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보에 관한 실천인식
이평래 / 충남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① 왜 삼보에 귀의하는가 ▲ 위로
깨달음 얻어 행복 공유…평화세계 건설 가능
삼보(tri-ratna, 三寶)란 붓다(buddha-ratna, 佛寶)와 다르마(dharma-ratna, 法寶) 그리고 쌍가(San.gha-ratna, 僧寶), 이 세 가지를 말한다. 삼보는 붓다의 아들.딸(buddha-putra, 佛子)의 귀의처이다. 왜 삼보에 귀의하는가. 삼보 속에는 생명관.철학관.종교관.세계관.인생관.가치관, 말하자면 모든 진리가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삼보에 귀의함으로써 깨달음을 얻어 행복을 공유하면서 평화의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 삼보에 귀의해야만 붓다의 아들.딸(buddha-putra, 佛子=佛敎徒)이 될 수 있다. 삼보에 귀의하는 것이야말로 붓다의 아들.딸이 되는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불교의식이나 불교행사를 봉행할 때 먼저 삼보에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붓당 싸라낭 갓차미 Buddham. saran.am. gaccha-mi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하나이다.
담망 싸라낭 갓차미 Dhammam. saran.am. gaccha-mi
거룩하신 가르침에 귀의하나이다.
쌍강 싸라낭 갓차미 San.gham. saran.am. gaccha-mi
거룩하신 스님들께 귀의하나이다.
삼보의 내용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로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소를 충족하였을 때, 비로소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세 가지 요건이란 교조와 교리 그리고 교도를 가리킨다. 젊은 나이에 출가한 고따마 씻다르타는 6년 동안 어렵고 힘든 수행을 한 끝에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였다. 이와 같은 ‘위대한 진리의 발견’을 우리는 깨달음 또는 해탈이라고 한다. 그럼 무엇을 발견하였을까. 다르마를 직관으로 발견한 것이다.
고따마 씻다르타 보디싸ㅅ뜨와, 깨달음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제까지 부르던 이름은 세속의 것으로 돌리고, 출세간의 이름을 얻는다, 샤끼야무니 붓다(S´a-kyamuni-Buddha, 釋迦牟尼佛)! 샤끼야무니 붓다는 불교의 교조이고, 님께서 발견한 위대한 진리인 다르마는 불교의 교리이다.
샤끼야무니 붓다의 위대한 발견이란, 우주 안에서 벌어지는 존재의 실상에 관한 이치를 가리킨다. 저마다의 존재는 저 홀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남에게 서로 기대고 의지해야 하는 사실의 발견, 현대과학으로 이어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의 이론의 길을 터준 셈이다.
정신적 원리인가 그렇지 않으면 물질적 원리인가, 오랜 세월 여러 패로 갈리어 서로 헐뜯고 치열하게 다투던 인디아의 지성사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고 본다. 이렇게 이치에 딱 들어맞고 앞뒤로 이어지는 논리가 명징(明澄)하므로, 그 신선한 부르짖음은 당시의 진부한 논쟁으로 염증을 앓던 지성들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꿀이 있으면 벌이 모여들고, 플랑크톤이 많으면 물고기가 떼를 지어 오듯이 샤끼야무니 붓다에게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렇게 해서 모여든 이들, 그들은 샤끼야무니 붓다가 발견한 위대한 진리인 다르마를 수지.해설.봉행하는 수행자이며 실천자가 된 것이다.
첫 번째 모인 붓다의 아들.딸(buddha-putra, 佛子)이 안냐따 까운디니야(An~n~a-ta-Kaun.d.inya, 阿若陳如).아슈와지뜨(As´vajit, 阿濕波誓).바드리까(Bhadrika, 跋提梨迦).마하나마(Maha-na-ma, 摩訶那摩).다샤발라까쉬야빠(Das´abalaka-s´yapa, 十力迦葉), 이렇게 다섯 사람이며, 이들을 불교사에서 5빅슈(Pan~ca-bhiks.u, 五比丘)라고 한다. 이들은 샤끼야무니 붓다를 공경.공양.존중.찬탄.예배하는 참된 붓다의 아들.딸(buddha-putra, 佛子)이며, 그들이 바로 불교도(佛敎徒)이고, 출가하여 수행에만 전념하는 집합체인 쌍가인 것이다.
② 불교가 있는 곳에는 삼보가 있다 ▲ 위로
불교에서의 붓다(Buddha)와 다르마(Dharma) 그리고 쌍가(Saṃgha)의 삼보(tri-ratna)는 종교의 세 가지 요소인 교조와 교리 그리고 교도와 궤도를 같이 한다는 것을 인식하였을 것이다. 불교가 있는 곳에는 삼보가 있고 삼보가 있는 곳에는 불교가 있다. 삼보에 귀의하는 것은 불교도가 되는 첫 번째 관문이며, 죽을 때가지 이 문안에서 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마지막 문이기도 하다.
인디아의 성지를 순례해본 붓다의 아들.딸이라면 이와 같은 종교체험을 충분히 겪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샤끼야무니 붓다의 출현, 한 인간의 힘이 이렇게 위대하고 찬란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쓸쓸하고 안타까운 감정의 늪에 빠진 불자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하나의 문화재로, 또는 관광자원으로서의 역할밖에 못하고 있는 현실, 거룩하신 붓다를 공경.공양.찬탄.예배하면서 다르마를 실천할 쌍가가 서 있어야 자리가 텅 비어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어느 곳의 불교이든, 대승.소승이든 가릴 것 없이 삼보를 수호하고 잘 보존하는 것은 전적으로 붓다의 아들.딸(buddha-putra, 佛子)의 몫이라는 인식이 절실하다.
불교학적으로는 삼보의 정의도 다양하다. 첫째, 현전삼보(現前三寶)이다. 샤끼야무니 붓다(Śākyamuni-Buddha, 釋迦牟尼佛) 스스로가 불보(buddha-ratna, 佛寶), 님께서 말씀하신 가르침이 법보(dharma-ratna, 法寶), 샤끼야무니 붓다의 아들.딸(buddha-putra, 佛子)로써 출가하여 수행에만 전념하는 빅슈(bhikṣu).빅슈니(bhikṣuṇī)의 집합체가 쌍가(Saṅgha-ratna, 僧寶)라는 이론이다.
둘째, 주지삼보(住持三寶)이다. 샤끼야무니 붓다(Śākyamuni-Buddha, 釋迦牟尼佛)는 꾸쉬나가라(Kuśinagara)의 와상(臥床)의 모양으로 서 있는 샬라나무(śāla, 沙羅雙樹, 鶴林) 아래에서 마하빠리니르와나(Maha-parinirvāṇa, 大般涅槃)에 드시었다. 그 뒤에 실제로는 붓다가 계시지 않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대처했을까. 인간은 사유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합리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 시대마다 그 시대의 상황에 맞는 불보를 섬긴 것이다. 이와 같은 정신에 입각하여 그 시대의 불교에서 삼보로 섬긴 것은 무엇이든 다 삼보라는 이론이다.
예를 들면, 샤끼야무니 붓다가 강탄하신 곳인 룸비니(Lumbinī).깨달음을 성취하신 곳인 붓다가야(Buddhagayā).최초로 설법을 하신 곳인 와라나씨(Vārāṇasī).마하빠리니르와나에 드신 곳인 꾸쉬나가라(Kuśinagara)를 불교의 4대 성지로 삼고 불보로 섬기는 것이다. 불교의 성지를 자연스럽게 불보로 인식하고, 불교도가 모여들어 예배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상이 출현하기 이전에는 붓다의 발자국이라든가, 보디나무라든가, 법륜라든가, 불탑이라든가를 불보로 섬기고 예배를 드린 것이다. 그리고 후대에는 그리스의 조각예술을 수용하여 금속이나 돌 또는 나무에 붓다의 형상을 새긴 불상을 모시거나 종이와 천에 불상을 그려서 불보로 모시고 예배를 드린 것이다. 오늘날처럼 IT산업이 발달한 시대에는 인터넷 법당에 모신 불상도 훌륭한 불보라고 볼 수 있다.
법보로는, 나뭇잎이나 나무껍질, 직물, 종이에 쓴 경전, 후세에는 인쇄된 서책 등의 불교경전을 법보로 섬긴 것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아주 훌륭한 법보로 섬기는 것은 그와 같은 이유다. 전자대장경까지 출현한 오늘날은 법보의 개념을 외연을 넓혀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셋째, 일체삼보(一體三寶)이다. 붓다.다르마.쌍가의 삼보를 철학적인 이론의 관점에서 하나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를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일체(一體)라고 인식하는 관점이다.
③ 佛法은 승가 통해 민중에 전달 ▲ 위로
삼보에 관한 마지막 글이므로 이제는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 붓다(Buddha)와 다르마(Dharma) 그리고 쌍가(Sam.gha)를 삼보(tri-ratna)라고 정의하고, 각각에 부여된 개념을 풀이하였다. 삼보는 각자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가지면서도, 서로 떼어 놓으려고 해도 떼어 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면 붓다는 직관으로 다르마를 발견하고, 지혜로 다르마를 깨달으며, 그리고 종교적으로 다르마를 체득함으로서 붓다가 되었다고 선언하였기 때문에, 다르마를 떼어 놓고서는 붓다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붓다는 다르마를 본질로 하고 본성으로 있기 때문에, 법성(dharmata-, 法性)이야말로 붓다의 본체인 것이다.
또한 다르마는 붓다의 직관에 의해서 발견되고, 붓다의 선언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붓다의 가르침(敎法)이 되기 때문에, 붓다를 의지하지 않고서는 다르마가 존립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꼭 알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쌍가는 붓다를 대신하며, 수행력과 실천성을 근거로 하여 붓다의 대리자가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다르마를 중생에게 전수하는 역할을 띠고 있는 것이다. 쌍가는 붓다와 다르마를 떼어 놓고서는 그 존재성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논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통용되는 공통분모이기 때문에 붓다와 다르마는 쌍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불교의 문화적 가치와 종교적 의의가 드러나게 되며, 쌍가의 힘을 빌려서 비로소 붓다와 다르마의 존재 이유라든가 종교적 기능이 나타나기 때문에, 붓다(Buddha)와 다르마(Dharma) 그리고 쌍가(Sam.gha)의 삼보(tri-ratna)는 떼어 놓으려고 해도 떼어 놓을 수 없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마치 근.경.식(根境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에 따른 의식의 형성과정이나, 시자(施者).수자(受者).시물(施物)의 삼륜청청(三輪淸淨)에 입각한 보시의 성립과정, 또는 ‘갈대단의 비유’를 예로 들어 연기법의 공리를 해석하는 논리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붓다에 관한 학설.다르마에 관한 이론.쌍가에 관한 구성요소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여러 가지 주장이 새로이 전개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것은, 부파불교.대승불교.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사이에서의 해석학적 입장, 시대적인 상황에 따른 민중의 요구, 그리고 다른 종교와의 논쟁을 겪으면서 이론과 논리를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시대와 장소에 맞는 이론과 논리를 담은 새로운 언어로 태어난 것이다.
붓다도 룸비니 동산에서 강탄하고 꾸쉬나가라에서 마하빠리니르와나에 드신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샤끼야무니 붓다만이 아니라, 과거.현재.미래의 시세(時世)에 따른 붓다라든가, 법신.보신.응신의 불신설(佛身說)에 따른 불타관이 전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남방의 상좌부에서는 샤끼야무니 붓다만을 예배하지만, 대승불교의 법화경에서는 그리드라꾸따(Gr.dhraku-t.a, 靈鷲山)에서 법화경을 말씀하신 법신으로서의 샤끼야무니 붓다를 예배하고 있다. 정토교에서는 아미따바/아미따유쓰(Amita-bha/Amita-yus, 無量光/無量壽)붓다를, 밀교에서는 마하와이로짜나(Maha-vairocana, 大毘盧遮那) 붓다를 예배하고 있음은 긴 불교의 역사 속에서 형성된 신앙현상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다르마도 붓다가 자신의 깨달음을 말씀으로 드러낸 것이며, 말씀으로 드러난 가르침은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이상세계를 얻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평화롭고, 모든 사람이 누구나 다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길을 담고 있는 다르마는, 바로 쌍가의 힘을 빌려서 민중에 전달된다.
2. 사성제(四聖諦)
목경찬 / 불광사 불광교육원 교수
① 위대한 의사가 내린 삶에 대한 처방전 ▲ 위로
몸에 이상이 와서 병원에 갔다. 그런데 의사는 금방 아픈 곳을 알아내고 병의 원인인 생활 습관을 귀신 같이 알아낸다. 의사에게 강한 믿음이 간다. 더구나 의사선생님은 곧 완쾌될 수 있으며 재발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리고 처방대로 약을 먹고 평소에 늘 음식을 조심해서 먹으라고 당부한다. 약을 먹기 전에 벌써 몸이 나은 것 같다.
위의 글은 <잡아함경> ‘양의경(良醫經)’에 나오는 이야기를 각색해본 글이다. 그 경전에는 좋은 의사가 갖춰야 할 네 가지 덕목을 언급한다. “첫째는 병을 잘 아는 것이요, 둘째는 병의 근원을 잘 아는 것이요, 셋째는 병을 잘 알아 다스리는 것이요, 넷째는 병을 다스릴 줄을 알고는 다시 재발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왜 괴롭다고 했는가…그 원인과
열반으로 가는 방법은 무엇인지
세상의 훌륭한 의사와 같이, 부처님께서도 힘든 삶의 모습과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새 삶과 새 삶을 열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신다. 경전에서 부처님을 훌륭한 의사에 비유하며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부처님께서 큰 의왕(醫王)이 되어 네 가지 덕을 성취하여 중생들의 병을 고치는 것도 또한 그와 같다. 무엇을 네 가지라 하는가? 이른바 여래께서 아시나니, 즉 이것은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고성제(苦聖諦)’라고 참답게 알며, 이것은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고집성제(苦集聖諦)’라고 참답게 알며,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고멸성제’라고 참답게 알며,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고멸도적성제’라고 참답게 아시느니라.”
이 내용이 바로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가르침이다. 줄여서 사제(四諦)라고도 한다.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고 풀이할 수 있는 사성제는, ‘괴로움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이를 보통 고성제(苦聖諦), 집성제(集聖諦), 멸성제(滅聖諦), 도성제(道聖諦)로 나타낸다. 줄여서 고제, 집제, 멸제, 도제라고 쓰기도 한다. 그리고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한꺼번에 나타내기도 한다.
고성제는, 현실을 바로 보게 하는 가르침이다. 이 세상은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집성제는 괴로움의 원인을 밝혀 원인을 제거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다. 멸성제는 괴로움에서 벗어난 상태(열반)을 밝혀 그것을 이루게(증득하게) 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다. 도성제는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여 그 길을 닦게 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다.
사성제는 불교에서 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이다.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설한 법문 가운데 하나가 사성제이다. 세상의 의사는 환자의 병을 고치지만 결코 생사의 근본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대의왕이신 부처님께서는 사성제 등을 통해 생사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가르침을 주신다. 자, 이제 그 가르침으로 다가가 보자. 왜 괴롭다고 했는지,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지, 열반은 무엇이고, 그것으로 가는 방법은 무엇인지?
② 중생 삶의 모습, 괴로움과 그 원인 ▲ 위로
한치 앞을 모르면서 이러쿵저러쿵 내세우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자신은 늘 그렇게 문제없이 살아갈 것 같지만, 결국 자신도 힘든 환경에 처한 뒤, 주위를 둘러보지 못한 것에 뒤늦은 후회를 한다. 그런데 잊고 있거나 단지 자각하지 못할 뿐, 늘 쉽지 않은 삶의 환경에 놓여 있다. 이러한 우리 삶의 모습을 일깨워주는 가르침이 사성제 가운데 고성제(苦聖諦)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삶은 괴로움”이라는 것이다. 괴로운 삶의 현실을 자각하는 것이야말로 그 괴로움 삶을 극복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된다.
사람들은 말한다. “왜 삶을 괴로움이라고 하는가? 즐거움도 있는데.”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즐거움도 완전한 즐거움이 되지 못한다. 언젠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고, 이어서 괴로움이 올 수도 있다. 물론 또 다른 즐거움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지속되지 않는다.
괴로운 삶의 현실 자각은
극복할 수 있는 ‘첫 걸음’
이러한 괴로움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자체 고통으로부터 오는 괴로움이다. 이를 고고(苦苦)라고 한다. 가령 병으로 인한 괴로움 등이다. 둘째 항상 있지 않고 변해가기 때문에 생기는 괴로움이다. 이를 행고(行苦)라고 한다. 가령 나의 젊음이 그대로 있지 않고 변해 가는 것에서 오는 괴로움 등이다. 셋째 있던 것이 없어짐으로써 오는 괴로움이다. 이를 괴고(壞苦)라고 한다. 가령, 소중하게 여긴 재물 등을 잃어버림으로써 오는 괴로움 등이다.
또는 괴로움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바로 사고(四苦) 또는 팔고(八苦)이다. 사고는 네 가지 괴로움으로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말한다. 생로병사는 모든 이들이 겪게 되는 과정이다. 팔고는 사고에 네 가지 괴로움을 더한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애별리고(愛別離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게 되는 괴로움[원증회고(怨憎會苦)], 구하고자 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이 치성하여 이루어진 괴로움[오음성고(五陰盛苦)]이다.(오음은 차후에 자세히 설명될 것이다.)
그런데 잠깐 생각해보자. 중생의 생로병사가 괴로움인 것은 맞지만, 진짜 생로병사 자체가 괴로움일까?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 자체가 무조건 괴로움일까? 누구나 생로병사를 겪게 된다. 이 땅에 오신 성인(聖人)도 그렇게 가신다. 그리고 성인도 사람을 만나고 헤어진다.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면 성인도 괴로워야 하지 않을까? 진짜, 삶 자체가 괴로움일까? 그러면 우리의 삶이 너무도 슬프지 않은가?
삶이 괴로움인 것은 분명히 원인이 있다. 이러한 괴로움의 원인을 설명하는 가르침이 바로 집성제(集聖諦)이다. 그 괴로움의 원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무명(無明)과 갈애(渴愛)이다. 무명은 밝음(지혜)이 없다는 뜻이니, 곧 어리석음이다. 이 무명에 의해 갈애가 생긴다. 갈애는 말 그대로 목말라 물을 찾듯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탐욕이라고 한다.
이러한 어리석음과 탐욕 때문에 중생은 무엇이든 붙들고 놓지 못한다. 이로 인해 생로병사가 괴로움의 쓰나미가 되어 다가온다. 어리석음과 탐욕에 의해 좋아함과 싫어함을 가지게 되니, 이별과 만남이 괴로움으로 다가온다. 그렇게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세상을 바로 보니, 늘 집착 속에 세상이 괴로움으로 다가온다. 세상은 그냥 그렇게 있는데 말이다.
③ 괴로움의 소멸과 실천수행 ▲ 위로
멸성제는 고멸성제(苦滅聖諦)로 나타내듯이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여기서 괴로움의 소멸인 ‘멸’, 또는 ‘고멸’이란 결국 열반을 말한다. 열반은 범어 니르바나(nirva-n.a)을 음역한 것으로, ‘불어서 끈다’는 뜻이다. 즉, 열반이란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 번뇌를 불어서 끈 상태, 타오르는 번뇌를 소멸시키고 깨달음의 지혜인 반야를 얻은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멸성제란 괴로움에서 벗어난 열반을 밝혀 열반을 얻게 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다.
간혹 열반을 죽음으로 이해하는 이도 있지만, 열반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번뇌가 사라져 참으로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열반은 고요할 뿐만 아니라 지혜(반야)도 함께 하기에 밝기도 하다. 중생을 교화하다 마침내 몸을 버리고 고요한 곳에 드셨기에 열반으로 표현한 것이지 죽음이 열반은 아니다.
번뇌 사라진 고요한 상태
수행법으로 八正道 ‘제시’
도성제는 고멸도적성제(苦滅道跡聖諦)라 나타내듯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따라서 도성제는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 열반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여 그것을 닦게 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다. 모든 수행이 이에 해당되지만, 보통 팔정도(八正道)로 언급된다. 여기서 정도(正道)는 중도(中道)의 뜻이다. 그 여덟 가지란, 정견(正見:바른 견해), 정사(正思:바른 생각), 정어(正語:바른 말), 정업(正業:바른 행동), 정명(正命:바른 직업), 정정진(正精進:바른 노력), 정념(正念:바른 마음 챙김), 정정(正定:바른 선정) 등이다.
정견은 가치관, 관점을 말하고, 정사는 지금 순간 순간 일어나는 생각을 말한다. 정사, 정어, 정업은 삼업(三業)인 의업(意業:생각으로 짓는 업), 구업(口業:입으로 짓는 업), 신업(身業:몸으로 짓는 업)을 말한다. 물론 정견 등 나머지 다섯도 삼업에 속하지만 두드러진 특징 때문에 별도 항목으로 나타낸다.
정명에서, 목숨(命)은 생계수단과 관련된다. 그래서 바른 직업이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출가수행자의 경우 직업이라 표현하기 곤란하다. 이에 바른 생활로 번역한다. 그런데 간혹 정업을 바른 생활로 번역하는 경우 혼란이 생긴다. 그래서 정명을 ‘바른 생계수단’으로 번역한다. 정정진은 용기를 가지고 바르게 노력하는 것이다. 정방편(正方便)이라고도 한다. 방편은 방법을 말한다. 즉 바른 방편으로 바르게 노력함을 말한다.
정념에서 ‘념(念)’은 단순하게 ‘생각’이라는 뜻이 아니라, 명기불망(明記不忘)의 뜻을 지닌다. 즉, 앞서 익혔던 대상을 명확히 기억하여 잊지 않게 하여 선정을 이끌어내는 마음 작용이다. 이에 정념을 바른 마음 챙김, 바른 기억 등으로 번역한다. 이때 기억은 지난 옛일을 떠올리는 기억이 아니라, 앞 찰나의 생각을 놓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정은 보통 말하는 삼매로 바른 마음 집중, 바른 선정을 말한다.
이때 집중이란 오직 한 대상에 머문다는 뜻이 아니라 머물고자 하는 곳에 능히 머문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의 대상에만 머무는 것이라면, 동작 하나하나 살피는 위빠사나 수행자는 결코 정에 머문 것이 아니고, 부처님께서 항상 선정에 머물며 법을 설하신다는 것도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④ 괴로움을 보고 괴로움을 벗어나라 ▲ 위로
병명만 알고 완쾌될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병의 원인은 알지만 치료법을 모른다면, 환자에게나 의사에게나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단지 ‘삶은 괴로움이다’라는 말에 그친다면, 그것은 성인의 가르침이 될 수 없다. 괴로운 현실만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괴로움이 사라진 미래도 이야기해야 한다. 괴로움의 원인이 어리석음과 탐욕이라고 하였다면 그것을 없애는 방법도 이야기해야 한다.
따라서 사성제의 가르침은 현실의 모습과 현실의 모습을 극복한 상태를 결과와 원인의 구조로 설명한다. 중생의 현 상황(결과-고 苦)를 짚어주고, 그 이유(원인-집 集)을 말하고, 이 현 상황을 벗어난 상태(결과-멸 滅)를 말해주고, 그 길을 가는 방법(원인-도 道)을 제시한다. 앞서 언급한 병(病)이 고(苦)에, 병의 원인이 집(集)에, 완치된 상태가 멸(滅)에, 치료과정이 도(道)에 비유된다.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그 현실의 원인을 파악한 뒤, 현실의 문제가 해결된 상황을 향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구조이다.
현실의 모습 극복한 상태를
결과와 원인의 구조로 설명
‘삶은 괴로움이다’라는 가르침을 접하고 나서, 혹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즐거움이 항상 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움이라면, 괴로움도 항상 하지 않아서 곧 즐거움이 되지 않겠는가? 긍정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것이 좋지 않은가? 긍정적인 사고와 현실에 대한 판단은 다른 차원이다. 삶을 괴로움이라고 본다고 해서 긍정적인 사고가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정확히 판단하고, 미래에 대해 희망과 그 희망찬 미래를 위한 방법이 있을 때 긍정적인 사고가 나온다. 현실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단지 장미빛 미래만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현실도피이며, 현실망각이다. 그때 그것은 긍정적 사고가 아니라 공상이다.
이에 성인께서 고집멸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세 번 굴려 말씀하신다.
첫 번째 법을 굴림은 시전(示轉)으로서 중생들에게 그 가르침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것은 고성제이다. 이것은 집성제이다. 이것은 멸성제이다. 이것은 도성제이다.” 두 번째 법을 굴림은 권전(勸轉)으로서 중생들에게 실천하도록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 고성제는 알아야 한다. 이 집성제는 끊어야 한다. 이 멸성제는 증득해야 한다. 이 도성제는 닦아야 한다.” 세 번째는 증전(證轉)으로서 중생들에게 실천을 통해 모든 것을 얻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고성제는 이미 알았다. 이 집성제는 이미 끊었다. 이 멸성제는 이미 증득하였다. 이 도성제는 이미 닦았다.”
이를 사성제의 세 가지 측면에서 말씀하셨기에 삼전십이행(三轉十二行)이라고 한다. 이를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고는 보아야 되고(견고 見苦), 집은 끊어야 되고(단집 斷集), 멸은 증득해야 되고(증멸 證滅), 도는 닦아야 한다(수도 修道).”
즉, 현실을 바르게 보아야 하고, 모순된 현실의 원인은 제거해야 되고, 모순된 현실의 모습은 극복해야 하고, 극복하기 위해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현실을 막연하게 바라보거나 무시하지 않고 그 모습을 바르게 진단하고, 그 원인을 알아 제거하고, 희망찬 미래에 청사진을 제시하고, 이를 완성하기 위해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가르침이 사성제에 담겨 있다.
3. 팔정도
황정일 / 동국대학교 연구초빙교수
① 중생의 ‘無明 병’에 내린 처방 ▲ 위로
부처님을 표현한 여러 말 중에 의왕(醫王)이라는 말이 있다. 이 표현은 중생들이 무명(無明, 진리에 대한 앎이 없는 상태)이라는 중병에 걸려 고통 받고 있을 때, 그 병을 정확히 알고 올바른 치료법을 처방해 주신데 따른 별호(別號)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한 여러 사례 중,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성제(四聖諦)이다.
즉 중생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생노병사(生老病死)라는 고통을 겪고 있는데, 그 병을 무명이라 한다. 그리고 그 병이 일어난 원인은 자신에게만 너무 집착하는 스트레스 때문인데, 이를 일러 아집(我執)이라고 한다. 따라서 그 병의 원인을 제거하면, 본래의 편안하고 근심.걱정 없는 삶을 살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 올바른 치료법을 알고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이 가진 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것이 고성제(苦聖諦)이고, 병의 원인을 진단해, 원인을 가르쳐 준 것이 집성제(集聖諦)이다. 나아가 병의 원인을 제거하면, 본래의 건강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이 멸성제(滅聖諦)이고, 본래의 건강을 찾기 위한 치료법을 가르쳐 준 것이 도성제(道聖諦)이다.
두 극단 버린 중도가 최고명약
8가지 올바른 재료로 만들어져
병과 그 원인을 안다고 해서 병이 저절로 낫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이에 부처님이 구체적으로 내린 처방전이 바로 팔정도(八正道)이다. 이는 곧 사성제 중의 하나인 도성제이지만, 구체적인 8가지 올바른 방법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일명 팔정도(八正道)로 불린다. 그렇다면, 그것의 효용과 가치는 무엇이며, 어떻게 뿌리 깊은 무명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일까. 이에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출가자들이 행하지 말아야 할 두 극단이 있다. 이 두 극단이 무엇인가. 하나는 감각적 욕망의 대상에 대한 즐거움을 탐닉하지 말아야 하는 것으로, 그 즐거움에 대한 탐닉은 낮고 통속적이며, 평범하고 신성하지 않으며 해로운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몸을 괴롭히는 것에 탐닉하는 것으로 그것은 고통스럽고 신성하지 않으며 해로운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림으로서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眼]을 열어주고 알게 하며, 적정(寂靜)과 통찰(通察)과 정각(正覺)과 열반(涅槃)으로 이끌어 준다.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눈(眼)을 열어주고 알게 하며, 적정(寂靜)과 통찰(通察)과 정각(正覺)과 열반(涅槃)으로 이끌어 주는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성스러운 여덟 가지 길’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삼매(正念)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눈[眼]을 열어주고 알게 하며, 적정(寂靜)과 통찰(通察)과 정각(正覺)과 열반(涅槃)으로 이끌어 주는 중도이다.”
부처님은 무명이란 병을 치료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쾌락과 고행의 두 극단을 버리라고 당부한다. 왜냐하면, 쾌락은 마치 마약과 같아서 자신이 무슨 병을 앓는지도 모르게 하기 때문이고, 고행은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은 잘 알지만, 병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오히려 더 큰 병을 낳게 하기 때문이다.
잘 조율된 악기가 훌륭한 소리를 내듯이, 쾌락과 고행의 두 극단을 버린 중도야말로, 최고의 명약(名藥)이다. 그리고 이 명약은 오직 올바른 8가지 재료로만 만들어진다. 중도가 곧 팔정도이고, 팔정도를 통해서만 열반이 성취된다.
그러면, 무엇을 중도라 하고, 그것을 왜 팔정도라고 할까.
② 올바르게 살아가는 실천의 길 ▲ 위로
불교가 존재하는 이유며 처음이자 마지막 가르침 중도(中道)는 일상에서도 자주 쓰는 말이다. 흔히들 ‘중도를 지켜라’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중도를 지키는 것일까. 불교에서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연기(緣起)에 대한 이해와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한 팔정도의 실천이다.
연기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고 <아함경>에서 말하고 있다. 이 말은 모든 것이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의미다. 즉 어느 것도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종교에서 신은 그 자체로 존재하며, 스스로 존재하는 절대적 대상이라고 하지만, 그 역시 인간과 관계하는 한, 절대적이지 않다. 설령, 인간과 관계하지 않는 신이 있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연기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므로, 불교에서는 공(空)이라 한다. 하지만 이때의 공은 ‘텅 빔’이나 ‘아무것도 없음’이 아니다.
다만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은 스스로의 존재성이 없는 것이므로, 공이라 할 뿐이다. 이것은 “연기(緣起) 그것을 우리는 공(空)이라고 말한다. 그것(空)은 가명(假名)이며, 그것(空)이 바로 중도이다” 라는 용수의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즉 존재는 있고 없음(有無)이나 생겨나고 소멸(生滅)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관계 속에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원적 분별을 넘어, 연기적 관점에서 모든 존재를 보는 것이 중도다. 그리고 이러한 중도를 실천하는 방법이 바로 팔정도다. 연기적 관점으로 대상을 보는 것이 중도이지만, 이러한 이론을 배우고 이해한다고 모든 대상을 연기의 관점으로 볼 수는 없다.
이에 부처님께서 연기의 관점으로 대상을 보는 연습을 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팔정도이다. <초전법륜경>에서 말했듯이, 중도가 곧 팔정도이고, 팔정도를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열반은 성취된다. 열반은 중도에 대한 이해로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실참실수(實參實修)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팔정도가 없는 가르침, 팔정도를 실천하지 않는 수행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이것은 부처님이 열반 직전, 마지막 제자로 받아들인 수밧다(Subbadha)에게 한 마지막 가르침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수밧다(Subbadha)여, 법(法, 가르침)과 율(律)에 성스러운 여덟 가지 바른 길에 대한 가르침이 없다면, 사문[(예류과(預流果), 일래과(一來果), 불환과(不還果), 아라한과(阿羅漢果)]에 들지 못한다.”
이처럼 ‘중도를 지켜라’는 말은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말라”는 이론적 의미로 보이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팔정도를 실천하라’는 말이 내포돼 있다. 중도는 팔정도의 실천이며, 이는 곧 올바르게 살아가는 실천의 길이다.
올바르게 산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말하고 이해하는 듯하지만,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올바르게 사는 것이며,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것이 팔정도이다.
무릇 종교란 신앙의 대상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을 통한 신(神)의 선택을 중시하는 타력적(他力的)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이는 자칫 맹목적 믿음으로 변질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불교는 맹목적 믿음을 거부한다.
이해를 통한 믿음, 타력 이전에 자력(自力)을 중시한다. 이는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 팔정도임을 보더라도 확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처음 가르침도 마지막 가르침도 팔정도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팔정도는 불교의 존재 이유다.
③ 팔정도는 사성제 이해에서 시작 ▲ 위로
불교의 시작이 ‘삶은 괴로움이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면, 불교의 끝은 중도를 깨침으로서 완성된다. 그리고 이 중도의 길에 팔정도가 있다. 즉 바른 견해(正見)로부터 시작해서 바른 삼매(正定)로 끝나는 여덟 가지 길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바른 견해일까.
“비구들이여, 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괴로움에 대해서 아는 것(고성제), 괴로움의 발생에 대해서 아는 것(집성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서 아는 것(멸성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아는 것(도성제)을 바른 견해라고 한다.”
이처럼 팔정도의 첫 가르침은 사성제에 대한 바른 견해로 시작하고 있다. 이미 팔정도가 사성제에 포함되어 있음에도 팔정도에서 사성제를 다시 거론한 것은 괴로움에 대한 철저한 재인식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괴로움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야 말로, 벗어나야만 하는 확실한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원인을 알고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삶이 괴로움이라는 것은 질병, 노쇠, 죽음 등을 통해 명백하게 체험하는 사실임에도 우리는 너무나 쉽게 망각해 버린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빈두설경(賓頭說經)>에서 인간이 처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옛날 한 사람이 들판에 나갔다가 미친 코끼리에 쫓겨 덩굴을 타고 우물 속으로 피했다. 그러나 우물 바닥에는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다. 다시 오르려 했지만 코끼리가 입구에 버티고 있어, 의지할 것이라곤 잡고 있는 넝쿨뿐이다. 이때 어디선가 흰 쥐와 검의 쥐가 나타나 넝쿨을 갉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벌집에서 흐르는 꿀을 발견하고 그 단맛에 취해 모든 위험을 잊고 꿀맛에 탐닉한다. 그 동안 대지에는 난데없는 불이 일어나 모든 것을 태우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은 무명의 병에 걸려, 밤낮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 인식도 잠시뿐, 벌꿀과 같은 오욕(五慾)에 이끌려 그 모든 상황을 잊고 사는 게 인간이다. 부처님이 바른 견해에서 다시 사성제를 이야기한 것은 이 현실을 직시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가 괴롭다고 하는 괴로움은 대체로 육체적 심리적 아픔을 의미한다. 하지만 부처님이 고성제를 통해서 말한 괴로움은 더 근본적인 의미이다. 즉 모든 존재는 바뀌고 변해간다는 무상(無常)의 괴로움이다. 만일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면, 괴로움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잠시만 자신과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면, 그러한 믿음이 곧 헛된 망상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무상하기(諸行無常) 때문에 괴롭다는 것(一切皆苦)은 보편적 진리이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다면, 바른 실천도 없다.
그러면 무상이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무상하니까 무상한 것일까. 만일 이것에 대한 이유가 없다면, 괴로움을 벗어날 길도 없다. 만일 부처님의 가르침이 여기서 끝났다면, 무상하다는 것은 모든 존재가 인과적 관계인 연기적 존재라는 가르침이 없었다면, 불교 역시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다. 그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믿어라는 맹신의 구호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아무런 이유 없이 무상한 것이 아니다. 연기(緣起)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도 일어나듯이, 어떤 것도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지 않다. 하지만 무상하기 때문에, 연기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은 아니다. 무상한 것을 무상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영원한 자아나 불변하는 어떤 존재가 없음에도 그러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러길 바라는 집착(집성제)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④ 바른사유로 탐욕과 성냄을 다스려라 ▲ 위로
흔히들 현대를 물질만능주의 혹은 배금주의(拜金主義)시대라 한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숭배하여 삶의 목적을 돈 모으기에 급급한 경향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돌이켜 보건대, 물질에 집착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어느 시대든 물욕(物慾)이나 권력욕(勸力慾) 등이 시대적 문제였다.
탐욕은 자신 태우는 불길
분노는 타인 죽이는 포수
<법구경>에서 “돈이 하늘에서 소나기처럼 쏟아질지라도 사람의 욕망을 다 채울 수는 없다”고 했듯이, 부처님이 살았던 시대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우리의 마음속에 괴로움(번뇌)를 일으키는 근본 원인인 탐(貪).진(瞋).치(癡) 삼독(三毒)이 있는 한, 이 말은 언제나 유효할 것이다.
그러면 삼독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첫 번째 탐은 탐욕(貪慾)으로 좋아하는 대상에 집착해, 그것을 취하고자 욕심을 내는 마음을 말한다. 두 번째 진은 진에(瞋)로 좋아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 성내고 분노하는 마음을 말한다. 세 번째 치는 우치(愚癡)로 어리석은 마음이다. 구체적으로 불교의 사성제나 연기 등의 가르침에 대한 어리석음을 말한다.
이 삼독에 대해, <법구경>에서는 “탐욕처럼 심한 불길은 없고 분노처럼 심한 포수(捕手)도 없으며, 어리석음에 비할 그물도 없고 욕망과 같은 거센 물결도 없다”고 한다. 탐욕은 자신을 태우는 불길이고 분노는 타인의 생명을 죽이는 포수이며, 어리석음은 자신을 옭아매는 그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삼독은 자신과 타인을 죽이는 세 가지 치명적인 독(毒)이다.
그러면, 삼독의 해독약은 없을까. 이에 부처님께서는 팔정도의 두 번째 덕목인 바른 사유(正思惟)라는 처방전을 지어 주었다. “감각적인 욕망을 벗어나고자 하는(出離) 마음가짐, 나쁜 의도가 없는 마음가짐, 남을 해치려는 의도가 없는 마음가짐”이 그것이다. 감각적 욕망이란 탐욕을 말한다. 탐욕은 순간적 쾌락을 얻고자 마약을 먹는 것과 같기에 멀리 벗어나라는 가르침이다.
나쁜 생각이나 남을 해치려는 의도는 성냄과 분노를 말한다. 그것은 마치 칼날을 쥐고 타인을 공격하는 것과 같이, 자신은 물론 타인의 생명도 앗아갈 수 있음을 경계한 가르침이다. 이처럼 팔정도의 두 번째 덕목인 바른 사유(正思惟)는 삼독 중의 탐욕과 성냄을 다스리는 가르침이다.
그러면, 탐욕과 분노를 치료할 약은 무엇일까. 그 보약(寶藥)이 바로 6바라밀(波羅蜜,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의 수행) 중의 보시(布施)바라밀과 인욕(忍辱)바라밀이다. 욕심내는 마음은 베푸는 마음으로, 분노하고 성내는 마음은 참고 인내하는 마음으로 치료하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그저 남는 것을 주었다고 해서, 화를 꾹 참았다고 해서, 보시바라밀이나 인욕바라밀이 되지 않는다. 자비(慈悲)의 실천이 수반될 때에만 그렇게 부를 수 있다. 타인을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으로 대하듯이, 자식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는 마음이 일어날 때, 베풂은 보시바라밀이 되고 참음은 인욕바라밀이 된다.
이처럼 바른 사유란 탐욕과 성냄을 치료하는 처방전이고, 그 보약이 보시바라밀과 인욕바라밀이다. 하지만 탐욕과 성냄 역시 어리석음(癡)에서 비롯된다. 자신이 짓고 있는 집이 공중누각(空中樓閣, 허공의 집)임을 안다면, 탐욕과 분노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바른 견해를 갖지 못함이 어리석음 낳고, 어리석음으로 인해 탐욕과 성냄이 일어난다. 바른 견해는 어리석음(癡)을 치료하고, 바른 사유는 탐욕(貪)과 분노(瞋)를 치료하는 삼독의 해독약이다.
⑤ 팔정도는 혜·계·정 순서로 수행 제시 ▲ 위로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하는 사람이 반드시 닦아야 할 세가지 덕목이 있다. 일반적으로 계(戒).정(定).혜(慧)로 불리는 삼학(三學)이 그것이다. 이를 순서대로 보면, 계학은 몸(身)과 말(口)과 생각(意)으로 짓는 나쁜 행위를 방지하기 위한 덕목이고, 정학은 수행으로 마음을 고요하고 평안한 상태에 이르게 하기 위한 덕목이다. 그리고 혜학은 정학을 통해 얻은 마음 상태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如實知見) 지혜를 말한다.
삼학은 또 각각 팔정도에 배치되는데, 혜학은 바른 견해(正見).바른 사유(正思惟)에, 계학은 바른 언어(正言) 바른행위(正業) 바른 생활방식(正命)에, 정학은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마음집중(正定)에 해당된다. 삼학의 계정혜가 팔정도에서는 혜계정의 순서로 되어 있다. 일반적인 수행방법으로는 삼학의 순서가 타당해 보이지만, 무엇을 중점에 두고 논하는가에 따라 순서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존재의 실상과 중생이 처한
현실 여실히 보여주기 위함
팔정도에서 혜를 먼저 설한 것은 존재의 실상과 중생이 처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모든 존재는 연기하므로 실체가 없음(無常)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집착해 삼독(三毒)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자각할 때, 비로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팔정도에서는 혜를 통해 존재의 실상을 알리고,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 바른 노력과 바른 마음챙김, 바른 마음집중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계율의 실천이므로, 혜를 먼저 설한 다음에 계정을 설한 것이다.
이처럼 계율이란 정(수행)의 바탕이 되고 혜는 정을 통해 완성된다. 계율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바른 수행과 바른 지혜가 성취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계율의 중요성은 부처님이 열반하기 직전에 남기신 말씀에서도 알 수 있다.
“비구들이여, 내가 열반에 든 후에 마땅히 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 승가의 규범)를 존중하고 보배같이 공경해야 한다. 마치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을 만난 듯, 가난한 사람이 보배를 얻은 것 같이 해야 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너희들의 큰 스승이니, 만약 내가 세상에 머물더라도 이와 다를 것이 없느니라. …(중략)… 계를 의지하면 모든 선정과 괴로움을 없애는 지혜를 낼 수 있다. 그러므로 비구들은 반드시 철저한 계를 가져 어긋나지 않게 하여야 한다.” <유교경론(遺敎經論)>
이처럼 계율은 선정(禪定)과 지혜를 낳고 해탈을 이루는 근본이 되기 때문에, 수행에 앞서 가장 먼저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이와 관련해, 팔정도에서는 바른 언어(正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른 언어란 거짓말(妄語)을 삼가고 이간질 하는 말(兩舌)을 삼가며, 거친 말(惡口)을 삼가고 쓸모없는 말(綺語)을 삼가는 것이다.”
결국 바른 언어란, 남을 속이거나 악담하거나 이간질 시키는 말 등을 삼가라는 것이다. 세치도 안 되는 혀가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듯이, ‘말조심’ 하라는 말이다. <숫타니파타>에서 “사람은 태어날 때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오며, 어리석은 사람은 욕설을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신을 찍는다”고 하는 말이나, <법구경>에서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우며, 성난 말로 인해 채찍의 고통이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하는 말 등은 모두 ‘말조심’, ‘입조심’을 당부한 말이다. 특히, 불교에서 이를 삼업 중의 하나인 구업(口業)으로 분류한 까닭도 이와 같은 행위가 바른 수행의 큰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⑥ 잘못된 생활방식을 버려라 ▲ 위로
불교에는 스님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와 승가의 화합을 위해 지켜야 할 계율이 비구계 250, 비구니계 348개나 된다. 이 중에는 재가불자도 참고할 만한 내용이 상당히 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스님이나 재가불자 모두가 반드시 지켜야 할 계율이 있으니, 바로 5계(五戒)이다.
즉 불살생(不殺生), 불투도(不偸盜), 불망언(不忘言), 불사음(不邪淫), 불음주(不飮酒)가 그것이다. 이것은 또한 팔정도의 바른 언어, 바른 행위, 바른 생활방식에 해당하는 것으로, 불망언은 바른 언어에, 불살행, 불투도, 불사음은 바른 행위에, 불음주는 이 세 가지에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이와 같이 팔정도에는 이미 5계의 가르침이 설해져 있다.
불망언과 관련한 바른 언어는 이미 설명했기에, 여기에서는 나머지 두 개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팔정도에는 바른 행위에 대해, “살생을 하지 말고(不殺生) 주지 않은 것을 가지지 말며(不偸盜), 잘못된 성행위를 하지 말라(不邪淫)”고 되어 있다. 즉 바른 행위는 5계 중의 세 개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런데 팔정도에는 불음주와 관련된 직접적인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팔정도에는 불음주와 관련한 가르침이 없을까.
불음주란 술을 마시는 행위로부터 떠나고 이를 멀리 할 것을 가르치는 계율이다. 하지만 이것은 앞의 4개의 계율과 그 성격이 다소 다르다. 앞의 4개는 그 행위 자체가 바로 죄가 되는 성죄(性罪)이지만, 불음주는 그 행위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행위로 인해 성죄를 저지를 수 있는 원인이 되므로 이를 금지한 것이다. 그래서 이를 차죄(遮罪)라고 하는데, 음주(飮酒), 가무(歌舞), 화장(化粧) 등이 이에 해당한다.
계율 근본정신 지키면서
적용은 중도 관점서 이해
이러한 예는 팔정도의 바른 생활방식과 관련되는데, 팔정도에는 “고귀한 성문(聲聞)의 제자가 잘못된 생활방식을 버리고 바른 생활방식에 의해서 생활하는 것, 이것을 바른 생활방식이다”고 할 뿐, 구체적인 실례가 없다.
하지만 이와 관련된 <중부(中部)> 117경에는 출가자의 경우 사기행위, 배신, 점, 예언, 속임수, 고리대금을, <증지부(增支部)> 177경에서는 재가자와 관련해, 무기나 살아있는 동물거래, 고기나 술, 독극물 등을 사고파는 일 등을 금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요약하면, 살아있는 생명에게 직.간접적인 피해를 주는 생계는 잘못된 것으로, 음주 역시 이 범주에 포함된다. 이와 같이 팔정도에는 4개의 성죄와 하나의 차죄로서 5계가 갖추어져 있다.
그런데 5계와 관련해 현대에 와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육식(肉食)의 문제다. 즉 육식은 불살생의 계율을 어기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는 않다. 사실 부처님이 계실 때 육식을 금하는 계율은 없었다. 당시의 스님들은 지금과 달리, 모든 음식을 탁발로 얻었기 때문에, 재가불자가 주는 음식에 고기가 들어 있다고 받지 않거나 버리지 않았다.
다만, 살아 있는 것을 직접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이는 행위, 또는 죽이는 것을 보고 묵인하는 행위 등에 대해서는 엄격히 금했다. 이처럼 초기불교는 이 세 가지에 위배되지 않는 육식은 허용했다. 육식을 금한 것이 아니라, 살생과 관련된 행위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육식을 하든 채식을 하든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어느 하나를 고집하는 집착이 문제이다.
부처님 역시 중도에 의해, 세 가지에 위배되지 않는 육식은 허용했듯이, 무엇을 먹느냐 보다 먹은 음식을 통해 얻은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계율의 근본정신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겠지만, 그 적용은 중도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⑦ 수행은 깨달음 맺기 위한 꽃 ▲ 위로
깨달음이 열매라면, 수행은 열매를 맺기 위해 꽃을 피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탐스러운 열매도 꽃이 잘 피어야 맺히듯이, 바른 깨달음(正覺)은 바른 수행을 통해 얻어진다. 이에 팔정도는 바른 수행법으로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마음집중(正定)을 말한다.
바른 노력이란, 막으려는 노력, 끊어내려는 노력, 향상시키려는 노력, 유지시키려는 노력 을 말한다. 막으려는 노력은 아직 생기지 않은 악하고 좋지 못한 마음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끊어내려는 노력은 이미 생겨난 악하고 좋지 못한 마음을 제거하려는 것이다. 또한 향상시키려는 노력은 아직 생기지 않은 선하고 좋은 마음을 생겨나도록 하는 것이고, 유지시키려는 노력은 이미 생겨난 선하고 좋은 마음이 사라지지 않도록 성숙시키는 것을 말한다.
바른노력과 바른챙김
바른 마음집중 ‘필요’
이와 같이 바른 노력은 악하고 좋지 못한 마음을 제거하고 선하고 좋은 마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 수행이다. 하지만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듯이, 좋은 일이나 좋은 마음을 먹으면, 꼭 그것을 방해하는 나쁜 일이나 나쁜 마음이 동반해서 일어난다. 이를 흔히 장애라 하는데 수행에서는 수마(睡魔, 못 견디게 퍼붓는 졸음)나 망상(妄想, 그릇된 생각이나 잡념) 등이 그러한 장애다. 따라서 바른 노력은 이들 장애를 극복하고 수행에 전력할 것을 당부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장애를 인위적으로 제거하려면, 오히려 더 큰 장애를 불러온다.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에서 “수행하는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말지니,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성현이 ‘모든 마군(魔軍)을 수행을 도와주는 벗으로 삼아라’ 하시었다”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장애를 도반(道伴)삼아 하는 노력, 이것이 중도적 바른 노력이다.
세상에는 예나 지금이나 무수히 많은 수행법들이 있다. 하지만 그 수행법들이 모두 부처님과 같은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지는 않는다. 이는 바른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바른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바른 마음챙김이다. <대념처경(大念處經)>에서도 바른 마음챙김이야말로 번뇌를 제거하고 열반을 얻기 위한 직접적이고 유일한 길이라고 한다.
“비구들이여,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몸에 대하여 몸을 관찰하고, …(중략)… 느낌에 대하여 느낌을 관찰하고, …(중략)…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관찰하고, …(중략)… 법(가르침)에 대하여 법을 관찰한다면, 이것을 바른 마음챙김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바른 마음챙김은 자신의 몸에 대한 챙김, 몸과 마음이 받아들이는 느낌에 대한 챙김, 현재의 마음상태에 대한 챙김,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챙김이다. 한 마디로 숨 쉬거나 눕거나 걷거나(行住座臥) 생각하는 모든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하지만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 하듯이, 수행이 깊어질수록 그에 따른 장애도 치성하기 마련이다. 수행을 시작하면서 부딪치는 수마나 망상뿐만 아니라, 혼침(昏沈, 마음이 어둡고 답답한 상태)과 도거(掉擧, 마음이 들뜨고 혼란스러운 상태) 등과 같이 더욱 미묘하고 교묘한 장애가 수행을 방해한다.
하지만 돌이켜 보건데, 악하고 나쁘게 하거나 산란케 하는 것도 마음이고, 선하고 좋게 하거나 대상에 집중케 하는 것도 마음이다. 결국 마음이 마음을 다스린다. 하지만 마음이란 실체가 없는데, 어느 마음으로 어느 마음을 다스리겠는가. 단지 어느 마음에도 이끌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관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도적 바른 마음챙김이다.
⑧ 병행해 수행하는 순환원리 ▲ 위로
긴 고행의 끝, 극단적인 고행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부처님은 니란자 강가에 이르러, 목욕을 하고 수자타 여인이 주는 유미죽도 먹었다. 마침내 극단적인 고행을 버리고 중도(中道)의 길로 들어서고자 한 것이다. 6년 동안 뼈와 살을 깎는 수행을 했지만, 그러한 수행은 육체와 정신만 병들게 할뿐 깨달음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윽고 이 자리에서 깨닫지 못하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심과 함께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선정에 든다. 그로부터 7일 뒤, 새벽 첫 별을 보고서 마침내 더 이상 추구해야 할, 끊어야 할 어떤 것도 없는 더 없이 높은 바른 깨달음(무상정등각)을 증득하기에 이른다. <법구경>은 이때의 깨달음을 다음의 오도송(悟道頌)으로 전하고 있다.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치달려왔고 보지 못하였다. 집 짓는 자(갈애)를 찾으면서 괴로운 생은 거듭되었다. 집 짓는 자여, (이제) 그대는 보여 졌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라. 그대의 모든 기둥(무명)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번뇌)는 해체되었다. 마음은 업의 형성을 멈추었고 갈애는 부서져버렸다.”
바른 견해로 시작해서
바른 마음집중 끝맺음
이는 선정(禪定)을 통한 깨달음의 내용으로, 곧 바른 마음집중(正定)의 결과이다. 즉 모든 감각적인 욕망과 모든 좋지 않은 법들을 버리고 대상을 향하는 마음(尋)과 대상에 머무는 마음(伺)으로 희열과 행복감이 있는 첫 번째 선정(初禪)을 거쳐, 심(尋)과 사(伺)조차도 가라앉은 무심(無尋), 무사(無伺)의 상태에서 희열과 행복감을 느끼는 제2선(二禪)에 이르고, 나아가 희열마저 버리고 평온에 머물며, 마음챙김(正念)을 지니고 행복에 머무는 제3선(三禪)에 이른 후, 마침내 행복함이나 괴로움, 행복하지도 괴롭지도 않는 무념무상(無念無想)의 마지막 4선(四禪)에 이른 결과이다.
이와 같이 바른 마음집중을 통해, 생사윤회의 근본 원인이 무명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이 무명을 제거하니 탐진치 삼독(三毒)이 사라지고, 나아가 여실지견(如實知見)하는 지혜가 드러났음을 알게 된 것이다. 즉 바른 마음집중을 통해, 바른 견해에서 말해진 사성제와 연기의 가르침이 비로소 체득되어진 것이다.
이처럼 바른 견해로부터 시작한 팔정도는 바른 마음집중에서 끝을 맺지만, 그 결과는 곧 다시 바른 견해임을 알 수 있다. 이는 팔정도가 순환의 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 경전에는 팔정도의 수행 방법을 바른 견해부터 순서대로 바른 마음집중에 이르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편의상의 설명일 뿐이다. 바른 마음집중의 결과가 곧 바른 견해이듯이, 팔정도의 각 단계는 동시에 병행하며 수행되어져 함은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은 다시 45년간의 긴 자비실천의 길을 통해, 중생들에게 8만4000 법문을 했다고 한다. 이 숫자는 중생들의 번뇌가 그 만큼 많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그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팔정도를 실천하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팔정도의 실천만이 그 모든 번뇌를 끊는 바른 길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최후의 유훈이 “모든 형성된 것들은 부서지고야 마는 것이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는 것도 팔정도의 실천을 재차 강조하신 말씀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처음 가르침도 팔정도이고, 45년 동안 설한 법문의 핵심도 팔정도이며, 또한 열반 직전 마지막 제자인 수밧타(Subbadha)에게 설하신 것도 팔정도이며, 열반에 이르실 때 남기신 유훈도 팔정도이다. 따라서 팔정도는 부처님 가르침의 뿌리이자 줄기이며, 꽃이자 열매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방법과 길을 안다고 할지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없듯이, 지금 이 순간 마음 한 자락을 내어 볼 일이다.
4. 12연기(緣起)
신병삼/동국대 전자불전문화콘텐츠연구소 전문연구원
① 의미 - 시간적으로 변하는 윤회현상 ▲ 위로
하루는 오전 12시간 오후 12시간 합해서 24시간이고, 1년은 12개월이다. 또한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라는 동물 12가지(十二支)로 60년 단위인 60갑자(甲子)를 나타낸다. 이는 ‘12’라는 숫자가 시간을 표시하는데 매우 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간은 일반적인 시계처럼 원 운동을 하며 흘러간다. 그러한 원의 가장 간단한 등분은 6등분이며, 그 두 배는 12등분이다. 그 이유는 원의 반지름으로 원의 둘레를 끊어가면 정육각형(6등분)이 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수학적으로 12는 1.2.3.4.6과 같은 약수가 많아서 단위로 삼기에 매우 편리하다.
그래서 ‘12’라는 실생활의 시간개념과 관련된 숫자를 사용해서 ‘12연기’라고 함으로써 시간적으로 변화하는 윤회의 현상을 설명했을 것이다.
12연기는 사슬처럼 이어진
통일된 구조로 이뤄져 있어
12연기는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처(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등 12가지 연기의 현상이 사슬처럼 서로 이어져 통일된 구조를 이룬다. 이 12가지 과정으로 중생(衆生)들은 윤회한다.
연기(緣起)는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줄임말이다. 인연생기는 ‘원인과 조건이 만나서 새로운 것이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흔히 ‘씨앗이라는 원인에 흙.햇빛.물.거름 등의 조건이 결합해서 새싹이 돋는다’는 것에 비유된다. 그러한 연기에 대해서 <잡아함경>에서는 간략히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발생하므로 저것이 발생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이는 볏짚단들이 서로 버티고 서 있다가 한쪽이 넘어지면 나머지들이 모두 넘어지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은 서로서로 의지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도 서로 관련되지 않는 것은 없다. 자기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길거리의 풀 한 포기나 하나의 돌멩이일지라도 넓게 보면 나와 동일하게 ‘지구의 구성물’이고, 더 넓게 나아가 ‘우주의 구성물’로서 상호 의지하고 있다.
이러한 연기의 진리를 부처님은 깨달으셨다. ‘깨달았다’는 것은 ‘부처님이 연기법을 처음으로 만드셨다’는 말이 결코 아니고, ‘부처님은 연기법이 진리임을 분명하게 아셨다’는 의미이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도 연기법은 있었으며, 부처님이 태어난 이후에도 변함없이 그대로였고, 또한 열반(涅槃)한 이후에도 연기법은 그대로이다. ‘모든 만물은 서로서로 의지하고 관련되어 있다’는 연기법을 부처님은 발명한 것이 아니라 발견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연기법은 ‘만물은 원래부터 한 뿌리’(萬物同根)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쪽을 해치면 저쪽도 손해를 보고, 저쪽을 도우면 이쪽도 이익을 받게 된다. 남을 해치면 내가 죽고, 남을 도우면 내가 살게 된다. 이것은 우주의 근본진리로서, 연기법을 알면 남을 해치려고 해도 해칠 수가 없고, 서로서로 도와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적대적 처지에 있더라도 공존(共存)을 위해서는 침해와 투쟁을 버리고 서로 도울 수밖에 없다. 물과 불은 상반되지만, 물과 불을 함께 조화롭게 이용하는 데서 지혜가 발생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연기법을 설법하신 이유는 ‘모든 것의 상호관련성’을 직시한 올바른 견해(正見)에 의해서 모든 중생들이 괴로움을 없애도록 하기 위한 자비심의 발로였다.
② 기원(起源) - 늙음과 죽음 문제 고민한 부처님 ▲ 위로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인도 북부의 카필라성에서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한 왕자가 태어났는데, 그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하였다. 어머니 마야부인은 왕자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게 되는데, 어머니의 ‘죽음’이 싯다르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삶의 화두처럼 작용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점술가들은 “싯다르타 왕자는 집에 있으면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고, 출가하면 부처님이 된다”는 그의 운명을 말하였다. 전륜성왕은 세계를 통일해서 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帝王)이다. 이에 아버지 정반왕은 아들이 전륜성왕이 되기를 원하면서, 출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외부 출입을 자재하고 궁전에서 향락을 누리도록 배려하였다.
그러나 싯다르타는 길에서 ‘늙은이, 병든 사람, 시체’를 보게 된다. 인간이면 누구나 늙음 병듦 죽음은 겪는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 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그러다가 출가수행자를 만난다. 출가수행만이 그러한 늙음과 죽음을 벗어나 해탈을 이룰 수 있음을 자각한다. 이것을 ‘네 곳의 문(門)을 지나다가 경험한 것’으로서,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고 한다.
사문유관 후에 아버지 정반왕은 아들 싯다르타의 출가 결심이 확고한 것을 알고 “그러면 네 아들을 낳고 출가한다면 허락하마”라고 말한다. 정반왕은 싯다르타가 아들을 얻게 되면 출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반왕의 기대와는 달리 싯다르타는 아들 라훌라가 태어난 날 저녁 몰래 궁궐을 넘어서 출가의 길로 들어선다.
12연기는 사슬처럼 이어진
통일된 구조로 이뤄져 있어
출가 후 처음 만난 선정수행자인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타라는 두 스승에게서 늙음과 죽음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6년간의 갖은 고행과 극단적 단식으로도 그 해답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신만의 선정수행방법인 사선(四禪)을 수행하면서 늙음과 죽음에 대한 해답을 구하였다. “이 몸이 가죽과 힘줄, 뼈만 남고 피와 살은 다 말라서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겠노라”라는 결의로써 보리수 아래 앉았다. 일주일 되던 새벽녘에 “늙음과 죽음(老死)은 태어남(生)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다.
“태어남은 존재(有)가 원인이 되고, 존재는 집착(取) 때문이다. 집착은 갈애(愛) 때문에 발생하고, 갈애는 느낌(受) 때문이네. 느낌은 접촉(觸)이 원인이 되고, 접촉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處) 때문에 발생하는구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명색(名色) 때문에 발생하고, 명색은 인식(識) 때문이다. 인식은 의도(行) 때문이고, 의도는 어리석음(無明)이 원인이 되는구나. 다시 어리석음은 이전 생애(前生)의 늙음과 죽음이 원인이 되었구나”라고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중생(衆生)들이 12가지 형태로 윤회한다(流轉門)는 것임을 분명히 자각하였다.
그러고 나서, “어리석음(無明)이 없게 되면 의도(行)가 사라지고, 의도가 사라지면 인식(識)이 없어진다. 인식이 없어지면 정신과 물질이 사라지고, 정신과 물질이 사라지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없어진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없어지면 접촉이 사라진다. 접촉이 사라지면 느낌이 없어지고, 느낌이 없어지면 갈애가 사라지는구나. 갈애가 사라지면 집착이 없어지고, 집착이 없어지면 존재가 사라지네. 존재가 사라지면 태어나지 않게 되고, 태어나지 않으면 늙음과 죽음 그리고 슬픔 괴로움들이 모두 없게 되네”라고 명확히 알았다. 이렇게 중생들이 늙음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서 해탈을 성취할 수 있음(還滅門)을 분명히 알았다.
부처님께서 늙음과 죽음에 대한 해답을 궁구한 끝에 12연기의 윤회(流轉門)와 그 윤회에서 벗어나는 길(還滅門)을 깨달으셨다.
③ 무명(無明)의 의미 - 내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착각·망상이 고통의 근원 ▲ 위로
내가 영원히 존재한다는
착각·망상이 고통의 근원
12연기에서 윤회하는 근본원인은 무명이다. 무명은 빨리어로는 avijja로서 ‘밝음(vijja)이 없다(a-)’라는 의미다. 밝은 햇빛이 내리쬐는 대낮에 구름이 태양을 가려서 어둡게 되는 것이다. 빛과 어둠은 낮과 밤, 선과 악, 흰 색과 검은 색, 천사와 악마처럼 모든 상대적 사유의 기본적 틀이다.
어쩌면 어둠은 우주가 발생하기 이전 원시적인 혼돈이나 무질서 상태인 카오스(chaos)의 은유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래서 ‘근본 무명의 한 생각(一念)에 의해 우주(cosmos)가 발생했다’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밝음은 앎이고 지혜로서, 동물의 습성에서 벗어난 문명화된 인간을 상징한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초기경전에서는 ‘무명은 지혜가 없는 것이고, 진리인 사성제에 대한 무지이고 어리석음(癡心)이다’라고 한다. 사성제는 ‘모든 것이 괴롭다는 거룩한 진리’(苦聖諦), ‘괴로움의 원인인 거룩한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인 거룩한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을 소멸하는 수행방법인 거룩한 진리’(苦滅道聖諦)이다.
여기에서 ‘괴로움의 원인인 거룩한 진리’는 12연기를 통해 윤회하는 것(流轉門)을 가리키고, ‘괴로움의 소멸인 거룩한 진리’는 12연기의 윤회에서 벗어나서 해탈하는 것(還滅門)을 가리킨다. 그래서 무명은 12연기 자체에 대한 무지이고, ‘모든 것은 서로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연기법을 자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다. “모든 고통이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는 불교의 핵심적 관점이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또한 무명은 ‘나’(a-tman)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하고 독립적인 실체가 없는 내가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착각과 망상이다. 이 망상에서부터 고통이 시작된다. 무명에서 벗어나는 길은 모든 존재가 영원하지 않아서 항상 변화하며 무아라고 밝힌 부처님의 교법을 이해하고 깨닫는 정견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이것이 지혜의 광명을 밝히는 길이다.
그래서 불교를 ‘지혜의 종교’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칠불의 어머니가 되고, 반야바라밀다가 불모가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혜를 깨달으면 이것이 바로 밝음이다. 어둠은 밝은 빛을 비추면 곧바로 환하게 밝아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12연기의 구조는 ‘진리에 대한 무지(無明)의 근본 원인 때문에 윤회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 주는 내용이다. 무명 때문에 중생들이 저마다 윤회하게 되는 것이고, 넓게는 무명 때문에 우주 전체가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데 무명은 ‘본래 밝은 태양에 구름이 끼어서 어두워지는 것’과 같이, 본래 청정한 여래장(如來藏; 佛性)을 가지는 있는 중생이 번뇌망상에 의해 가려져 더럽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본래 밝음은 그것을 막고 있는 구름이 떠나서 태양이 드러나기만 하면 된다. 윤회의 근본원인인 무명을 본래의 명(明: 지혜)으로 회복했을 때, 윤회는 저절로 사라져서 해탈열반이 성취되는 것이다.
그것은 ‘무명’의 ‘무(無)’를 없애서 ‘명(明)’을 회복하는 길이고, 모든 중생이 본래 청정한 부처님의 성품을 간직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길이다.
그래서 불교를 달리 표현하면 “‘무명(無明)’의 ‘무(無)’를 없애서 ‘본래 지혜’(明)를 되찾는 운동(종교)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중생들이 저마다 모두 ‘본래 부처임’을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④ 행과 식의 의미 - 인식은 미세한 생명현상의 지각작용 ▲ 위로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해서 행(行)이 발생한다.
행은 빨리어로 ‘결합하는 작용’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앞으로 더 영향력을 발휘하고 작용할 준비상태이다. 행은 본질적으로 원인과 조건이 결합해서 형성된 것을 의미한다.
“모든 형성된 것은 영원하지 않고 변화해서 결국 사라져 갈 수밖에 없다”(諸行無常). 현생에 태어나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도 변화하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태어나고 늙으며 병들고 죽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모든 것이 괴롭다”(一切皆苦). 괴로운 존재는 그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영원한 절대행복인 열반(涅槃寂靜)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추구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 속에서 괴로움을 경험한다.
죽음 후 다음 탄생으로
옮겨가는 지각의 능력
어찌 보면 참된 행복은 생로병사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생로병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실현될 것이다. 그처럼 행복하려는 존재가 괴로움 속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에, 행복을 추구하는 ‘나’(我; a-tman)라는 주체(主體)의 의지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주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므로 “모든 현상에는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諸法無我). 이처럼 행(行)은 본래 ‘결합’ 또는 ‘형성’이라는 의미에서 ‘변화’(遷流)라는 의미로 발전하고, 불교의 진리를 의미하는 삼법인(三法印)으로 설명된다. 또한 행은 물질(色) 느낌(受) 표상작용(想) 형성작용(行) 인식(識)이라는 ‘다섯 가지 쌓임’(五蘊) 중의 행온(行蘊)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데 12연기에서 행은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實在化)하려는 작용이고, 몸과 말과 마음으로 행위를 일으키려는 충동(의지)을 조작한다. 그래서 행은 모든 존재 요소들에게 그것들의 특성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현상들이 발생하도록 한다.
이는 우리 인간의 존재를 유지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자기 형성(形成) 작용으로 맹목적인 의도(意圖), 또는 삶의 의지(意志)이고 잠재적 경향성이다. 현재의 보이지 않는 의도는 미래의 결과인 행위(業)를 창조하는 원동력이다.
이러한 행을 조건으로 해서 인식(識)이 발생하기 때문에, 행은 ‘잠재적인 무의식’의 경향도 있다. 무명에 의해서 사실이 아닌 것을 착각하여 맹목적으로 집착한 것을 행은 계속해서 그러한 착각과 아집(我執)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렇게 결합하여 형성된 결과가 의식(識)에 옮겨져서 인식하고 분별해서 판단하게 된다. 이처럼 행에 의해 개체가 형성되면 그곳에 분별하는 인식 작용이 발생한다.
인식(識, 의식)은 미세한 생명현상의 바탕을 담당하는 지각작용이다. 인식은 이전 생애에서 죽은 이후에 그 다음 탄생에 어머니의 몸에 들어가 잉태되어 육체가 형성되는 과정에 들어가서 윤회(존재의 순환)를 본질적으로 담당하는 작용이다. 행(行)이라는 의지(意志)의 추진력들은 인식의 조건으로서, ‘인식이 어머니의 몸속으로 들어가도록’ 한다. 다시 말하면 인식은 윤회의 중심 작용으로서 죽음 이후에 다음의 탄생으로 옮겨가는 지각능력이다.
그런데 인식을 윤회하는 실체(實體)로서 죽음 이후에 다음 존재로 옮겨가는 실제적 존재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 모든 현상에는 ‘나’(주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인식을 실제 존재로 여기는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인식이라는 것도 어떤 ‘실체’가 아니라 조건에 의해 발생한 것일 뿐이다.
마치 장작을 조건으로 해서 타는 불은 ‘장작불’이라 하고, 쇠똥을 조건으로 타는 불은 ‘쇠똥불’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12연기에서 인식은 잉태될 준비인 간다바(gandhabba), 부모의 결합, 어머니의 배란기가 결합하여 태아가 잉태될 때에 발생하는 ‘지각작용’이기 때문에 ‘인식’이라고 명명될 뿐이다.
⑤ 명색(名色)의 의미 - 인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발생 ▲ 위로
인식(識)을 조건으로 해서 명색(名色)이 발생한다.
명색은 이미 인도 바라문교의 성전인 베다(Veda) 문헌에 나타나기도 하는 매우 오래된 개념으로, 명색은 미세한 인식(識)이 어머니의 몸속으로 들어간 이후에 거기에 연결되는 육체와 정신의 유기적 혼합체이다. 또한 ‘명색을 조건으로 인식이 발생한다’라는 내용도 초기경전에 등장하는데, 이는 ‘인식이 명색에 머물어야만 미래에 태어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는 인식과 명색은 서로 의존 관계로 매우 밀접한 친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식이 명색에 머물러야
미래에 태어날 수 있어
명색은 빨리어로는 na-maru-pa로서, na-ma(名)는 ‘이름’이고 ru-pa(色)은 ‘물질’이다. 명(名)은 다섯 가지 쌓임(五蘊) 중에서 느낌(受) 표상작용(想) 형성작용(行) 인식(識)이라는 정신적 부분을 말하고, 색(色)은 물질(色)이라는 육체를 가리킨다. 그래서 명색은 흔히 ‘정신과 물질’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명색은 ‘정신과 물질(육체)이 하나로 결합된 혼합물’이라는 의미로서, 정신과 육체가 한 덩어리인 상태이다. 또한 다섯가지 쌓임도 한 덩어리로서, 물질의 쌓임(色蘊), 느낌의 쌓임(受蘊), 표상작용의 쌓임(想蘊), 형성작용의 쌓임(行蘊)과 인식의 쌓임(識)이 한 덩어리로 결합되어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을 나타내는 내용이다.
부처님 당시에 사람들은 ‘정신과 육체는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라고 의심하였다. 부처님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정신과 육체가 동일하다면 육체가 죽을 때에 정신도 동시에 죽는 것이므로 “사람이 죽은 후에는 아무 것도 없게 된다”는 단멸론(斷滅論)이 된다. 정신과 육체가 다르다면 죽을 때에 육체만이 사라지고 “정신은 영원히 남아 있게 된다”는 것으로 상주론(常住論)이 된다.
상주론은 바라문교와 파쿠다 카차야나 등이 주장했고, 단멸론은 아지타 케사캄발린 등 외도(外道)들이 주장한 잘못된 견해(邪見)였다. 오늘날에도 정신적 측면만을 중시하는 유심론(唯心論)과, 물질적 측면만을 중요시하는 유물론(唯物論) 등의 사상이 만연하고 있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분리하고 사유하는 문제이다. 인간의 사유와 언어는 현상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으며, 대부분 철학사상은 분별(分別)함으로써 사물을 분석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침묵하였다. 정신과 물질 또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사유하는 하나의 틀임을 직시한 것이다. 본래 정신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다. 우주 전체가 모두 서로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분리해서 사유하는 것은 인간의 분별심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정신과 육체는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부분을 ‘정신’이라고 하고, 변화해서 소멸해가는 부분을 ‘육체’라고 지칭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정신과 육체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정신없는 육체는 뇌사상태이고, 육체없는 정신은 유령일 뿐이다. 그래서 정신과 육체가 분열된 존재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고, 정신과 육체가 하나의 유기체로서 작용할 때만이 온전한 인간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무분별(無分別) 지혜의 입장에서 ‘정신과 육체가 같은가? 다른가?’에 대하여 침묵했다.
12연기에서 명색은 어리석음(無明)과 의도(行)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어머니의 몸속으로 들어간 인식(識)을 조건으로 하여 발생한 것으로서, 정신적 과정과 생생한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신체로 이루어진 최초의 배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⑥ 육입처(六入處)과 촉(觸)의 의미 ▲ 위로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入處)이 발생한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눈.귀.코.혀.몸.마음이다. 사람들은 눈으로 물질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향유하며, 몸으로 접촉을 느낀다. 마음으로는 생각을 분별하고, 눈.귀.코.혀.몸 자체를 지각한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육입(六入)’이라고 하는데, ‘입(入)’은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들을 가지고 억지로 지각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부의 환경인 객관을 주관적인 감각기관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릴 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보다는 분별하고 분리해서 사유하기 때문에 현실을 거부하게 된다. 그래서 여러 가지 번민 속에 휩싸여서 괴로워하게 된다. 그 괴로움의 극복은 그 괴로움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직면하고 있는 상황이 당연히 주어질 것이 왔음을 자각할 때 이루어진다.
그래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어린이 같은 마음이 되어야만 현실은 보다 명확히 이해되고 거기에서 괴로움은 자연스럽게 발생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현(聖賢)들은 “어린애 같은 마음(童心)을 지녀라”고 말했다.
억지로 인식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게 돼
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조건으로 접촉(觸)이 발생한다.
접촉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눈.귀.코.혀.몸.마음이 물질.소리.냄새.맛.접촉.생각이라는 외부 환경을 만났을 때 인식작용이 발생하는 눈의 접촉(眼觸), 귀의 접촉(耳觸), 코의 접촉(鼻觸), 혀의 접촉(舌觸), 몸의 접촉(身觸), 마음의 접촉(意觸)이라는 여섯 가지 접촉(六觸)을 말한다. 고통에서 헤매지 않으려면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알맞게 제어하고 나쁜 환경에 접촉하지 말아야만 한다.
그리고 접촉은 네 가지 자양분(食, a-ha-ra)의 하나인 접촉의 자양분(觸食)으로서, 초기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은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가죽이 찢어진 소가 벽에 기대어 서 있으면 그 벽에 살고 생물들이 그를 먹어 버릴 것이고, 나무 곁에 서 있으면 그 나무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 버릴 것이며, 물속에 서 있으면 그 물속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버릴 것이고, 야외에 서 있으면 야외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버릴 것이다.
그 가죽이 찢어진 소가 의지해서 서 있는 곳마다 각기 거기에 살고 있는 생물들이 그를 먹어 버릴 것이다. 접촉의 자양분은 가죽이 찢어진 소와 같다. 접촉의 자양분을 분명히 알면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라는 세 가지 느낌을 명확히 알게 되고, 세 가지 느낌을 명확히 알면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어진다. 접촉의 자양분을 분명히 알아서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여기는 잘못을 버리면 존재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접촉은 ‘피부가 벗겨진 소의 상처에 미생물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침투하는 것’으로 비유되고 있다. 이는 우리 인간들이 접촉하는 모든 정보들이 은연중(隱然中) 삶에 영향력을 크게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현대 정보 사회를 살아가면서 인터넷에 노출되어 있는 현대인들은 저질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잘못된 삶의 방법을 습득하기 보다는, 지혜롭게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정보를 통해 일상생활을 보다 풍부하게 해야 할 것이다.
⑦ 수(受)의 의미 -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발생 ▲ 위로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발생한다.
느낌은 다섯 가지 쌓임(五蘊) 중에서 ‘느낌의 쌓임’(受蘊)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 느낌은 괴로운 느낌(苦受), 즐거운 느낌(樂受),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이라는 세 가지 느낌으로 설명된다. 즐거움은 행복이고, 괴로움은 불행이며,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행복하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은 평정(捨)의 느낌이다.
초기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즐거운 느낌에서 탐욕(貪慾)의 잠재적 경향이 발생하고, 괴로운 느낌에서 분노(憤怒)의 잠재적 경향이 일어나며, 평정의 느낌에서 어리석음(無明)의 잠재적 경향이 발현된다.”
어떤 느낌이 오더라도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마음에 드는 영화를 감상하거나 오락, 취미생활 등의 경험을 통해 즐거운 느낌을 받게 되면 그것에 대해 계속 집착해서 향유하려는 경향성이 발현된다. 반대로 어떤 경험을 통해 괴로움을 느끼게 되면 그것을 회피하고 싶은 절실한 감정이 발생하고, 싫어하고 거부하면서 분노의 감정이 우러나오게 된다.
또한 평정심의 마음에서는 그것에 집착하지도 않고 거부하는 감정이 없어서 거의 아무 생각 없이 될 위험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어리석음의 잠재적 경향이 발현될 수 있다.
탐욕은 폭력과 도둑질, 건전하지 못한 이성교제를 불러오기도 하며, 세속의 소유욕.색욕(성욕).식욕.명예욕(권력욕) 등의 현대자본주의 자유경제사회에서 거의 대부분 일간지 사회면의 ‘사건사고’와 관련되어 있다. 분노는 현실을 도피하고,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자살욕구와 관계되기도 하고, 자신의 분노를 남에게 표출하여 서로 화나게 만든다. 분노나 ‘화’는 말 못하는 갓난아기가 “나 좀 봐줘요, 내게 문제가 있어요. 문제 좀 해결해 주세요”라는 의미로 울음을 터트리는 것과 같다.
‘화’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자 하는 유아기적 행위이기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분노하는 사람에 대해 각별한 애정이 필요하다. 어리석음은 음주.마약 등 향정신성 의약품을 통해서 진행될 가능성이 많고, 해야 할 일에 대해 게으름을 피우는 등의 수면욕과 관련된다. 본질적으로 어리석음은 “원인과 조건에 의해 결과가 발생하고, 그렇게 발생한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연기법을 부정하는 것이다.
탐욕.분노.어리석음이라는 삼독심은 세속적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생활의 추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끝내 모두 괴로움을 유발시킨다. 왜냐하면 즐거운 느낌도 계속 향유하다 보면 싫증이 나서 질리기도 하며, 이보다 더 나은 즐거움을 찾으러 바삐 돌아다니며 시간을 쓸데없이 허비하게 된다.
지금 괴로움이 느껴진다면 이 괴로움은 반드시 내게 와야 할 것이 온 것이고 즐거움은 사라져야 할 것이 사라진 것이다. 어떤 느낌이 당사자에게 오더라도 있는 그대로 와야 할 것이 왔음을 분명히 받아들일 때 행복은 그 자리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선정(禪定)에 있어서 ‘아홉 가지 선정’(九次第定) 수행을 설명하는데, 그 중 아홉 번째 ‘번뇌를 완전히 소멸한 선정’(滅盡定)을 ‘상수멸(想受滅)’이라고도 한다. 상수멸은 ‘표상작용(想)과 느낌(受)까지 소멸한 경지’를 의미한다.
이는 “어떠한 ‘느낌’이든지 탐욕 등의 번뇌를 일으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모든 ‘느낌’이 소멸되었을 때 모든 번뇌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느낌의 소멸’은 느낌 그 자체의 소멸이 아니라, “어떠한 느낌이든지 여실하게 받아들일 때 번뇌는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의미이다.
⑧ 애(愛)의 의미 -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발생한다 ▲ 위로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渴愛)가 발생한다.
갈애는 어원적으로 동사 ‘목마르다’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마치 사막에서 목이 말라서 물을 갈구하는 것과 같다. 모든 번뇌의 근저(根底)에 있으면서 윤회를 반복하게 하는 원인으로 욕망의 총칭이다. 욕망은 재산.명예 등의 물질적 정신적 욕망뿐만 아니라 죽은 다음에 고통 없는 천국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도 포함된다.
갈애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 중 두 번째인 ‘괴로움의 원인인 거룩한 진리’(苦集聖諦)로서 표현된다. ‘괴로움의 원인’은 일반적으로 탐욕.분노.어리석음인 ‘세 가지 독성이 있는 마음’(三毒心)이 대표적인 것으로서 윤회(輪回)의 원인이다.
그 저변(底邊)에는 인간들이 저마다 자신이 부족한 것을 채우려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욕망을 ‘다섯 가지 욕망’(五欲樂)이라고 한다. 다섯 가지 욕망은 눈으로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고, 귀로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며, 코로 향기로운 것만 맡으려고 하고, 혀로 맛있는 음식만 맛보려고 하며, 몸은 부드러운 것만 감촉하려는 욕구이다.
마치 사막에서 목이 말라
물을 갈구하는 것과 같아
세속에서는 이 욕망을 재욕(財欲).성욕(性欲).식욕(食欲).명예욕(名譽欲).수면욕(睡眠欲) 등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욕망은 마치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갈구하고,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갈구하는 것과 흡사하기 때문에 갈애라고 한다. 오아시스 없는 광활한 사막의 지독한 더위 속에 물을 구해서 마시려 하지만 결국 구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계속 물을 찾아 헤매는 굶주린 아귀(餓鬼)와 비슷하다.
갈애는 ‘감각적 욕망의 대상에 대한 갈애,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갈애, 다시 태어나지 않고자 하는 갈애’라는 세 가지로서 설명되고, 탐욕이나 집착과 동일한 의미로 여겨진다. ‘감각적 욕망의 대상에 대한 갈애’와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갈애’는 생물체가 자기 종족을 번식하려는 욕구와 같은 생식욕, 재물에 대한 욕심, 명예 또는 권력에 대한 욕망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다시 태어나지 않고자 하는 갈애’는 삶이 힘들고 고달픈 것을 참지 못해서 회피해서 극단적인 자살(自殺)로까지 이어지는 것과 관련된다.
초기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기도 한다. “괴로움, 즐거움,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난다. 이 갈애를 원인으로 하여 몽둥이를 들게 되고, 칼을 잡으며, 다투고, 싸우며, 논쟁하고, 서로 비방하게 되며, 중상모략하고, 거짓말과 같은 나쁜 행동방식이 초래된다.”
이처럼 갈애는 폭력과 같은 나쁜 행동방식을 초래할 수 있는 내적인 원인이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싶다’는 내면적 욕망이 결국 외부로 표출될 때는 폭력, 상해, 살인 등의 인간사회의 극악무도한 범죄행위를 자행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떠한 인간의 행동이든지 자기내면의 감정을 표출시킨다”는 점에서 항상 자기성찰을 통해 건전한 정신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12연기에서 갈애는 윤회와 결합된 개념으로서 현재 상태에 내부에 존재하면서 미래에 늙음과 죽음을 초래할 수 있는 내적인 원인이다. 인간들은 갈애로 말미암아 윤회하고 탐욕을 가지게 되고 여기저기에서 즐거움을 갈망한다. 이러한 갈망은 흡사 ‘타는 목마름 속에 있는 생물이 물을 구하려는 것’처럼, 생물체는 누구나 삶의 에너지를 추구한다.
그러나 갈애라는 번뇌로 인해 끊임없이 윤회하면서 괴로움을 겪기 때문에 벗어나려고 한다. 갈애를 벗어나는 것이 해탈열반(滅聖諦)이고, 해탈열반으로 나아가는 길은 ‘여덟 가지 올바른 길’(八正道)의 실천이다. 결국 갈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하며(正思惟)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동하며(正業) 바르게 생활하고(正命) 바르게 노력하며(正精進) 바르게 현실직시하고(正念) 바르게 집중(正定)해야 한다.
⑨ 취(取)의 의미 -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발생 ▲ 위로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取)이 발생한다.
집착(upa-da-na)의 어원적 의미는 ‘단단히 붙잡은 것’으로서, 개개인이 움켜쥐거나 붙잡으면서 자신의 소유라고 집착하는 정신적 작용이다. 그래서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대상에 대해 달라붙어 그것을 소유하려고 집착하기 때문에 항상 괴로움이 발생한다.
집착에는 욕취(欲取).견취(見取).계금취(戒禁取).아취(我取)의 네 가지가 있다. 욕취는 물질적인 집착이다. 견취는 인과(因果)를 부정하는 견해 등에 대한 집착이다. 계금취는 미신적 행위나 종교적 신조 등에 대한 집착이다. 아취는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이다.
이 네 가지 집착은 현존재를 계속 존재하도록 유지시키고, 거듭 다시 태어나도록 해서 새로운 존재로 이끌기 때문에 갈애와 동등한 고통의 원인으로 제시된다.
윤회의 고통서 벗어나는 길은
가까운 집착부터 내려놓아야
견취(見取)에서 견(見, dr.s.t.i)은 넓게는 ‘철학’이나 ‘사상’의 의미이고, 일반적으로는 ‘사람들이 가진 관점이나 견해(見解)’이다. 깨달은 부처님의 견해는 항상 바르고 원만하며 옳고 진리와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에 ‘정견(正見)’이라고 한다. 진리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법칙성으로서, “모든 것은 서로서로 관련되어 있다”는 연기(緣起)의 법칙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깨달음이 진리와 다르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고 망상(妄想)일 뿐이다. 부처님과 달리 보통 사람들이 갖는 견해는 시시각각 변하고 저마다 자신의 생각이 옳은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보통 ‘견’(見)은 ‘잘못된 견해’를 말하는데,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기 때문에 바른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에 장애가 되고, 괴로움을 초래한다. 일반 사람들은 연기.공(空).무아(無我).무상(無常) 등이 올바른 진리임을 모르고 자신이 떠오르는 생각에 따라서 행동한다.
견에는 유신견(有身見).변집견(邊執見).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견(戒禁取見)이라는 다섯 가지가 있다. 유신견은 인간 존재인 ‘다섯 가지 쌓임’(五蘊)이 변함없이 영원히 존재하는 자아(自我)라고 여기는 견해로서, 자아 또는 자아가 소유한 것에 애착하는 견해이다. 변집견은 올바른 중도(中道)를 떠난 양 극단적인 견해로서, “인간이 죽으면 완전히 사라진다”는 단멸론(斷滅論)과, “항상 변하지 않는 자아가 영원히 실재한다”는 상주론(常住論)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사견은 “원인과 조건이 결합해서 결과가 발생한다”는 연기법을 부정하는 견해로서, 모든 견해 중에서 가장 위험한 견해이다.
견취견은 부처님의 가르침 이외의 외도의 견해나 사고방식을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견해로서, 잘못된 이데올로기나 주장을 바르다고 간주하여 그것에 집착하는 견해이다. 계금취견은 잘못된 견해에 기초하여 잘못된 계율을 뛰어난 계율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을 정당하다고 여기며, 그것에 의해 해탈에 도달할 수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처럼 집착(取)은 인간의 견해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느 순간 그냥 떠오르는 견해가 무조건 옳다고 집착한다. 자신에게 어떠한 견해가 떠오른다면, 우선 개인과 사회공동체, 그리고 여러 제반 사항을 꼼꼼히 따져 보고, 자신의 견해에 대해 객관적인 실증의 잣대를 가지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집착(upa-da-na)의 또 다른 의미는 ‘불의 연료’이다. 이는 마치 ‘휘발유가 다 떨어지면 자동차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는 비유와 같다. 12연기에서 집착은 인간들의 생존(生存)과 재생(再生)을 그대로 유지하게 하는 땔감으로서의 몫을 담당하고 있으며, ‘윤회의 추동력’이다.
사람들이 더 이상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도 집착이 없다면 윤회는 그 자리에서 멈추게 된다. 끊임없는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선 가까운 것에 대한 집착부터 하나씩 놓아 버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⑩ 유(有)의 의미 -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발생 ▲ 위로
집착(取)을 조건으로 존재(有)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항상 무엇인가 ‘집착’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죽으면 ‘중유’(中有)로 머물러 있게 된다. 중유는 생물체가 죽는 순간부터 다음 생(生)을 받기까지의 임시적인 존재이다. 중유는 49일 후에 존재를 받게 된다.
그 존재는 전생(前生)에서 자신이 ‘집착’한 것에 자석처럼 자신도 모르게 달라붙게 된다. 집착은 탐욕.분노.어리석음으로부터 발생한 것이고, 탐욕 등은 살생.도둑질.잘못된 성행위.거짓말.욕설.이간질.사기(詐欺) 등으로 표출된다.
이처럼 집착은 ‘착하지 않은 행위’(不善業)로부터 발생하는데, 전생에서 일으킨 ‘집착’ 때문에 현생(現生)의 존재가 탄생된다. 그래서 ‘착하지 않은 행위’에 의해 윤회(輪廻)는 지속되고, ‘여덟 가지 올바른 길’(八正道) 등 ‘착한 행위’(善業)에 의해 윤회로부터의 해탈이 가능함을 알 수 있다.
팔정도 등 善業에 의해
윤회서 벗어나 해탈 가능
존재는 ‘집착이라는 연료’를 태우는 것을 통해 어머니의 몸에 들어가서 새롭게 재탄생한다. 또한 그것은 존재하려는 갈망에 의해 현 상태의 유지를 보장받는다. 그것은 욕계(欲界)의 존재, 색계(色界)의 존재, 무색계(無色界)의 존재라는 세 가지가 있다.
욕계의 존재는 감각적으로 바라고 희망하는 것이 뛰어난 존재이다. 색계의 존재는 감각적으로 바라는 것은 없지만 아직도 물질적인 것이 남아 있는 존재이다. 무색계의 존재는 물질적인 것이 없어지고 정신적인 것만이 있는 존재이다.
‘욕계의 존재’는 지옥(地獄).아귀(餓鬼).축생(畜生).아수라(阿修羅) 등의 ‘네 가지 나쁜 길’(四惡道), 동불바제(東弗婆提).남염부제(南閻浮提).서구야니(西瞿耶尼).북울단월(北鬱單越) 등의 ‘네 대륙’(四洲), 사왕천(四王天).도리천(利天).야마천(夜摩天).도솔천(兜率天).화락천(化樂天).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등의 육욕천(六欲天)이 있다.
‘네 대륙’은 인간세계이고, ‘육욕천’은 천신(天神)들의 세계이다. ‘색계의 존재’는 초선천(初禪天).범왕천(梵王天).제이선천.제삼선천.제사선천.무상천(無想天).오나함천(五那含天) 등 일곱 가지가 있다.
‘무색계의 존재’는 공무변처천.식무변처천.무소유처천.비상비비상처천 등 네 가지가 있다. 색계와 무색계는 선정 수행 단계이기도 하다.
‘윤회’라고 하면 흔히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인간(人間).천(天)으로서 ‘여섯 가지’(六道)를 말한다. 여기에서 지옥 등의 ‘네 가지 나쁜 길’과, 인간들이 살아가는 ‘네 대륙’은 욕계에 속한다. 그리고 천계(天界)는 그 나머지 육욕천.색계.무색계 모두를 말한다. 지옥은 현세에 나쁜 행위를 한 자가 죽은 뒤에 그 형벌을 받는 고통만이 가득한 세계이다.
아귀는 현세에 복덕(福德)을 짓지 않은 자가 죽어서 늘 굶주림.목마름의 고통에 괴로워하며 가끔 음식물을 얻어도 이를 먹으려 하면 불꽃이 일어나서 먹을 수 없게 되는 굶주린 귀신이다. 축생계는 동물들의 세계이다. 아수라는 언제나 인드라신(帝釋天)과 투쟁하는 나쁜 천신이다.
출가수행자는 윤회에서 완전히 해탈해야 하지만, 재가자의 입장에서는 윤회하더라도 인간계와 천계에서 진행되기를 바라고 지옥 등의 ‘네 가지 나쁜 길’에서는 벗어나기를 열망한다. 그래서 <천수경(千手經)>에는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칼산지옥 내가 가면 칼산 절로 무너지고, 화탕지옥 내가 가면 화탕 절로 말라지며, 모든지옥 내가 가면 지옥 절로 사라지네. 아귀세계 내가 가면 아귀 절로 배부르고, 수라세계 내가 가면 악한 마음 조복되며, 축생세계 내가 가면 지혜 절로 얻게 되네.”
我若向刀山 刀山自折 我若向火湯 火湯自枯渴
我若向地獄 地獄自消滅 我若向餓鬼 餓鬼自飽滿
我若向修羅 惡心自調伏 我若向畜生 自得大智慧
이 게송은 지장보살이 “지옥중생을 모두 구제하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誓願)을 표현한 것처럼 느껴진다.
⑪ 생(生)의 의미 -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발생 ▲ 위로
존재(有)를 조건으로 태어남(生)이 발생한다. 남(男)과 녀(女)가 만나 서로 깊이 사랑하였다. 그래서 여자의 배란기에 남녀가 결합하여 한 생명이 잉태되었다. 어머니의 몸에서 열 달 뒤에 한 아기가 태어났다. 태어난 아기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염색체 중 각각 23씩(합해서 46개) 가지게 되어, 부모(父母)의 유전형질을 각각 절반씩 보유하게 된다.
그러나 그 아기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태어난 아기는 무명(無明)으로부터 발생한 윤회의 사이클을 끊임없이 헤매고 있다가, 부모를 만나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독일의 근대 심리학자 프로이트(1856~1939)는 “남과 녀의 관계인 성(性; Libido)을 모든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능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존재하는 생물체는 누구나 자기종족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생물체의 행위는 모두 자기 종족의 보존을 위한 것과 결부되어 있다. 자신이 성(性)에 의해 탄생한 것처럼, 자신이 성(性)에 의해 후손을 탄생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나 매미가 우는 소리 등이 모두 성적인 것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무명으로 윤회에서 헤매다
부모 만나 태어나게 된 것
이러한 남녀의 성적 결합에 의해 탄생한 아기는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우주 에너지의 변형이다. 우주 에너지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음식’(飮食; a-ha-ra)이다. 음식은 먹고 마시는 실제적인 음식인 단식(段食)과, 정신적인 측면인 촉식(觸食).의사식(意思食).식식(識食)이라는 네 가지가 있다. 존재는 이 네 가지 음식에 의해 스스로 신체와 생명을 기르고 유지시킨다.
초기경전에서는 단식은 ‘사막에서 굶주림을 이겨내고 벗어나고자 어쩔 수 없이 먹을 수밖에 없는 아들 고기’에 비유된다. 한 부부와 그들의 아들이 적은 양식만을 가지고 사막길을 걷게 되었다. 얼마 후 그들은 양식이 다 떨어져서 굶주림에 허덕이자, ‘아들 고기를 먹고 사막을 벗어나자’라고 생각하고 아들을 잡아먹게 된다.
그들은 그 아들고기를 오락이나 흥분상태, 매력, 장식을 위해서 먹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다만 사막의 굶주림을 벗어나려고 어쩔 수 없이 먹게 되는 생존욕구 때문이다. 촉식은 ‘가죽이 벗겨진 소’에 비유되는데 접촉이다.
접촉은 신체와 생명을 양육하고, 희열의 정감을 일으키는 감촉에 의해 신체를 유지시킨다. 의사식은 사고와 의지작용으로서, ‘숯불화로 위에 끌려온 사람’에 비유된다. 사람의 키보다 큰 작열하는 숯불화로가 있는데, 행복을 바라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사람이 힘센 두 남자에 의해 두 손이 잡혀 그 화로 가까이 끌려왔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의지와 거리가 멀다. 그 사람은 ‘내가 숯불화로에 떨어지면 나는 죽음에 이르거나 죽을 정도의 괴로움을 겪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식식은 여섯 가지 인식이 작용하는 것으로서 ‘삼백 개의 창에 찔린 도둑’에 비유된다.
흉악한 도둑을 사로잡아 왕 앞에 데려오자, 왕은 백 개의 창으로 찌르라고 명령한다. 다시 두 번 더 살아나자 각각 백 개의 창을 찌른다. 삼백 개의 창에 찔린 그 사람은 그 때문에 큰 괴로움과 고통을 느낀다.
다시 말하면 우주 에너지는 우리 인간이 먹고 마시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접촉하고 인식한 모든 것이다. 우리 인간이 어떤 영화나 책을 보든,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하든,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든지 모두 우주 에너지를 흡수하는 것이고 동시에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경전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이 우주 에너지인 음식은 고통스러운 윤회를 유발하는 것이므로 되도록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만 섭취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태어남(生)에는 태생(胎生).난생(卵生).습생(濕生).화생(化生)이라는 네 가지가 있다. 태생은 모태에서 태어나는 생물, 난생은 알로 태어나는 생물, 습생은 습기로 태어나는 생물, 화생은 변화하여 태어나는 생물이다. 우리 인간은 태생으로서, 인간계에서만이 윤회를 벗어나 해탈 열반 할 수 있다고 한다.
⑫ 노사(老死)의 의미 - 세상 모든 것은 소멸하기 마련 ▲ 위로
태어남(生)을 조건으로 늙음, 죽음, 근심, 슬픔, 번뇌 등 온갖 괴로움이 발생한다.
어떠한 것이든 발생한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사물들은 발생하고 유지되며 변형되었다가 소멸한다(生住異滅). 우주는 성립되고 유지되며 무너진 뒤에 텅 비게 된다(成住壞空).
현대 우주물리학에서는 현재의 우주는 대폭발 이후에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고 한다. 팽창할 수 있는 한계점까지 팽창한 이후 우주는 다시 수축하고 한 점으로 수축된 이후에는 다시 팽창이 시작된다고 한다. 그래서 우주는 팽창과 수축의 반복이라고 한다.
하루살이에서부터 사자,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죽지 않는 생물체는 없다. 모두 시간의 영향 속에서 죽음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사람도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生老病死). 태어날 때는 피부도 부드럽고 뽀송뽀송하다. 나이가 들면 주름살이 생기고, 팔다리가 딱딱해지며, 머리털은 빠지고, 허리는 휘며, 몸은 비틀거려서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만 한다. 그러다가 결국 땅에 묻히든가, 한줌 재로 사라지게 된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어
우주는 팽창과 수축의 반복
고대 인도에서는 사람의 일생을 범행기(梵行), 가주기(家住期), 임서기(林捿期), 유행기(遊行期)의 네 시기로 나누어 설명한다. 범행기는 스승 밑에서 학습하는 소년시절로서, 현대의 초.중.고등학교 과정에 해당된다. 가주기는 가정에서 생활하며 가장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청년시기이다. 임서기는 가정과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고 숲속에 들어가 은거하는 노년시기이다.
유행기는 숲속의 거처까지 버리고 완전히 무소유로 걸식, 편력의 생활에 들어가는 시기이다. 이 중 임서기와 유행기가 노년기에 해당된다. 노년에는 가정에 경제적 도움이 될 수 있는 노동력을 산출할 수 없고, 다만 다른 가족들에게 의지하며 살기 때문에 가족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 가정을 버리고 숲속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체계가 확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 고려시대에는 늙은 부모를 숲에 버리는 고려장(高麗葬) 풍습이 있기도 했다. 이 임서기 때문에 인도에서 수행자들이 출가하는 생활방식이 정착되었고, 부처님의 출가와 전법교화도 이것으로 설명된다.
‘태어난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점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소크라테스도 죽었고, 공자 예수도 죽었다. 공자는 그의 제자 안회를 먼저 보내면서,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라고 통곡하였다.
부처님도 그 늙음과 죽음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부처님의 상수제자 사리푸트라와 마하목갈라나를 먼저 보내고 나서, “사리푸트라와 목갈라나가 살아있을 때는 우리 승단이 가득찬 것 같았는데, 그 둘이 죽으니 우리 승단이 텅 빈 것 같구나”라고 슬퍼하셨다.
그 석달 뒤에 부처님은 대장장이 춘다의 ‘독버섯요리’를 공양받고, 그 요리는 자신만 달라고 하고는 혼자 드시고 “남은 음식은 땅에 묻으라”고 하셨다. 이것이 부처님의 마지막 식사다. 그러면서 부처님의 제자들이 춘다를 미워할까 염려하고는, “춘다를 비난하지 마라. 여래에게 맨 처음 식사를 대접한 사람과 맨 마지막 식사공양을 드린 사람은 여래의 어머니 같은 사람이다. 춘다를 어머니처럼 모셔라”라고 하셨다.
“부처님, 왜 이리도 늙으셨습니까?”라며 스승의 발을 어루만지면서 격한 슬픔을 토해내는 아난에게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나는 늙었다. 지쳤다. 지금 나는 낡아서 허물어진 수레를 가죽 끈으로 억지로 동여맨 것과 다르지 않다.”
부처님은 당신의 가사를 풀어 메마르고 주름투성이인 몸을 보여주시며 마지막 사자후를 하셨다.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세상 모든 것은 소멸하기 마련이다. 게으르지 말라. 해야 할 일을 모두 이루어라.”
5. 육바라밀
김영진 / 인하대 HK연구교수
① 고통과 번뇌의 강을 건너라 ▲ 위로
불교는 참 다양하다. 기독교의 바이블같이 손에 쏙 들어오는 책 한 권으로 정리할 수가 없다. 그러니 팔만사천법문이라고 하지 않나. 그렇다고 불교인들이 팔만사천법문을 모두 이해하고, 늘 움켜쥐고 다니는 건 아니다. 각자 수지독송하는 경전이 있고, 환희봉행하는 법문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야 작게나마 하나씩 챙길 수 있는 법이다.
꼭 불교인만 그런 게 아니다. 어느 시대 불교라도 과거 불교 전체를 계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전 불교에서 가려 뽑고, 각색도 한다. 때론 이전과 단절하고 새로이 태어나기도 한다. 법고창신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대승불교가 출현하면서도 이런 모습을 보였다. 비록 초기 대승인들이 기존 불교를 소승불교라 폄하하면서 심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그들 안에 이미 과거 불교가 있었다.
대승불교인은 초기불교에선 그리 주목하지 않은 보살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대승불교의 기본 정신으로 삼았다. 보살은 초기불교에선 석가모니불의 전생과 깨달음 이전의 고타마 싯타르타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었다. 또한 보살이 실천해야할 덕목으로 대승불교는 육바라밀을 제시한다.
보살의 여섯가지 실천덕목
불교의 윤리이자 수행방식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 의미
육바라밀은 수행의 방식이다. 또한 그것은 불교의 윤리이기도 하다.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철저히 실천하는 데서 시작한다. 바라밀 실천을 통해서 오온이 모두 공함을 통찰하고, 이로써 집착의 근원을 뿌리째 싹둑 잘라버린다. 그 결과 일체의 고통과 액난을 극복한다. 초기불교의 고집멸도 사성제 구조가 여기서 드러난다.
그럼 바라밀은 뭐고, 거기다 육바라밀은 또 뭔가. 바라밀은 범어 파라미타(pa-ramita-)를 고대 중국인이 소리로 옮긴 것이다. 범어 파라미타는 완성의 뜻이다. 그것을 옮길 경우 도(度)라고 했다. 이 한자는 흔히 물을 건너서 어디에 도착하는 걸 두고 하는 표현이다. 보살이 수행을 통해서 고통과 번뇌의 물을 건너서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함이다.
대승불교는 보살이 실천해야할 덕목인 바라밀의 구체적 내용 여섯을 제시한다. 이것을 흔히 육바라밀이라고 이른다. 육바라밀은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지혜바라밀이다. 초기불교에도 보시나 지계 등 각 개념들이 있었지만 이렇게 바라밀을 뒤에 붙이고 여섯으로 정리되어 보살의 실천 덕목이 된 것은 대승에서다.
보살의 행위는 극한적인 이타행이다. 이 이타행, 즉 선행이나 선의지는 자아나 타자의 강화를 초래할지도 모른다. 이러면 무아가 아니라 유아다. 육바라밀은 윤리적 행위 속에 자아나 타자라는 구도를 세우지 않고 어떠한 의식의 침전물도 남기지 않도록 한다. 달리 말하면 보살행이 결국 대승불교의 철학적 완성인 공을 실천하는 것임을 보인다.
거꾸로 말하면 육바라밀은 공의 윤리인 셈이다. <중론> 같은 글을 읽다가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야?”하고 자문하는 경우가 있다. 비록 <중론> 자체에서는 해답이 없지만 숱한 반야경에서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바보야. 답은 육바라밀이야.” 육바라밀이 공의 실천임을 명심하자. 다음주부터 육바라밀 각각에 대해 알아보자.
② 바라밀 실천과 空 통찰은 맞물려 있다 ▲ 위로
대승불교의 주요한 경전인 <반야경>에서 반야는 ‘반야바라밀’을 가리킨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대승경전 전체가 반야바라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반야바라밀은 육바라밀 가운데 하나를 가리키는 게 아니다. 나머지 다섯 바라밀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반야바라밀이다. <반야심경>에서 말한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실천할 때”는 보시바라밀을 실천할 때이기도 하고, 지계바라밀을 실천할 때이기도 하다.
반야바라밀 혹은 반야가 꽤나 추상적이지만 다섯 바라밀은 구체적인 실천 덕목이다. 그런데 좀더 생각해보면 의문이 든다. 반야면 반야지 왜 반야바라밀이고 보시면 보시지 왜 보시바라밀인가. 보시나 지계 등은 대승불교 이전부터 존재한 개념이다. 그런데 거기 ‘바라밀’이 붙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때부터 대승의 것이 된다. 왜 대승인가.
바라밀이 되려면 철저하게
무집착이 실현되어야 한다
보시가 그냥 보시가 아니라 보시바라밀이 되려면 거기서 철저하게 무집착이 실현되어야 한다. 무집착은 철학적으로는 무자성이나 공의 실현이다. 바라밀은 공에 대한 통찰과 결부된다. 그래서 그것은 반야인 것이다. ‘반야행’이라는 말도 쓰는데 그것은 앎이지만 그 앎은 함을 동반해야 한다. 그러니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실천할 때” 바로 “오온이 모두 공함을 통찰한다”고 <반야심경>은 말한다.
이리 바꿀 수도 있다. “관자재보살이 깊은 보시바라밀을 실천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통찰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이 바라밀인 이유는 바로 무집착을 실현하기 때문이다. 바라밀의 실천과 공의 통찰은 맞물려 있는 셈이다. 이로써 종교적 구원의 능력을 보이는데, “일체 고통과 액난을 극복한다.” 이는 바라밀의 윤리이자 공의 윤리이다.
보시바라밀은 어떤가. 한자 보시(布施)는 범어 다나(da-na)를 번역한 것이다. 베풀다는 의미이지만 종교적으로는 출가 수행자에게 대한 기부행위라고 할 수 있다. 복전(福田)인 수행자에게 음식 등을 공양함으로써 공덕을 쌓은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기본적으로 재가자의 행위여야 한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그것을 보살의 실천 강령으로 제시했다. 무슨 의도일까.
여기서 보살의 성격이 드러난다. 보살은 출가자와 재가자의 경계를 허문다. <유마경>에서 붓다의 제자들이 유마힐에게 보살의 길을 묻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보여준다. 보살이 보시바라밀을 실천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통찰한다 했는데 보시와 오온의 공함은 어떻게 연결되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주상 보시를 생각해보자. 무주(無住)라는 말은 간단히는 ‘붙들지 않는다’고 풀어도 좋다. 과연 뭐에 붙들리지 말라는 건가.
<반야심경>에선 오온을 붙들지 않는다 했다. 오온의 공함을 통찰한다는 것은 바로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걸려들지 않음이다. 이와 관련하여 삼륜 청정 개념을 거론할 수 있다. 보시하는 사람과 보시 받는 사람의 마음이 청정하고 보시하는 물품이 청정해야 한다.
청정하다 함은 무주상하다는 말이다. 적절한 물건이어야 하고 주고받는 사람이 마음에 찌꺼기를 남겨서는 안 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런 노력이 바라밀행이다.
③ 새로운 자기가 되기 위한 ‘자기극복’ ▲ 위로
오늘은 지계바라밀과 인욕바라밀에 대해 살피자. 지계바라밀에서 지계(持戒)는 글자 그대로 풀면 ‘계를 지키다’이다. 그럼 계는 무엇인가. 계는 범어 실라(s´1-la)의 번역이다.
실라는 행위나 습관, 성격, 도덕 등의 의미를 가진다. 뭉뚱그려 말하면 좋은 습관이다. 불교 입장에서 이 ‘좋다’는 말은 인간 일반의 삶에 해당한다기보다는 수행자로서 삶에 해당한다. 그래서 계는 수행자로서 바람직한 삶의 태도인 셈이다.
불교가 제정한 계는 많다. 수행자로서 한 인간은 다양한 면에서 서툴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 조목에서 벌써 불교가 지향하는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계는 이상적인 불교인이 되는 일종의 표지판이다. 그 길을 따라 가면 사고 없이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의 눈에는 지계가 일상의 규율처럼 비칠 수도 있다. 사실 수행공동체에서 그것은 규율이기도 하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다라면 군대나 학교의 규율처럼 계는 그저 집단을 훈육하는 기제 이상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수행일 수 있는 까닭은 지계를 통해서 자기 정화라는 내면적 상승이 있기 때문이다.
지계바라밀과 인욕바라밀
불교적 지향의 ‘태도 바꿈’
자기 정화는 바로 자기 극복이다. <금강경> 식으로 말하면 ‘무주상 보시’뿐만 아니라 ‘무주상 지계’도 가능하다. 지계를 행할 때 지계의 주체와 지계의 내용이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하면 그것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바라밀일 수 없다. 그것이 지계바라밀이 되려면 그야말로 얽매임 없는 지계를 행해야 한다. 얽매임 없다는 말은 계를 깨뜨린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지계바라밀은 지계라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고양시킨다. 자신의 일반적 습속을 극복하여 새로운 자기가 된다. 공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인욕바라밀도 지계바라밀과 마찬가지 구조 속에 놓인다. 인욕바라밀도 자신의 감정이나 습관의 무절제한 표현을 조절함으로써 자기 상승이나 자기 극복을 시도한다.
요즘 같으면 인욕이 회사에서 부하직원이 감내해야할 비굴함 정도로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인욕은 자신의 감정을 때론 지연하고 때론 해소하는 것이다. 인욕바라밀이 되려면, 그것이 공의 실천이 되려면 무시나 핍박을 당할 때 어떤 것도 남기지 않아야 한다. 상대에 대한 분노나 상대에 대한 도덕적 우위라는 의식마저도.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를 극복하여 자기 상승을 맛볼 수 있다.
인욕바라밀은 내게 어떤 일이 발생해도 참고 견딘다는 식이 아니다. 그런 것은 노예 도덕이다. 감정이나 행위의 절제는 분명한 지향이 있어야 하고 또한 그것에 부합해야 한다. 붓다는 코살라국 왕자 비두다바가 군대를 이끌고 카필라바스투를 침공할 때, 군대를 막아 선 적이 있다. 저들의 침공에도 참고 견디는 게 인욕이 아니라 그것을 막으려고 가지 없는 나무 아래서 좌선한 게 인욕이다.
이렇게 지계바라밀과 인욕바라밀은 단순한 자기 억제가 아니라 불교적 지향을 갖고 자신의 태도와 습속을 바꾸는 작업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극복을 이룬다. 멀리는 공의 실천에 닿아 있다. 이들 또한 반야바라밀이라고 할 수 있다.
④ 정성을 다하면 조금씩 ‘전진’ ▲ 위로
열심히 행하는 ‘정진바라밀’
수행과 일상에서 이익 생겨
오늘은 정진(精進) 바라밀에 대해서 살펴보자. 정진은 산스크리트로는 위리야(v1-rya)이다. 어떤 일을 빈틈없이 그리고 열심히 행함이다. 정근(精勤)이라고도 한다. 관음정근이나 석가모니불 정근도 이 한자를 쓴다. 이때는 보통 불보살에 대해 일념으로 행하는 기도를 말한다.
하지만 크게 보면 둘은 그리 다르지 않다. 정성을 다해서 끊임없이 염송하는 가운데 우리는 조금씩 전진한다. 그래서 정진이라고 해도 좋다.
정진은 초기불교에서는 37조도품 가운데 하나로 거론됐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로 선별됐다. 큰 발심으로 수행을 시작하기도 힘들지만 그 발심을 놓치지 않고 실천으로 전환하는 것은 더 어렵다. 마음 한 번 낸다고 일이 성사되는 경우는 없다.
꼭 수행자가 아니더라도 정진은 필요하다. 공부하는 학생이나 직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도 학습이나 작업을 위해서 지겨운 반복과 훈련이 필요하다. 숱한 시행착오에도 동요하지 않고 계속 밀고나가야만 결과를 내는 법이다. 아홉을 채웠지만 하나를 못 채워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만다. 열을 채워야 하면 열한 개를 채운다는 마음가짐으로 일하고 수행해야 한다.
육바라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육바라밀은 공의 실천이라고 했다. 보시가 그렇고 지계가 그렇고 인욕이 그렇다고 했다. 물론 정진바라밀도 마찬가지다. 인욕바라밀은 자신의 욕구나 습속이 일어나는 것을 조절하기에 부정의 방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에 반해 정진바라밀은 나의 능력이 하나나 둘일 것 같은데 실은 열이고 백일 수 있음을 발견하는 방식이다. 긍정의 방식으로 나를 극복하고 공을 실천한다고 할 수 있다.
육바라밀 전체를 정진바라밀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도 있다. 정진바라밀을 크게 신(身) 정진과 심(心) 정진으로 구분하는데 다른 다섯 바라밀을 이 둘에 배치하는 것이다. 보시바라밀과 지계바라밀은 신정진이고 나머지 인욕바라밀과 선정바라밀, 지혜바라밀은 심정진에 해당한다. 몇몇 경론에서는 이 정진의 다양한 이익을 이야기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구도인데, 수행을 하면 그것을 원인으로 결과가 따른다는 것이다.
수행뿐만 아니라 일상 삶에서도 정진의 이익은 분명하다. 때론 노력이 흐트러지기도 하지만 정말 노력한다면 결과는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늘 불안하다. 학생은 공부하면서 이게 과연 시험에 나올까 의심하고, 수행자는 내가 과연 이 화두를 뚫을 수 있을까 의심한다. 이는 공의 실천으로서 정진바라밀이 아니다. 그래서 무주상 보시를 말하듯 무주상 정진도 말할 수 있다.
“과연 할 수 있을까”하는 불안은 늘 우리를 주저앉힌다. 우리는 이런 불안으로 수행의 현장에서, 생사의 기로에서 진도가 나가지 않고 멈칫거린다. 정진바라밀은 자신의 사이즈를 점점 축소시키는 이런 주저함을 부수는 데서 시작한다.
내가 이 밤에 깨달음을 얻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밤의 수행에 한 목숨 걸어야 함은 분명하다. 보살이 정진바라밀로 건너는 고통과 액난은 바로 이런 불안과 의심이라는 한계일 것이다.
⑤ 혼란한 마음을 보듬어 다스림 ▲ 위로
육바라밀 가운데 온전히 수행의 측면만을 다룬 것은 선(禪)바라밀이다. 선바라밀은 선정(禪定)바라밀이라고도 한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듯이 선(禪)은 선나(禪那)의 줄임말이다. 선나는 범어 드야나(dhyana)를 음사한 것이고 드야나는 본래 사유와 명상을 의미한다. 선정에서 정(定)은 삼마디(samadhi)에서 나온 말인데 의식의 집중을 가리킨다.
삼마디는 한자로는 ‘평등지심(平等持心)’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평등’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법적 평등이나 신분상 평등 같은 게 아니다. 그것은 수행과 관련된 말인데, 의식이 오르락내리락 요동치지 않고 안정됨을 말한다. 심장파나 뇌파가 평등하게 수평선을 그으면 죽음을 의미하지만 의식파가 수평선을 그으면 죽음이 아니라 종교적 생을 맞본다고 할 수 있다.
진여평등이라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의식이 이렇게 철저하게 평등한 상황이 되면 실은 깨달음을 완성한 것이다. 그것을 궁극적 실재나 진정한 실존으로서 진여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진여평등이라 쉽게 말하지만 평등이 그리 쉽지는 않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나의 것처럼 생각하지만 마음 한 번 다스리기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마음을 가만히 쳐다보는 것만 해도 실은 수행이 된다.
수행 측면의 선정바라밀
마음을 안정상태로 유지
이렇게 선(禪)이나 정(定)은 기본적으로 수행자가 명상이나 의식 집중을 통해서 마음을 안정된 상태로 유지함을 가리킨다. <대지도론>에서는 선정을 혼란한 마음을 보듬어 다스림이라고 말한다. 물론 세부적인 부분에 들어가면 교리적으로 다양한 이야기가 가능하다. 그래도 혼란한 마음을 다스려 의식의 평정을 얻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마음의 안정이나 의식의 평정은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일까. 간단히 번뇌의 소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의식의 평정이 어떻게 번뇌의 소멸을 견인하냐고 따져 물을 수 있다. 번뇌는 무엇일까. 시험을 앞두고 발생한 교통사고가 번뇌는 아니다. 그 교통사고 때문에 괴로워하고 시험에 낙방할까봐 노심초사하는 게 번뇌다. 시험의 당락이 번뇌가 아니라 그 때문에 일어나는 분노와 혼란 또는 망상 등이 번뇌인 셈이다.
선정은 바로 이런 번뇌를 치료한다. 그래서 선정은 단순한 고요함이나 심신의 안정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좀더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우리 의식의 산란을 다스리려는 시도이다. 선이나 선정이 선바라밀이나 선정바라밀이 되면 어떨까. 굳이 거기에 바라밀이 붙으면 뭐가 달라질까.
<반야경>에서는 “보살마하살은 일체지심이 있기에 방편으로 여러 선정에 들어가지만 각각의 선정에 떨어지지 않고 또한 다른 이들을 교화하여 여러 선정에 들게 하지만 무소득”이라고 한다. 이것을 바로 선바라밀이라고 말한다. 굳이 선바라밀인 이유가 여기에 등장한다.
보살이 보시를 하면서도 일체의 상(相)을 남기지 않듯 보살은 자신이 선정에 들거나 타인을 선정에 들도록 하면서도 결코 상을 남기지 않는다. 이것이 보리심이고 대비심이고, 방편이고 무소득이다. 계속해서 말하고 있지만 육바라밀의 실천은 공의 실천이자 또한 공의 윤리이기 때문이다.
⑥ 대승불교의 실천과 이론을 대표 ▲ 위로
육바라밀 가운데 반야바라밀은 앞선 다섯 가지 바라밀과 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대승경전을 대표하는 반야계 경전이 굳이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을 단 데서도 알 수 있다.
어쩌면 반야바라밀은 대승불교의 실천과 이론을 온통 대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반야바라밀(prajn~a-pa-ramita-)은 무엇인가. 반야(prajn~a-)는 고대 중국에서 지혜로 번역됐다. 그래서 반야바라밀은 지혜바라밀로 불리기도 한다. 이는 하나의 앎이다.
반야는 도대체 무엇에 대한 앎인가. 대승불교에서 반야는 “공에 대한 지혜이며, 집착 혹은 분별을 여읜 지혜이며, 존재의 본질을 직관하는 지혜이다.” 모든 존재자는 연기(緣起)하기에 그것에서 실체적인 무엇을 기대할 수 없다. 이런 통찰로 우리는 존재자에 얽혀서 일으킨 온갖 분별과 번뇌를 씻어 없앤다. 모든 존재자가 실체 없이 공함을 통찰하는 게 반야라 할 수 있다.
공에 대한 앎의 반야바라밀
존재 본질 직관하는 ‘지혜’
용수는 <중론>에서 이 앎을 중(中)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했다. 예를 들면 존재자에 대해서 ‘존재다’ 혹은 ‘비존재다’ 판단하는 행위는 결국 그것을 실체로 파악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사태다. 존재자가 연기한 바라면 우리는 그것을 ‘존재다’ 혹은 ‘비존재다’ 판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라고 할 때도 실체로서 무엇을 상정해야 하고, 비존재라고 할 때도 실체로서 무엇인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한자로 표현하면 제법은 비유(非有)이자 비무(非無)이다. 존재와 비존재라는 두 가지 판단에 대한 이 이중부정을 중(中)이라고 했다. 그래서 <중론>에선 존재자에 대한 통찰을 중도 혹은 중관이라 한다. 이는 세계를 대하는 태도이자 삶의 형식이다. 공에 대한 앎으로서 반야도 마찬가지다. 우리 삶에서 실체론적 판단과 그것에 따른 분별과 번뇌를 척결하는 능력이 반야인 셈이다.
구체적 실천으로서 반야는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하다. 여섯 바라밀 가운데 앞선 다섯 바라밀은 실은 반야바라밀의 실천이다. 보시바라밀이나 지계바라밀은 무아나 무자성의 실현이다. 그것을 통해서 수행자는 끊임없이 상승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다섯 바라밀은 반야바라밀로 수렴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다섯 바라밀 상위에 반야바라밀이 놓인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각각 바라밀에서 반야바라밀이 실현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무주상보시를 실현할 때, 사실 반야바라밀을 실천하고 있고, 인욕바라밀로 내가 내 한계를 허물 때 바로 반야바라밀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실천이 진전되어 궁극적인 한계를 넘을 때, 그것이 완성이고 깨달음이다.
이렇게 보면 반야바라밀은 단지 “사물이 어떻다”는 식의 대상에 대한 앎이 아니다. 반야바라밀은 나를 바꾸는 앎이자 공의 실천인 것이다. 중관이나 공관처럼 굳이 관(觀)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실은 그것이 실천이고 행위함이기 때문이다. 행위의 구체로서 보인 것이 다섯 바라밀이다.
관자재보살이 행하는 깊은 반야바라밀도 다른 게 아니다. 오늘 우리가 얽매이지 않는 보시를 하고, 아니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인욕을 행한다면 결국 그것이 깊은 반야바라밀이자 공의 실천이다. 일체고액은 거기서 소멸한다.
6. 삼법인
이필원 박사 / 동국대 강사
① 제행무상 -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 ▲ 위로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와 믿음이 존재한다. 그 많은 것 가운데 불교를 불교로서 구별 짓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양한 답변들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부터 불교를 불교답게 만드는, 혹은 불교를 비불교적(non-buddhist) 가르침과 구별지을 수 있는 것으로서 삼법인을 들고 있다.
삼법인(三法印)이란 말 그대로 ‘세 가지 진리의 도장’으로 불교적 진리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삼법인’이란 말은 초기 빨리 니까야(nika-ya)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말에 해당하는 빨리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산스끄리뜨어나 티베트어로는 해당 술어를 확인할 수 있다.
니까야에서 용어가 확인되지 않는다고 해서 삼법인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확립된 것으로 알려진 <담마빠다(법구경)>에는 삼법인에 해당하는 내용을 고통을 벗어나 청정에 이르는 길로 설명하고 있다.
분명한 지혜로 관할 때
고통에서 떠날 수 있어
그럼, 이번 주제인 제행무상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제행무상(諸行無常)에 해당하는 빨리어는 “sabbe san.kha-ra- anicca”이다. 이 말은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란 의미이다. <담마빠다>에 나오는 내용을 잠시 인용해 보자.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고 분명한 지혜를 갖고 관할 때에, 사람은 고통에서 멀리 떠나간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깨끗해지는 길이다.” (<담마빠다> 제277게송. <테라가타> 제676게송)
불교는 현실을 고통(苦)으로 본다. 이는 현실의 참 모습을 제대로 통찰하여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보자는 매우 적극적인 자세이다. 고통의 원인은 다양한 것이 있을 수 있으나, 우리가 영원히 우리 곁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느 순간 사라졌을 때의 상실감이 고통을 야기하는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나의 이 빛나는 청춘은 영원할 것이야!’, ‘나는 언제나 건강할거야!’, ‘나는 영원히 아름다울 것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것이야!’,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고 늘 내 것으로 존재할 것이야!’ 등등이 우리들이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는 생각들이다.
물론 이성적으로는 ‘나도 언젠가는 늙고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 그것을 확고한 사실로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은 매우 적다. ‘나도 언젠가는 늙고 죽을 것이다’라고 확고하게 인식하는 것이 바로 ‘지혜’인 것이다.
이러한 지혜를 확고하게 지닌 사람이 사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이 보이는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다. 주자학을 대성시킨 남송시대의 주희(朱憙, 1130~1200)의 시 가운데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이라도 헛되이 보내지 말라.”라는 싯귀가 있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바르게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된다. ‘모든 것은 덧없이 변하니,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여라.’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은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무상한 것을 무상하다고 아는 사람만이 모든 것을 소중하고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고, 반대로 모든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과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인지 모른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② 일체개고 - 모든 형성된 것은 고통이다 ▲ 위로
삼법인의 내용은 경전별로 다소의 차이를 보이는데, 그 차이는 바로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는 경우이다. 경전상에서는 제행무상.제법무아.열반적정이 더 일반적인 용례로 나온다. 여기에 일체개고를 덧붙여 사법인(四法印)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담마빠다>에서는 일체개고를 넣어 삼법인의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어, 필자는 이에 따르고자 한다. 그 이유를 간단히 밝히면, 불교의 출발은 ‘苦(고통, dukkha)’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 호에서도 간단히 언급했지만, 현실인식의 결과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딛고 있는 이곳의 실상을 고통이 가득 찬 세상이라고 인식하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고통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거나 초월하거나 제거함으로써 우리는 그 결과로서 ‘열반(nibba-na, 涅槃)’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한 지혜 갖고 관할 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
<담마빠다>에서 일체개고는 다음과 같이 설해지고 있다.
“모든 형성된 것은 고통이다’(일체개고)라고 분명한 지혜를 갖고 관할 때에, 사람은 고통에서 멀리 떠나간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깨끗해지는 길이다.” (<담마빠다> 제278게송. ‘테라가타’ 제677게송)
이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고통에 대해 분명한 지혜를 갖고 관할 때에 고통에서 벗어나 안락에 이를 수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하는 것이 바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선언한 것이기도 하다. 고통을 바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지 우리는 <숫따니빠따> 724게송에서 727게송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통을 알지 못하고, 또 고통이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또 고통이 남김없이 사라진 것도, 또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숫따니빠따> 제724게송)
그들은 마음의 해탈이 없고, 또 지혜의 해탈이 없다. 그들은 (윤회를) 끝낼 수 없다. 그들은 참으로 나고 늙음을 받는다. (<숫따니빠따> 제725게송)
그러나 고통을 알고, 또 고통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또 고통이 남김없이 멸하는 것을 알고, 또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아는 사람들 (<숫따니빠따> 제726게송)
그들은 마음의 해탈을 구현하고, 또 지혜의 해탈을 구현한다. 그들은 (윤회를) 끝낼 수 있다. 그들은 나고 늙음을 받지 않는다. (<숫따니빠따> 제727게송)
부처님이 고통을 강조하신 이유는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추구해야 할 당위성을 보여주기 위함이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일체개고의 가르침은 사실은 고통에 방점이 놓인 것이 아니라 해탈에 방점이 놓여 있는 것이다.
고통을 보지 못하면 해탈에 대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상의학의 체계를 세운 동무 이제마(1837~1900)는 “낮을 보지 않으면 밤에 대해 알 수 없고, … 진실을 보지 못하면 거짓에 대해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이 고통을 강조한 부처님의 뜻을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다.
③ 제법무아 - 모든 사물엔 ‘자아’가 없다 ▲ 위로
절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바른 지혜로 욕망사슬 끊어야
삼법인이라 하면, 일체개고 대신 일반적으로 열반적정을 넣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앞서 언급했다. 고통은 현실인식이지만, 열반적정은 모든 고통이 소멸된 결과로서 획득되는 결과이다.
열반이란 번뇌가 완전히 사라져 고요한 적정(寂靜)의 경지이며, 번뇌에 의해 다시는 오염되지 않는 완전한 청정(淸淨)한 경지를 의미한다. 일체개고는 부정의 뉘앙스가 강하지만, 열반적정은 긍정의 뉘앙스가 강하다.
삼법인에서 일체개고 대신에 열반적정을 넣는 경우는 경전 편찬자들이 아마도 부정적인 내용보다는 추구해야 할 긍정적 요소를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삼법인 가운데 다른 사상이나 종교와 가장 극명하게 차별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자아관념을 부정하는 제법무아의 가르침일 것이다. 제법무아는 개인적인 자아의 부정과 동시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게는 그것의 영원불변한 실체가 없다는 것을 포함하는 가르침이다. <담마빠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제법무아를 설하고 있다.
“모든 사물에는 자아라 할 만한 것이 없다’(제법무아)고 분명한 지혜를 갖고 관할 때에, 사람은 고통에서 멀리 떠나간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깨끗해지는 길이다.” (<담마빠다> 제279게송, <테라가타> 제 678게송)
한편 무아(無我)는 비아(非我)라고도 번역된다. 일부 학자들의 경우 비아라고 번역할 경우 어떤 자아(영혼)가 긍정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부처님은 인간을 오온(五蘊), 즉 다섯 가지 요소들의 집합이라고 설하셨기 때문이다.
오온이란 색(色, 물질), 수(受, 감각작용), 상(想, 개념작용), 행(行, 의지작용), 식(識, 식별작용)이다. 무아가 되었든, 비아가 되었든 의미상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은 이 다섯 가지 이외에 여섯 번째를 불교에서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관념의 부정은 의식의 근원에 자리한 소유의 뿌리를 제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진리의 관점에서 보면 ‘나(我)’와 ‘나의 것(我所)’이라고 집착할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제시한 것이다. 이를 경전 <맛지마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색 수 상 행 식(五蘊)은 무상하다. 그리고 무상한 것은 고이다. 고인 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그것은 내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 같이 이것을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로 보아야 한다.”
우리들은 늘 무엇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가 있다고 믿는다. 아니 솔직하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의 지혜의 눈을 가리고 있는 망상이 된다. 영원한 삶을 꿈꾸는 것 역시 다섯 가지(오온) 이외에 여섯 번째가 존재한다고 맹목적으로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는 한 우리는 욕망의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절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바른 지혜의 칼로 욕망의 사슬을 끊어 버려야 한다. 그러한 금강석의 지혜를 부처님은 삼법인의 내용으로 요약하여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다.
7. 사무량심
최원섭 / 성철선사상연구원 전임연구원
① 중생 구제의 네가지 불보살 마음 ▲ 위로
‘사무량심(四無量心)’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불보살께서 중생들을 구제하실 때 품고 있는 한없는 네 가지 마음이다. 구체적으로는 한없는 ‘자(慈)’의 마음, 한없는 ‘비(悲)’의 마음, 한없는 ‘희(喜)’의 마음, 한없는 ‘사(捨)’의 마음의 네 가지이다.
네 가지 마음 각각의 자세한 설명은 다음에 하기로 하고 우선은 네 가지 마음 전체의 의미를 이야기해 두자.
보통 사무량심은 보살의 수행 덕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미 초기불교 경론에도 ‘사무량심’이라는 말은 물론 구체적인 설명이 보이기 때문에 대소승을 가리지 않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르게는 ‘사등심(四等心)’이나 ‘사등지(四等至)’ 등으로도 부른다.
<중아함경> 권21 ‘장수왕품(長壽王品)’에서 부처님께서는 “아난아, 나는 본래 너를 위하여 사무량심을 설하였다. 비구는 마음을 ‘자(慈)’와 함께 있게 하여 … 일체에 널리 두루하게 한다. … 이와 같이 ‘비(悲)’와 ‘희(喜)’와 ‘사(捨)’도 함께 있게 하여 … 일체 세간에 두루 가득 차게 성취하라. … 평온함을 얻고 힘을 얻으며 즐거움을 얻어서 몸과 마음이 번뇌로 더워지지 않고 종신토록 범행(梵行)을 하리라”고 하셨다.
자·비·희·사 ‘한 없는 마음’
‘사등심’.‘사등지’로도 불려
사무량심이 자기 수행을 하는 과정에서 중생을 향해 갖추어야 할 마음으로 설명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사무량심의 의미를 바탕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중생을 구제하는 자가 갖추어야 할 마음으로 그 강조점이 전환되면서 대승보살의 수행 덕목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왜 사무량심은 ‘무량(無量)’할까? <구사론>과 <대지도론>에서는 중생이 한없기 때문이고, 사무량심이 불러오는 복(福)이 한없기 때문이며, 그에 따르는 결과가 한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없이 많은 보살이 한없이 많은 중생을 만나서, 만나는 중생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이 바로 한없는 네 가지 마음의 의미이다.
육바라밀이나 사섭법도 마찬가지이지만, 사무량심을 특별히 순서를 따라 갖추어야 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사무량심의 각각의 마음이 어떤 한 가지 마음을 네 부분으로 나눈 일부이거나 네 가지 측면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네 가지 중의 한 가지 마음을 완전히 갖추는 일이 바로 나머지 세 가지도 동시에 성취하는 것이다. 한없는 ‘자(慈)’의 마음을 갖추면 저절로 한없는 ‘사(捨)’의 마음까지도 완전히 성취한다는 뜻이다.
사무량심이 중생을 구제하는 불보살의 마음이라는 점 때문에 보살과 중생을 따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논리를 넘어 이미 모두가 부처라는 논리로 보면, 구제하는 보살도 구제받을 중생도 이미 부처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랄 것 없이 모두가 사무량심을 갖추고 살아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모두가 이미 부처인 상태에서 갖추는 사무량심이란, 나 스스로 부처라는 자각 속에 지금 눈 앞에서 만나고 있는 누구나에게 한없는 네 가지 마음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처럼 모두가 부처로 사는 세상에서 사무량심은 단순히 보살의 수행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펼쳐내는 행동이다.
② 세상의 고통을 소멸시켜라 ▲ 위로
‘사무량심(四無量心)’은 한없는 ‘자(慈)’의 마음, 한없는 ‘비(悲)’의 마음, 한없는 ‘희(喜)’의 마음, 한없는 ‘사(捨)’의 마음의 네 가지이다. 먼저 한없는 ‘자(慈)’의 마음과 한없는 ‘비(悲)’의 마음의 두 가지를 이야기해 보자.
‘사무량심’을 이야기할 때는 ‘자(慈)’와 ‘비(悲)’로 나누지만 보통은 ‘자비’라는 한 단어로 쓰이며 불교를 대표하는 말이 될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는 마음이 바로 한없는 ‘자(慈)’의 마음과 한없는 ‘비(悲)’의 마음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에서 “자(慈)에는 여락(與樂)의 행상(行相)이 있고, 비(悲)에는 발고(拔苦)의 행상이 있다”고 정의를 내리고 있듯이, ‘자(慈)’의 마음은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비(悲)’의 마음은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이라는 설명이 가장 일반적이다. 이런 특성을 살려 영어권에서는 ‘자(慈)’와 ‘비(悲)’를 각각 ‘자애’와 ‘연민’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돕겠다는 마음을 낼 때에는 그 사람을 향한 자애와 연민의 마음이 기본일 것이다. 그 사람의 상황을 가련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애와 연민의 바탕에는 동감이 있다. 나도 겪어본 괴로움이어서 어떻게 벗어났는지를 이야기해줄 수 있고, 나에게도 닥칠 수 있는 어려움이어서 그 사람의 상황이 남의 일이 아니다.
괴로움 없애야 즐거울 수 있고
즐거움 주어야 괴로움 사라져
그래서 불보살께서 중생에게 펼치는 구제의 방편에서 가장 기본적인 일이 바로 지금 말하고 있는 자비, 즉 괴로움을 없애고 즐거움을 주는 일이다. 불보살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살필 수 있는 대지혜(大智慧)를 갖추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갖춘 불보살의 위신력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이다.
사무량심의 한없는 ‘자(慈)’의 마음과 한없는 ‘비(悲)’의 마음은 서로가 서로의 바탕이 된다. <대승의장(大乘義章)>에서는 “자(慈)의 마음으로 즐거움을 주려고 해도 비(悲)의 마음으로 괴로움을 없애지 않으면 즐거움을 주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비(悲)의 마음으로 괴로움을 없애야 즐거움을 주는 일이 비로소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悲)의 마음이 자(慈)이 마음의 바탕이 된다. 비(悲)의 마음으로 괴로움을 없애주려고 해도 자(慈)의 마음으로 즐거움을 주지 않으면 괴로움은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자(慈)의 마음으로 즐거움을 주어야 괴로움이 비로소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慈)의 마음이 비(悲)이 마음의 바탕이 된다”고 한다.
괴로움을 없애는 일과 즐거움을 주는 일이 서로 다른 일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괴로움을 없애야 즐거움을 줄 수 있고, 즐거움을 주어야 괴로움이 사라진다는 말을 통해서, 전하려는 의미는 한없는 ‘자(慈)’의 마음과 한없는 ‘비(悲)’의 마음이 결국은 같은 마음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크기가 아무리 작아도 겪고 있는 사람에게는 괴로움이란 한없이 크고 힘든 법이다. 그런 괴로움을 완전히 없애주는 일, 그것이 바로 세상의 괴로움이 사라진 완전한 즐거움을 주는 일인 셈이다.
③ 남이 짓는 공덕을 함께 기뻐한다 ▲ 위로
‘사무량심(四無量心)’의 세 번째는 한없는 ‘희(喜)’의 마음이다. ‘희(喜)’의 기본적인 의미는 ‘희수(喜受)’이다. ‘희수’는 5온에도 포함되어 있는 ‘수(受),’ 즉 감수작용 중의 하나를 말한다.
흔히 감수작용은 다섯 가지로 설명한다. 몸으로 괴롭다고 느끼는 ‘고수(苦受)’와, 몸으로 즐겁다고 느끼는 ‘낙수(樂受),’ 마음으로 괴롭다고 느끼는 ‘우수(憂受)’와, 마음으로 즐겁다고 느기는 ‘희수(喜受),’ 그리고 좋음과 나쁨의 구별이 없는 ‘사수(捨受)’이다. ‘희수’는 바로 대상과 접촉할 때 마음으로 느끼는 즐거움, 기쁨 등의 긍정적인 감수작용을 말한다.
<구사론>에서는 이러한 ‘희(喜)’의 마음으로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의 장애를 ‘기뻐하고 위로하지 않는 마음(不欣慰)’이라고 설명한다. 무엇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내 일은 누구나 기뻐하지만 남의 일까지 기뻐하기는 쉽지 않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에게 기쁜 일이 생겼을 때이다. 다른 사람에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기뻐해주지 않는 마음, 즉 질투심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희’의 마음이다.
깨달음을 구하는 넓고 큰
공덕을 모두 기뻐하는 것
다른 사람의 기쁜 일을 함께 기뻐하라는 의미를 조금 더 강조하는 것이 바로 <화엄경>의 보현행원(普賢行願)이다. 특히 보현행원 중의 다섯 번째인 ‘수희공덕원(隨喜功德願)’은 ‘사무량심’의 한없는 ‘희(喜)’의 마음을 이야기할 때는 전형이 되다시피 했다.
“남이 짓는 공덕을 함께 기뻐한다는 것은 … 모든 부처님께서 처음 발심하실 때로부터 일체지를 위해 부지런히 복덕을 닦되, 몸과 목숨을 돌보지 않기를 … 일체 난행 고행으로 가지가지 바라밀문을 원만히 하며, … 모든 부처님의 위없는 보리를 성취하며 내지 열반에 드신 뒤에 사리를 분포하실 때까지의 모든 선근을 내가 다 함께 기뻐하며, … 일체 종류 중생들의 짓는 공덕을 … 모두 함께 기뻐하며, 시방삼세의 일체 성문과 벽지불인 유학 무학 … 보살들이 … 무상정등보리를 구하는 넓고 큰 공덕을 내가 모두 기뻐하는 것이니라.”
그럼, 남에게 나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까? 그럴 때는 함께 걱정하고 위로해주는 것이 ‘희’의 마음이다. 그래서 ‘희’의 마음으로 ‘기뻐하고 위로하지 않는 마음’을 극복한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한없는 ‘희’의 마음도 결국은 ‘사무량심’의 앞의 두 가지, 한없는 ‘자’의 마음과 한없는 ‘비’의 마음과 그 특성이 다를 것이 없다. 그래서 <대승의장>에서 ‘자비’와 ‘희’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자(慈)와 비(悲)가 함께 희(喜)의 바탕이 된다. 자(慈)의 마음으로 즐거움을 주려고 하고 비(悲)의 마음으로 괴로움을 없애주려고 해도, 희(喜)가 질투의 마음을 없애주지 않으면 즐거움을 주거나 괴로움을 없애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희(喜)의 마음을 바탕으로 삼아야 자(慈)와 비(悲)가 이루어진다. 희(喜)의 마음으로 대상을 기쁘게 하려하지만 자(慈)와 비(悲)가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을 없애주지 않으면 기쁠 것이 없다. … 그러므로 자(慈)와 비(悲)가 바탕이 되어 희(喜)의 마음을 이룬다.”
④ 사(捨) -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평등함 ▲ 위로
‘사무량심(四無量心)’의 마지막은 한없는 ‘사(捨)’의 마음이다. ‘사(捨)’의 기본적인 의미는 한없는 ‘희(喜)’의 마음을 설명할 때와 마찬가지로 감수작용(受) 중의 ‘사수(捨受)’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사수(捨受)’가 괴로운 느낌도 아니고 즐거운 느낌도 아닌 평등한 느낌이라고 하듯이 ‘사(捨)’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평등함을 말한다.
사람을 평등하게 대한다는 것은 버리거나(簡) 나누거나(別) 미워하거나(怨) 좋아하거나(親)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이렇게 대하려면 탐심(貪心)이 없어야 한다고 <구사론>은 설명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다르게 대한다는 것은 나에게 필요한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나의 탐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조금 더 생각하면 사람을 평등하게 대한다는 것은 서로가 대등한 위치에서 만난다는 말이다. 남보다 조금 나은 것이 나에게 있어서 그것을 차별 없이 남에게 고루고루 나누어 준다는 것으로는 진정한 ‘사(捨)’의 마음일 수 없다.
상대와 내가 전혀 다를 것
없다고 보는 한 없는 마음
상대에게 모자란 것이 있다면 나도 그것이 모자랄 것이라는 마음, 또 나에게 남는 것이 있다면 상대도 남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마음, 즉 상대와 내가 전혀 다를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한없는 ‘사’의 마음이다. 이렇게 보면 ‘사’의 마음이 ‘자’의 마음이자 ‘비’의 마음이고 ‘희’의 마음이다.
이런 점을 <대승의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자(慈)’의 마음으로 즐거움을 주고 ‘비(悲)’의 마음으로 괴로움을 없애주며 ‘희(喜)’의 마음으로 기쁘게 해주려고 해도, ‘사(捨)’의 마음이 없으면 두루 이익을 줄 수 없다. ‘사’의 마음으로 장애물을 없애고 나서야 비로소 즐거움을 골고루 주고 괴로움을 모두 없애주며 고르게 기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한없는 ‘사’의 마음은 이전 세 가지 한없는 마음의 바탕이 된다.
또한 ‘사’의 마음으로 두루 이익을 주려고 해도 세 가지 한없는 마음으로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을 없애며 함께 기뻐해주지 않으면 도대체 무엇이 평등한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이전의 세 가지 한없는 마음은 한없는 ‘사’의 마음의 바탕이 된다.”
‘사무량심’의 어느 한가지라도 지극한 마음이면 한없는 네 가지 마음을 모두 성취한 것이다. 이것이 ‘사무량심’으로 그칠 뿐일까? 한가지에 지극하면 불보살의 마음 전체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무량심’이 중생을 구제하는 불보살의 마음인 것은 분명하지만 스스로 구제받아야 할 중생이라는 마음으로 불보살의 가피(加被)만을 바라보며 살지는 말자. 남들과 차별없이 동등하게 사는 삶의 기준을 중생 수준에서 부처의 수준까지 높이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모두가 부처로서 서로서로 ‘사무량심’의 마음으로 살면 ‘사무량심’은 불보살께 내가 받아야 할 가피가 아니라, 이미 부처인 내가 또 다른 부처인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해서 부처의 행동을 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바로 불국정토가 아니겠는가?
8. 사섭법(四攝法)
석길암 / 금강대학교 인문한국연구센터 교수
① 보시섭 - 보살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덕목 ▲ 위로
인간은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리고 더불어 함께하는 삶이 아름답도록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의 네 가지 사섭법은, 더불어 함께하는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행해야 하는 조건들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여기에서 ‘섭(攝)한다’는 것은 ‘보살이 고통받는 중생을 포용해서 중생들로 하여금 친애하는 마음을 들도록 하고, 보살을 신뢰하게 하며, 나아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사섭법은 그러한 행위 내지는 조건들을 설명한 네 가지 기본적인 실천덕목이라는 말이다.
일반 불자의 경우에는, 타인을 보살피고 애호해주면서 행복한 사회생활을 만들도록 하는 네 가지 미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보살에게는 중생교화의 덕목이며, 일반인에게 있어서는 행복한 공동체를 위한 덕목인 것이다.
그 중에서 먼저 보시섭(布施攝)에 대해서 살펴본다. 보시섭은 보시섭사(布施攝事), 보시수섭방편(布施隨攝方便), 수섭방편(隨攝方便) 혹은 혜시(惠施)라고도 한다. 본래의 뜻은 ‘주는 것으로 섭수하는 실천덕목’이라는 의미이다.
중생에게 필요한 무엇인가를 제공하여 이익을 얻게 함으로써 보살을 친근하게 느끼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는 까닭에 보시섭이라고 한다. 중생을 교화하는 핵심으로 보시방편을 주로 사용할 때 보시섭이라 한 것이므로 보시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조건 없는 보시를 하면서도
중생을 佛法으로 이끌어야
보시란 경전 전반에 걸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고, 일반인들의 경우 역시 어떤 불교용어보다도 흔하게 사용하는 말이다. 보시는 범어 da-na의 음역으로, 한문으로 옮길 때는 단나(檀那), 타나(那), 단(檀)이라고 음사하였으며, ‘베푼다’는 뜻이다.
보통하는 보시하는 내용에 따라서 재물을 주는 경우(財施)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경우(法施), 그리고 천재지변이나 병고와 같은 온갖 두려움을 없애주는 경우(無畏施) 등으로 보시를 나눈다.
경전에는 보시의 결과로 시주자(施主者)에게 돌아올 공덕이나, 예전에 보시한 공덕이 현재의 어떤 결과로 나타났는지를 설명하는 내용들을 많이 소개하여 보시를 권유하는 전범으로 삼는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보시섭에서 무엇보다도 강조되는 것은 보시하는 마음가짐인데, 주는 자와 받는 자 그리고 주는 내용이 본질적으로 공한 것이어서 아무런 집착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된다.
그러나 보시섭에서는 의미의 확장이 이루어지는데, 보살이 보시를 통해서 중생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이끌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반에게 적용할 때도 마찬가지인데, 함께 더불어서 잘 살기 위한 조건을 충족한다는 목적의 하나로 보시라는 행위가 받아들여져야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보시섭은 조건 없는 보시를 하면서도 중생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보살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역량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보시라는 행위가 무조건(무소유)이라는 조건에 충실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것을 일반화시켜 보면, 보시라는 행위에 있어서 도를 넘어선 시여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② 애어섭 - 사랑스런 말로 섭수하는 것 ▲ 위로
더불어 함께하는 삶이 아름답게 만드는 조건의 두 번째는 애어섭(愛語攝)이다. 애어섭은 애어섭사(愛語攝事), 애어섭방편(愛語攝方便), 능섭방편(能攝方便) 혹은 애언(愛言)이라고 하는데, 본래의 뜻은 ‘사랑스런 말로 섭수하는 것’이다. 보살이 중생을 보살피고 함께 어우러지며, 그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이끄는 교화방편의 핵심으로 ‘애어(愛語)’ 곧 사랑스러운 말을 사용하는 것을 일컫는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기준으로 한다면, 공동체 내에서의 의사소통에 있어서 필요한 실천덕목으로 부드러운 언어생활, 상대방을 배려하는 언어생활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보살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중생을 염려하며 평화로운 시선과 미소로 부드러운 말을 사용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중생 혹은 타자는 자신에게 부드럽고 배려하는 태도를 보이는 보살 혹은 상대방을 신뢰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그에게 귀기울이게 된다.
보살은 그 연후에야 중생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여, 중생이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실천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며, 또한 언어에 의지하여 중생이 맞닥뜨리고 있는 어리석음을 깨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상호간의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면, 상대방은 그것을 오히려 비난으로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흔히 발생한다. 상호간의 신뢰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지적이기 때문에 쉽사리 비난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언어생활
언어에 의지 어리석음 깨치게
이 상호간의 신뢰, 중생이 서슴없이 의지하고픈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 기본 조건의 하나로 언어생활에 있어서의 부드러운 말, 사랑스러운 말에 의한 섭수를 말하는 것이 바로 애어섭인 것이다. 곧 교화방편의 핵심이 ‘애어’인 것이며, 이것은 수동적인 입장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입장에서 사용하는 섭수의 방편이다.
불교에서는 언어생활의 중요성을 부단히 강조한다. 팔정도의 정어(正語)가 그렇고, 거짓된 말(妄語) 듣는 사람 앞에서 잠깐씩 좋게 꾸며대는 말(綺語) 이간하는 말(兩舌) 악한 말(惡口) 등 열 가지 악한 행위에 네 가지나 되는 잘못된 언어생활의 예를 들고 있는 것도 역시 같은 연장선상에서 이해된다.
불교에서 바른 언어생활이라는 것은 동체대비심으로부터 우러러 나오는 언어에 기반한 생활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것은 반드시 듣기 좋은 말만을 상대방에게 하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동체대비심으로부터 우러난 언어는 중생을 바른 길로 이끈다는 전제 위에서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어섭은 단순히 사랑스런 말, 부드러운 말이라기보다는 상대방으로부터 진정한 신뢰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언어생활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이것이 상대방으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한 언어생활이 아니라는 것은 물론이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며 그 안위를 염려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한 부모가 자식을 바른 길로 이끄는 데 있어서 언어 역시 그 중요한 방편 중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곧 언어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직접적인 방편의 하나인 것이며, 그때의 언어는 부모에게 맞추어진 언어가 아니라 자식에게 맞추어진 언어라야 하며, 그래야만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이해하고 신뢰하며 따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 셈이다.
곧 부모의 언어가 ‘애어’라야 자식은 좀더 쉽게 그리고 진정으로 부모의 울타리에 안주할 수 있게 되는 이치가 애어섭에 들어있다.
③ 이행 - 부처님께 공양하듯 베풀어라 ▲ 위로
더불어 함께하는 삶이 아름답게 만드는 조건의 세 번째는 이행섭(利行攝)이다. 이행섭의 뜻은 ‘이익이 되는 행위로써 중생을 포용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다르게는 이행섭사(利行攝事), 이익섭(利益攝), 영입방편(令入方便), 도방편(度方便), 이익(利益), 이인(利人)이라고도 부른다.
중생을 더불어 함께하는 삶이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동참하도록 이끄는 방편 중에 이것보다 더 직접적인 조건은 없을 것 같다. 괴로움에 빠져 있는 중생에게 실제로 이익을 베풀고, 그 이로움 때문에 중생이 보살에게 의지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으로, 이익에 의한 섭수는 항상 자신의 이익을 바라는 중생의 속성에 가장 잘 부합하는 섭수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보시섭도 애어섭도 모두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지만, 이 이행섭은 좀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사섭법은 모두 중생이 처한 현실에 맞추어 보살이 대응하여 방편을 베푸는 행위로써 섭수한다는 의미가 있는 만큼,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보살이 중생을 위해 베푸는 행위 중에서 특히 이롭게 한다는 성격이 강조된 조건이 바로 이행섭(利行攝)이라 할 것이다.
괴로움에 빠져 있는 중생에게
이익 베풀며 佛法 전하는 행위
단 그것이 현실에서의 이익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행위가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 사섭법이라는 조건 자체가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고, 믿고 귀의하여 그 가르침대로 실천함으로써 아름다운 삶에 동참하도록 이끄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곧 탐욕스러운 자에게는 그 탐욕스러움을 버리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이로움을 베푸는 행위가 되며, 더불어 나누는 삶을 살고 있는 자에게는 그러한 삶이 지속되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바로 이행섭이 되는 것이다.
중생은 자기중심적인 갈망으로 가득한 존재이다. 그것은 때로는 철저히 이기적인 행동방식으로 나타난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은 자기 자신과 세계를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과 세계를 별개로 인식하는 순간, 모든 행위들은 자기만을 위한 행위로 귀결된다.
상대방이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면 상대방을 멸시하는 행동으로, 상대방이 자기보다 우월하다고 생각되면 시기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더불어 함께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이 행동의 초점이 되는 것이다.
남을 이롭게 하는 행위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그 행위로부터 때로는 자신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환상에 굴복당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남을 이롭게 한 행위로 인해서, 자신이 남보다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며, 자신이 구원자와도 같다고 여기는 인식을 더하는 것이다. 동체(同體)의 정신에서 출발한 자비심이 어느새 자만심으로 변질되어 애초의 의도를 어그러뜨리는 것이다.
이행섭은 물론 사섭법 전체는 동체대비의 정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자기중심성의 과도한 확장은 늘 역설적으로 자기존중이 지닌 건전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개개 개체들이 지닌 고귀함과 완전성을 망각하는 순간, 우리가 행하는 이행하여 거두어들이는 행위들은, 오히려 함께하는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는커녕 그러한 삶을 가로막고 망가뜨리는 행위들로 작용하게 된다. 곧 이행섭은 우월한 자기인식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온전한 존경심으로부터 출발하는 행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화엄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방세계 중생들이 여러 가지로 차별된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부처님께 공양하듯이 받들고, 병든 이에게는 어진 의원이 되고 길 잃은 이에게는 바른 길을 가리키고, 가난한 이에게는 보배를 얻게 하나니, 보살은 이와 같이 모든 중생을 평등하게 이익 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살이 중생을 수순하면 부처님을 수순하며 공양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④ 동사 -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실천행 ▲ 위로
더불어 함께하는 삶이 아름답게 만드는 조건의 네 번째는 동사섭(同事攝)이다. 동사섭사(同事攝事), 동사수순방편(同事隨順方便), 수순방편(隨順方便), 동리(同利)라고도 하는데, 보살의 동체대비심에 근거를 둔 것으로 ‘함께 일하고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서 중생들을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이끄는 것’을 말한다.
보살은 밝은 안목을 가지고서 중생의 근기를 비추어 보고 중생이 하는 일에 똑같이 동참하여 도움을 주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이끈다. 그러면 중생은 자신의 일에 동참하는 보살의 도움을 받으면서 친애하는 마음을 일으켜 의지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보살이 전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핵심은 ‘같은 목적의 일에 함께 참여한다(同事)’는 점에 있다.
같은 목적의 일에 함께 참여할 때의 원천은 동체대비심이다. 보살이 중생을 자신처럼 여기고, 중생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여기는 것이 출발점인 것이다. 여기에 ‘이끈다’ ‘교화한다’고 하는 우월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생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처럼 받아들이고, 중생이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하는 일에 동참하여 자신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것처럼 일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일방적인 베품이 아니라 중생이 나아가는 바람직한 방향에 자신의 힘을 보태어 거든다는 것이며, 거들 때조차도 도와주는 자의 입장이 아니라 더불어 삶을 함께 하는 동참자로서의 입장이 선행되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함께 일하고 함께 생활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전하는 것
이와 같이 동사섭은 보살이 중생과 일심동체가 되어 고락을 함께 하고 화복(禍福)을 같이 하면서 그들을 깨우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실천행(實踐行)이라는 점에서, 보시.애어.이행의 세 가지 섭사(攝事)보다는 더욱 적극적이다. 바람직한 일은 동참해서 더욱 일을 잘 되게 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일은 그 일로부터 더욱 쉽게 물러날 수 있도록 돕는다.
보살이 현실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중생과 함께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적극적으로 사회적 삶의 조건을 바꾸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동사섭은 어떻게 보면 사섭법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기를 바꿈으로서 남을 바꾸고, 남을 바꿈으로서 자기를 바꾼다는 좀더 사회적 차원으로 삶의 조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확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사섭 공동체 행복마을’을 이끄는 용타스님 같은 분은 화합(和合) 곧 더불어 함께하는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화합에 이르는 ‘세 가지 길’[和三要]을 제시한다. 보는 눈을 책임지고, 보이는 모습을 책임지고, 잘 교류한다(나눔)는 세 가지이다. 공동체 구성원의 긍정적인 모습을 보고자 노력하고, 상대방에게 긍정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서로의 생각을 소통하는데 모자람이 없다면, 그 공동체야말로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논리로 보이지만, 그 지극히 당연한 것을 행하지 않는 것이 또한 우리 중생들인 것이다. 보살이 애써 더불어 함께하는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네 가지 조건을 강조하는 것은, 중생들이 이 당연한 삶의 기본적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동사(同事)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노력과 그만큼의 정성이 필요한 것인데, 당연하다고만 할 뿐 그 당연한 것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으니 애써 강조하는 것이다.
사섭법은 제각각 따로 이루어지는 조건들은 아니다. 그 핵심은 혼자만의 삶이 아닌 더불어 함께하는 삶이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조건을 바꾸는 데는 ‘너’ ‘나’라는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이 ‘너’ ‘나’라는 경계선을 없애가는 행위가 바로 ‘나눔’이다. 나눔의 모습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섭법에서는 그것을 보시(布施)와 아름답고 부드러운 말(愛語), 이익되게 하는 행위(利行), 적극적인 참여(同事)라는 네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9. 육근-육경-육식
양경인 / 불광교육원 연구원
① 인간과 세계의 존재 방식 ▲ 위로
한참 철이 지났지만 지난 8월에 ‘블라인드’라는 범죄 스릴러 영화가 상영되었다. 영화는 ‘오감추적 스릴러’라는 장르로 뺑소니 사고의 목격자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범죄수사물이다. 사건의 첫 목격자인 여자 주인공은 시각장애인인데, 엄밀히 말하자면 눈으로 볼 수 없으므로 목격자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건현장에 있었던 여주인공이 사건 현장에서 직접 냄새 맡고, 만져보고, 듣고, 느껴서 알게 된 사실들을 시각과 미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을 동원해 사건을 묘사한다. 이 때 오로지 ‘눈’으로 본 사실 만으로 진술하는, 말 그대로 ‘목격자(目擊者)’인 남주인공이 다른 의견을 제시하며 영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이처럼 두 주인공이 하나의 대상을 두고 상반된 판단을 이끌어 내게 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각’이라는 감각기관이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소리와 냄새, 맛, 촉감을 통해 외부세계를 인식하지만, 일반인들은 여기에 시각이 포함된 다섯 가지 감각으로 사물을 인식한다. 불교에서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 마음까지도 감각의 한 종류로 인정한다.
곧 불교에서 인간의 감각이란 눈(眼), 귀(耳), 코(鼻), 혀(舌), 피부(身), 마음(意)으로 구성된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물질적인 다섯 감각기관과 정신적 지각 능력으로 마음을 인식의 기관으로 파악한 것이 특징이다.
눈 귀 코 혀 피부 마음으로
존재의 실상 파악할 수 있어
우리들이 경험하는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는 이 육근에 의해 각각의 대상을 분별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세계가 인간의 인식 영역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인식할 수 있는 범위에서만 그 실재성을 인정받는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여주인공의 진술을 살펴보면 비가 오는 밤에 고급시트로 된 모범택시를 탔다. 합승하고 있던 다른 손님은 소독약냄새가 났고, 오른손에 시계를 차고 있던 기사는 커피를 권해지만 사양하자 기사가 화를 냈는데, 그 순간 무언가 차에 부딪히며 사고가 났다고 진술을 한다. 그러나 남자 주인공의 택시가 아닌 외제차라는 한마디에 모든 진실은 한 순간에 무너진다.
그녀가 모범택시라고 믿었던 진실은 귀, 코, 피부를 통해 경험한 내용을 종합한 것이다. 모든 정황과 경험된 사실을 기반으로, 그 순간 모범택시로 인식한 그 차량은 그녀가 알지 못한 새로운 차량이다. 우리가 실로 진실이라고 믿는 사실은 우리의 인식범위에 한정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많은 6가지 감관 가운데 ‘시각’의 부재는 존재의 실상을 왜곡하기에 이른다.
우리가 6근을 통해 알아야하는 존재의 실상은 ‘일체의’ 형성된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며, 이를 경험하게 되면서 야기되는 고통, 그리고 변화하는 물질을 넘어 부단히 정신의 조합인 ‘자아’를 부정하는 무아를 아는 것이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서 불교에서는 3가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오온과 6근(根), 6경(境), 6식(識)로 구성된 12처(處). 18계(界)이다.
오온은 이미 이전에도 많이 언급되었으므로 앞으로 6근(根)의 구체적인 능력과 각각에 대응하는 6가지 외부 대상(境)과 관계를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로 인해 발생하는 6가지 인식의 과정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존재 방식에 이해하고자 한다.
② 6근 통해 6가지 경계를 본다 ▲ 위로
인간에 대한 불교의 기본적인 인식은 몸과 정신이다. 몸은 다시 물질인 눈(眼根), 귀(耳根), 코(鼻根), 혀(舌根), 피부(身根)의 집합체이며, 정신작용인 마음(意)을 더하여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에서 인식이 비롯된다고 한다.
우리들이 경험하는 현상세계의 모든 존재는 이 육근에 의해 각각의 대상을 분별하여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세계가 인간의 인식 영역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초월적인 진리나 이상세계의 구현을 설하기 위해 먼저 우리들 몸에 지닌 다섯가지 감각기관, 즉 눈, 귀, 코, 혀, 피부와 마음을 이용해 구체적인 현실세계의 관찰에서부터 시작한다.
구체적인 현실 세계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주를 말한다. 온 우주와 세계는 그럼 무엇인가? 이 해답은 <잡아함경>에 나타난 부처님과 어느 바라문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에 어떤 생문 바라문은 ‘일체(一切, 모든 것)가 무엇인가’를 부처님께 여쭈었다.
“일체란 곧 십이처(12處)니, 눈과 빛깔.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부딪힘. 뜻과 법이다. 이것을 일체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을 벗어난 다른 일체를 말한다면 그것은 다만 말에 불과하며, 물어보아도 알지 못하며, 의혹만 더할 뿐이다. 왜냐하면 참으로 있는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주와 세계는 12처로
분류되고 인식되는 게
불교의 기본적 세계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6근을 통해 인식되는 여섯가지 경계(境界)인 12처를 통해서 인식되는 것이다. 눈.귀.코.혀.몸의 다섯 감각기관과 이를 통솔하는 의근(意根)을 육근이라 한다면 이에 대응하는 인식대상인 빛깔(色境), 소리(聲境), 냄새(香境), 맛(味境), 부딪힘(觸境), 법(法境)이 육경(六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눈으로 보는 시각능력과 시신경과 같은 시각기관인 안근(眼根), 귀로 듣는 청각능력과 청각기관인 이근(耳根), 코로 냄새를 맡는 후각능력과 후각기관인 비근(鼻根), 입으로 맛을 아는 미각능력과 미각기관인 설근(舌根), 몸으로 더위와 추위 고통을 느끼는 촉각 능력과 피부에 분포된 촉각 신경과 같은 촉각기관인 신근(身根)이 있다. 그리고 마음으로 아는 지각능력과 지각기관인 의근(意根)으로 구성돼 있다.
또한 눈으로 보는 색깔과 물질인 색경(色境), 귀로 듣는 소리인 성경(聲境), 코로 맡는 냄새나 향기인 향경(香境), 입으로 느끼는 맛의 대상인 미경(味境), 몸에 닿아 느낌을 일으키는 모든 대상인 촉경(觸境), 마음으로 아는 생각인 법경(法境)이 있다.
이와 같이 육근에 각각에 대응한 육경을 모두 합쳐서 인식체계를 설명하는 것이 불교의 12처설(十二處說)이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육근이 인간존재라면 이는 인식의 주체가 되고, 육경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환경이 인식의 대상이 된다.
인식의 주체와 대상을 벗어난 것은 단순히 말장난에 불과하며, 의혹이 끊이지 않아 물어도 구체적으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게 되어 모르는 것과 같고, 보거나 느낄 수 없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인간이 인식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즉 모든 존재는 인간의 인식을 중심으로 존재하며, 온 우주와 세계는 12처로 분류되고 인식된다고 하는 불교의 기본적 세계관을 설명하는 것이다.
③ 세계는 감각과 지각에 의해 존재 ▲ 위로
불교에서는 외부의 어떤 대상이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과하고 나서야 우리에게 인식된다. 즉 세계는 인간의 감각과 지각에 의해서만 그 존재가 성립되는 것이다. 12처는 우리가 경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6근과 6경을 인식의 주체와 객체로 분류한다.
또한 6근은 인간의 내부에 존재하므로 6내처(內處), 인간 밖에 존재하는 외부의 대상을 6외처로 나눈다. 12처를 12입처(入處)로도 부르는데 6근을 ‘들어오는 곳’, 6경을 ‘들어오는 것’이라는 의미로 구분한 것이다.
이들은 6근에 상응하는 6경의 결합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눈을 통해서 인식되는 것은 반드시 색깔과 형상뿐이며, 귀로 인식되는 것은 반드시 소리뿐이다. 이 사실을 역으로 짚어 보면 인간에게 눈이 없다면 모양과 색깔은 존재할 수 없고, 귀가 없다면 소리가 존재할 수가 없다. 냄새, 맛, 법(法) 또한 마찬가지다.
이처럼 인간의 감각 기관을 통과하지 않은 것들은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은 사실상 없는 것이 된다. 복잡한 듯 보이지만,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과 인식되는 대상인 세계의 관계로 존재한다는 인간과 세계의 존재방식에 대한 설명이다. 결국 인간과 세계는 서로 12처(處)의 상관관계 속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감각기관의 몸과
정신작용인 오온 결합체
인간이 이와 같은 인식 주체라면 ‘너’는 외부 대상으로 6가지 감각기관에 의해 인식되므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인식되며, 존재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살펴본대로 정리하면 ‘나’는 반드시 6근에 의해서만 인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 존재를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인간은 감각기관으로 이루어진 몸과 정신작용인 오온의 결합체이다. <중론>의 관육정품(觀六精品)에서는 이 문제를 6근과 6경의 관계를 통해 눈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다.
“눈은 그 자신의 눈을 보지 않는다. 보지 않는 것이 어떻게 다른 것을 보겠는가? 보지 않는 눈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면 눈이 본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눈은 보지 못한다. 보지 못하는 것(즉 눈이 아닌 것)은 결코 보지 못한다. 보는 사람이 보는 것에 의해 설명된다고 인정해야 한다.”
눈이 눈을 볼 수는 없다. 만약 눈이 눈을 보게 된다면 눈에는 보는 능력과 보이는 대상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더 이상 ‘눈’일 수 없다. 감각기관으로 외부 대상과의 접촉으로, 외부 대상은 감각기관을 통과할 때 비로소 각각의 존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마치 수학 선생님이 자기 스스로에게 몰랐던 미적분을 가르칠 수 없고, 자기가 만든 상품을 스스로 구입하여 이익을 남길 수 없는 것과 같다. 코, 혀, 몸, 마음도 마찬가지다.
중론에서는 외부 대상과 감각기관 각각의 요소를 통찰함으로써, 더 나아가 일체의 모든 것은 ‘공’으로 귀결되므로 상호 의존을 통한 관계를 통해 성립된 ‘나’의 부정을 이끌어 낸다.
④ 원숭이는 한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 위로
인간과 세계는 6근과 6경의 상호 연관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감각기관으로 외부 대상과의 접촉으로, 외부 대상은 감각기관을 통과할 때 비로소 각각의 존재가 성립하기 때문에 눈이 눈을 보게 된다면 눈에는 보는 능력과 보이는 대상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더 이상 ‘눈’일 수 없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6근과 6경을 대입한 결과 ‘나’의 부정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이다. 12처는 우리가 경험하는 사실에 입각하여 인식의 주체와 객체를 세부적으로 분류한 것이라면, 우리들은 눈으로 색과 형상을 알아차리고 귀, 코, 혀, 몸, 마음으로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의 작용이 있다.
이 마음의 작용이란 6경을 6근으로 받아들인 것, 즉 감각과 지각의 내용을 알아차리는 주도자이며 6근과 6경이 접촉한 여섯 가지 인식을 말한다.
눈을 통해 색(色)과 형상이 들어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안식(眼識)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귀로 들어온 소리로 알아차리는 이식(耳識), 코를 통해 냄새가 들어오면 알아차리는 비식(鼻識), 혀를 통해 맛으로 알아차리는 설식(舌識), 몸을 통해 접촉해서 알아차리는 신식(身識), 마음으로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의식(意識)이 라는 6식(六識)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는 6근, 6경과 마찬가지로 6식 또한 인간의 감각작용에 의한 의식작용의 구조를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18계(界)라는 ‘일체’의 요소로서 존재하게 된다.
‘여섯 개의 창문’은 인간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육근
여섯 개의 창문이 있는 방에 한 마리의 원숭이를 넣어 두면 원숭이는 한시도 가만히 않는다.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숨고, 다른 창문에 얼굴을 내밀거나 또 같은 창문으로 얼굴을 내미는 동작을 되풀이한다. 여섯 개의 창문은 인간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을, 한 마리의 원숭이는 각각의 창문으로 고개를 내미는 마음의 작용에 비유한 것이다. 창 밖에 쌓인 흰 눈을 보며 냄새도 없고 맛도 없지만, 뽀드득 뽀드득 눈길을 달리며 차가운 눈을 뭉치는 생각을 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우리는 6개의 창을 가진 방은 인간의 몸이고, 창 문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원숭이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이루어진 결합체인 인간을 나타내고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원숭이를 여섯 가지 마음의 작용을 복합적으로 이끌어가는 하나의 주체 혹은 객체로서의 ‘자아(나)’를 연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자아를 생각했다면 자아는 존재하는 것인가 라는 의문이 생긴다. 6근의 지각기관인 ‘마음’과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인 ‘법’을 이미 실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5온을 비롯한 12처, 18계의 이론은 ‘자아’는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제시 된 것이다. 자아가 눈을 비롯한 육근에 있지도 않고, 외부 대상도 아니며, 6가지 인식의 한 부분에도 속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6근의 ‘마음’과 12처의 ‘법’, 18계의 ‘의식’ 각각에 대한 특별한 이해가 따르지 않으면 이 물음은 끝내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끝〉 ▲ 위로
[출처: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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