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화보다 더 어려웠던 농업 개발)
박 대통령은 18년여의 집권 기간 중 '수출 주도의 공업화 정책'과 '농민이 잘 사는 정책'을 경제정책의 2대 지주로 삼고 경제면에서의 '민족 중흥과 조국 근대화'를 꾸준히 추진해 나갔으며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농민이 더 잘 살 수 있는가를 사색, 구상하고 실천해 나갔다.
농업 개발은 공업화에 못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 과정은 공업화보다 더 어렵고 힘이 들었다. 토양 개량, 경지 정리, 다목적 댐 건설을 비롯한 수리 시설의 확충, 영농의 기계화, 다수확 미곡 종자의 개발, 온상 개발. 보급, 농산물 가격지지정책, 특히 이중 곡가제, 단지별 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결과 우리의 주곡인 쌀 생산량이 1977년에는 4,170만 6천 섬으로 4천만 섬을 돌파하여 8.15 해방 이후 수없이 겪었던 미곡 부족과 쌀 파동을 마침내 근본적으로 극복하고 쌀이 연간 수백만 섬씩 남아돌게 되었다.
한편 1974년부터는 농가 소득도 도시 노동자 소득을 상회하기 시작했다. 농림부의 김영준, 조시형, 김보현 등 세 장관의 공이 컸고 청와대비서실에서는 고병우, 윤근환 비서관의 노고가 컸다(김정렴회고록 "한국경제정책 30년사", 중앙일보사).
농촌 부흥의 결정적 요인은 보다 근본적으로는 박 대통령이 스스로 창시하여 농민들에게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을 각성시킨 새마을운동이었다.
흔히 농민들이 가난한 까닭을 게으르고 저축심이 낮으며 협동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 농업은 벼농사를 주로 하여 왔으며 좁은 농토 면적을 경작하여 가족을 부양하려면 부지런하고 근검 절약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을 주민들과 협동하여 살아야만 했다. 다만 농촌 생활에 어려움이 겹치고 사회생활에서 많은 시달림을 받는 동안 농민들이 지니고 있던 본원적인 생활 윤리가 잠재해 버림으로써 나태하고 소비성이 심하고 협동심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빈곤을 자기의 운명이라 한탄하면서 정부가 뒤를 밀어주지 않아 빈곤 속에 있다고 자기의 빈곤이 타인의 책임인 것처럼 불평을 늘어놓는 농민은 몇백 년의 세월이 걸려도 일어설 수 없다. 의욕 없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은 돈 낭비이다. 게으른 사람은 나라도 도울 수 없다"고 나태한 농민을 꾸짖으면서 근면, 자조, 협동 정신을 일깨우는 새마을 운동을 일으켰다.
1970년 새마을 가꾸기를 위하여 부락 당 300 ~ 350 포대의 시멘트를 무상으로 배급하되 배분받은 시멘트는 개별적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마을의 공동사업을 일으키는 데 써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그리고 마을 진입로 확장, 작은 교량 건설, 농가 지붕 개량, 우물시설 개선, 공동 목욕탕 건립, 작은 하천의 둑 개조, 공동 빨래터 만들기 등 지방 행정을 통해서 새마을사업을 예시해 주고 마을의 합의에 의해 협동해서 실시하도록 하였다.
('새마을 지도자들의 당원 가입은 절대 안 될 말')
주민들이 엄청난 노동력을 제공하여 놀랄 만한 공동사업을 이룩한 부락이 많았으며 제2차년도부터는 열심히 노력해서 성과를 올리는 부락만을 지원하고 성적이 나쁜 부락은 전혀 지원하지 않는다는 신상필벌의 원칙을 세워 이를 고수해 나갔다.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의 정치적 이용을 엄금시켰고 운동의 중점을 농민의 소득 증대에 두었다. 1970년대 초반 새마을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날 때 여당에서 새마을지도자에게 당원 가입을 권유하는 안이 검토 성안 된 바 있었다.
공화당 사무총장으로부터 이 안을 보고 받을 때 박 대통령은 일찍이 나타낸 바 없는 불쾌한 표정으로 "누구를 막론하고 새마을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새마을운동이야말로 농민들에게 근면 . 자조 . 협동의 정신을 일깨워 농민이 잘 살고 마을을 잘 살게 하며 나라가 잘 되게 하는 순수한 국민 운동으로 승화, 지속되어야 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새마을 지도자를 새로운 당원으로 가입시켜서는 안 된다."고 엄명하였으며, 청와대비서실이 항상 체크해서 보고하라는 분부가 있었다.
새마을운동에서 정치성을 철저히 배제하라는 박 대통령이 지시는 그후 철저하게 지켜졌다. 이보다 좀 앞서 청와대비서관 중 한 사람이 마련한 청소년 문제에 대한 건의서 중 농촌지역에 있어서는 4H클럽 운동을 지원하고 이들 회원을 여당 청년당원으로 가입시키는 안을 제출한 바 있었다.
이때도 박 대통령은 "4H클럽 운동의 건전한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지원은 계속하되 절대로 4H클럽 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엄히 지시했었다.
새마을운동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고, 농민을 잘 살게 하기 위한 운동이라는 것을 농민 스스로가 자각하고 믿게 되자 새마을운동은 전국에 걸쳐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돼 나갔다. 각 새마을 부락은 부락민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남녀 새마을 지도자 각 1명을 선출했다. 이들은 연수와 모범 부락 견학을 통해서 얻은 지식을 가지고 자기 부락을 지도해 나갔다.
새마을운동 초기부터 공동 작업과 공동 영농이 전국적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 공동 작업은 농사의 생산성, 병충해 방제, 새로운 영농기술의 확산 등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 결과 1970년대 중반부터 농민 소득은 도시근로자의 소득을 초과하게 되었고 쌀의 자급자족이 이루어졌다.
( 예금통장을 갖게 된 농민들 )
새마을운동 추진 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부락 진입로, 농로 및 부락 내 도로의 확장에 소요되는 토지의 보상 문제였다. 정부는 토지 보상은 일체 지원하지 않고 부락민 스스로가 해결하는 원칙을 고수하였다. 개인의 이해관계가 큰 토지보상 문제로 진통을 겪기도 하였으나 부락 전체의 협동정신과 공동 부담으로 모든 부락이 자체적으로 해결하였다.
각 부락에는 새마을부녀회가 조직되었고 부녀회는 절미, 저축 운동을 시작했다. 밥을 지을 때마다 쌀 한 숟가락을 절미통에 넣고 일정량이 되면 그 쌀을 공동으로 판매해서 그 대금을 농업협동조합에 예금하고 통장을 받았다.
그때까지 농촌에는 예금통장을 가져본 농가가 거의 없었다. 통장을 갖게 된 것도 기쁨이었으나 처음으로 이자를 받아본 주부들은 근검절약하여 저축에 더욱 힘쓰게 되었다. 새마을운동 초기의 농협 대출 재원의 대종은 정부 대하금이나 타금융 기관으로부터의 차입금이었다. 새마을운동 후 농민들의 저축 의식이 고조되었으며 197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농민들의 저축이 농협 대출 재원의 대종을 이루게 되었다.
새마을운동은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것이 새마을지도자를 중심으로 하여 마을 주민 모두의 자유 토론과 완전 합의를 거쳐 협동으로 추진되었다. 실로 농민들은 민주적 의사 결정이 어떠한 것인지, 또한 마을의 자치가 어떠한 것인지를 책을 읽거나 남의 말을 듣고서가 아니라 새마을사업을 위한 주민 회합을 거듭하는 동안 스스로가 체득하였다. 무엇보다도 새마을 운동으로 주부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 인식하였다.
박 대통령은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농민과 농촌의 주부들이 민주주의와 마을 자치를 하나하나 실천하며 권리를 신장해 나가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또한 이러한 성과들이 축적되어 모든 마을의 마을회관에는 그 마을의 여러 기본 통계와 더불어 주민들의 민주 역량과 자치능력 그리고 주부들의 노력의 결정인 각종 새마을사업과 부녀회 활동의 성과에 관한 상세한 기록이 자랑스럽게 보존되어 있었다. 또한 마을회관의 벽에는 그 마을의 꿈을 담은 장래의 개발 계획이 걸려 있는 경우도 많았다.
새마을운동은 농촌에서 공장, 학교, 그리고 도시로 확산되어 일대 국민 정신 함양 운동으로 승화되어 나갔다. 박 대통령의 진두 지휘 아래 새마을 운동에 앞장서서 애쓴 사람들은 관계 부처, 각 도 등에 걸쳐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중에서도 특히 박진환 대통령 특별보좌관과 김준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원장의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김 원장은 과로로 인해 한때 몸이 몹시 쇠약해지기도 하였다. 박 대통령은 김 원장이 쓰러지면 새마을운동에 큰 차질이 온다면서 남몰래 한방 보약을 보내준 일도 있었다. 청와대비서실에는 처음부터 새마을운동 상황실이 설치되어 새마을운동이 제자리를 잡을 때까지 계속 불을 붙이며 지원을 계속하고 애로를 타개하며 올바로 계도하느라 많은 애를 썼다.
노새 ~노새 ♬~~ 젊어서 노새 ~~♪'' 늙어지면 못노나니 ~~~
얼씨구~ 절씨구 ~~♬촤차차 !! 지화자 조쿠나 챠챠챠 ~~~♩
박정희 대통령은 이 노래를 겨울내내 부르며 놀고만 있는 농민들에게 금지곡령을 내렸다 당연한 일이다
한번은 신년사에서 강하게 국민들을 일께우는 경고같은 발언으로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
이 가난을 계속 자녀들에게 물려주어 굶어죽고 병으로 죽게 만들 작정 입니까 !! 부탁 드립니다 겨울에도
일할수 있는 여건을 드릴테니 4계절 모두 협동 단결하여 어떤 피땀을 흘리 더라도 열심히 일을 해 나아갑시다
나를 믿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합쳐 삽과 곡갱이 낫을들고 우리 함께 열심히 일을 해 나가야만 후대에
는 우리 자녀들이 쌀밥을 배불리 먹을수있는 시대를 열리게 할수 있습니다 ~
우리 스스로 믿고 이룰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십시요 !!
언제까지 보릿고개때마다 굶어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봐야 겠습니까
제가 시키는데로만 하시면 분명히 우리도 잘살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이니 4계절 일 할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드릴테니 한분도 빠짐없이 다 나와서 새마을 운동에 참여 하십시요 !! "
대통령 박정희 그분은 우리에겐 없어서는 안되었을 유일무일한 위인으로 세계사에 기록된 영웅 이십니다
그 분 덕에 우린 선진국이되어 오늘도 먹고도 남는 음식만 하여도 버릴때가 없을만큼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
사상과 이념을 떠나 그 분을 향해 비웃는자는 분명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한 분에게 현 좌빨 정부는 박정희대통령과 육영수여사의 묘터에까지 쇠말뚝을 박아 놓은 인간들이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박근혜님은 웬종일 굶으며 바닥을 헤매며 통곡만 하셨던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게 습성이 되 있습니다
미국 조차에도 반미주의자들이 설쳐대며 미군철수를 외치며 원수 취급하고 있습니다
감사의 예를 갖추지 못할망정 원수로 대하는 것은 김일성3대 짐승집단들이 하는 짓입니다
따라하지 마세요 --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킬초이 말을 잘 새겨 들어셰요~~
첫댓글 히틀러도 독일을 살렸는데
공과 과를 분명히 살펴서 무조건 매도하지 말아야할것입니다. 전교 200명 중 190등인 학생을 30등 만들었으면 탁월한 담임인거지요. 미국을 상대로 여야합작으로 짜고치는 고스톱으로 엄청난 이익을 2번이나 얻어낸 유일한 대통령입니다. 일본이 F104 탈때 우린 핵투발기능을 탑재한 F4팬텀D 받았습니다. 지금 F22급인겁니다.
맞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공과 과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입니다.
사람치고 공만 있고 과는 없는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공만 있고 과는 없는 존재는 하나님 외에는 없으며
공만 있고 과는 없다고 스스로 믿는 자가 사탄이며 교주이며 적그리스도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