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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고양이 좀 봐!”
“오메, 고양이 시상이다냐?”
“아따메, 이 고양이들 잔 보소.”
요즘 우리 집에 온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기부터 한다. 현관문 바로 앞에 고양이들이 너무 많이 우글거리고 있어서다. 아니카, 활짝이에 이어 콩이까지 새끼를 낳으면서 새끼 고양이 열한 마리가 새 식구가 되었는데, 그 녀석들이 하필이면 현관문 바로 앞 툇마루를 육아터로 삼았다. 헌 식구에 새 식구까지 거의 스무 마리에 육박하는 고양이들이 사람들이 오며 가며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보란 듯이 자리를 잡고 있으니 나라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나 많은 고양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날이 오다니!
그 많은 고양이들이 마당과 집 앞 텃밭에서 뛰어 놀 때는 동물의 왕국을 시청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통나무에서 발톱을 갈고 있는 고양이, 새를 잡으려고 풀숲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고양이, 양배추 밑동을 갉아먹는 고양이, 키 큰 감나무 위를 오르내리는 고양이, 한데 뒤엉켜 장난치듯 싸우는 고양이…. 온갖 고양이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착각은 점차 심화되어 고양이가 사자로 보이고, 내가 있는 곳이 아프리카 대초원인가 싶어 큰 혼란에 빠져들기도 한다.
공동육아 고양이터 현장. (새끼를 안 낳은, 삐삐 이모도 젖을 먹이고 있어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엄마가 되면서 부쩍 사냥 실력이 좋아진 콩이가 다람쥐 한 마리를 물고 온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다리 쪽을 물어서 다람쥐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까맣고 동그란 눈이 얼마나 생생한지, 지켜보는 내 마음이 아프게 저려 왔다.
“얘들아, 나와 봐! 콩이가 다람쥐를 잡아 왔어!”
내 외침에 다랑이가 가장 먼저 달려 나왔다. 다랑이로 말할 것 같으면 지난해 봄부터 다람쥐를 키우고 싶어서 지극한 공을 들이며 애를 써 왔다.(다람쥐 잡겠다고 나무 둥치에 던져 넣은 호두알만 해도 한 공기는 되리라.) 자기가 그토록 잡고 싶었는데 끝내 잡지 못한 다람쥐가 두 눈 앞에 있으니 얼마나 가슴이 뛰었겠나. 어떻게든 다람쥐를 구해 내고야 말겠다며 콩이를 끝까지 쫓아가서 다람쥐 뒷덜미를 잡았다. 그때부터 콩이와 다랑이 사이의 팽팽한, 그리고 끈질긴 줄다리기 시작! 하지만 결국 콩이가 이겼다. 다랑이는 “그래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람쥐를 만져 봤으니까” 하면서 돌아섰다. 콩이가 다람쥐를 먹는 모습은 차마 두 눈으로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다랑이의 다람쥐 구출 현장. (결과는 참혹했습니다만) ⓒ정청라
한편, 이런 일도 있었다. 저수지에 어망을 놓아 물고기를 수십 마리나 잡은 다랑이가 큰 들통 가득 물을 채우고 물고기를 키우게 되었다. 그런데 당장 다음 날부터 물고기 숫자가 점점 줄어드는 게 눈에 보였다. 보나마나 고양이들 짓이었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랑이는 꾀를 내어 무거운 가마솥 뚜껑으로 들통을 덮어 놓았다. 그 정도면 물고기의 안전을 보장해 주겠지, 다랑이는 물론 우리 모두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고양이들은 머리로 밀어내어 뚜껑을 떨어뜨리고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물고기 맛에 미쳐서 눈에 뵈는 것도 없는지 심지어 사람이 가까이 있어도 끝끝내 들통에 얼굴을 들이밀고 물고기를 잡기까지.... 특히 활짝이는 잠수 능력이 상당해서 그걸 본 아이들은 활짝이는 아무래도 고양이인 척하는 수달인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잡아 온 물고기는 한 마리도 빠짐없이 고양이들 뱃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는데, 다랑이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속상하지 않느냐는 내 질문에 다랑이는 이렇게 답했다.
“새끼들 젖 먹이려면 많이 먹어야 되잖아.”
그 얘길 듣고 보니 뭔가 감이 잡혔다. 지난번에 콩이에게 져 준 것도, 이번에 물고기 잡는 활짝이를 목격하고도 그냥 내버려 둔 것도, 일부러 져 주고 일부러 당해 준 거였구나. 평소에 다랑이는 이기고 싶은 욕구가 강한 아이지만 고양이들의 형편과 상황을 다 아는 이상, 이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양이들은 새끼를 키워 내야 하니까. 그러니까 새 생명을 키워 내는 어머니들에 대한 존경과 예우랄까?
시도 때도 없이 새끼들에게 젖 물리는 엄마 고양이들을 날마다 보고 있으면 나 또한 엄마 고양이들이 짠할 때가 많다. 마치 ‘날 잡아잡수’ 하듯이 자신을 먹잇감으로 내어 놓는 엄마 고양이들, 그런 엄마 몸에 다닥다닥 붙어 생명을 쪽쪽 빨아 먹는 새끼들.... 그 모습을 보면 삶이 뭔가 싶어 숙연해지곤 한다. 아마 다랑이도 뭔가를 느껴 왔던 거겠지. 그래서 져 주고 싶었을 테고.
끝도 없이 고양이가 불어나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가운데서도 그런 마음이 일어남을 지켜볼 수 있어서 기쁘다. 져 줄 수 있는 마음, 져 주어야 할 때를 아는 마음, 이런 걸 어디서 배울 것인가. 다랑이가 기특하다.
덧. 이 원고를 마무리해서 보내는 이 시점엔 고양이가 예전만큼 우글거리지는 않는다. 각고의 노력과 영업 전략으로 여러 마리를 분양했기 때문이다. 분양하면서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또 한가득이지만 그것까지 풀어내려면 영영 마감을 미룰 것 같아서 생략한다.
물고기 전멸 사건을 소재로 다울이가 만든 만화. ⓒ박다울
정청라
흙먼지만 풀풀 날리는 무관심, 무 호기심의 삭막한 땅을
관심과 호기심의 정원으로 바꿔 보려 합니다.
아이들과 동물들의 은덕에 기대어서 말이죠.
무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명랑한 어른으로 자라나고 싶어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