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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어때?"
케익을 만들다가 생크림이 모자라서 아민이한테 좀 만들으라고 했더니, 처음엔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사방팔방 다 튀기면서
혼자 생 난리를 치다가, 15분이면 되는 걸 30분만에 겨우 다 만들어 놓은 아민이. 그냥 거품기로 잘 젓기만 하면 되는데 뭐
가 이렇게 어렵냐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다 만들고나서는 자신도 뿌듯했는지, 새끼 손가락에 찍어
서 맛 좀 봐달라고 하더니 지금 내 대답을 기다리는 아민이의 눈엔 설레임으로 가득하다. 혹시라도 맛이 없다고 하면, 잔뜩
풀이 죽어서 실망할 표정.
"응? 어때? 맛 없어?"
"....맛있어!!"
입맛을 다시다가 장난 한 번 쳐볼까 했는데 마음 약한 우리 아민이 진짜 상처 받을까봐 솔직하게 대답해줬더니, 내 말에 만
족하는듯 눈이 휘어지게 웃으면서 너무 좋아한다. 너무 달콤하고 부드러워서 자꾸자꾸 먹고 싶지만, 얼른 케익부터 다 만들
어야겠단 생각에 아민이한테 잘 했다고 한 번 칭찬해주고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처음에는 아빠꺼랑 아로하꺼랑 딱 이렇게 두 개만 만들려고 했는데 어쩌다보니 벌써 5개째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걸 다 누
구한테 줄지 생각은 안 해봤지만 재료가 남아서 그냥 다 만드는 중. 몇 시간동안 계속 바쁘게 움직였더니 슬슬 다리도 아프
고 허리도 아프고 왠지 뒷골까지 땡기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기분 좋은 날이니까 끝까지 기분 좋게 하려고 노력중이다.
"근데 아민아, 케익 두 개 남는 건 누구주지?"
"우리 못난이 동생! 안 주면 또 자기만 안 준다고 삐져~ 한 밤 중에 쳐들어올지도 몰라."
"그럼 쳐들어오라지 뭐. 쳐들어와도 죽어도 개류는 안 줄 거야!"
"왜?"
"못난이니까."
사실은 어젯 밤에 개류한테 전화가 왔었는데. 몸은 좀 어떠냐고 걱정은 못해줄 망정 '왜 아프고 지랄이야. 병신' 이라고 욕
만 하다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뚝 끊어버리더라. 그런데 케익은 무슨... 절대 안 줘!! 흥. 원래 크리스마스는 사랑만 가득한
날이 되어야 하는데, 거지 같은 개류 놈 생각에 기분이 살짝 상했다. 그런데.
"아가씨, 이제 잘 하네요? 그쪽으로 나가도 되겠어요~"
"그치? 나 쫌 잘 하는 것 같애!"
하실장 언니의 칭찬에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또 헤헤- 웃고 있으면, 보조처럼 내 옆에 서서 짤주머니에 생크림을 채우고 있
다가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민이. 처음엔 빵 시트에 골고루 생크림 펴바르는게 참 힘들더니, 벌써 5개 째라고 속
도도 점점 빨라지고 데코하는 실력도 제법 늘었다. 내가 원래 이렇게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손재주가 있는 애였나 싶을 정도
로, 처음 하는 건데도 전혀 형편 없지 않았고. 재료는 다 거기서 거기였지만 디자인은 각각 달랐다.
"제일 예쁜 거 나 가져도 돼?"
"응~ 오늘 나 도와줬으니까, 아민이가 제일 예쁜 거 가져!"
"아싸!! 그럼 나 이거."
미리 만들어놓은 케익 네개를 조리대 위에 나란히 올려놓고 눈을 열심히 굴리더니, 결국 두 번째에 있던 케익을 고른 아민
이. 이 중에서 과일이 제일 많이 들어가기도 했지만,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나 혼자만의 정성이 깃들여진 케익이였다.
"난 못난이가 아니니까."
"응?"
"난 착한 도련님이니까, 이거 가져도 되지?"
"응. 가져 가져!! 여기."
고개를 세차게 끄떡거리면서 아민이가 고른 케익을 들어 앞으로 내미니, 고마워하며 오랜만에 볼에 쪽- 하고 뽀뽀해주는 아
민이. 예전 같았음 아무 생각없이 입술에 해주고도 남았을 텐데 요즘엔 좀 자제하고 있는게 눈에 보인다. 손수 구운 쿠키를
예쁘게 하나씩 포장하다가 우릴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냥 웃어버리는 하실장 언니.
"로하씨는 참 힘들겠어요."
"왜?"
"아빠한테 질투해, 동생들한테 질투해. 로하씨 성격에 싫은 표현도 못하고 그냥 웃어넘길 텐데, 속은 벌써 쌔카맣게 다 탔
을 걸요?"
"언니.... 모르는구나? 언니가 생각하는 것 만큼 아로하 그렇게 착하지 않아!"
"맞아요!! 저번엔 저한테 막 욕 하면서 베개도 집어 던지고, 홍이랑 뽀뽀하지 말라고 소리도 질렀는데요?"
"내가 막 장난으로 다른 남자 얘기 하면, 삐져서 전화도 그냥 끊어버리고~"
"누나가 몰라서 그렇지, 의외로 엄청 소심하다니깐요?"
"맞아 맞아! 특히 요즘에 보면, 삐돌이가 따로 없어 완전."
"그치? 우리 형 나이를 거꾸로 먹나봐."
언니의 말에 절대 동의 할 수 없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고 연신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말하는 우릴 보고 묘하게 웃음짓는 하
실장 언니.
"둘이 진짜 잘 어울린다... 진짜 질투나겠다 로하씨."
"우리 잘 어울려?"
"네~ 남들이 보면 연인인 줄 알겠어요."
"그래?"
그러고보니 한 때 사이가 좋았던 개류랑은 이제 톰과 제리 같다는 말까지 들을 만큼 서로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고. 남들이
그렇게 착하다고 칭찬하는 아로하랑도 가끔 티격태격하고 삐지고 토라지고 하지만, 아민이랑은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다.
같이 있으면 항상 편하고, 즐겁고, 짝짝꿍이 잘 맞아서 웃기만 했다. 그만큼 사이가 좋아서 그런가? 아민이랑 잘 어울린다
는 말, 이번이 처음은 아니였다.
"이건 비밀인데."
오랜만에 잘 어울린다는 말에, 만약 내가 아로하 말고 아민이랑 사귀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엉뚱한 상상을 하고 있는데. 갑
자기 날 끌어안으며 내 정수리 위에 턱을 대고 장난스런 말투로 얘기하는 아민이.
"형만 아니였음, 홍이 내꺼 했을지도 몰라요!!"
"어머, 민이씨... 진심이에요?"
이럴 때 보면 정말 순진한 건지, 아민이의 표정과 말투가 다 장난이라고 말해주고 있는데도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진심이냐
고 묻는 하실장 언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왠지 걱정스럽다는 그런 표정으로 아민일 향해 물으면, 오늘따라 장난
끼가 돋은 아민인 하실장 언니보다 더 순진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떡거리면서 진심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뒤에서 티셔츠를 강하게 당기는 바람에, 사정없이 목이 졸리면서 뒤로 끌려가는 아민이.
"아악! 뭐야, 이거. 악...!!"
하실장 언니랑 나, 그리고 아민이. 이렇게 우리 셋 밖에 없었던 공간에서 갑자기 무지막지한 힘을 자랑하며 아민일 뒤로 끌
어당겨 내동댕이 치는 건 다름아닌 아로하였다. 대체 언제 온 건지 뭔가 잔뜩 맘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구기고서 계
속 꺅꺅대는 아민일 향해 낮게 한마디 날린다.
"시끄러워."
목소리를 듣고 자기를 잡아당긴게 누군지 알았는지 눈을 정확히 두배로 부풀리며 빠르게 돌아보더니, '헉' 소리를 내며 잽
싸게 두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싸는 아민이. 콜록 콜록- 기침 소리를 몇 번 낸 후 아로하의 눈치를 살살 살피며 소심한 목
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한다.
"...나 죽을 뻔 했어, 방금."
아무래도 방금 했던 장난을 무마시키려는듯, 최대한 아픈척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나 형 때문에 죽을 뻔 했다' 라는 걸 인
식시켜주려고 한 것 같은데, 돌아오는 아로하의 대답은 참으로 무심했다.
"어쩌라고."
"헐.... 홍아!!!"
방심하고 있을 때 그렇게 목을 졸라놓고도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는 자신의 형을 보고 서러웠는지, 울상을 지으면서 애타게
내 이름을 부르는 아민이. 그 눈빛엔 서럽고 서운한 감정들로 가득했다. 아로하는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조기 퇴근이라
도 했는지 아직 5시 반 밖에 안 됐는데 벌써 집. 어쨌든, 아민이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마저 거슬렸는지 나랑 세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 서서.
"꼴통. 이리와."
라고 말하며 내 손목을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는 아로하. 아직도 눈썹이 꼼틀거리고 계속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는게
누가 보면 진짜 사랑 싸움이라도 하는 줄 알겠다. 언니... 봤지? 아로하 이런 남자야. 동생한테 질투나 하는 유치한 남자라
고. 아로하 성격상 그냥 웃으며 넘어가는 일은 절대 없다고.
얼떨결에 아로하 품에 안겨서 피식 피식 웃다가 슬쩍 하실장 언니를 바라보면, 정말 의외라는 듯이 또는 웃기다는듯이 우리
셋을 번갈아 보면서 웃고있는 하실장 언니. 거봐.. 소심하다니까? 지금 아로하가 하는 행동으로 봐선, 이번 건 왠지 오래갈
것 같단 생각에 살며시 허리에 팔을 두르고 같이 안아주면, 이제서야 조금 누그러졌는지 내 정수리에 살짝 입맞추며 평소와
다름 없는 목소리로 내게 묻는다.
"근데 이건 뭐야? 왠 케익?"
아, 맞다.... 망했다. 원래는 아로하 몰래 만들어서 짜잔- 하고 깜짝 선물 하려고 했는데. 이게 뭐야!!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히잉."
"전화했는데 니가 안 받길래, 자는 줄 알았지..."
속상한 마음에 내가 울먹거리며 얘기하자, 갑자기 얘가 왜 이러나 싶은지 말 끝을 흐리면서 어벙벙한 표정을 짓는 아로하.
"아... 속상해."
고개를 숙이고 아로하의 가슴에 머리를 콕 박고서, 나 혼자만 들리게끔 아주 작은 목소리로 혼자 속상해하고 있는 사이. 아
로하는 영문도 모르는 채 그냥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줄 뿐이고, 아민인 아까 자기꺼라고 미리 찜해두었던 케익을 스스
로 상자에 포장하며 집에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이건 아류꺼."
심지어는 빵 시트에 딸랑 생크림만 발라놓은 5번 째 케익 한 가운데에 체리를 하나 얹어주고, 그건 아류 거라며 씨익 웃으
며 케익을 두개나 챙기는 아민이. 방금 전 언제 그렇게 서러운 얼굴로 아로하의 눈치를 살폈냐는 듯이 너무나도 해맑은 표
정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콧노래까지 부른다. 하여튼, 귀엽다니까? 너무 아이 같은 아민이의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서 망
쳐버린 이벤트에 우울했던 마음도 조금은 괜찮아졌다. 여전히 속상하긴 하지만.
"형아."
"너 아직 안 갔냐?"
케익 두 개를 양 손에 들고 웃으며 아로하를 부르던 아민인, 자신을 흘겨보며 차갑게 말하는 아로하의 반응에 상처 받은 듯
귀엽게 울상 짓다가. 이내 뭔가 결심한듯 다시 씨익 웃으면서 대뜸 사랑한다고 말한다. 뜬금 없는 동생의 애교에 살짝 입꼬
리를 올리면서 들릴듯 말듯 작게 '...미친' 이라고 말하던 아로하는, 이어지는 다음 말에 바로 표정을 굳힌다.
"형수."
"뭐?"
"사랑해 형수. 나 갈께!! 안녕히 계세요!!!"
울그락 불그락 변해버린 아로하를 향해 혓바닥을 내밀고 보복이 두려워서 재빠르게 주방을 뛰쳐나가는 아민이. 곧바로 현관
까지 직행해서 그대로 집을 나가버린다. 나랑 하실장 언니는 웃겨 죽겠다고 웃고 있는데, 아로하 혼자 심기가 불편한 듯 고
운 미관을 좁히면서 아민이가 사라진 곳을 계속 노려보며 말한다.
"짜증나..."
.
.
.
"라희야. 안 추워?"
"응!! 엄마는??"
"엄마도 하나도 안 추워~"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이해 오랜만에 온 식구가 모여 다 같이 밥을 먹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밤 늦게 바람을 쐬러 나
온 우리. 벌써 12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낮에 낮잠을 자서 그런지 아직 쌩쌩한 똥강아지다. 항상 내가
뭘 물어보면 엄마는? 하면서 꼭 되물어주는 착한 딸. 내 품에 안긴 채 벙어리 장갑을 낀 손으로 내 얼굴을 따뜻하게 감싸주
며 천천히 눈을 깜빡깜빡 거리는게 정말 너무 예뻐죽겠다.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쁜 건지, 통통한 볼을 살짝 꼬집으며 빨개
진 코에 쪽- 뽀뽀해주면, 베시시 웃으면서 나한테도 똑같이 뽀뽀해주는 똥강아지.
"아라희. 엄마 힘들게하지 말고 아빠한테 와."
"싫어!"
"엄마 팔 아야해. 너 때문에 엄마 아팠으면 좋겠어?"
"힝..."
"착하지 우리 딸? 아빠가 안아줄께, 이리와."
나한테 폭 안겨서 아로하를 향해 눈을 찡긋거리던 똥강아지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거의 울먹이는 얼굴로 아로하 품에
가서 안기고. 아로하한테 안겨서 우울한 듯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눈을 내리깔고 있던 똥강아지가, 자신의 머리를 살살 쓰
다듬어주는 내 손길에 다시 고개를 들고 서글픈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이따 엄마가 또 안아줄께. 응?"
"알아쩌..."
"아이구 착해. 라희야, 아빠한테도 뽀뽀해줘!"
"아빠?"
"응, 아빠 사랑해요~ 하면서 뽀뽀해줘."
처음에는 눈만 깜빡거리면서 멀뚱멀뚱 아로하를 바라보다가, 곧 히히 웃으면서 정확히 입술에 쪽- 뽀뽀해주곤.
"아빠. 사랑해에~"
라며 애교있는 말투로 수줍게 얘기하는 똥강아지. 아로하 품에 안겨서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나를 바라보는 똥강아지의 머
리를 쓰다듬어주고. 남자라 그런지 똥강아지를 한 팔로 거뜬히 안은 아로하와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한시간 전쯤, 갑자
기 뭐 하고 싶은 거 없냐고 하길래 하고 싶은 건 없고 그냥 사람이 많은 곳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날 명동으로 데리고 나온
아로하. 원래 평소에도 사람이 많은 곳이긴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더 사람이 많은 것 같은 명동 거리. 모두들 행복해 보
여서 나까지 더 행복해지는 기분이다.
"근데 꼴통. 아까 그 케익, 진짜 나 주려고 만든 거 아니야?"
"어?? 아, 아니라니까!! 그냥 심심해서 만든 거라고 몇 번을 말해!"
아로하의 손을 잡고 길을 걷다가, 갑자기 나온 케익 얘기에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으며 목소리를 키운 나. 큰 이벤트는 아니
였지만 아무리 작은 이벤트라도 완벽하지 못하면 그냥 안 하는게 낳은 것 같아서, 어설픈 건 너무 싫어서 그냥 대충 얼버무
리며 넘어갔었는데... 그땐 어설픈 내 거짓말도 그대로 다 믿는 것 같더니 이제와서 또 뜬금없이 얘기를 꺼낸다.
"아, 그렇구나~ 난 또. 나 주려고 만들어 놓고 민망해서 거짓말 하는 줄 알았지."
"뭐, 뭐??"
"근데 그냥 심심해서 만들었다고 하니까, 믿어야지 뭐."
"...."
나를 힐끔 쳐다보며 묘하게 웃음짓는 아로하 때문에 괜히 얼굴이 빨개지고 민망해서 고개를 푹 숙이는데, 갑자기 세상이 온
통 캄캄해졌다. 화려하게 조명을 비추던 상가들의 불이 하나도 남김 없이 다 꺼지고, 불빛 하나 없이 갑자기 어두워진 거리
에 당황해서 고개를 번쩍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겁먹은 듯 칭얼거리면서 자신의 품에 더 꽈악 안기는 똥강아지를 달래
주다가 한 손으로 내 고개를 돌려 자신과 마주보게 만드는 아로하.
처음엔 아무 것도 안 보였는데 점점 어둠에 익숙해지니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아로하의 얼굴. 나랑은 달리 하나도 당황한 것
같지 않은 모습이다. 입가에 살짝 걸려있는 웃음이, 왠지 이렇게 될 걸 예상이라도 한 듯 여유로워보였다.
"꼴통."
"응?"
"잘 먹을께."
그리고는, 내가 뭐라고 대꾸할 틈도 없이 내 턱을 가볍게 잡아 올리고 내 입술에 입맞추는 아로하. 입 맞추기 전, '잘 먹을
께' 라고 했던 아로하의 말이 도대체 케익을 말 하는 건지 입술을 말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러나 저러나 민망한 건 마
찬가지였다. 아무리 장소 불문하고 키스를 한다 해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해보긴 처음이라 그런지, 캄캄해서 아무도
보지 못할 텐데도 괜히 더 부끄럽고 얼굴이 화끈거려서 애꿎은 주먹만 꽉 쥐었다. 아로하가 내 입술을 한 번씩 핥을 때마다
심장이 너무 떨려와서 옴짝달싹 못하고 입을 앙 다문 채로 눈만 꾹 감고 있었더니, 피식 웃으면서 마지막으로 가볍게 세 번
입맞추고 내 볼을 어루만지며.
"눈 떠 이제."
"...응?"
"볼 일 끝났으니까 이제 집에 가자."
"헐..."
볼 일이라니, 도대체 뭘 말하는 거지? 우리가 나와서 한 거라곤 그냥 조금 돌아다닌 게 전분데. 캄캄했던 거리가 다시 환하
게 불을 밝히고, 멈춰있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다시 유동적으로 바뀌고, 겁먹은 듯 아로하의 가슴에 얼굴을 콕 박고 있던 똥
강아지가 환해진 불빛에 다시 고개를 들면, 씨익 웃으면서 다시 내 손을 잡고 걷기 시작하는 아로하.
나중에야 안 건데 아까 갑자기 불이 꺼진 건 '키스 타임' 때문이란다. 어쩐지 혼자 여유롭더라니, 다 알고 있었던 거야. 그
럼 볼 일이라고 말했던게 그거였나? 갑자기 또 빨개지려고 하는 얼굴을 찬바람에 애써 진정시키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앞만
보고 걸었다. 명동 키스타임이라고, 무지 유명한데 왜 모르냐며 놀리듯이 말하는 아로하 말엔 대꾸도 안 하고 똥강아지한테
만 애정을 쏟아부으며 집까지 왔다.
그런데, 밖에서 보는 불 꺼진 집이 왜 이렇게 으시시해 보이는 건지... 새벽이라 캄캄한게 당연한 건데도, 오늘따라 유난히
더 캄캄해보이는 집을 올려다 보며 어느새 잠들어버린 똥강아지를 안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상황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얼어버린 나.
"맘에 들어?"
나보다 한걸음 늦게 집에 들어와, 내 어깨를 감싸며 따뜻한 눈길로 나를 향해 웃어주는 아로하. 감동이라는 말, 이럴 때 쓰
는 거 맞지? 정말 감동이라는 말 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현관부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쭉 이어져 있는 수 백개의 촛
불과 그 길을 따라 뿌려져 있는 무수한 꽃잎. 어둠 속에 오직 나를 위해서만 영롱하게 빛나고 있는 작은 불빛들... 보는 순
간 마음이 울컥해서 가슴이 찡해지고, 아로하의 마음에 감동해서 점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데. 하마터면 눈물이 떨어질뻔한
바로 그때.
"확 다 꺼버리기 전에, 빨리 올라 오지?"
뭐야, 쟤.... 계단 위에 삐딱하게 서서 시건방진 말투로 얘기하는 개류 놈을 보고 눈물이 쏙 들어갔다. 그리고.
"홍아, 빨리 와! 초 다 녹는단 말이야!!"
목소리만 들어도 울상인 아민이가 날 향해 빨리 오라고 소리친다. 그도 그럴 것이, 초 길이가 짧아서 오래 둘 수는 없는 이
벤트. 갑자기 웃음이 픽- 새어 나와 고여있던 눈물을 대충 손등으로 닦고 아로하에게 고맙다고 말하면, 대답대신 이마에 가
볍게 입맞추는 아로하. 내가 안고있던 똥강아지를 자기 품에 안고, 그렇게 아로하의 손을 잡고 촛불이 켜진 길을 그대로 따
라갔다.
계단에서 끝나지 않고 방 안까지 이어진 촛불은, 어디서 구해왔는지 예쁜 티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하트 모양으로 마무리 돼
있었고. 그 티테이블 위에는 낮에 내가 만들었던 케익과 화이트 와인 한 병, 그리고 작은 선물 하나가 올려져있었다.
"이제 불 켜도 되지? 밖에 있는 촛불은 우리가 끄고 갈테니까, 방에 있는 건 알아서들 끄시고."
아까 낮에 아로하가 아민이한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너 아직 안 갔냐?? 잊고 있던 개류 놈이 어느새 방까지 따라 들어와서
는 혼자 길게 떠들며 제 멋대로 불을 키고, 그 옆에 서서 계속 싱글벙글 웃고있는 아민이.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선물상자를 보고 의아해 하는 아로하. 아무래도 선물은 자기가 준비한게 아닌듯, 선물 상자를 들고 동생들을 바라보며 얘기
한다.
"이건 뭐야?"
"보면 몰라? 선물이잖아. 크리스마스 선물."
"맞아! 크리스마스 선물!!"
"우리가 야심차게 준비한 거니까, 서로 합심해서 결과물 만들어와."
"응!! 라희는 우리가 데리고 갈께!"
"너무 고마워할 필욘 없고. 가자 형."
"형아 화이팅. 안녕 홍아!!"
아, 정신 없어.... 침대 위에 눕혀놓은 똥강아지를 데리고 잽싸게 밖으로 나간 개류와 아민이. 근데 무슨 문을 저렇게 세게
닫고 나가는 건지, 아주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 나가는 두 형제를 보고 혀를 쯧쯧 차고 있으면, 선물이 뭔지 궁금했는
지 그새 포장을 뜯고 있는 아로하다.
"뭐야?"
"글쎄.."
도대체 둘이 뭘 준비했길래 저렇게 말이 많은 건가, 나도 슬슬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포장을 뜯고 있는 아로하 옆에 달라붙
어 고개를 내밀고 내용물이 드러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상자 안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눈사람 모양의 크리스마스
카드였다.
"화끈한 밤 되세요."
"동생은 나처럼 귀여운 아들로... 부탁해요?"
잠시 상자를 내려놓고 같이 카드를 읽어 내려가던 우리의 얼굴은 묘하게 굳어갔다. 아니, 내 얼굴만 굳었다고 해야 더 정확
할 것이다. 처음에 한줄만 읽었을 땐 무슨 말인지 몰라서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는데, 두 번째 줄을 읽으면
서부턴 완전히 얼굴이 사색이 됐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카드를 거의 바닥에 내동댕이 치듯이 던져버리고 빠르게 내용물을 확인하던 난,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
라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얼굴이 너무 화끈거리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서, 눈 밑에 경련이 일어나는 느낌. 썩을 개류놈과
아민이가 야심차게 준비했다던 그 선물은 바로, 듣기만 해도 민망한 커플 속옷이였다. 디자인이 귀여웠더라면, 아니 평범하
기만 했어도 이렇게 민망하진 않았을 텐데. 아로하껀 망사고, 내껀.... 말로만 듣던 티팬티다.
"미친... 짜증나!!!"
결국 속옷마저도 바닥에 던져버리고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부채질하고 있으면. 난 차마 부끄러워서 제대로 펼쳐보
지도 못한 천쪼가리들을 다시 줏어서 눈 앞에 펼쳐보이곤, 뭐가 그렇게 웃긴지 완전 크게 웃어버리는 빌어먹을 아로하.
"너도 똑같애! 니가 시켰지? 어?? 웃지마. 웃지 말라고!!"
"왜, 예쁘기만 한데. 입어봐 꼴통. 응? 보고 싶어."
"죽을래? 변태도 아니고 진짜. 씨... 짜증나!! 아빠한테 이를 거야."
갑자기 왜 이렇게 서러운 건지. 이런 선물 한 번만 더 받았다간 심장이 뻥 터져서 죽을 것만 같았다. 왜 이렇게 심장이 콩
닥콩닥 빨리 뛰는 건지, 부끄럽고 창피하면서도 왠지 셋이 짜고 날 놀리는 것 같아서 화가났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울컥하
는 마음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가려는데, 잽싸게 날 뒤에서 끌어안고 내 어깨에 턱을 괸 채 나긋
나긋한 목소리로 얘기하는 아로하.
"이런 거 안 입어도 충분히 예뻐. 화내지마 꼴통. 오빠가 잘못했어."
"..."
"미안해... 응? 왜 울고 그래. 울지마."
나를 살살 달래며 말하는 아로하의 목소리에 갑자기 더 서러워져서 고여있던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내 눈물을 닦아주는 아
로하의 손을 쳐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고집스럽게 얘기하는 나.
"비켜... 아빠한테 가서 잘 거야."
"그럼 나는?"
"몰라. 비켜... 흐읍. 짜증나. 너 싫어."
"응, 미안해. 울지마."
그냥 웃으면서 넘길 수도 있는 일인데 왜 이렇게 서러운 건지 모르겠다. 이벤트의 감동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이런 봉변을
당해서 그런 건지. 아님, 정말 부끄러워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꾸역꾸역 삼키
면서 여전히 아로하한테 안겨있는 나.
그리고 2분 정도 시간이 흐르고 눈물이 점점 말라갈 때. 천천히 뒤로 돌아 촉촉히 젖은 눈망울로 아로하를 올려다보며 천천
히 두 눈을 깜빡거렸다. 아주 순진한 어린 양의 얼굴로 한 3초 동안 아로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옅게 웃으면서 양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 엄지손가락으로 젖어있는 눈가를 닦아주는 아로하.
"오빠..."
"응?"
"저거 입어보면 안 돼?"
"응..? 뭐라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속옷들을 가리키며 얘기하자 갑작스런 내 말에 아로하 역시 당황한 듯, 잘못들은 건 아닐
까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나에게 되물었지만.
"저거, 망사... 입어봐. 응? 나 보고 싶어."
조금 머뭇거리면서 다시 한 번 더 정확하게 얘기하는 나. 사실 나도 궁금했다. 저걸 입은 아로하의 모습은 어떨지. 우는 내
내 그 생각이 머리 속을 헤집고 다녀서 눈물도 빨리 말라버렸다. 말 꺼내기가 무지 부끄러워서 얼굴까지 홍시처럼 빨개졌지
만,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창피한 건 창피한 거고 궁금한 건 또 궁금한 거니까. 용기내서 한 내 말에 처음엔 당
황한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날 바라보던 아로하가, 기분 나쁘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더니.
"입으면?"
"응?"
"입으면, 넌 뭐 해줄 건데?"
끄응...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예상 밖의 반응에 눈썹이 꼼틀대는 나. 도대체 나한테 뭘 바라고 하는 얘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더불어 내가 뭘 해준다고 해야 입어줄까 하는 생각에 혼자 속으로 한참 고민하고 있을 때, 개류
와 아민이가 써준 카드를 내 앞으로 내밀며 말하는 아로하.
"화끈한 밤."
"헐..."
"아들 딸 상관 없이 하나만 만들자."
너무 노골적인 말에, 순식간에 온몸이 후끈 달아올라 얼굴은 마치 열이라도 나는 것처럼 매우 뜨거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굳어있는 날 보며 씨익 웃더니, 날 가볍게 안아들고 침대 위로 눕히는 아로하. 결국, 내 운명은
저 카드대로 가나보다. 맙소사... 내가 낚였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왠지 오늘은 잠 못 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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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내일 가지고 오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조금 일찍 왔네용. ㅋㅋ
크리스마스는 잘 보내셨나요? 전 집에서 잠만. ㅋㅋㅋㅋㅋㅋ
다음편은 수요일에 12시 땡하면 가지고 올께용.
(업쪽 = 숫자)
아, 그리고 '명동키스타임' 예전에 비가 티비에서 말한 적 있는데
네이버에 찾아보면 있다는 사람들도 있고 없다는 사람들고 있고. ㅋㅋㅋ
그래도 소설이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봐주세요 ㅋㅋㅋㅋ
저도 이번 크리스마스때 집에만 있었어요 ㅠㅠㅠ 완전 방콕; 하루종일 잠만 자고 ㅠㅠ 이번에 진짜 밀린 잠 다 잔듯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뭐 ㅠㅠ 이제 유부녀라 그런지 크리스마스가 큰 의미가 없어져서 ㅋㅋㅋ 그리 슬프진 않았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암튼 넘 감사합니당 담편도 기대해주세요 ㅋㅋㅋㅋ
재미있게 읽었어요..ㅎㅎ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ㅠ ㅋㅋㅋ
ㅋㅋㅋ크리스마스따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기억빨리 찾앗으면 조켓어요~
라희동생은 남자아이 원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다들 아들을 원하시는군요 ㅋㅋㅋㅋ 역시 딸이 있으니깐 ㅠㅠ ㅋㅋㅋㅋ 감사합니당
오늘첨보는데 완전 달달해서 좋아요 ㅋㅋㅋ
첫편부터 보고올께요 ㅋㅋ
아 ㅋㅋㅋㅋㅋ 네 감사합니다 ㅠㅠ 53편만 마음에 드는게 아니였음 좋겠네용 ㅋㅋㅋ
ㅋㅋ결국 이까지 다보고왔네요
끝까지 달려주셔서 넘 감사해요 ㅋㅋㅋㅋㅋ
아 ㅠㅠㅠ 달달해 ㅠㅠ 이런거조아요ㅠㅠ
ㅋㅋㅋㅋㅋ 저도 계속 달달하기만 했으면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