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벽에서의 옛일을 회고하며
소동파
장강(長江)은 동쪽으로 흘러가고
물결은 다 씻어 버렸네. 천고의 풍류 인물들을
사람들은 말하네
옛 보루의 서쪽은 삼국시대 주유(周瑜)의 적벽이라고
뽀족한 바위는 구름을 무너뜨리고
놀란 큰 물결은 강 언덕을 치며
천 무더기의 눈 더미 같은 물보라를 휘감아 올리네
그림 같은 이 강산에
한때 호걸이 얼마나 많았던가
아득히 주유의 그때 일을 생각하니
소교(小喬)가 갓 시집왔었고
웅장한 자태에 영웅의 모습이 넘쳤겠지
깃 부채를 들도 비단 두건을 쓰고
담소를 나누는 사이
적의 돛대와 노는 불에 타 재 되어 사라지고 말았겠지
고향으로 내 마음 달리나니
다정한 그대는 응당 나를 보고 웃을 테지
흰 머리카락이 일찍도 났다고
인생은 꿈과 같은 것
한 잔의 술을 강물 속의 달에게 부어 주네.
[작가소개]
소동파[ 蘇東坡 ]
<요약> 중국 북송 때의 제1의 시인.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 고 해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켰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출생-사망 : 1037.1.8 ~ 1101.8.24
자 : 자첨(子瞻)
호 : 동파거사(東坡居士)
본명 : 소식(蘇軾)
별칭 : 파공(坡公) ·파선(坡仙)
국적 : 중국 북송
활동분야 : 문학, 정치, 행정
출생지 : 중국 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주요작품 : 《적벽부(赤壁賦)》
중국을 대표하는 탁월한 문장가 중 한사람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며 북송시대 중국 메이산[眉山:지금의 四川省 眉山市]에서 출생(景祐 3년 12월 19일)하였다. 자 자첨(子瞻), 호 동파거사(東坡居士), 애칭(愛稱) 파공(坡公) ·파선(坡仙) 등으로 불린다. 이름은 식(軾)이며 동생으로 소철(蘇轍)이 있었고 동생과 비교하여 대소(大蘇)라고도 불리었다. 부친 소순(蘇洵)은 구양수(歐陽脩), 왕안석(王安石) 등과 교우하며 송나라에서 이름난 문장가였다. 그의 가문은 부유한 지식인 집안으로 명망이 높았다. 소동파는 송나라 최고의 시인이며, 문장에 있어서도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22세 때 송나라의 도읍인 변경(汴京:현재 카이펑,開封)에서 열린 과거시험에서 진사에 급제하였고, 과거시험의 위원장이었던 구양수(歐陽修)에게 인정을 받아 그의 후원으로 문단에 등장하였다. 모친상으로 고향 미산(眉山)에서 3년 시묘살이를 마친 후 변경으로 돌아와 제과(制科)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했으며 동생 소철은 차석으로 급제했다. 봉상부(鳳翔府: 현재 산시성) 참판(簽判)으로 부임하여 첫 관직을 수행했다. 봉상부에서 임기를 마치고 변경으로 돌아와 궁정의 사무를 담당했는데 이때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던 왕안석(王安石)과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대립적 관계가 되었다. 당시 정치적 실세였던 왕안석의 개혁정책인 ‘신법(新法)’이 실시되자 ‘구법당(舊法黨)’에 속했던 소동파는 지방관으로 전출되어 항주(杭州)로 갔다(1071년). 통판(通判)이라는 한직(閑職)을 맡았지만 그 반면 소동파의 문학적 재능을 발현하기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항주로 좌천된 이후 4년 동안 많은 시(詩)를 남겼다. 특히 항주의 서호(西湖)는 소동파의 문학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좋은 장소가 되었다. 1074년에는 밀주(密州)의 태수로 부임하였고 1077년에는 서주(徐州)의 태수로 부임하였다. 소동파는 천성이 자유인이었으며 일반 백성들을 살피고 가까이 했다. 그리고 기질적으로도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신법을 싫어하였으며 “독서가 만 권에 달하여도 율(律)은 읽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일이 재앙을 불러 사상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켜 북송의 수도 변경으로 호송되어 어사대(御史臺)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이 때 나이 44세였다. 심한 취조를 받은 뒤에 후베이성[湖北省]의 황주(黃州)로 유배되었으나, 50세가 되던 해 철종(哲宗)이 즉위함과 동시에 구법당이 득세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 등의 대관(大官)을 역임하였다.
황태후(皇太后)의 죽음을 계기로 신법당이 다시 세력을 잡자 그는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섬[海南島]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7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던 중, 휘종(徽宗)의 즉위와 함께 귀양살이가 풀렸으나 돌아오던 도중 장쑤성[江蘇省]의 상주(常州)에서 사망하였다.(建中靖國 원년 7월 28일) 그는 폭넓은 재능을 발휘하여 시문서화(詩文書畵) 등에 훌륭한 작품을 남겼으며 좌담(座談)을 잘하고 유머를 좋아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으므로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당시(唐詩)가 서정적인 데 대하여 그의 시는 철학적 요소가 짙었고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하였다.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참조항목
[네이버 지식백과] 소동파 [蘇東坡]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