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 외 4편 *제22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수상작
안성은
태아에서 사람이 된 아기의 뒤꿈치를 본 적 있는가
땅을 디디는 일에는 관심도 없이 그저 망, 글자를 닮은 둥근 하얀 피를
아기는 틈만 나면 나를 감시했다 내가 자칫 잘못될까봐서
나를 부르고 싶었다
어쩐지 무화과 같은 시력으로
처음부터 나를 알아보는 체 했지
뼈끔거리는 입술로 엄마, 라는 글자를 아는 척 했잖아
남의 기쁨마저 다 앗아와 누리게 하려는 듯이
기회가 된다면 아기에게 묻고 싶다
나의 첫인상과 지금은 어쩐지 조금 다르지 않느냐고
아무래도 나는 좀 별로인가
이상한 쪽으로 성격이 기울었대도 같이 굽어주는 세계
나는 조금 양해를 구할 수 밖에
어떤 하루를 기억해줄지 모르니까 최대한 매일 성실하고 싶었다
실패한 인간들의 소망을
아가? 너는 잘 모를 것이다
아무리 키워도 아기는 늙지 않았는데
사람들을 많이 용서해줘서 그런 것이었다
아기의 낮은 콧망울에 모든 회개가 다 모여 있었기에
나는 근방의 십자가를 모두 그러모은
사람, 처럼 굴기도
새벽이 소담스럽게 찾아올 때면
나는 때때로 아기의 온몸을 뒤적거렸다 뒤꿈치에는
아직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생사의 구절들이 갓 복사된 것 같았다 너의 지난 삶 말이다
쏜살같이 내게 오느라 다 지워진 걸음의 흔적들을
만, 만, 만져보면서
나는 왜인지 이번 생이 망하지만 않은 것 같다고
잠자리에 꿔다놓은 초생달에 빌붙어 속삭이고는 했다
돌
그는 돌치기 소년이었다
석양이 질 때는 기다렸다가
골목의 돌들을 한 곳으로 모는 일을 했다
별을 헤아리는 일과
비슷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집 나간
모든 자를 잡아오려는 몸부림으로
소년은 따뜻한 조약돌만 한 곳으로 모았다
〈괄호〉 안은 따뜻했으니까
모서리를 잃고
구석을 얻은 것들은
코코아잔의 뺨을 만지는 것 같았다고 한다
잃어버린 엄마의 발뒤꿈치를 쥔 것처럼
젖과 젖 사아의 노지露地에
뭐라도 채워진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돌들이
거대한 집을 이루면
소년은 돌의 문을 뚫고 들어가
어느 집이든 아들이 될 것이었다
이웃으로부터
툭 밀려버렸다고 전해지지만
자신을 가라앉힌 바위들을
지고, 이고,
이고, 지고, 다시 기어와, 소년은
사람이 사는 집에서
아들이란 것도 한 번쯤 해볼 것이었다
미싱 수업
실을 푼다
노란색 천이니까 노란 실이 좋다
바늘귀에 꽂는다 박음속도를 정하고 폐달을 밟는다
정확한 직각은 모퉁이에서 만들어진다
길의 끝에서 바늘은 느려져야만 한다
천 밖으로 튀어나가는 실들은 농담보다 못한 것들이다
매듭을 지을 때는 바늘이 같은 자리를 두 번 왕복해야 한다
세 번이라 하여 천이 더 단단해지거나
너희가 오래 사랑한다는 것은 아니다
시접을 고작 0.5센티미터 잡았다고
익사하듯 소리 지르는 선생이 있다면
넉넉하지 못한 것을, 불길한 사랑을, 이해 못하는 사람이다
학원을 옮기면 그만이고 아버지는 바꾸면 그만이다
겉과 안의 재질이 다른 천 두 장을 겹치고 싶을 때는
시침핀을 신중하게 꽂는 것이 좋다
수직으로 내리 꽂아야 한다
가급적 크게 움직이지 않아야만 천이
절대 울지 않는다
여기 시침질한 천을 들고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저 사람은 조짐 없이 닥치는 것들로부터 오래 시달린 사람
이제는 사람의 옷은 만들지 않고
개나 고양이의 것들만 만드는 사람이다
선생님, 저도 오래전부터 이 실을 끊고 싶었어요
허락을 구하는 사람도 있다
수업이 끝나도 노란 천과 노란 실과 은색 바늘과
단단하지 못했던 매듭을 생각하고
이사 갈 때마다 망친 천 조각을 데리고 다닐 사람이다
방향
방향을 알려주는 여러 지식 중에
당신은 무엇을 맹신하나요
찬송가에서 알려준 미신 중에
어떤 것이
마음에 끝내 가라앉는 흙이었나요
우리는요―
모든 식물의 장례를 습관처럼 치르며
북향집에서 여섯 해를 살았답니다
퇴근할 때면 몇 가지의 별이
어둠 속으로 밀려가는 걸 보았죠
개미가 토란 같은 알뿌리를 대신해
우리집을 밀어올리는 소리를
듣기도 했어요
잎맥을 지나간 물의 기억도―
하늘에서 흘러내리던 모든 것도―
휘파람이 되어
제일 먼 귓가에 남아있죠
하늘이 괜찮게 그려진 밤,
별자리를 진작 인쇄하지 못했어요
다운로드 기간이 지난
모든― 혜택처럼요
선착순에 들지 못할 때도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재밌었던 걸까요
거기에다가 난 또
왼손잡이잖아요
박해가 없는 이 시대에도
― 옳은 손으로 먹어라
이런 소릴 들어야 했던 것처럼,
옳지 못한 나를 마주해야 했을 때에도
사랑은 책임감 있게 순수를 맡았죠
순수하고 비루한 스위치 옆의 손때를 보세요
이런 것이 증명이랍니다
아까 본 별은 이미 어둡고
지금 본 별은 이제 막 밝아져요
오늘은 비가 오더니
내일은 더 비가 올 듯하죠
방향을 알려주는 미신 중에
당신은 어떤 것을 믿나요
석양이 손가락질하는 곳에
작은 집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믿고 있어요
새 칼
정육점 사장님이 바뀌었다
화분이 몇 개 들어섰고 칼날은 뭉툭했다
벼리지 않은 것들을 보면 기쁘다
닳고 닳은 나이를 들여다보는 일
스스로를 목격하는 사람이 되는 일
나만 음흉하지 않다는 일을 확인하는 일에
안도한다
밀면 밀리는 게 사람이니까
밀려 있는 것들과 뭉툭한 것들은
한 통속일지 모르지
정육점 간판은 그대로지만
앞치마는 바뀌어 있었다
날이 서지 않은 시간이 나를 앉힌다
앉는 건 언제나 반갑가
그러니 의자는 사람을 앉히고 싶어했고
미처 일어서지 못한 날들이 많을 수밖에
사장님은 그동안의 적립포인트를 그대로 유지한다 하였다
나는 여전히 정육점과 한 통속일 수 있어 기쁘다
반쯤 접힌 돼지의 몸을 꺼내보는 시간
닳고 닳으면 뒤집히는 게 도마인데
가끔 뒤로 걷고 싶은 나는,
아무 상처도 받지 않은 등을 가지고 싶었던가
너무 열심히 사는 사람을 보면 무서웠는데
구겨진 돼지의 얼굴을 꺼내 보는 건
안도가 된다, 새 칼을 들고 있는 새 사장님이 꽤 마음에 든다
부러진 망치 같은 시간
― 《내일을 여는 작가》 (2023 / 겨울호)
안성은
1984년 서울 출생.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박사 통합과정 수료. 현재 아동문학으로 박사논문 집필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