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광해군,인조시대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거슬러 올라가서 덕흥대원군의 장남도 아닌 삼남이었던
하성군이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의 결정적인 후원으로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면서 불행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조 대에 대표적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서 무고한 많은
선비들이 참화를 입고 결코 생각하기도 싫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조선의 많은 백성들이 희생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정유재란까지 7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당시 조선의 국토는 초토화된 것이나 진배 다를 바 없었
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백성들을 굳건히 지켜야 할 국왕이
도성을 버리고 심지어 명나라 망명까지 추진하였다 하니
실로 백성들의 절망감을 이루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선조의 아들들중에서 광해군 같은 왕재가 있어서
임진왜란 때에 국왕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부왕을
대신하여 어지러운 민심을 수습하여 강력한 리더십을
가지고 왜적에 대항하였던 사실입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고 1606년에 태어난 영창대군을
옹립하는 과정에서 광해군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16년동안 왕세자로서
때를 기다리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613년에 발생한 계축옥사로 인하여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위리안치되어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하고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을 비롯하여 가족들이 화를 입은 참화를
겪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축옥사는 10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
하나의 구실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국제정세에도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있던 광해군의 외교감각에 의하여 명나라와
후금사이에서 절묘한 중립정책을 취함으로써 광해군 대에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폐모살제의 명분을 내건 서인들에 의하여 광해군은
폐위를 당하게 되며 그 이후의 역사는 발전의 모습보다는
후퇴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광해군 대에 몇가지 처신을 잘못한 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았다는
사실인데 단순히 선조의 손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인들에
의하여 택군이 된 능양군이 인조가 된 이후 4년후에 정묘호란
으로 조선이 큰 혼란에 빠지더니 그로부터 9년후에 사실상
국권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는 병자호란이 발생
하였던 것입니다.
어느 덧 병자호란이 일어난지 380여년이 되는 시점에서 당시
국왕이 삼전도로 나아가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의 왕재로서 결코 손색이 없었던 소현세자가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는 불행을 겪었으며, 더불어 아무런 죄도
없는 조선의 백성 수십만도 함께 끌려가니 당시의 그 처절하고
참담한 역사를 생각하면 무거운 마음을 어찌 형연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결국 조선의 영원한 왕세자
소현세자가 귀국한지 두달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며,더불어
소현세자의 세아들도 인조에 의하여 제주도로 귀양을 가서 결국
장남과 차남은 제주도에서 사망하고 삼남만은 살아서 가문의
후사를 잇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이 선조 대부터 시작하여 인조 대까지의 역사를 뒤돌아
보았는데 광해군이 재위시에 아쉬운 점도 다소 없지는 않으나
만약에 광해군이 계속 재위하였다면 적어도 병자호란같은 비극적인
전쟁을 겪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2015년 7월 11일(금) 작가.칼럼니스트 문 암 박 관 우 올 림.
첫댓글 가슴 아픈 얘기군요
그래도 울 윤문과는 5번 사돈을 맺었지요 ! ~
새로운 정보 알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문암 교하 문중에 정정공파 (휘자번)에선
세번을 소정공파 에서도 왕족과 사돈을 맺었지요 ! ~
@등촌동 파평윤문에서 특히 기억나는 왕비는
정희왕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