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육천(第六天)의 마왕(魔王)은
불멸후(佛滅後)에
비구(比丘)·비구니(比丘尼)·우바새(優婆塞)·우바이(優婆夷)·
아라한(阿羅漢)·벽지불(壁支佛)의 모습을 나타내어
사십여년(四十餘年)의 경(經)을 설(說)하리라고 쓰여 있다.
통력(通力)으로써는
지자(智者)와 우자(愚者)를 알지 못하느니라.
오직 부처의
유언(遺言)과 같이
오로지
권경(權經)을 홍통(弘通)하고
실경(實經)을 끝내
홍통(弘通)하지 않는
인사(人師)와 권경(權經)에
숙습(宿習)이 있어서
실경(實經)에
들어가지 않는 자(者)는
혹(或)은
마(魔)에 속아서
통력(通力)을 나타냄이로다.
다만
법문(法門)을 가지고
사정(邪正)을 밝혀야 하느니라,
이근(利根)과
통력(通力)에는 의하지 말지어다.
창법화제목초(唱法華題目抄)
어서 16쪽
젊은날의 일기
1950년 8월 10일 (목) 비 –22세-
고투의 한 달이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생애, 오늘과 같이 괴로운 적도 드물 것이다.
병. 직업 실패. 경제 파탄. 신용 저하.
선생님,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 결연히 일어나 싸운다. 그러나 도움은 안 되고 전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불만을 토하는 직원들의 모습에 분하기만 하다.
만난(萬難: 온갖 어려움)이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마라
지용의 보살이기에
그대여 부처의 앞에서 맹세하는
젊은이의 사명은 막중하고 분기할 뿐
불 테면 불어라
몰아치려면 몰아쳐라
거센 파도여
네 힘과
나 겨루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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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8월 10 (화) ~ 20일 (금) –26세-
10일=하네다발 오후 2시20분 ~ 치토세 5시20분 도착.
20일=치토세발 오후 7시45분 ~ 하네다 5시20분 도착.
10일간, 홋카이도에서 삿포로를 중심으로 활약.
우리의 거점, 마루신(丸新)여관도 기필코 추억의 역사로 남을 것이다.
웅대한 광야. 포플러 가로수. 꽃 피는 대로변 공원. 평화로운 집. 평화로운 사람들. 평화로운 거리. 동경(憧憬)하는 홋카이도의 향기가 감수성 풍부한 청년에게 깊이 스며들어온다.
특히 선생님의 고향인 아쓰다를 여행한 것은 인상 깊었다.
이시카리(石狩) 강의 격류. 일직선으로 난 산길을 질주하는 상쾌함. 선생님도 기쁘신 모양이었다.
3일간, 선생님의 생가 근처에 있는 친척집에서 지냈다. 스승을 모실 수 있는 것은 최대 · 최고의 긍지다.
아쓰타 항구의 갑(岬)에서, 동양을 향해 홀로 외치며 여러 가지를 확신했다.
밤에 먹은, 맛있는 이시카리찌개도 잊을 수 없다.
이 역사, 언젠가 써서 남기리.
내 두뇌에, 깊이 새겨지는 사명임을 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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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8월 10일 (일) 맑음 –30세-
8일 ― 특급 ‘쓰바메’를 타고 교토로. 삼등열차를 탔는데 역시 좋지 않았다.
간부들과 여러 가지 의논.
끝나고 아라시야마로.
선명한 자연의 경치. 일본 사람에게는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시정(詩情)넘치는 교토.
9일도 더웠다. 일찍부터 잠이 깼다.
교토에 머물고 있다.
오후 7시10분발 ‘운젠’을 타고 규슈로 향했다.
K여사 등과 함께. 열차 안에서 ― 교학 등을 함께 연구했다.
아침 10시 ― 8시 조금 넘어 하카타 역 도착. 덥다.
규슈 본부 낙성 입불식에 참석하기 위해.
방루(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쌓은 성이나 진지)가 있던 명소. 소나무에 붙어 불어오던 강풍을 그리워하고, 돌로 쌓은 성루에서 그 옛날 수비병들의 분투를 상상했다.
탄광의 폐석 더미를 보며 눈앞에 놓인 현실 사회의 가난을 생각하고, 현해탄의 조개잡이를 보며 하네다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추억했다.
어수선한 회합이었다. 스승이 없는 지금, 학회에 확실한 지도자가 계시지 않기 때문인가.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