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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너벨 리
에드거 앨런 포
아주 여러 해 전
바닷가 어느 왕국에
당신이 아는지도 모를 한 소녀가 살았지
그녀의 이름은 애너벨 리 -
날 사랑하고 내 사랑을 받는 일밖엔
소녀는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았네
바닷가 그 왕국에선
그녀도 어렸고 나도 어렸지만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을 하였지
천상의 날개 달린 천사도
그녀와 나를 부러워할 그런 사랑을
그것이 이유였지, 오래전
바닷가 이 왕국에선
구름으로부터 불어온 바람이
나의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했네.
그래서 명문가 그녀의 친척들은
그녀를 내게서 빼앗아 갔지
바닷가 왕국
무덤 속에 가두기 위해
천상에서도 반쯤밖에 행복하지 못했던
천사들이 그녀와 날 시기했던 탓
그렇지 그것이 이유였지.(바닷가 그 왕국 모든 사람들이 알 듯)
한밤중 구름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그녀를 싸늘하게 하고
나의 애너벨 리를 숨지게 한 것은
하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훨씬 강한 것
우리보다 나이 먹은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
우리보다 현명한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
그래서 천상의 천사들도
바다 밑 악마들도
내 영혼을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으로부터 떼어 내지는 못했네
달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지 않으면 비치지 않네
별도 내가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빛나는 눈을 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네
그래서 나는 밤이 지새도록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누워만 있네
바닷가 그곳 그녀의 무덤에서 -
파도 소리 들리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작가소개]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출생 : 1809년 1월 19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사망 : 1849년 10월 7일 (향년 40세)
미국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국적 : 미국
학력 : 버지니아 대학교 (중퇴)
미국 육군사관학교 (퇴학)
직업 : 시인, 단편 소설가, 편집자, 문학 비평가
장르 : 고딕물, 추리물, 시문학
사조 : 암흑낭만주의
1. 개요
미국의 시인 및 소설가. 한국에서는 추리소설의 시초라 불리는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을 집필한 추리 소설가, 혹은 《어셔 가의 몰락》이나 《검은 고양이》 같은 공포 소설을 쓴 장르 문학가로 알려졌다. 반면 영미권에서는 추리 소설가보다는 순수문학 작가 또는 시인으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시와 단편의 미학적 문장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어 포의 공포소설은 영어 원문을 읽어보면 내용뿐 아니라 그 문체 스타일 자체가 음울하고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발산한다. 이는 소설에서 문체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의 기괴하고 초현실적인 대표작 《갈가마귀(The Raven)》는 미국 역사에서 무척 유명한 시이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자면 이 시에 등장하는 "Quoth the raven", "Nevermore" 등 어구는 미국의 유치원생들도 안다. 이 시가 미국 내에서 받는 평가의 정도는 대한민국 내에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 아니, 어찌 보면 그 이상이라고도 할 수도 있겠다. 위키피디아에서는 아예 '대중문화에서의 갈가마귀' 항목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 항목을 보면 문학,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게임, 웹 코믹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부문에서 갈가마귀가 패러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타깝게도 포의 일생은 생애 내내 불운하였다. 이유는 그의 모난 성격과 그로 인한 가난 때문이었다. 19세기는 작가들이 출판 계약을 따내도 금액이 100달러 선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시기란 걸 감안해도, 포가 쓴 글들 중에서 그나마 제일 성공했던 《The Raven》도 쓰고 나서 달랑 9달러 받았다. 당시 명확하지 않았던 저작권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다른 잡지나 매체에 실려도 돈 한 푼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포는 전업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기 전에 양아버지의 가게에서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고 사관학교에 입교하기도 했다. 그러나 양아버지와의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아서 금방 일을 그만두었고 군대 문화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오직 글로만 먹고 산다는 신념하에, 낮에는 편집자로 일하면서 밤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편집자로 일할 당시에도 겨우 10달러의 주급을 받았다고 한다.
결국 생전에 포는 편집자 혹은 비평가로만 조금 알려졌을 뿐 작가로는 알려지지 못했고, 포의 사후(死後)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가 그의 글을 우연히 보고 포의 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전집을 출판, 이 전집이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포의 재발견은 빅토리아 시대 영국과 다른 유럽으로 퍼졌고, 비로소 미국이 작가로서의 에드거 앨런 포를 다시 보게 되면서 미국 내에서도 유명해졌다.
2. 생애
불쌍하게도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는 포가 1살 때 집을 나가고, 어머니는 포가 2살 때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서 포는 어릴 적부터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부유한 담배상인인 존 앨런 아래에서 자랐다.
14살에 수양부모를 따라 영국으로 이주하였고 기숙학교에 입학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성적이 좋아 미래가 기대되나 동시에 항상 공상에 잠겨있는 학생이었다고 되어 있다. 포는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는데, 그의 멀리뛰기 기록이 21피트 6인치(약 6.5~6m)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시를 좋아하는 형 윌리엄 헨리와 오랫동안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다른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대필해서 누이동생인 로잘리를 통해 전달하기도 하는 등, 글쓰기에 소질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즈음 타국에서 사춘기를 보내던 포를 유일하게 친절히 대해주었던 친구의 어머니 제인 스태넛 부인을 연모하지만, 이듬해 스태넛 부인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면서 크게 상심하고 처음으로 시를 쓰게 된다. 이때 포는 부인을 간호하던 소녀 중 한명이었으며 동향 리치먼드 출신이었던 사라 엘미러 로이스터와 친해지고, 두 사람이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정식으로 약혼까지 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17살이 되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포는 당시 부유한 상인 자녀들이 들어갔던 버지니아 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입학 당시에는 성격이 굉장히 내성적이고 소심해서 동료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대학동기들과 잘 지내보기 위해 당시 버지니아 대학교내에서 유행했던 도박을 접하고부터는 술에 빠지고 빚까지 지게 되어 1년 만에 퇴학당한다. 다만 포의 대학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다고 한다.
당시 다른 여성인 루이자 패터슨과 바람을 피던 중이라 집안일에는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던 포의 수양아버지인 존 앨런은 포가 술과 도박에 중독됐다는 사실을 접하고 당장 그만두라고 충고하며 포를 질책했지만 포는 충고를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존 앨런과의 사이가 크게 벌어져 화가 난 존 앨런이 포의 학비를 끊어버려 퇴학당했던 것이다. 특히 포는 도박빚으로 2천달러의 빚을 지는 바람에 양부한테 더욱 찍히고 말았다. 다만 빚은 양부가 다 갚아줬다고 한다.
대학에서 퇴학당한 직후 설상가상으로 약혼녀 엘미라 로이스터가 양가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좌절하여, 포와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해버리자 포는 완전히 절망에 빠진다. 그녀와의 연애는 포의 첫 시집 《태멀레인(Tamerlane)》과 두 번째 시집 《알 아라프(Al Aaraaf)》의 소재가 된다.
이후 포는 생활고 때문에[14] 양부 이름과 나이를 속여 미합중국 육군에 들어간다. 입대한지 5개월 만에 설리반 섬으로 배치 받은 포는 맡은 임무를 잘 처리하여, 1829년 1월 사병으로서는 최고 지위인 특무상사에 올라간다. 포는 설리반 섬의 생태를 관찰하면서 자연과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설리반 섬의 경험은 황금충에서 잘 묘사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포는 이왕 군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육군 장교가 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양부의 추천장으로 뉴욕 주에 위치한 웨스트포인트의 미국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다.
하지만 입교 직후 전해들은 형 윌리엄 헨리의 갑작스러운 요절 소식에 대한 충격과, 독서조차 할 수 없는 강압적인 사관학교의 분위기, 예민한 성격으로 인하여 발생한 상관 및 동료들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포는 근무를 소홀히 하기 시작하고, 장교로서의 삶에 대한 전망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다시 술에 빠져든다.
결국 포는 육사에서 제대로 찍혀 퇴학당하고 불명예 전역하게 된다. 이 때문에 양부와의 관계는 완벽하게 파탄나서 포한테 크게 실망하며 빡칠대로 빡친 양부 존 앨런은 포와 의절을 선언하고 호적에서 파버렸고 포를 집에서 완전히 내쫓았다.
이미 군복무 중 2권의 시집을 자비 출판한 경력이 있었던 포는 군에서 쫓겨난 직후인 1831년, 육사 친구들의 출자로 3번째 시집을 출판하면서,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1831년 육사를 나오면서 집에서까지 쫓겨나게 된 포는 형의 소개로 알게 된 고모, 마리아 클램의 집에서 살게 된다. 여기에서 그의 평생의 사랑이었던 버지니아 클램을 만나게 된다. 포가 그녀를 얼마나 좋아했냐면, 안 그래도 가난한 고모의 집에 포까지 얹혀 살다보니 부담이 되어서 고모가 다른 사촌집에 버지니아를 보내려 했더니 포가 식겁했기 때문에 끝까지 같이 살았다. 소녀 버지니아 클램 역시 빛나는 문학청년인 포를 가슴 깊이 숭배하고 있었다고 한다.
1833년 단편소설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가 볼티모어 지역의 신문사가 주최한 공모전에 당선되어 상금을 받자, 에드거 앨런 포는 돈을 벌기 위해 본격적으로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유명하지 않다보니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포는 이에 절망해서 또 술을 가까이 하게 된다.
1836년, 27세의 포는 13살인 사촌동생인 버지니아 클램과 결혼한다. 결혼 문서에는 버지니아의 나이를 21세로 허위 신고했다.
다만 포가 페도필리아 였던 것은 아니고 당시 미국 남부 사회에서는 집안 내 결혼은 흔한 것이었다. 사춘기에 막 접어든 소녀들의 결혼도 결코 드물지 않았다.
실제로 마리아 클램의 집은 할머니, 고모, 버지니아로 구성된 대가족이었는데, 이것은 19세기 남부의 전형적인 가족의 형태였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마리아 클램의 숙박업과 포의 할머니가 독립유공자 배우자로서 받고 있는 작은 연금에 의존하여 살고 있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포와 버지니아가 결혼한 1836년은 포의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가족의 생계가 곤란해진 시기였고, 포는 경제적 압박 때문에 자신에게 유일하게 남아있는 친혈육인 클램의 가문이 해체될지도 모른다며 무척 불안해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포가 처음으로 편집 일을 했던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의 잡지의 편집장 화이트는 포와 버지니아는 부부라기보다 남매 같은 사이었다고 증언했고, 갈까마귀가 성공하여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은 포는 다른 여성들과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 손님이 집에 들렀다 목격한 증언에 의하면, 아파 누워있는 버지니아는 고양이를 껴안고 이불을 덮고 누워서 자고 있고, 곁에는 포와 장모인 고모가 각각 버니지아의 차가운 손을 잡아줘야 체온이 유지될 정도였으며, 겨울에는 난로를 땔 돈이 없어 원고지를 연료삼아 불을 지펴야 했다고 한다.
31살이 된 1839년에는 어셔가의 몰락을 쓴다.
한편 10대 시절부터 '북부의 뉴 잉글랜드 문단처럼, 자신이 살고 있는 남부에도 문학적인 기반이 탄탄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며 부러워하면서, 당시 미국 문학계의 주류인 뉴잉글랜드 보스턴 중심의 문학계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포는 편집자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이후, 이러한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서 미국의 국민문학에 기반이 되어 줄 재능 있는 신인을 발굴하는 수준 높은 문학잡지를 만들기로 결심했고 마침내 32살이 된 1840년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자신의 잡지 《Pen Magazine》을 창간하려 한다. 이 시기에 포의 역량은 절정기에 접어드는데, 훗날 포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여러 작품이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
33살이 된 1841년에는,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을 썼고, 34살이 된 1842년에는, 함정과 진자, 붉은 죽음의 가면, 마리 로제의 비밀을, 35살이 된 1843년에는, 검은 고양이, 황금충, 고자질하는 심장을, 36살이 된 1844년에는, 도둑맞은 편지를 집필한다.
그러나 포는 특유의 예민하고 독선적인 성격으로 기존 문학잡지의 사주들과 끊임없이 충돌하여, 직장내에서도 대인관계가 좋지 않아 나중에는 아예 편집자 직을 그만두고 새로 구직하는 과정 - '이브닝 미러'에서 '브로드웨이 저널'로 등 - 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특히 직설적인 면모 때문에, 귀족적인 환경에서 성장하여 돈 걱정 없이 편안하게 글을 쓰고 끼리끼리 어울리면서 출판기회마저 독차지하던 기존의 뉴 잉글랜드 문인들과도 관계가 편치 못했다. 특히 뉴 잉글랜드 기성문단의 대표격인 롱펠로를 심하게 공격해서, 북부 뉴 잉글랜드 문단은 포를 작가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1845년부터 편집장으로 일하던 '브로드웨이 저널'이라는 잡지를 마침내 소유까지 하게 되지만, 결국 재정적으로 실패하여 1846년 폐간되고 만다. 포는 잡지 폐간에 대한 충격과 그 동안의 과로가 겹쳐 실신하여, 7주 동안 침대에 드러눕게 된다.
38살이 된 이 해, 아몬틸라도 술통(1846년)을 집필한다.
39살이 된 다음 해, 설상가상으로 건강이 좋아졌다 악화되었다를 반복하던 아내 버지니아가 1847년 24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포 생전에 어찌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평생 그리워했다고 하며, '애너벨 리'라는 명시(名詩)를 남겼다.
'갈까마귀'에서도 주인공이 레노어라는 죽은 연인에 대해서 그리워하는 대목이 나오며, 이 시의 레노어가 실제 포의 아내 버지니아와 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이다. 반대로 두 인물이 서로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학자들도 있는데, 이들에 의하면 "시 '갈까마귀'가 버지니아의 죽음 2년 전인 1845년에 공개된 시이기 때문에, 죽은 것으로 묘사된 레노어가 당시 살아있었던 버지니아를 묘사한 것일 수 없다"라는 것.
물론 '갈까마귀'가 1845년에 세상에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주인공의 연인이었던 레노어가 버지니아라는 주장은 학계에서 꾸준히 타당성을 인정받아 왔다. 몇 가지 근거를 대자면, 버지니아는 평소에도 건강이 좋지 않아 병치레하는 일이 잦았으며, 포 자신 또한 '엘레오노라(Eleonora)' (1842), '직사각형 상자(The Oblong Box)' (1842), '레노어(Lenore)' (1843) 등 이전 작품에서도 버지니아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거나, 그녀와 흡사한 인물을 아프거나 죽은 것으로 그리는 등, 버지니아의 완연한 병색에 대한 본인의 슬픔을 꾸준히 작품 속에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잡지의 폐간과 버지니아의 죽음 후 포는 절망에 빠져 아편으로 자살 시도를 하고, 자살 시도 직후 여류 시인 세라 휘트먼이 보낸 발렌타인 카드를 보고 우발적으로 프로포즈를 하는 등 정신적으로 오락가락 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라 휘트먼에게 차인 후에는 예전의 약혼자였으며 당시 과부가 되어있었던 '사라 엘머러 로이스터'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재결합을 하려 했다.
사라는 포를 잊지 않고 사랑하여 그와 결혼하기로 결정했으나 생활고와 지독한 음주에 피폐해진 모습을 보고는 안타까워하며 포에게 술을 끊고 의사를 만나 건강을 회복하여 새사람이 되라고 했다. 그는 그녀의 뜻대로 금주회에 가입하고 의사를 만나러 여행길에 오른다.
그러나 포는 의사를 만나지 못하고, 그대로 클램 숙모를 결혼식에 초대하기 위해 볼티모어로 향하는 배를 타게 되고 행방불명된다. 1849년 9월 28일 볼티모어의 한 병원에서 포는 빈사상태로 목격되나 역시 의사를 만나지 못했고, 이후의 행적은 의문에 싸인 채 10월 3일 볼티모어의 한 술집 앞(또는 길바닥, 또는 바닷가 근처라는 기록 및 글도 있다고 한다)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된다.
당시 포는 혼수상태와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 있었는데 절규하면서 "누구든 나를 생각하면 제발 내 머리를 총으로 쏴다오!" 라고 외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죽기 전날 레이놀즈라는 이름을 몇시간 동안 외쳤다고 한다. 다만, 레이놀즈의 정체는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포는 발견 직후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몸 상태가 너무나도 허약해진 상태라 이미 늦었다는 진단이 내려져, 입원 상태에서 10월 7일 일요일, 새벽 다섯 시에 40세로 숨을 거뒀다. 유언은 모든 것이 끝났다. 에디는 더 이상 없다라고 묘비에 적어주게. 신이시여, 내 불쌍한 영혼을 돌보소서!"라고 한다. 덧붙이자면 이때는 버지니아가 사망한 지 2년이 지났을 때였다.
그의 장례는 약혼녀였던 사라가 치루어주었다. 하지만 무연고 병자로 쓸쓸히 숨을 거둔 포는 당시 유일한 유족이었던 사촌이 대중들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아 사라를 포함한 몇명의 추모객만 참여한 채 서둘러 장례식을 마쳤고 볼티모어의 공동묘지에 비석도 없이 매장했다. 이후에 그의 작품을 알게된 팬들의 도움으로 볼티모어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장로교회 묘지에 묻혀 제대로 된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
포의 죽음에는 이상한 점이 있는데, 당시 해당 병원에 남겨진 포에 대한 의료진단서나 자료들이 모조리 사라져서, 포가 유명해진 다음에 이걸 분석하려던 이들은 두고두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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