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적 정권 이양을 꿈꾼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
사카모토 료마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든 내가 이루는 것은 나만이 알 따름이다." 막부 체제를 종식시키고 근대 일본의 토대를 만든 지사 사카모토 료마.
그는 3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정치 활동을 했으나, 막부 체제가 종식되고 천황 친정제를 확립한 대정봉환을 통해 근대 일본을 수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쇄국과 개화의 갈림길에 선 에도 말기,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활동하며 불꽃 같은 생을 살다 간 그는 일본인에게 인기 많은 역사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1835년 도사 번의 향사인 하치헤이 나오타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사카모토씨는 전당포, 주조업, 포목상을 하는 상인 가문인 사이다니야 가의 분가로, 료마는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2세 때 어머니를 여의였으나 새어머니의 사랑과 엄격한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14세 때부터 고향에서 검술을 배웠으며, 19세 때 보다 심도 있게 검술을 연마하고자 에도로 갔다. 그는 3년 후 다시 에도로 검술 여행을 갔는데, 어린 시절 다른 학문을 공부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으며 오직 검술에만 힘을 쏟은 듯 하다.
그가 에도에 도착했을 당시는 페리 제독의 내항과 개국 요구, 미일 화친 조약 체결, 개국파와 쇄국파의 대립, 존왕양이론의 등장, 안세이 대옥 등으로 혼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에도에서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의 치바 사다키치(千葉定吉) 문하에서 수련하고,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의 사숙에서 공부했다. 이 무렵 존왕양이론자들과 교류하고 서양 학문을 배우면서 시대 상황에 눈을 떴다.
그가 본격적으로 활약한 나이는 스물일곱으로 다소 늦은 때였다. 1861년 료마는 다케치 즈이잔(武市瑞山)의 주도 아래 도사 번 출신 하급 무사들이 막부 타도를 기치로 모인 도사근왕당(土佐勤王黨)에 들어갔다. 이들은 안세이 대옥으로 실각한 도사 번주 야마노우치 요도의 의지를 이어받은 과격 존왕론자들이었다. 료마와 같은 당원들은 단지 참가자에 불과했으며, 료마는 이곳에서 그리 두드러지는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해 3월 료마는 탈번을 감행했다. 당시 탈번은 사형으로 다스려지는 중죄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훗날의 행적으로 미루어 도사근왕당의 과격한 성격이 그의 성정과 맞지 않았던 데다 일개 번이 아닌 국가 전체적 틀에서 시대의 변혁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탈번 후 료마는 낭인(소속이 없는 무사)으로 에도에 올라왔다. 그리고 평생의 스승이 되는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만나게 된다.
가쓰 가이슈
간닌마루 호의 지휘관이자 사카모토 료마의 스승. 가쓰 가이슈는 료마에게 서양 문물과 개화 사상을 전했으며, 료마가 고베 해군 훈련소를 세우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가쓰 가이슈는 1860년 미일 수호통상조약 비준서를 교환하는 사절단을 태운 간닌마루 호의 지휘관으로, 일본 최초로 태평양을 횡단한 인물이다. 가쓰는 이때의 경험으로 양이(攘夷)는 시대 흐름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해군을 창설했다. 료마와 만날 당시 가쓰는 군함 부교로 일하며 해군의 근대화에 앞장서고 있었다. 료마는 가쓰로부터 서양 문물과 개화사상을 배웠다. 가쓰는 이듬해 도사 번 번주 야마노우치 도요시게에게 료마의 탈번에 대한 사면을 얻어 냈다. 료마는 가쓰 아래에서 고베 해군 훈련소를 설립하고, 1863년에 그곳의 책임자가 되었다.
1865년 료마는 가쓰의 소개로 사이고 다카모리를 알게 되었다. 그해 가쓰가 파면당하고 해군 훈련소가 문을 닫았으나 료마는 사쓰마 번의 원조를 받아 무역회사인 가메야마 조합을 세웠다. 료마는 이후 가메야마 조합을 기반으로 사쓰마-조슈 동맹 수립에 큰 역할을 수행하면서 정치 전면에 급부상하게 된다. 막부는 토막 운동의 거점인 조슈 번이 군대를 강화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 외국 세력과의 무기 거래를 금지시킨 바 있었다. 이에 군량미 부족으로 고심하던 사쓰마 번의 상황을 고려하여, 료마는 가메야마 조합을 통해 사쓰마 번의 명의로 무기를 구입해 조슈 번에 넘기고, 조슈 번의 쌀을 사쓰마 번에 공급하는 거래를 성사시켰다. 1866년 료마의 중재로 사쓰마 번과 조슈 번 사이에 삿초 동맹이 체결되었고, 동맹군은 토막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료마는 대정봉환론의 기본을 구상했다. 그는 1866년 막부가 2차 조슈 정벌에 실패해 위신이 떨어지자 막부의 정치 독점을 타파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사쓰마, 조슈 등 세력이 큰 번들이 연합하여 중앙 정국을 구성한다는 공의정체론(公議正體論)을 구상했다. 료마는 초기에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권 이양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막부를 타도해야 한다는 급진파를 설득했다. 그러나 이후 막부 측이 대정봉환에 동의하지 않거나 표면적인 수락에 그칠 경우 무력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다는 데 도달했다. 그는 토막파와 결합하여 공의정 체제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했다.
가메야마 조합.
사쓰마 번의 원조를 받아 나가사키 가메야마에 설립한 무역회사. 현재 가메야마 조합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다.
1867년 료마는 대정봉환 구상을 담은 〈선중팔책(船中八策)〉을 작성했다. 도사 번 번주 야마노우치 도요시게가 〈선중팔책〉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올림으로써 역사적인 대정봉환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초 표면적으로만 권력을 이양하고 새로운 정부에서도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려던 막부 측의 기대와 달리 쇼군 가는 새로운 정권에서 완전히 배제되면서 정국 불안은 계속되었다.
오쿠보 도시미치,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등 토막 세력은 무력으로라도 막부 세력을 토벌하고자 했고, 이에 막부가 저항하면서 얼마 후 막부와 조정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료마와 토막 세력의 차이는 여기에 있다. 토막 세력이 기본적으로 무력에 의한 막부 토벌 노선을 견지한 데 비해, 료마는 이런 상황을 고려하되 웅번 연합(세력이 강한 번들의 연합)에 기대하여 막부 측에 관대한 정책을 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카모토 료마는 대정봉환이 결정된 후 〈신관제안(新官提案)〉, 〈신정부강령〉 등을 작성하던 중 교토의 오미야 여관에서 피살되었다. 그를 암살한 세력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암살자로 지목된 세력은 크게 세 세력이다. 당시 존왕파를 습격하던 신센구미라는 설, 막부의 소행이라는 설 그리고 막부에 대한 태도에서 료마와 대립했던 토막 세력(사쓰마 번)이 고의로 그의 소재를 막부에 누설했다는 설 등이다.
· 1862년 : 도사 번에서 탈번한 후 에도에서 평생의 스승 가쓰 가이슈를 만나다.
· 1865년 : 가메야마 조합을 기반으로 삿초 동맹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다.
· 1867년 : 대정봉환의 구상을 담은 〈선중팔책〉을 작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