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걸이 / 박미령
나에게는 갈색 옷에 잘 어울리는 오래된 목걸이가 있다. 아버지가 프랑스 여행선물로 사다 주신 것이다. 오늘 아침 그 목걸이를 하니 여행지에서 딸을 위해 목걸이를 고르는 늙은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내가 친정엄마도 없이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 아버지가 직접 사서 미역이라며 보내주신 다시마가 생각난다.
나는 서른세 살에 친정엄마를 잃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다음해, 내가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 아버지는 인편에 미역과 소꼬리를 보내주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미역이라고 보내주신 것은 미역이 아니라 다시마였다. 아버지는 아마 혼자 시장에 가셨을 것이다. 누구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마치 당신이 잡수실 것처럼 미역과 소꼬리를 고르셨으리라. 누구에게 물어보고 부탁하는 그런 성품이 아니셨으니까. 그렇게 해서 제일 큰 다시마와 소꼬리를 사서 나에게 보내셨을 것이다. 미역이 아닌 크디큰 다시마를 잘게 잘라 오랫동안 국이나 찌개를 끓일 때 넣어 먹었지만, 아버지에게 당신이 다시마를 미역으로 잘못 알고 보내셨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혼자서 외로운 말년을 보내셨다. 나는 외동딸이었으므로 사람들은 나보고 홀로 된 아버지에게 잘해 드리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 신세 지는 것을 너무나도 싫어하셨다. 더욱이 딸에게 부담을 준다는 것은 아버지 사전에는 없는 일이었다. 내가 결혼을 한 후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신 것은 채 다섯 번도 안 될 것이다. 나는 가급적 자주 아버지를 찾아보려 애썼지만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고 아버지도 딸보다는 친구들 만나는 것을 더 우선시하셨다. 어렵게 찾아뵈어도 힘든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함께 밥을 먹어도 밥값은 늘 아버지가 내셨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려운 살림을 사는 내가 혹시나 친정에 의지할까 봐 때때로 경계하셨다.
그렇게 홀로 지내던 말년의 어느 날, 아버지는 남동생과 둘이서 나에게는 비밀로 한 채 유럽여행을 떠나셨다. 아이 기르며 공부하느라 힘들게 사는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셨을 것이다. 함께 데려갈 수도 없을 바에야 비밀로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셨으리라. 그때 나에게는 해외여행을 다닐만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었으니까.
남동생은 아버지와 둘이서 여행한 비밀을 끝까지 지켰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목걸이 때문이다. 목걸이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버지가 유럽여행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기어이 딸에게 줄 선물인 목걸이를 사고야 말았다.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나를 위해 크리스찬 디올 목걸이를 사오셨다.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화가 났다. 그래서 목걸이를 할 때마다 속으로 삐죽거렸다. “이 목걸이는 뭐하러 사오셔서 나를 화나게 하신담. 나를 빼놓고 몰래 가셨으면 끝까지 비밀을 지키실 것이지…”
아들과 딸 사이에서 나름의 자존심을 지키시느라 말년의 아버지는 참 힘들게 사셨다. 자식들과의 관계는 때로 혼란스러웠다.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와의 관계도 편안치 못했으나, 딸인 내가 친정 일에 관여하는 것은 철저히 차단하셨다. 사소한 생활상의 도움은 딸인 나에게 요청하셨지만 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던 물질의 혜택은 아들과 며느리에게만 집중되었다. 그래서 딸인 나에게 비밀로 한 채 아들과 유럽여행을 다녀오셨고, 비밀 아닌 비밀이 되어버린 유럽여행기념으로 아버지가 내게 선물한 목걸이는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혼자서 십 년을 사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목걸이는 아버지의 유품처럼 남아 아버지의 유렵여행을 기억하게 한다. 한때는 이 목걸이가 나에게 아픔이기도 하고 분노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미역이라면서 다시마를 보내주셨을 때처럼 어쩔 수 없는 부정(父情) 때문에 비밀을 지키지 못하고 내게 줄 선물을 산 아버지의 마음을 감사히 받는다. 공부 잘하고 똑똑한 딸을 자랑스럽게 여겨 아들 못지않은 기대를 하셨음에도 내심으로는 아들을 더 귀하게 대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해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 시대의 부모님들은 다 그렇게 살았으니 그것은 어쩌면 아버지의 한계였을 것이다.
비록 앞뒤가 맞지 않아도 나를 사랑한 아버지의 마음을 갈등 없이 받아들이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세월이 걸렸다. 사랑은 논리를 초월한다는 것을, 그래서 사라에는 반드시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아는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오늘 나는 여행지에서 아버지가 나를 위해 공들여 고르셨을 목걸이에 담긴 부정을 읽어내며 아버지를 추억한다. 그리고 파리도 함께 추억한다. 몇 년 전 가 보았던 파리의 어느 곳에선가 아버지가 나를 위해 목걸이를 사셨다. 나이 든 아버지가 젊은 딸을 위해 등을 구부리고 고개를 숙인 채 목걸이를 고르고 있다. 여행지 파리에서 아버지가 딸을 위해 고르는 것은 목걸이가 아니라 추억이고 그리움이며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