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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전쟁 목표는 임진왜란 때와 같은가요, 아니면 다른가요?
우리는 정유재란 당시 왜군의 전쟁 목표는 무의식적으로 당연히 임진왜란때 왜군의 전쟁목표와
같을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혹시나 다르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분은 드문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때 1만 6천 고니시 유키나가가 점령중인 평양성을 공격할때 명군은 이여송 이하 4만 3천명
이었고, 반면에 조선군은 8천명이며 유정등 승군 2천명 도합 5만 3천명 이었는데....
명군의 대포가 평양성을 부순 1등 공신이며 긴 칼과 창을 가진 중국 남병의 육박전이 2등 공신입니다.
이후 휴전에 들어가 협상으로 조선 4개도를 얻을수 있다고 믿었던 히데요시는 4년후 속은걸 알자 노하여
재침하니 정유재란으로.... 일본군이 14만인데 비해 명군은 11만 7천이고 조선군은 3만 8천인데,
조선군은 숫자가 극히 적은데다가 명군 대포가 위력을 발휘하니 사실상 "명군이 전쟁을 떠맡게" 됩니다?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정복한다고 큰소리 쳤지만 그건 허풍이고 실제로는
9개 부대를 보내 조선 8도와 한성을 하나씩 나누어 점령하여 통치하는데, 전라도를 담당한
고바야카와는 호남 침공에 실패했으며... 이순신 장군이 남해안을 장악하였고 의병이 보급을
차단하는데다가 강추위로 동상이 걸리고, 명군의 참전으로 결국에는 평양을 뺏기고 후퇴합니다.
임진왜란때 왜군은 조선을 점령해 통치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고려국금제” 를
내려 백성을 약탈하거나 난폭 행위 및 방화를 금지한 탓에 임진왜란 초기에는 의도적인
대규모 학살은 없었으나 명나라와 화평교섭에 의해 서울에서 물러가면서 집단 학살이
있었고.....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성을 함락한 후에 성내의 모든 사람들을 다 죽였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은 처음 부터 닥치는대로 죽이고 할당량을 주어 코를 베어 바치게 하니, 12만이 묻힌
교토 이총(耳塚) 인데, 종군 승려 게이넨 (慶念 경념)의 “조선일기" 에는 "상륙하자말자 무차별로
사람을 베어죽이고 약탈하며 가는곳마다 불을 지르니 전라도는 검붉은 화염에 휩싸였다, 아이를 끌고
가면서 보는 앞에서 부모를 베어죽였다” 히데요시는 조선인의 씨를 말리고 왜인을 이주시킬 생각이라?
명나라와 일본의 화평교섭은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가 황제와 히데요시를 속이며 국서
까지 위조하며 진행하다가 결국 탄로가 나서 협상이 결렬되니... 1597년에 재침한게
정유재란인데, 일본은 임진왜란시 조선엔 포장 도로가 없으니 우마차가 없는데다가
의병들이 보급을 차단하고 또 평안도와 함경도의 혹한에 동상이 걸린데서 교훈을 얻습니다.
해서 정유재란에서는 조선 전체가 아닌 경상, 전라, 충청 하삼도를 할양받는 것을 목적으로
울산에서 순천까지 남해안에 29개 왜성을 쌓고는...... 늦은 봄이면 출진해 저 3도를
휩쓸며 파괴와 약탈을 한 후에 늦은 가을인 음력 10월 까지 남해안 왜성으로 철수하며
휴식과 재정비를 하면... 식량과 탄약의 보급과 강추위 및 안전에 염려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몇년만 되풀이 하면 당시 명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니 부정부패와 환관의 발호에
몽골족이 반란을 일으키고 여진족이 대두하며.... 빈부격차가 커지고 가혹한 세금 징수에
흉년으로 농민봉기가 일어나던 때 이며 더욱 조선 까지는 워낙 "먼 거리라 식량등 보급" 이
너무 어려우니, 결국 제 코가 석자인 명군이 철수하면 고립된 조선도 응할 것이라 본 것입니다?
정유재란 참전 병력은 왜군 14만에 명군 11만 7천 그리고 조선군 3만 8천인데....
당사자인 조선군의 병력수가 가장 적은 것은, 전란으로 농토가 황폐화 되어
세금 징수가 안되니 많은 군대를 유지할 "돈" 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이때는 조선 백성들이 굶어죽기 일보 직전이라 의병을 일으키는 이도 없었습니다.
왜군 14만 중에 2만은 부산등 경상도 남해안에 주둔하고 12만이 좌, 우군으로 나뉘어 북상하는데
7월 15일(이하 음력)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후, 고니시와 우키다 좌군 5만 6천은
섬진강으로 들어와 8월 12일 남원성을 치는데.... 성에는 명군 양원의 3천이 남, 서, 동문을 맡고
전라병사 이복남등 1천명 조선군은 북문을 맡았으나 나흘만에 함락되니 왜군은 전주로 북상합니다.
모리와 가토등 우군 6만 4천은 내륙으로 해서 창녕을 지나자.... 곽재우는 창녕 화왕산성에서 움직이지
못하며 황석산성에 모인 안음현감 곽준등 조선군 5백명을 전멸시킨후 전주에서 좌군과 만나니 명군
진우충 2천은 도주하는지라 무혈입성해 공주까지 진출하는데, 서울에서는 공포에 질려 왕비와 왕자를
피신시키자 백성들도 혼란에 빠지는데, 좌군 5만여명은 공주에서 회군해 전라도를 점령하러 남하합니다.
우군 중 구로다 5천과 모리 3만은 충청남도의 천안으로 북상하며 가또 기요마사등 2만여명은 청주를 거쳐
충주로 북상하자 충주의 명군 오유방의 4천은 달아나는데 경상도 의령의 권율등 조선군은 숨어버렸고...
충청도 병사 이시언의 보고를 받은 충청관찰사 정윤우 장계에 병사들은 수풀속으로 사라져 버렸으며
한강 이남의 경기도 병사들도 경기 방어사 유염이 무한산성을 불사르는 등..... 진영을 버리고 도주합니다.
평양에 있던 양호는 서울로 달려와 마귀를 시켜 명군 기병을 파견하는데 9월 7일 왜군이 천안에서 직산으로
진출하니 구로다 선봉 1천 5백으로.... 해생의 명군 기병 2천이 저격하자 구로다 본대가 달려와 역전되고
파새의 기병 2천이 합세하자 호각지세로 싸우던중 천안에서 모리의 3만이 도착해 좌우로 나누어 포위
를 할려고 하자, 명군 기병은 황급히 도주하여 수원으로 후퇴하니 왜군은 보병인지라 천안으로 물러갑니다.
명군은 조선에 통지하니 한강을 방어하려고 경기도 수군을 들어오게 하고 배를 강 북안으로 옮기며 한강
남안에 있던 민가를 허물어 왜군이 뗏목을 만들 수 없도록 하니 피란민들이 서울을 떠나는데.... 양호는
명군 5천을 수원에 보강하며 정찰하니 일본군은 며칠간 천안 주변을 약탈하다가 9월 11일경 물러갔다고
통지하니... 조선왕조실록에는 9월 13일 기사에 나오고 사실을 확인하라는 기사는 9월 16일자에 보입니다.
선조는 이건 필시 임진강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거짓 철수하자 한응인과 신할이 말려들어 유극량등이 강을
건넜다가 매복으로 패퇴한 것 처럼 왜군의 속임수이니 경기도 동부쪽으로 우회하는지 살펴야 한다고
걱정하는데, 이후 명군이 후퇴한 왜군을 추격하자 이때 까지 12만 왜군과 싸운 조선군은 1천 5백명에
불과했으니.... 권율을 탄핵해야 한다는 상소도 올라오고 조선군도 비로소 명군을 뒤따라 추격에 나섭니다.
실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음력 10월 2일 (양력 11월 초순) 까지 남해안 29개 왜성 (순천에서 울산)
으로 철수하라고 지시하니.... 천안의 왜군은 9월 11일경 스스로 물러갔고 가토 기요마사는 충주
에서 조령을 통해 경북으로 남하했으며 왜수군은 9월 하순에 전남 영광과 무안에서 철수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천안까지 북상한 왜군이 명량 해전에서 왜수군이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 대패해서 멀리
도주한지라 서해를 통한 보급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왜군이 서울 진공을 포기하고 물러간
것으로 아는데.... 직산 전투는 9월 7일로 왜군이 승리했으며 또 물러간 날자는 9월 11일
인데.... 그 보다 닷새후인 "9월 16일에 일어난 명량해전 패배" 때문에 물러갔다고 말합니다?
명량해전 대승으로 왜군은 도주했고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했으며 전라도 백성들이 안전해졌고
수세에서 공세로 돌아섰다고도 말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이 물러간 9월 16일 오후에 병사들이
점심도 굶고 거친 물살속에 악천고투하며 싸워 피곤이 극에 달하고 저녁때니 영화 명량에서 백성들
이 목메어 기다리던.... 아침에 수군이 출진했던 우수영에 돌아와 군사들을 먹이고 쉬도록 해야 합니다.
하지만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적었듯이 우리가 이긴 것은 천운이다. 형세가 심히 위태롭다고 걱정하시면서
굶주림과 피곤에 지친 병사들을 독려해 우수영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배를 저어 멀리 신안군 당사도로
물러가서 밤에 육지에 상륙조차 못하고 대기하다가 다음날 아침이 되자 다시 배를 저어 어의도에 도착해
육지에 상륙했으며 19일 법성포를 지나 북상해 21일 금강하구인 군산 선유도에 도착해서야 장계를 씁니다.
왜군에 이겼지만 적선은 아직 300척 가까이 남았으니 그중 일부가 진도 바깥 바다로 돌아온다면 포위되어
전멸을 당할까 염려했고, 적선 31척을 부수고 수천명을 죽였음에도 아군 피해는 배는 전혀 손상이 없고
전사자 2명에 부상자 3명에 불과한건 대포의 포격에 힘입은바 크니..... 조총은 유효 사거리가 70미터인데
비해 조선 대포는 평균 600미터니 크게 활약했지만 전투후 화약과 포탄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으로 봅니다?
참패해서 멀리 도망쳤다(?) 는 왜 수군은 다음날 아침 다시 진격해 와서 우수영을 점령하고 이순신 장군을
추격해 북상하면서 조선인들을 살육하고 약탈하며 불을 지르는등 "전라도 해안은 아비규환 지옥도" 를
연출하는데...... 히데요시는 병사들에게 코를 베라고 했으니, 군인이 아닌 백성이라도 죽여 할당량을
채워야 하는 것이니 종군 승려 게이넨은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보이는 대로 베었다고 적었습니다.
포로가 되어 끌려가서 후지와라 세이카 에게 조선 과거제도와 춘추석전 (釋奠) 의례 를 설명하고 유학경서
(經書) 를 써 주었으니, 주자(朱子)의 주석에 따라 훈점(訓点) 을 표시한 “사서오경왜훈 (四書五經倭訓)”
으로 일본에 주자학(성리학) 을 전하게 되고 귀국해 선조를 만나 간양록을 적어 올린 전 형조좌랑 강항은
남원성에 보급을 대다가 성이 함락되자 고향 영광으로 돌아와 의병을 모았으나 5만여명 좌군이 남하합니다.
5만명 왜군이 전라도로 남하하자 강항은 식솔을 배 2척에 태우고 북상한다는 이순신을 찾아 바다로 나가는데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이미 군산에 도착한 뒤 였으니, 일행은 "명량해전 대승 7일" 만인 9월 23일 영광 앞
바다에서 명량해전에 참전했던 왜수군에 나포되는데 바로 도도 다카토라의 휘하로 시코쿠섬 이요(伊豫)국
오즈(大洲 에히메현 오즈시) 성주 사도(佐渡)의 부하인 노부시치로 (信七郞) 였으니 배는 무안으로 끌려갑니다.
무안항에는 왜군 배가 300척이 넘었다고 간양록에 적었는데, 관리라고 심문을 당하자 명나라
두유격이 1만척 전선으로 바다를 건너왔고 (실제로는 아직 안왔음!) 명량 처럼 물살이 거센
태안의 안행랑에 주둔하며 유선은 이순신과 합세했다고 거짓말을 하니 왜군은 대경실색해
더 이상 북진을 포기하는데.... 며칠후 조선인 수천명은 순천을 거쳐 시코쿠섬으로 끌려갑니다.
음력 10월 까지 남해안 왜성에 도착해야 하니 모리군이 9월 11일 철수한 것 처럼 왜수군도 9월 하순에
물러가니 이순신 장군은 10월 3일 군산 선유도를 출발해 우수영에 돌아온 날자는 후퇴한지 24일째인
10월 9일로 명량해전때 판옥선 13척에 초탐선(협선) 32척이었으니 함대는 그보다 더 많았을 것입니다?
대함대가 입항했는데도 우수영에는 그 많던 조선 백성들이 단 한명도 나타나지 않고, 개도 한 마리
보이지 않으니 왜수군에 학살당한 것이라? 그 기괴한 분위기에 참담한 마음이 드신 장군은 이틀을
머물다가 폐허가돼 버린 적막강산인 우수영을 뒤로 하고 안편도로 옮겼다가 얼마후 고흥 서쪽에
왜군이 없음을 확인하시고는... 목포 고하도로 들어가 13개월후 벌어지는 노량해전을 준비하십니다.
왜군의 전쟁계획은 2가지 사유로 뒤틀어지니 첫 번째는 왜군이 스스로 물러갔는데 패해서 물러간 것으로
오인한 명나라 양호는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큰 전투를 계획하니 적장중 으뜸은 가토 기요마사이고 29개
왜성 중에 가운데를 공격하면 포위될수 있으니 가장 동쪽인 울산을 공격하는데, 서생왜성은 방비가 튼튼
하니 공격하지 못하고 가토가 더 동쪽 울산 (학성공원) 에 부하를 시켜 새로짓는 도산성을 목표로 정합니다.
양호는 명군 5만 6천을 동원했는데 이중에 2만명은 양산으로 보내 주둔중인 5백명 왜군을 죽이고는 부산
에서 오게될 왜군 구원병에 대비시키고는, 12월 23일 마귀와 함께 3만 6천을 진군시키니 조선은 권율
과 정기룡등 1만1천5백명을 동원합니다. 이에 놀란 서생왜성의 가토 기요마사가 황급히 달려와 도산성
으로 들어갔지만.... 짓기 시작한지 두달도 채 안된 미완성인 성에는 "우물이 없는게" 가장 큰 문제 입니다.
조선군이 항왜까지 동원해 성밖 우물을 막아버리자 포위된 왜군은 명나라 대포에 성벽이 부숴지는데, 서생
왜성에서 급히 달려온지라 식량이며 탄약이 부족한데다가 "우물이 없으니" 말을 죽여 피를 마시고 소변을
받아 먹으며 악천고투 야차같이 버텨서... 열흘후 1월 4일 왜군 8만명이 양산의 명군 저지선을 무느뜨리고
달려오며 바다로 왜수군이 들어오자 명군은 포위될까 염려해 달아나다 무수히 많이 죽고 경주로 후퇴합니다.
왜군은 원래 계획으로 휴식을 취해야 하는 겨울에 울산까지 달려가 전투를 했으니 봄이 되어 출진을 하는게
아니라 그제서야 다시 남해안 왜성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하는데.... 이때 일본의 히데요시가 병으로 위중한
상태라고 하니 안테나를 일본에 맟추니 결국 "8월 18일에 죽고 철수명령"이 내려오니 돌아갈 준비를 합니다.
양호는 전날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4로병진 공격을 계획하니 동로군은 9월 22일 마귀의 명군 2만
4천명에 김응서와 선거이의 조선군 1만 5천등 3만 9천이 울산을 공격하는데 도산성은 이미 방비를
갖춘지라 선거이 장군이 전사하는등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서로군은, 육군은 유정의 명군 2만 6천에
조선군은 권율과 전라 병사 이광악의 1만이고... 바다에서는 이순신 장군과 진린의 수군이 협공 합니다.
10월 3일 이순신의 6천(60척) 수군과 명나라 진린의 9천(120척) 수군은 장도에서 30여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11척을 나포하였으며 일본군 3,000명을 무찔렀으니 "장도 해전" 인데,
조명연합군의 피해 역시 컸으니 명나라 전선은 썰물이 되어 뻘에 갇혔고 8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구하러 가던 사도 첨사 황세득과 군관 이청일도 전사하는등 130명의 사상자를 냅니다.
한산도해전의 조선군 전사자가 3명에 부상자 10명, 명량해전의 전사자 2명에 부상자 3명에 비하면 매우
큰 손실인데... 명군 배가 썰물에 물러나지 못해 뻘에 갇히니 구원하러간 조선 배도 갇혀 고전했지만
육군의 협공이 없으니 수군 단독으로는 왜교성에 상륙전을 할 수는 없는지라 별 소득 없이 후퇴 합니다.
두 전선이 고착된 가운데 중로군은 명나라 동일원 3만 6천 8백명에 조선군 정기룡의 2천 2백명 합계 3만
9천명이 공격해 진주와 사천성의 왜성들을 수복하고 선진리 왜성으로 접근하는데, 8천명 왜군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수비에 열중하다가 마침내 기회를 잡아 성밖으로 돌격해 나오니 명군은 혼비백산하여
멀리 경북 고령까지 달아나니 1만명이 전사하는등 명군이 완전히 와해되니 서로군과 동로군도 후퇴합니다.
20여개 왜성에 주둔하던 왜군은 조선군이나 명군의 방해 없이 순조롭게 물러가는데.... 오직 하나
순천왜성 만큼은 이순신 장군이 진린과 함께 막아서는지라 11월 19일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성의 다치바나 무네시게, 남해의 소 요시토시에 부산의 수군등 300척 1만 5천이 구원을
오니 노량해전으로... 연합군은 이순신의 60척 7,000명과 진린과 등자룡등 200척 1만여명 입니다.
구원군이 200척 배를 잃으며 분투하는 사이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유카나가의 70척 8,500명은 별다른
피해없이 탈출에 성공하는데...... 만약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지 않았으면 전쟁은 오래토록 계속
되었을 것이니, 일본과 조선 백성 모두 고통스러웠을 것인데 하늘이 조선을 버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충청 병사 이시언의 장계를 적은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10월 3일자 기사에 보면 천안과 전라도
에서 왜적이 물러간 것은 히데요시의 명이라고 하는데.... 포로로 잡힌 후쿠다 간스케 (福田勘介
복전감개) 를 공초한 내용으로 그는 가토 휘하에서 100명을 지휘하는 아시가루 대장이라고 합니다.
“당초에 행장과 청정은 세 길로 나누어 서울로 올라가려 했는데 관백이 사람을 보내어 전령하기를 "서울은
침범하지 말고 9월까지 닥치는 대로 무찔러 죽이고 10월 안으로 서생포나 부산 등의 소굴로 돌아오라."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까지 3일길 밖에 안 되는데 곧바로 돌아간 것이며 전라도에도 머물 뜻이 없었습니다”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걸을 수 있는 자는 사로잡아 가고 걷지 못하는 자는 모두 죽였으며, 조선에서
사로잡은 사람들은 일본에 보내서 농사를 짓게 하고... 일본에서 농사짓던 사람을 군사로 바꾸어
해마다 침범하고 아울러 중국까지 침범하려 하고 있습니다. 10월 안으로 청정은 울산에 새로운
진지를 만들 것이며 직산 (稷山) 싸움에서 갑비수 (甲斐守 구로다) 의 군대가 많이 죽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 3개도를 얻겠다는 일본의 장기 전략은 실패로 돌아가니, 먼저 전공을
세우려는 조명 연합군의 두차례의 공격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경상, 충청, 전라도를 할양 받으려는 정유재란 전쟁 목표는 물거품이 되게 됩니다.
왜군은 겨을을 띠뜻한 남해안 29개 왜성에서 나며 부상을 치료하고 재충전해 다음해 늦은 봄에 다신 하삼도를
유린하는 출진을 하려 했지만, 저 조명연합군의 공격으로 멀리 울산성을 구원하려 가서 전투를 치뤘으니
겨울을 쉬지 못하고 봄에야 다시 남해안의 왜성으로 돌아왔으니 재 출진을 못했고, 그후 과대망상증에 걸린
히데요시가 죽었으니 철수하는데... 죽지 않았으면 전쟁은 더 오래 끌었을 것이니 하늘이 조선을 도운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