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幻來生亦何嘗生? 幻去滅亦何嘗滅?
환영[幻]으로 와서 생生한 것이니 어찌 생한 적이 있으리오.
환영[幻]으로 가서 멸滅한 것이니 어찌 멸한 적이 있으리오.
《宗門統要》云:
「洛京佛光如滿禪師因唐順宗問:『佛從何方來?滅向何方去?既言常住世,佛今在何處?』
『종문통요宗門統要』에서 말하였다.
“낙양의 불광여만佛光如滿 선사에게 당나라의 순종順宗이 물었다.
‘부처님께선 어디로부터 오셨으며, 멸할 때는 어디를 향해 가셨습니까? 항상 세간에 머무신다고 한다면, 부처님께선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師曰:『佛從無為來,滅向無為去,法身等虛空,常在無心處。有念歸無念,有住歸無住,來為眾生來,去為眾生去。清淨真如海,湛然體常住,智者善思惟,更勿生疑慮。』
선사가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어디로부터 오시는 것도 아니고,
멸하여 어디로 가시는 것도 아닙니다.
법신法身은 허공과 동등해서 항상 무심無心의 처소에 있습니다.
유념有念이 무념無念으로 돌아가고,
유주有住가 무주無住로 돌아감이니,
오셔도 중생을 위해 오시고,
가셔도 중생을 위해 가시는 것입니다.
청정한 진여眞如의 바다는 담연해서 체體가 항상 머뭅니다.
지혜로운 자는 잘 생각하셔서 다시는 의심을 일으키지 마십시오.’
帝又問曰:『佛向王宮生,滅向雙林滅,住世四十九,又言無法說。山河及大海、天地及日月,時至皆歸盡,誰知不生滅?疑情猶若斯,智者善分別。』
황제가 다시 물었다.
‘부처님께선 왕궁을 향해 태어나셨고, 멸하실 때는 쌍림雙林을 향해서 멸하셨으니, 세간에 49년 간 머무셨습니다.
또 설할 법이 없다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산하山河와 대해大海, 천지와 일월日月이 때가 이르면 다 귀진歸盡한다고 하니, 도대체 누가 불생멸不生滅을 아는 것입니까? 의문이 이와 같으니, 지혜로운 이께선 잘 분별해 주십시오.’
師曰:『佛體本無為,迷情妄分別,法身等虛空,未曾有生滅。有緣佛出世,無緣佛入滅,處處化眾生,猶如水中月。非常亦非斷,非生亦非滅,生亦未曾生,滅亦未曾滅。了見無心處,自然無法說。』
선사가 말했다.
‘부처님의 체體는 본래 무위無爲인데, 미혹된 마음[迷情]으로 망령되이 분별할 뿐입니다. 법신은 허공과 동등해서 일찍이 생멸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연緣이 있으면 부처님께서 세간에 나오시고, 연緣이 없으면 부처님께선 입멸入滅하십니다. 곳곳에서 중생을 교화하시는데, 마치 물 속의 달과 같습니다. 항상함[常]도 아니고 또한 단멸함[斷]도 아니며, 생함[生]도 아니고 또한 멸함[滅]도 아닙니다. 생하여도 일찍이 생한 적이 없으며, 멸해도 일찍이 멸한 적이 없습니다. 무심처無心處를 요달해 보면, 자연히 설할 법이 없습니다.’
『대장일람집』 상주품常住品
《楞嚴經》云:「不依正覺修三摩地,別修妄念,存想固形。有十種仙:
『능엄경楞嚴經』에서 말하였다.
“정각正覺에 의지해서 삼마지三摩地를 닦지 않고, 따로 망념妄念을 닦아서 상념을 간직하고 형체를 굳건히 하는 열 가지 선仙이 있다.
堅固服餌而不休息,食道圓成,名地行仙;
복식服食의 법문을 닦아 익혀 형체를 견고히 하길 쉬지 않음으로써 식도食道를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을 지행선地行仙이라 한다.
堅固草木而不休息,藥道圓成,名飛行仙;
초목 약물[草木]의 법문을 닦아 익혀 형체를 견고히 하길 쉬지 않음으로써 약도藥道를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을 비행선飛行仙이라 한다.
堅固金石而不休息,化道圓成,名遊行仙;
금석金石을 화련化練하는 법문을 닦아 익혀 형체를 견고히 하길 쉬지 않음으로써 화도化道를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을 유행선遊行仙이라 한다.
堅固動止而不休息,精氣圓成,名空行仙;
토고납신吐故納新, 도인導引, 기맥운행의 법문을 닦아 익혀 형체를 견고히 하길 쉬지 않음으로써 정기精氣를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을 공행선空行仙이라 한다.
堅固津液而不休息,潤德圓成,名天行仙;
진액津液을 토하고 삼키거나 정수를 복용하는 법문을 닦아 익혀 형체를 견고히 하길 쉬지 않음으로써 윤택한 덕을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을 천행선天行仙이라 한다.
堅固精色而不休息,吸粹圓成,名通行仙;
일월의 정기나 천지의 정화[精色]를 취하여 받아들이는 법문을 닦아 익혀 형체를 견고히 하길 쉬지 않음으로써 흡수吸粹를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을 통행선通行仙이라 한다.
堅固禁咒而不休息,術法圓成,名道行仙;
금주禁呪의 법문을 닥아 익혀 형체를 견고히 하길 쉬지 않음으로써 술법術法을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을 도행선道行仙이라 한다.
堅固思念而不休息,思憶圓成,名照行仙;
정신사념[思念]을 하나로 모으는 법문을 닦아 익혀 형체를 견고히 하길 쉬지 않음으로써 사억思憶을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을 조행선照行仙이라 한다.
堅固交遘而不休息,感應圓成,名精行仙;
교구交溝의 법문을 닦아 익혀 형체를 견고히 하길 쉬지 않음으로써 감응感應을 원만하게 성취하는 것을 정행선精行仙이라 한다.
堅固變化而不休息,覺悟圓成,名絕行仙.
천지변화의 물리의 현묘한 법문을 닦아 익혀 형체를 견고히 하길 쉬지 않음으로써 각오覺悟를 원만하게 하는 것을 절행선絶行仙이라 한다.
是等皆於人中鍊心,不修正覺,別得生理,壽千萬歲,妄想流轉,不修三昧,報盡還來,散入諸趣。」(染字函第八卷)
이런 부류들은 모두 사람 중에서 마음을 단련하면서도 정각正覺을 닦지 않고 따로 장생長生의 이치를 얻어서 천 살이나 만 살의 장수를 누리지만, 망령된 상념이 유전流轉하고 삼매를 닦지 않아서 과보가 다하면 다시 와서 온갖 취(趣:6道)에 흩어져 들어간다.”[염자함染字函 제8권]
《本事經》云:「佛告苾芻:『當知三因三緣能感後有。
『본사경本事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필추(苾篘:比丘)들에게 말씀하셨다.
‘반드시 알라. 세 가지 인因과 세 가지 연緣이 능히 후유(後有:後生)에 태어나는 존재에 감응한다. 무엇을 세 가지라고 하는가?
云何為三?所謂無明未斷故、愛未棄故、業未息故,由是因緣能感後有。
이른바 무명無明을 아직 끊지 못했기 때문이며, 애착을 아직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며, 업을 아직 쉬지 못했기 때문이니, 이러한 인연을 말미암아서 능히 후유에 감응한다.
所以者何?業為良田,識為種子,愛為溉灌,無明、無智、無了、無見之所覆蔽,識便安住欲有、色有、無色有處。欲最為下,色為其中,無色為妙。
그 까닭은 무엇인가? 업은 좋은 밭이 되고, 식識은 씨앗이 되고, 애착은 물을 대는 것이 되고, 무지無智ㆍ무명無明ㆍ무료無了ㆍ무견無見의 가림으로 식識이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의 처소에 안주하는 것이니, 욕欲은 가장 아래가 되고, 색色은 그 중간이 되고, 무색無色은 묘함이 된다.
由欲界業感異熟果,正現在前,故可施設,此為欲有。當於爾時,業為良田,識為種子,愛為溉灌,識便安住,下欲有處。若色界、無色界,感異熟果亦復如是。』」(甚字函第六卷)
욕계欲界의 업을 말미암아서 이숙과異熟果를 감응하면 앞에 바로 나타나는 까닭에 시설施設할 수 있는데, 이것이 욕유가 된다. 이 때 업이 좋은 밭이 되고, 식識은 씨앗이 되고, 애착이 물을 대는 것이 되면, 식識은 문득 최하인 욕유의 처소에 안주한다.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가 이숙과를 감응하는 것도 이와 같다.’ ”[심자함甚字函 제7권]
《宗鏡錄》云:「大藥菩薩白佛:『云何識離於身便速受身?識捨故身,新身未受,當爾之時,識作何相?』
『종경록宗鏡錄』에서 말하였다.
“대약大藥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떻게 식識이 몸을 여의고서 다시 조속히 몸을 받습니까? 식이 옛 몸은 버리고 아직 새로운 몸은 받지 않았을 바로 이 때에 식은 어떤 모습을 짓습니까?’
佛言:『如有丈夫著堅甲冑,馬疾如風,乘以入陣,干戈既交,心亂墜馬,武藝勁捷,還即跳上;識棄於身,速即受身,棄一受一,亦復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령 어떤 장부丈夫가 견고한 갑옷을 입고, 바람처럼 빠른 말을 타고서 적진으로 들어가 칼과 창을 부딪치다가 마음이 흐트러져 말에서 떨어졌지만, 무예가 강하고 민첩하기 때문에 즉각 다시 말 위로 뛰어오르는 것과 같으니라. 식識이 몸을 버리고 조속히 다른 몸을 받음으로써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받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니라.
又復譬如人影現於水中,無質可取,手足、面目、及諸形狀與人不異,體質事業影中皆無,無冷、無熱及與諸觸,亦無肉段及與言音;識棄故身,未受新身,相亦如是。』
다시 비유하면 마치 사람의 그림자가 물 속에 나타나더라도 취할 만한 본질은 없지만 손발ㆍ얼굴ㆍ눈 및 모든 형상은 사람과 다르지 않으니라. 체(體:바탕)의 본질과 사事의 업은 그림자 속에 모두 없으며, 차가움도 없고 뜨거움도 없으며, 아울러 온갖 촉觸도 없고 살도 없으며, 말과 소리도 없으니, 식이 옛 몸을 버리고 아직 새로운 몸을 받지 않은 모습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니라.’ ”
又云:「賢護童真問佛:『識捨此身,隨善惡業,遷受餘報,其事云何?』
다시 말하였다.
“현호賢護 동진보살童眞菩薩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식識이 이 몸을 버리면 선악의 업에 따라 옮겨가면서 다른 과보를 받는데, 그 일이 어떠합니까?’
佛答:『譬如風大,出深山谷,入占蔔林,其風便香;經於糞穢,其風便臭。若風香臭俱至,則風香臭並兼,盛者先顯。風大無形,香臭無質,然風持香臭,遷之於遠;此識捨身,持善惡業,遷受餘報亦復如是。』」(策字函第五卷)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비유하면 마치 풍대風大가 깊은 산골짜기에서 나와 점복림占蔔林을 지나면 그 바람에 문득 향기가 있고, 똥과 오물을 지나면 그 바람에 문득 냄새가 나는 것과 같다. 만약 바람의 향기와 냄새가 함께 이른다면 바람의 향기와 냄새가 뒤섞인 가운데 더 강한 것이 먼저 드러난다. 풍대는 형태가 없고 향기와 냄새는 형질이 없지만, 바람은 향기와 냄새를 지니고서 이를 멀리까지 옮겨간다.
이 식識이 몸을 버린 뒤 선악의 업을 갖고 변천하다가 다른 과보를 받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책자함策字函 제5권]
《寶積經》云:「彼識欲移,猶如睡人夢見諸事,然此識不從咽喉及諸孔出;其識亦復如是,不求諸孔。
『보적경寶積經』에서 말하였다.
“‘저 식識이 옮겨가고자 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잠자면서 여러 가지 일을 꿈꾸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식은 인후咽喉 및 모든 구멍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며, 그 식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온갖 구멍을 구하지 않는다.’
復問:『諸卵不破,其識云何移徙?』
다시 여쭈었다.
‘모든 알[卵]이 깨지지 않았는데 그 식識이 어떻게 옮겨간단 말입니까?’
佛言:『譬如以瞻婆花薰麻善熟然後壓油,而言此是瞻婆花油,然彼花香不從麻邊求孔而入,因彼花、麻二和合,故其香移徙;此識移卵亦復如是。』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마치 첨파화瞻婆花와 훈마薰麻가 잘 익은 뒤엔 기름을 짜는데, 이를 첨파화 기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꽃의 향내는 마麻 주변으로부터 구멍을 찾아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꽃과 마麻, 두 가지의 화합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그 향내가 좇아서 옮겨가는 것이다. 이 식이 옮겨가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復問:『此識移徙善、不善業,其事云何?』 다시 여쭈었다.
‘이 식이 옮겨갈 때, 선한 업과 선하지 않은 업은 그 일이 어떠합니까?’
佛言:『猶如種子,擲置地內,生芽、莖、葉、乃至花、果,或色赤白、或性剛柔,皆業力成熟故。』」(丈字函第九卷)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치 씨앗과 같다. 땅 속에 뿌려 두면, 싹ㆍ줄기ㆍ잎이 생기고 나아가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데, 그 색깔이 빨간 것도 있고 하얀 것도 있으며, 그 성품이 굳건한 것도 부드러운 것도 있으니, 모두 업력業力의 성숙 때문이다.’ ”[장자함丈字函 제9권]
宗鏡》云:「心能作佛、心作眾生、心作天堂、心作地獄,心異則千差競起、心平則法界坦然,心凡則三毒縈纏、心聖則六通自在,心空則一道清淨、心有則萬境縱橫。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마음은 부처도 지을 수 있고, 마음은 중생도 지을 수 있으며, 마음은 천당天堂도 짓고, 마음은 지옥도 짓는다. 마음이 다르면 천 가지 차별이 다투어 일어나고, 마음이 평등하면 법계法界가 평탄해진다. 마음이 범속하면 3독毒에 얽매이고, 마음이 성스러우면 6신통六通이 자재롭다. 마음이 공空하면 한 길[一道]이 청정하고, 마음이 유有이면 만 가지 경계가 종횡한다.
善因終值善緣,惡行難逃惡境。
착한 인因은 끝내 착한 연緣을 만나고, 악한 행동은 악한 경계에서 빠져나가기 힘들다.
蹈雲霞而飲甘露,非他所授;臥煙焰而噉膿血,皆自能為。
非天之所生、非地之所出,只在最初一念。」(策字函第五卷)
구름과 안개를 밟고서 감로수를 마시는 것은 남이 주는 것이 아니고, 연기 자욱한 화염 속에 누워서 고름과 피를 먹는 것도 다 스스로 초래한 것이지 하늘이 낳은 바도 아니고 땅이 낸 것도 아니다. 단지 최초의 일념一念이 존재할 뿐이다.”[책자함策字函 제5권]
《宗鏡》舉《金剛經》云:「過去心不可得、未來心不可得、現在心不可得。以因現在立過去、因過去立未來;現在既不住,過去亦無生,互檢互無,徹底空寂,但有微毫起處皆從識生。
『종경록』에서 『금강경』을 인용해서 말하였다.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현재를 인因해서 과거를 세우고 과거를 인해서 미래를 세우니, 현재가 이미 머물지 않아서 과거도 또한 생김이 없다. 서로 검토해 보아도 서로 없으니, 철저히 공적空寂하다. 다만 미세한 터럭이라도 일어나는 곳이 있다면 모두 식識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今推既無,分別自滅;分別既滅,境界無依。如依水生波、依鏡現像,無水則波不起、無鏡則像不生,故知非關法有、法無,但是識生、識滅。
이미 없음을 이제 미루어 보니, 분별이 저절로 멸한다. 분별이 이미 멸하니 경계가 의지할 바가 없다. 마치 물에 의지해서 파도가 일어나고 거울에 의지해서 상像이 나타나다가, 물이 없으면 파도가 일어나지 않고 거울이 없으면 상像이 생기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법이 있고 법이 없는 것에 상관없이 단지 식識이 생하고 식이 멸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如《金剛三昧經》偈云:
「法從分別生,還從分別滅,滅是諸分別,是法非生滅。如是洞達根境,豁然自覺既明,又能利他普照。」
예컨대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의 게송에서 ‘법은 분별로부터 생기고 분별을 따라서 소멸한다’고 한 것과 같다. 멸하는 것은 모든 분별이며 법은 생기거나 소멸하지 않으니, 이렇게 통달通達하면 감관[根]과 경계가 활연해진다. 자기의 각[自覺]이 이미 밝아지고 나서는, 또한 능히 남을 이롭게 하면서 널리 비출 수 있다.
「故經偈云:
「究竟離虛妄,無染如虛空,清淨妙法身,湛然應一切。」
그러므로 경經의 게송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궁극적으로 허망함을 여의면
번뇌[染]가 없음이 마치 허공과 같고
청정하고 미묘한 법신法身이
고요히 일체에 감응한다.”[경자함輕字函 제6권]
《宗鏡》:
「問:『無心者,為當離心是無心?即心得無心?』
『종경록』에서 말하였다.
“【문】 무심無心이라는 것은 마땅히 마음을 여의는 것이 무심인가, 마음에 즉卽해서 무심을 얻는 것인가?
荅:『即心得無心。』
【답】 마음에 즉해서 무심을 얻는 것이다.
問:『即心是有心,云何得無心?』
【문】 마음에 즉함은 유심인데, 어째서 무심을 얻는다고 하는가?
荅:『不壞心相而無分別。』
【답】 마음의 모습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분별이 없는 것이다.
問:『豈不辯知也?』
【문】 그것이 어찌 변별의 앎이 아니겠는가?
荅:『即辯知無能所,是無心也,豈渾無用始是無心?譬如明鏡照物,豈有心耶?當知一切眾生恒自無心,心體本來常寂,寂而常用、用而常寂,隨境鑒辯,皆是實性自爾,非是有心方始用也。
【답】 변별의 앎에 즉해서 능소能所가 없는 것이 무심이다.
어찌 아주 작용이 없어야 비로소 무심이겠는가? 비유하면 마치 밝은 거울이 사물을 비추는 것이 어찌 유심이겠는가? 모든 중생은 항상 스스로 무심이어서 마음의 체體가 본래 항상 적적寂寂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적적하면서도 항상 작용하고 작용하면서도 항상 적적하니, 경계를 따라 비추어 변별하는 것은 모두 참된 성품[實性]이 스스로 그러한 것이지, 유심이 비로소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只謂眾生不了自心常寂,妄計有心,心便成境。以即心無心故,心恒是理;即理無理故,理恒是心。理恒是心故,不動心相;心恒是理故,不得心相。不得心相故,即是眾生不生;不動心相故,即是佛亦不生。以生、佛俱不生故,即凡聖常自平等。法界性也,純一道清淨,更無異法。
다만 중생은 자신의 마음이 항상 적적함을 요달하지 못하고 망령되게 유심을 계교해서 마음이 문득 경계를 이룬다.
그리하여 마음에 즉해서 무심이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이치[理]이고, 이치에 즉해서 이치가 없기 때문에 이치가 항상 마음이고, 이치가 항상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의 모습을 움직이지 않고, 마음이 항상 이치이기 때문에 마음의 모습을 얻지 못하고, 마음의 모습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곧 중생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모습을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곧 부처도 생기지 않는다.
중생과 부처가 모두 생기지 않기 때문에 곧 범부와 성인이 항상 스스로 평등한 법계法界의 성품이다.
순수하고 한결같은 도道가 청정할 뿐 다시 다른 법은 없다.
當知:但有心分別作解之處俱是虛妄,猶如夢中,若未全覺,所見纖毫亦猶是夢中事。但得無心即同覺,後絕諸境界,但有一微塵可作修證,不思議解處俱不離三界夢中所見。』經云:『無有少法可得,佛即授記。』」(駕字函第五卷)
반드시 알라. 다만 유심으로 분별하여 해석을 짓는 곳은 모두 허망하여서 마치 꿈속과 같다. 만약 완전히 깨닫지 못한다면 솜털만큼의 보는 바도 또한 꿈속의 일과 같다. 다만 무심을 얻으면 곧 깨달음과 동일하여 그 후에는 모든 경계가 끊어진다. 하지만 한 티끌이라도 있어 수증修證을 지을 수 있다면, 불가사의한 이해의 처소는 모두 삼계의 꿈속에서 본 바를 여의지 못한다.
경에서는 ‘조그만 법이라도 얻을 수 없다면 부처님께서 곧 수기授記한다’고 하였다.”[가자함駕字函 제5권]
『대장일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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