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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의 시선 원문보기 글쓴이: 카페지기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깊은 교제생활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
이솝우화에 나오는 ‘곰과 친구’ 이야기. 산에서 곰을 만난 두 친구 중 미처 나무 위로 피신하지 못한 한 친구가 `곰은 죽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할머니의 말씀대로 죽은 척하는 기지를 발휘,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다는 내용이다. MBC `TV특종 놀라운 세상`의 신설코너 ‘놀라운 실험 If`에서 `할머니의 말씀`이 진짜인지 실험을 통해 진위를 규명해 화제를 모았다. 첫번째 실험은 마네킨에 사람 체취가 흠뻑 베인 옷을 입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있다는 설정. 일단 마네킨 주위로 와 냄새를 맡던 곰은 갑자기 덥석 물며 공격했다. 그 다음은 이솝우화처럼 ‘죽은척 하기’. 어슬렁 어슬렁 우리에서 나온 곰은 처음엔 죽은 척 누워있는 마네킨을 발견해도 외면하고 딴 곳으로 몸을 돌리더니 이내 다가와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이어 앞발을 마네킨의 복부위에 올려 체중을 실어 짓눌렀다. 이미 두 동강이 나버린 마네킨. 하지만 곰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더욱 맹렬한 공격을 펼쳤다. 결국 ‘산에서 곰을 만났을 때 죽은 척을 하면 산다’는 동화같은 이야기는 틀린 것이다. 그럼 갑자기 산에서 곰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방송에선 여러가지 실험을 해봤다. 먼저 사람이 삽과 같은 무기를 들고 있을 경우, 곰은 삽에 관심을 보이다가 이내 뒤쪽으로 몸을 돌려 마네킨의 옷을 물어 뜯는 흉폭함을 보였다. 무기 역시 별 소용이 없는 듯. 다음은 짐승들은 불을 무서워 한다는 통념에 대해 알아봤다. 곰은 마네킨의 손에 들린 모닥불을 보자 일단 몸을 피해 난간으로 올라서며 앞발로 불을 휘젓다가 불길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공격을 했다. 무기 대신 불로 대체하는 것도 역시 역부족이었다. 곰이 소리에 예민하다는데 괴상한 소리를 사용해 보는 것은 어떨까. 방송에선 특이한 목소리의 개그맨 김현철의 음성을 녹음해 마네킨의 목에 카세트를 매달았다. 곰이 마네킨을 향해 접근해오자 녹음된 목소리를 틀었다. 갑작스런 이상한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달아났던 곰은 ‘한번 속지 두번은 안속는다’는 듯 곧 마네킨 주변으로 다가와 앞발을 치켜들며 무서운 기세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럼 과연 산에서 곰을 만났을 때 어떤 대처방법이 가장 좋을까. 방송에 출연한 곰전문가 박기성씨에 따르면 사과, 바나나처럼 당도높은 과일로 곰을 유인한 뒤 도망가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날 방송에선 `곰을 만났을 때 죽은 척하면 살 수 있다`는 말은 동화 속에나 있을 법한 내용이란 것을 기발한 실험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었다.
암5:19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은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본 문: 갈2:20 초월자를 내 속에
임어당의 유명한 책 <생활의 발견>이라는 책이 있어요. 원문에는 영어로 <The importance of living - 생활의 중요성>라고 되어 있는데, 우리 말로는 <생활의 발견>이라고 번역되었지요. 여러분에게 권할 만한 훌륭한 책입니다. 그 책 속에 `교양의 즐거움'이라는 chapter가 있습니다. 그 chapter 모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육의 목적 또는 교양의 목적은(지성의 목적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 속에 견식을 키우고 행위 속에 덕을 쌓게 하는 데 있다."
지식인, 지성인, 교양인이라면 견식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데 견식이 뭐냐 하면 옳고 그른 것, 아름답고 추한 것, 숭상할 만한 것과 혐오할 만한 것을 가릴 줄 아는 능력을 견식이라고 합니다. 지식 속에 견식을 키우는 것, 학문을 하되 그 속에 견식을 키우는 것이 대학 생활이라고 우리 입장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140학점 이상을 따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하되 그 속에 견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무엇이 올바른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무엇이 정말 숭고한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 것인지, 무엇이 불변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무엇이 지나가 버리는 것인가? 무엇이 정말 생명을 내놓고라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고, 무엇은 혐오하고 멀리 해야 할 것이냐 하는 것, 그 판별력을 키우는 것이 견식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오늘 campus에서 대학 생활을 하는 이유도, 또 campus 생활중에 이 한 시간을 내서 새로운 인생관, 세계관을 확립하려고 거듭거듭 노력하는 이유도 그런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교양, 올바른 견식 이것은 동서양의 모든 사람들이 추구해 온 것이지만 특히 우리가 자라오고, 호흡하고 있는 동양 문화 속에서 많이 숭상되는 일입니다. 교양을 이야기할 때 일종의 지성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공자님의 제자들이 쓴 <논어>에 대학생으로서는 음미할 만한 대목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오늘의 내용과 관련해서 기억할 만한 대목이 하나 있습니다. 선진편(先進編)은 공자의 제자들 중에 훌륭한 사람들에 관련된 내용인데, 이 선진편(先進編)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하루는 공자가 사랑하는 제자 네 사람을 앉혀 놓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늘 사랑하는 제자 세 사람을 데리고 높은 산에도 올라 가시고 했는데, 공자님은 네 사람으로 자로, 염유, 공서화, 증석이라는 제자를 늘 아꼈습니다. 하루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평소에 말하기를 세상에서 나를 알아 주는 사람이 없구나 하고 한탄들을 하지 않느냐? 오늘 내가 너희들의 말을 충분히 들어 줄 테니 어려워 말고 너희들의 포부를 기탄없이 이야기해 봐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제일 야심이 강했던 자로(子路)가 말하기를 "만약 나에게 천승 (탱크가 천대 있을 정도로 강한 나라)의 나라를 맡겨 준다면 비록 그 나라가 양대의 강국 속에 끼어서 항상 국방에 어려운 문제를 안고 있다 하더라도, 또 그 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여 백성이 기근에 허덕인다 하더라도, 나에게 그 나라를 맡겨 준다면 그 나라의 국가 안보를 튼튼히 하고, 그 나라의 경제를 부강시켜 백성들의 의식을 풍족하게 만들어 줄 자신이 있습니다." 참 야심만만한 사람입니다. 요즈음 말로 말하면 내우외환이 있고 경제 공황이 찾아와도 나에게 나라를 맡겨 준다면 3년 안에 안보 문제, 경제 문제 다 해결할 자신이 있다 그런 말입니다. 얼마나 자신만만한 이야기입니까? 그 말을 듣고 공자님이 피식 웃었습니다. 너는 아직 멀었다는 것이지요.
둘째번 제자 염유(有)라는 사람이 자로가 공자님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 조심스러워서 "나는 자로처럼 저런 대망은 없지만 내게 사방으로 5,60리 정도되는 나라를 맡겨 준다면 (쉽게 말하면 충청남도 정도의 나라를 내게 맡겨 준다면) 그 나라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3년 안에 백성들 중에 굶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만들겠습니다. 다만 예약(禮樂)에 있어서는 내가 덕이 부족하니까 공자님처럼 훌륭한 선생님을 모셔다가 예악을 펴게 하겠습 니다." 요즈음 대학생들이 하는 말로 한다면 나는 정신 문화를 부흥시키는 데는 자신이 없으니 훌륭한 선생님을 모셔다가 교화를 도모하겠습니다. 퍽 겸손한 말 같은데 공자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도 아직 멀었다는 뜻이지요.
세번째 공서화(公西華)라는 제자가 아주 조심스럽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자로나 염유처럼 저런 큰 정치적인 야망은 없어도 나는 외교관이 되고 싶습니다. 나라에 큰 제전이 있을 때 아니면 국제간의 회의가 있을 때 예복을 단정히 입고 그 의전을 돌보는 의전국장 같은 것을 시켜 준다면 한번 뜻을 펴 보겠습니다." 공자님이 좋다고 할 것 같은데 "얘 나라의 제사나 국제간의 회의가 그렇게 작은 일이냐 아직 멀었다." 세 제자가 낙제를 받았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 증석(曾晳)이라는 사람이 (曾子의 아버지) 거문고를 타고 있었는데 거문고를 놓더니 하는 말이 "나는 늦봄에 새로 지은 옷을 단정히 입고 친구들 5, 6명과 더불어 기수(제사지내기 위해 목욕 재개하던 곳)라는 강에 가서 목욕을 하고 무우(비가 안올 때 기우제 지내던 곳)라는 곳에 가서 바람을 쏘이고 노래를 하면서 집으로 돌아 오겠나이다." 유명한 말이지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정신적 내면을 먼저 가꾸겠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말했더니 공자님이 무릎을 탁 치면서 "네가 참 훌륭한 사람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요즈음 대학생 입장에서 볼 때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너희들의 포부를 말해라. 그래서 세 사람이 자기의 포부를 이야기했는데, 공자님은 피식 웃고 너희들은 아직 멀었다 하고 마지막 증석이 말한 것은 그게 뭐 포부라 할 수 있나 하는 것인 데도 네가 됐구나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이것을 많이 생각해 보았어요. 공자님이 제자들을 열심히 가르쳐서 가기를 돋으려고 했는데 왜 그렇게 사기를 꺾었는가? 그게 무슨 교육철학인가 많이 생각해 보았어요.
생각한 뒤에 내가 느낀 것은 뭐냐 하면 공자님이 제자들의 생각을 꺾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큰 야망을 품으면 품을수록, 큰 포부를 가지면 가질수록 먼저 마음에 수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내면의 수양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크든지 작든지 자기의 대망을 펼 수 있는 인간이 준비된다는 그런 뜻으로 이해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동양의 이야기입니다만 서양에도 똑같은 면에서 많은 성현, 철인들이 내면으로 들어가라는 뜻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위대한 비전, 위대한 포부를 가진 사람일수록 먼저 내면으로 들어 가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200년 전에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그의 명저 중에 명저인 <실천 이성비판>이라는 책 맨 나중에 결론에서 "나는 사색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두 가지의 경이에 봉착한다." Two wonder - 인간 사고로 생각할 수 없는 두 가지 큰 경이에 직면하게 되는데, 그 경이는 뭐냐하면 하나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이요(The stars of heaven)', 다른 하나는 '내 속에 있는 도덕률(The moral law with i me)'이라고 했습니다. 이 두가지가 경탄에 빠지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역시 200년 이래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는 사람도 자연의 경이와 내면의 세계에 도사리고 있는 양심의 도덕률 여기에서 위대성을 감탄했던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사에 가장 심오한 사상가 중에 한 사람인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중세 초기의 기독교 사상가로 그가 쓴 유명한 <참회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다음에 시간 날 때에 한번 읽어보셔요. 그 책 중간쯤에 가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 내면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진리를 찾겠거든 너희 내면으로 들어 가라."하며 내면에 들어가서, 시간에 대해서, 영혼에 대해서 깊이 사색한 대목이 나옵니다. 눈을 감고 내면에 들어가면 거기에서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에서 어떤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가? 영원에 통하는 시간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과거도 있고 현재도 있고 미래도 있는데 거기에서는 영원에 통하는 순간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청년들이 '순간이 영원에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의 근원은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With you today is eternity.(당신과 같이 있으면 오늘도 영원히 됩니다.) 내면에 들어 가면 거기에서 신을 발견하고, 오늘 이 한 순간도 영원으로 통할 수 있는 그런 경지를 발견합니다. 바로 그런 얘기입니다. 매우 중요한 얘기입니다.
내가 15년 전에 관직 생활을 다 청산하고 일년 동안 하와이에 가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구름을 쳐다 보면서 책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뒤에 이 학교에도 왔습니다만 그 때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쓴 책 제목 위에다 인용을 했습니다. "미래가 긴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긴 기대가 긴 것이요. 과거가 긴 것이 아니요, 과거에 대한 긴 회상이 긴 것이다." (Future is not long, but long future is long expectation of the future. Past is not long, long past is long memory of the past) 이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미래나 과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 속에 미래에 대해서 건 기대, 커다란 vision , 포부를 가지면 그 사람에게는 긴 미래가 오고, 과거에 대해서, 전통이나 역사에 대해서 과거 자체가 긴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하서 길게 회상하고 긴 과거에서 교훈을 뽑아올 능력이 있으면 그 사람 머리 속에, 그 사람 내면 속에서 과거가 길게 살아 온다는 것입니다. 조금전에 이 순간도 영원에 통할 수 있다. 오늘도 영원에 통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 똑같은 말인데 반대로 표현된 것이지요. `내면을 개척한 사람에게는 내면 세계 속에 긴 미래가 전개될 수 있고 긴 과거도 전개될 수 있고 따라서 현재, 오늘, 이 순간에도 긴 과거 긴 미래와 연결되서 영원에 통할 수 있다.' 이것이 기독교 사상의 가장 중요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영원관이요 미래관입니다.
이 정도 말씀드리고 여러분에게 결론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면에 들어가라는 것을 강조하게 싶은데 그러면 내면에 무엇을 가져 오느냐? 그냥 공허 공백을 가질 것인가? 아니면 내면에 나의 아집, 나의 고집, 나만 잘 났다, 내가 신이다 하는 것을 담을 것인가? 세상에 그런 사람들 많이 있지만 무엇을 내면에 가질 것이냐 결론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내면에 절대자를 모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면에 초월자를 모셔야 한다. 순간적인 것이 아니요 영원한 것, 유한한 것이 아니요 무한한 것, 인간을 초월하는 그런 절대자를 내면에 모실 때 힘이 난다는 것입니다.
지난날 우리를 굉장히 흥분시킨 사건이 한가지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 청년 두사람이 요트를 타고 부산항을 떠나서 75일만에 미국 캘리포니아에 상륙한 쾌거가 있었어요. 그 요트의 이름은 <파랑새>이고 주인공의 이름은 '노영문, 이재웅' 두 사람이예요. 그 후에 그 젊은이들이 동아일보에 수기를 실었는데 그것을 읽어 보았어요. 여러분과 같은 젊은 사람들에게 교훈될 만한 이야기가 없을까 유심히 읽었습니다. 과연 나왔어요. '노영문군'이 열 길을 넘는 죽음의 파도를 몇 번이나 지나 가는데 지나 갈 때마다 나침판을 꽉 잡는데 그 나침판 위에 거울처럼 나타나는 영상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 영상은 무슨 영상이냐 하면 새벽에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자기 아들 영문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어머니의 영상이 나침판위에 나타나곤 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영상을 쳐다 보면서 죽음의 파도를 몇 번인가 이기고 나갈 수 있었다는 거지요. 수기를 읽고 감격했습니다. 노영문이라는 청년이, 여러분과 똑같은 나이의 청년이 태양을 건너면서 자기 내면에 절대자, 자기 어머니의 모습에 나타난 절대자를 가졌기 때문에 사지를 열번이고 넘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인간이 어려서부터 절대자를 내면에 모셨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커다란 힘을 발휘했다는 그런 우수한 예가 성경 속에 담겨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 하나만 들면 이스라엘 민족사를 완성했다고 할 수 있는 다윗 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윗 왕이 어려서 자기 아버지의 양을 치는데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새끼를 물어갈려고 하면 다윗이 쫓아가서 그 곰과 사자의 입에서 어린 양을 빼앗아 왔어요. 어릴 때부터 "여호와가, 절대자가 나와 함께 하신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는 내게 두려움이 없으리로다." 하는 신앙이 그 내면에 가득차 있었단 말이지요. 이스라엘 나라가 큰 위기에 봉착했는 데 블레셋이 라는 국가가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을 때 거기에 맹장 골리앗이라는 사람이 있어서 이스라엘 왕부터 모든 군사를 다 멸시하였습니다. 그때에 다윗이 나서서 차돌을 가지고 골리앗을 눕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려서부터 자기 내면에 절대자를 모신 다윗이 소년 때나 자라서나 이스라엘의 커다란 대업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는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 등 역사를 이끌어 간 인물들을 통해서 듣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내면 속에 절대자를 모신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remind해 드리면서 요 정도로 하려고 합니다.
우리 대학생들이 20세기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알버트 슈바이쳐일 겁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양서를 권장하기 위해서 알버트 슈바이쳐 박사의 <나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문고판으로 나온 책을 소개합니다. 대답이 훌륭한 책이에요. 알버트 슈바이쳐가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인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내면성을 가진 지식인, 내면속에 절대자를 모신 그런 대표적인 지성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의 전기를 여러분들이 다 알겠지마는, 알버트 슈바이쳐는 19세기 말에 스트라스부르크 대학을 졸업하고 거기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박고 신학대학 교수로 있을 떠 나이가 26세였습니다. 그는 그때 아프리카 선교사업을 하겠다는 뜻을 두고 다시 의과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대학교수로, 또 목사로, 그리고 이름난 파이프 오르간이스트로 활동하면서 26세때에 다시 의학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군대 갔다 온 사람은 이미 슈바이쳐 나이가 돼 있을 것입니다.
7년인가 걸려서 의학 공부를 다 마친 다음에 아프리카 가봉이라는 오지 남베르네에 가서 근 50년 이상 자기 생애를 바쳤습니다. 어떻게 일류대학에서 대학 교수를 하고 철학 박사요, 신학 교수요, 음악가로 이름을 날릴대로 다 날린 사람이 자기의 평생을 바쳐서 아프리카 오지에서 인류 구원의 행위를 할 수 있었는가?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오는가 생각할 때에 역시 내면성을 가진 사람, 내면성에 자기만 실린 것이 아니라, 그냥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를 임재시킨 가장 대표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 많이 참고하길 바랍니다.
기독교 사상의 가장 핵심을 바로 이겁니다. 내면에 절대자를 모신 사람의 위력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이런 말이 있어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산다." 사도 바울의 유명한 고백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사상의 핵심입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절대자가 들어와 살 때에 모든 나의 사상, 나의 행동이 위대성을 띨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바드 대학에 사회학과 교수로 있는 데이비드 리스만이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20년 전에 쓴 책이 있어요. 우리 나라에도 많이 소개되고 대학생들의 필독서로 알려진 책이예요. <The lonely crowd - 외로운 군상>이라고 우리 말로 번역되었을 겁니다. 그 책의 주제가 뭐냐면 산업 사회가 되면서 인간들이 모두 소외되고 타락해서 어떤 인간이 되냐면 자기 주장이 없이 자기 내면이 없이 남 하는 대로, 남이 시키는 대로 타율적인 인간이 돼버렸다 하는 것입니다. 정말 필요한 사람은 내면의 사람, 내면의 지시를 받는 인간, 자율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산업 사회의 모든 인간들이 타율인이 돼버렸다는 거예요. 남이 하는 대로 한다는 것이지요, 자율인이 없습니다. 내면인이 없습니다. 남이 하면 우우 따라 갑니다. 자기 내면에 들어 가서 그 속에서 절대자를 발견하겠다 하는 이런 마음보다는 우우 하고 남을 따라 가는 것이 산업 사회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런 인간들은 문명 건설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리스만은 벌써 미국의 사회에 관해서 20년 전에 발견했습니다. 우리 나라의 오늘에서 발견되는 문제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세대에 가장 필요한 것은 내면의 세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사랑하는 여러분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면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큰 일을 하고자 원하면 원할수록 먼저 내면에 들어 가라. 성 어거스틴이 가르쳐 준 바와 같이 그 내면에 들어가면 거기에서 神의 임재를 깨닫게 될 것이며, 그래서 하루를 살아도 영원과 통하는 그러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