영광스러운 일이나 수치스러운 일을 만났을 때 국가적인 위기나 재난을 만났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집을 찾았던 것이다.
B. 신자의 어머니
하나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시지만 당신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교회 속에서 가장 충만하게 누려진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바라보면서 일평생 살겠노라고 다짐하였다. 그런 점에서 교회는 신자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교부 키프리아누스(Caecilius Cyprianus, c190-258)는 교회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은 것은 개인적인 사건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몸에 접붙여진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의 지평에서 입증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자는 교회와 접붙여지셔 일생을 교회의 한 지체로서 기쁨과 서러움을 교회와 함께하며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
Ⅳ. 맺는 말
인생은 바람같이 지나간다. 지나온 날들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앞에 남아 있는 날들도 속히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인생을 잘 살길 바란다.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순종하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길 바란다. 그리스도를 위해 남은 고난을 자신 안에 채우며 사는 성도들이 되길 빈다.
세상이 흔들 수 없는 확신
시 23:6 / 김남준 목사
시편 23편의 1절이 하나님께서 시인의 목자가 되시는 것에 대한 총론적 선언이라면, 2절부터 5절은 하나님께서 왜 자신의 목자이신지 이유를 밝히고 있고, 마지막 6절은 그렇게 하나님을 선한 목자로 모신 시인이 미래에 대해서 갖는 확신과 결단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두 가지 때문에 미래의 어떠한 불안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하심’입니다. ‘선하심’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 ‘토브’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함께 거의 모든 날 동안 빠짐없이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구절의 ‘좋았더라’와 같습니다. 즉 이 말은 선함이 변하기 쉬운 인간 심리에 기인한 판단이 아니라, 절대적이고 불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드러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 하나님께는 세계를 이렇게 만드시겠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가 실제로 이루어졌을 때, 그것들은 시간과 공간 속에 모두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계획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완전히 합치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것이 좋았더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선’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쁘다든지 사람의 마음에 만족을 준다든지 하는 인간 편에서의 판단이 아닌 것입니다. 그 판단이 하나님의 시각에서 완전한 조화와 질서,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이유는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신성의 충만한 영광을 영적인 세계에서 뿐만 아니라 보이는 이 시간과 공간의 세계 속에서 펼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의 고유한 목적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천지 창조의 목적이고, 이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을 통해 당신 자신의 성품을 드러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각 사람은 바로 이 온 세계를 창조하신 계획에 이바지하도록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진정한 삶의 가치와 보람, 기쁨은 하나님이 온 세계를 창조하신 그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삶이 그 목적과 부합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 선한 사람, 선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볼 때 사실, 신앙에서 느끼는 대부분의 갈등은 우리가 생각하는 ‘선’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선’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중심으로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셨으니 인간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 목적에 이바지하며 살아야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문제는 그렇지 않을 때 발생합니다. 죄는 무엇입니까? 죄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살면서 이런 저런 나쁜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악’입니다. 그 악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고, 자신의 행복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자신의 행복에 이바지하고 자기를 섬겨야지만 좋은 하나님이시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이 모든 세계에서, 그 사람들의 선과 악을 모두 사용해서 궁극적으로 하나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여기에 나오는 ‘합력하다’라는 단어가 희랍어로 ‘순 에르고’라는 단어인데 ‘순’이라는 단어는 ‘함께’라는 뜻이고 ‘에르고’라는 단어는 일하다는 뜻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선’ 역시 이런 관점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흔히 오해하듯이 하나님께서 선하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복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긴 여름 장마가 계속 되면, 온 집안에 곰팡이가 피고, 아침에 눈을 뜨면 날이 밝았는지 아직 어두웠는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어두침침한 날들이 계속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장마가 끝나고 아침에 맑게 갠 하늘에 찬란한 햇빛이 얼굴을 내민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좋은 아침입니다. 그러나 그때 누군가에게 안질이 있다면 햇살이 비칠 때 다른 사람은 좋은 아침이라고 감탄해도 그의 눈은 따갑고 고통스러워서 눈에 안대를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악하고,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지 않고, 고집대로 살 때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부모가 자녀들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자녀들이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을 때 그 아이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 것이고, 아이를 꾸중하거나 매를 들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 그 아이를 향해 선하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자식을 사랑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부모라면 어찌하든지 내버려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바로 이‘내버려 두심’입니다. 하나님의 큰 진노의 표현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거기에 대한 처방도 마련하셨습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고통을 받을 때 ‘회개’를 통해서 영혼과 마음의 궁극인 질병을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때 우리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다시 받으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입니다. 결국 시인이 말하는 선은, 더 더욱 미래에 대한 자기만족이나 자기 뜻대로 움직여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보증하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가장 큰 은혜의 본질은 말씀을 통해 깨뜨려져 자기를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던 인생의 자라에서 도망쳐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종 눈에 보기에 좋은 것들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시지만, 때로는 우리의 눈에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 나를 둘러싼 환경을 깨뜨리기 전에 나를 깨뜨려 주시옵소서. 나의 아집과 교만과 사랑의 집착을 무너뜨려 주시옵소서. 나를 당신의 진리로 정결케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깨끗케 해 주시옵소서. 우리가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붙들며 살겠습니다…….’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우리의 마음에 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나는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잘 모르지만 그분은 아시며, 나는 또 안다고 할지라도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께는 있다는 믿음으로 살면서 자기를 주님께 복종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이 식으면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왠지 불안해 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내가 나에게 가장 선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져 보려고 하는 인간의 모든 몸부림이자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짓는 뿌리입니다. 믿음의 눈이 아니면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든지, 자기를 의지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께 책망을 받았던 주요한 제목이 우상숭배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우상을 섬긴 것은 우상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우상을 통해서 자기를 섬기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결국 자기 사랑이 우상숭배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값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졸렬한 방식으로 복음을 재해석하면서 자신의 엉터리 신앙생활을 정당화합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의 무지는 이기적인 자기 욕망을 버리지 않고 신앙의 껍질로 덮은 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이런 삶에 박수를 치는 사단의 합작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잘못 심겨진 것들이 무너지고 뽑혀지지 않으면 올바르게 좋은 것들이 심겨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항상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제시하는 참된 의미를 알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전에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을 것처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명백하게 드러난 것이지만, 섭리는 감춰진 것이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보십시오. 그가 비록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많은 고난을 겪었고, 자기에게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에 대해서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선한 분이시라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에게 주신 그 위대한 꿈, 해와 달과 열한 별이 그에게 절하는 그 꿈을 하나님께서 이뤄주실 것임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는 마치 두루마리가 펼쳐지듯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말 위대한 계획 속에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자기를 노예로 팔았기 때문에 두려움 가운데 용서를 빌었던 형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그대들은 나를 종으로 판 것에 대해서 염려하지 마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악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마로 인생을 향해 어떤 악을 행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그분께 불만족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할까요?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셨는지 자기 아들까지도 내어주셨는데,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하려고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선하신 하나님을 버리고, 또 다른 선을 찾아 그 안에서 행복해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께 악을 행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선하시면 선할수록 그렇게 악을 품은 사람들은 고통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드러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며, 항상 당신의 선한 빛을 우리 인간에게 환하게 비추십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앞에 악하게 살 때에 그 선한 하나님의 햇빛은 인간에게 고통으로 나타나 징계를 가져옵니다. 반대로 한 인간이 핍박 속에서도 진실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쓴다면 선하신 그 햇빛은 고난 속에도 하나님이 자기를 붙들고 계시다는 확신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자기도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도록 신실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비추고 이해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자신의 고백을 통해 거듭 강조하고 있는 바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승복을 하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때로는 결핍의 빈들을 지나기도 했고, 때로는 폭풍과 같은 바다를 건너기도 했으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두려움 속에 걷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인생의 역경을 헤치면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선하신 분이시고, 마치 양떼를 사랑하고 돌보는 것처럼 그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악하고 고통을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요, 하나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혹시 우리에게 좋은 일들이 있었고 행복한 일들이 있었다면 우리의 악을 능가 하셔서 그 악을 선으로 바꾸어 주신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번 마음을 찢고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가면 그분의 마음에 우리가 박았던 수많은 못 자국들이 아직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한 번도 미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로 인하여 욕을 당하신 적이 없는 것처럼 당신의 품에 안으시는 그 한없는 사랑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 사랑은 강물처럼 흘러서 우리 같이 죄인 중의 괴수인 사람에 미치고 그 손길은 우리를 치료하여 우리의 눈의 안질을 낫게 해 주셔서 진리의 찬란한 빛이 이제는 따갑지 않고 아름다운 빛이 되도록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마음의 입맛을 변하게 하여 이제 주님의 선하심이 쓰디쓰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의 속한 것들이 우리에게 쓰게 느껴지도록 변화시켜 줍니다. 수많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이렇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주님 바깥에서 행복해 보려고 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할 때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그릇된 행복을 좇는 인간은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자기가 삶의 주인 된 삶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분 안에서 행복해 지려고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