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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이가 너무 늦었습니다. (머리박)
여기에서 이어집니다.
https://cafe.daum.net/Europa/1AT/30796
*마라노 - 개종한 유대인
*주인공은 중세인이며, 주인공의 사상은 작성자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PC 가독성이 영 좋지 않으므로 모바일을 추천합니다.
지금 제정신이냐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앞에 선 이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나는 이 사시나무처럼 벌벌 떠는, 나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사무관을 노려보았다. 용서해 주십시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빌었다. 바짝 낮춘 그 애처로운 모습이 오히려 더 울화를 돋궜다.
“지금부터 셋을 셀 테니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라. 셋을 센 후에도 남아있다면 내 자네를 산 채로 강물에 처박을 테니.”
하나. 나는 위협하는 짐승처럼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그는 물러가겠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뒷걸음질로 달아났다. 허둥대는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집무실에는 사람의 침 삼키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싸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다른 이들에게까지 겁줄 마음은 없었는데. 그러나 나는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 눈앞에 선 이에게 지금 당장 치안대장을 불러오라 지시했다. 이미 해가 가라앉아 밤의 창백한 어둠이 내리던 시간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착취가 만연하고 또 얼마나 왕가가 받아야 할 것을 횡령했을까. 조금 전 도망간 이가 가져온 같잖은 명세서에 적힌 숫자들이 물에 비친 양 눈에 어른거렸다. 공역을 시작한 첫 달 치의 집행 예산 기록이었다. 그 중 노동 임금이 보르도 일대와 비교해 턱없이 낮았다. 보르도에서는 역병 전과 비교해 고용 금액이 배 이상 뛰었다. 사람이 줄어들어 웃돈을 주고도 노동자를 구할 수 없게 되자 영민들은 더는 무급으로 영주에게 봉사하려 하지 않았다. 돈을 모아 농노에서 자유민이 된 자도 적지 않았다. 그런 임금 상승이 절반도 반영되지 않았다. 이 가격이 푸아티에의 일반적인 인건비라면 생각할 수 있는 건 하나다. 임금 담합. 거주와 가족이 걸려있는 자는 멀리 다닐 수 없고 주위의 일자리가 그것뿐이라면 어쩔 수 없이 낮은 임금을 감내하며 일하게 된다. 여유가 없으니 목숨을 버티기에도 벅차 소비가 줄어들어 시장이 침체하고, 재화가 돌지 않으니 조세를 거두기 어렵다. 중간에서 배를 불린 자들 때문에 일반인의 소득과 그에 비례한 국가의 징수 수입이 다 줄어들었다.
‘그리고 돈을 아꼈다며 내게 이걸 들고 왔단 말이지.’
시장 담합, 그것도 노동자의 임금을 다 같이 낮추는 행위가 관원의 묵인도 없이 벌어졌을 리가 없다. 이 서류가 내게 당도하기까지 거친 손 중에 분명 가담자가 있다. 누군가는 직접 주도했을 테고 누군가는 이득을 나눠 가졌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치안대장을 기다리며 조금이라도 연관했으리라 짐작되는 이들 전원의 체포영장을 직권으로 작성했다. 잠시 후 도착한 치안대장은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에 경악한 빛을 드리웠다.
“폐하, 모반입니까?”
나는 그제야 창밖에 부푼 상현달이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음을 알아챘다. 이런 시간에 갑자기 불렀으니 중대한 사건이리라 짐작할 만도 하다. 대개 지금은 가족이 식탁이나 거실 등에 함께 모여 앉아있을 시간이다. 어둠이 일찍 내리는 시기이니 더욱 그렇다. 무미건조한 영장에 몇 마디 더 말을 얹어야 했다.
“이들을 횡령과 뇌물 수수 혐의로 체포하니 이들이 집을 떠나 있을 내일 낮에 시행하도록 하게. 한 명씩 수감하되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없도록 늘 감시하고. 만일 저항한다면 베어도 좋다. 그 사실을 미리 알려주도록.”
아무리 죄인이라도 어린아이에게 아비가 혹은 할아비가 잡혀가는 꼴을 보이기는 내키지 않는다. 그렇지만 만일 내일 낮 지하 감옥이 새 손님을 맞이하기 전에 단 한 명이라도 미리 도주한다면 그때는 탈주자 대신 이 자를 배임죄로 잡아넣으리라. 나는 지금 내가 어떤 눈을 하고 앞에 선 이를 보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이가 흠칫 놀란 낯빛으로 고개를 숙인 것만 알아볼 뿐이었다.
모든 성인과 순교자를 기리는 대축일을 앞둬 안팎으로 분주하던 날이었다. 국왕이 시찰을 나서 성이 비교적 한산하던 오후, 감옥에서는 갑자기 들이닥친 여러 사람에게 놀란 생쥐들이 찍찍 소리를 내며 바삐 도망쳤다. 햇빛이 가로막혀 들지 못하는 지하에서 붉은 불빛과 겁에 질린 안광만이 타올랐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하고 친지의 면회를 받지도 못한 채 여러 날을 어둠 속에 갇혔다. 수감을 버티려 조악한 식사를 입으로 넘기는 소리만이 그들이 낼 수 있는 소리 전부였다. 그러나 귓가로 들리는 소리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무거운 사슬이 땅에 끌리는 소리, 녹이 슨 구속구를 채우는 소리, 묵직한 도르래가 끼익끼익하며 무언가를 올리는 소리, 거기에 더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는 소리 등이 두꺼운 돌벽을 타고 흘러들어 수감자들이 편한 잠을 잘 수 없게 만들었다. 축축한 공기 속에 간혹 훅하고 짙은 피비린내가 번졌다. 땅에 흩뿌려진 피는 시간이 흐르자 코를 찌르는 악취로 변해 그들을 휩쓸었다. 냄새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동료가 자신을 겨냥해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그리고 곧 자기 차례가 닥치리라는 공포였다. 수감자들은 간혹 자신의 억울함을 읍소하며 나나 불경하게도 내 딸을 보게 해달라고 소리를 높였다. 그 가운데 특별히 다른 사람의 탓을 하는 자들의 명단이 내게 추가로 보고되었다. 나는 그들의 태생과 인척 관계, 가깝게 지내는 친지와 역병 이후 씀씀이가 눈에 띄게 달라진 구석이 있는지 조사했다. 그때 세리들이 여럿 보이지 않자 눈치가 빠른 상단주 한 명이 수매 원정을 핑계로 푸아티에를 빠져나가려다가 경비대에게 붙들렸다. 섣불리 움직인 자가 가차 없이 수감되자 누군가는 왕실에 헌납하겠다며 값비싼 비단과 모피를 수레에 실어 보냈다. 자백이나 다름없었다.
“엄청난 선물이 들어왔는데 보낸 사람을 만나보지도 못했네요.”
어느새 나는 딸의 얼굴을 식사 시간에나 겨우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내도 손님으로 맞아들인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오라드는 수프를 들면서 지나가는 듯한 말소리를 던졌다.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냐는 조용한 추궁이었다. 나는 딸의 질문 아닌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주었다.
“마음에 드는 게 있니?”
“모피가 하얀색이었어요.”
하얀 말, 하얀 토끼. 속사정을 모르는 바깥의 사람들은 오라드가 흰색을 좋아한다고 인식할 만하다. 오라드는 무릎에 올려놓은 토끼 피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살아있는 게 더 좋아요. 따뜻하잖아요.”
만일 그 말을 들었다면 흰 여우를 생포해 바치려 들겠군. 나는 무심결에 우리 가족의 식사 시중을 드는 시녀를 쳐다보았다. 만일 다른 누군가가 정말 흰 송아지나 흰 족제비, 흰 올빼미 등을 바친다면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할 사람이다. 시녀는 놀란 짐승처럼 움츠러들며 고개를 숙였다. 리키. 그러자 프레브라나가 나직이 나를 부르더니 손짓으로 시녀를 나가게 했다. 시중드는 이가 없다고 음식을 넘기지 못할 것은 아니었으므로. 우리가 도움을 물리자 아드마르를 돌보는 늙은 시종이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다른 이들의 뒤를 따랐다. 그 후에야 내 눈에 아이 둘이 보였다. 공연히 식사 분위기를 긴장시키고 말았다. 화제를 바꿔야 했다. 무엇을 하며 지냈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는 평범한 대화가 오고 갔다.
그날 밤 나는 감옥 위 탑의 별실로 수감자 한 명을 올려보내게 했다. 임용된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데다 공직에 종사하는 가족은커녕 의지할 친지조차 변변찮은, 시장의 추천을 받아 관료의 말석을 받은 젊은이였다. 정돈되지 않은 수염이 추레하게 난 그는 먼지 덮인 얼굴로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파리한 얼굴을 들어 두리번두리번 살피더니 경비와 서기관 사이에 앉은 나를 발견하고 입술을 덜덜 떨었다. 나는 그대로 잠시 그를 지켜보았다. 푹 숙인 고개 밑으로 보이는 낯빛이 점점 새파랗게 질려갔다.
“네 죄가 무엇인지는 알겠지.”
이 성에서 무고한 사람은 없다. 수장인 내가 그러한 것처럼. 나는 미리 작성해둔 서류를 그의 앞으로 내밀게 했다.
“하나 불의를 고하지 않아 여러 선량한 이들의 삶을 교란함에 동조한 죄는 감해주겠다. 적어라.”
그는 걸인이 잔칫상에 달려들 듯 허겁지겁 서류를 그러쥐었다. 옆에 대동한 서기관이 그에게 잉크와 깃펜을 내밀었다. 그러나 펜대를 쥔 그는 안쓰러울 만큼 손을 부르르 떨며 한 글자도 쓰지 못했다. 아니, 쓰려고 하지 않았다.
“……지고하신 폐하, 전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내가 그에게 전한 것은 수감된 다른 이들의 유착과 비리를 고발하는 기소장이었다. 의리를 지켜야 할 만큼 가까운 자가 없을 텐데. 나는 대답 없이 기다렸다. 그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내가 부른 이상 처음부터 그에게 거절이라는 방향은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작성을 마친 그는 그 자리에서 몇 년이 흐르기라도 한 양 허탈한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서기관은 기소장을 낚아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스윽 훑더니 확인을 마쳤다는 의미로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 자에게 별실을 마련해 주도록. 바깥출입은 금한다.”
나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가 별안간 다급히 내게 달려들었다. 그때까지 묵묵히 내 곁을 지키던 위병들은 재빨리 앞으로 나서서 그를 가로막고 냅다 바닥에 잡아 꿇렸다. 그는 억눌린 채로 울먹이며 버둥거렸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발. 그 말에 나는 내 앞을 막은 인간 장벽을 걷고 그의 앞으로 나섰다. 그럴 거라 생각도 안 했지만, 나를 해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내 손짓에 그를 붙잡던 이들마저 손을 놓자 그는 내 발등과 옷자락에 입을 맞추고 울며 빌었다.
“폐하, 정말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부디 제게서 유다의 이름만은 걷어 주십시오. 저는 이제 갈 데가 없습니다. 여길 떠나 찾아갈 사람도 할 줄 아는 것도 없습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살기를 원한다면 네 손으로 직접 고발해라. 나는 분명 오늘 그에게 길을 하나 열어주었다. 그러나 내가 떠난 뒤 자기는 배신자의 이름을 쓰고 여기서 어떻게 사냐는, 잔뜩 겁에 질린 하소연이 나를 잠시 멈춰 세웠다. 아무래도 상인과 관리의 유착을 잡는 걸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두 달 후 자네는 보르도로 소속을 옮긴다. 주변을 정리할 시간을 줄 테니 조속히 준비하게.”
선물을 지금 줄 마음은 없었는데. 나는 그의 어깨를 밀어 엎드린 몸을 일으키고 밖으로 나섰다. 그 순간 내가 지금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멍청하게도 내 입은 엉겁결에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오라드?”
“왜 그렇게 놀라세요? 제가 있으면 안 돼요?”
그럴 리가. 아니, 그 말이 맞긴 하다만. 나는 걸쳤던 외투를 벗어 서둘러 딸에게 둘렀다. 그러자 원래 입은 것까지 합쳐 몸집이 세 배로 불어난 오라드는 작고 해말간 얼굴에서 눈만 깜빡깜빡 떴다. 귀엽다. 지금 상황과는 별개로. 오라드는 고개를 흘끗 돌려 눈짓으로 계단 아래를 가리켰다.
“저 사람들 나무라지 마세요. 제가 가겠다고 했어요. 어머니도 계세요.”
사람을 물려준 배려에 고마워해야 하는지, 아니면 몸도 좋지 않으면서 이 험한 곳에 왜 홀로 서 있었냐고 타박을 해야 하는지. 나는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뭘 하든 우선 아이를 따뜻한 방에 데려가야 한다. 오라드는 내 손을 잡았다. 다행히 내 예상보다 더 따뜻한 손이었다.
“아빠를 왜 기다렸어?”
“아버지가 그자를 심문하시면서 체형을 가하면 말리려고요. 그러실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지만 내내 무언가 고민하고 계시는 것 같았어요.”
고문으로 인한 자백은 믿을 게 못 된다. 그걸 모르지 않음에도 굳이 고문을 가하는 이유는 당사자가 시인했다는 정당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리 대답을 정해 놓고서. 예전에 오라드가 성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지하 창고에서 녹이 슬고 거미집투성이가 된 끔찍한 도구들을 발견하고 왔을 때 설명한 적이 있다.
내 아이는 착한 아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거짓말쟁이 찾기 놀이가 이어졌다. 증언과 자백을 기록하고 책임의 화살이 쏠리는 자를 따로 추렸다. 서로 말 한마디 주고받지 못하게 막았으나 혹시 이런 사태를 대비해 암묵적으로 정해둔 희생양이 있지 않을까 싶어 삼자대면하기도 했다. 해가 있는 시간에는 정무를 보거나 오라드를 데리고 외근을 나갔기에 심문 시간은 언제나 밤이었다. 나를 수행하는 이들은 교대로 일했다. 그러다가 졸음을 견디다 못한 서기관이 깜빡 돌벽에 머리를 찧어 혹이 났다. 한편 나는 수염을 좀 더 길러 인상을 바꾸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내 앞에서도 혓바닥에 기름칠한 양 변명을 늘어놓는 자들은 여럿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남은 관원들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분담된 업무 탓일까, 아니면 자신들의 동료를 가차 없이 잡아넣은 나를 두려워해서 그럴까. 그들은 때로, 내가 그들처럼 장관으로 직무를 수행하던 시절을 이야기하거나 보르도에서 처형된 이들을 입에 올리며 수감자들의 안위를 가늠해보고는 했다.
“잠깐만요. 그건 싫어요. 그러지 마세요.”
임금 담합에 가담한 상인들을 시장 교란과 조세 체납 및 공금 횡령, 뇌물 증여 등의 혐의로 생선 엮듯 체포한 날이었다. 떳떳지 못한 일을 한 것은 아니나 바로 전까지 사람을 위협한지라 나를 기다리던 아내의 뺨을 쓰다듬으려던 손을 무심코 거두고 말았다. 프레브라나는 내 손목을 꾹 잡고 손바닥을 자신의 뺨에 갖다 댔다.
“당신을 만지고 싶어요. 내 사람이니까요.”
손은 반대인데. 나는 피식 웃었다. 하루 내내 경직되어 있던 얼굴이 이제야 처음으로 웃은 거였다.
“싸움꾼이 되어서 돌아왔소.”
그러자 프레브라나는 어이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받았다.
“그러면 당신에게 걸게요. 누구한테 돈을 주면 돼요? 그렇지만 돈은 못 벌 것 같아요. 모두 다 당신에게 걸 테니까요.”
“절반 나눠서 상대편에게도 걸지 그러시오. 그래야 누가 이기든 본전은 유지할 텐데.”
“대전 상대로 머리 긴 삼손이 나왔어도 당신에게만 걸 거예요. 당신이 절 부자로 만들어주세요.”
내가 그렇게나 잘 싸우게 생겼나. 지금은 머리 긴 삼손이 아니라 삭발 충격으로 힘을 잃은 삼손과 싸워도 내가 질 것 같다. 요즘은 꿈도 꾸지 못하고 나가떨어져 자니까. 나는 잡힌 손으로 프레브라나의 뺨을 살짝 주물렀다. 잘 쉬지 못하는지 다소 여윈 뺨이었다.
“오늘도 수고 많았소.”
“아직 아무 말씀도 안 드렸는데요?”
“당신이 오늘 뭘 했는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가 있지.”
여기 일이란 게 그렇다. 비밀이 없다. 나도 그렇고.
“그래도 이건 모르실 거예요. 시녀를 더 들였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들었어요. 오후에 오라드를 재우고 난 뒤에요.”
“청탁이오?”
“누구를 가리켜서 자리 마련해달라는 건 아니었어요. 모처럼 오라드가 있으니 나이 비슷한 아이들이 들어와 예절을 배우면 도움이 될 거라고요. 그 아이들을 위해서요.”
솔직해서 듣기 좋군. 우리 가족은 셋뿐이라 많은 사람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겨울을 앞두고 줄리아나 공주와 앙굴렘 백작 자매, 앙주 가문의 섭정 부자와 아르투아 백작 부처까지 여러 귀인이 푸아티에 성에 모인다는 정보야 암암리에 퍼졌을 것이다. 이런 때에 양가에서는 자식이 왕실을 지근에서 모셨다는 영예를 놓치고 싶지는 않을 터.
“여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번거로워도 해야겠지.”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를 찾아 의지하기 마련이다. 새 사람이 여럿 들어온다면 국왕이 활기차고 사교적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으면서 동시에 내 딸과 거리를 두고 떨어뜨려 놓을 수 있다. 아무리 갓 열세 살 생일을 지난 어린 소녀라도 국왕보다는 자기들끼리 어울리는 게 더 편할 테니.
친구가 되어줄 또래가 백만 명이 모여도 내 딸은 나와 가장 가까울 것이다.
내성과 바깥의 분위기가 점점 대조적으로 달라졌다. 겨울 대비까지 겹쳐진 관원들은 어둠이 내릴 때 소리가 사라지는 것처럼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다. 이맘때쯤 으레 인사치레로 받던 가벼운 선물조차 단호히 거절하더라는 소식이 내게 들렸다. 한편 망치 소리가 활발한 새 작업장은 눈이 내리기 전 숙소가 완공된 것을 축하하며 작은 잔치를 열었다. 폐촌으로 전락했던 마을도 개선된 수로로 맑은 물이 흐르는 위에 새 다리가 놓였다. 구경을 마치고 돌아온 내게 사무관은 이번 가을 거래된 곡물의 시장 가격과 그 외 교역품 등의 물가 변동을 보고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줄어든 농지, 그 농지조차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든 인구. 기존 산업 체계는 역병의 창궐로 종말을 고했다. 아키텐이 부국의 명성을 유지하려면 새로운 방책이 필요하다. 다음 날 저녁 아르투아 백작이 새 남편과 함께 성에 도착했다.
“국왕 폐하, 약혼을 축하드립니다. 아르투아에서 지내는 동안 폐하를 정말 뵙고 싶었답니다.”
간신히 역병을 피해 살아남은 베튠 가의 가문원 중 둘이 더 세상을 떠났다. 족내혼으로 결혼했던 아르투아 백작의 남편 하멜른과 외동딸이었다. 사위어가는 촛불처럼 위태로운 가문의 존속 앞에 젊은 가주는 슬픔에 잠길 시간조차 충분히 얻지 못했다. 새 남편 외스타슈는 선대 귀네즈 백작의 손자로 같은 플랑드르 사람이었다. 신혼부부의 인사를 받은 오라드는 으레 그렇듯 아르투아 백작의 이름을 부르며 자기처럼 머리가 검은 친척을 맞이하듯 그이를 덥석 안았다. 그렇지만 나와의 재회는 그리 화기애애하지는 않았다. “사람을 물려 주십시오.” 자리를 파할 때가 되어 아드마르가 일찍 돌아가고 오라드가 피곤한 기색을 보일 때 아르투아 백작은 새신랑을 먼저 올려보낸 후 넌지시 내게 말했다. 그러나.
“아르신드 경, 그 ‘사람’에 나도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요?”
오라드의 눈은 더 웃지 않았다. 입가의 미소는 아직 거두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얼굴이 싸늘하게 보였다. 아르투아 백작은 바로 부정하지 못하며 다소 주저하는 말투로 오라드에게 답했다.
“국왕 폐하, 폐하께서는 다소 듣기 껄끄러우실 것입니다. 폐하께는 잠시 후 제가 따로 고하겠으니…….”
“아버지.”
아예 쐐기를 박아버렸다. 오라드가 군주로서 있겠다면 나는 이 아이를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아키텐 국왕의 영민함을 누구보다 잘 알 사람이 그 국왕마저 배제하길 원한다면 예사로운 일은 아닐 터. 내가 대답을 망설이자 프레브라나가 조심스럽게 오라드의 팔을 잡았다. 아마 나중에 이야기할 테니 지금은 방으로 돌아가 쉬라고 한다면 내 착한 아내는 딸을 설득해 데려가 줄 것이다. 그리고 그 뒤 저 아이는 자신의 체면을 깎았다며 내게 섭섭해하겠지.
“…나는 괜찮으니 말하게. 내 처자는 나와 다름없고, 결국 국왕이 알아야 할 일인 것은 변함없으니.”
내 허락을 받았음에도 아르투아 백작은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그러자 오라드는 답답하다는 듯이 “내가 숨어있을까요?” 라 말을 던지며 재촉했다. 자존심이 상한 걸까. 그렇지만 저이가 오라드를 경시해서 이러지는 않을 것이다. 나를 배려한 것일 테지. 아르투아 백작은 고개를 숙이고 밖에 새어나가지 않을 나직한 목소리로 보고를 시작했다.
“우리와 국경이 닿은 프랑스 아미앵 지역에서 한 유랑극단이 왕실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비를 맞았는지 얼룩지고 너덜너덜해진 홍보지가 프랑스에 파견된 세작의 보고서와 겹쳐 내 앞에 슬며시 놓였다. 아미앵은 플랑드르와 이웃하므로 나보다 아르투아 백작에게 먼저 소식이 닿은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유랑극단이라면 아미앵에만 거하지는 않을 터. 아미앵과 프랑스 수도 파리는 지척이다. 나는 아르투아 백작에게 물었다.
“이 일에 카페 왕가가 가담했는가?”
“프랑스의 왕대비는 수상한 주술사에게 부적을 사들이고 로베르 3세를 가둬두기만 할 뿐입니다. 감히 입에 담기도 죄스럽습니다만 저들은…….”
아르투아 백작은 해쓱할 만큼 하얀 얼굴에 보기 드물게 새빨간 빛을 드리웠다. 그이는 천천히, 이 유랑극단이 아키텐의 푸아티에 왕가를 소재로 무대를 올리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나를 겨냥해 비방을 일삼는다고 전했다. 극의 내용은 가관이었다. 어린 여왕의 탐욕스러운 아비가 권력을 차지하려 일부러 보급을 끊어 선왕을 굶겨 죽였다, 마누라까지 죽자 제 세상을 만난 듯 밤마다 여자를 갈아치운다, 처녀만 찾아대니 보르도의 딸 가진 부모들이 겁에 질려 문을 잠그고 위병들은 민가를 들쑤시며 엽색을 나선다, 신벌을 받아 딸 하나를 끝으로 자식을 못 갖는 고자가 되자 정력을 되찾으려 암컷 백 마리를 거느린 숫염소의 생식기를 잘라 먹는다 등등. 내가 실수했다. 혼자 들을 걸 그랬다.
“……고자로 만들든 색정광으로 만들든 하나만 하라고 하고 싶군.”
듣는 나는 지극히 태연한데 곁의 사람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졌다. 오라드는 설화에 등장하는 악령처럼 눈빛만으로 사람을 얼릴 기세로 찬바람이 쌩쌩 불었고 같이 산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싫은 소리 한마디 듣기 어려웠던 프레브라나도 앞에 그 극단이 있다면 당장 멱살을 잡아채 내동댕이칠 것처럼 눈에 불꽃이 튀었다. 아르투아 백작은 자신의 잘못인 양 점점 고개를 숙이며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나는 아르투아 백작에게 물었다.
“내 역을 하는 자는 어떻게 생겼나? 나처럼 갈색 머리인가?”
“……그자가 등장하기만 해도 관객들이 웃음을 터트린다고 합니다.”
“그건 좀 섭섭하군. 기왕이면 잘생긴 사람으로 해줄 일이지. 이래 봬도 어릴 때는 나를 우리 누님이라 착각하던 사람들도 종종 있었는데.”
당신 얼굴 보면 재미있어요. 생전에 파트리샤가 종종 내게 했던 말이다. 그 말이 우습게 생겼다는 뜻으로 와전되었나? 아무리 인접국이라도 그런 사소한 것까지 회자했을 리가. 그저 적의 수장이라 일부러 희화화했나? 내가 잠시 골몰하며 따로 더 묻지 않자 오라드가 아르투아 백작에게 물었다.
“나는 어떻게 나오나요?”
“폐하.”
아르투아 백작은 난감해하며 나를 보았다. 이런 어린 국왕조차 아비의 횡포에 두려워하며 몸을 떠는 역할 외에 또 다른 것이 있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묻지 않았다면 모를까, 물었으니 대답은 해줘야 한다.
“……보르도는 수탉 대신 국왕 폐하께 어미를 빼앗긴 새끼 당나귀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아침을 연다고 합니다.”
“내가 다 잡아먹었대요?”
“암탕나귀의 젖이 국왕 폐하의 목욕물로 쓰인다고 합니다.”
오라드는 녹음처럼 짙푸른 초록빛 눈동자를 끔뻑끔뻑 떴다. 그리고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짐승의 젖으로 목욕하면 건강에 좋나요?”
나는 답했다.
“해본 적 없어서 모르겠는데, 하고 싶으면 하게 해줄게.”
못 할 건 없지만 해달라고 하지는 않겠지. 내 딸은 내가 잘 안다.
“차라리 그걸로 흰 빵을 만들어서 나눠주는 게 나아요. 한 사람이 다 쓰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아키텐 국왕은 이렇게 착하고 자애롭다. 프랑스 국왕 열 명이 모여도 아키텐 국왕보다 나을 수는 없을 것이다. 프레브라나도 나처럼 생각했는지 말없이 오라드의 작은 손을 겹쳐 잡고 주물렀다. 그건 그렇고, 겨우 연극 공연 내용 따위나 듣고 감상을 말해보자는 자리는 아니지 않는가. 우리 가족은 아르투아 백작의 설명을 몇 마디 더 들었다. 금 접시로 사냥개 밥을 먹인다거나, 곳간에서 고기 썩는 냄새가 진동해 그 악취를 감추려 비싼 향유를 국자로 퍼서 뿌린다거나. 열여섯부터 아키텐의 왕족으로 산 나조차 상상할 수 없던 엄청난 사치가 나열되니 오히려 의문이 더 커졌다.
“정말 카페 왕가가 사주하지 않았어도 문제고, 사주했더라도 문제군. 차라리 프랑스 왕대비가 벌인 일이라면 대처하기가 더 쉬울 텐데.”
내가 중얼거리자 아르투아 백작이 답했다.
“프랑스 왕대비는 여전히 실권이 없습니다. 교단과 봉신들이 서로 아귀다툼을 벌여 섭정의 자리도 몇 달째 표류하고 있습니다.”
“왕비가 힘이 있었으면 프랑스 선왕이 제 형수와 시녀에게 사생아를 낳게 했겠나.”
그러고 보니 간음을 일삼은 건 자기들의 선왕인데 왜 애꿎은 나한테 덮어씌우지? 내가 모범적으로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배우자를 저버리지는 않았건만. 문득 아까 전 들었던 헛소리가 떠올라 부아가 갈 곳 없이 치밀었다. 하나 지금은 화낼 때가 아니다.
“아키텐이 부유하고 타락했다는 것만은 끊임없이 강조하는군. 곧이곧대로 들은 얼간이라면 자갈 대신 굴러다닐 황금을 줍겠다며 강도질을 하러 오겠지. 그걸 누군가가 노리고 벌인 짓이라면 알기 쉬운데.”
“뭘 그렇게 걱정하세요?”
오라드가 물었다. 어린 국왕에게 설명할 차례다.
“적은 나를 잘 알 수 있어. 나나 아르신드 경이 어떤 사람이고 그동안 무슨 일을 해왔으며 뭐를 좋아하는지, 아마 나 자신보다 더 잘 알 수 있겠지. 마음만 먹으면. 그렇지만 나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으니 모든 경우를 다 대비해야 해.”
“그럴 필요 없어요. 그자들을 없애라고 하세요. 아니, 없애요.”
뭐?
저녁 식사를 들며 반주로 마셨던 술이 확 깨는 소리였다. 이 아이가 그렇게 말하면 사형선고가 된다. 내 딸이 지금 사람을 죽이라고 한 건가?
“아버지는 프랑스를 원하시지요?”
아니다. 나는 관심 없다. 네 할머니가 프랑스의 공주였고 아키텐이 이슬람과 맞닥뜨린 최전선이 되었기에 지금의 국력으로는 존속이 위태로워 왕가의 숙원이 되었다. 네가 내 자식이니 나는 땅 한 뼘도 필요 없다. 서둘러 부정하려는 내 입을 아르투아 백작의 푸른 눈이 막았다. 오라드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키텐 왕이 사악하다는 인식이 퍼지면 나중에 프랑스를 병합할 때 반감이 클 거예요. 정말 누군가의 사주 없이 그자들이 선의로 카페 왕가를 옹호하고 푸아티에 왕가를 비난했다면 군주가 바뀌었다 해서 우리 편이 되려 하지는 않겠지요. 해가 갈수록 더 자라나 퍼질 독버섯이에요. 이번에는 제 말대로 하게 해주세요.”
“……오라드.”
“제가 틀렸나요?”
이 아이 말이 옳다. 그렇지만.
내가 말이 없자 아이 눈이 점점 냉정해졌다. 사이 좋은 아빠를 보는 눈이 아니라 신뢰하는 사람이 보인 거부에 마음을 다친, 그리고 본인을 향한 거절에 분이 차오르는 오만하기까지 한 눈이었다. 별수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내린 손으로 아르투아 백작에게 따로 수신호를 보냈다. 예민한 아이라 눈짓은 바로 알아차릴 테니. 나와 아르투아 백작은 다음날 바람 부는 밝은 낮에 따로 만나게 되었다.
“내버려 두게. 해치지 말고. 오라드가 묻거든 시킨 대로 했다고 말하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유랑인들이다. 천시받는 이들이다. 아키텐 국왕에게 충성할 이유가 없는 자들이니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게 하기에는 너무 가혹할지도 모른다.
“폐하, 국왕께서는 여느 아이들보다 열 배는 영민하십니다. 제가 부족해 혹여 국왕께서 알아차리신다면…….”
“그때는 내 핑계를 대게. 설마 내 딸이 나를 어쩌기야 하겠나.”
살갗에 닿는 공기가 부쩍 차가워졌다. 쨍하게 푸르르던 하늘에도 얼음을 품은 흰 구름이 눈에 뜨일 만큼 빠르게 흘러갔다. 북풍이 스치자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가을의 잎사귀는 가장 선명한 색을 간직한 채 내 발치에서 바스락대며 굴러다녔다.
“죄인들을 직접 심문하신다 들었습니다.”
아르투아 백작이 나직이 말을 건넸다. 나는 그이가 해득하기 어려운 푸른 눈으로 무엇을 보는지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탑으로 줄을 이어 들어가는 장작과 음식 수레였다. 아르투아 백작은 내게 물었다.
“몸소 나서셔야 할 만큼 여기 상황이 심각합니까?”
처음 장관이 된 이래로 내가 심문을 맡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처남이 살아있을 적에는 내 일이 아니었으므로. 그리고 이후에는 일일이 개입해 공포심을 심어주고 싶지 않아서. 보르도를 떠나기 전 처리했던 배임 행위도 지침만을 내려보냈을 뿐 변장한 나를 몰라보고 위협한 괘씸죄를 연좌해 묻지는 않았다. 심문 목적으로 직접 만나본 자는 몇 해 전 내가 광인의 이름을 붙여 조각배에 태워 바다 너머로 보내버린 반란군 수괴 프랑수아가 마지막이었다.
“그대가 한 명 더 있었으면 아마 온전히 맡기고 놀러 다니기나 했겠지.”
누구도 믿을 수 없다. 내 딸이 이 땅의 주인이라 하나 여기서는 오히려 우리가 외부인이다. 국왕의 눈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아 저들끼리 결탁해 세월을 보냈으니 보르도에서 하던 대로 했다간 적당한 희생양을 내세우거나 사안을 축소해 ‘피해는 있으나 책임자는 없는’ 구도를 만들어 들이밀 수도 있다. 이때 내가 당장 죄지은 자를 대령하라며 윽박지르면 무고한 이에게 고통을 가해 굴복시켜 피로 얼룩진 자백서를 내놓을 것이다. 내 부족한 머리로는 지금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폐하, 저는 지금 여기 있습니다.”
“그대 신랑에게 무슨 원망을 들으라고. 이제 거의 다 왔네. 일이 이렇게 된 책임은 내게 있어.”
나는 손을 들어 아르투아 백작을 제지했다. 말이 가로막힌 아르투아 백작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우리는 다른 말을 해야 한다.
“…라 마르셰의 백작이 장자의 반려로 제 누이 샤를로트를 맞이하고 싶다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샤를로트는 선대 아르투아 백작이 선선대 페르슈 백작의 딸 세실과 재혼해 얻은 막내딸로 오라드보다 세 살 어려서 언니인 아르투아 백작과는 나와 오라드만큼이나 터울이 진다. 그리고 현 툴루즈 공작부인 알리노르의 조카이기도 하다. 나는 부르봉 공작의 봉신인 라 마르셰 백작이 주군인 부르봉 가문이 아니라 플랑드르에서 고귀한 며느리를 얻으려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부르봉 가문에는 나이 비슷한 소녀가 없고 국왕의 신임을 받는 아르투아 백작과 인연을 맺어둔다면 가문과 아들을 위해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그대가 마땅한 자리라 여긴다면 그렇게 하게.”
어디선가 어린아이들이 기대에 찬 탄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절로 나는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성 마르틴의 축일을 맞아 거위 통구이 요리를 준비하는 걸 보고 들뜬 아이들이었다. 내 눈은 그중에서 아드마르를 찾아냈다. 아버지를 꼭 닮은 아들이라 그런지 나이 비슷한 평민 아이들 사이에서 유독 키가 큰 게 띄었다. 아드마르도 내가 보는 걸 어떻게 눈치챘는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를 마주 보았다. 나는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고개를 저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어느 순간 아르투아 백작의 걸음이 느려졌다. 그 푸른 눈에는 이슬처럼 눈물이 맺혔다.
“……데려가고 싶은 아이가 있거든 데려가도 좋네. 자식이 그대를 보좌하게 되었다면 부모도 기꺼이 따라가려 할 테지.”
죽은 외동딸과 닮은 아이를 보았을까. 나는 자식을 잃은 슬픔을 알지 못한다. 하나 만약 남은 내 삶의 이유인 오라드가 나보다 먼저 신의 부름을 받는다면 나도 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내던지고 그 아이를 따라갈 것이다. 미래를 바랄 힘이 있는 아르투아 백작은 나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다.
축일의 만찬은 감옥에도 지급되었다. 자해하거나 흉기로 쓸 수 없도록 식기 없이 나무 바구니에 담긴 음식이 침묵 속에 건네졌다. 그러나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그토록 기다리던 노릇노릇한 거위 고기는 아침이 되자 절반 가까이 말라비틀어진 채 남아 군견과 사냥개들의 간식이 되었다. 아마 도살장을 앞에 둔 심정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오라드와 함께 재판정에 출석했다. 상급 재판이었기에 영주인 국왕이 최종 판결을 내려야 했다.
“저는 가만히 있을게요.”
오라드가 작은 목소리로 넌지시 내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라드와 함께 상석에 앉았다. 아키텐을 수호하는 성스럽고 자비로운 국왕을 향한 간단한 경의를 행한 후 내가 기소장을 쓰게 한 이가 죄인들의 기소 사실을 읽었다. 그러자 방청석에서 한 노파가 그이를 힐난하며 소리를 높였다. 기소된 죄인의 가족이었다. 뒤이어 다른 이들도 용기를 얻어 줄줄이 기소자를 성토하고 나섰다. 죄인들의 친지가 목에 핏대를 세우니 화가 난 피해자들도 그자들의 머리채를 휘어잡을 기세로 반박하며 맞붙었다. 당황한 집행관이 어전임을 상기시켜 정숙하라 외쳤다. 그러나 흥분한 그들은 잠잠해지기는커녕 ‘어리고 착한 여왕님’을 향해 서로의 말을 믿지 말라며 떼로 몰려들었다. 우리 부녀를 보호하려 위병들이 앞을 가로막으려는 찰나, 오라드는 벌떡 일어나 “당장 그치지 않으면 모두 불경으로 처벌하겠다!”라며 옆에 앉은 내가 흠칫 놀랄 만큼 노성을 질렀다.
청중이 잠잠해지자 재판이 진행되었다. 참고인과 참고인이면서 피의자이기도 한 이들이 휴정과 개정을 거치며 순서대로 그간 벌어진 담합과 착복, 유착 등을 증언했다. 변호인은 제 임무를 성실히 하지 않을 작정인지 증언을 반박하지 않고 그저 죄인이 깊이 반성하고 있으며 과오를 인정하나 그간의 공로를 보아 선처해달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동안 일군 모든 재산을 헌납하겠다는 말도 함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잠자코 있는 오라드에게 매달리는 대신 재판을 진행하는 나를 향해 자비를 구했다. 내 전적을 익히 아는지 이미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 자도 몇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저지른 죄의 경중에 따라 해직과 노역 등을 부과하고 부당하게 거둬들인 모든 이득을 몰수함과 동시에 법이 정한 바에 따라 벌금을 책정했다. 폐정 후 오라드가 내게 물었다.
“오늘은 아무도 처형되지 않을 거라 예상했어요. 저를 데려가셨으니까요. 그런데 왜 그러셨어요?”
상급 재판은 대개 나 혼자 출석했다. 아무리 이 아이가 군주라도 어린 딸에게 곧 처형될 자의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러니 오라드가 자신의 출석으로 오늘 재판의 결과를 짐작했을 만도 하다.
“우리……. 아니, 내 잘못이 크니까.”
나는 그들을 버렸다. 오라드를 잃고 싶지 않아서 파트리샤가 생전 시행한 폐쇄를 몇 년이나 그대로 유지했다. 내가 먼저 주군의 보호 의무를 다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방만을 죽음으로 갚게 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저도 책임을 져야 할 거예요. 알겠어요. 이번에는 아버지께서 관용을 베풀어 반성할 기회를 주신 걸로 할게요.”
공역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급여는 첫 달에 받지 못한 손실분을 포함해 인상되었다. 벌을 핑계로 일부 상단이 규모를 긴축했는데, 그렇게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추가로 고용돼 가도 정비에 나서 폐허가 된 집을 부수고 굵어진 그루터기를 잘라냈다. 탑에서 교대로 가짜 비명을 지르던 위병들도 잘랑거리는 주머니를 받아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는 오늘이 며칠이나 되었는지 종종 잊어 다른 이에게 묻곤 했다. 숫자로 붙은 이름을 어제, 오늘, 내일, 모레처럼 거리를 나타내는 이름이 대신했다.
올해의 마지막 달을 맞이할 때 이탈리아의 손님이 둘이나 푸아티에까지 찾아왔다. 하나는 제노바 공화국의 사절이었는데, 새로 선출된 도제가 교역 지점의 확장을 부탁하며 우의의 선물로 금화를 보냈다. 사절은 저울까지 준비해 아키텐의 통화와 무게를 비교하며 최근 제조한 진품임을 보증했다. 위조 금화가 퍼진 지 반년이 흐르자 제노바의 기축통화는 점점 신뢰를 잃어 오랜 기간 통상 수교를 맺던 곳조차 꺼리는 추세였다. 지중해 등지에서는 그 대용으로 아키텐의 기축통화가 많이 쓰였다. 그 탓인지 사절은 저번에 왔을 때와 달리 최대한 자신을 낮추며 아키텐 국왕 오라드의 장수와 무궁한 번영을 빌었다. 아울러 신의 도움으로 위조범을 먼저 잡게 된다면 양국에 해를 끼친 죄를 물어 끓는 기름 가마솥에 넣겠다는 무시무시한 다짐까지. 다른 손님은 바티칸의 사절로, 아쟁의 대주교가 추기경으로 승격되어 붉은 수단을 걸치게 되었음을 알렸다. 바티칸의 승인을 얻어 왕권을 인정받은 장인도, 즉위 후 순례자의 모습으로 직접 로마를 방문했던 처남도 얻어내지 못한 영예였다. 알모라비드와의 최전선이 된 아키텐을 추켜세우는 것이든 프랑스의 쇠퇴를 염두에 둔 것이든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내가 아키텐에 온 이래 늘 팽팽하던 저울추가 조금씩 우리 쪽으로 기우는 것을 느꼈다. 다만 마음을 놓을 시간은 길지 않았다.
“상왕 폐하, 어머니와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불러주세요. 폐하께서 말씀하시면 바로 오실 거예요.”
앙주에서 아드마르의 겨울옷이 도착했다. 급한 일만 처리하고 다시 오겠다던 고티에르는 도저히 손이 비지 않는지 아들의 물건에 덧붙여 내게 서신을 보냈다. 프레브라나가 선심을 써 지은 새 옷을 입은 아드마르는 풀이 죽어 어쩐지 움츠러든 새끼 거북이처럼 보였다. 나는 아드마르를 옆에 앉히고 고티에르가 쓴 서신을 같이 보려 했다. 아주 한순간. 서신을 펼쳤을 때, 나는 서둘러 서신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다시피 하며 덮어버렸다.
인접국의 유대인과 마라노가 앙주로 대거 망명했다. 사라져가던 역병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퍼지자 불안과 공포에 잠식된 사람들은 재앙의 근원을 찾아 나섰다. 구타로 목숨을 잃지 않은 자는 뼈가 부러진 채 꽁꽁 묶여 재판도 없이 장작불에 불태워졌다. 간신히 재판을 받게 된 마라노에게는 시뻘겋게 달군 쇳덩어리를 잡은 채 손을 사흘간 묶거나 사냥한 짐승처럼 사지를 결박해 물에 가라앉히는 신명재판이 행해졌다. 집시도 다른 이방인도, 장애를 지닌 사람도 그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노인을 업고 어린아이의 손을 잡으며 12월의 강을 건넜다. 유대인으로 보르도에 정착해 장인과 처남 2대를 거치며 알바라신 백작위까지 하사받은 마리 재상이나 스코틀랜드인으로 아키텐의 섭정이 된 내가 그들의 선택에 도움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아드마르를 돌보는 늙은 시종에게 눈짓해 둘을 나가게 한 뒤 잔인한 단어가 난무하는 서신을 마저 읽었다. 아마 부르고뉴도 어쩌면 툴루즈도 조만간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낼 것이다. 역병의 재확산이라는 공포는 앙주의 결정을 존중하며 난민의 국왕령 이동을 허가한다는 답장을 쓰려던 내 손을 멈췄다. 나 혼자만 판단할 사안은 아니다.
“고티에르 경의 보고는 사실입니다.”
오전이 되어 알현실에 사람들이 모였을 때, 나는 다른 모든 안건보다도 먼저 앙주의 서신을 읽었다. 왕좌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듣던 아르투아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신빙성을 더했다. 그러자 오라드가 아르투아 백작에게 물었다.
“경이 떠나오기 전 플랑드르는 어땠나요?”
“플랑드르는 평안합니다, 폐하.”
고민도 없이 말하는 아르투아 백작을 보며 나는 속에 감춰진 다른 말을 읽었다. 반역자 위그가 폐위된 이래 플랑드르 공령은 아키텐 국왕의 직할령이 되었다. 영토가 이어져 있지 않은 월경지이고 바다가 길게 뻗어 있으니 프랑스나 신성로마제국의 북부에서 배를 타고 쉽게 도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망명자라도 플랑드르에서 아키텐 국왕의 보호를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설령 아르투아의 주인이 아키텐 국왕의 중신이라도.
“난민들이 보기에 고티에르 경이라면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 것 같았나 보네요. 부르고뉴는 우리 아키텐의 동쪽 끝인데 디종의 아델에게는 소식이 없었나요?”
오라드는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뿐인지도 모르지.”
부르고뉴는 힘이 없다. 대를 거쳐 오랜 세월 종사해 부르고뉴가 아닌 삶의 터전을 상상할 수 없는 가신들만이 ‘부모 얼굴도 모르고 형제도 없이 홀로 남겨진 불쌍한 어린 아가씨’를 돌보고 있을 뿐이다. 인척인 인연을 고려해 가주의 목숨을 바치는 걸로 가문을 유지해준 우리를 굳이 기만하려 들지는 않을 터.
“으레 번지던 돌림병의 징후라도 있다면 부르고뉴는 문을 열어주지 않겠죠. 이제 가문의 이름을 이을 사람은 아델 혼자니까요.”
오라드는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가문의 이름을 이을 사람이 어린 여주인 하나인 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디라히온에 있는 필리파 공주와 아직 서른이 안 된 앙굴렘의 줄리아나 공주, 선대 플랑드르 공의 막내아들 가르시아와 장남 위그의 외동딸인 손녀 브리아, 차남 필리프의 아들 필리프의 승계 가능성은 내 머릿속에서 지운 지 오래다. 내가 있지 않을 세상은 그려볼 필요도 없으므로.
“국왕 폐하, 폐하께서도 부디 보중하셔야 합니다.”
누군가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마음에 드는 말을 했다. 그 말에 찬동하듯 다른 이들이 저마다 조심하라며 걱정 어린 한 마디를 오라드에게 건넸다. 어린 국왕은 푸아티에의 상속자로서가 아니라 그 자신으로서 소중한 존재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에게 딸처럼 혹은 손녀처럼 심려 받는 오라드는 조금도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아 어쩐지 시큰둥해 보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웃고 있었지만.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앙주가 도움을 청한다면 우리는 어디까지 해야 할까요?”
나는 빠르게 주위의 반응을 훑었다. 주인이 원조를 전제로 말하며 내게 결정을 넘기자 그들은 서릿발이 오른 작물처럼 뻣뻣이 경직되었다. 그들의 동료 중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는데 어쩌다가 내가 두려운 존재로 변했을까.
“만 명이 오든 십만 명이 오든 아키텐 국왕은 얼마든지 거두어 보호할 수 있어.”
이 자리를 파하고 나면 오라드에게 가르칠 게 생겼다. 국왕이 동원할 수 있는 명확한 규모를 짐작할 만한 말은 절대 던지면 안 된다는 것. 나는 숫자 대신 복구 작업이 한창인 주거지구나 인구 감소가 유달리 커 기본적인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지역 등을 읊었다. 지금부터 아이들이 많이 태어난다 해도 그 아이들이 스스로 한몫을 하려면 15년은 걸리고 숙련자는 그보다 더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이주자가 대거 온다면 우리로서는 좋은 일이다.
“폐하, 그렇지만 사악한 자가 폐하의 자비를 악용해 숨어들 수도 있습니다.”
나는 앙주의 고티에르가 떠나기 전 나를 도왔던 것처럼 자객이나 세작의 침투를 우려하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비록 잔인무도하기는 하나 죽은 자들이 과연 일체 수상한 언행을 안 했겠습니까? 정말 그들 중에 마녀나 술사가 있어 몰래 요사스러운 주술을…….”
나는 그때 그자를 노려보았음이 틀림없다. 신이 되었든 사탄이 되었든 인간의 기도 따위를 들어주는 존재가 있다면 내 딸이 아직도 병마를 이기지 못했을 리 없다. 파트리샤가 속절없이 죽었을 리도 없다. 독생자의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달라’는 애원조차 들어주지 않은 신 따위가….
“그것을 파악하는 건 내 소관이오.”
아르투아 백작이 발언자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 차분한 목소리에 나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속으로 삼켰다. 이 이상 더 말하면 왕국 첩보관의 자질 문제를 거론하는 셈이 되어서일지 발언자도 고개만 까딱 숙여 보이고 입을 닫았다. 침묵을 깬 건 오라드였다.
“이번에 우리 아키텐에서 추기경이 나온 사실은 모두 잘 알 테지요.”
몇 년 전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 교황청은 죄 없는 이웃을 탄압하는 악행을 멈추라 선포했다. ‘우리와 다른 것’을 찾아내려 눈이 뒤집힌 자들에게 바티칸의 포고령은 소용이 없었다. 법관들은 살인자를 살인죄로 재판하기를 포기했다. 모인 이들의 반응이 빠르게 변했다. 이교도를 솎아내 신실함을 보이느냐, 교리에 따라 도움을 청하는 자를 내치지 않는 자비를 보일 것이냐, 내 딸을 잘 모르는 이들이니 의중이 무엇인지 갈팡질팡할 만도 하다. 오라드는 나를 돌아보았다.
“영민은 영주의 귀한 재산이에요. 자신이 속한 지역보다 아키텐이 더 살기 좋다고 판단했다면 기쁜 일이지만, 아키텐에서 대놓고 받아들이면 인접국들이 앞다퉈 내 재산을 내놓으라며 보호를 청한 이들을 돌려받으려 할 테지요. 좋아요. 아버지께서 조치하세요.”
차라리 그렇게 말하는 게 낫다.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지금 그보다 더 나은 핑계는 없다. 난민의 유입 묵인과 국왕령의 이동 허가, 그 외 가을을 마무리하는 동안 예년과 비교해 거래 가격의 변동 폭이 컸던 품목의 상한가 한도나 빈 땅이 되어버린 밭의 보리 파종 규모 등이 논의되었다. 그중 누군가가 관리들의 식견 향상을 위해 서로 다른 지방과 일정 기간 업무를 맞바꾸기를 제안했다. 보르도는 내가 꾸준히 관리한데다 왕국의 수도이니 숙련된 이들이 많아 다른 지방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고, 다른 지방에서 옮기는 관리들도 각 지방의 특성을 연구하며 견문을 넓혀 돌아와 고향에 봉사하면 좋지 않겠냐는 취지였다. 오라드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구체적인 규모와 시기를 정한 후 잘 되면 내년 초에 시행하겠음을 밝혔다. 내년까지는 실상 한 달도 남지 않은 탓에 안건을 낸 이의 화색과 달리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이들은 낯이 조금 어두웠다.
그날 전령 여럿이 푸아티에를 떠나 국경 근처를 다스리는 공작들에게로 떠났다. 아직 소식이 오지 않은 툴루즈와 부르고뉴에게는 우리가 인지한 상황을 소상히 밝히며 만일 안전 이유로 난민을 받기 꺼려진다면 국왕령으로 보내라는 허가를, 그리고 앙주에게는 원래 내가 쓰려던 대로 앙주의 결정을 존중하며 일이 버겁거든 난민의 국왕령 이주를 허가한다는 공문과 함께 아들의 근황과 그 아들이 고사리손으로 쓴 안부 편지 등을 보냈다. 중간에 자리한 부르봉에는 소년 공작과 그 가신들에게 툴루즈에 보낸 것과 마찬가지로 상황을 밝힘과 함께 만일 부르봉에서 통행 허가만이 아니라 거처를 제공하고자 한다면 제재하지 않을 것임을 덧붙여 기술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보르도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십수 년을 알고 지낸 사이건만 그는 밤중에 맞닥뜨린 짐승처럼 때 없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아니, 어쩌다가 이렇게 야위셨습니까? 이 작자들이 대체 폐하를 어떻게 모셨기에…!”
마르탱의 붉은 수염이 당혹과 노여움으로 파르르 떨렸다. 나는 침대에 몸을 기댄 채 상반신만 일으키고 그이를 맞았다. 전날 공교롭게도 몇 년 동안 보이지 않았던 코피가 흘러서 보고 있던 측량 관련 보고서를 적셨는데, 프레브라나가 하얗게 질리며 기겁하더니 아예 침대에 묶어놓을 기세로 나를 주저앉히고 야히드를 불렀다. 설상가상으로 오늘은 쨍한 강추위를 만나 목까지 잠겼다. 나는 손을 들어 마르탱을 제지했다.
“그 말 내 안사람이 들으면 섭섭해할 텐데. 나는 보다시피 잘 지내고 있소. 아키텐의 그 누구보다도. 그저 여기가 북쪽인 줄도 모르고 찬바람을 우습게 보았을 뿐이오.”
독대였기에 프레브라나는 자리를 비켰다. 마르탱은 내 부름에 응해 온 것임에도 자신이 늦게 온 것과 내 휴식을 방해한 것 모두 면구스러워 했다. 나는 그에게 새 인구 조사서를 건넸다. 푸아티에, 그리고 생통주와 보르도. 새로 파악한 가호 수와 상이가 크지 않거나 없어 노동이 가능한 자들의 숫자가 상단에 있었다.
“보르도 쪽은 잘 되고 있소?”
마르탱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폐하. 병영 시설 공사 완공을 고할 수 있어 무척 기쁩니다.”
생산과 교역으로 손을 놓을 수 없는 필수 경제인구를 제외한 여유 인력이 필요하다. 근면하고 선량해 믿을 수 있으며 국왕의 명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 용맹한 자들이. 아키텐 전역이 서서히 옛 활기를 되찾아가니 혼잡한 도시의 방범을 위한 치안대 모집은 알모라비드나 브르타뉴, 프랑스 등에 당분간 괜찮은 연막이 될 것이다.
“그대에게는 부탁이 하나 더 있소.”
“하명하십시오.”
나는 마르탱에게 보르도에 남은 또 다른 장군, 지금은 노르게의 국구가 된 핀 기스킹의 서신을 전했다. 칠순을 넘긴 그는 아키텐에서 30년 넘는 세월을 지내며 장인부터 지금의 오라드까지 4대를 섬긴 숙장이다. 나는 이미 그에게 아키텐 군대의 수장이 되기를 청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병과 노르게 왕비인 둘째 딸의 처지 등을 고려해 통수권만큼은 거절하며 대신 마르탱을 추천했다. 46세로 충분히 10년 후 미래를 기약할 수 있으며 반란에 맞서 나와 함께 빈틈없이 도성을 지켰고 여러 사람의 신망이 두텁다는 칭찬이 뒤따랐다. 마르탱이 서신을 다 읽으며 그 붉은 수염만큼 얼굴이 새빨개졌을 때 나는 그의 커다란 억센 손을 잡았다.
“내년 좋은 날을 가려 그대를 대장군으로 올릴 것이오. 선왕 시절의 아키텐 군을 재건해야 하오.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오직 그대뿐이오.”
마르탱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맞잡았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뤄내겠습니다.”라며 그가 울먹였다. 앓아누운 내 목소리보다 더 잠긴 목소리였다. 나는 그에게 당분간 푸아티에에서 머물면서 병사가 되겠다는 지원자를 모집할 것과 이곳의 병영 시설 관리를 지시하고 내보냈다. 밖에서 기다리던 프레브라나가 다시 들어와 일부러 차갑게 식힌 손바닥으로 내 열을 재고 목과 머리에 물수건을 올려놓았다. 그때서야 나는 몸을 떠나지 않던 미열이 밤사이 훌쩍 치솟았음을 알아챘다.
열이 조금 가라앉았을 때 나는 가주의 방을 향했다. 빈방이었다. 지금의 가주인 오라드가 쓰기에는 꾸밈새가 취향에 맞지 않았고, 나는 일부러 내가 파트리샤의 부마이던 시절에 쓰던 방을 골랐다. 그래서 방은 처남이 쓰던 시절에 멈춰 있었다. 보르도에 있던 방들처럼 여기도 시간이 멈춘 공간이다. 아마 오라드가 신랑을 맞으면 그땐 별수 없이 이 방의 시간도 새 주인을 위해 다시 흐를 테지.
나는 처남 생전에 절대 욕심내지 않았던 자리에 앉아보았다. 왕을 위한 의자였다. 침대도 쓸어보았다. 든 사람이 없어 청소를 게을리하는지 회색 먼지가 손가락에 묻었다. 우리의 추억 속에 나는 홀로 남겨져 나타날 리 없는 사람을 소리 없이 부르다 창가에 기대섰다. 창 너머로 희미하게 눈이 날렸다. 고요히 덮여가는 세상 속에서 내 눈은 새로 얹은 지붕을 찾아냈다. 단체 노동자와 이동 상단 등을 위해 지은 숙소와 행려병자의 병동 등을 포함해 확장된 진료소였다. 만일 이 방의 주인이 아직 살아 32세가 되었다면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좋아했을 풍경이다. 손재주가 좋았으니 어쩌면 자기도 망치를 들고 솜씨를 보태겠다며 나를 난감하게 했을지도 모른다.
어디선가 나와 네 후계자를 보고 있을까. 목숨도 아깝지 않을 만큼 너를 사랑했던 네 큰누이와 함께.
문득 눈을 맞고 싶어져 나는 몸을 내밀고 손을 뻗었다. 하나, 둘. 작은 풀꽃을 닮은 눈송이가 손바닥에서 녹아내렸다. 그때 어디선가 “와아!” 하며 높은 탄성이 섞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쪽에서는 일을 배우는 아이들이 강아지 네 마리와 함께 눈 구경을 하러 우르르 몰려나왔다. 경비견이었기에 몸집이 제법 큰 강아지였으나 멀리서 보기에도 신난 게 보일 만큼 앞발을 들고 껑충껑충 뛰며 꼬리를 쳤다. 아이 하나가 창가에 선 나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일하는 사람 중 하나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도 아이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대답을 받은 아이는 꾸벅 인사하고 제 동무들처럼 강아지를 따라다녔다.
“리키, 저 왔어요.”
어느 틈에 왔는지 프레브라나가 뒤에 서 있었다. 프레브라나도 나처럼 바깥을 가만히 보다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시녀들을 대동하고 눈구경하러 나온 오라드였다.
“야히드가 많이 좋아졌다고 했어요. 이번 겨울은 그렇게 춥지 않을 것 같아요.”
프레브라나는 내게 나직이 속삭이며 머리를 기댔다. 나는 기댄 그이의 뺨을 어루만지며 열심히 일한 보상으로 소원을 물었다. 언제나 소원을 묻다니 꼭 설화에 등장하는 속없는 정령 같다며 그이가 킥킥 웃었다. “평생 다 써도 못 쓸 만큼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리며 내 뺨에 그이의 입술이 살며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우리는 창 너머로 점점 새하얘지는 세상을 보며 눈 속에 피어난 붉은 장미를 보듯 오라드에게 눈길을 고정했다. 내 꿈, 내 세상, 내 모든 것이 저기서 웃고 있었다.
원래는 이 다음해 3월에 나름 큰 사건이 있어서 그걸로 끊으려 했다가 ㅇ<-<
읽어주시는 분들 복 받으세요 (_ _)
첫댓글 조회수가 200 근처 되어가는데 왜 반응이 없나여 저 무서워여………… (창백)
필력에 감탄하고 갑니다~
다들 댓글없이 보는 스타일?
잉……… 무서워여…………… (소심소심열매)
오오오오오 아침에 발견하고 지금부터 정독 들어갑니다
으아아아 빠 빨리 다음 이야기도 써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넙죽)(꾸벅)
아 주말동안에 카페를 안들러서 귀한 글이 올라온걸 몰랐네요
이번편은 그래도 상대적으로 평화(?)롭네요. 늘 느끼지만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느낌의 글이라 지루하지가 않아요 ㅋㅋ
자 그래서 다음편은 어디있습니까 선생님
((부끄러워서 주거버림))
원래 외치적으로 큰일이 없다면 누가 들이받고 치고 파직파직 불꽃이 튀어야 긴장감이 도는데, 선출권력보다 더 엄격한 혈연권력으로 통제되는 중이니까요 :D 다만 아키텐 사람들은 꼬마 여왕님의 성장을 기다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빠가 몇년 씩 잘하고 있고 나이도 한참 젊으니 오래오래 통치하시는게 (끄덕끄덕)
그치만 모두 알다시피 크킹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이니 제가 걍 시스템상으로 아무것도 없는 기간을 이것저것 채우는 중이져…… 읽으실 만했다면 감사합니당(_ _) 다음에는 아빠가 딸 성질을 또 긁어놓습니다. 쯧쯧.
여담이지만 읽어주는 친구들에게 "폐하"라는 호칭을 들었을 때 누가 먼저 떠오르는지 물었는데 둘이나 아키텐 3대 국왕 파트리샤 1세 폐하를 말해서 파트리샤의 38일 재위를 외전으로 써볼까 합니다. 블로그에 올린 외전 둘이 다 파티길 커플 얘기였는데 정기출석하네요.
@디아나 .....? 블로그...? 외전...? ????????????????? 그곳에 무엇을 숨겨두신거죠
@콤콤 어………………?????
음 외전 1편은 카페에도 올렸던 것 같은데……… 외전 2편은……… 그…… 허니문이라…………………
moon-s-h.tistory.com/24
moon-s-h.tistory.com/34
주소입니당……… 푸아티에즈 예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_ _)
(나중에 오라드가 주연일 때는 사랑과 전쟁이 펼쳐질 텐데 카페에 수위를 어떻게 조절해야 하나 벌써 고민입니다ㅋㅋ)
@디아나 선생님.. 티스토리 정주행을 마쳤읍니다.. 다음편이 필요합니다..
재미나고 재미난 다음편이 필요합미다.. :)
@콤콤 외전 쓰다가 공모전 때문에 잠시 멈춘 게 있는데(오늘이 마감!) 그거 쓰던 부분 지금 메일로 쏘겠습니다……
연차 2년 좀 넘긴 호조판서 시절에 OTL 하는 이야기인데 수위가 좀 있어서 아마 카페에 안 올리지 싶습니다.
쪽지는 하나 보냈어요!
@디아나 메일 확인했습니다. 애껴읽어야겠군요..
공모전 잘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