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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의 주축인 조선 의용군과 6.25 전쟁의 몇가지 미스터리들?
중국과 미국이 서로 패권 경쟁을 벌이는 시대에 한국인들은 한미동맹이 미일동맹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미국 입장에서 볼 때는 미일동맹이 한미
동맹 보다 몇배나 더 중요한 지극히 소중한 동맹으로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미일 동맹은 미국의 국가 존립과 안보” 에 직접적으로 관련되기 때문 입니다!
2차대전 당시 1941년 12월 일본의 항공모함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 하와이를 습격해 미해군을
대파했고 (미군 항공모함은 필리핀 보급에 나선지라 무사했음), 6개월후 1942년 6월 4일
일본 항공모함은 다시 미드웨이를 공격했으며..... 일본 잠수함들이 태평양에서 작전하니
미국이 위험에 노출된지라 미국의 안보를 위해서는 “태평양이 미국의 내해” 가 돼야 합니다.
태평양에 적국의 함정이 드나들지 못하도록 미국의 내해가 되려면 태평양 건너편 “일본이 미국의 동맹
으로 친미국가” 가 되어야 하는 것이니, 그 대신에 미국은 일본을 소련과 중공등 공산주의 세력으로
부터 방어를 약속하는데..... 전쟁이 일본 땅에서 일어나면 일본인들이 다치는지라 건너편에 “일본을
지키기 위한 교두보로서 한국” 이 필요한 것이니 전쟁은 한국 땅에서 해야 일본이 피해를 입지 않습니다.
1948년 가을 임표가 지휘한 조선의용군이 간도 자오허(교하) 에서 국민당 군대에 승리하는등 두 민족이
연합한 동북 인민해방군이 만주에서 30만 국민당군을 격파하는 것을 시작으로 전세가 역전되고 힘의
균형이 깨지니, 인민해방군은 1949년 1월 31일 베이징에 입성했고 파죽지세로 양쯔강을 건너 4월 23일
에는 국민당 정부 수도 난징(남경) 을 함락하는데 홍군이 나룻배를 타고 건너는데도 저지하지 못했습니다!
5월 27일 상하이를 함락하자 장개석은 대만으로 후퇴하니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천안문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을 선포하는데.... 국공내전에 참가한
“조선인 6만명 (지방군 10만 별도) 중에서 4만여명이 북한” 으로 넘어와 조선 인민군
이 되어 6.25 전쟁 때 선봉으로 남하해서 대전에서 “미군 사단장을 포로” 로 잡게 됩니다.
1948년말 넘어온 조선인들은 4사단 18연대가 되어 스미스 부대를 격파하게 되며 1949년 7월에는 홍군 64
사단 7천 5백명이 북한으로 넘어와 인민군 5사단을 창설했고 또 홍군 166사단 방호산등 1만명은 인민군
6사단이 됐으며 1950년 5월에 홍군 15사단 1만 5천이 북한으로 넘어와 7사단에 배치되었고 조선의용군
전우는 12사단장이 되니 6.25 인민군 21개 연대 중 10개 연대가 중공(홍군) 8로군 출신 조선의용군 입니다.
사단장만 보더래도 8로군 연대장인 김웅은 인민군 1군단장이고, 김광협은 1940년 동북 항일연군 제2로군
정치위원을 지낸후 소련 군정의 동북민주군의 군관구 사령관으로 1948년 조선인민군 제3사단장을 거쳐
2군단장이 되었으며 4사단장 이권무, 5사단장 김창덕, 7사단장 전용, 10사단장 이방남, 12사딘장 전우와
최인이며 땅크사단장 류경수는 김일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하다가 소련을 거쳐 들어온 자 입니다.
조선인들이 모택동의 홍군 (공산당) 에 참여한건 이보다 훨씬 전이니 1926년 장파쿠이(張發奎)
의 북벌 부대 2천명중 200여명을 시작으로 1927년 12월 광주 봉기 때는 최용건이 조선인
학생 160명과 함께 참가했으며..... 이후 김원봉 부대 400명중 100명은 중경의 광복군에
남았으나 김두봉, 최창익, 무정, 박일우등 300명은 연안으로 가서 공산당 홍군에 합류 했습니다.
1946년 마침내 국공내전이 일어나자 장개석은 국민당 군대를 만주로 파견하니 소련군으로 부터
심양과 장춘등을 인계받고 린뱌오 (임표) 의 홍군(공산당 8로군)을 격파 하자.... 위기를 느낀
조선인들은 대거 공산당 홍군에 참가하니, 그 수는 정규군 6만에 지방군등 10만을 합쳐서
16만명에 달했는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손잡았던 국민당 군대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해방후 만주에 거주했던 조선인 200만명 중에 90만명이 귀국하고 110만명이 남았는데, 홍군에 참여한
이유는 일본이 만주에서 조선인들을 의도적으로 우대하고 한족을 차별한 결과 국민당군이 진주하자
한족들이 조선인 마을을 습격해 보복에 나서니... 홍군 (8로군) 이 조선인 마을을 지켜준게 첫째이고,
또 공산당이 농지개혁으로 토지를 조선인을 포함한 소작농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기 때문 입니다.
그 전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괴뢰 만주국이 수립되자 중국인들은 비로소 일본군에 저항
하게 되니.... 한국독립당 군대는 중국인들과 연합해 1932년 쌍성보전투, 1933년 사도하자와
동녕성 전투를 치른후 1933년 대전자령 전투에 이어 1933년 9월 동녕현 전투에서 일본군
에 의해 괴멸당하니...... 이때 “민족주의자 독립군은 만주 땅에서는 완전히 소멸” 해 버립니다.
이후 1936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8로군은 공산당 동북인민혁명군을 확대 개편한 “동북항일연군”
에 김일성, 최현, 김책, 최용건, 강건, 김일, 리홍광등 40% 가 조선인이었으니 “공산주의자
독립군” 들이 중국 공산당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인데...... 승승장구
하던 국민당 군대는 간도 자오허 (교하) 에서 조선인 부대에 일격을 당한후 기세가 꺽입니다.
2차대전후 동구 유럽 국가들이 모두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가고 중국 대륙이 공산화 되었으며
베트남에서도 공산세력이 대두하자..... “도미노 이론” 을 들어 동남아시아와 일본 까지
좌파가 득세하는등, “동서냉전의 시대” 에서 팽창하는 공산세력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미국으로서는 자국 안보의 핵심인 “태평양 저편의 일본” 을 지키는 것도 어려워진 것 입니다.
2차대전후 4대국 신탁통치가 결정된 나라는 “독일, 오스트리아와 한반도” 인데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지역은 서독이 되고 소련 지역은 동독이 됐으며 오스트리아는 내전을 치러 서로를 죽였으니 “원수지간
인 공산당과 민족진영이 화해해 공동 정부”를 수립해 영구중립을 선언한후 소련과 미국에 절대 적대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니 한국으로 치면 “김구와 이승만에 김일성이 공동 정부” 를 수립한 셈이라?
소련군과 미군은 철수하니 오스트리아는 통일됐으며 동독은 국세가 약한지라 서독을 침공하지 못했는데...
한반도도 신탁통치를 받아들였으면 “소련의 함경도는 북한” 이 되고 중국 장개석의 평안도와 영국
의 경상도에 나머지 미군 지역은 대한민국이 되었을 것이니 “6.25는 어려웠고” 소련이 해체돼 동구권
이 독립할 때 한국 도 “중공의 신뢰” 만 얻을 수 있다면 북한을 흡수 통일할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은 '적당한 시기에'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가 될 것임을 선언한다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했습니다!
루즈벨트의 특별보좌관 해리 홉킨스가 작성했던 카이로 선언 초안에는 한국의 독립을 “가능한 한
가장 이른 시기에” 라고 적었으나, 루스벨트는 “적당한 시기” 로 고쳤고..... 처칠과 협의 후에
“ 적당한 (적절한) 시기에 in due course" 로 발표했는데, 한국인들은 뒷부분 “독립” 만 본 것
인데. 문제는 독립이 "적당한 시기" 에 있음에도 한국인들은 외면하고 "보고싶은 것" 만 본 것이라?
카이로 회담이 끝난후 루스벨트와 처칠은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소련의 스탈린을 만나니 테헤란
회담인데 1943년 11월 28일 미· 영· 소 3개국 정상 회담에서 루스벨트는 "한국인들이
완전한 독립을 얻기 전에 40년간의 수습 기간 (apprenticeship) 을 필요로 한다." 고 말했습니다.
스탈린은 구두로 동의를 표했다는 것을 1944년 1월 12일 태평양전쟁위원회 회의에서 밝혔는데...
이후 미국이 조선을 25년간 신탁통치 하자고 주장하자 소련의 수정 제안으로 5년으로 줄입니다.
스탈린은 미국의 국력이 강하니 25년이면 조선이 미국화 될 것을 우려해 기간을 단축한 것 일까요?
루즈벨트는 1941년 태평양 전쟁에서 조선인들이 일본군과 싸워 “미군의 목숨을 구한 실적” 이 전혀
없었으니 독립을 요구할 자격이 없다고 본 것인데.... 조선인들은 '천황의 황군' 이 되기 위해 일본
육사에 자진해서 입교했고, 강제로 징병이나 학도병이 된 조선인등 일본군이 무려 10만명이 넘습니다.
광복군은 500명도 되지않으니 일본군과 전투한 적이 단 한번도 없는데, 10만명은 미군 및 중국군, 영국군과
싸웠으며... 조선인 징용자들이 건설한 활주로에서 뜬 일본기가 미군 함정을 공격했고, 본의는 아니더래도
쌀과 면화를 공출하고 광산과 공장에서 총탄등 전쟁 물자를 생산해 일본군의 전쟁을 뒷받침했다는 것이라!
그러니까 미국이 보기에 조선인 (한국인) 들은 미군 편에서 싸운 자는 없고 일본군 편에서 싸웠다는 것 입니다?
한국인들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으니 해방되어 광복되고 독립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1941년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에 입대해서 싸운 한국인은 10만명이 넘어도 미군 편에서 싸운 한국인은
단 한명도 없었으니.... 미국은 5천년 세계사에서 보듯 한국이 일본 식민지에서 승리한 미국 식민지가
되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인데 조금만 참았으면 함경도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한민국이 되었을 것이라?
한국에서 오스트리아 노선을 따른 사람은 “김구와 김규식” 이니 전쟁을 막기위해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지만, 김일성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고 빈손으로 내려옵니다.
오스트리아 처럼 김구와 이승만에 김일성이 연합해 공동정부를 세우는 일은 불가능했습니다.
평화적 대화가 아닌 “무력으로 통일하겠다는 생각은 김일성과 이승만” 이 똑 같았으니 평화 주장은 이적세력
이라? 미국이 경무장 10만 이상은 지원해 주지 않으니 “이승만은 북침할 군대” 가 없었으나.... 김일성은
중국에서 4만 정예병 조선의용군이 넘어오고, 소련에서 탱크와 야포에 전투기를 받아 전쟁 준비를 완료합니다.
6. 25전쟁과 관련된 몇가지 미스터리 :
1. 한국과 대만을 미군 방어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라인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1949년 6월 말에 “주한 미군은 철수” 했으며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애치슨 라인 (Acheson line)” 을 발표하니 미국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극동 방위선” 을 의미하는데...... 전미국 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해 스탈린과 마오쩌둥
의 영토적 야심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동북아시아 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한 것 입니다.
태평양에서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니 “한국과 대만,
인도차이나 반도가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 된 것인데...... 한반도는 당시만 해도 “태평양을
미국의 내해” 로 만든다는 점에서는 “전략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는 인식이 지배적이라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 것이니..... 한국 외교부의 해명 요구에도 애치슨은 끝내 회답해 주지 않았습니다.
2. 6.25 직전에 미 군사 고문단의 강권으로 비상사태 해제
6.25전 부터 개성 송악산을 북한군과 국군이 서로 뺏고 뺏기는 “국지전인 소규모 전투” 가 계속
되어 왔는데, 저 선언과 관계없이 “오래전 부터 전쟁을 준비해 온 김일성” 은 애치슨 라인
까지 발표해 주니 “날개를 단 셈” 인데.... 1950년 4월 후방의 사단들을 전방으로 이동시키니
육군본부 정보국 유양수 소령 등도 인지해 “한국군도 비상” 이 걸리고 전투 태세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3개월도 안되어 “미군 군사고문단의 강권” 으로 한국군은 “비상사태를 해제” 하고 6월 23일
금요일 오후에 “장병의 3분지 1을 휴가, 외박, 외출” 을 보내며 (농번기라 시골 농사일 돕도록???)
차량의 3분지 1 을 정비 명목으로 후방으로 빼는데, 저 유양수 소령도 6월 24일 육본에서 춘천의
6사단 정보 참모로 쫓겨갑니다. 북한의 남침이 임박하다는 둥 말이 많은 자는 멀리 보내 버려야......
3. 6.25 전날 서울 장교 구락부 낙성식
6월 24일 서울에 “장교 구락부가 완성되어 밤에 댄스 파티” 가 열리는데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저
“2가지 조치를 완료” 후, 임기가 만료되어 도쿄로 갔고 참모장 라이트 대령이 군사고문단장 직무대행으로
국군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교구락부 낙성식 댄스 파티” 도 직무대행의 강권으로 열었으니 파주의 “1사단장
백선엽 장군” 을 비롯한 다수의 장군과 장교들은 부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밤 12시경에 서울에서 잠이 듭니다.
그리고 “6.25는 4시간 후인 6월 25일 새벽 4시” 에 일어나니 서부전선은 병력도 3분지 1이나 나가버렸고
지휘관도 서울에서 돌아오지 못했으며 몇 개월의 고된 비상사태가 해제된 일요일이라 역시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으니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3일만에 수도 서울” 을 뺏기게 되니, “김일성이 안심하고
남침할수 있는 여건” 을 제대로 마련해 준 것인데..... 춘천의 6사단만은 정상적인 상태에서 방어를 합니다.
4. 김일성의 오판
미국은 1, 2차 세계대전에서 보듯 전쟁은 여론의 동향을 보아야 하고 의회 동의도 얻어야 하는지라
“전쟁 참가에는 오랜 시간” 이 소요 되는데, 1949년 6월 주한 미군 철수후 1950년 1월 애치슨라인
을 발표하니 미국 방위선은 일본- 오키나와- 필리핀선 으로 한국과 대만을 제외했으며 1949년 8월
“장개석이 한국을 방문” 하자 미국은 이승만에게 국민당과 연합하면 “ 원조를 끊겠다고 경고” 합니다.
이러한 여러가지를 종합해 봤을 때 김일성은 모택동과 스탈린에게 인민군이 3개월 이내에 부산을
점령해 전쟁을 끝낸다면 “미국이 참전하는 일은 없을 것” 이라고 호언장담했는데..... 하지만
실제로는 미국은 주말 “휴일인데도 유엔안보리” 가 긴급 소집되고, 트루먼은 “의회를 거치지도
않고 파병” 을 신속히 결정하니 어리석고 경험이 일천한 김일성이 "미국이 친 덫" 에 걸린 것이지요?
5. 미군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신속한 미군 파병
규슈에 주둔중인 24사단 21연대 1대대 (스미스 부대) 는 전쟁이 일어나지 불과 “6일만인 7월 1일
부산” 에 상륙했고, 딘 사단장도 7월 3일 대전에 들어왔으며 사단 전체가 부산에 상륙한
것은 전쟁 발발 9일만인 7월 4일이니 가히 "전광석화" 라고 할만한데...... 미군은 인민군은
아시아 “후진국의 허약한 군대” 인지라 미군의 참전만 보고도 주눅이 들 것으로 생각 했습니다.
1대대 (스미스부대) 는 열차로 북상해 신속 과감한 전진으로 “남침 열흘” 만인 7월 5일 경기도
“오산에서 북한군 4사단과 첫 전투” 를 벌이는데, 인민군 탱크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으며
전투에서 참패하고 후퇴합니다....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단련된 만주의 조선의용군이 넘어와
주축이 된 조선 인민군은 미 24사단을 대전에서 격파하고..... “딘 사단장을 포로” 로 잡습니다.
6. 맥아더 원수의 오판
맥아더는 어떤 경우에도 “중공군의 개입” 은 절대로 없다고 호언 장담하며 영국과 캐나다, 호주 및
뉴질랜드등 영연방이 '38선에서 그만 멈추자' 는 반대의견을 완강하게 묵살하고는 진격 명령을
내리니 결국 “유엔군이 38선” 을 넘는데 “중공군은 평양이 함락” 되자 즉시 압록강을 넘어왔습니다.
맥아더는 확신에 차 있었으니 “포로로 잡혀온 중공군” 을 눈으로 보면서도 아냐? 이건 “소수의 정찰대”
일 거야..... 라며 끝내 중공군 참전을 인정하지 않는 황소 고집을 부리다가, 운산 전투와 군우리전투 및
장진호 전투 대패로 “1.4 후퇴” 로 이어지니.... 맥아더는 자기 눈으로 보고도 믿지 않는 미련 곰탱이 라?
7. 역지사지 (易地思之) :
임진왜란 때에 “평양이 일본군 고니시 부대에 함락되자 중국은 파병” 을 결심하고 7년간 누계 25만에
가까운 대병을 파병해서 “재정 파탄으로 인한 세금 폭징으로 농민 반란이 일나고 여진족이 흥기
하는걸 막지못해 망한 명나라 예에서 보듯이.... ”평양이 미군에 점령“ 되자 참전한 중국은 세계
최 강대국 ”미군이 중국 국경선인 압록강에 주둔“ 하는 상황은 절대로 용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며, 싸울때도 하지하책으로 적의 성을 공격할때는
반드시 “성문 하나는 비워” 두어 적이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니, 맥아더와 이승만이
“중국의 입장” 을 생각해서 “평양” 을 공격하지 말고 “황해도와 원산” 선에서 진격을 멈추고는
북한 정부의 유지를 인정한다면서 휴전을 제의했으면.... “중공군의 참전” 은 없었을 것으로 봅니다?
8. 모택동과 주은래의 오판
중공군 30만이 참전해서 경기도 남부 “평택” 까지 밀고 내려오자 백선엽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영국과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등 “영연방 국가들” 은 미국을 압박하여 중공에 "현전선에서 휴전" 을
제의하는데, 모택동과 주은래는 조금만 밀어붙이면 부산 이라고 생각해 거부하자 미군은 "융단폭격
으로 반격” 했으니 만약 받아들여졌으면 대한민국 국경선은 “충청도와 경상도선” 이 되었을 것 입니다?
전쟁도 “상대방의 입장과 처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맥아더와 이승만에 모택동과 주은래는 오직 “전부
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으로 적을 완전히 섬멸” 할 생각만 했으니..... 대동강과 원산선에서 휴전
했더라면 김일성은 아직 우상화 되기 전이니 “전쟁 패배 책임으로 실각” 하고 허약해진 북한은
훗날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고 신뢰” 를 쌓으면 “동독처럼 흡수통일” 되었을 수도 있으니 아쉽습니다.
중국의 국력이 커져서 미국과 함께 "G2" 를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자 미국은 “중국을 포위해 저지”
하는 전략으로 들어갔으니..... 한국에도 “쿼드” (미국, 일본, 호주, 인도) 참여를 요청하고
“5 아이즈”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 에도 참가할 것을 강권하는데..... 중국 역시 한국에
“사드 배치 철수” 와 “일대일로” 및 중국 주도 “아시아인프라 투자은행” 에 참가할 것을 요구합니다.
태평양을 미국 내해로 만드는 동맹국 “일본은 쿼드등 확실히 미국편에 선” 반면 한국은 어정쩡한 입장으로
“박근혜는 베이징 천안문” 에 섰으며“ , 한국 외교부 장관은 미국에 가서도 중국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두둔하니 “신먼로 독트린으로 아시아에서 철수” 하는 미국은 부상하는 “중국을 견제” 하자면 확실한 친구
“일본의 힘” 을 키워야 하니 1905년의 태프트~가쓰라 협정 처럼 “한국을 일본의 손에 붙이려” 할 것입니다?
9. 여수. 순천사건이 6.25 직전에 터졌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반도체와 자동차에 조선과 철강 그리고 군수산업등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부강한
나라가 되었으며, 한류는 전세계인들이 동경하는 훌륭한 나라가 되었으니... 6.25는 극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시에 주둔하던 14연대 2천여명이 지창수 상사등 남로당에 속한
군인들의 선동으로 제주 4.3 사건 진압 출동을 거부하고 군사 반란을 일으켜 스무명이 넘는 장교들을
죽이고 부대를 나와 구례, 곡성과 순천을 휩쓸면서 무수히 많은 민간인까지 살해하고 진압군에 쫃기어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했으며, 이 사건으로 국군 내에 남로당 계열 장교들이 모두 숙청 됩니다.
만약에 저 여수. 순천 사건이 1948년에 터지지 않고, 1950년 6월에 터져 전국의 여러 국군 사단에서
반란이 동시에 일어나서 국군이 와해된 상태에서 6.25가 터졌다면.... 참으로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을 것인데, 다만 여순사건이 남로당의 지시가 아닌 지창수등의 단독 행동이라는 것이라!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일어난 사건에 충격받고 당황해 좌절한 사람은 남로당과 북로당이니 분노했습니다.
가장 놀란 사람은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이현상이었으니, 한달음에 달려와 지창수등 반란군은 만나 첫 마디가
"장교들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지창수가 장교들을 모두 죽였다고 하자 이현상은 낙담해서 대성통곡을
하는데, 14연대는 새로 편성된 연대로 남로당이 공을 들여 장교 70% 가 남로당인데, 지창수가 모르고 같은
편을 죽였고, 박정희 소령등이 체포돠면서 군내 좌익이 일망타진된후 6.25가 터졌으니 불행중 다행인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