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하나님을 공경하였으니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되기 이전, 조선 중기의 명신 백강 이경여 선생의 아래의 말씀에서 오래전부터 우리나라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하나님의 은총(恩寵)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
1631년 인조 9년 10월 3일 백강 이경여 선생 상차문(上箚文)에 다음의 말씀이 있다.
『하늘은 이치(理致)이니, 한 생각이 싹틀 때 이치에 합하지 않으면 이는 하늘을 어기는 것이고, 하나의 일을 행할 때 이치를 따르지 않으면 이는 하늘을 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옛적의 제왕이 매우 조심하며 상제(上帝)를 대한 듯 행동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 정성으로 하늘을 섬기면 천명(天命}이 계속 아름답게 내려지지만 하늘을 어기고 이치를 거스르면 그 천명이 영원히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마음은 인자하여 차마 갑자기 끊어버리지 못하니, 반드시 재이(災異)를 내려 견책한 뒤 흐리멍덩하게 깨닫지 못하여 끝내 고치지 않은 다음에야 크게 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재앙이나 복은 자신이 초래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잘못을 깊이 징계하고 스스로 장래의 복을 구하여 상림(桑林)의 육책(六責)1)으로 몸을 살펴 반성하고 운한(雲漢)의 8장2)으로 몸을 기울여 덕을 닦으소서. 심술(心術)의 은미한 곳으로부터 궁정의 사람 없는 곳과 동작하고 이야기하는 사이에 이르기까지 삼가 공순하고 공경히 두려워하지 않음이 없게 하소서. 천명(天命)을 스스로 헤아려 천리(天理)로써 보존하고 자연의 법칙으로써 움직여, 공경하고 조심스럽게 하기를 마치 효자가 어버이를 섬길 때 힘써 성의(誠意)를 쌓아 기필코 즐겁게 되시도록 하는 것과 같이 하소서.』
또한 1657년 효종 8년 5월 5일 백강 이경여 선생의 상차문(上箚文) 말미에 다음의 말씀이 있다.
『신의 생각으로는 ‘허례허식(虛禮虛飾)이나 잗단 일을 하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도리(道理)가 아닙니다.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는 것이 궁궐의 출입을 통제하여 청탁하는 길을 막는 것만 못하며, 수라의 찬수를 줄이는 것이 검소한 덕을 숭상하여 낭비를 줄이는 것만 못하며, 해마다 좋은 말을 구하는 것이 한 가지 일을 실행하는 것만 못하며, 조정(朝廷)에 임하여 애통해 하시는 것이 밤낮으로 삼가고 두려워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명(聖明)께서는 하늘이 내게 경고한 것은 왜 그런 것이며 내가 하늘을 받드는 것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반드시 살펴서 어떤 일이나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강구하여 체득하고 힘써 행하되, 오랫동안 유지하고 일관성 있게 해 나가 반드시 감응(感應)하는 실적이 있게 하고 형식적인 것이 되지 않게 하소서.』
위의 글을 보고 그윽하게 생각건대,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지금까지의 서구문화 일변도의 해석에서 벗어나 그 폭을 넓혀서 범(凡)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두루 아우르는 시각에서 성경을 새롭게 해석해 가야 한다고 본다. 성경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온 인류를 모두 아우르는 시각에서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조차도 사후에 지옥으로 갔다는 해석은 참으로 기괴(奇怪)한 것으로 잘못된 것이 분명하니 교리(敎理)를 수정해서 고쳐야한다.
[주-1]상림(桑林)의 육책(六責) : 은(殷)나라 시조 성탕(成湯)이 7년 동안 가뭄이 계속되자 상림에서 비를 빌며 자책한 여섯 가지. 곧 정치가 잘 조절되지 않았는지, 백성을 병들게 하지 않았는지, 궁실이 지나치게 화려하지나 않았는지, 여자의 청탁이 성행하지 않았는지,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지 않았는지, 참소하는 사람은 없었는지 한 것이다.《순자(荀子)》 27 대략(大略).
[주-2]운한(雲漢)의 8장(八章) : 운한은 가뭄을 하늘에 하소연한 《시경》 대아(大雅)의 편명(篇名)으로, 주 선왕(周 宣王)이 여왕(厲王)의 폭정을 이어 받아 잘 다스리려는 뜻이 있었으나 한발을 만나자 두려워하면서 하늘에 하소연한 내용이다.
2024.11.15. 素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